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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년 웹진 〈결〉 독자만족도 조사
    2024년 에세이 2024년 웹진 〈결〉 독자만족도 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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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본 군인에게 '위안소 이용'이 의미하는 것
    2024년 자료해제 일본 군인에게 '위안소 이용'이 의미하는 것

    [일본 군인 회고록 읽기] 일본 군인에게 '위안소 이용'이 의미하는 것   '위안소'를 이용한 일본 군인들은 자신들의 경험을 세세하게 상기하며 자유롭게 집필한 많은 회고록을 남겼다. 자기를 만족시켜주고 따뜻한 정서가 있는 장소, '목숨의 세탁소', '공동변소', 안정제, 권리, 남자가 되는 과정…. 회고록에 남긴 이들의 서술을 통해 그들에게 위안소를 이용한다는 것의 사회적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위안소에서 군인을 상대해야 했던 여성은 군인들의 질서 유지와 관리를 위한 도구에 불과했다는 사실도 알 수 있다. 군인 회고록 중 위안소 이용에 관한 서술에 주목해 위안소가 일본군에게 어떤 기능을 했는지 살펴본다.   1118_결_자료해제-02.jpeg   일본 군인들은 '위안부'나 '위안소'에 관해 많은 기록물을 남겼다. 특히 전 군인들이 자신의 경험을 상기하면서 자유롭게 집필한 회고록에는 그들의 적나라한 생각이 드러난다. 일본에서 연구 활동을 진행하고 있는 '일본전쟁책임자료센터(日本の戦争責任資料センター)'는 1990년대부터 군인들이 펴낸 회고록을 꾸준히 조사해 '위안소'나 '위안부'에 대해 서술하고 있는 사례를 1,000권 가량 발견한 바 있다.  필자는 오래 전 '위안소' 앞에서 웃음을 지으며 줄을 선 일본 군인들의 모습을 담은 기록을 보고 궁금했다. 힘없는 여성들이 거듭되는 성적 행위를 강요당하고 있는 상황에서 도대체 뭐가 그리 즐거웠을까,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남자들은 성욕을 참을 수 없는 건가? 전쟁터에서 계속된 싸움이 인간을 이상하게 만드는 건가? 그런데 회고록에서 관련 서술들을 연구하다가 '위안소'를 이용한다는 것의 사회적인 의미를 발견할 수 있었다. 여기서는 군인 회고록 중 위안소 이용에 관한 서술에 주목해 위안소가 일본군에게 어떤 기능을 했는지 살펴본다.     위안소에 갈 수 있는 권리 우선 위안소에는 어떤 군인들이 갈 수 있었을까. 회고록에는 초년병은 가기 어려웠다는 서술이 많다. 시간적·정신적 여유가 없고, 선배 병사들의 눈치도 봐야 했기 때문이리라. 그러다 이년병이 되고 후배가 생기면서 할 일이 줄고, 눈치 볼 선배도 적어지면서 위안소에 가보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후 이년병 이상의 군인 대부분은 당연한 듯 위안소에 다니게 된다. 중국 중부지역 산둥성(山東省)에서 종군했던 일반 병사는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다. "남자만 있는 매몰차고 흥취가 없는 군대 생활에서, 게다가 내일도 모르는 목숨이기 때문에 외출하는 날 찾는 위안소는 모두에게 자기를 만족시켜주고 따뜻한 정서가 있는 장소였으며, 목숨의 세탁소이기도 하여 그날을 애타게 기다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捜三十二会, 1978: 175-176)." 1937년 중국 중부지역 허베이성(河北省) 부근에 주둔했던 나가이 미치야스(長井通泰)는 다른 표현으로 '위안소'를 말한다. "우리들은 이 작은 집을 '공동변소'라고 부르고, '공동변소에 갔다온다'고 말했다. 공동으로 사용하는 필수 불가결한 배설 행위로 본 것이다. 내일 전투에 목숨을 거는 젊은이들에게는 안정제와 같은 의미에서 필요했을지도 모르고, 오히려 일본군은 울적함을 발산하는 장소로 이곳을 장려한 것 같았다. 그리고 나와 같이 고향에 약혼자가 있는 사람조차 당연하게 가는 분위기가 되었다(央巧友の会, 1973: 108)." 공동변소, 배설 행위, 안정제라는 표현은 모두 위안소가 군인들의 불안한 마음과 두려움을 달래주는 장소로 기능했다는 것을 거침없이 고백하고 있다. 이는 위안소 여성들을 마냥 '변기'로 취급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후루하시아야 자료해제 사진 정리.001.jpeg   군에서 콘돔을 받고 의기양양하게 위안소로 향하는 모습을 기록한 군인들도 많다. 1945년 일본이 패전하기 직전에 중국 상하이 부근 하이먼(海門)이라는 지역에 있었던 오사다 가즈오미(長田一臣)는 위안소에 간 날을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위안소 사용은 자유로운 것이 아니라 휴일에 한정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날 할당된 병사들은 위병소에서 점호를 받아 이름을 확인하고 '사크(콘돔-인용자)'를 받는다. 'ㅇㅇ상등병 이하 ㅇ명, 지금부터 위안소에 다녀오겠습니다!'라고 보고하면 '응, 잘하고 와라!'라고 사령이 격려해주고 대열을 짜서 영내를 나가는데, 이럴 때는 칼을 휴대할 필요없이 무방비로 가는 것이 허용되었다. 겨우 나에게도 그날이 왔다. 위안소에 갈지 말지는 자유 의지이다. 여기에 있다는 것은 오사다 이등병이 위안소 행 권리를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이다(長田,2001: 167)." 대열을 짜서 위안소로 향하는 군인 행렬의 일원이었던 오사다 병사는 본인의 행위에 대해 '위안소 행 권리를 포기하지 않았다'고 썼다. 주저 없이 위안소에 다닌 병사들이 많았고, 대부분 의심없이 즐겼다. 즉 '내일도 모르는' 나날 속에 있었던 병사들은 위안소에 가는 일을 자신이 누릴 수 있는 권리나 혜택으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여자를 모르는 놈 손 들어봐" 그런데 모든 군인이 처음부터 '위안소'에 가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일본 군인들은 10대 후반부터 20대 초반에 입대한 경우가 많았고, 성 경험이 없는 경우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군인들은 위안소에 가는 것을 부끄러워하거나 민망해하여 스스로 가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런데 그럴 때 동료들이 가만히 있지 않았다. 대신해 위안소에 갈 채비를 해준 것이다. 예컨대 중국 중부지역 산둥성(山東省) 짜오좡(棗荘)에 주둔한 어떤 병사(이름 미상)는 다음과 같이 자세하게 당시 상황을 남겼다. "짜오좡에는 위안소도 있고 (동료들이 나에게–인용자) 동정을 버리도록 억지로 집어넣어 밖에서 문을 잠궈버린 곤란한 일이 있었다(谷四二〇五部隊第一中隊の集い事務局, 1980: 269)."   