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안계장 출신 일본 군인이 본 것과 말하지 않는 것

후루하시 아야(古橋綾)

  • 게시일2024.10.29
  • 최종수정일2024.11.06

위안계장 출신 일본 군인이 본 것과 말하지 않는 것
『우한병참』을 통해 읽는 '위안부'와 위안소

 

일본군 사령부 위안계장으로 직접 위안소 관리를 담당한 야마다 세이키치의 저술 『우한병참(武漢兵站)』은 위안소가 일본군에게 어떤 공간으로 존재했는지를 선명하게 보여주는 기록이다. 한일관계를 비롯해 일제 강점기 강제동원 피해를 연구해 온 후루하시 아야가 『우한병참』을 비판적으로 읽으며 일본군의 강력한 관리 아래 운영된 중국 우한 지역의 한커우특수위안소의 상황, '위안부'로 일한 조선인 여성들의 모습, 그리고 기록의 행간에서 유추할 수 있는 사실들을 정리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 군인들은 '위안부'나 '위안소'에 관해서 많은 기록물을 남겼다. 관련 기록물은 1990년대 일본군'위안부' 피해 생존자들의 잇따른 공개 증언으로 여성 인권 문제에 대한 인식이 확장되고 사회적인 주목을 받은 후 실상을 조사하기 위한 중요 사료로 주목받았다. 

1978년에 출판된 야마다 세이키치(山田清吉)의 저술 『우한병참(武漢兵站)』도 그 중 하나이다. 이 책은 중국 우한(武漢) 한커우(漢口) 지역에 있던 '한커우특수위안소'를 중심으로 한 대규모 '위안소 거리'를 상세히 묘사한 것으로 유명하다. 저자인 야마다는 일본군 사령부 위안계장으로 직접 위안소 관리를 담당했기 때문에 위안소가 일본군에게 어떤 공간으로 존재했는지를 선명하게 보여준다. 이를 통해 유곽 같은 겉모습으로 일본군의 강력한 관리 아래 운영된 위안소의 상황을 엿볼 수 있다. 이 글에서는 『우한병참』에 담긴 기록물을 통해 당시 위안소 상황과 '위안부'가 된 조선인 여성들의 모습을 살펴보려 한다.

 

20개 위안소에 여성 280명이 있었던 위안소 거리,
한커우특수위안소

1900년생인 야마다 세이키치는 1941년 10월부터 일본이 패전할 때까지 중국 우한병참사령부에서 부관(副官)으로 근무했다. 그는 우한에 도착한 지 한 달 후에 위안계장으로 임명돼 모든 위안 업무를 담당하게 되었다. 위안 업무는 부대에서 지내는 군인들의 복리후생에 관한 일을 총괄하는 것으로, 예컨대 식당을 비롯해 요정, 유기장, 극장, 도서관, 특수위안소 등에 관련된 업무가 포함된다. 저자는 "그 중에서도 가장 우려스러운 곳은 위안소였다"고 설명한다(61쪽).

 

한커우특수위안소는 일본군이 한커우에 입성하는 1938년 11월에 앞서 설치가 계획, 실행돼 입성하자마자 영업을 시작한 곳이다. 야마다가 한커우에 부임한 1941년에는 이미 자리가 잘 잡혀있었다고 판단할 수 있다. 거리 이름을 따서 지칭리(積慶里)라고 부르기도 한다. "한커우특수위안소(지칭리)는 큰 거리에서 옆으로 길 하나 들어간 곳에 있고 높은 벽돌로 둘러싸여 외부와 차단되어 있었다. 입구에 들어가자 왼쪽은 순사 대기소, 업주조합 사무실이 나란히 있었다"(77쪽). 또한 "순사 대기소는 군 경비대에서 경찰이 파견되어 필요에 응하여 출입을 단속했다."(82쪽) 따라서 여성들이 그 장소에서 쉽게 빠져나갈 수 없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당시 위안소는 일본인이 경영한 9개, 조선인이 경영한 11개 등 총20개가 있었고, 여성들은 일본인이 약 130명, 조선인이 약 150명이 있었다고 전하고 있다. 벽돌 안쪽에는 위안소뿐만 아니라 연못이나 작은 공원도 있고, 여성들은 공원에서 라디오 체조도 했다. 또 사망한 여성을 위한 공양탑도 있었다(77쪽).


