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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Comfort Girls”: The Forgotten Tragedy of Child Exploitation
    2025년 논평 “Comfort Girls”: The Forgotten Tragedy of Child Exploitation

    본 콘텐츠는 영문으로 발행되었습니다. 오른쪽 상단의 [EN]을 클릭 후 영문 웹진 <KYEOL>을 통해 확인 부탁드립니다.

    Ñusta Carranza Ko

  • 2025 기림의 날 기념 이벤트 - 고르다, 새기다 : 나의 결
    2025년 에세이 2025 기림의 날 기념 이벤트 - 고르다, 새기다 : 나의 결

    */ 2025 기림의 날 기념 웹진 '결' 이벤트  고르다, 새기다 : 나의 결      #이벤트 기간 | 2025년 8월 11일 ~ 8월 31일 (총 21일)  #주최·주관 | 한국여성인권진흥원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참여 방법 | 웹진 <결>에 업로드 된 모든 기사 중에 마음에 남는 기사 3편을 선정하고 그 이유를 간단히 적어주세요.   #참여 혜택 | 참여해주신 분 중 총 100분을 선정하여 2만 원 상당의 모바일 상품권을 드립니다.  #선정자 발표 | 2025년 9월 10일(수) 선정자 개별 연락 2019년부터 7년간, 웹진 <결>은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인식을 제고하고 전시 성폭력에 대한 사회적 논의를 확산하기 위해 다양한 이야기를 기록해왔습니다. 2025년, 광복 80주년 기림의 날을 맞아 그동안 <결>이 걸어온 여정을 함께 돌아보고,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함께 생각해보는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지금까지 발행된 약 300편의 기사 중, 당신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기사는 무엇이었나요? ‘고르다, 새기다 : 나의 결’은  당신의 기억 속 <결>을 꺼내어 다시 고르고, 그 안에 담긴 의미를 함께 새겨보는 참여형 이벤트입니다.   참여방법 안내    ① 웹진 <결>에 업로드된 모든 기사 중, 카테고리나 연도에 관계없이 당신의 마음에 새겨지고 의미 있게 다가온 기사 3편을 골라주세요.   #전체보기 메뉴에서 웹진 결의 카테고리를 탐색해보세요. ▶기사 전체보기 #엮어보기 메뉴를 통해 다양한 주제와 인물을 다룬 콘텐츠를 탐색해보세요. ▶ 기사 엮어보기     ② 아래 ‘이벤트 참여하기’ 버튼을 클릭해 설문지로 이동한 후, 선택한 기사 각각에 대해 아래 항목을 작성해 주세요.   이벤트 참여하기

    웹진 <결> 편집팀

  • 기억해야 할 첫 발걸음, 1세대 연구자를 만나다 - (1) 윤정옥
    2019년 인터뷰 기억해야 할 첫 발걸음, 1세대 연구자를 만나다 - (1) 윤정옥

      윤정옥(1925년~ / 영문학자, 인권운동가) 이화여대 영문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일찍부터 ‘위안부’피해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진상을 규명하기 위해 노력해왔으며, 1980년부터 ‘위안부’ 피해자를 찾아다니며 실태조사를 진행했다. 1988년 한국교회여성연합회 주최 ‘국제 관광문화와 여성(일명 기생관광) 세미나’에서 정신대 답사 보고를 하고 1990년 한겨레신문에 정신대 취재기를 연재하면서 이 문제가 세상에 적극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1990년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를 결성, 공동 대표를 역임한,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최초로 세상에 알리고 그 진상을 규명하기 위해 노력해 온 선구자. 