경리부 간부 후보생이던 니시카와 히로시(西川浩)는 교관에게 위안소에 가라는 명령을 받기도 했다. "(교관이 명령했다.-인용자) '너희 중에 아직 여자를 모르는 놈 손 들어봐!' 간부 후보생 20명 중 손을 드는 사람은 나를 포함해서 3명이었다. 국군(일본군-인용자)의 간부가 되려는 놈은 알고 있어야 하는 일이다. 전우들이 도와줘라. 다음 외출 때에는 남자가 되게 하라." 그래서 난리가 났다. (전우들은–인용자) 책임을 다해야 하기 때문에 저녁 식사 동안 소란스러웠다. 이치리키(一力)의 모모코(桃子)가 좋다던지, 아사히로(朝日楼)의 하루고마(春駒)가 좋다던지, 시노노메의 폰타를 추천한다는 등 소란스러웠다. 이제 다음 일요일에는 산 외에 있는 병료(兵寮)에 모두 다 같이 가서 마실 줄 모르는 술을 억지로 먹이고 지닝(鶏寧) 거리에 나가 모두 삐야(위안소 -인용자)에 직행한다. 나에게는 순한 애가 좋다며 아케보노의 기요코(清子)로 결정됐고, '돌격일번(일본군이 사용했던 콘돔 이름 -인용자)'이 손에 쥐어져 방으로 들여보내졌다. 쓸데없이 참견하는 놈이 있어 합판으로 만들어진 문틈으로 엿보면서 '야, 빨리 바지 내려', '맞다, 좀더 힘을 줘'라고 시끄럽게 한다. 뭐가 뭔지 모르는 사이에 21년 동안 지켜온 동정을 버렸다. 그래서 무링강(穆稜河)에 가까운 찻집 에투알(エトワール)에서 축배를 들었다. 월요일 훈련을 시작하기 전에 정렬할 때 나와 다른 2명은 한 걸음 앞으로 나와서 교관에게 보고했다. '교관님! 니시카와 히로시 외 2명은 어젯밤 훌륭히 남자가 되었습니다. 삼가 보고하겠습니다. 경례!' '훌륭히? 축하한다.'(西川, 1985: 50-51)" 상관이나 동료들, 그리고 본인들도 위안소에 '억지로 갇혀 불편한' 척을 하면서도 거절하지 않았다. 성 경험이 없는 이들에게 위안소에 가서 여성들과 성행위를 하는 것은 '훌륭한 남자가 되는' 과정이라는 생각을 공유했던 것이다.  군인 수기에 나오는 '위안부' 사진.jpg 그러면 왜 그들은 성 경험이 없는 이들에게 '명분'까지 제공하며 위안소에 보냈을까. 미국의 젠더학 및 비판 이론 분야 학자인 이브 세지윅(Eve Sedgwick)이 제시한 '동성사회적(homosocial)'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할 수 있다. 즉 남성들은 함께 모여 있는 동안 동성애적 욕망을 억압하고 동성사회적 관계를 유지시키기 위해 여성을 거래한다. 이를 통해 남성들은 서로가 사회성이 있음을 확인하는데, 이때 여성들은 욕망의 대상일 뿐이다. 이렇게 대상화된 여성을 거래하는 것을 매개로 남성 간 연대는 강해진다. 연대감이 필요했던 군대에서 위안소라는 공간과 대상화된 여성들의 존재가 필요했던 이유이다..     죽음의 공포 달래기 한편으로 이런 상황에서도 위안소에 가지 않겠다고 다짐한 군인도 존재했다. 이들은 군대에서 이질적인 존재로 간주되었다. 남성으로 살아오면서 대부분 군인들이 배워 익힌 동성사회성 규범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강하게 다짐했지만 죽음을 앞두고 있다고 통렬하게 느꼈을 때 그 마음이 무너졌다고 토로하는 병사도 있다. "나는 결혼할 때까지는 동정으로 살기로 맹세했기 때문에 시야(西椏) 위안소의 앞을 지나가도 흥미조차 갖지 않았다. 그런데 어젯밤 부상병을 보자 언제 죽을지 모르는 '내 몸', 나도 인간인 이상 죽기 전에 한번 여자의 몸을 보고 싶다! 작전을 나와서 수개월 동안 받은 급여도 그대로 있다. 한번 보는 정도라면 괜찮을 것이라고 스스로 타이르며 위안소 입구에 들어갔다(近衛歩兵第五連隊史編集委員会 1990: 141)."   "초년병이나 이년병들이 '니시무라(西村) 상등병은 고집이 세네. 남자가 맞냐'라고 놀리고, 고참병은 이전부터 빈번하게 유혹했습니다. 그리고 우수한 선배 전우가 하나의 탄알로 죽어가는 것을 눈앞에서 보고 심경의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지금까지 순결을 지켜왔는데, 한 번에 죽지 않고 부상을 당해 몸이 자유롭지 못하게 될 경우 후회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면서 자신이 없어졌습니다. 나는 위안소 여성들이 돈을 벌러 오는 줄 알고 있었고, 역시 다른 사람만큼 경험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됐습니다(小川, 2005: 101)."     이들이 위안소에 가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이유를 주목해 보자. 그들은 '결혼할 때까지는 동정으로 살기' 원했다거나 '순결을 지킨다는 이유로 위안소에 가지 않았다. 당시 일본에서 남자 청소년들은 성병에 걸리지 않도록 유곽에 가는 것을 금기시하는 교육을 받았다. 교육 관계자는 건강한 가정을 이루고 출세하고 싶다면 결혼하기 전까지 성병에 걸리면 안 된다고 지도했고, 입대 때는 성병 검사를 엄격하게 실시했다. 즉 성병에 걸리지 않는 것은 남성들이 행복한 미래를 꿈꾸기 위한 필수 요건이라고 교육받았으며, 그 교육을 잘 따른 군인도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런 규범은 죽음의 공포 앞에서 쉽게 무너졌다. 미래를 꿈꿀 수 없는 상황에서 행복한 가정이나 출세를 기대할 수 없게 되자 위안소에 가지 않겠다는 다짐도 무너졌다고 해석할 수 있다. 글을 시작하면서 필자는 회고록을 들여다보면 일본군이 위안소를 이용한 행위의 사회적인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당시 군인들은 위안소에 가는 일을 '내일도 모르는' 생활, 개인의 권리를 주장할 수 없는 전쟁터에서 자신들의 불안과 공포를 대체하는 선택이자 권리로 받아들였다. 또 많은 군인들은 위안소에 가지 않는 동료가 있는 상황을 불편하게 여겼다. 그런 동료들을 설득하고 회유해 위안소 이용 경험을 공유함으로써 동성사회성을 기반으로 한 관계를 구축하였다. 이때 위안소에서 군인을 상대해야 했던 여성은 군인들의 질서 유지와 관리를 위한 도구에 불과했다. 출세를 위해 성병 예방을 실천하던 병사들도 죽음을 앞두고는 위안소로 향했다. 여기서도 위안소 여성들은 죽음의 공포를 넘어서기 위한 도구로만 간주되었다. 결국 '위안소'에 간다는 것은 군인들로 하여금 개인의 자유가 있는 것처럼 착각하게 하고, 동성사회성을 기반으로 한 군대를 보다 강고한 조직으로 발전시키는 역할을 했다. 그리고 위안소를 제공하는 것으로 군인들이 전쟁터에서 잘 싸우도록 만들었다. 위안소는 일본군이 군인들을 잘 관리해 작전을 원활하게 수행하기 위한 장치로 기능했다고 할 수 있다.   인용 문헌 - 央巧友の会, 1973, 『白い星』, 私家版. - 小川健次郎ほか, 2005, 『語り継ごう元戦士たちの証言』, リープル出版. - 長田一臣, 2001, 『一陣の風』, 新潮社. - 近衛歩兵第五連隊史編集委員会, 1990, 『近衛歩兵第五連隊史:上巻』, 私家版. - 捜三十二会, 1978, 『黄塵:捜索第三十二連隊第二中隊史』, 私家版. - 谷四二〇五部隊第一中隊の集い事務局, 1980, 『山と湖と黄塵を征く:谷四二〇五部隊第一中隊史』私家版. - 西川浩, 1985, 『私の大東亜戦記』, 私家版.