 

위안소에는 여성들의 이름과 사진이 나란히 표시돼 있고, 군인들이 여성을 골라 지명해서 들어가는 방식이었다.(78쪽) 이용 시간은 병사는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 하사관은 저녁 8시까지, 장교는 그 이후로 정해져 있었다.(82쪽) 장교는 숙박도 가능했다. 군인들이 서로 한꺼번에 몰리지 않게하려는 배치로 보이는데, 여성들에게는 쉬는 시간이 없었음을 의미한다. 여성에 대한 성병검사는 매주 1회 군의관이 직접 담당했다.(야마다는 군의관이 아니어서 성병검사에 관한 기술은 거의 나오지 않는다. 성병검사에 대해서는 야마다와 같은 시기에 한커우병참에서 군의관으로 근무했던 나가사와 겐이치(長沢健一)의 『한커우위안소(漢口慰安所)』(1983)에 자세하게 나온다.) 위안소에서 벌어들인 금액은 매일 병참에 보고해야 했었다. 병사, 하사관, 장교로 구분해 어떤 여성이 군인 몇 명을 상대했는지도 상세히 보고했다.(82쪽) 병참에서는 보고된 결과를 보고 혼잡을 피하기 위한 대응을 했다고 한다. 군 생활의 중요한 요소로 '위안소'가 자리매김하고 있었던 것을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다

야마다는 여성들이 하루에 상대하는 인원 수를 대략 병사 6명, 하사관 1명, 장교 1명 정도라 생각했다. 그렇게 한 달 동안 27~28일을 일할 경우 약 1년 6개월 후에는 전차금을 갚을 수 있을 정도의 금액을 벌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84쪽). 하지만 실제로 전차금을 갚고 집으로 돌아간 여성의 사례는 나오지 않는다. 야마다가 위안계장으로 일한 기간이 3년 반 가량이라 그렇게 위안소를 벗어난 여성의 에피소드가 나올 수 있는 데도 말이다. 여기서 읽어낼 수 있는 부분은 여성들은 전차금이라는 거짓 구조에 묶여 인권 침해를 계속 당해야만 했었다는 것이다.

당시 병참은 여성들의 이력을 모두 파악하고 있었다. 한커우에서 일하려면 병참에서 허가를 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위안부가 도착하자 업자와 함께 필요서류를 가지고 병참 위안담당을 찾아온다"(86쪽). 위안담당은 서류를 확인하고 헌병대와도 이력서를 공유했다. "조선에서 온 자는 (공창) 전력도 없고, 나이도 18, 19살 정도인 젊은 여자가 많았다. '힘든 일인데 할 수 있냐?'고 묻자 미리 업자가 잘 말해놓았는지 그녀들은 일은 납득해 왔다고 모두 끄덕인다"(86쪽). 야마다는 실태조사를 위해 "출생지, 연령, 전력, 학력, 병력, 가족구성, 전차금 등을 통계"(86쪽)로 정리했다. 이와 관련된 자료가 남아 있다면 실태를 알고 연구하는 데 매우 큰 도움이 되었을 텐데, 아쉽게도 우리는 볼 수 없다. 모아 놓은 자료들은 패전 후 일본군의 명령으로 모두 불태워졌기 때문이다(288쪽).

 

 

한커우에서 지낸 조선인 여성 '위안부'들

그러면 한커우에서 지낸 여성들의 상황은 어땠을까. "대부분의 '위안부'는 극심하게 가난한 가정에서 자랐고, 심지어 조선인 중에는 글을 전혀 읽을 수 없는 교육 수준이 아주 떨어진 이도 있었다. 혹은 부모가 없거나, 남자에게 버림받는 등 불행한 이가 많았다. 그 중에는 부모나 동생들을 위해 희생하여 스스로 온 이도 있었다"고 한다(81쪽). 

