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투텐? 원투원!
“아. 아… 여보세요 여보세요.”
“렛 그랜마 리 카운트 텐.”
“할머니, 하나부터 열까지 세보시래요.”
“하나, 둘, 셋…”
10월 25일 아침.
이용수 선생님 댁 거실은 마이크 테스트가 한창이다.
영국 다큐멘터리 취재진이 선생님을 촬영하기 위해 방문했다.
카메라, 마이크 기술 테스트. 연출자와 카메라맨이 촬영 준비에 여념이 없다.
이 틈에 옷매무새를 단단히 여민 선생님은
뒤에 있는 프로듀서의 팔을 톡톡 두드린다.
“<아이 캔 스피크> 봤어요?”
“노.. 이즈 잇 다큐멘터리?”
느닷없는 선생님의 말 걸기에 선생님 허리에 마이크를 채우던 프로듀서가 관심을 보인다.
“노, 잇츠 무비.”
통역사가 선생님 대신 답한다. 미 하원에서 ‘위안부’문제 관련 결의안(HR121)을 통과시킨 이야기가 담긴 이용수 님에 관한 영화라고.
“와우~! 한 번 봐야겠어요.” 프로듀서의 대답을 받아낸다.
탁월한 방송 코디네이터의 감각.
원투텐? 하나부터 열까지 갈 것도 없이 ‘원투원’으로 치고 나오신다.
당신을 취재하러 왔다면 가장 중요한 이야기 아닌가. 엄한 곳으로 에둘러 가기 전에 당신이 생각하는 중요 포인트를 콕 짚으신다.
어떤 코디네이터도 능가하는 감각적인, 진격의 코디네이트. 이건 시작에 불과했다.
수야
선생님은 본인의 침실 문을 스윽 열어 주신다.
화사한 병풍이 눈에 들어온다.
침대 머리맡에 펼쳐진 병풍 속에는 서예를 즐기고, 한가로이 나물을 캐고, 바람결에 연을 날리는 어린 수야(용수의 ‘수’. 어린 시절 가족들이 부르던 아명)가 있다.
“하도 원통해서 내가 처녀 적에 이랬다고 이걸 맞췄어.”
프로듀서는 연 날리는 모습이 제일 좋다고 했다.
다들 그림에 넋을 놓고 있는 와중에 선생님은 방의 형광등을 탁! 켜신다.
‘조명빨’도 놓치지 않는 방송 전문가의 면모.
비비안나
다음엔 화장대 거울에 달린 십자가 목걸이로 이동하신다.
이 묵주로 말할 것 같으면 무려 현직 교황 프란시스의 선물이다.
교황님께 직접 선물을 받은 사람이 지구상에 몇이나 되겠는가.
그 진귀함에 모두가 놀랄 즈음, 십자가에 입 맞추시고 고개를 들어
“비비안나”
세례명 투척.
“오, 뷰티풀.”
프로듀서의 감탄사는 어쩌면 예견된 수순일 뿐.
이것이 끝인 줄 알면 쑤야 선생님을 띄엄띄엄 안 것이다.
초록색 파우치 안에 고이 접힌 하얀 미사포를 살포시 꺼내신다.
카메라도 없이 속출하는 방송‘분량’들.
프로듀서는 이 모든 것을 나중에 다시 촬영해도 괜찮겠냐고 여쭙는다.
“찍어야지. 기도하는 것도 찍어야지.”
그러라고 준비해 두신 것 아니겠는가.
단박에 촬영 하이라이트와 ‘분량’까지 코디네이트 완료!
곱은 거
이번엔 야외촬영이다.
촬영진을 태운 승합차는 시내 한복집 앞에 멈춰 섰다.
‘금오실크’.
선생님이 자주 가시는 한복집이다.
댁에서 가까운 이곳에는 “코리안 드레스 뷰티풀-”을 외치는 또 한 명의 진격의 캐릭터가 취재진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용수 선생님과 한복집 사장님은 방송을 위한 촬영 스케치에는 간단히 임하셨다.
“곱은 거(=고운 것) 함 입히볼까?”