    후루하시 아야(古橋綾)

  • 학병의 사명과 '위안부'의 운명
    2024년 에세이 학병의 사명과 '위안부'의 운명

    학병의 사명과 '위안부'의 운명 - 소설 「여명의 눈동자」를 통해 본 일제말기 청년들의 해방 이후 삶의 향방   1970년대 중반 신문에 연재된 김성종의 소설 「여명의 눈동자」는 이후 TV드라마와 연극 등으로 각색되며 큰 인기를 누렸다. 그 인기의 바탕에는 '위안부'를 성애화하여 관음증적 시선으로 보는 당대의 잘못된 인식이 작용하였음은 그간 많이 지적되었다. 이러한 한계에 더하여 국문학자 이지은은 이 소설을 제국주의 전쟁에 동원된 식민지 청년들이 해방 이후 젠더에 따라 어떻게 다른 경험을 하였는지를 추적하면서, 한국사회에서 '위안부' 여성을 타자화하는 메커니즘을 분석한다.       전장(戰場)의 식민지 청년들 한국사회에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공론화한 윤정옥은 해방 이후 돌아오지 않는 여자들의 소식을 '학도병(학병)'을 통해 들었다고 한다.[1] 여기서 '학병'이란 '반도인학도특별지원병제'(1943.10 공포)로 인해 사실상 '강제' 입대한 학생들로, 이들은 조선인 '위안부'들을 가장 가까이서 목격한 전장의 병사이자, 그녀들의 소식을 고국에 전해준 동포였다. 그러나 해방 이후 학병과 '위안부'는 서로 다른 역사적 위치에 놓이게 된다. 많은 학병들이 전장에서 희생되었으나, 귀환한 학병들은 당대 최고의 엘리트 그룹으로서 새로운 국가 건설의 주역이 되었다. 귀환 학병들에겐 '국가 건설'이라는 역사적 과업에 참여할 기회가 주어졌으며, 따라서 공동의 과업에 참여한 이들은 실제 학병 징집자든, 기피자든, 면제자든 할 것 없이 모두 '학병 세대'로 포괄될 수 있었다.[2] 반면, 귀환한 '위안부' 피해자들은 많은 경우 생활고를 면치 못하였으며, 심지어 1990년대에 이르기까지 위안소 생활을 전시 성폭력의 '피해'로 말할 수 있는 공론장도 제대로 가지지 못했다. 이들에겐 자신들의 경험을 공유할 사회적 계기도, 역사적 과업에 참여할 기회도 없었다. 김성종의 소설 「여명의 눈동자」(『일간스포츠』, 1975.10.1~1981.3.2.)[3]는 제국주의 전쟁에 동원된 식민지 청년들, 즉 학병과 '위안부'가 해방 공간과 6·25전쟁을 거치며 어떻게 다른 역사적‧사회적 위치를 부여받는지 살피게 한다는 점에서 문제적인 텍스트다. TV드라마, 연극 등으로 각색되며 한국 사회에 '윤여옥'이라는 대표적인 '위안부' 상(像)을 남긴 「여명의 눈동자」는 연재 중에 단행본이 출간될 만큼 상당한 인기를 누렸다. 그러나 소설의 인기가 상당 부분 여성 섹슈얼리티를 외설적으로 소비한 데서 비롯되었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이 글은 소설의 한계를 분명하게 인식한 다음, 소설이 '위안부' 여성을 타자화하는 메커니즘을 분석하여 '위안부'가 한국 사회에서 어떻게 역사적 주체의 자리로부터 탈각되었는지 그 인식의 한 단면을 살펴본다.     제국의 폭력이 만든 '학병-위안부'의 연대 「여명의 눈동자」는 '위안부'로 차출된 여옥과 대학을 다니다가 학병으로 징집된 대치, 하림을 교차해 보여주면서 장구한 서사의 첫머리를 시작한다. 이들 식민지 조선의 청년들은 부대를 따라 전선을 이동하면서 만나고 헤어짐을 반복한다. 그런데 의미심장하게도 소설에서 '여옥-대치', '여옥-하림'은 모두 제국의 권력 장치 아래에서 성적 관계를 맺게 된다. 먼저, 대치의 경우 고참의 강요로 위안소를 찾았다가 '위안부'가 된 여옥을 만나게 되고, 서로에게 연민을 품은 두 사람은 위안소에서 관계를 맺게 된다. 한편, 여옥이 하림과 성적 관계를 맺게 된 것은 일제의 감옥소 안이다. 사이판에서 포로로 붙잡힌 여옥과 하림은 미군 OSS 요원이 되고, 이후 미군의 지시 하에 조선 독립을 위한 공작을 전개해 나간다. 그러던 중 일제 경찰에 발각되고, 경찰은 고문의 강도를 높이다 급기야 여옥과 하림에게 그들이 보는 앞에서 성교를 강요한다. 이 에피소드는 「여명의 눈동자」의 관음증적 시선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자, 동시에 학병과 '위안부'가 어떠한 조건 속에서 동류관계가 형성될 수 있었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장치이다. 소설은 학병과 '위안부'가 위안소나 감옥과 같은 제국의 폭력장치 속에서 그것에 대항하며 연대할 수 있음을 시사한다.     국가 건설의 사명과 대결 구도의 재배치 그렇다면 제국이라는 적대항이 없어진 뒤에도 학병과 '위안부'는 연대할 수 있을까. 해방공간으로 접어들면서 「여명의 눈동자」는 독립국가 건설의 주역으로 학병 세대를 호명하고자 하는 욕망을 매우 강하게 드러낸다. 이들은 국민국가 건설을 주도해 나갈 만한 엘리트 집단이기도 했거니와, 친일 혐의로부터 자유로운 세대였기 때문이다. 특히 일본군에서 탈영한 학병들은 중국군이나 광복군 등에 합류해 항일 무장 투쟁을 전개함으로써 독립 국가 건설의 주체로서 도덕적·정치적 우위를 확보하였다. 「여명의 눈동자」 또한 학병에게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하림과 대치의 항일 무장 투쟁 행적을 강조한다. 대치가 중국 국민당, 공산당 군대를 두루 거쳐 팔로군 내 조선인 병사들을 이끌고 귀환한다면, 하림은 미군 OSS 요원으로서 해방 직전 경성으로 침투한다. 이후 이들은 해방 공간의 주요 사건들, 이를 테면 각종 암살 사건,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1946), 9월총파업(1946), 4.3항쟁(1948), 여순사건(1948), 지리산 빨치산 투쟁(1951) 등에서 매번 대결하게 된다. 남한에서 벌어진 좌우 갈등에서 대치는 빨치산 수장으로, 하림은 진압군 대장으로 부딪히게 되는 것이다. 이때 국가건설의 주역으로 학병 세대를 호명하고자 하는 욕망은 해방 공간의 갈등과 대립을 '학병 vs 학병'의 구도로 재배치함으로써 달성된다. 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대목이 제주 4.3항쟁에서 대치와 하림의 대결이다. 소설은 무장대 총사령관과 진압 사령관의 협상, 토벌대 사령관의 피살사건 등 당대 알려진 4.3사건의 전개를 유사하게 따라가면서도, 일본군 출신의 토벌대 사령관들을 탈영 학병 출신의 하림으로 대체한다. 미군과 이승만 정부는 제주 4.3사건이 일어나자 만주에서 대유격전의 경험을 쌓은 일본군 출신 방공(防共) 전사들을 제주도와 지리산으로 파견했다.[4] 그러나 「여명의 눈동자」는 제주 4.3사건을 둘러싼 해방공간의 갈등 구도를 대치와 하림, 즉 '학병 vs. 학병'으로 재배치한다. 미소 군정과 남북 단독 정부의 수립, 그리고 그 과정에서 벌어진 동족상잔의 비극은 신제국의 점령지가 된 약소민족의 설움으로, 혹은 새로운 국민국가 건설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겪어야 할 갈등으로 서사화될 수는 있지만, '해방' 공간에서조차 '일본군 출신의 군·경 vs 학병이 지휘하는 무장대'의 대결로 그릴 수는 없었던 것이다. 더욱이 하림과 함께 남쪽의 편에 서 있는 「여명의 눈동자」의 입장에서 '학병이 이끄는 무장대'와 대결하는 남쪽 세력이 일본군 출신의 군부여서는 안 되었을 것이다. 요컨대, '제국-식민지/점령지'의 대결 구도가 재배치되고 국민국가 건설이 역사적 사명으로 주어지면서, 해방 공간에서는 '학병-위안부'의 연대 대신 정국을 주도하기 위한 학병 간의 갈등이 전면화된다. 이와 같은 서사 전략은 식민지 역사 및 친일 잔재로부터 자유롭고자 하는 욕망은 실현하지만, 남한 통치체제 내부에 존속한 식민의 잔재는 은폐하는 우를 범한다.     여자의 운명과 역사로부터의 배제 혹은 초월 해방 공간이 학병 사이의 대결로 재편되었다면, 여기에서 누락된 '위안부'의 역사적 위치는 어디일까. 학병과 '위안부'가 제국의 폭력 속에서 연대를 형성하였다면, 해방 공간에서 이들의 관계는 어떻게 변모하였을까. 해방 직후 대치는 여옥을 식민지 역사가 빚은 "대표적인 비운의 여성"이자 "치욕스런 역사의 잔영"이라 여기며, 안타깝지만 새 시대의 그늘에 "숨어 살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5] 반면, 하림이 보기에 일본군 '위안부'로 전선에 끌려갔다가 아이까지 낳아 살아 돌아온 여옥은 그야말로 "하나의 신화"이다.[6] 역경 속에서도 꺾이지 않는 불굴의 의지와 생명력의 상징인 것이다. 얼핏 대치와 하림은 정반대의 시각을 보여주는 듯하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일본군 '위안부'를 수치로 여기는 쪽이나, 민족의 신화로 여기며 보호하려는 쪽이나, '위안부' 피해자를 새 시대의 역사적 주체로서 인식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상통한다. '위안부'를 역사적 사명을 둘러싼 대결구도로부터 배제하든, 혹은 신화화하여 역사로부터 초월하게 하든, '위안부' 피해자는 지금-여기 역사적 주체의 자리에서 탈각된다. 