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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년 논평 지금/여기 ‘위안부’ 영화의 안과 밖 2부 - 다른 상상은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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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상상은 가능하다 이 글은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의 요청에 따라 『페미니즘 리부트』(손희정, 나무연필, 2017)에 수록되어 있는 「기억의 젠더 정치와 대중성의 재구성: 대중 ‘위안부’ 서사를 중심으로」를 요약하고 수정한 글입니다. ‘위안부’에 대한 다른 재현: <눈길>의 경우 <눈길>은 그 ‘반복과 차이’ 때문에 <귀향>과 자주 비교되었다. 두 작품 다 위안소에 끌려가는 소녀들에서 이야기가 시작되어 그 소녀들 사이의 우정, 죽음과 생존, 그리고 노년에 다다라 벌어지는 일들을 담는다. 이렇게 비슷한 서사구조를 공유하는 이유는, 두 작품 다 증언을 바탕으로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같은 증언 안에서도 두 작품은 서로 다른 재현을 선보이고 있다. <눈길>은 <귀향>과 달리 발가벗겨진 채로 두들겨 맞는 여성의 몸을 날것으로 우리 앞에 던져놓지 않는다. 대신 그 자리를 채우는 것은 그렇게 한낱 ‘몸뚱이’로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여성들의 하루하루와 그 일상을 버텨내는 마음이다. 예컨대 <귀향>이 강간당하는 ‘처녀’의 비명을 담아낼 때, <눈길>은 매일 반복해야 했던 콘돔 세탁의 비루함과 그 안에서 묻어나오는 한탄을 보여준다. <눈길>에서 여성은 그저 ‘유린당한 몸’으로 이미지화되지 않는다. 주인공 스스로 자신을 ‘짓밟힌 짐승’으로 여길 때에도, 카메라는 그를 그렇게 대하지 않는 것이다. 폭력을 스펙터클로 만드는 것이 피해자의 고통을 묘사하는 유일한 방법은 아니다. 폭력을 볼거리로 만들지 않기 위해 우회로를 택하는 것이 피해자를 또다시 대상화하고 물신화하지 않을 방법이기도 하다. 미카엘 하네케(Michael Haneke) 감독의 말처럼, 폭력의 재현은 폭력 그 자체에 대한 것이 아니라 고통에 대한 것이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눈길>이 ‘여성들의 읽고 쓰기’에 공을 들이는 것은 매우 인상적이다. 영애(김새론)는 종분(김향기)에게 글을 가르치면서 삶의 이유를 찾고, 종분에게는 글을 배운다는 것이 삶의 동기가 된다. 한 평론가는 이것이 가르칠 수 있는 자와 배워야 하는 자라는 계급적 위계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비판했으나, ‘가르친다’와 ‘배운다’라는 행위가 결과적으로 가지는 의미에 주목한다면 그렇게 단순하게만 해석될 수 없다. 영애에게 ‘가르친다’는 것은 자신의 우월함을 증명하는 방식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 이유를 되찾는 것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것을 잘 아는 종분이 영애에게 ‘글을 가르칠 기회’를 준다. 읽는 법을 알려달라며 책을 먼저 내미는 것은 종분이다. 그리하여 “너 착각하지 마라, 너나 나나 똑같애!”라는 종분의 외침은 성노예화가 어떻게 피식민자의 계급과 무관하게 진행되었는가를 폭로한다. 이후에 종분에게 있어 글을 안다는 것은 또 다른 의미로 쓰이게 된다. 글을 알게 됨으로써 그는 비로소 이 국가 시스템에 시민으로서 다시 기입된다. 영애 덕분에 『소공녀』를 읽게 된 그는 귀향하여 ‘강영애’라는 이름으로 국가 시스템에 등록하고, 국가보훈처가 보낸 고지를 읽으며, 첫사랑에게 편지를 쓴다. 종분에게 “쓴다”는 것은 더 이상 이 사회에 ‘없는 자’가 아니라 ‘등록된 자’가 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동시에 자신의 이야기를 말할 수 있는 자, 기록할 수 있는 자가 된다. 그렇게 ‘들리는 자’, ‘읽힐 수 있는 자’가 되는 것이다. 증언의 힘: “아이 캔 스피크” 우리는 왜 “비명과 울부짖음”만이 ‘위안부’ 피해자의 고통을 전달할 수 있다고 상상하는 것일까? 결국 ‘위안부’ 피해자 여성이 역사의 주체로서 자신의 피해를 증언하고 기록할 수 있었던 것은 그것이 어떤 형태였든 간에 자신의 언어로 말을 했기 때문이 아닌가. <귀향>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국가의 완전한 부재’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시스템의 완전한 부재’다. 여기서 ‘부재’란 영화가 그것을 재현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그렇게 사라진 일본과 조선/남한은 ‘사악한 일본인’과 ‘무능한 조선/남한 남자’라는 정형으로 개인화된다. 오빠는 동생을 구하지 못하고, 아버지는 딸을 지키지 못한다. 그런 무능은 현재까지 계속된다. 그래서 여자들은 미친년이 되거나 불귀의 객이 되고, 접신을 통해서야 비로소 말할 수 있는 영매가 된다. 이는 가족 로망스 안에서만 정치가 상상되고 재현되고 설명되는 가부장제 사회의 인식론을 반영하면서 재생산된다. 물론 국가의 부재야말로 이 사회의 현실을 그대로 보여준다. 일본 정부는 물론이고 한국 정부도 ‘위안부’ 문제에 대해 책임감을 가지고 대처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탓에 영화가 ‘위안부’ 문제의 해결을 굿이라는 문화적 형식에 기대는 것이 설득력을 가지고 대중을 매혹시킨다. 이때 정민(강하나)의 혼을 ‘귀향’할 수 있도록 이끄는 영매 은경은 ‘위안부’ 여성들이 겪었던 그 성/폭력의 역사가 일본 제국주의의 폭력에 머물지 않으며 가부장제의 보편적인 폭력으로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음을 폭로한다. 은경이 영매가 되는 과정에 대한 묘사는 그래서 중요했을 것이다. 은경은 성폭행을 당하고 그 가해자가 아버지를 살해하는 것까지 목격하면서 우리는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자, 이성의 언어를 넘어서는 자, 그 제도의 틈새에 존재하는 자, 영매가 된다. 과연 생존자에게 세상을 떠난 동무와 그로 상징되는 고통의 기억은 영매를 통해서만 불러올 수 있는 타자였을까. “몸은 돌아왔지만 마음만은 그곳에 있었다”는 영옥(손숙)의 말은 생존자들이 삶에서 언제나 죽은 자들의 혼과 함께였다는 것에 대한 고백이다. 그러니 도대체 왜 영매여야 하는가? 다시 <눈길>을 보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상을 살아가는 생존자 ‘할머니 종분’(김영옥)은 돌아오지 못한 소녀 영애의 영혼과 일상적으로 만나고 대화한다. 종분은 귀향 후 영애의 이름으로 살아왔다. 이는 종분을 ‘국가 시스템에 등록된 자’로 그려내는 전략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종분에게 그 과거가 '귀신의 것’이 아니라 ‘사람의 것’으로 계속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런 의미에서 오랜 침묵을 깨고 이 사회에 ‘위안부’ 피해자의 목소리를 들리게 한 것이 ‘진혼’이 아니었음을 기억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것은 ‘살아가겠다’고 선언한 할머니들의 용기와 결기였다. 그리고 그 옆을 지켜온 살아 있는 운동들이었다. <귀향>에도 가슴을 두드리는 장면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나이 든 영옥이 ‘위안부’ 피해 신고를 하기 위해 동사무소를 찾았던 장면이다. 신고할까 말까 주저하던 영옥은 “미치지 않고서야 누가 신고를 하겠느냐”는 동사무소 직원의 말에 되돌아가 외친다. “내가 그 미친년이다!” 이는 제도에 ‘미친년’의 목소리를 기입함으로써 제도의 성격 자체를 다시 쓰는 순간에 대한 묘사다. ‘위안부’ 피해자의 ‘소녀 시절’의 재현을 과감히(!) 삭제하고 말하는 자로서 “할머니”의 모습으로 점프한 <아이 캔 스피크>가 등장하는 지점이 바로 여기다. <아이 캔 스피크>는 <귀향>에서 할머니가 “그 미친년임”을 선언하는 순간, 그리고 <눈길>에서 상상하고 재현했던 ‘말하고 쓰고 기록하는 행위’에 주어졌던 의미를 살려낸 작품으로 ‘위안부’ 재현의 또 다른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영화는 “민원 왕” 옥분 할머니(나문희)와 원칙주의자 9급 공무원 민재(이제훈)의 우정을 다룬 코미디를 표면적으로 내세웠지만, 영화가 실제로 집중하고 있는 것은 미국 연방회의 일본군‘위안부’ 사죄 결의안이 통과되었던 2007년 미 하원 의회 공개 청문회였다. 민원 왕 옥분은 이 청문회에서 공개 증언하기 위해 영어를 배워야 했고, 민재를 자신의 영어 선생으로 찍으면서 사건과 사고가 펼쳐진다. ‘위안부’ 피해자의 말하는 행위 그 자체가 영화를 추동하는 모티브이자 에너지이며 사건이고 주제인 셈이다. 영화는 한국 영화사상 가장 제목을 잘 지은 작품으로 꼽혀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영화 제목인 <아이 캔 스피크> 안에 줄거리뿐만 아니라 주제가 정확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허스토리언’의 탄생과 남겨진 과제 1992년부터 1998년까지, 6년에 걸쳐 진행된 관부재판 과정을 그리고 있는 <허스토리> 역시 제목을 통해 영화의 주제를 선명하게 드러내고자 했다. 이 작품의 타이틀 크레딧은 <히스토리(History)>로 시작된다. 이어서 영화는 ‘그의(His)’를 지우고 그 자리에 ‘그녀의(Her)’를 다시 써넣으면서 남성 중심의 역사 서술을 바로잡아 여성 중심으로 재기술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낸다. 여성들의 삶 속에서 쌓인 이야기가 어떻게 ‘역사’가 되는지 보여주고 싶었던 셈이다. 타이틀 크레딧에서 선언하고 있는 것처럼, 영화는 다른 어떤 ‘위안부’ 영화보다 여성의 관점에서, 그리고 페미니즘적 서사-이미지 구성을 통해 이 주제에 접근하려고 노력했다. 강간을 볼거리로 만들어버리는 재현을 피하고, 여성들의 주체성에 집중하며, 여성들 간의 관계를 구축하는 데 관심을 기울였던 것이다. 영화가 많은 부분을 재판정에서의 증언 장면에 할애하고 있는 것도 이런 문제의식 안에서였을 터다. 민규동 감독의 여러 인터뷰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허스토리>는 지금까지 페미니스트 비평이 ‘위안부’ 재현에 대해 고민해 온 내용을 세심하게 참조하면서 영화의 서사와 이미지를 쌓아 올렸다. 이 작품은 일종의 ‘교본’과도 같은 작품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교본이 정답은 아니고, 언제나 ‘좋은 작품’인 것도 아니다. <허스토리>는 아쉽게도 (그 자체로 이미 한계를 노정하고 있었을) 페미니스트 비평이 그려놓은 서사-이미지 안에 그대로 머물러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의 질문이 수면 위로 떠오른다. “어째서 여전히 ‘위안부’ 피해자의 재현은 소녀-할머니의 이분법 속에 갇혀있는가.” 잠시 <눈길>로 다시 돌아가 보자면, 이 작품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한국 영화에서 보기 드문 성숙한 어른으로서의 종분이었다. 이런 평가에 대해 <눈길>의 유보라 작가는 이렇게 대답했다. “애초에 <눈길>을 기획할 때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생존해 돌아온 여성들이 30~40대가 되었을 때의 이야기였다. 