“응.”
의기투합한 두 사람은 영국서 온 프로듀서에게 대뜸 한복을 입어보라고 종용하신다.
“노노노노. 쿄오와 다분 이소가시이까라.”
일본어를 잘하는 영국 여성 프로듀서는 당황하여 영어와 일본어를 섞어가며 오늘은 바쁘다고 완곡하지만 완강하게 거절했다.
“이소가시꾸 나이. 다이조부.”
흔들림 없는 ‘그랜마 리‘의 단호한 “다이조부”(=괜찮다)로 게임 오버.
한사코 겉옷만 걸쳐보겠다던 프로듀서는 ’치마저고리‘부터 입어야 된다는 그랜마 리의 성화에 결국 탈의실로 끌려간다.
“빨리 나오세요~~!”
“아니야. 천천히~~!”
탈의실 앞에서 목을 빼고 조르는 그랜마 리와 ‘천천히~’를 외치는 사장님의 우당탕탕 주문들은 통역하지 않는 것이 상책이다.
“촥! 촥!”
양쪽으로 커튼이 걷히고 프로듀서가 나타났다.
“와~ 이뻐 이뻐…!”
가게 안은 물개박수와 탄성으로 한층 더 소란스러워졌다.
진분홍 치마와 은박이 수놓인 흰 저고리, 화사하면서도 고급스러운 한복이 프로듀서와 썩 잘 어울린다.
자신들의 연출작에 뿌듯해진 두 총괄 연출가들은 “사진 좀 찍어두자”며 기념 촬영에 여념이 없으시다.
오마이갓
다음 행운의(?) 코리안 드레스 모델은 카메라맨.
순순히 무장해제를 선언했다.
타국에서의 촬영 첫 날. 취재진의 긴장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두 연출가 앞에서
카메라맨은 온 몸을 두른 우주복 같은 촬영 장비를 하나씩 해체하는 중이다.
남자 한복은 처음 보는 것이라 기대된다며 프로듀서도 이 ‘장꾸’(장난꾸러기) 대열에 합류했다.
피할 수 없다면 즐겨야 한다.
생각만해도 우섭다
“하이고 우섭다. 생각만 해도 우섭다.”
카메라맨이 옷을 갈아입는 동안 선생님은 연신 “재밌다”를 연발하신다.
카메라맨이 키가 큰데 과연 옷이 맞을지 궁금하다고 프로듀서도 거든다.
피할 수 없다면 즐겨야 한다.
이윽고 바지저고리에 도포까지 성장(盛裝)을 한 카메라맨이 등장했다.
“모자! 머리 머리, 빨리 빨리.”
패션의 완성은 갓이다. 사장님의 주문에 직원이 이리 뛰고 저리 뛰어 갓과 옷 여밈 장신구들을 챙겨 내온다.
“까르륵 꺄르륵”
“어메이징~”
낙엽만 굴러가도 웃음이 터질 듯한 명랑한 소용돌이.
“우째 그게 또 맞는 게 있노.”
다들 반신반의했던 의혹은 걷히고, 키 큰 카메라맨에게 맞춤한 듯 딱 떨어지는 핏.
갓을 쓴 그의 모습이 어엿하다.
“양반, 양반”
어느 틈에 그의 옆에 선 선생님은 양반의 복장이라며 기념 촬영 중간 중간에 적절한 해설을 더하신다.
메즈라시이
프로듀서가 방금 찍은 사진을 보여준다.
“메즈라시이…”
“에-엔니”
선생님은 사진을 가리키며 ‘드문, 희귀한(메즈라시이)’ ‘영원한(에엔니)’이라고 반복하신다.
“아. 소우데스네. 포레버-”
프로듀서가 화답한다.
번갯불에 회오리바람 같은 ‘뷰티풀 코리안 드레스’ 런웨이는 성공적이었다.
원래 주인공은 마지막에 나오는 법. 두 연출가의 피날레 촬영이 이어진다.