이와 같은 타자화의 시선은 대치와 하림이 여옥과 맺는 섹슈얼한 장면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소설 내내 모든 면에서 대조적으로 그려지는 대치와 하림이지만, 섹슈얼한 장면에서 이들의 태도는 놀랍도록 유사하다. 대치와 하림은 여옥과의 관계에서 항상 그녀의 벌거벗은 몸을 '바라보는 자'의 위치를 점한다. 제국의 폭력 아래에서 연대관계였던 학병과 '위안부'가 해방 공간에서는 시선의 주체와 보이는 대상으로 분리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보는 주체-벌거벗겨진 몸'이라는 권력 구도는 식민지 시기 대치와 하림이 경험한 '일본군-조선인 학병(대치)', '미군-조선인 포로(하림)' 관계와 유사하다. 조선인 학병들을 괴롭히던 일본군의 오오에 오장은 대치에게 자신이 보는 데서 점령지 여성을 강간할 것을 명령하였다. 오오에는 대치를 벗게 만듦으로써 대치가 자신의 권력 아래에 놓여 있음을 확인시키고, 대치는 점령지 여성을 강간함으로써 오오에와 같은 '점령군'이 되었다. 하림의 경우 또한 이와 유사하다. 하림이 OSS 요원이 되기 위해 심사를 받으러 갔을 때, 미군 심판관은 하림에게 옷을 벗으라고 명령했다. 미군 심판관은 '벌거벗겨진 몸'이 바라보는 주체와 보이는 대상 사이의 권력관계를 선명하게 가시화하고, 이를 더욱 공고하게 만든다는 것을 이용한다. 제국의 군대는 자신들의 권력을 과시하고, 식민지 청년들을 길들이기 위해 섹슈얼리티에 대한 폭력을 활용했다. 그렇다면 대치와 여옥, 하림과 여옥이 '보는 주체- 보이는 대상'의 관계를 맺는 장면은 단지 '학병-위안부'의 연대적 관계가 위계적 관계로 재편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을 넘어, 그러한 권력적 관계를 형성하는 방식이 제국의 폭력과 상당히 유사하게 이루어지고 있음을 드러낸다고 할 수 있다. 제국의 억압 아래에서 '학병-위안부'는 식민지 민족으로서 연대관계를 맺었지만, 해방 공간에서 국민국가 건설이라는 역사적 사명은 학병의 몫이 되었다. 학병들이 새로운 국가(건설) 세력이 되었다면, '위안부'는 또 다른 국가(건설) 세력에 의해 식민화된 셈이다.   해방 직후 하림이 독립국가 건설을 꿈꾸고, 대치가 공산국가 건설을 꿈꿀 때, 여옥 또한 "앞으로 나의 육체를 탐내는 남성들은 모두 나의 적"[7]이라고 선언한다. 그러나 소설에서 여옥의 '여자의 길'은 '아내의 길'로 회수되고 만다. 문제는 '아내의 길'이 여옥의 정치적 주체성만을 박탈하는 게 아니라, 그녀에 대한 대치의 착취 또한 은폐한다는 점이다. 대치는 여옥에게 미군의 정보를 빼내 올 것을 요구했고, 여옥은 내키지 않음에도 가정을 지키기 위해서 그의 말을 따랐다. 가부장제 규범은 대치가 여옥을 끊임없이 이용하게 하는 구실이 되어주면서, 동시에 그 착취를 착취로 인식하지 못하게 하는 은폐 기제였다. 이러한 까닭에 여옥은 두 아들을 잃은 후에야 마침내 대치를 거절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대치가 6·25 전쟁 중에 빨치산이 되어 찾아오자, 여옥은 또 다시 그를 거절할 수 없게 된다. 여옥은 대치를 도와주기 위해 빨치산 무리를 토벌군 대장인 하림에게 알리지만, 이는 배신행위로 간주되어 결국 여옥은 대치 손에 죽게 된다. 이후 대치는 빨치산 동료들에게 버려지고, 곧이어 미쳐버린다. 하림은 대치에게 마지막 호의를 베풀어 그가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 있게 한다. 이로써 「여명의 눈동자」는 남쪽 체제를 택한 하림만 남기고 모두 역사의 무대에서 퇴장시킨다.      여옥의 무덤 위에서 살아가는 여자들 1975년 10월 1일부터 1981년 3월 2일까지 장장 5년이 넘는 기간 동안 연재된 대하소설 「여명의 눈동자」는 여옥의 묘비문을 마지막 문장으로 하여 끝을 맺는다.   여옥의 무덤은 눈 속에 들어 있었다. 얼마 전에 세워준 조그만 돌비도 눈 속에 서있었다. 그[하림-인용자]는 거기에 쌓인 눈을 손으로 쓸어냈다. 그리고 여옥의 얼굴을 어루만지듯 자꾸만 그 돌비를 어루만졌다.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새겨져있었다. 「윤여옥, 1928년3월5일~1951년8월9일」 - 「여명의 눈동자」(1661), 1981.3.2. "신화"라는 것이 본래 초월적 세계의 이야기라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하림이 지키려고 했던 "신화"는 역설적으로 여옥의 죽음으로 완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는 대치가 말했던 "역사의 잔영으로 그늘에 숨어"들어야 하는 '위안부'의 운명과 다르지 않아 보인다. 하림과 대치의 상반된 태도는 결국 여옥의 존재가 하나의 비석으로, 민족 수난사의 상징으로 물화(物化)됨으로써 합치된 셈이다. 물론 이는 여옥을 대상화·타자화했던 두 사람의 시선에서 예견된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위안부'는 하림과 대치의 은밀한 바람처럼 그렇게 역사 속으로 사라지지 않았다. 공교롭게도 실제 역사에선 여옥이 사망한 바로 그 즈음 연합군/한국군 위안소가 세워졌다. "정부가 연합군 전용 위안소 설치에 개입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결정적 자료는 보건부가 1951년 10월 10일에 결재한 「청소 및 접객영업 위생사무 취급요령 추가지시에 관한 건」(保防  제1726호)이다."[8]  해방 이후 '위안부' 제도는 남한 정부에 의해 계승‧변형되었다. 소설은 조국이 지키지 못한 '단 한 명의 여자'의 죽음에 애달파 하였으나, 조국이 지키지 못한 여자는 '한 명'이 아니었다. 이와 같은 결말은 두 가지 측면에서 중요한 시사점을 던진다. 하나는 해방 이후 '위안부' 제도의 변형과 계승이 애초 소설 속에 예견되어 있다는 점이다. 한국에서 군 '위안부' 제도가 존속된 것은 한국 군대가 미군정의 비호 아래 일본군, 일본 육사 출신의 병사와 간부를 다수로 하여 창설되었기 때문이다.[9]  실제로 6·25전쟁 당시 한 장교는 "군 '위안부'를 이용하도록 지시를 내렸던 연대장이 관동군 출신자였으므로 군 '위안부' 발상을 했다고 기억했다."[10] 그러나 「여명의 눈동자」는 새로운 국가 건설기의 '적자'로서 학병을 호명하기 위해 남한 군대에 이어져 내려온 식민주의의 연속성을 삭제해 버렸다. 국가 건설 시기 남한 군·경의 지휘부에 자리 잡았던 일본군과 만주군 출신자 대신 탈영 학병 하림을 내세웠던 것이다. 식민주의의 잔재를 삭제하고자 했던 욕망은 그 의도와 별개로 오히려 식민주의의 연속성을 은폐하는 기능을 하고 만 셈이다. 이때 은폐된 존재란 바로 여옥의 무덤 위에서 살아가고 있는, 신화도 역사도 되지 못했던 연합군/한국군 '위안부'들이다. 다른 하나는 「여명의 눈동자」에 '위안부' 피해자가 단 한 명만 등장한다는 점이다. 소설은 남한에 계속해서 존재했던 군 '위안부'만 은폐하는 게 아니라, 여옥 이외에 어떠한 일본군 '위안부'도 그리지 않는다. 위안소에서 다른 '위안부'들이 등장하긴 하지만, 그녀들 가운데 여옥 외에 귀환한 여자는 없다. 하림이 학병 기피자들과 함께 친일파를 처단하고, 대치가 귀환 학병들과 함께 제주에서 무장 반란을 일으키지만, 여옥은 해방된 나라에서 자신과 비슷한 경험을 지닌 여자를 단 한 명도 만나지 못한다. '위안부' 피해자는 오직 여옥 한 명만이 존재한다. 학병들에겐 그들을 모이게 하는 역사적 과업이 주어지지만, '위안부' 피해자들을 만나게 하는 역사적·사회적 계기는 없다. 대신 여옥에게 주어진 것은 '아내의 길'이었다. 학병이 역사적 '사명'을 통해 세대로 구성된다면, '위안부' 피해자는 탈역사적인 여자의 '운명'으로 귀속되었다. 그러나 '위안부'에겐 이러한 운명조차도 가부장제 규범과 여성 섹슈얼리티에 대한 왜곡된 인식으로 인해 비극으로 끝나버리고 만다. 대신 이 비극적 운명을 통해 '위안부'는 민족 수난사의 상징으로, 하나의 신화로 완성되고 만다.       각주 ^  윤미향, 『25년간의 수요일』, 사이행성, 2016, pp. 121~122. ^ 김건우, 「운명과 원한」, 『서강인문논총』 52, 서강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2018 참조. ^ 이 글은 『일간스포츠』 연재본을 저본으로 삼았다. 이하 작품명, 연재 횟수, 날짜만 표기함. ^ 허은, 『냉전과 새마을』, 창비, 2022, p. 85. ^ 「여명의 눈동자」(727), 1978.2.16. ^ 「여명의 눈동자」(1031), 1979.2.14. ^ 「여명의 눈동자」(1031), 1979.2.14. ^ 박정미, 「한국 성매매정책에 관한 연구 : '묵인-관리 체제'의 변동과 성판매여성의 역사적 구성, 1945∼2005년」,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1, p. 99. ^ 김귀옥, 『그곳에 한국군'위안부'가 있었다』, 선인, 2019, pp. 167~168. ^ 김귀옥, 『그곳에 한국군'위안부'가 있었다』, 선인, 2019, p. 169.