그러나 상황이 여의치 않았고, 결국 소녀-할머니의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만약 처음부터 그냥 ‘할머니’ 캐릭터를 상상했다면, 나 역시 상처받거나 분노에 찬 캐릭터를 상상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분들이 살아온 삶에 대해 리서치하고 생각하고 상상해 보니, 종분과 같은 두터운 맥락을 가진 캐릭터를 만들게 되었다.” ‘상상력’의 문제란 이런 것일 수 있다. 즉각적으로 손쉽게 주어진 익숙한 이야기가 아닌, 오랜 고민과 성찰 안에서 등장하는 ‘발견되지 않았던 이야기’를 통해 ‘새로운 이야기’를 쓰는 것. 그런 ‘새로운 이야기’야말로 역사를 구성하는 또 다른 관점을 제공해 줄 터다. 그렇다면 문득 궁금해진다. ‘위안부’ 피해자의 30~40대를 재현하는 것이 “여의치 않았던 상황”이란 과연 무엇일까? 바로 그곳에 한국사회의 한계가 놓여있는 것은 아닐까. <허스토리>는 영화와 여성 관객이 만나는 자리에서 매우 흥미로워졌다. 2015년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한국 영화의 남성 중심성에 지친 청년 여성 관객들은 새로운 영화를 찾아 헤맸다. 2018년에 <미쓰백> 팬덤 ‘쓰백러’와 <허스토리>의 팬덤 ‘허스토리언’의 등장은 이런 흐름 위에 있었다. 허스토리언은 단체관람과 티켓 구매 등을 통해 관객 운동을 펼쳤고, 이는 배우 김희애의 팬덤 형성으로도 이어졌다. 그들은 가부장제의 폭력을 예민하게 인식하면서 ‘파워하우스 여성 영웅’인 문정숙(김희애)에 열광했다. 이렇게 새로운 관객이 등장한 것이 새로운 상상력의 가능성으로 이어질 수 있을까? 그 관객이 만들어내는 새로운 장 안에서 대중 ‘위안부’ 서사는 무엇을 갱신해야 하고 갱신할 수 있을까. 어쩌면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영원히 완성되지 않을, 언제나 형성 중인 것일지도 모르겠다. 상상력의 여정에는 종착지가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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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년 인터뷰 기억해야 할 첫 발걸음, 1세대 연구자를 만나다 - (2) 송연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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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연옥 (문화센터 아리랑 관장 / 아오야마가쿠인대학교 명예교수) 일본 아오야마가쿠인대 명예교수. 재일조선인으로서 일본에서 식민지 역사와 여성사의 기틀을 마련한 연구자로서 일본군‘위안부’문제의 진상을 규명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주요 저서로 『군대와 성폭력』, 『동아시아 일본군 위안부 연구(공저)』, 『한국 여성사 연구 70년(공저)』, 『식민주의, 전쟁, 군 ‘위안부’(공저)』, 『동아시아의 전쟁과 사회(공저)』 등이 있다. Q. 송연옥 선생님에 대해 잘 모르는 웹진 결 독자분들을 위해 간단한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일본 오사카에서 1947년에 태어난 재일조선인 2세입니다. 국적은 한국이지만 교육은 일본 교육기관에서만 받았습니다. 그래서 제국의 언어인 일본어가 저 자신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모어가 되겠지요. 식민주의가 신체화된 일상을 살아야 하는 존재입니다. 대학교를 졸업했을 시절, 민족 차별 때문에 재일조선인은 사회적으로 배제되어 있었어요. 그런 역사적인 배경을 알고자 한국에 민족사를 배우러 갔는데, 당시 조국의 정치적인 계절은 겨울이었습니다. 서울에서 대학원 석사과정을 다 마치지 못한 채 일본으로 돌아왔고, 다시 한국에 가게 된 건 1992년부터입니다. 역사 연구를 단념한 시기도 있었으나, 50세 때 도쿄에 있는 아오야마가쿠인대학교 교수로 채용되어 그 후에는 제대로 연구할 수 있게 되었어요. Q. 처음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어떻게 알게 되셨나요? 대학교를 졸업한 몇 년 후에 센다 카코(千田夏光)의 『종군위안부(従軍慰安婦)』(双葉社, 1973)를 읽어서 알게 되었습니다. 읽고서 큰 충격을 받았으나, 센다의 책에는 여성주의적인 시각은 약했어요. 그래서 언젠가 ‘위안부’ 피해자의 한을 푸는 데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막연한 바람을 가지게 되었어요. 그러나 그 당시는 피해를 당한 당사자가 한국에 살아 계시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고 대부분이 전쟁터에서 죽거나 버려졌을 걸로 생각했었습니다. Q. 선생님께서 그동안 진행하셨던 일본군‘위안부’와 관련한 연구들을 소개해주세요. 『개벽』77호(1948년 2,3월호)에 최정석이란 사람이 쓴 ‘해방되는 창기 5천명’이란 글이 있는데 그걸 보고 일제시대에 대한 인식을 달리했습니다. 글의 앞부분에 ‘일제가 여성에 관해서 이 땅에 남긴 해독이 두 가지 있으니 하나는 공창제도(公娼制度)고 다른 하나는 그들의 봉건적인 노예여성관을 유지, 연장시킨 것이다’란 구절이 있었습니다. 물론 최정석은 ‘위안부’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으나 그것을 포함해서 공창제를 ‘日帝(일제)의 搾取(착취)와 이 땅의 社会悪(사회악)을 가장 醜悪(추악)한 가운데 가장 端的(단적)으로 나타내는 実証(실증)이었다’고 주장했습니다. 일본군‘위안부’제도가 1932년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이 정설이지만 일제가 조선 여성의 성적인 신체를 유린·착취하고, 가난한 여성들을 인신매매한 것은 훨씬 이전부터 진행된 거잖아요. 개항 이후의 일제 침략 과정을 보고, 최정석의 글을 해독한 후 일제가 식민지지배 정책으로 이용한 공창제를 연구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연구를 하다 보니 식민지 조선에 적용된 공창제는 일본에서의 공창제와 같은 명칭이 쓰이지만, 그 내용은 일본 공창제보다 업자들에게 더 유리하게, 여성들에게는 더 불리하게 만들어졌더라고요. 이러한 식민지 공창제가 ‘위안부’제도의 전제가 되었다는 연구를 해왔습니다. Q. 일본에 거주하는 재일조선인으로서 일본군‘위안부’를 연구하기가 그리 쉽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일본에서는 ‘위안부’문제를 연구과제로 하면 일본인이라도 대학 교수로 채용되기가 어렵다고 해요. 반일 사상의 소유자란 낙인이 찍히는 거지요. 제가 1993년에 조선사연구회 대회에서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국가적 관리매춘’이란 제목으로 발표를 한 적이 있어요. 연구한 결과, 중일전쟁 시기에 조선인의 성매매업 종사율이 높아진 결론을 얻었어요. 그것은 조선인이 전쟁 체제에 휘말려 들어 간 것을 증명한 건데, 제 발표를 들은 한국 남자 유학생이 저에게 막 비난하는 말을 퍼부었어요. 제가 하고자 하는 취지를 단순하게 오해한 거였지만, 그런 식의 민족주의에 회의를 느낀 것도 사실입니다. 해방 후에도 일본에 사는 재일조선인은 민족 차별 속에서 3D 노동에 종사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보면 그런 반응은 이해하기가 어렵네요. Q. 연구하시면서 만났던 ‘위안부’피해자 중 특히 기억에 남는 분이 계신가요? 1992년 8월 말, 한중국교가 체결되기 직전에 중국 목단강까지 가서 김순옥 할머니(1922~2018)를 만났어요. 김순옥 할머니의 존재는 우연히 알게 됐어요. ‘위안부’ 문제에 관심이 있는 시민단체 사람들이 조사차 러시아 국경에서 가까운 둥닝(東寧)까지 간 적이 있었어요. 예전에 일본 병사였던 사람이 안내를 해줬죠. 조사 마지막 날에 마을 노인이 ‘카이코’라는 여자가 옛날에 ‘위안부’였다고 가르쳐줬어요. 그런데 그때만 해도 중국 여행이 어려울 때라 귀국 날짜를 연기할 수가 없어서 당시 일행은 숙제를 남긴 채 그냥 돌아왔어요. 이후, 저와 김영희씨가 연변대학 임희준 교수님의 도움을 받고 둥닝까지 조사하러 갔는데, 옌지(吉林)에서 둥닝까지 가기도 쉽지 않았어요. 10시간이나 택시를 달려서 저녁에 간신히 도착했죠. 그런데 할머니는 집에 안 계시고 목단강에 있는 딸 집에 갔다는 거예요. 할 수 없이 그날은 둥닝에서 숙박하고 다음 날 아침 일찍 목단강으로 출발했어요. 중국이 얼마나 넓은지 실감했어요. 도로가 포장되어 있지 않아서 장거리 이동만으로도 너무 지쳤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김순옥 할머니를 만났을 때의 감격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어요. 할머니한테도 저희들이 외부에서 처음으로 찾아온 동포였는지라 정말 기뻐하시고 오랜만에 만난 친척처럼 대해주셨어요. 딸한테도 얘기 못 했던 아프고 쓰라린 경험을 한꺼번에 쏟아내듯이 얘기 해주셨던 추억은 아직도 생생합니다. 만나 뵈니까 ‘카이코’의 수수께끼도 풀렸어요. ‘카이코’는 카요코란 일본 이름으로 위안소에서 붙여진 것이었는데, 마을 사람들이 할머니를 그렇게 불렀답니다. 동네 사람들이 ‘카이코’라고 부를 때마다 할머니 마음이 어땠을지 생각하니 착잡하기만 합니다. Q. 일본에 거주하는 재일조선인의 시각으로 바라보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분단국가인 대한민국 연구자의 시각과는 조금 다른 부분이 있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일본 교육기관에서만 배운 재일조선인으로 다른 점이 있다면 그것은 일본을 평가하는 눈이 냉철하다는 겁니다. 일본 역사학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인데 어떤 문제점이 있는지 일찍 지적해왔습니다. 일본에선 1931년부터 1945년까지 15년간의 전쟁에 대해서는 큰 관심을 기울이지만, 식민지 지배에 대해서는 그렇지 못합니다. 제가 15년 전쟁이 아니라 50년 전쟁이라고 주장한 것도 그런 맥락에서입니다. 그리고 분단된 현실에서 어쩔 수 없으나 북한을 바라보는 시선이 과소평가에서 과대평가까지 눈높이가 안정되지 못하고 있으며 ‘위안부’ 연구에서도 그것을 느낍니다. Q. 일본군‘위안부’를 둘러싼 여러 문제 중에서도 선생님께서 주목 혹은 집중하고자 하셨던 부분이 있다면 어떤 것인가요? 제가 상해 위안소에 관한 연구를 한 결과 얻은 결론은 상해와 같이 전쟁터였다가 점령지가 된 지역은 위안소를 중심으로 다양한 성매매업이 확대·번창했다는 거예요. 성매매 요리점은 위안소를 보완하고 또 국가가 개설한 위안소가 있으므로 다른 성매매업도 대의명분을 얻어 서로가 번창하는 그런 전쟁 사회상을 더 밝혀야 해요. 공창이냐 아니냐 하는 논쟁은 시기와 지역에 따른 실태를 파악하지 못하는 데서 나온다고 봅니다. 또 지금 일본에서 ‘위안부’제도와 구별해서 공창제를 정의하는데 시민법, 평시, 폐창의 규정을 그 근거로 들지만, 과연 일제강점기 조선은 시민법이 적용된 평시였을까요? 그런 공창제 정의는 식민주의와 전쟁 사회사에 대한 인식이 결여되어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Q. 연구자 혹은 개인으로서 선생님의 인생에서 ‘위안부’ 연구는 무엇을 의미하나요? 일본군‘위안부’ 연구를 놓지 않고 끊임없이 할 수 있게 만든 원동력은 무엇인가요? 저는 재일조선인 여성으로서 살아오는 과정에서 성차별, 민족 차별, 계급차별을 복합적으로 경험했고 정신적인 상처도 깊이 입었습니다. 