저서로 『平和を希求して : 「慰安婦」被害者の尊嚴回復へのあゆみ』 『朝鮮人女性がみに 「慰安婦問題」 : 明日をともに創るために』 등이 있다.   “지금도 내가 느끼는 거는.. 남의 일같이 생각하는 사람, 위안부 이렇게 떠들어도 관심 없는 사람들 아직도 많아. 내가 안 당했고, 내 딸이 아니니까. 근데, 혼자 공부 잘 해가지고 PhD 되고 월급 많이 받고 이게 아니라, 나 혼자는 절대로 있을 수 없다는 걸 알아야 해. 다른 사람이 있어서 내가 있는 거야.” 지난 2월 14일, 웹진 <결> 편집팀은 서울 등촌동의 한 실버타운을 찾았다.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루는 웹진의 시작점에서 가장 먼저 찾아뵙고 소식을 알리고 말씀을 듣고 싶은 사람을 꼽으라면 누구라도 주저 없이 떠올릴 분.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공론화한 선구자, 윤정옥 전 이화여대 교수를 만나기 위해서다. 기대감과 떨림을 안고 찾아간 노학자의 집은 조용하고 정갈하면서도 온화한 느낌으로 가득했다. 아흔을 넘긴 연세로 왕성히 활동하던 시절보다는 쇠약해진 모습이었지만, 또랑또랑한 목소리에서 치열했던 평생의 여정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인터뷰는 방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 연구를 시작하게 된 동기와 후학에게 전하는 메시지 중심으로 짧게 진행되었다.   같은 시대, 같은 여성의 소설보다 더 소설 같은 이야기를 차마 지나칠 수 없었다 영문학자로, 대학교수로 편안히 살 수도 있었던 그를 평생 뜨겁게 움직이도록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난 소설 전공이었거든. 19세기 전공이었는데, 문학에 관심 많았기 때문에 단체 일이나 사회사업 같은 건 관심도 없었어. 그런데 개인 개인을 만나게 되잖아. 만나고 보면 그렇게 기가 막히고, 생각도 못 할 이야기들이…... 이건 내가 아는 소설, 소설 아무것도 아니야.” 해방 직후, 윤정옥은 정신대로 떠났다던 여성들이 도무지 돌아오지 않는 것에 의문을 품고 ‘위안부’ 문제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돌아오지 않는 여성들에 대해 누구도 이야기하지 않던 1970년대, 『분노의 계절』이라는 책이 도화선이 되어 스스로 이 문제를 파헤쳐 보기로 했다. 길도 없고,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몰랐지만, 사방으로 수소문하며 ‘위안부’ 피해 여성을 찾아다니던 중, 1980년 오키나와에서 배봉기 할머니를 만날 수 있었다. 수년간 답사를 하고, 증언과 자료를 모으며 개인적으로 연구를 진행해 1988년 4월 한국교회여성연합회가 주최한 국제세미나 ‘여성과 관광문화’에서 <정신대와 우리의 임무>라는 제목으로 일본군‘위안부’ 피해 실태를 발표했고, 그 자리에 있던 여성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그것을 계기로 일본군‘위안부’ 문제의 진상조사를 위해 한국교회여성연합회 산하에 정신대연구위원회가 설치되기에 이르렀다. 소설 속에서 삶의 속살과 진실을 발견하는 데에 매료되었던 영문학자였지만, 그 어떤 소설보다도 ‘소설 같은’ 이야기를 쏟아내는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을 만나며 윤정옥은 차마 외면할 수가 없었다고 이야기한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이야기가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참담하기도 했지만, 이 문제가 벌어지게 된 배경에 복잡하고 끈끈하게 얽힌 전쟁, 계급, 빈곤, 사회 구조와 여성 차별의 고리들을 생생히 발견하면서 은퇴 이후에 인간사에 대해 다시 눈을 떴다고 회고하는 그의 목소리는 조용하지만 솔직한, 학자로서의 고백이었다.   “내가 미안하잖아……” 1925년에 태어난 윤정옥은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와 같은 시대를 살아왔다. 이화여자전문학교(현재의 이화여자대학교)에 재학 중이던 1943년, 정신대 소집장이 어김없이 날아왔지만, 문제가 있음을 직감한 아버지의 판단으로 바로 학교를 자퇴하고 온 가족이 피난을 떠나 겨우 고난을 면했다. 전쟁이 끝나고, 끌려간 남자들은 돌아왔지만 끌려간 여자들은 소식조차 알 수 없이 수십 년이 지나는 동안 내가 피해간 어떤 문제를 나와 같은 이들이 당할 수밖에 없었다는 무게감, 학자로서 이 문제에 대해 알아내고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양심과 책임감, 같은 시대를 사는 사람으로서 외면할 수 없는 공감이 끈질기게 달라붙었다. “다른 사람들이 이런 일을 당했다더라, 그런 얘기가 귀에 들어오면 깜짝 놀라서 알아보고 말이지. 그 얘기 들으면 어떡할 수가 없어. 안 찾아다닐 수가 있어? 찾아다니지.”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그에게 “내 문제”일 수밖에 없었다. 그 마음이 원동력이 되어 교수 재임 동안에는 틈틈이 방학 기간에 사비를 털어 답사와 연구를 이어 갔고, 은퇴 후에도 멈추지 않고 본격적으로 이 문제에 뛰어들게 되었다. 윤정옥은 김신실, 김혜원과 함께 현장답사 조사위원을 꾸려 일본, 타이완, 파푸아뉴기니 등을 답사하고 일본군‘위안부’ 피해 사례를 수집했다. 생생하고 절절한 조사 내용은 1990년 1월, 한겨레에 <정신대 발자취 취재기>라는 제목으로 한 달 동안 연재되었고, 우리 사회에 폭넓은 반향을 일으켰다. 같은 해 7월 윤정옥은 그의 서재에 정신대연구회(한국정신대연구소)를 설립했다. 당시 이화여대에서 여성학을 전공하던 학생(여순주, 야마시다 영애, 이상화, 조최혜란)을 중심으로, 실천적인 문제 해결 방안을 찾기 위해서는 진상 규명이 우선이라는 공감대 위에서 거침없이 내디딘 발걸음이었다. 정신대연구회는 일본군‘위안부’ 피해 여성 면담을 통해 구술 채록을 진행하고 구술집(증언집)을 간행하는 등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이렇게 피해자 증언 녹취와 피해 실태 조사를 주도하는 한편 국외 거주 피해자 발굴과 국적회복 사업에도 힘썼다. 그는 한국정신대연구소 활동과 함께 1990년 11월 37개의 여성단체가 모여 설립한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이하 정대협)의 공동대표로서 운동을 활발히 주도했다.   고통받는 사람이 있다면, 본능적으로 다가가는 것 아무도 거론하지 않고 수십 년간 묻어왔던 문제를 처음으로 드러내고, 국제 사회에서 이슈화하고, 피해자의 인권과 존엄을 되찾기 위해 뚜벅뚜벅 걸어온 길이 절대 쉽지 않았음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 사람들 이야기를 듣는데 내가 어려운 게 어딨느냐’며 그는 오히려 “내가 창피하고 미안하다”고 손사래를 쳤다. “글쎄…… 다시 태어난다고 해도 그런 얘기 들으면 내가 가만히 있을 수 없을 거 같아. 누가 그렇게 힘들다고 하면 말이지. 본능적, 거의 본능적으로 뛰어드는 거야. 의지가 아니라.”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민족의 문제, 증오와 대립의 문제가 아니라 인권의 문제, 공감의 문제로 바라보았기 때문에 윤정옥은 우리와 같은 아픔을 겪은 베트남전 성폭행 피해자 문제 또한 결코 외면할 수 없었다. 그 아픔을 누구보다 잘 알아야 할 한국이 도리어 가해국이 되었다는 점이 더욱더 무거운 마음의 짐이 되었다. 정대협 공동대표직을 내려놓은 이후 2006년, 개인 자격으로 베트남으로 향했다. 