    이지은

  • 중국 잡지를 통해 보는 연합군 구출 당시 '위안부' 피해 생존자들의 모습
    2024년 자료해제 중국 잡지를 통해 보는 연합군 구출 당시 '위안부' 피해 생존자들의 모습

    중국 잡지를 통해 보는 연합군 구출 당시 '위안부' 피해 생존자들의 모습   만삭의 임산부를 포함해 네 명의 일본군’위안부’ 모습을 담고 있는 ‘유명한’ 사진이 있다. 1944년 연합군이 중국 윈난성 쑹산에서 촬영한 것으로, 이 사진 속 임산부는 잘 알려진 ‘위안부’ 피해생존자 박영심이었다. 구조돼 병원에서 안정을 취한 박영심은 일본의 항복 후 고국으로 송환됐다. 일본군‘위안부’ 제도의 범죄 증거를 수집해온 중국 리지샹위안소 유적전시관은 10여년 간의 노력 끝에 박영심을 포함해 당시 ‘위안부’ 피해자들과 관련된 새로운 단서를 찾아냈다. 해방 직전인 1945년 6월 25일 발행된 잡지 『대전화집(大战画集)』에 실린 기사였다. 이에 대한 이야기를 ‘중국 침략 일본군 난징대학살 희생동포기념관’의 류광지안 부연구관원이 소개한다.   '만삭의 위안부'.jpg   1944년 9월, 미 육군 164 통신사진중대 소속 이병 햇필드(Charles H. Hatfield)는 중국 윈난성 쑹산 전선에서 ‘유명한’ 전쟁 사진 한 장을 찍었다. ‘만삭의 ‘위안부’’라는 제목으로 공개된 이 사진에는 중국군 병사와 여성 네 명이 등장하는데, 옷차림과 외모로 미루어 보아 한반도 출신으로 추정됐다. 초췌한 얼굴로 어찌할 바를 모르는 불안한 표정의 네 여성은 웃고 있는 중국계 미군 정보장교와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특히 시선을 끄는 부분은 사진 속 가장 오른쪽에 있는 여성인데, 한 눈에 보아도 임신 상태였다. 서 있기도 힘들어 보이는 만삭의 여성은 흙더미에 기대어 두 손을 짚고 고통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다. 그리고 나중에서야 그녀가 ‘박영심’이라는 이름의 조선 출신 일본군 ‘위안부’라는 사실이 확인됐다. 연합군 촬영 사진 속 ‘만삭의 ‘위안부’피해자’ 당시 박영심은 동료들과 함께 목숨을 걸고 윈난성 쑹산의 일본군 진지에서 탈출한 직후였다. 과도한 피로와 극도의 긴장 상태였던 박영심은 다리 아래로 피를 흘리며 결국 유산하고 말았다. 구조된 박영심은 즉시 중국 원정군 제8군 야전 병원으로 이송되었고, 사산된 태아를 꺼내는 수술 끝에 목숨을 건졌다. 중국 윈난성 바오산에서 한동안 요양한 박영심은 이후 다른 조선인 ‘위안부’ 30여명과 함께 쿤밍으로 보내져 앞날을 기약하게 되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공식적으로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면서 박영심과 동료 여성들은 이듬해 고국으로 송환되었다. 이후 한동안 그들의 비극적인 경험은 역사 속에서 묻히는 듯했다. 그러다가 1991년,  ‘위안부’ 피해자 김학순이 침묵을 깨고 증언하면서 일본군 ‘위안부’ 제도의 잔혹한 진실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후 중국, 한국, 일본 등 여러 나라에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졌고, 피해 생존자들이 용기를 내어 증언하는 대열에 박영심도 동참했다. 수많은 증언과 증거는 전쟁 중 일본군이 자행한 ‘위안부’ 제도가 여성의 권리를 심각하게 유린한 반인륜적 전쟁 범죄임을 입증했고,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국제적인 화두로 떠올랐다. 2000년 12월, 국제사회는 일본 도쿄에서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국제법정'을 열어 일본군의 전시 성폭력 범죄를 심판했다. 이 자리에 참석하기 위해 도쿄에 방문한 박영심은 숙소에 있던 목욕 가운을 보고 과거 위안소에서의 기모노가 떠올라 먹는 것도, 말하는 것도 어려운 상태에 빠져 결국 그녀의 증언은 비디오 영상으로 대체되었다. 영상으로나마 그녀는 일본군 ‘위안부’ 제도와 그 범죄들을 생생하게 고발했다. 2003년 11월, 박영심은 중국 난징과 윈난 쑹산을 방문해 예전 일본군 위안소 현장을 직접 지목하는 역사적인 활동을 펼쳤다. 2015년 12월 1일, 박영심이 지목한 난징 리지샹위안소 옛터에 세계 최대 규모의 ‘위안부’ 주제 기념관인 난징 리지샹위안소 유적전시관이 정식으로 개관했다. 그 후 리지샹 전시관은 일본군 ‘위안부’ 제도의 범죄 증거를 수집하는 데 힘써왔으며, 여기에는 박영심과 동료들의 삶의 궤적을 추적하는 작업도 포함되었다.   박영심이 1939년부터 약 3년간 ‘위안부’로 생활했던 동운위안소 19호실. 중국의 난징 리지샹위안소 유적전시관의 일부로 공개되고 있다. (사진 제공: 류광지안(by photographer Sun Chen(孙晨)))   10년 간의 노력 끝에 찾아낸 새로운 단서 약 10년 간의 끈질긴 노력 끝에 리지샹 전시관은 박영심에 대한 새로운 단서를 찾아냈다. 1945년 6월 25일 발행된 잡지 『대전화집(大战画集)』에 실린 ‘윈난에서 포로로 잡힌 일본군의 여성들, 그녀들이 속은 경위를 털어놓다’라는 제목의 기사였다. 이 기사는 한반도의 젊은 여성들이 중국 윈난까지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온 과정과 쑹산 진지에서 겪었던 비참한 경험을 상세히 소개하고 있다. 《大战画集》1945年第5期.pdf_page_01.jpg   기사에 따르면 1942년 봄, 일본인들은 여성들이 살고 있는 마을을 찾아가 싱가포르에서 일본군을 돕는 일을 하는 ‘여성 보조 부대(妇女辅助队)’를 모집한다고 속였다. 안전하고 돈을 벌 수 있다는 말에 가난한 농가 출신 소녀들은 가족을 부양할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해 쉽게 현혹되었다. 그들은 일본인의 말을 믿고 지원하여 배에 올랐고, 남양에서 행복한 삶을 꿈꾸었다. 하지만 그들이 도착한 곳은 싱가포르가 아닌 미얀마였고,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안전한 일자리가 아니라 일본군의 폭력이었다. 마지막에 그들은 윈난성 쑹산의 일본군 진지로 보내져 유린당했다. 중국군이 쑹산을 점령했을 당시 원래 24명이던 ‘위안부’ 가운데 살아남은 여성은 열 명이었다.   《大战画集》1945年第5期 기사 사진만.jpg   이런 내용과 함께 기사에는 사진 한 장이 함께 실려 있었다. 사진 속 열 명의 여성은 1944년 9월 쑹산 전투에서 중국군에 의해 구조된 ‘위안부’피해자들이었다. 열 명 중 한 명은 일본인, 나머지 아홉 명은 모두 조선인이었다. 약 1년간 요양을 한 사진 속 인물들은 구출 당시와 비교해 외모와 체격이 조금 달라졌지만, 모두 행복한 표정이었다. 놀랍게도 사진 맨 앞줄 왼쪽에서 두 번째 자리에 있는 박영심의 모습도 확인됐다. 사진 속 박영심은 희미하게 미소를 짓고 있어 사진 촬영 당시 기분이 좋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요양 1년 후, 미소를 띠고 있는 여성들  1944년 9월, 미 육군 164 사진부대는 쑹산 전투 현장에서 많은 사진과 영상을 촬영했다. 이 사진과 영상 자료는 온전히 보존되어 왔다. 『대전화집』에 실린 이 사진 속 여성 열 명을 미군이 촬영한 영상과 비교해 보니, 이들 모두가 다른 영상에도 등장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즉, 그들은 구출된 후 건강하게 지냈고, 수술을 받았던 박영심을 포함해 누구도 낙오하지 않았다. 