이런 복합적인 차별의 상징이 ‘위안부’문제라고 생각해요. 문제의 뿌리인 식민주의는 최근에 일본 사회에서 나타난 헤이트 스피치와도 상통합니다. 아직 해결되지 않고 저희를 일상적으로 괴롭히고 있으니 건전한 사회를 만들려는 희망으로 연구를 놓칠 수가 없습니다. Q.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다양한 학문적, 사회적 이슈 중에서도 (대한민국 내에서) 가장 민감한 최전선의 이슈 중 하나라는 생각이 듭니다. 앞으로 후학들은 일본군‘위안부’ 문제와 관련하여 어떤 방향으로 연구를 더 확장해가면 좋을까요? 연구하는 후학들을 위해서 해주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위안부’문제는 많은 증언과 연구, 진상규명을 위한 노력이 있었음에도 아직 낡은 담론과 틀 속에 갇혀있는 부분도 있는 것 같습니다. 예를 들면 공창제와 ‘위안부’ 제도를 연결하여 보는 것을 꺼리는 사람이 많지만, 공창제를 제대로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아요. 공창제와 ‘위안부’ 제도를 시기와 장소에 따라 구체적인 실상을 밝힐 연구가 앞으로 많이 나와야 합니다. Q.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대다수의 대한민국 국민이 인식하고 있는 보편적 이슈입니다. 하지만 조금만 들여다보면 일본군‘위안부’에 대한 대중의 인식이 감정적 층위에만 머무르고 있다는 인상을 받게 되는데요. 이러한 현상의 원인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 여쭙고 싶습니다. ‘위안부’ 문제에 한해서 말씀드린다면 민족적인 시각은 강해도 여성적, 계층적인 시각을 복합해서 보는 것은 아직도 약하다고 생각합니다. 국민 통합을 위한 해방 후에 만들어진 민족주의도 강하고요. 역사학계에선 친일이냐 항일이냐 하는 2항 대립적인 단계를 넘어선 연구가 많이 진척되었으나 ‘위안부’ 문제를 바라보는 대중적인 시선에 관해서는 그런 성과가 잘 반영되어있지 않은 것 같아요. 그래서 일제강점기 사회사 연구가 더 다양하게 진전되어야 하고 일본의 침략전쟁 하에서 국내외에서 생활한 동포의 실상이 더 많이 밝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한국과 일본은 아직까지 성매매에 대한 표리일체로 된 호기심과 멸시감, 혐오감이 강한 사회입니다. 공창제 운운할 때 나오는 거부감도 여기서 나옵니다. 그래서 여성주의적인 가치관을 더 일상화해야 하고 성적인 권리가 존중되는 사회여야 합니다. Q. 위와 같은 상황에서 일본군‘위안부’문제 연구소는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 조언을 부탁드립니다. 역사학을 전공하는 저로서는 ‘위안부’ 문제를 식민주의와 침략전쟁이 낳은 문제이며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는 문제로 봐야 한다고 조언을 하고 싶어요. 그리고 ‘위안부’ 제도를 낳은 배경, 즉 식민지 지배하 조선의 사회와 경제 상황을 지방마다 구체적으로 세밀하게 파고 들어가는 연구가 나와야 합니다. ‘위안부’ 문제만 보면 정치적인 담론의 영향을 받아서 오히려 실증적인 연구가 소외될 우려도 있습니다. ‘위안부’ 문제를 구조적으로 중첩적으로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우선 중국에 있는 자료도 계속해서 발굴·수집해서 그 성과를 널리 공개해 젊은 연구자들을 양성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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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년 인터뷰 기억해야 할 첫 발걸음, 1세대 연구자를 만나다 - (3) 강정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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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정숙 성균관대 동아시아역사연구소 연구원으로 재직중이며 한국근대 여성사를 전공하였다. 정신대연구소, 강제동원진상규명위원회 등에서 활동하면서 일본군‘위안부’ 문제의 진상 규명과 더불어 일본군‘위안부’피해자들의 증언 녹취 작업을 진행하는 등 초창기 ‘위안부’ 연구에 크게 기여했다. 주요 논저로 『인도네시아 동원 여성명부에 관한 진상 조사』, 「제2차 세계대전기 인도네시아 팔렘방으로 동원된 조선인의 귀환과정에 관한 연구」 「일본군성노예제문제와 관련한 남북교류와 북측의 대응」, 「일본군 위안소 업자의 지위와 역할에 관한 연구」 등이 있다. Q. 강정숙 선생님을 잘 모르시는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웹진 결 독자분들에게 간단한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처음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어떻게 접하게 되었는지도 말씀해주세요. 저는 일제강점기 민족해방운동사(농민운동)로 공부를 시작했어요. 그러다가 여성사를 하면서 이 문제가 중요하다고 느껴 1992년부터 한국정신대연구회에 들어가 조사연구하기 시작하여, 2000년 일본군성노예전범여성국제법정 한국위원회, 일제강점하강제동원진상규명위원회에서 활동하였고 2010년에는 <일본군'위안부'제의 식민성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이후에도 이 주제를 비롯하여 여성사와 관련된 연구활동 등을 해왔습니다. 제가 처음 ‘위안부’ 문제를 알게 된 건 고등학교 때 읽은 소설책을 통해서였어요. 집에 ‘위안부’를 소재로 쓴 책이 한 권 있었는데, 제목도 기억이 안 나요. 일본 책이 번역되어 들어왔던 것 같아요. 여성들을 굉장히 성적 대상으로 삼아서 쓴 책이었어요. 읽고 굉장히 불쾌해서 태워버렸어요. 아버지 책인데 그리 중요한 책은 아닌 것 같아서. ‘위안부’ 문제를 본격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한 것은 90년대부터예요. 90년대에 『한국여성사 근대편』을 쓸 때 ‘위안부’ 부분을 제가 쓰게 되면서 이 문제가 민족, 계급, 젠더 등 다양한 문제들이 농축되어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때가 마침 ‘위안부’ 운동이 본격적으로 진행되던 시기였어요. 1992년 3월에 제가 한국정신대연구회(이후 한국정신대연구소)에 가입했거든요. 원래 한국여성연구회에서 활동하고 있었는데, 거기에 있던 연구자 한 분이 한국정신대연구회에 역사연구자가 부족하니 저에게 같이 하면 좋겠다고 말씀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잠시 파견 나간 기분으로 정신대연구회로 갔죠. 그런데 그게 잠시가 안 되더군요.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피해자 할머니들과 만나고 ‘위안부’ 문제를 어떻게 연구해야 할지에 대해서 고민했어요. Q. ‘위안부’ 문제 연구 중 선생님께서 가장 주목하고자 했던 부분은 어떤 것이었나요? 일본이 ‘위안부’ 문제에 관해 부정하는 것이 많았기 때문에 일본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근거 자료를 찾으려고 노력했어요. 그래서 ‘군속의 신상정보를 기록한 인사기록이다. 이 명부엔 강제 동원된 조선인들의 이름도 함께 수록되어 있다." popuptitle="유수명부" data-url="/taxonomy/term/420">유수명부’와 같이 할머니 이름이 적혀 있는 수용소 명부, 귀환자 명부 같은 것을 저의 연구 주제로 삼았죠. 이러한 명부들은 당시 현장의 미묘한 부분들을 보여주는 아주 귀중한 자료죠. 그렇지만 제가 발굴했던 명단들은 엄밀히 말하면 ‘위안부’ 명단이 아니기 때문에 이 명단에 있는 할머니들이 진짜 ‘위안부’였는지 아닌지는 제가 증명을 해야 했어요. 그래서 직접 할머니를 찾아가 증언을 듣거나, 그 외의 군인 군속 등 다른 분들의 이야기를 통해 교차 조사를 했죠. 그래서 결국 사실이라고 확인되었을 때 연구자로서 보람을 느끼곤 했습니다. 그리고 공창제와 ‘위안부’ 제도의 관계를 드러내는 것에도 관심을 가졌어요. ‘강제적’인 동원이라는 말도 고민해봐야 해요. 만약 ‘강제’가 ‘물리적인 강제’만을 뜻하는 것이라면, 저는 ‘강제’라는 말을 쓰고 싶지 않아요. 물리적인 강제 동원도 있었지만, 물리적인 강제 없이 구조적으로 강제하는 것도 있단 말이에요. 구조적인 측면에서 ‘위안부’ 제도는 공창제와 다름이 없어요. 공창제가 가지고 있는 구조적 강제성과 폭력성이 있잖아요. 강제라는 의미를 폭넓게 이해해야 해요. 이 부분은 지금도 여전히 과제라고 봐요. 지금 우리 사회는 ‘위안부’ 제도와 공창제를 구분하는 데 관심이 있지, 서로 연동되어 있다는 이야기를 하면 잘 들으려고 하지 않아요. 이걸 대중에게 설명하려는 노력이 많이 필요한데 자꾸 뒤로 미뤄요. 저의 바람이자 과제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바라보는 사람들이 일본 욕만 하는 것을 넘어, 우리 사회가 가져야 할 문제의식은 무엇이고, 어떤 도덕적 기준을 가져야 하는지 논의를 확장하는 거예요. Q. 선생님께서 처음 만난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는 누구인가요? 당시 구술했던 정황들이 궁금한데요. 그때가 할머니들께서 당신들의 존재를 이제 막 드러내는 시기였기 때문에 취재 형식의 짧은 인터뷰를 참 많이 하셨어요. 그러다 증언집을 만들자는 이야기가 나왔죠. 당시 저는 강덕경 할머니와 박옥련 할머니를 만났어요. 증언집 1집에 이야기들이 들어있죠. 당시 제 나이가 35, 6세 정도 됐을 때예요. 할머니 눈에는 당시의 제가 완전 새댁이었어요. 그러니까 할머니가 말을 가려서 하시더라고요. 자신의 이야기를 충분히 이해할 거라고 생각을 하지 않으신 거예요. 할머니들이 봤을 때 저는 딸뻘이고 세상의 쓰라린 맛을 모르는 사람이라 생각하신 거죠. 그리고 당시는 국민적으로 '위안부' 문제에 관한 관심이 높았던 시기잖아요. 관심이 너무 지나치면 사실 연구하기가 쉽지가 않은 부분이 있어요. 지금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지만, 사람들이 생각하는 '위안부'의 이미지가 있었어요. '처녀'여야 하고, 일본군에게 '강제로' 끌려가 물리적 폭력을 당해야 하고, 엄청난 학대를 당해야 하는 거죠. '위안부' 피해자를 생각하는 일반적인 이미지가 그렇잖아요? 할머니들은 그전까진 어디 가서 자기가 피해자라고 말하지도 못했던 약자였어요. 그러니까 자신의 피해 사실이 사람들이 생각하는 ‘위안부’ 피해자 이미지와 조금이라도 다르면, 자신을 피해자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봐 두려움을 갖고 있었겠죠. 그러면 할머니들이 말을 어떻게 하겠어요? 실제가 아니더라도 사람들이 원하는 이미지 틀에 맞춰요. 그게 제일 편하고 안전한 거예요. 그래서 연구자는 할머니의 증언을 가려들으면서 사실을 확인하는 것이 중요해요. Q. 말씀하신 것처럼 ‘위안부’ 연구 초창기에는 연구를 진행하시기에 어려웠던 점도 많았을 것 같아요. 혹시 관련한 에피소드가 있을까요. 1996년 무렵이었나. 일본 방송국 NHK에서 같이 조사를 하자고 의뢰가 왔어요. 필리핀 수용소 기록에서 발견된 피해자 중 한 분인 김소란 할머니를 같이 찾아보자고요. 그래서 필리핀 수용소 기록을 들고 일본에서 할머니를 찾기 시작했어요. 그때 저하고 여순주 선생님이랑 같이 조사를 했어요. 당시 할머니의 한국 출신지 면사무소 도움을 받아서 제적부를 찾았죠. 그때는 제적부를 개인이 볼 수가 있었어요. 지금은 못 보죠. 그런데 할머니가 미국에 계시더라고요. 미국에 계신 할머니의 연락처를 간신히 찾아내고 당시 LA에 있는 친구에게 부탁해서 결국 할머니를 찾긴 찾았어요. 