베트남전 성폭행 피해자와 그 가족, 2세들을 찾아가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마음으로 사죄의 말을 전했다. 한국 정부와 일본 정부를 향했던 십수 년간의 외침, 그리고 그 과정에서 만나고 연대하게 된 일본의 연구자와 시민단체들의 활동이 한국과 베트남 사이에도 필요하다는 사실을 마주한 후 ‘가만히 있을 수 없어’ 다시 한번 새로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1990년 책상 하나에 전화기 한 대로 정대협의 막연한 여정을 시작했듯이, 이번에는 한국과 베트남 사이의 시민연대 출범을 제안한 것이다. 그 목소리에 호응한 국내와 베트남 현지의 많은 단체는 2000년대 이후 지속해서 베트남전 성폭력 피해자와 그들의 2, 3세들을 돕기 위한 활동을 이어가며 전쟁으로 침해된 여성 인권 회복을 위해 달리고 있다.   한국을 넘어, 아시아에 인권과 평화가 회복되기를 대화를 나누는 중에도 그는 베트남전 성폭행 피해자 2세 가족을 한국으로 초청해 “당분간 내 집에서 머물더라도” 한국에서 아버지를 만나도록 돕고 싶다고 이야기할 정도로 그들의 아픔에 크게 공감하는 모습을 보였다. 정부의 입장과 외교적 관계, 정치의 논리가 아니라 여성 인권과 평화의 차원에서 일본군‘위안부’ 문제와 베트남전 피해자 문제를 바라보고 해결할 것을 외쳐온 윤정옥의 노력은 최근 들어 느리나마 결실을 보고 있다. 그와 뜻을 함께하는 사람과 단체들이 십수 년간 활동을 이어온 결과, 지난 2018년 4월 서울에서 ‘베트남전쟁 시기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학살 진상규명을 위한 시민평화 법정’이 열리게 된 것이다. 일본군‘위안부’ 문제도, 베트남전 민간인학살과 성폭행 문제도 아직은 풀어야 할 단단한 매듭이 많이 남아있다. 진실을 외면하지 않는 연구자들과 현장에서 포기하지 않는 활동가들, 그리고 이들에게 관심과 지원을 보내는 시민들이 계속 뒤를 이어나가기를 기원하고 기대해 본다.   결국, 중요한 것은 사람에 대한 발견과 공감 “내가 아무리 공부 잘 해가지고 에이플러스 받아서 하버드 나오고 런던대 나오더라도, 나 혼자 살 수 없는 거야. 꼭 내 주위에는 같은 사람이 있어. 나 혼자만 잘된다는 생각, 그건 버려야 할 거 같아. 내가 있으면 누가 있지. 남자와 여자가 있는 것 같이, 동서남북이 있는 것 같이. 동이라는 것은 서가 있어야 동이야. 남이라는 건 북이 있어야 남이야. 혼자 절대로 있을 수 없어. 우리가 그거 알아야 할 거 같아.” 연구자로서 평생을 살아왔지만, 결국 중요한 것은 성취나 성공이 아니라 ‘사람’과 함께 산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라고 강조하는 윤정옥. 사람으로서 다른 사람에게 눈을 열고, 공감하고, 서로가 있음에 내가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그의 말은 조용했지만 뜨거운 여운을 남겼다. Interviewer : 소현숙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연구팀장) Interviewee : 윤정옥 정리 : 슬로워크  

    웹진 <결> 편집팀

  • 중국의 일본군 성폭력 문제 방법으로 사유하기 〈3부〉 - 중국의 일본군 ‘위안부’ : 용서와 화해란 누가 청할 수 있는 것일까?
    2019년 논평 중국의 일본군 성폭력 문제 방법으로 사유하기 〈3부〉 - 중국의 일본군 ‘위안부’ : 용서와 화해란 누가 청할 수 있는 것일까?