구출 당시 ‘위안부’피해자들의 모습은 몹시 초라했다. 옷차림이 단정치 못한 사람도 있었고, 피투성이 얼굴도 있었다. 하지만 구출 뒤 사진에서는 미군이 촬영할 당시의 불안하고 초라하며 당황스러운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고 모두 마음이 편해 보였다. 구출 당시에는 자신들을 기다리는 것이 또 다른 지옥일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떨었을 것이다. 다행히 고난을 겪은 이들 여성들은 구조 후 중국 군인과 현지 주민의 도움으로 삶의 희망을 발견했다. 전쟁이 끝나기 전이었지만 미소를 띠고 있는 여성들의 얼굴에서는 미래를 기대하는 마음을 읽을 수 있다. 당시 일본인 ‘위안부’든 조선인 ‘위안부’든 그들은 오직 하나의 바람만을 간절히 품고 있었을 것이다. ‘어서 빨리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바람 말이다.   <『大战画集』 기사와 번역문> 《大战画集》1945年第5期 '위안부' 기사.jpg   중국 뎬시(滇西)에서 포로로 붙잡힌 위안부들  - 자신들이 속은 과정에 대해 입을 열었다-  중국 군부대는 누장(怒江)강 전방(前线)의 쑹장(松江)강 전투에서 독특한 ‘전리품’을 얻었다. 바로 10명의 일본군 위안부이다. 그들 중에는 일본인도 있고 조선인도 있다. 지난 3개월간 그녀들은 쑹산(松山) 전투(중국의 항일전쟁 중 송산지역에서 벌어진 전투)에 참여한 적군들과 함께 생활했다. 누장강 전선 각 거점의 일본군 부대에는 일본 위안부들의 흔적이 남아있었다. 한번은 텅충(騰沖) 지역에서 일본군의 잔인무도한 행위가 포착되기도 했다. 일본군 화약고가 폭발될 때 한 조선인 위안부가 그대로 생매장되는 것을 당시 현장에 있는 일본군들은 모두 두고 보고만 있었던 것이다. 이번에 중국 군부대에 의해 포로가 된 일본 위안부들 중 네 명이 조선인이었다. 나이는 스물네 살에서 스물일곱 살까지로 서양 여인들이 입는 옷을 입고 있었는데 꽤 화사해 보였다. 이 여성들의 말에 따르면 이 서양식 옷들은 모두 싱가포르에서 사 온 것이다. 그녀들은 낮은 의자에 편안히 앉아 미국 담배를 피고 있었다. 지난 수 월간 겪었던 전쟁의 충격 속에서 서서히 안정을 되찾고 있었다. 이 여성들은 모두 북조선의 평양 사람으로 전부 농촌 여성이었다. 1942년 봄, 일본의 정치 관계자가 이들이 있는 마을에 찾아와서 일본군이 전쟁에서 얼마나 천하무적이고, 어떻게 "부녀자 지원팀"을 모집하여 싱가포르로 보내서, 전혀 위험하지 않은 비전투 업무를 맡기고, 또 싱가포르가 얼마나 안전한 후방 지대인지, 이들이 가면 병원에서 병간호 일만 하면 된다는 등의 감언이설을 내뱉고 갔다. 비록 이런 감언이설들이 이들의 마음을 움직이지는 못했지만 정말 안타깝게도 이들은 당장의 돈이 너무 시급한 상황이었다. 이들 중 한 여성의 아버지는 농부인데 넘어져 다리를 다쳤는데 병원비를 부담하지 못해 치료를 받지 못하고 있었다. 아버지의 치료를 위해 그녀는 어쩔 수 없이 모집에 응할 수밖에 없었다. 신청 후 받을 수 있는 1,500위안의 정착비로 아버지의 치료비를 충당하기 위해서였다. 생계를 위해 속아 이곳에 왔는데… 끌려온 24명 중 14명이 숨을 거두었다. 대부분 이런 안타까운 상황에 처해 있는 열여덟 명의 여성이 1942년 6월에 북조선을 떠나 남양지역에 보내졌다. 남양으로 가는 길에서 이들은 일본군이 곳곳에서 승리를 거두고 있다는 소식과 동아시아제국이 구축될 것이라는 등의 온갖 허황한 선전을 들었다. 그러나 그들이 싱가포르를 지나치고 멈추지 않는 것을 알아챘을 때, 마음속으로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직감했다. 기차는 미얀마 양곤에서 계속 북쪽으로 향할 때, 그녀들은 앞으로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 짐작하게 되었다. 쑹산지역에 도착하자 네 명의 조선 여성은 서른다섯 살의 일본군 정식 위안부 아래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 이 일본인 위안부도 이번 전쟁에서 우리에게 붙잡혀 포로가 되었다. (사진 속 왼쪽 아래 여성) 쑹산 지역 일본 군부대에는 그녀들을 포함해서 총 스물네 명의 여성이 있었다. 다른 업무 외에도, 그녀들은 일본 병사들의 빨래를 하고, 밥을 짓고, 산속 야영지의 동굴을 청소하고 했다. 중국 군부대가 쑹산을 공격할 때 이들은 일본군과 함께 전쟁의 참상을 겪었다. 스물네 명 중 열네 명의 위안부가 폭격으로 사망했다. 평소에 일본군 당국은 그녀들에게 만약 중국군에 의해 포로가 된다면 반드시 각종 수모를 겪을 것이라고 줄곧 이야기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들은 처음에는 이 말들을 정말로 믿었다고 한다. 남은 가족들의 안전을 위해 그녀들은 끝까지 자신들의 진짜 이름을 알리지 않았다. 하지만 이들은 지난 2년간의 생활로 인해 일본 군부대에 대한 자신들의 믿음이 이미 완전히 사라졌다고 입을 모았다.    ▼박영심을 비롯한 '위안부' 피해자들이 구출되는 모습이 담긴 영상. 1944년 미군 164 통신사진중대 소속 사진병이었던 에드워드 페이 병장이 촬영한 것으로 추정된다. (출처: KBS News)▼

    류광지안(刘广建)

  • ‘위안부’ 피해와 트라우마를 어떻게 재현할 것인가
    2024년 좌담 ‘위안부’ 피해와 트라우마를 어떻게 재현할 것인가

    다큐를 통해 보는 재현과 기억의 전승 <1부> '위안부' 피해와 트라우마를 어떻게 재현할 것인가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는 지난 2024년 9월 26일 <다큐를 통해 보는 일본군‘위안부’-트라우마의 재현과 세대를 넘는 기억의 전승>을 주제로 학술 콜로키움을 개최했다. 다큐멘터리는 피해자의 현존과 목소리를 영상으로 전달함으로써 역사부정세력에 대항하며 ‘위안부’ 문제를 기억하고 후세대에 전달하는 데 큰 역할을 해왔다. 콜로키움에서는 <22>의 궈 커 감독, <내게서 출발한 배(A Boat Departed From Me Taking Me Away)>의 세실리아 강 감독, <보드랍게>의 박문칠 감독을 초청해 작품에 담아낸 문제의식과 제작 과정을 듣고, 일본군‘위안부’문제에 천착해 온 학자들과 각 작품이 이룬 성취와 향후 과제에 관해 논의하였다.  웹진 <결>은 주요 토론 내용을 2회로 나누어 공유한다. 다큐를 통해 보는 재현과 기억의 전승 <1부> -  '위안부' 피해와 트라우마를 어떻게 재현할 것인가 다큐를 통해 보는 재현과 기억의 전승 <2부> -  포스트 피해자 시대, 세대를 넘어 기억하기     <22> 감독 궈 커 | 98분 | 2018  (▶보러가기) 제2차 세계대전 중 중국에서 많은 여성이 일본군에 의해 성노예로 동원되었다. 촬영 당시인 2014년 피해 생존자 수를 의미하는 제목처럼, 중국의 궈 커 감독은 다큐멘터리 <22>에서 피해생존자 22명의 일상을 과장 없이 따라가며 ‘위안부’로 동원되어 받았던 고통과 그 이후의 지난한 삶이 새겨진 주름 가득한 얼굴을 스크린 가득 담아낸다. 이 영화는 2017년 중국 개봉 이후 한국과 일본을 비롯해 세계 곳곳에서 상영되며 소셜미디어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고 수많은 관객을 만나고 있다. <내게서 출발한 배> 감독 세실리아 강 | 120분 | 2023   아르헨티나 한인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난 세실리아 강 감독은 한국 방문 중 우연히 ‘위안부’피해자 고 김복동의 강연을 듣고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처음 접한다. <내게서 출발한 배>는 피해자들의 고통스러운 경험에 대한 깊은 공감과 디아스포라로서 이를 어떻게 영화적으로 재현할 것인가라는 감독의 고민이 담긴 결과물이다. 