그런데 빠뜨린 게 있었죠. 할머니의 입장은 어떨지 한 번도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자료의 사실을 확인한다는 생각만 있었던 거예요. 그런데 마지막에 ‘이게 할머니한테는 엄청난 충격이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죠. 그런데 정말 다행인 것은 할아버지가 이 할머니의 과거사를 다 아시고 결혼을 한 분이었어요. 그리고 할머니는 영주권 때문에 잠깐 미국에 가 계셨던 거고, 원래 생활은 한국에서 하고 계셨어요. 그래서 한국에서 할머니 이야기를 들을 수가 있었죠. 그렇지만 당시 할머니가 건강 상의 문제가 있었고, 이 문제에 대해서 굉장히 조심스러워 하셨기 때문에 저희한테 사진 한 장 안 남겨주셨어요. 김소란이라는 이름도 가명이에요. 김소란 할머니의 구술은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와 정신대연구회가 발간한 세번째 ´위안부´ 피해자 증언집. 증언집 1, 2권과는 다르게 사투리, 구어체 등 피해자들의 말을 고치지 않고 그대로 표기하여 피해자들의 정서와 감정을 생생하게 전달했다. 또한, 피해자들의 증언과 함께 강제로 동원되어 남양군도 파라오에서 군생활을 했던 홍종태 씨가 경험하고 목격한 위안소 및 ´위안부´에 대한 증언도 담았다." popuptitle="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군위안부들 3" data-url="/taxonomy/term/393">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군위안부들 3에 있는데, 거기엔 포로수용소에서 찍힌 사진이 조그마하게 실려있어요. 연구자는 알고 싶은 게 있으면 어떻게 해서라도 알아내고 싶어 하잖아요. 할머니가 어떤 심정일지를 생각을 잘 못 해요. 하지만 무엇보다 할머니 삶이 일차적이고 중요한 거죠. 오키나와에서도 그런 일이 있을 뻔했는데, 오키나와에 있는 활동가 선생님이 “그게 할머니한테 뭐에 도움이 되는 건데?” 이렇게 질문을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아, 선배란 이런 거구나’ 그런 걸 느꼈었는데요, 그래서 스톱 했어요. 우리가 알고자 하는 것이 할머니의 생활과 미래 등을 고려했을 때 도움이 안 되는 것이 많더라고요. Q. 지금은 역사학계 안에서 구술사가 방법론으로서 인정받고 있지만, 당시만 해도 객관성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그리 중요하게 다루지 않았잖아요. 어떻게 보면 이런 시각을 바꾸게 한 것이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의 증언이었던 것 같아요. 구술 작업을 하시면서 특별히 신경을 쓰셨던 부분들이 있었을까요? 할머니는 시간과 공간의 구분이 정확하지 않죠. 오래된 기억인데다가 트라우마도 있으니까요. 그런 부분을 우리가 이해해야 해요. 그래서 할머니 구술 중의 특정 내용을 어떤 시간에, 어떤 공간에 위치해야 하는가를 계속 고민하고, 반복해서 질문해야 해요. 그러다 보면 그 전의 이야기와 엉키거나 그 전의 이야기가 번복되기도 하고 그래요. 이런 과정을 거치며 이야기를 해야 할머니가 어떤 맥락에서 이야기하는지 이해하고 넘어갈 수 있어요. 할머니가 거짓말을 했다는 게 아니라, 구술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혀야 한다는 거죠. 게다가 할머니들의 이야기가 담긴 증언집이 일본 우익에게 부정당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해 굉장히 조심스러운 접근이 있었어요. 그럼에도 구술사를 어떻게 드러낼 것인가에 대한 방법적인 부분은 굉장히 미숙했다고 봐야죠. 그때 우리 사회가 짜임새 있는 방법론을 전개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었기 때문에 결국은 할머니는 이렇다고 말씀하신다, 우리는 이걸 이렇게 본다, 이렇게 한 거죠. 대부분의 사회문제 해결이 운동이 선행되고 연구가 뒤를 따르는 경우가 많긴 하지만, 그렇다고 연구를 놔두고 운동만 앞서서 진행되면, 연구자가 해야 할 말을 못 하는 경우가 생겨요. 예를 들어 역사적 사건을 소재로 만든 영화나 연극 같은 것이 역사적 연구가 충분하지 않은 상태에서 만들어지면 굉장히 자극적인 것 위주로 연출하게 되고, 사실과 점점 멀어질 수가 있는 거죠. ‘위안부’ 연구도 비슷한 문제가 있습니다. Q. 아까 군인 군속 등 할머니 외에 다른 분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도 중요하다고 했는데, 좀 더 부연 설명해 주시겠어요?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보다 당시 현지에서 일했던 군인 군속들이 비교적 좌표가 잘 잡혀요. ‘위안부’ 피해자가 있었던 지역에 동원됐던 군인이나 군속, 노무자 이런 사람들이요. 우리가 그 당시에 산 사람이 아니어서 감이 안 잡히는 부분을 이 할아버지분들은 말을 해줄 수 있어요. 게다가 이 할아버지 중엔 위안소를 갔던 분도 계시거든요. 이 ‘위안부’가 누구다라고까지는 말을 못 하지만, 당시 그곳에 위안소가 몇 개가 있었고, 대략 몇 명이 있었는지는 말해줄 수 있는 거죠. 할머니들의 증언과 함께 그분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교차 조사가 되고 훨씬 더 풍부한 이야기가 나오는 거죠. 그래서 제가 군인 군속을 조사하고 연구도 했는데, 연구자금이 부족하다 보니까 중요한 기회와 많은 분을 놓쳤어요. 그때가 그분들도 돌아가시기 바로 직전의 시간이었는데, 시간을 많이 놓쳐버렸어요. 지금은 살아계신 분이 별로 많지 않을 거예요. Q.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연구하는 후학들을 위해서 해주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연구자들은 자기가 관심이 있는 쪽에서부터 시작을 하게 될 텐데요. 연구할 때 연구하려는 방향, 내용 이런 것들이 예상했던 것과 다르다면, 잠시 멈춰서 스스로 생각하는 연습을 좀 하는 게 좋다고 생각해요. 조금 이상하다 싶으면 자기식으로 찾아보고 연구하는 연습을 했으면 좋겠어요. 물론 거기에 대한 소신이 있으면 더 좋고요. 예를 들면 민족주의적인 감정으로 쓰인 연구들도 있잖아요? 이럴 때 감정적으로 동의는 되지만 역사 자료를 보면 이렇게 말하지 않는데? 하고 의심할 수 있는 감, 그런 게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렇게 해야 새로운 연구가 나올 수 있고, 의미 있는 연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렇게 되지 않으면 그냥 따라가는 거죠. 새로운 연구를 만들어 낼 수가 없어요. Q. 굉장히 중요한 말씀이신 거 같아요. 기존 연구 자체가 만들어 놓은 어떤 틀이 후학들에겐 때론 장벽이 될 수 있는데, 거기에 매몰돼서 쫓아가기보다는 과감하게 문제 제기 해보는 것도 중요할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는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까요? ‘위안부’ 문제를 연구하려면 적어도 10년을 할 생각을 하고 시작했으면 좋겠어요. 단기적인 프로젝트로 연구자를 키울 게 아니라 장기적으로 연구자를 키워야 한다는 거죠. 연구를 맡겼으면 한 번 발표시키고 끝낼 것이 아니라 2탄, 3탄 계속할 수 있게끔 기회를 줘야 해요. ‘위안부’ 문제는 꾸준히 하지 않으면 정말 어려운 주제예요. 티끌만 한 자료 하나 가지고 끄집어내고 해석해야 하거든요. 크게 안 보여요. 작게 보이거든요. 그래서 꾸준히 계속할 수 있게끔 연구 지원을 해줘야 해요. 이제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와 같은 곳이 생겼으니까, 이 기관에서 지원을 꾸준히 해줬으면 좋겠어요. 당장 연구 성과를 내는 데 급급할 것이 아니라 얼마큼 성실하게 연구를 이어가느냐 중요해요. 성실하게 연구를 해야 뭐가 나와요. 이른 시간 안에 자꾸 큰 거를 요구하면 오독이 나와요. 굉장히 조심해야 하는 부분이라고 생각해요. Interveiwer : 소현숙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연구팀장) Interviewee : 강정숙 정리 : 슬로워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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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년 좌담 대중매체를 통해 바라본 일본군‘위안부’의 재현 〈2부〉 - '위안부'를 둘러싼 재현의 윤리, 어디까지 묘사하고 재현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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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부'를 둘러싼 재현의 윤리, 어디까지 묘사하고 재현할 것인가 허윤(부산외대 만오교양대학 교수) / 권은선(중부대 연극영화과, 영화평론가) / 오혜진(한예종, 문학평론가) / 김청강(한양대 연극영화학과 교수) <1부> - <여명의 눈동자>부터 <허스토리>까지, 대중매체를 통해 바라본 일본군‘위안부’ 역사의 재현전략 <2부> - '위안부'를 둘러싼 재현의 윤리, 어디까지 묘사하고 재현할 것인가 <3부> - 재현물로서 <허스토리>의 성공과 실패 오혜진 ‘위안부’ 역사를 재현하고 비평하는 데 무엇이 핵심이어야 할까요? 강간 장면을 얼마나 자세하게 묘사했는가? ‘위안부’ 피해자의 고통을 얼마나 ‘절절하게’ 담았는가? ‘위안부’인 존재에 ‘빙의’해야만 진정성 있는 고통을 재현할 수 있는가? ‘위안부’ 역사와 고통을 그런 방식으로 상상하는 게 한계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를테면, ‘빙의’의 상상력은 ‘내가 만약 '위안부'였다면’, 즉 ‘나’를 역사의 피해자로 상상하는 거죠. 그런데 ‘위안부’의 ‘역사’를 사유한다는 건, ‘나도 피해자일 수 있었음’을 주장하자는 게 아닙니다. 어떤 지배의 체제와 정서 구조에서 그런 ‘폭력’이 발생할 수 있는가를 사유하는 거죠. 그렇게 보면, ‘나도 피해자일 수 있었다’라는 가정에 머물 게 아니라, ‘위안부’라는 역사적 폭력의 연원인 ‘식민지 가부장제’라는 역사와 시스템을 사유해야겠죠. 그렇게 사유의 초점을 이동하면, ‘식민지 가부장제’는 여전히 한국 사회에 잔존하며, 현재의 나 역시 그 체제의 효과의 자장 안에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런 면에서, 최근 서강대학교 트랜스내셔널 인문학연구소와 한국국제교류재단이 공동주최한 전시 <이웃하지 않은 이웃─홀로코스트 ‘집시’ 희생자와 타자의 초상>(KF 갤러리, 2019. 1. 24~2019. 2. 28)의 소개말은 흥미로웠어요. 나치 시대에 억압당했던 ‘집시’들의 모습이 담긴 독일인 한스 벨첼의 사진을 전시한 것인데요. 한스 벨첼은 ‘집시’를 ‘매력적인 친구들’이라고 생각해서 그들을 카메라에 담았지만, 결국 그 ‘집시’ 친구들을 홀로코스트로 보내는 데 일조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 전시의 서문은 ‘우리도 언제든지 홀로코스트의 피해자가 될 수 있다’가 아니라, ‘평범한 이웃이었던 우리도 언제든지 가해자가 될 수 있다’는 것으로 역사적 성찰의 초점을 바꿔보기를 요청해요. 가해자에 이입하라는 뜻이 아니라, 어떤 상황과 조건에서 ‘선량한 이웃’은 역사의 가해자가 될 수 있는지 사유하자는 것이죠. 권은선 그와 관련해서, 저는 미약하게나마 조금씩 변화가 느껴지긴 합니다. 