    ‘관대한’ 정책에 따른 ‘결정’ 중국에서 일본군 성폭력 피해를 입은 여성들이 일본 정부에 사죄와 배상을 청구하는 재판을 시작한 것은 1992년이다. 이에 따라 중국에서 강간에 대한 조사와 논의로 1997년 북경출판사의 『일본군 중국침략 폭행실록』이 나왔다. 그전까지는 중국에서 일본군‘위안부’나 성폭력은 거의 논의 대상이 되지 않았다. 그런데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후 중국 정부는 1,000명이 넘는 전범 용의자를 구류하였으며, 피해자 측과 아울러 조사를 실시한 바 있다. 1945년 러시아 군대에게 체포되어 러시아로 압송되었던 일본전쟁범죄자들은 1950년 7월 중국에 인도되어 푸순(抚顺) 전쟁 범죄자 관리소(사진1)에 감금되어 있었다. 그리고 1956년 4월 25일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중국침략 전쟁 중 일본전쟁범죄자 처리에 관한 결정」(이하 ‘결정’으로 약칭)이 통과되어 마오쩌둥(毛澤東) 주석령으로 공포되었다.   중화인민공화국 최고인민법원은 이 결정에 따라서 특별군사법정을 조직하여 1956년 6월과 7월, 랴오닝성(辽宁省) 선양(沈阳)시와 산시성(山西省) 타이위안(太原)시에서 공개재판을 했다. 재판의 공소서와 변론은 모두 ‘결정’에 근거하여 주장되고 판결되었다. ‘결정’은 일본의 전범들이 국제법과 인도에 반하는 죄로 중국의 인민에게 막대한 피해를 주었기 때문에 마땅히 엄벌해야 한다고 선언한다. 그러나 곧바로 일본이 투항한 지 10년이 지나면서 상황과 환경에 많은 변화가 있었다. 그리고 최근에 중일 양국 인민의 우호 관계가 발전하였다. 게다가 구속 기간 중 전범자들이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절대 다수가 자신의 죄를 반성하였다고 말한다. 따라서 ‘결정’은 ‘관대한’ 정책에 따라 전쟁 범죄자들을 분별 처리한다고 선언한다.   이 ‘결정’은 두 차례에 걸쳐 ‘관대한’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전범에 대한 사면을 암시한다. 실제로 법정 변호인단의 변론 역시도 상투적이다시피 ‘결정’이 제시하고 있는 관대 이유 세 가지를 들고 있다. 세 가지는 현재 상황 변화, 피고인의 사죄와 반성, 중일 양국의 우호적 관계 회복 등을 말한다. 그리고 일본 전범자들에 대해 관대한 판결을 요구하는 변호의 논리는 다음과 같다. 첫째, 피의자가 제국주의 국가와 군부, 그리고 각각의 국가기관에 속해있는 구조 속 부품에 지나지 않았다. 둘째, 군국주의 교육과 환경 속에서 군국주의자로 성장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중국정부의 교화 노력을 통하여 깊이 반성하고 있다. 실제로 중국은 1950년 러시아 정부로부터 인도받은 포로들에게 ‘세심하고도 꾸준한 배려’에 입각한 ‘교화’사업을 진행했으며 이 과정에서 포로들의 “인식과 태도에 근본적인 전환이 일어났다”고 한다. 어떤 면에서는 교화사업에 성공했다는 자신감이 재판으로 이어졌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중국공산당 정부의 교화사업은 판단 여하에 따라 제네바 협약 총칙 제3조 ‘신앙에 따른 불리한 대우를 받지 않는다’는 조항을 위반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법정에서는 사회주의 교화에 대한 낙관적 정치철학이 주요한 전범자들을 옹호하는 변호 논리로 작용하였다. 다케베 류조(武部六藏) 등 28명의 전쟁범죄안건에 대한 공소인은 리푸산이었다. 그는 돌아가신 분들의 마음을 품고 공소자인 자신이 국제법과 인도를 위반한 전쟁범죄자들에게 응분의 책임에 따른 징벌을 내려 달라고 요청한다고 하였다. 이외 스즈키 히라쿠(鈴木啓久) 등의 공소 내용을 보면 상당수의 양민학살과 부녀자들에 대한 강간, 그리고 “중국부녀를 일본군대 ‘위안소’로 보내어 강간한 일” 등을 중요한 공소 이유로 들고 있다. 그러나 재판은 시종일관 ‘결정’의 원칙에 따라 변호와 공소가 제기되었기 때문에 이러한 범죄에 대하여 심각하게 다루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변론의 주요한 논거에 대한 검찰의 이의제기가 전혀 없지는 않았다. 스즈키 히라쿠 등 8명의 전쟁범죄를 기소한 것은 왕즈핑이었다. 그는 개인이 사회의 영향과 역사적 제약을 받는 존재이지만, 결코 개인의 능동적 역할을 부정할 수 없다고 말한다.   