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군 '위안소'는 130년 전부터 있었다
흔히 일본군‘위안부’ 제도는 1932년 중국에서 일어난 제1차 상하이 사변을 계기로 만들어졌다고 알려져 왔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19세기부터 이미 해외 침략에 나선 일본은 전쟁 수행과정에서 군인을 통제하기 위해 여성의 성을 동원해 왔다. 일본 아오야마가쿠인대학 명예교수 송연옥은 여러 관련 기록을 바탕으로 상하이 사변 훨씬 이전부터 일본이 국가 차원에서 여성의 성을 정치적으로 이용해 왔다고 지적한다.
부국강병과 노동자를 회유하기 위해 설치된 국영 유곽
일본군이 전쟁 수행을 위해 만든 일본군‘위안부’ 제도는 대개 1932년 제1차 상하이 사변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주장에 특별한 이견이 없어왔다. 여기서 드는 의문 하나. 일본은 이미 청일전쟁, 러일전쟁 등 많은 해외 침략전쟁을 저질렀는데, 그렇다면 그 당시에는 '위안부' 제도가 없었을까?
19세기 중엽 당시 자본주의가 덜 발달했던 제국 일본은 그 취약점을 군사주의로 메우려 하였다. 1868년 메이지 정부는 부국강병(富国強兵)이라는 구호 아래 자원 확보와 남하하는 러시아에 대항하기 위해 홋카이도 개척에 나섰다. 이때 노동력으로 동원된 죄수들을 회유하기 위해 설치된 것이 국영 유곽이었다. 이 기획을 정부에 제안한 이는 개척사(開拓使) 장관 구로다 기요타카(黒田清隆)로, 그는 개척사가 자금을 융자한 다음 도쿄 요시와라 유곽의 성매매 업자에게 유곽의 경영을 맡기려 하였다. 그러나 1872년의 ‘예창기해방령’과 1873년의 경기 불황으로 개설 직후 바로 폐업하고 말았다.
‘예창기해방령’은 서구 열강들이 예창기에 대해 인신매매된 노예라 비난하자 메이지 정부가 그 대응책으로서 빚 때문에 몸이 묶인 예창기들의 해방을 지시한 일이었다. 이로 인해 일부 예창기가 해방되었으나, 여성들을 옭아맸던 ‘전차금(前借金. 나중에 갚기로 하고 미리 빚으로 쓰는 돈) 제도’와 유곽은 그대로 남았다. 오히려 메이지 정부는 성매매 제도를 통제할 절호의 기회라 판단해 철저한 성병 검사 실시, 세금 징수 등 공창제를 근대적으로 개편했다. 즉 유녀들을 착취당하는 존재가 아니라 업자에게 공간을 빌려서 자유영업을 하는 자로 보고 그 형식을 바꾼 것이다. 가시자시키(대좌부(貸座敷))와 창기(공창)란 신조어가 생긴 것이 이 즈음이었다. 전차금은 높은 이율로 계속해서 창기의 몸을 구속했다.
자본이 빈약한 일본에서 성매매업은 기간산업이라 해도 될 정도로 경제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일례로 홋카이도 삿포로시의 경우 성산업에서 납부되는 세금이 지방세의 44%를 차지했다. 일본의 근대 공창제는 국가 책임을 은폐하기 위해 각지방으로 관할권을 넘겼다. 그러다 1900년부터는 업자의 관리만 각 지방이 맡고 창기에 대해서는 국가가 통일적으로 관리하기 시작했다.
개항한 부산에 요시와라 유곽이 문을 연 이유
1876년, 일본은 운요호가 국기를 게양했음에도 조선이 포격했다고 억지를 써서 불평등한 강화도조약을 조선에 강요했다. 조약 체결 당시 전권변리대사로 조선에 온 이가 개척사 장관 구로다 기요타카였다. 그리고 1880년, 그가 도쿄에서 단골로 드나들던 유곽인 요시와라의 나카고메루가 부산에 상륙했다. 개항 직후 어수선한 시기에 나카고메루가 부산이라는 낯선 토지로 올 수 있었던 데에는 구로다의 보증이나 요청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나카고메루의 업주였던 아카구라 토키치(赤倉藤吉)는 ‘상업’을 한다는 명목으로 3년 기한의 여권을 얻어 부산으로 왔다[사진 1]. 당시 그는 수하에 있던 창기 10명을 빚을 탕감해 준다는 조건으로 부산에 데려왔다. 부산에서의 성매매는 일본의 ‘가시자시키 영업규칙’이 준용되어 거류지 내에서 공창제가 실시되기 시작했다. 아카구라는 3년 후인 1882년 일본으로 귀국했다.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으로 조선 내 일본의 입지가 약화되고 조선이 잇따라 조약을 체결한 서구 열강과 대면하며 국가적인 체면을 계산하게 된 일본은 부산에서 공창제를 중지시키고, 인천에서는 애초에 가시자시키 영업을 허락하지 않았다.