조금 전에 말씀하신 것처럼 <귀향> 같은 경우에는 정말 ‘고통의 전이’의 관객성을 구축합니다, 즉 관객이 정민의 몸을 빌려서, 완전히 그 몸을 통과하면서, 과거의 고통의 현장으로 가게 되는 구조입니다. 정민이라는 몸이 동일시-몸이 됩니다. “사실 그대로”의 고통의 재현과 대리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영화적 주된 장치는 플래시백이죠. 그런데 최근 <아이 캔 스피크>나 <허스토리>를 보면 플래시백이 점점 사라지고 있어요. <아이 캔 스피크> 같은 경우에는 아주 부분적으로만 플래시백이 나오고, <허스토리> 같은 경우에는 전혀 없어요. <허스토리>는 주인공 시점의 플래시백을 사용하는 대신, 지금은 폐허가 된 위안소 터를 찾아 역사적 거리를 두고 현장을 바라보는, 증인의 자리에 일본군 ‘위안부’를 위치시키는, 다큐멘터리 관습을 차용합니다. 이러한 것들이 고통과 트라우마를 둘러싼 재현에 있어서 미세하게나마 변화된 지점이 아닌가 합니다. <귀향>이 나왔을 때, “이 이미지, 이 고통의 이미지 앞에서 한없이 너의 무기력함을 받아들여라.”- 이런 비평적 태도가 있었습니다. 사실 저는 그러한 비평적 태도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왜 무력한 위치로 관객의 위치를 한정시켜야 하느냐는 것이죠. <눈길>에서 제가 가장 흥미롭게 생각하는 지점은 ‘내포 청자’의 위치입니다. 내포 독자가 아니라요. 영화 서사 장치 안에 ‘헬조선’의 소녀가 ‘위안부’ 할머니의 증언을 듣는 후속세대의 좋은 청자(good listener)로 자리매김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곧 관객이 동일시 할 수 있는 지점을 만들어 줍니다. <귀향>이 피해자에게 ‘빙의-되기’를 통한 죄책감의 정치였다면, 잘 듣고 반응할 수 있는 능력에 기초한 ‘청자-되기’는 책임감의 정치를 촉구합니다. 최근의 영화들을 보면 어떤 조바심이 보입니다. 오혜진 선생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등록된 피해생존자의 수가 계속 줄어드는 상황에 대한 영화적 반응으로요, <22> 라는 중국 다큐멘터리도 있듯이요. 제가 아까 일본군 ‘위안부’들 간, 그리고 할머니와 후속 세대 간의 자매애 혹은 우정을 이야기했는데요, 거기에 흥미로운 부분이 하나 있어요. 꼭 알츠하이머에 걸린 할머니가 한 명은 등장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정신을 잃어가는 것, 기억을 잃어가는 것이 하나의 역사적 망각에 대한 메타포로 작동하면서, 관객에게 “잃어버리면, 잊으면 안 돼”라는 것을 상기시킵니다. <아이 캔 스피크>나 <허스토리>는 재현에 있어서 ‘말하는 주체’로서의 위상을 강조했는데, 부분적으로 아쉬움이 있습니다. <아이 캔 스피크>는 오혜진 선생님이 지적하신 것처럼 ‘유사 가족’의 형태를 빌어온 것, 그리고 판타지 같은 결말이요. <허스토리>는 사실 장점이 될 만한 요소들을 많이 내장하고 있었어요. 우리가 '위안부' 운동을 떠올릴 때, 소녀상, 나눔의 집, 광화문과 같은 공간적 특성을 떠올린다는 거죠. 그런데 <허스토리>는 부산이라는 지역을 다루고 있다는 지점이요. 그리고 ‘법정 드라마’이기 때문에 펼쳐질 수 있는 부분들이 있었습니다. 가령 “법적 책임 vs. 도덕적 책임”의 문제라든지, 그런 배상과 책임을 둘러싼 (국제)법, 법리적인 것들이요. 오혜진 제가 아까 소개한 ‘감방 죄수의 무력함’에 대한 이야기는, 고통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받아들이라는 뜻이 아니라, 너무 고통스럽다는 이유로 재현을 포기하고 역사적 성찰을 방기하는 상황에 대한 성찰을 촉구하는 맥락에서 인용된 것이었어요. 다른 얘기를 해보자면, 김숨의 소설 『한 명』을 읽고 제가 깨달은 것은, ‘위안부’ 피해생존자가 ‘말하는 주체’가 됐다는 점이 다시 한번 물신화될 수 있다는 것이었어요. 그 소설은 마치 보고서처럼 300여 개의 각주가 달려 있는데, 그것들은 ‘위안부’가 당한 폭력을 서술하는 서술자의 증언에 신빙성을 보완하기 위해서 동원돼요. 그 ‘폭력 묘사’의 내용은 <귀향>과 이전 ‘위안부’ 서사들이 즐겨 한 자극적인 묘사와 거의 같습니다. ‘강간’을 비롯한 폭력이 매우 선정적이고 노골적인 방식으로 서술되는데요. 여기 달린 각주들은 ‘이건 서술자가 일부러 그 고통을 외설적으로 재현한 것이 아니라, ‘할머니’들이 직접 한 말이니 ‘재현의 윤리’ 따위로 문제 삼지 말라’라는 뜻으로 읽히더라고요. ‘위안부’ 피해생존자들의 증언을 페티시적인 방식으로 활용하는 거죠. ‘위안부’의 역사적 맥락을 사상시킨 채 ‘위안부’의 섹슈얼리티를 재현하고 소비하는 것에 경종을 울리고자 ‘위안부’ 피해생존자의 ‘증언’이 등장한 것인데, 그 ‘증언’을 다시 한번 물화하는 것이 대중서사의 강력한 전략이 됐다는 건 문제적이죠. 김청강 초반에 진실성의 문제가 굉장히 큰 이슈였잖아요. 말하자면 일본에서 역사적 부인을 하기 때문에 거기에서 우리는 사실로 증명을 해야 한다는 그런 강박 내지는 필요성에 의해서 계속 사실이었다고 말한다거나. 그리고 그게 단순히 증언으로 가능하지 않았다, 증언이 신빙성이 없다는 말 때문에 자료를 통해서 증빙해야 하고. 이런 강박이 사실은 지금 말씀하신 소설에서도 여전히 유효하게 작동하는 것이 아닐까요. 그러니까 일본은 계속해서 역사를 부인하고, 우리는 거기에 대해서 반응하는, 그런 방식으로. 그런데 약간 그런 제로섬 게임 안에서는 거기서 더 나갈 수가 없는 방식이 없는 거죠. 그러니까 이쪽에서 부인하면 '아니야, 사실이야.' 이렇게 계속해서 왔다 갔다 하는 그런 모습으로밖에 갈 수가 없는. 그리고 또 한 가지 덧붙이고 싶은 것은 아까 그 이전의 재현 방식에서 나타나는, 1990년대 이전에 재현의 방식에서 성인 여성으로 주로 나타났다는 그런 측면이 현재는 사라진 건데, 그 의미도 조금 더 생각해봐야 할 부분이 있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왜 그 부분이 삭제되느냐, 피해를 입었던 기간보다 한국에 돌아온 ‘위안부’ 생존자들은 한국에서 숨죽이고 견뎌왔던 세월이 굉장히 많이 삭제되는 거거든요. 물론, 최근의 영화들에서는 그런 부분들에 대해서 성찰해야 한다는 시각들이 드러나기는 하지만. 소녀와 할머니로 재현되었을 때 그 사이에서 쭉 견뎌온 세월과 그사이 한국 사회의 책임에 대한 문제들이 사실은 굉장히 많이 삭제되고 있다는 것이거든요. '위안부' 문제를 얘기할 때 1990년대 이후의 서사들에 대해서 굉장히 집중하는데, 사실 이전의 맥락들을 더 자세히 살펴본다면 한국 사회가 떠안아야 할, 이게 단순히 일본의 폭력으로만 회수되지 않을 지점들을, 우리 사회가 받아 안아야 할 부분들을 조금 찾아볼 수 있지 않을까. 어떻게 '위안부'를 그동안 잊어왔는가. 이전의 디테일한 방식들에 대해서 조금 더 성찰해야 하지 않는가. 그런 생각도 조금 듭니다. 허윤 '위안부'가 항상 늘 대중 소설의 장르 속에 등장하는 성애화된 성인 여성이었죠. 김성종 소설도 그렇고요. 저는 재현의 기점이 바뀌게 된 것은 ‘이승연 씨 화보 사건’이라고 생각해요. 이승연 씨가 모바일 미디어 산업과 결합한 성인 화보 시리즈의 연장 선상에서 화보를 내겠다고 하면서 엄청난 이슈가 되고, 사람들이 분노했었죠. 이후에 성인 여성으로 재현하는 것이 굉장히 위험하다는 감각이 생긴 거죠. 그런데 그때 무릎 꿇고 사죄하고 필름 태우고 하는 식으로 사죄를 했지만, 그게 왜 문제인지, 혹은 어떻게 이런 작업을 생각할 수 있었는가를 더 묻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때도 제작자는 '역사적 책임을 가지고 일본군의 만행을 고발하겠다'라는 말을 했었거든요. 일본군이 주둔했던 팔라우까지 가서 화보를 찍은 것인데, 그런 화보가 받아들여지리라 생각했던 데 대해서 한국 사회는 심문해보지 않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오혜진 이승연 씨의 화보 사건은 그 자체로 새롭다기보다는, 그 이전까지 ‘위안부’ 섹슈얼리티를 소비하던 방식의 연장 선상에서 발생한 일이죠. 식민지의 ‘위안부’로 동원된 여성 섹슈얼리티가 남성이 선택할 수 있는 여러 성애화된 여성 섹슈얼리티의 한 종류로서 간주되어온 전통. 다만 이승연 씨의 화보 사건은 그것을 ‘모바일 화보’라는 형식을 통해 매우 노골적으로 상품화하면서 사회적으로 큰 후폭풍을 맞은 거죠. 그 이전에도 이미 스포츠신문 연재소설 등에서 ‘성애화된 여성 섹슈얼리티’로서 ‘위안부’ 이미지를 소비하고 있었으니까요. ‘위안부’ 여성을 성애화된 방식으로 소비해온 구조와 역사에 대한 질문 없이, 그저 ‘위안부’ 여성이 성애화되는 건 ‘위안부’를 ‘성인 여성’으로 묘사했기 때문이라고 믿으며, 그걸 피하고자 손쉽게 ‘어리고 순결한’(그럴 것이라고 상상되는) ‘소녀’ 형상을 택한 게 최근의 일인 듯합니다. 하지만 <귀향>이나 ‘소녀상’에 대한 성희롱에서 보듯 ‘소녀’ 역시 성애화의 대상이 될 수 있죠. ‘소녀’ 역시 섹슈얼리티의 주체니까요. 김청강 저는 소녀상이 사실은 굉장히 좋은 재현의 방식의 하나라고 생각을 했었어요. 왜냐하면 어떤 커다란 동상을 세운 게 아니고, 굉장히 작고... 제가 영화에서 성인 여성들이 착취되는 어떤 그런 모습들을 쭉 보다가 소녀상을 봤을 때, 이게 당시에는 상당한 대항성을 가지고 있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우리가 가서 만져볼 수 있고 비가 오면 우산도 씌워 주고, 눈이 오면 모자도 씌워 줄 수 있는, 이런 만질 수 있고 동일시할 수 있는 대상으로서 재현했던 게 좋았는데, 지금은 사실은 소녀상이 굉장히 너무 과공급되면서 그 의미가 탈색됐다고 생각되는 부분이 있는데. 그렇기 때문에 그 대항적인 부분이 사라졌을 때, 어떤 식의 대안을 가지고 재현을 할 것인가. 이제 소녀로만 얘기하기도, 성인 여성으로만 얘기하기도, 할머니의 모습만으로 얘기하기도 굉장히 어려운 지점에 도달해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권은선 돌이켜 보면, 이승연 씨 화보 사건은 일종의 해프닝이었습니다. 아까 말씀하신 것처럼, 이전까지 '위안부'에 대한 포르노그래픽한 상상이 잔여적인 이미지 형식으로 계속 있었고. 또 한편으로는 김학순 님의 증언 이후, '위안부' 재현과 관련해 가장 강력한 순간이라고 할 수 있는 변영주 감독의 <낮은 목소리>가 1995년에 등장합니다. 이런 이미지들과 담론들이 경합하는 와중에서, 이미지 생산을 둘러싼 미디어 자본이 결합하면서 나온 아주 이상한 결과물이 이승연 씨 화보 사건이었던 것입니다. 사실 그 잔여적인 이미지 형식이 <귀향>에서까지도 남아 있는 것이죠. 김청강 <귀향>을 보고 저는 이게 왠지 성인 여성에서 소녀로 바뀌었을 뿐이지, (물론 성폭력 피해 여성과 겹쳐지는 공감의 부분을 넣긴 했지만) 피해자 입장에서 보지만은 않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권은선 ‘소녀상’에 대해서 얘기하자면, 사실은 소녀상의 무한증식으로 ‘소녀’가 일본군 '위안부'의 이미지를 과점유하게 되었다고 봅니다. 많은 분이 반복해서 지적했던 것처럼, 일차적으로 ‘훼손당한 민족’을 순수하게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손쉬운 이미지 재현이 소녀이기 때문이죠. <귀향>을 분석하면서 얻은 생각은, 이러한 순수한 민족적 피해자 소녀의 고통 재현이, 결국 ‘위안부’ 피해자를 추상화하고 종교화하고 신성화하는 방식이라는 점입니다. 즉 무력한 위치를 받아들이면서 그 앞에 머리를 조아리라는. 그리고 그러한 감각을 강화하는 것은 이 <귀향>이 만들어진 크라우드 펀딩, 그리고 소녀상 만들기 모금 과정과 관련이 있다고 봅니다. 다시 말해 “내가 이 이미지(동상)를 만든다”라는 주인의식이 과도한 죄책감의 공동체, 공통감각-이런 것들을 만들어 내고, 거기에 대해서 입을 틀어막는 효과를 만들어 내는 것이죠. 일종의 ‘국민 프로듀스’ 감각이라 할 만한 것으로, “내가 프로듀서”, 마치 버라이어티 쇼의 대국민 투표에 참여하듯이, 내가 제공하는 것이라는 생각. 이런 것들이 역사적 성찰에 필요한 이미지에 대한 거리감이라든지, 유효한 정치적인 전략을 구성하는 데 저해가 된다고 봅니다. 