과거 군국주의가 지배하던 일본에는 이를 추종하는 세력이 있었지만 동시에 평화를 사랑하는 진보적인 힘도 있었다. 그런데 피고인은 인간이 지녀야 할 최소한의 양심을 저버리고 ‘목적의식적으로 다양한 죄악을 저질렀다.’ 따라서 그들이 저지른 엄혹한 죄에 대한 법률적 책임을 피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또한, 피고인의 범죄행위가 명령의 집행이었다고 하지만 일정한 직책을 지닌 자들은 국제법을 알고 있었다. 따라서 비무장 양민학살과 마을 파괴, 부녀강간, 독가스 살포 등이 모두 엄중한 범죄행위임을 알고 있었다고 본다. 그렇다면 최소한의 양심을 지닌 인간이라면 상급의 명령을 변경하거나 저지 가능했을 것이기 때문에 중대한 책임을 피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마지막으로 피고인들이 법정에서 자신의 잘못을 인정했다고 하지만 “초기에는 죄를 인정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중국침략이 일본 군인의 직무”라고 저항하였다면서 그 죄를 묻고 있다. 그러나 이후 어떤 변호사도 이 점에 대해 반박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공소인도 충분한 이해를 표하면서 의견 표명을 하지 않았다. 결국, 타이위안에서 9명이 유죄판결을 받았으며, 120명이 유죄를 인정했지만 불기소되었다. 9명 전범의 죄상 중에는 강간 범죄가 3명이었다. 120명 중 자료가 남아있는 118명이 강간, 윤간을 자행하였으며, 여성을 강제로 ‘위안부’로 만든 죄가 있는 자가 43명이다. 그중 70명은 수십 명을 강간, 윤간하였으며 유아 강간을 인정한 자도 있다. 여기서 불기소된 120명의 범죄의 중요 내용을 구성하고 있는 것은 강간, 윤간이라는 여성에 대한 성폭력이다. 그럼에도 대부분 불기소 처분되었다. 중국 정부는 이 재판을 통해서 전쟁범죄를 따지고자 했다기보다 중국의 ‘관대함’을 보여주는 ‘정의’의 실현을 통하여 일본과의 국교 수립이라는 실리를 꾀했던 것 같다. 당시 총리 저우언라이(周恩來)는 6월 28일 전국인민대표대회 제3차 회의에서 “중국 정부의 전쟁범죄자들에 대한 처리는… 양국이 빠른 시일에 정상적 관계를 회복하기를 강렬하게 원하고 있는 점을 고려한 것이다”라고 솔직하게 말한 바 있다. 하지만 피해자들은 어떠한 심정으로 재판에 임하고 재판과정을 지켜봤을까? “돌아가신 분들의 마음을 품고 죄를 묻는 일이” 공소인들에게 부여된 권능일까? 전쟁범죄자들에 대한 용서의 주체는 누구일까? 증인으로 출석하여 자신들이 겪은 피해를 진술한 많은 이들은 입을 모아 정부를 향하여 자신들을 대신해 원수를 갚아 달라고 호소하였다.   용서와 화해란 누가 청할 수 있는 것일까? 전범자들 중에는 앞서 논한 산시성 피해자들에게 직접적인 가해를 입혔던 스미오카 요시카즈(住岡義一), 사가라 게이조(相樂圭二) 등도 있었다. 이들이 산시성 일대에서 자행한 부녀에 대한 폭력(강간, 윤간, ‘위안소’)으로 심신이 망가진 여성들에 대한 이야기도 재판 과정의 여러 곳에서 나오고 있다. 그런데 재판이 끝나자마자 실형을 선고받고 복역하게 된 이들을 제외하고 기소를 면한 이들과 질병으로 석방을 허락받은 이들은 3차에 걸쳐 일본의 적십자에서 보내온 일본 윤선 고안호를 타고 귀국하게 된다. 복역을 선고받은 이들도 대부분 형기를 앞당겨 1960년대 중반까지는 모두 석방되어 일본으로 귀환한다. 그런데 인상적인 것은 귀국하는 고별사의 보도 내용이다. 1차로 불기소 처분되어 귀국하는 도미나가 준타로(富永順太郞)는 ‘잘못을 하면 바로 고치는 것을 주저하지 말라(過則勿憚改)’는 고사성어를 인용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확실히 잘못했다. 오늘 나는 충분히 반성할 기회를 얻었다. 나는 아주 기쁘다. 많은 재난과 고통을 입은 중국 인민에게 죄송하다. 나는 사람이 변하여 좋은 사람이 된 것보다 더 유쾌한 일은 없다고 생각한다. 나는 오늘부터 인생의 제일보를 걷고자 한다. 