앞서 소개한 대로 야마다는 여성들이 '위안소'에서 할 일을 알고서 왔다고 기록하는데, 그 주장은 의심스럽다. 예컨대 영화 「낮은 목소리1」(1995, 변영주 감독)에도 나오는 하상숙은 바로 여기서 지낸 조선인 여성인데, "관공서 같은 곳에 찾아가 허가를 받았다. 일본사람들은 여자 나이가 열여덟 살이 넘어야 허가장을 줬기 때문에 주인은 나에게 열여덟 살이라고 말하라고 했다"고 이야기한다.[1]  현대 성매매 알선 방식을 봐도 성매매 유입 전에 성매매 업소에서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 알고 들어가는 여성들은 드물다. 게다가, 야마다는 높은 지위에 있는 나이 많은 일본 군인이며 낯선 남성이다. 따라서 야마다 앞에서 여성들이 어떤 일을 하는지 잘 알고 있다고 대답했다 해도, 여성들이 실제 '위안소'에서 어떤 일을 겪을 것인지 미리 알고 있었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야마다는 인상에 남는 여성들의 에피소드를 기록했는데 그 중 조선인 여성들도 나온다. 당시 생활을 엿볼 수 있어 소개한다. 

고바나(小花)는 급성복막염으로 장기 입원했다가 끝내 사망했다. 고바나는 "어머니는 일찍 사망하고, 아버지와는 연락두절. 아직 스무 살도 안 되는데 고향에 아이를 하나 두고 온" 조선인 여성이었다. 고바나를 위해 위안소에서 거행된 장례식 때는 위안소 여성들이 모두 조선 옷을 입고 앉아 있는 모습을 목격했다.(97쪽)

 

미치코(美千子)는 호적이 16세로 되어 있어서 영업 허가를 받지 못했다. 시골 관습으로 출생신고가 늦었던 뿐이고 실제로는 18살임을 주장하는 업자 말을 믿고 야마다는 영업을 허가해 주었다. 야마다는 그때까지 이름이 없던 이 여성에게 미치코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100쪽)

 

착하고 지적인 얼굴을 했던 사유리(小百合)는 2세 때 어머니가 사망하고, 심지어 아버지한테서도 버림받았다. 결국 이웃 여성이 사유리를 키워줬다. 사유리는 어떻게 해서든 자립하고 싶다고 생각해서 일본어 타이핑을 배우고 도쿄에 가서 은행에서 일했다. 그러나 키워준 여성이 자꾸 돈을 요구하니 은행을 그만두고 경성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키워준 여성은 모르핀 중독자가 되어 있었고, 집에 돈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결국 돈을 벌기 위해 '위안부'를 지원해서 왔다. 당시는 '위안부'라고 안하고 다른 일을 소개해준다 해서 온 사례도 많았다고 설명한다.(102쪽)

 

성병이 들어 병원에 입원했던 미사코(美佐子)와 그녀를 문병하는 동료들의 모습을 야마다는 봤다. 미사코와 동료들은 레코드를 들으며 놀고 있었다. 야마다는 그녀들과 함께 레코드를 듣게 되었는데 김갑자(金甲子)의 '夏四月'이라는 음악이 마음에 들었다고 하니 미사코는 야마다에게 그 레코드를 주었다. 그 레코드는 패전의 혼란 속에서 어느날 잃어버렸다.(106쪽)

 

대구 출신인 다마미(珠美)는 양쯔강(揚子江)에 뛰어들어 자살했다. 저녁이 되어도 다마미가 돌아오지 않자 업자가 찾으러 다녔다. 다리에서 강을 보고 있던 다마미가 업자의 모습이 보이자 강으로 뛰어들어 버렸다. 나중에 동료들은 다마미가 병이 들어 몸이 아팠다거나, 친하게 지냈던 병사가 다른 여성한테 갔다는 소문을 듣고 말싸움을 했고, 그가 다마미를 찾아오지 않게 된 것에 괴로워 했었다는 이야기들을 했다.(107쪽) 

 

 

 


여성의 목소리가 빠진 기록물의 한계

『우한병참』에는 가장 가까이서 한커우특수위안소를 지켜봤던 야마다가 '위안소'에서 일어난 일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지 알 수 있는 대목도 있다. 야마다는 위안소를 좋은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것은 야마다의 상사인 호리에 사다오(堀江貞雄) 사령관도 같은 의견이었다. 호리에 사령관은 "'위안소'는 필요악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지만 그 폐해를 조금이라도 감소할 방법을 생각하자"(60쪽)고 야마다에게 이야기한다. 호리에는 전쟁 후에 출판한 수기에서 위안소는 장병들에게도 나쁜 영향을 주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원래 전쟁터에 오기 전까지 완전히 순결을 지켰던 젊은이들로 하여금 전쟁터에 이러한 시설이 있기 때문에 환경의 힘에 지배되어 여기로 향하게 한 사례가 오히려 많다는 게 실상"이라고 적었다. 그래서 위안소는 유지하되 다른 건전한 오락을 제공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63쪽, 호리에 사다오 『목소리 없는 전선(声なき戦線)』에서 재인용) 호리에는 또 여성들에 대한 위안소 업자들의 착취를 없애고, 여성들이 돈을 벌게 해 빨리 전차금을 갚아 집으로 돌아가게 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보았다.(64쪽, 앞의 책에서 재인용) 