이에 대한 성찰과 비평적 담론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김청강 중요한 부분을 권 선생님께서 지적해주신 것 같은데요. 국민 프로듀스가 된다는 그런 감각? 오혜진 선생님이 말씀해주신 시민의식 같은 거. 그러니까 굉장히 시민의식을 갖는 손쉬운 방법으로 돼버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조금 들거든요. 그러니까 조금 시민의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일에 대해서 알아야 하고, 여기에 적은 돈이지만 그만큼 투자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굉장히 손쉬운 시민의식 감각으로 만들어지는 경향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듭니다. 허윤 지금 ‘위안부’를 둘러싼 재현물이나 상품, 텀블벅과 같은 크라우드 펀딩이 엄청나게 쏟아지고 있죠. 오혜진 100피트 운동부터 <귀향> 보기 운동까지 면면히 이어지는 시민참여 방식 자체를 비판하고 싶지는 않아요. 그걸 ‘자본주의에 침윤된 소비자운동’에 불과하다는 식으로 폄하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다만 ‘위안부’ 역사 재현의 새로운 쟁점이 만들어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어차피 여성의 섹슈얼리티는 언제든 성애화되기 십상이니, ‘위안부’를 ‘소녀’, ‘성인여성’, ‘할머니’ 중 무엇으로 재현할 것인가가 핵심적인 질문이라고 생각되지는 않고요. 결국 ‘위안부’ 역사를 재현한다는 것은 ‘위안부’ 문제를 역사화하면서 우리가 얻은 ‘성찰’을 재현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최근 ‘재현의 윤리’에 대한 두 가지 경향을 이야기하고 싶어요. 하나는, 지대한 고통은 ‘재현하지 않는 것’이 곧 윤리라고 생각하는 경향이죠. 어떤 고통은 ‘재현 불가능성’의 영역에 있다고 규정하고, 그것을 재현하는 것은 곧 ‘재현의 폭력’이라는 주장이 있습니다. 이는 ‘쇼아[1]는 재현될 수 없다’라는, 재현에 대한 오랜 논쟁의 연장이기도 합니다. ‘위안부’ 재현 서사뿐 아니라, 최근에는 (성)폭력이 등장하는 재현물 자체를 금지와 말소의 대상으로 여기는 경향까지 있죠. 하지만 ‘재현 없는 사유’가 가능할까요? 문제는 폭력을 ‘재현’했다는 것 자체에 있지 않을 겁니다. 어떤 관점과 방식으로 폭력을 재현하는가의 문제겠죠. 어떤 대상이 절대로 재현 불가능하다거나 재현돼서는 안 된다는 주장은 오히려 재현된 ‘이미지’에 대한 물신화에 기인한다고 생각해요. 재현된 이미지에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하고 그것을 불가변적인 것으로 사유하는 거죠. 하지만, ‘재현된 이미지’는 대상에 대한 특정 시대와 인간의 ‘역사적’ 관점과 이해를 보여주는 한 사례일 뿐입니다. 특정 대상을 ‘재현 불가’의 영역에 두는 건 그 대상에 대한 이해를 포기하는 것에 가까워요. 오히려 재현된 결과물에 대해 논쟁을 하는 게 더 생산적이죠. 이건 ‘표현의 자유’ 등을 내세워 모든 재현은 용납돼야 한다는 식의 나이브한 주장과는 전혀 다른 얘기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경향은, 특정 대상을 비평할 때 ‘재현의 윤리’ 등을 문제 삼는 것을 매우 전통적이고 엘리트적인 작품론에 속한다고 보는 의견에서 발견됩니다. 예를 들어 <귀향>을 비평할 때, ‘재현의 윤리’를 문제 삼아 영화의 한계를 지적하는 것은 이 영화의 제작과 수용에 참여하는 방식으로 역사와 정치에 개입하는, 작품 자체보다 ‘더 큰’ 대중운동의 정치성을 간과하는 고식적인 비평으로 간주하는 식입니다. 하지만 영화에서 시도한 재현 전략을 비평적으로 사유하는 것과 영화를 둘러싼 수용의 정치를 사유하는 것은 서로 배치되지 않아요. 둘 다 필요하죠. ‘재현의 윤리’는 작품을 창작한 개인의 정치적・미학적 수준이나 취향에 국한된 문제가 아닙니다. 특정 재현이 대중적 공감을 얻고 선호되는 건 그 자체로 그 주제에 대해 한국 사회에 축적된 지식과 이해의 문제고, 이는 매우 정치적인 문제죠. 여기서 잠깐 영화 <사울의 아들>(라즐로 네메스, 2015)과 관련된 논쟁을 생각해보고 싶은데요. 이 영화는 아우슈비츠에서 유대인 수용자들을 가스실로 이끌고 시체를 처리하는 또 다른 유대인 수용자들인 ‘존더코만도’의 이야기입니다. 실제로 ‘존더코만도’ 일원 중 한 명이 나치의 감시망을 피해 어두운 소각로에서 몰래 아우슈비츠의 모습을 찍은 사진 4장이 이 영화의 기반이 된 거죠. 저는 이 영화 초반부를 보고 충격을 받았어요. 이 영화가 정말 나를 아우슈비츠로 끌고 간다는 느낌을 받았거든요. 영화에서 카메라는 언제나 주인공의 어깨 뒤에 위치합니다. 딱 그 위치에서 보이는 것만 볼 수 있는 거죠. 아주 한정된 시야로 현재 주인공이 있는 위치를 조망하기 때문에 관객은 지금 여기가 어딘지,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파악하기 어려워요. 마치 광장에서 키 큰 앞사람들의 어깨 사이로 보이는 것을 통해서만 현재 광장 앞에서 일어나는 일을 파악해야 할 때의 답답함처럼요. 이런 촬영기법들이 저한테 일종의 임장감(臨場感)이랄까요, 내가 정말 그곳에 임하고 있다는 느낌을 줬어요. 그리고 또 영화는 바로 그 한정된 시야를 통해, 떼 지어 기차에 오르는 유대인들이나, 벌거벗은 수용자들의 시체더미 등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그 장면들은 마치 포커스 아웃, 혹은 블러 처리를 한 것처럼 희미하게 나와요. 이런 연출을 통해 관객은 아우슈비츠의 시스템 전모를 절대 파악할 수 없고, 죽음에 이르는 수용자들의 표정이나 정동 같은 것도 결코 포착할 수 없죠. 아우슈비츠라는 장소나 피해자들의 모습이 ‘스펙터클’로 제시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이런 특성들 때문에 혹자는 이 영화가 재현의 윤리에 매우 충실하다고 평했죠. 하지만, 피해자나 시체를 ‘희미하게’ 보여줌으로써 보장되는 윤리? 그렇다면 그 블러 처리가 조금 덜 희미했다면 덜 윤리적인 재현이 되는 걸까요? 저는 그 영화에 재현의 윤리가 있다면, 그런 정교하게 기획된 촬영기법에 있다기보다는 그 영화가 말하려고 했던 바 그 자체에 있다고 생각해요. 그 영화는 주인공인 한 존더코만도 ‘사울’이 나치의 감시망을 피해서, 가스실에서 죽은 한 소년을 제대로 ‘매장’하고 애도하기 위한 분투를 서사화하거든요. 심지어 그 소년이 자신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존재일지라도, 바로 그 분투를 함으로써만 겨우 스스로 감지하는 ‘존엄’의 문제를 말합니다. 마치, 소년의 매장을 위해 분투하듯, 결코 재현될 수 없는 고통임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그 고통을 사유하려는 영화의 ‘기투’ 자체에 윤리적인 지점이 있다고 생각해요. 그렇게 보면, ‘위안부’의 역사를 비롯한 고통의 재현을 생각할 때 ‘재현의 윤리’에 대한 매우 협소한 이해가 고착되는 상황은 염려스럽습니다. 권은선 공감합니다. 사실 ‘재현의 윤리’ 혹은 ‘재현의 도덕’이라는 논리가 이상한 방식으로 고착되고 사유되고 있어서, 어느 순간 개인적으로 그러한 용어를 사용하지 않으려고 노력하게 되더라고요. 단순히 촬영 기법 같은 것들이 즉각적으로, 기계적으로 어떤 윤리적인 효과를 만들어 내는 것은 아니지만, 시각화의 장치라는 것을 통해서만 그 어떤 이미지의 의미가 만들어지기 때문에, 저는 시각화 장치라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쇼아>부터 ‘아우슈비츠’를 재현할 수 있느냐, 없느냐-재현 불가능성에 대한 논의는 오래되었죠. 그런데, 결론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저는 그것을 재현할 수 있으며 또한 그것을 사유하고 성찰하기 위해서 재현을 위해 투쟁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중요한 것은 재현의 방식이죠. 폭력의 재현이 그 자체로 나쁜 것이 아니라, 그 재현이 나쁘다면 그것이 폭력의 속성을 사유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귀향>의 재현을 옹호한 언설 중의 하나가 실제 ‘위안소’에 대한 증언을 토대로 그린 그림을 “그대로 재현한 것이다”라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은 사실 재현의 윤리에 관해 어떤 것도 담보할 수 없습니다. 위안소에서 벌어진 일이 정말 나쁜 것은, 그것이 인간성이라는 것을 말살하는 장소였기 때문입니다. 그 과정을 어떤 방식으로 재현할 것인가, 여기에 대한 깊이 있는 고민이 필요한 것이죠. <사울의 아들> 같은 경우에는 초점 심도를 낮추는 촬영 방식 등을 주도적으로 사용하는데, 이는 수용소에 있는 수용자들에게는 초점이 명확하게 맞춰질 수 없는, 어떤 상황이라는 것을 드러내기 위한 장치였습니다. <사울의 아들>을 두고 디디 위베르만은 이런 얘기를 합니다. 그곳에서는 전체를 조망할 수 없다, 전체를 조망하는 시선은 감시자의 시선뿐이라는 거죠. 그런데 <귀항>에서 정말 문제적인 ‘지옥도’의 재현을 예를 들면, 그것은 그 사실이 얼마나 끔찍하고 정말로 용납할 수 없는 것인지를 강조하기 위해서 극 부감의 시점으로 전체를 조망합니다. <귀향>에서 성폭력이 남성 중심적인 가해자의 관음증적 시선으로 묘사되는 것도 문제지만, 감시자, 전체주의자의 시선을 채택하고 있는 것도 문제가 있습니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근대성이 탈각된 ‘스위트 홈’ 고향의 이미지가 놓여 있고요. <귀향>에서처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를, 마치 지옥도에 나오는 인물들처럼 종교적으로 만들고, 추상화하고 신성화하는, 그런 탈역사적 재현 장치를 문제로 얘기하고 싶습니다. 오혜진 아까 그 존더코만도가 찍은 사진 4장에 대해 프랑스 철학자 조르주 디디-위베르만이 2004년에 쓴 책 『모든 것을 무릅쓴 이미지들』(오윤성 역, 레베카, 2017)을 읽어봤어요. 그 사진들에는 화장 구덩이들과 숲에서 옷이 벗겨진 채로 호송되는 여성의 모습이 찍혔습니다. 하지만 그 사진은 나치의 감시를 피해 몰래 찍은 것이기 때문에 초점도 맞지 않고 이미지도 선명하지 않아요. 무엇보다 사진을 찍는 이가 있는 장소도 함께 찍혔죠. 예컨대 화장 구덩이와 그곳에서 일을 지시하는 나치들만 찍히는 게 아니라, 사진을 찍는 사람이 있던 제 5소각로 가스실의 ‘어둠’이 시커멓게 찍혔습니다. 화장 구덩이는 사진을 찍는 사람이 있던 공간의 열린 문을 통해 간신히 보이는 장면이죠. 이 사진들에 대해 가장 빈번하게 시도된 조작의 내용이 흥미롭습니다. 사람들이 알고 싶은 건 ‘아우슈비츠는 어떻게 생겼고 거기서 무슨 일이 일어나나’이기 때문에, 사진 속 시커멓게 나온 ‘어둠’은 자르고 화장 구덩이들만 클로즈업하는 식이죠. 시커먼 부분은 아우슈비츠에 대한 정보를 알려주는 데 별 도움이 안 되는 잔여적인 부분으로 간주해서 삭제하는 겁니다. 하지만 디디-위베르만은 그 시커먼 부분 역시 아우슈비츠의 이미지임을 강조합니다. 그 까만 부분은 그 사진들이 어떤 상황을 ‘무릅쓰고’ 탄생 가능했는지를 보여주는 부분인데, 그것을 삭제한다는 것은 ‘증언/재현이 가능한 자리’를 비가시화하는 일이라는 거죠. 이 부분을 읽으면서 당연히 <귀향>의 소위 그 ‘지옥도’ 장면이 떠올랐습니다. ‘위안소’ 전체를 ‘조감’하는 시선은 어떤 자리에서 가능한가 생각해보면, 그건 권은선 선생님 말씀대로 감시자 혹은 신의 시점이죠. 결국 우리는 왜 증언/재현을 물신화할 뿐, 그것을 가능케 한 역사적 조건을 사유하지 않는가. ‘위안부’의 고통을 존중한다면서, 왜 ‘위안부’의 고통을 재현하는 ‘위치’에 대해서는 성찰하지 않는가 질문하고 싶었습니다. 