나는 후반생은 좋은 사람이 되고자 한다. 여러분에게 감사한다. 지금 내 마음은 유쾌함으로 충만해 있다.”   귀국자들은 “일본과 중국은 빨리 국교를 회복하여 정상화하여야 하며 재차 형제와 같은 우정을 만들어 가야 한다”며 이를 위해 노력하겠다는 다짐을 하면서 돌아갔다. 물론 이와 같은 내용은 중국의 보도자료이기 때문에 실제로 그들이 남긴 말이 무엇이었는지 정확하게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적어도 중국 정부가 이 보도를 통하여 전범자들을 불기소 처리하고 귀국시킨 이유를 유추해볼 수는 있다. 피해자의 절규와 중국 정부의 ‘관대’하고 ‘정의로운’ 재판, 그리고 스스로 용서받아 ‘좋은 사람’이 되었다는 전범자의 자부를 보면서 용서와 화해를 청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무엇이 전제되었을 때 용서와 화해란 가능한 것일까? 라는 사유가 과제로 제기된다. 법학자 이재승은 용서와 화해에도 도덕적 문법이 있는가 고민하면서 국가권력이 범죄자의 처벌과정을 독점하고, 정의의 유일한 실현자로 나선다면 피해자의 소외, 배제, 파멸이 예정된다고 말하였다. 이재승의 지적은 중국의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허우둥어(侯冬娥)의 고통을 이해하는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한다.    중국의 전범관리소에서 ‘교화’되어, 관대한 전범 재판을 거친 일본 군인들은 귀국하여 ‘중국귀환자연락회’를 조직하여 중·일의 친선을 위하여 노력했다. 그런데 피해자 허우둥어는 자신의 피해를 말하겠다는 고통스러운 결심을 한 날에도 한나절 동안 비통한 눈물만 흘렸을 뿐 차마 입을 열지 못했다. 그리고 중일수교가 맺어진 지금(1992년)은 책임을 묻는 일이 더욱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1952년 장제스 국민당 정권(타이완)은 일본과 맺은 평화조약인 「일화조약·부속의정서(日華條約·附屬議定書)」 1항에서 “일본 인민에 대하여 관대하고 우호적인 뜻을 표시하기 위하여 중화민국은 스스로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 제14조 갑항 제1항의 일본국이 제공해야 하는 용역의 이익을 포기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로부터 20년 후인 1972년 9월 29일 중국과 일본 양국 대표는 인민대회당에서 중일 수교 정상화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공동성명서 제7조는 전쟁배상 문제에 대해서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는 선언한다. 중일 양국 인민의 우호 관계를 위하여 일본국에 대한 전쟁배상 요구를 포기한다.”고 규정하였다.   이로써 엄청난 피해는 발생했지만 그로 인하여 피해를 입은 ‘개인’은 누구에게도 책임을 물을 수 없는 상황이 만들어졌다. 일본군에 의해서 자신의 존엄에 심각한 상처를 입은 피해자들은 피해가 ‘창부’라는 오욕으로 뒤바뀌어 일상생활에서도 심대한 타격을 입으며 다시 한번 깊은 상처를 입게 되었다. 거기다 그녀들을 ‘지키지’ 못했던 남성들의 자존도 깊게 상처 입어 ‘대국’ 중국의 과시에 편승하여 피해의 실태를 알면서도 봉인함으로써 피해 여성들은 존엄을 회복할 길을 오랫동안 잃어버리게 되었다. 피해 여성들 대부분은 가난하고 편벽한 시골에서 태어나 전족을 하고 있었으며, 글자도 모르고 마을에서 발생한 엄청난 폭력적 상황이 왜 생겨났는지 채 알지 못하였다. 그런 여성들이 자신의 피해에 대해서 입을 열고 이야기하기 시작하였다. 그녀들의 증언은 피해를 ‘목격’했던 딩링(丁玲)이 1941년 작품 속 주인공 전전을 통해서 만들고자 했으나 채 만들 수 없었던 피해 여성 시점의 바로 그 언어일 것이다. 그 언어가 새로운 역사를 써 내려가는 언어가 되었으면 하고 바라마지 않는다.