청일전쟁에 숨겨진 조선전쟁 그리고 성폭력
이후 일본은 세력을 만회하기 위해 군비를 확장하면서 대륙에서의 전쟁을 준비했다. 그런 일본에게 동학농민전쟁은 천재일우의 기회나 다름없었다. 1894년 봄부터 거세진 동학농민의 봉기를 진압하기 위해 조선 조정은 청나라에 출병을 요청했다. 청나라가 파병하자 ‘제물포조약’을 근거로 일본도 군대를 파병했는데, 규모가 청나라보다 3배가 넘었다. 외세의 침략을 경계한 농민군은 정부와 화약을 맺고 해산했고, 조선 정부는 두 나라에 군대를 철수하라고 통보했다. 그러나 일본은 이에 응하지 않고 오히려 내정 간섭의 강도를 높이다가 결국 경복궁을 점령하고 전쟁을 본격화하였다.
『일청전투실기』[사진 2]라는 자료는 당시의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 이 책에는 충청남도 아산에서 청나라 병사들이 조선의 민가를 습격하고 여성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장면이 담겨 있다. 그러나 이 그림은 시각적으로 청나라 병사들의 만행을 보여주고 일본이 정의롭다는 것을 각인시키려는 정치적인 함의가 담겨 있다.
그림과 달리 일본군이 만행의 주인공이었다는 사실은 일제 육군 창설자이자 일본군 최고 책임자인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県有朋)의 글을 통해 알 수 있다. 그는 『일청전쟁미담』이라는 책에서 ‘군부가 민가를 불태우고 재산을 약탈하고 부녀를 능욕하는 일이 있으니 이런 일들을 엄벌로 다스릴 것은 물론이고 이를 감독해야 할 상관도 역시 책임을 물을 것이다.’라고 썼다. 청나라를 향해 북상하면서 성매매와 성폭력을 자행한 일본군은 조선 남부지방에서는 농민군을 대량 학살하고 여성에 대한 성폭력도 서슴지 않았다. 1895년 청일전쟁이 종결되면서 그 전리품으로 일본은 타이완을 점령하게 되었는데, 일본은 타이완에 주둔하는 일본군을 위해 ‘성적위안시설’을 개설하였다. 1896년 타이베이현령(台北縣令) 갑 제1호 ‘가시자시키 및 창기 취체규칙’의 제정은 타이완에서 공창제가 확장되는 계기가 되었다.
특별요리점의 발명
19세기 말 일본이 타이완에서처럼 조선에 노골적으로 공창제를 실시하지 못한 이유는 조선에 서구 열강의 눈이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조선은 주요 11개 국가와 수호통상조약을 맺었고 서울에는 9개국의 공사관이 있었다. 을미사변, 즉 명성황후 시해사건을 목격하고 그 사실을 영문 잡지에 실은 이도 서울에 주재했던 서양인이었다. 이런 정세를 의식한 일본이 공창제를 대신해 발명한 것이 ‘특별요리점’이었다. 요리점에서 고객을 접대하는 여성을 ‘예기’ 혹은 ‘작부’라고 부르고, 그 안에서 이뤄지는 성매매를 은폐하며 민간 업자에게 부도덕성의 책임을 떠넘긴 것이다.
가즈키 겐타로가 펴낸 『조선국 부산 안내』(1901)에 실린 광고[사진 3-2]를 보면 요리점으로 기재하고 있지만 옆에 가시자시키, 즉 유곽이라고 나란히 적어 놓아 성매매를 숨기지 않고 있다. 더 주목해야 할 것은 러일전쟁 이전에 이미 일본인이 조선 여성을 ‘고용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가시자시키가 아닌 요리점이라 할 때 장점은 무엇이었을까. 대표적인 것이 세수입의 증가였다. 요리점은 가시자시키보다 세율이 높아서 고액의 세수입을 얻을 수 있었다. 겉으로는 공창제를 금지한 것처럼 꾸며 놓았지만 더 많이 얻게 된 이익을 바탕으로 공창제를 재개할 수 있는 정치적 상황을 기다렸다고 해석할 수 있는 대목이다.
러일전쟁과 군의들이 증언하는 '위안소' 개설
명성황후 시해사건 2년 후, 조선은 대한제국을 선포했다. 그러나 일본은 조선 지배에 방해가 되는 러시아를 상대로 러일전쟁을 일으키고, 양국 사이에서 중립을 선언하는 대한제국을 군사력으로 짓밟아버렸다. 서울을 점령한 일본은 ‘한일의정서’를 대한제국에 강요하였는데 그 내용은 전쟁에 필요한 인적・물적 자원의 제공, 군용지의 수용(収用) 등 한국의 주권을 침해하는 것이었다.
러일전쟁 중에 일본은 군대가 운용하는 ‘성적위안시설’을 설치하였다. 제4군 군의 부장을 역임한 후지타 츠구아키라(藤田嗣章)는 회고록 『전역의 회고와 전후의 경영(戦役の回顧と戦後の経営)』(1934)에서 다음과 같은 중요한 증언을 하였다.