김청강 디디 위베르만 책에서 보니 여성 가슴도 조작했다고 하더라고요. 더 위로 처진 가슴을 올리는 식으로요. 왜 굳이 그렇게 해야 했을까 생각하는데, 사실은 방금 말씀하신 것처럼 그런 어떤 우리가 보고 싶은 이미지, 그러니까 초점을 두는 부분에 대한 조작들이 일어나고 있는데, 사실은 어떻게 보면 지금 굉장히 재현이 많이 있지만, 다 너무 초점이 그 목적에 맞게 그 재현들이 너무 클리어하게 맞춰져 있다는 게 문제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사실은 최근에 경향 중에서 가장 큰 변화는 극화된 것이 많다는 것이잖아요. 그랬을 때 기존의 다큐멘터리가 정말 많은 것을 숙고해서 재현했던 방식과 극영화로 만들었을 때 방식이 굉장히 다를 수밖에 없고, 특히 극영화로 만들었을 때 너무 단순화되는 경향이 있는 거예요. 초점이 너무 클리어해지는 거죠. 대중적 소통이라는 것에 공감을 얻고, 대중적으로 소통해야 한다는 의식과, 그다음에 그러기 위해서 동원해야 하는 수단이, 사실은 어떻게 보면 그 이슈 자체를 너무 단순화하게 만드는, 그러니까 의도는 좋잖아요. 이 이슈를 알리고 사람들이 책임감과 모든 것을 알게 해야 한다는 건 좋지만, 사실 대중적 재현을 따랐을 때는 단순화될 수밖에 없는 그런 구도, 굉장히 클리어한 하나의 목적을 가지고 쭉 스토리를 끌어나가야 하는 그런 것 때문에 어떻게 보면 대중적인 서사 안에서 더 많이 재현된다는 건 사실 더 큰 우려를 낳는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오히려 정말 다양한 시도들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요. 각주 ^ 히브리어로 '홀로코스트'라는 뜻. 클로드 란츠만 감독의 영화 <쇼아>(1985)는 총 350시간에 이르는 촬영 필름을 가지고 9시간 반으로 편집된 대장편 다큐멘터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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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년 좌담 대중매체를 통해 바라본 일본군‘위안부’의 재현 〈3부〉 - 재현물로서 〈허스토리〉의 성공과 실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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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현물로서 <허스토리>의 성공과 실패 허윤(부산외대 만오교양대학 교수) / 권은선(중부대 연극영화과, 영화평론가) / 오혜진(한예종, 문학평론가) / 김청강(한양대 연극영화학과 교수) <1부> - <여명의 눈동자>부터 <허스토리>까지, 대중매체를 통해 바라본 일본군‘위안부’ 역사의 재현전략 <2부> - '위안부'를 둘러싼 재현의 윤리, 어디까지 묘사하고 재현할 것인가 <3부> - 재현물로서 <허스토리>의 성공과 실패 허윤 <허스토리>가 그래서 여러 가지 문제 지점을 낳았죠. 다큐멘터리 장면들을 그대로 영화 안에 포함하고, 살짝살짝 비틀면서 이질적인 이미지들을 다 소거하고, <나의 마음은 지지 않았다>(안해룡, 2009)에서 여러 장면을 거의 그대로 가져왔는데, 한국어로 노래를 부르잖아요. 송신도 님은 일본어로 노래 부르는데요. 이것이 다큐멘터리에 등장했던 실제 상황이라는 정보가 없는 사람들에게는 영화적 연출로 해석될 수밖에 없고, 대중들에게는 신선한 재현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습니다. 다큐멘터리를 보는 소수의 사람을 제외하고는, 어떤 식으로 그런 이미지들을 가져와서 유통하는지 모르게 되고요. 김청강 지금은 다큐멘터리 푸티지나 사진, 이미지가 많잖아요. 그걸 이용해서 어떤 사실로서의 증명처럼 중간중간 넣어주는 방식. 그러니까 '위안부' 문제뿐만 아니라 다른 극화된 식민지를 배경으로 한 영화들도 그래요. 요즘에 보면 식민지를 배경으로 한 영화들이 너무 많이 나오고 있잖아요. 극화된 서사에 사실로서의 이미지를 던져주면서 이게 전체적으로 굉장히 진실한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그런 재현이 많아진 것 같습니다. 오혜진 <허스토리>는 좀 나쁜 의미에서 충격적이었어요. 김희애 씨를 띄우는 것 외에 이 영화는 무엇을 하려고 했던 것일까 하는……. 김청강 김희애가 사투리를 쓸 수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는 영화인 것처럼. (웃음) 허윤 너무 못 쓰지 않아요? 부산 사람들이 못 알아듣겠다고 하던데. (웃음) 오혜진 그 영화에서 여성단체의 역할이 재현된 방식도 매우 제한적이었고요. '증언하는 여성'의 힘을 보여주기에는 '배정길(김해숙 분)'과 다른 '위안부' 피해생존자들의 비중이 너무 작았죠. 무엇보다 그 영화는 실제로 있었던 한일 연대 법정투쟁을 다루는데, 재일조선인 변호사 '이상일(김준한 분)' 외에는 일본 시민운동의 동향이 거의 나오지 않았어요. 한일 연대 법정투쟁의 의미를 되새겨보기에는 많은 것들이 삭제됐고, '부산'이라는 지역성을 내세웠지만, 그것이 서사에서 충분히 의미화되지는 않은 듯해요. 마지막 장면은 '위안부' 역사기념관의 전시물들을 비추며 끝나는데, 마치 '위안부' 문제는 이제 박물관에 가야 하는 완결된 문제라고 말하는 듯했어요. 김청강 그러니까 그거는 성찰이 끝난 것 같은 느낌인 거죠. 권은선 그런데 어떤 것은 흥미로워요. <아이 캔 스피크>랑 <허스토리> 같은 경우에 보면 타이틀이 공통점이 있잖아요. 소문자 i에서 대문자 I로 바뀌고. 히스토리에서 허스토리로 바뀌고. 어떤 담론을 대중적인 문법으로 끌어들이려는 의도를 자명하게 밝히고 시작한다는 부분이, 뻔하기는 한데, 재밌었어요. 그리고 상업 영화에서 '안경 쓴 여자'는 절대 주인공이 될 수 없다는 불문율이 있거든요. 그러면 어떤 순간에만 안경 쓴 여자가 등장하느냐. 신데렐라 스토리에서 여주인공이 변신하기 이전 단계에서만 안경을 쓰고 등장하죠. 그런데 이 영화에서 여행사 사장은 처음부터 끝까지 안경을 쓰고 나오죠. 분명 이런 부분은 여성주의적 재현을 의식했습니다. 오혜진 <허스토리>에서 '허(her)'는 누굴까요? 문정숙? 권은선 이 영화의 시선 자체가 남성 중심적인 재현 방식과는 좀 다릅니다. 처음부터 김희애 씨가 옷 갈아입는 장면부터 기존의 재현 방식이랑은 많이 다르거든요. 전혀 관음증적이지 않고요. 그리고 여성들을 집단으로 잡는 풀샷이 되게 많아요. 지금까지는 두 '위안부' 간의 관계가 주로 프레임 됐었다면, <허스토리>에서는 나름대로 집단으로서의 '위안부' 전체를 담아내는 쇼트를 자의식적으로 많이 넣습니다. 물론 이런 것들이 다큐멘터리를 차용한 결과이기도 하지만요. 그런데 <허스토리>가 단점들이 좀 있죠. 장르 영화로서 재미가 좀 없지요. 법정 드라마로 볼 때. 그런데 저는 이 영화가 <귀향>만큼, 혹은 <아이 캔 스피크>만큼 흥행을 하지 못한 것은 이게, 한 명의 영웅 이야기로 가져가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보여요. 오혜진 선생님이 아까 김희애 씨가 약간 너무 영웅 같다고 하셨는데, 오히려 이 영화는 영웅을 만들지 않아서, 배제적 동일시 지점을 만들지 않아서 실패한 것이 아닐까 생각했었거든요. 오혜진 저는 너무 심한 영웅주의라고 생각했어요. 헤아려보니 한 신 빼고 모든 신에 김희애 씨가 나오더라고요. 그 한 신이 뭐냐면, 법정에서 증언하는 장면이 끝나고, 배정길이 아들과 대기실에서 화해하는 장면. 그때 문정숙이 '난 나가 있을 테니 두 분이 얘기 나누세요' 하며 자리를 마련해주죠. 권은선 그럼 영웅 맞네요. (웃음) 오혜진 게다가 법정에서 문정숙은 변호사, 통역사, 증언자, 목격자 등 모든 역할을 하며 원맨쇼를 구사하죠. <허스토리>는 명백하게 '위안부' 피해생존자보다 그들을 돕는 존재에게 재현의 초점이 이동한 사례라 흥미로운데, 이건 '위안부'의 증언을 '돕는' 수준이 아니라, 서사에서 '위안부'의 자리를 빼앗는 수준이었달까요? <아이 캔 스피크>는 그렇게 하지 않았거든요. 권은선 그렇죠. <아이 캔 스피크>에서 나문희 씨가 맡은 주인공이 완전한 영웅이었죠. 문정숙 캐릭터는 사실은 굉장히 신자유주의적인 주체죠. 허윤 이왕 재판을 시작했으면 이겨야 한다. 권은선 '나 돈 있어' 같은 식으로 너무나 신자유주의적인 주체로 묘사되는 게 재밌더라고요. 오혜진 실제로 GV에서 김희애 씨가 돈 뿌리는 기계로 지폐를 뿌리는 장면이 화제였어요. 허윤 팬덤이 붙은 거예요. 이 영화로. 근데 이 영화는 관객이 30만밖에 안 들었거든요. 오혜진 '문정숙'이 영화에서 모순적인 존재로 묘사되죠. 자기 여행사가 기생관광으로 돈을 벌었음을 인정하고 사과하는 모습(그걸로 '도의적 책임'을 다했다고 볼 수 있는지 확언할 수 없지만)을 보여주기도 하고, '위안소'에서 '엄마'라고 불리며 일종의 '중간관리인' 역할을 한 여성을 타자화하다가 곧 그녀 역시 피해자임을 깨닫고 사죄하는 모습도 보여주죠. 그런 반성의 제스쳐와 거대한 자본력으로 인해 문정숙은 '위안부' 운동을 주도할 자격을 가진 이로서 서사적으로 승인됩니다. 특히 문정숙이 신자유주의적인 경제주체로서 여성파워의 상징이 된다는 게 흥미로워요. '위안부' 운동을 논할 때 가장 강고한 프레임은 민족주의나 민족주의 비판론, 여성주의였는데, 이 영화는 '신자유주의적 경제주체'를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기에 가장 적합한 주체로 내세우죠. 허윤 첫 장면에서 돈 얘기하면서 시작하잖아요. 문정숙(김희애)이 부산여성경제인 연합에서 이제 여자들이 나서서 회장 해야 된다, 라고 하는데 그 장면을 보고 이 영화가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여성 관객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오혜진 문정숙이 '부자'라는 것이 매우 중요한 정체성으로 재현돼요. '위안부' 시민운동에 있어서 '경제력'을 가장 강력한 요인으로 내세우는 건 어떤 '위안부' 서사도 하지 않은 거죠. 그런 점에서 참 놀라운 영화였습니다. 최근 '위안부' 관련 학술대회가 휘황찬란한 규모로 열리는 걸 볼 때, 신자유주의적 역사 인식이 '위안부' 역사를 사유하는 데 점점 강력한 벡터로 작동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돼요. 호화로운 학술대회 장소의 대형화면에는 '위안부' 피해생존자들이 얼마나 가난하고 고독하게 살았는지를 호소하는 자료화면이 나오는데, 정작 학술대회는 대규모의 물량을 동원해 화려하기 그지없고, '위안부' 문제에 대한 논의를 어서 '영어 논문'으로 작성해서 전 세계적 공인을 받아야 한다는 주장이 들려올 때, (그 중요성을 모를 바 아니지만) 조금 위화감을 느꼈어요. 제게 '위안부'의 역사는 탈식민의 문제이기도 했는데, 어쩌면 지금 우리는 식민화된 방식으로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허윤 그 지점이 <허스토리>가 실패한 지점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분위기는 1980년대고 실제 배경은 1990년대고, 담론은 2000년대인 거죠. 그런데 그 안에서 재현하는 일본은 2000년대 일본인 거예요. 관부재판이나 송신도 님의 재판이 벌어졌던 1990년대의 일본 사회의 분위기와 2000년대 이후 일본 사회의 분위기는 다르기도 한데, 영화에서 일본은 굉장히 평면적이죠. 재판을 배척하고, 조선인 일본군 '위안부'에 대해서 타락한 여자들이라고 말하는 프레임을 그대로 갖다 비추느라고 거기서 일본사람들이 계속 악마화하잖아요. 그래서 여관에서도 못 자게 하고, 식당에 테러하고 이런 식의 그런 장면들이 사실상 2000년대에 벌어진 일인 거죠. 제가 일본군 '위안부' 관련 다큐멘터리를 처음 봤을 때 제일 놀라웠던 부분이 1990년대 일본 사회 분위기였어요. 이 일본군 '위안부' 피해생존자들이 일본에 계속 왔다 갔다 하면서 피해 증언을 하잖아요. 