역시 한인 2세인 주인공 멜라니 정은 영화 속에서 ‘위안부’ 피해자 고 황금주의 증언을 낭독함으로써 과거를 현재로 불러오는 과정을 몸으로 보여준다. 실제 배우이자 연기 학교에 다니는 멜라니가 가정폭력이라는 자신의 개인적 경험의 토대 위에서 ‘위안부’ 문제와 접속하는 모습을 카메라가 따라가는 액자식 구조인 이 영화는 포스트 메모리 세대가 역사를 기억하는 방식을 담아낸다. 2023년 11월 마르델플라타 국제영화제에 출품되어 심사위원 특별상과 최우수 다큐멘터리상을 포함해 4개 부문에서 수상했다. <보드랍게> 감독 박문칠 | 73분 | 2022  어떻게 하면 ‘위안부’ 문제를 현재의 우리의 삶과 연결시킬 수 있을까 하는 박문칠 감독의 고민이 담긴 영화 <보드랍게>에는 피해자 고 김순악의 증언과 그 주변 활동가들의 인터뷰를 담았다.  “김순악, 김순옥, 왈패, 사다코, 데루코, 요시코, 마츠 다케, 위안부, 기생, 마마상, 식모, 엄마, 할매, 미친개. 술쟁이, 개잡년, 깡패 할매, 순악씨….” 등 김순악을 지칭하는 다양한 호칭으로 시작하는 영화는 ‘위안부’ 피해가 종전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그의 생애 전반에 걸쳐 이어진 사실을 보여주면서도, 그녀를 피해자 프레임에 가두기보다 자신의 삶을 살아내기 위해 고군분투한 여성이었음을 조명한다. 여러 여성의 목소리가 모여 ‘n개의 김순악’을 만들어가는 방식을 통해 영화는 현재의 젠더 폭력과 ‘위안부’ 역사 사이의 연결성과 차이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생존자의 증언을 담은 카메라 렌즈의 안과 밖   🧶 김한상 : 다큐멘터리는 현재 벌어지고 있는 사건들을 기록하는 경우가 많지만 오늘 우리가 논의하는 작품들은 기본적으로 과거에 일어난 폭력과 피해를 다루는 다큐멘터리들입니다. 과거를 어떻게 잘 재현해서 현재의 관객들에게 전달할 것인가는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이들이 갖는 근본적인 질문일 겁니다. 궈 커 감독님의 <22>는 카메라 앞에 설 수 있는 피해 생존자들이 점차 줄어들고 있는 현실에서 그분들의 마지막 순간의 어떤 모습들을 담기 위해 고군분투한 흔적으로 여겨집니다. 이와 같은 접근은 그 자체로 하나의 기록으로서 다큐멘터리의 기능을 보여줍니다. 이 영상들은 다시 후대에 기록될 자료나 전문가의 발언과 함께 새롭게 재구성될 가능성을 남겼다는 점에서 소중한 작업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직접적인 피사체로서 피해 생존자들 혹은 증언자들을 다루는 접근이 자칫 범할 수 있는 위험도 있습니다. 카메라가 증언자와 상호작용을 하려고 애써야 하는데, 그렇지 않을 경우 피해자 혹은 증언자의 증언은 대상화가 되고 혹은 감상의 재료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 황미요조 : <22>는 중국에 살고 있는 ‘위안부’ 피해 생존자들에게 근접해 클로즈업으로 얼굴을 담아내거나 반대로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이분들의 일상을 지켜봅니다. 간간히 인터뷰가 나오기는 하지만 어떤 큰 역사의 내러티브를 구축하거나 개인의 삶을 일관되게 구축하려는 시도는 하지 않습니다. 영화가 중요하게 담고 있는 것은 피해자들의 현재 시간, 그 일상의 시간입니다. 그리고 피해자들 얼굴의 주름으로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은 유예된 시간, 동결된 시간 자체를 보여줍니다. 스물 두 분의 생존자 중 이제 일곱 분만이 남아 있다는 자막으로 시작하는 영화는 그동안 우리가 무엇을 해왔고 이 역사가 어떻게 구축되었는지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일상의 내러티브 구축을 통해 전하고 있습니다. 이 시간을 통해 이 영화가 무엇보다 자신이 바라보는 대상에게 가지는 예의와 태도를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 김은경 : <22>는 제목에서 드러나듯 생존자들의 증언을 낱낱이 기록해 후대에 전승하겠다는 강한 의지가 읽히는 한편으로 ‘부재’를 환기시키는데요, 특히 ‘사라짐’을 조명하고 있다는 점에서 생각할 거리를 많이 준다고 생각합니다. 포스트메모리 시대에 ‘위안부’ 기억은 이제 피해 당사자의 어떤 회상이나 증언만으로는 채워질 수 없고, 그래서 우리가 기억의 전승이라고 하는 것, 그들의 부재를 예민하게 감지하고 내가 그것에 연루되어 있음을 깨닫는 것, 그리고 창조적인 재해석을 통해 그 기억의 확장을 도모하는 것이라고 이해하기 때문에 그 빈자리를 질문하는 영화로 보았습니다. 🧶 소영현 : 기록과 기억의 대상이 피해 생존자로 한정된 경향에 대해서는 성찰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다큐멘터리로 시각화하는 순간 언제나 피해 생존자를 중심으로 논의하게 되는데, 사실은 피해 생존자 말고 돌아오지 못한, 기록에도 남지 않은 수많은 피해 생존자와 피해자들이 계시잖아요. 그러니까 죽었기에 기록도 안 되고, 목소리도 가지고 있지 않은 그 많은 부분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기록할 것인가, 함께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죽음에 대한 사유가 필요한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살아 돌아온 피해자, 돌아오지 못한 피해자, 기록에도 남겨지지 못한 피해자와 피해 생존자를 위문하는 가족과 친척들, 돌아왔으나 트라우마적 과거에 갇히게 하는 사회를 폭넓게 성찰해야 한다는 것이죠. 문제는 피해가 선명해 보인다고 해도 사실 피해와 가해는 구분되기 힘들거나 뒤엉켜 있는 경우가 많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피해 생존자임을 밝히기 원하지 않는 가족들은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있어서 피해자인가, 가해자인가 이런 질문을 하게 되는 거죠. 결과적으로, 제 질문은 그 죽음을 어떻게 기록할 것인가 라는 질문 앞에서 우리는 무엇을 기억해야 하고 기록해야 하는가로 요약된다고 하겠습니다.     익숙한 재현 방식을 넘어   🧶 황미요조 : <보드랍게>는 기존 ‘위안부’ 재현 방식과는 다르게 김순악이라는 피해자의 삶을 재현하려고 노력합니다. 대구 지역의 ‘위안부’ 피해자 인권 활동가 인터뷰라든지, 드라마적인 애니메이션, 김순악의 생전 인터뷰와 일상생활 푸티지 들, 또 성폭력 생존자인 동시대 여성들에 의한 김순악의 증언 낭독, 그리고 화면 바깥에 화자가 전제된 연대기적 설명 자막과 사진이나 신문 기사처럼 정보 제공을 위해 화면 사이에 끼워 넣은 인서트용 아카이브 푸티지 등 다양한 방식을 활용해 김순악의 생애를 구성합니다. 이러한 복합적이고 중첩적인 층위의 재현 양식은 그동안 다큐멘터리에서 자주 사용된 인터뷰나 보이스오버 위주의 ‘위안부’ 피해자 재현양식과는 사뭇 다릅니다. 🧶 김은경 : 영화 초반에 등장하는 김순악의 다양한 이름은 그녀를 어떤 하나의 이름으로 부를 수 없고 또 단일한 기억으로 말할 수 없는 존재임을 드러냅니다. 심지어 복수의 김순악‘들’은 편하고 매끄럽게 들을 수조차 없습니다. 