여기서 후지타는 ‘위안소’라는 말은 안 썼지만 시설이나 관리 방법이 우리에게 기시감이 있는 ‘위안소’와 같다. 또 후지타는 그런 시설이 1895년 타이완을 점령했을 때부터 있었다고도 썼다.
러일전쟁 중 최대의 전투가 펼쳐졌던 봉천(현 심양) 부근에서 근무했던 군의관 나카무라 료쿠야(中村緑野) 역시 위안소에 관해 언급하였다. 그 내용은 후지타가 쓴 것과 비슷하지만 자신들이 병사를 관리하려고 만든 것임에도 병사에 대한 군의로서의 멸시감이 담겨있다.
주목할 것은 글을 쓰는 군인에 따라 사용한 명칭이 다르다는 점이다. 후지타는 사창제라 하고 나카무라는 매소제, 다른 군인은 공창제라고 썼는데, 이 시기에는 같은 시설이라도 호칭이 일정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명칭만 보고 선입견으로 해석하면 안 된다. 후지타와 나카무라의 글이 실린 회고록은 1934년에 간행되었는데, 만주사변 이후 일본군에게 참고하라고 엮은 것이었다.
‘위안소’는 가설 목조건물일 때도 있었으나 기존 건물을 그대로 사용하는 경우도 있었다. [사진 4]의 좌측 그림은 봉천 북쪽 국경의 문인 법고문(法庫門)에서 일본 병사들이 여성들을 고르는 광경을 묘사한 것인데, 그 장소가 관제묘, 즉 중국 삼국시대의 영웅 관우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이를테면 한국의 을지문덕이나 이순신을 모시는 사당에 위안소를 차린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런 부끄러운 만행을 현지 사람들이 어떤 심정으로 바라봤을지 짐작할 만하다.
이런 임시적인 것뿐만 아니라 일본군은 새로운 시가지를 조성하여 유곽을 건설하기까지 했다[사진 5]. 성매매 업소를 한자리에 모아 놓는 것이 단속하기에 효율적이고 위생상으로도 바람직하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1904년 안동(현 랴오닝성 단동)에서 개설한 유곽은 '유원지' 라고 이름 붙였다. 유곽의 여성에게는 성병 검사를 정기적으로 실시하고 성병 환자는 입원시켜 치료받게 했다. 여성의 영업 허가 연령은 일본보다 두 살 어린 16세였는데, 16세 미만이라도 성병 검사만 받으면 영업을 묵인했다. 1905년 작성된 규칙을 보면 예기 4엔, 작부 3엔, 중거(仲居. 나카이. 여관이나 요리점에서 고객을 접대하는 여성) 2엔, 하비(下婢. 하녀)1엔씩 매달 병참사령부에 세금을 납부하게 했다. 이는 군대가 포주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 유원지는 군정(軍政)에서 민정(民政)으로 이양된 후 민간인 업자에게 불하되었고 군인이 아니어도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이 무렵 작부는 연령 규정이 없었으나 1930년부터 만 17세로 정해졌다.
‘위안부’ 제도는 식민지 성관리 정책의 연장선
러일전쟁 당시 일제는 한국을 병참기지로 삼으며 한국주차군을 편성하였다. 이후 1907년 고종의 퇴위와 한국군의 해산에 반발한 의병들이 일제에 항쟁하자 이를 진압하기 위해 일제는 더 많은 군대와 헌병을 파견하였다. 의병 투쟁을 어느 정도 진압한 후 1908년 제정된 ‘기생단속령’과 ‘창기단속령’은 조선에서 성병검사를 포함한 성관리 정책을 추진하기 위한 발판이었다. 이는 일본 병사들을 위한 조치였으나, 조선인들의 반일 감정을 고려해 마치 조선인들이 성병이 만연할 것이 두려워서 스스로 성관리를 요구한 것처럼 꾸몄다. 이후 서울 외의 지역에도 차츰 일본인을 상대로 한 성관리 규칙을 만들었고 1916년에 ‘식민지 공창제’를 전면으로 도입했다. 당시 일제가 제정한 성관리 내용을 보면, 일본 내지의 공창제와 달리 창기 허가 연령을 제국의 서열에 맞게 규정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즉 일본 ‘내지’는 18세, 조선은 17세, 관동주와 타이완은 16세로 정해 여성들을 식민지나 전쟁터로 인도한 것이다. 이렇듯 일본제국의 성관리 정책은 상황에 따라 명칭과 내용을 바꿔가면서 실행되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국가의 책임은 안 보이게 하는 것이었다는 점을 놓쳐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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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송연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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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일본 아오야마 가쿠인대학 명예교수이다. 문화센터・아리랑 관장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반세기 전 기생관광이 한창일 때 김포공항에서 본 일본 남자의 모욕적인 태도에 분노를 느끼고 나서 제국의 성 정치를 밝히려고 연구해왔다. 삶이 여의치 않아서 긴 공백기간이 있었으나 여전히 그 과제를 붙들고 연구를 계속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