학교를 돌아다니면서 일본의 중고등 학생들과 전쟁과 평화에 대해서 질의응답을 하는 장면들이 제가 몰랐던 부분이었던 거예요. 제가 담론적으로는 일본군 '위안부' 투쟁이 한일의 국경과 민족을 넘어선 연대라고 알고는 있었지만, 그게 어떤 방식으로 실제 사회에서 적용되는가는 한 번도 물어보지 않았더라고요. 그랬는데 그 다큐멘터리들에서는 이 피해생존자들이 계속 일본에서 재판이나 시위를 하는 장면이 가장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런데 극영화가 되면서 그 부분들을 완전히 다 소거시키고, 일본인 지원단체도 배경으로 처리하는 식으로 위치성을 다 제거하더라고요. 아까 말씀하신 프레임을 뜯어내고 사진만 보여주는 방식이죠. <허스토리>가 트위터나 SNS에서 여성영화로서 굉장히 호평 일색이었어요. 사람들이 너무 좋아하고. 꼭 봐야 할 영화로 추천하고, 여성들의 임파워링을 도와주는 새로운 시대의 '위안부' 영화처럼 프레임이 됐었는데, 누구의 임파워링인가를 계속 되묻게 되더라고요. 김청강 영화에 재일 동포가 주로 도와주는 사람으로 나오는 게 일본 사회에 있었던 움직임을 살짝 보여줬다는 측면에서는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을 것 같거든요. 그런데 진짜 일본의 맥락을 잘 보여주지는 못한 거잖아요. '위안부' 문제가 처음 막 공론화되기 시작한 건 1980년대에 역사 왜곡 문제가 나오면서, 그 당시에는 정신대 문제로 나왔었고. 그런데 그랬을 때 그 충격이 사실은 우리에게만 있었던 건 아니고, 일본 사회에도 굉장한 충격을 줬고, 일본 사회에서 지식층들이 분노하고 그랬죠. 1980년대에 <오키나와의 할머니>(야마타니 테츠오, 1979) 다큐멘터리가 만들어진 것도 그 당시의 맥락인 거잖아요. 그러니까 사실 일본을 단순화하는 그런 측면들도 굉장히 문제가 되는 것이죠. <허스토리>처럼 가지고 오면 그 맥락을 상실해버리는 거죠. 일본에서 있었던 맥락들이 오히려 우리 스토리에 편입되는 방식으로 되어버리는 것 같아서. 저는 박수남 감독의 <침묵>(2016)이 너무 좋았고 감동적이었어요. 일본 쪽에서 있었던 운동의 맥락과 그 운동이 지속해왔던 세월도 보여주고요. 허윤 그리고 한국에서는 사실 여러 명의 피해생존자가 직접 일본에 가서 투쟁했다는 걸 잘 모르는 사람들도 많았는데, <침묵>은 그 부분을 다뤄주고 있어서 좋았습니다. 근데 이런 다큐멘터리는 많은 관객을 만나는 게 쉽지 않으니까 너무 아쉽죠. 오혜진 허윤 선생님 말씀대로 <허스토리>에는 서로 다른 역사적 시간대가 엉클어져 있고, 한국 사회는 '위안부'가 '증언의 주체'로 나설 만큼 변화했는데 일본 사회는 여전히 정체된 모습으로 묘사되죠. 이건 '위안부' 역사뿐 아니라 '위안부'의 역사를 재역사화해온 시간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한데, <허스토리>나 <귀향>은 결국 역사적 주제를 탈역사적이고 초역사적인 방식으로 다룬 거죠. '위안부' 역사에 대한 재현이 시작된 게 1950년대, 김학순 님의 증언이 1991년, '위안부' 증언자들의 법정투쟁이 2000년. 즉 '위안부' 문제는 꽤 오랜 시간에 걸쳐 여러 프레임들을 이동하며 논의돼왔습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는 알고 있죠. 같은 '위안부'라도 다양한 사례들이 있다는 것. 조선인 부모나 다른 이들에 의한 인신매매 혹은 일본군에 의한 강제연행으로 '위안부'가 된 경우도 있고, '창기'의 신분으로 '위안부'가 된 경우도 있다는 것. 중국에서 '위안부'를 경험한 이들도 있고, 오키나와 혹은 미얀마나 다른 '남양군도'에서 '위안부' 생활을 한 이들도 있다는 것. 전쟁이 끝나고 조선(북한/남한)으로 돌아온 사람도 있지만, 돌아오지 않은 경우도 있다는 것. '위안부'의 역사가 민족주의 프레임에서 논해지다가, 여성주의, 전시 성폭력 등의 프레임으로 이동하면서 국제 법정투쟁 등이 중요해진 과정 등. 그리고 이 과정에서 딜레마로 남아 있는 문제들. 이를테면, '위안부' 문제를 남성화된 민족 서사에서 구출해 가부장제 일반의 문제로 말할 때 식민지배의 문제가 사상될 수도 있다는 점, '위안부' 문제를 '전시 성폭력'으로 표준화해 전 세계적으로 논의 가능한 '보편적 문제'로 만들고자 할 때, 그 '보편성'의 언어와 논리로 '위안부'의 문제를 번역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곤경들. 그런데 이제 꽤 많은 '위안부' 재현물들이 축적됐는데도, 이 같은 '위안부' 역사와 운동에 대한 여러 초점과 전략의 역사적 변화들이 대중에게 충분히 학습되고 있지 않은 것 같아요. ''위안부' 이야기, 할머니들의 고통, 연대의 중요성' 같은 뭉툭하고 당위적인 주제들만 반복되기 때문이죠. 이 화소들로만 '위안부' 역사에 대한 상상력을 구성하니, 일종의 '지체'가 있는 듯합니다. 만약 '위안부'였다가 전쟁이 끝난 후 일본에서 쭉 살았던 사람, 즉 일본 시민들과 협동해 '일본어'로 자신이 '위안부'였음을 증언하는 '위안부' 모델을 영화로 만든다면 어떨까요? 그 영화도 <허스토리>처럼 설날 특집으로 TV에서 방영될 수 있을까요? 김청강 그런 것도 괜찮을 것 같아요. 허윤 TV 드라마 같은 데서 일본어가 많이 나오면 시청자게시판에 항의 글이 올라올 거예요. 김청강 충격을 받겠죠. 사실은 굉장히 그게 재현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역사화하는 과정에서 삭제되고 했던 부분들이 재현으로 드러나는 것 같아요. 예를 들어서, 2000년대 도쿄 법정(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 국제법정) 때도 중국은 '위안부' 보낼 때 원래 직업이 매춘부였던 사람은 삭제하고 보냈거든요. 그러니까 너무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거죠. 어떤 피해자 상만이 우리 사회에서 얘기될 수 있다는 것을, 삭제했던 역사의 과정들이 사실은 어떻게 보면 재현에서도 그런 식으로 드러나는 것 같다는 생각이 좀 들어요. 허윤 오늘 굉장히 여러 가지 고민과 질문을 던지면서 이야기했던 것 같은데요. 마지막으로 논의해볼 만한 좋은 텍스트는 어떤 것인지, 선생님들께 추천을 받고자 합니다. 이 질문은 우리 웹진을 읽으시는 많은 독자분이, "그렇다면 어떤 작품을 보란 말이냐!"라는 질문을 하실 듯해서요. 혹시 추천할 만한 텍스트, 영화 소설 뭐든 상관없을 것 같아요. 한 가지 정도씩 얘기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김청강 근데 이게 사실 대상이 누구냐에 따라서 굉장히 선별되어야 하는 측면이 있어요. 왜냐하면 기본적으로 '위안부'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는 사람들에게는 <아이 캔 스피크>나 <허스토리>를 보여줘도 사실 굉장히 충격을 받고, 또 거기에 대해서 알게 되는 측면이 있지만, 사실 어느 정도 알고 있고 한 사람들에게는 이것은 조금 너무 약한 거죠. 추천해주기에. 허윤 그런데 저는 그 지식의 격차라는 것이 생각보다 크지 않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대중 운동의 폭은 넓어졌는데 대중 담론은 여전히 여러 '결'을 담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부담 없이 얘기하셔도 되지 않을까 합니다. 오혜진 저는 1999년에 발표된 한국계 미국인 소설가 이창래의 『A Gesture Life』를 추천하고 싶어요. 한국에는 『척하는 삶』(정영목 역, 알에이치코리아, 2014)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됐습니다. 이 소설은 꼭 '위안부'를 재현한 소설로 분류되지는 않지만, '위안부'를 비롯해 식민의 유산의 문제가 현재 자신의 정체성을 사유하는 데 있어 필수적이라는 깨달음을 서사화한 작품입니다. 자신을 일본계로 알고 있는 미국인 남성 엘리트의 이야기인데요. 나중에 그는 자신이 조선인의 자식임을 알게 됩니다. 자신이 조선인의 후예라는 걸 부정하고 싶은 마음, 지배자에게 동일시하고 싶은 마음과 동시에 그것에 거리 두려는 욕망, 자신을 미국 주류 사회에 동일시할 수 있는 성공한 아시아 남성 엘리트로 정체화하려는 자기의식에 대한 성찰, 그 모든 고민과 갈등의 과정이 '후기 식민국가'의 일원으로서 겪는 역사적 경험임을 인상적으로 설득해냅니다. 두껍지만 추천하고 싶습니다. 김청강 사실은 저는 극영화는 추천하고 싶은 게 없고요. 박수남 감독님의 <침묵>, 아까 말씀드렸던. '위안부' 문제의 운동적인 측면이 국내뿐만 아니라 일본의 맥락을 잘 보여주는 것 같고. 사실 다큐멘터리들은 대부분 그래도 훨씬 낫고, 그리고 저는 여전히 <낮은 목소리>를 학생들에게 보여줍니다. <낮은 목소리>를 수업 시간에 계속 보여줬기 때문에 한 20번도 더 봤을 거예요. 저는 1995년도에 캠퍼스 상영할 때 처음 봤었는데, 그 당시에 마지막 그 시퀀스가 너무나 정말 충격이었어요. 침묵 가운데 할머니의 그 배가 보이는 장면이, 저 개인적으로 너무 잊을 수 없는 장면이기도 하고. 여전히 그만큼의 재현을 잘 못하고 있다는 생각도 드는 거예요. 그래서 사실 아직도 <낮은 목소리>를 추천합니다. 권은선 저는 앞으로의 '재현의 향방'은 사실 잘 모르겠어요. 다만 제가 최근에 관심을 좀 가지는 것을 이야기해보고자 합니다. 그동안은 계속 말하는 주체를 강조했잖아요. “하위주체는 말할 수 있는가”부터. 그런데 요즘에는 '누구에게 말하는가' '누가 듣는가'라는 게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됩니다. 영화 안에서의 동일시의 자리, 아까 얘기했던 좋은 청자의 자리, 누굴 향해서 이야기할 것인가. <아이 캔 스피크>나 <허스토리>가 한계에도 불구하고 듣는 자의 자리를 여러 가지로 바꾸잖아요. 등록된 생존자의 숫자가 점점 줄어드는 것에 대한, 그리고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조바심 같은 것들이 최근 영화에 드러난다고 했을 때, 듣는 자와 관련된 '텍스트를 통한 상속'의 문제가 중요하다고 생각됩니다. 그것은 <귀향>처럼 거리감을 없애는 방식이 아니라, 상속에 필요한 어떤 성찰과 거리감을 만들어 내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추천 작품 관련해서, 저는 개인적으로는 노라 옥자 켈러의 『종군위안부』(박은미 역, 밀알, 1997)를 너무 오래전 어렸을 때 읽은 텍스트라 다시 읽어보고 싶어요. 그런데 절판이 되어 구하기가 어렵더라고요. 흥미로운 서술 구조를 가지고 있는 작품이라 다시 꼼꼼히 읽어 보고 싶습니다. 그리고 영화 텍스트를 추천하자면 저 역시 <낮은 목소리>입니다. 마치 김학순 님의 증언 순간처럼, 이 영화는 한국영화사에 있어 중요한 모멘트였습니다. 허윤 저도 『척하는 삶』과 짝으로 『종군위안부』를 읽으면 재밌지 않을까 생각하긴 했어요. 그런데 제가 예전에 대학원, 국문학 전공이 아닌 다른 전공 친구들이랑 그 소설을 읽었었는데, 조금 어렵다고 하긴 하더라고요. 저는 송신도 님을 다룬 다큐멘터리 <나의 마음은 지지 않았다>를 추천하고 싶어요. 지금도 종종 공동체 상영을 하는 작품인데요, 일본에 사는 조선인 일본군 '위안부' 피해생존자인 송신도 님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10년간 소송을 하는 과정을 다룬 작품입니다. “사람은 믿지 않는다”라고 단호하게 접근을 거부하던 송신도 '할머니'가 양징자 씨를 비롯한 지원단체 사람들과 소통하는 과정이 무척 인상적입니다. 김청강 어떻게 보면 비평이 더 활성화되어야 하는 측면이 있는 것 같아요. 지금은 창작물로서의 공급과잉이 너무 심한 것에 비해서 거기에 대한 비평 자체가 좀 많지 않은 것 같아요. 비평이 더 활성화되어야 앞으로 나올 재현물도 조금 영향을 더 받지 않을까요. 허윤 지금까지 긴 시간 다양하고, 흥미롭고, 깊이 있는 이야기를 나눠주셔서 감사합니다. 이것으로 '대중매체로 바라본 일본군 '위안부' 재현' 좌담회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