이러한 생각을 이어받은 야마다는 도서관이나 유기장을 운영해 건전한 오락을 제공하려고 노력하거나, 업자들이 제출하는 기록을 조사해 수상한 내용이 없는지 확인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노력은 위안소 규모를 줄이지도, 업자들에 의한 착취를 없애지도 못했다. 그 노력을 비웃는 것처럼 한커우특수위안소는 끝까지 번성했다. 야마다는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물론 그것이 군의 방침이었다 해도 매춘임에 틀림없고 여성 인권을 무시하는 것이라는 건 말할 필요도 없다. 위안계장을 명령 받은 나는 전쟁 속 필요악이라는 병참사령관의 생각에 따를 수밖에 없었고, 그 체제 안에서 보다 나은 환경을 만드는 것, '위안부'들이 하루라도 빨리 자유로운 몸이 되는 것을 원하고 거기에 얼마 안 되는 편안함을 주는 것밖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러나 성스러운 전쟁(聖戦)이라는 미명하에 악랄한 업자의 착취에 눈을 감고 인신매매를 도와준 공범자가 아니냐는 비난을 받는다면 나는 벌을 달게 받아야 한다"(299-300쪽)

 

『우한병참』을 통해 위안소를 관리했던 40대 일본인 남성 장교 야마다 세이키치 눈으로 본 '위안부'의 모습을 읽어보았다. 자신의 책 속에서도 언급했듯이 야마다는 여성들의 실제 생활은 보여주지 못했고, 그녀들이 어떤 마음으로 살아 갔는지 알 수 있는 입장도 아니었다. 즉 일본 군인의 눈에 비친 '위안부' 여성들의 모습일 뿐, 실제 여성들의 경험을 묘사한 것이 아니라는 점에 주의해 읽을 필요가 있다. 

그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부분을 마지막으로 소개한다. 패전 후 군인들이 일본으로 도망나갈 때, 야마다는 여성들의 귀국에는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았다. "지칭리 여자들은 언제 고국에 돌아갔는지", "부디 모두 행복한 후반생을 보내줬으면 한다"(298쪽)고 '무책임하고 건방진' 태도를 남겨놓았을 뿐이다. 실제로 하상숙은 우한을 떠날 수 없었다. 성적인 착취를 계속 당하다가 언어도 통하지 않는 이국에 버림받은 여성에게 어떻게 행복한 삶을 찾으라고 하는가. 하상숙 뒤에는 우리가 못 만났던 많은 여성들이 있다

『우한병참』을 비롯한 일본군 장병들에 의한 기록은 '위안소' 운영 실태를 알려주는 중요한 자료로 이미 널리 활용되어 왔다. 이러한 자료를 다시 읽을 때 이 자료가 말하지 않는 것, 보지 못했던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면서 읽어야 함을 강조해 둔다.

 




 

각주

  1. ^ 서울대 인권센터 정진성 연구팀, 『끌려가다, 버려지다, 우리 앞에 서다1』, 2018, 274쪽.
글쓴이 후루하시 아야(古橋綾)

중앙대학교 사회학과에서 사회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비롯해, 한국과 일본에서 시대를 넘어선 성폭력, 성착취 문제를 연구해왔다. 현재 일본 이와테대학(岩手大学) 교육학과 사회과교육과 부교수로 재직 중이다. 한국어 저작으로는 『비판적으로 읽는 일본 군인 회고록 속 ‘위안부’』(동북아역사재단, 2021), 논문으로는 「포스트식민주의 페미니즘 관점에서 본 일본군 ‘위안부’ 문제 인식: 2014년 일본 신문 사설 분석을 중심으로」(한국여성학회 『한국여성학』 33(1), 2017)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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