앙드레김 패션쇼의 마지막 포즈, 이마가 닿을 듯 말듯 우아한 이 몸짓의 메시지는 아마도
‘이 순간 주인공은 나야 나’.
트렌드세터
다음 행선지는 고즈넉한 한옥 마을에 자리 잡은 힙 플레이스, 카페 아눅이다.
단골 쑤(야) 선생님이 오셨다는 말에 출타 중이던 사장님이 돌아오셨다.
갓 구운 베이커리를 손수 내오신다.
선생님은 이 집의 양송이 크림 스프를 특히 좋아하신다.
오늘도 사장님은 선생님을 위해 양송이 크림 스프를 각별히 포장해 내어 주신다.
사장님은 처음엔 이용수 선생님이 ‘의외로’ 이곳을 자주 찾아주셔서 놀랐다고 한다.
트렌드세터(Trendsetter)에게 늘 따라 붙는 수식어 중 하나가 ‘의외’이다.
선생님은 이 곳에서 힙스터들과 어울리며 요즘 감성을 즐기신다.
오늘의 화제는 단연 카페 아눅 바리스타님의 타투였다. 왼쪽 팔뚝 전체에 커피나무를 새겨 넣은 바리스타님의 문신을 본 일행들은 ‘대단하다’며 몰려들었다.
조선 사람이기도 한 쑤야 선생님은 ‘좋다’ ‘신기하다’는 말 대신 연신 바리스타님의 팔뚝을 쓰담 쓰담 하신다. 2021년 대한민국을 사는 조선 힙스터의 유연한 리액션.
셀러브리티 인 대구
“그랜마 리 이즈 셀러브리티 인 대구.” (리 할머니는 대구의 셀럽이구나.)
선생님을 뵌 지 반나절도 안 되어 프로듀서가 질문인 듯 혼잣말인 듯 중얼거린다.
셀럽의 필수코스는 포토타임이다. 카페 앞에서 사진 촬영 요청을 수락하신 선생님은 시크하게 엄지와 검지를 포개 스몰하트를 날려주신다.
물끄러미 지켜보던 카메라맨이 슬그머니 자기 손가락을 겹쳐 본다.
그의 심장도 추출 성공.
한 주먹도 필요 없고, 손가락 두 개로 심장을 꺼내 흔들며 깔깔거리는 사람들 틈에서 나는 문득 ‘대구의 힘’이 떠올랐다.
‘喜움’
일본인들의 ‘혼마찌‘[1]였던 종로 한 복판에 희움이 살아 있는 것도,
그 희움에서 고(故) 김순악 선생님이 “난 너거캉 지금 얘기하는 게 막 재미가 나서 죽겠다”고 하셨던 것도, 이용수 선생님이 오늘 마실을 다니시며 골백번 “재밌어”를 연발하시는 것도
다 깊은 내력이 있음을 알았다.
웬만한 사람이라면 자신이 끌려간 출발점인 고향을 다시 찾을 엄두도 내지 못했을 것이다.
대구의 생존자들은 돌아왔을 뿐 아니라 그 땅에서 웃고 떠들고 잠을 청했다.
‘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희움 역사관’ 등 이웃들의 따뜻한 마음 때문이었을까. 이곳에는 희움을 ‘喜움’이라 부르게 하는, 알 수 없는 힘이 느껴진다.
응달진 날에도 뜻밖의 기쁨을 동력으로 삼는 일, 형태가 없었던 즐거움을 두 손으로 주조하는 일, 펄떡이는 심장을 움켜쥐는 일이 가당키나 한가에 대해 이곳 사람들은 흔쾌히 ‘예’라고 말하는 듯하다.
각주
- ^ (편집자 주) 本町. 일본인 집성촌
연결되는 글
-
- 이용수 선생님 방문기 ‘아니, 기뻤어요.’
-
지난 9월, <2021 여성인권과 평화 국제 컨퍼런스>의 축사를 이용수 선생님께 부탁드리고자 대구로 향했다. 가능하다면 선생님의 근황을 듣고 컨퍼런스에 기대하시는 바를 간략히 들으면 되리라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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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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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교육홍보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