미투 운동 당사자들의 음성이 서로 중첩돼 울리는 가운데 열거된 그 이름들은 정말 듣는 청자가 천 개의 귀를 열지 않고서는 들을 수 없는 그런 소리였다고, 이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이름의 나열은 단지 김순악이라는 여성의 다양한 정체성을 드러내는 것 이상의 효과, 그러니까 ‘위안부’에 대한 사회적인 상징, 어떤 ‘숭고한 피해자’라는 상징을 완전히 깨는 효과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런 거죠. 영화는 ‘강제 동원된 일본군’위안부’ 대 매춘부 혹은 기지촌 미군 ‘위안부’’ 혹은 ‘인신매매된 순진한 기지촌 여성’ 대 ‘기지촌 여성을 착취하는 포주 마마상’ 등과 같은 이분법적 통념이나 피해자의 전형성을 뛰어넘습니다. 그래서 영화는 일부러 김순악이라는 굉장히 난해한 텍스트를 선택함으로써 ‘위안부’ 할머니에 대한 정형화된 기억과 담론을 뒤흔들며, 여러 이름으로 살았던, 여러 목소리로 중첩되어 설명되는 그 김순악‘들’에게 다시 돌아갈 것을 촉구합니다. 그리고 재현 방식들, 그러니까 기존 다큐멘터리에서 해온 관습을 뒤로 하고 애니메이션과 미투 운동 당사자의 내레이션을 통해서 관객이 김순악의 삶에 다가갈 수 있도록 돕는 미학적 선택은 ‘위안부’ 역사의 박제화에 저항하면서 관객이 함께 공감하고 공명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굉장히 훌륭한 미학적 장치라고 생각합니다. 또 낭독자들은 김순악의 삶을 읽어내려 가면서 그녀의 신산했던 삶을 어루만지고 ‘아이고, 참 애묵었다’며 다독입니다. 김순악의 삶과 낭독의 얽힘은 낭독자들의 상처까지 보듬으며 ‘애먹었다’라는 말을 그들에게 돌려줍니다.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서로 다른 세대의 사람들이 시대와 공간을 넘어 연대하는 큰 울림을 주는 장면이었습니다. 🧶 황미요조 : <내게서 출발한 배>는 아르헨티나 젊은 여성을 중심으로 영화가 이루어지는데 특히 주인공인 멜라니는 ‘위안부’ 피해자 황금주의 증언을 낭독하며 감정의 동요를 느끼고, 가정폭력을 당한 엄마 이야기에 눈물을 흘립니다. 영화는 한국에 와서 ‘위안부’ 문제에 더욱더 심층적으로 다가가는 멜라니의 여정을 함께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는데요, 이렇게 ‘위안부’ 피해 여성의 증언과 동시대의 20대 젊은 여성의 삶 사이의 공명을 포착한다는 점에서 <보드랍게>와 공통 지점을 갖습니다. 하지만 <보드랍게>와 달리 우리는 <내게서 출발한 배>를 통해 피해자 황금주의 구체적인 삶을 알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황금주의 삶을 구성하거나 재구성할 수도 없습니다. 증언의 일부만이 목소리나 표정, 몸짓 같은 멜라니의 ‘몸’을 통해 파편적으로 제시됩니다. 한국에서 멜라니가 방문한 박물관의 오디오 가이드나 기록, 자료도 그 내용이 구체적으로 관객에게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그렇지만 이것이 ‘황금주’의 삶에 접근할 수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영화는 관객들이 멜라니를 비롯해 여성들이 서로 주고받는 감응적인 반응들을 바라봄으로써, 그 감응의 공동체에 참여해 일부가 됨으로써 ‘황금주’의 삶에 접근하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어떤 억압에 대한 디아스포라의 삶일 수도 있고, 불안정한 20대나 가정폭력 피해자의 위치일 수도 있습니다. 황금주의 생애가 부분적이고 파편적으로 제시되듯이, 그에 감응하는 주체들의 삶도 완결적이지 않습니다. 영화는 ‘황금주’부터 현재 디아스포라 20대 여성까지 연결하면서도 계속 어떤 빗금을 긋고 영화 안에 액자적 구조를 만들어냅니다. 감독이 영화에 등장하기도 하는데, 자연 관객들은 영화 속 인물들이 카메라 앞에 있다는 것을 계속 인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내게서 출발한 배>는 누구의 삶도 일관되게 구성하지 않지만 각자의 위치에서 감응하고 위로하며 용기를 격려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줄 뿐입니다.   🧶 소영현 : 기본적으로 ‘위안부’문제에서는 역사에서 지워졌던 피해와 피해자를 가시권으로 이끄는 일, ‘드러냄’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앞서 언급했듯이 피해생존자를 중심으로 논의를 이끌게 될 위험이 있습니다. 어떻게 현재의 문제로 다룰 수 있는가도 고민해야 할 것이고요. 이런 점에서 오늘의 영화 3편은 다양한 재현 양식을 구현하고 있어 흥미롭게 봤습니다. 우선 일본군‘위안부’를 부인해 왔던 오랜 역사를 다시 쓰기 위해서는 피해자가 직접 증언하는 방식을 취할 수밖에 없었고, 그러한 운동의 성격이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피해자 중심으로 구축하게 했다는 것은 많은 분들이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구분하자면 <22>의 경우 피해 생존자 가시화 작업이 온전하게 요청되고, 거기에 긴급하게 반응해야 된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작업이었습니다. <보드랍게>는 감독님 설명을 들으면서도 여러 생각이 들었는데, 단순히 사건이 있었음을 입증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피해자 개인의 삶이 삭제되어 버리고 역사적 증인으로 환원되어버리는 상황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성찰한 점들이 굉장히 의미 있었습니다. 나아가 세실리아 강 감독님의 영화 <내게서 출발한 배>에서는 ‘위안부’문제 논의의 확장성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 할 사실은 세 재현의 방식 어느 하나를 일방적으로 진전된 작업으로는 볼 수 없다는 점입니다. 실제로 일본군‘위안부’ 피해 경험에 대한 기록 작업은 동시대를 사는 사람들을 통해서가 아니라 수용자를 통해서 완성됩니다. 문제는 수용자가 계속 바뀐다는 겁니다. 또 정치적인 상황에 따라 역사에 대한 인식이나 평가가 꽤 달라지는 경우도 있고요. 그래서 수용자의 가변성을 고려할 때 그것에 맞춘 재현의 방식이 반복적으로 지속될 필요가 있습니다. 포스트 메모리 세대가 늘어나면서 실제로 공적 기억의 지형 변화에 대한 고려가 좀 더 중요해지는 것 같습니다. 기억 투쟁 과정에서 피해와 피해 경험이 ‘있었음’을 부정하는 상황이 반복적으로 벌어지고 있는데 과거에 이미 다 보여줬으니까, 드러냈으니까 지나간 거고 이후에는 다른 방식의 대응 방식이 필요하다는 식의 논의로 나아가는 것은 좀 곤란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일본군‘위안부’ 피해 경험의 재현 방식에 대한 대안적이고 보완적인 작업으로 볼 수 있을 <22>와 <보드랍게>의 작업이 말해주듯, 그런 의미로 피해-증언의 복원과 피해 경험자의 복원은 각기 다른 자리에서 동시적으로 공존해야 하는, 그 자체로 보족(補足)적 작업이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김은경, 김한상, 소영현, 조서연, 황미요조, 웹진 <결> 편집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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