    Lee Sun-yi

  • 힘없는 사람의 역사가 기억되는 인간적인 사회를 위해 - 사회정의교육재단 손성숙 대표 인터뷰
    2019년 인터뷰 힘없는 사람의 역사가 기억되는 인간적인 사회를 위해 - 사회정의교육재단 손성숙 대표 인터뷰

    2016년, 미국 캘리포니아주 역사-사회과학 교과과정 지침에 2015년 한일합의 내용이 포함되었다. 하지만 이 합의에 피해자가 동의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포함되지 않았는데, 그 뒤에는 일본 정부의 열성적인 로비 활동이 있었다. 역사에서 피해자의 목소리를 지우려는 노력은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지만, 그에 맞서 올바른 역사를 알리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도 곳곳에 있다.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에서는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약자와 피해자의 역사를 지키기 위해 뛰고 있는 사회정의교육재단(Education for Social Justice Foundation, ESJF)의 손성숙 대표를 만나 미국 내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인식과 반응, 그리고 ‘위안부’ 역사 교육의 현황을 들어보았다.     샌프란시스코 교육위원회 발의안부터 교재 개발, 교사 워크숍까지 Q. 안녕하세요, 대표님. 웹진 결 독자 여러분께 사회정의교육재단을 간단히 소개 부탁드려요. 네, 저희는 과거 부당하게 외면당한 역사를 교육을 통해 알리는 것을 사명으로 하는 비영리 교육단체이고요, 2017년 다인종 멤버로 구성된 활동가와 현직교사들이 함께 모여 미국 캘리포니아 샌프란시스코에서 설립했습니다. 일본군‘위안부’ 문제가 저희가 다루는 프로젝트 중 첫 번째 주제이고요, 이외에 731부대 문제와 같은 의학 잔혹행위, 아시아인들의 초기 미국 이민 역사와 같이 크게 3개의 주제를 함께 고민하고 있어요. 모두 식민지 역사와 연결된 문제들이죠.  Q. 2017년에 재단을 설립하시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나요?  교육에는 항상 관심이 많았어요. 제가 전직 샌프란시스코 공립학교 이중언어 교사거든요. 1994년에 샌프란시스코 통합교육구 교사로 한글 이중언어 프로그램을 개발하기도 했죠. 교육에 대한 관심이 ‘위안부’ 이슈로 연결된 계기는 세 가지예요. 우선 저희 할머니께서 김학순 할머니보다 2년 전에 태어나셨어요. 어려서 ‘위안부’ 역사를 처음 접했을 때, 우리 할머니도 피해자가 될 수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위안부’ 문제에 공감과 채무감을 항상 느껴왔습니다. 그러던 중에 2015년에 합의 아닌 합의가 이루어지는 것을 보면서 큰 충격을 받고 정확한 ‘위안부’ 역사 교육의 필요성을 실감했어요. 사실 그 합의 직전 10월에 샌프란시스코 교육위원회에서 ‘위안부’ 역사를 공립학교 10학년 과정에서 가르칠 것을 제안하는 발의안이 상정되고 통과됐잖아요.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는데, 두 달 뒤에 말도 안 되는 그 합의가 이루어지는 것을 보고 잘못하면 이번에도 묻히는 게 아닌가 싶어 교육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더 들었어요.  그리고 이게 재단 설립을 서두른 이유가 될 텐데요. 2016년 12월에 일본 지바 시에 있는 조선초중급학교에서 학생 미술전이 있었어요. 학생 출품 작품 중에 2015 합의의 문제점을 지적한 작품이 두 개 있었는데요. 그걸 구마가이 지바 시장이 보고 이듬해 봄에 그 학교의 시 보조금을 삭감해버렸죠. 이 사건을 보고 지바 조선학교를 조금이라도 빨리 돕고 싶었어요. 부당한 것을 부당하다고 말한 두 학생에게 그들의 용기있는 행동을 지지하고 싶었고, 그 두 학생이 부당하게 불이익을 당한 지바 조선학교에게 혹시라도 미안해할까 봐, 그럴 필요가 없다고 말해주고 싶었거든요. 그래서 2017년에 조금 급하게 재단을 설립했죠. 그때부터 지금까지 지바 조선학교에 작은 도움을 드리고 있어요. Q. ‘위안부’ 역사 교육을 위한 교재까지 직접 만드셨죠. 2015년 10월에 발의안이 통과되긴 했지만, 제안으로 끝나지 않고 적극적으로 샌프란시스코 교육시스템 안에서 실천이 되려면 부모님들의 지지가 필요하거든요. 그래서 2016년 1월에 학부모님들과 캠페인을 했어요. ‘발의안을 지지한다. 빨리 교실에서 가르쳐달라’는 내용으로 샌프란시스코 통합교육구에 편지를 보낸거죠. 반응이 너무 좋았어요. 샌프란시스코 통합교육구에서 ‘가르치겠다, 그런데 관련 자료가 너무 없으니 좀 구해달라’고 요청을 해왔죠. 그래서 저 나름대로 모아서 2016년 말에 제출했어요. 그런데 그 자료들을 체계적으로 분류하고 점검해서 학습안을 만들고 커리큘럼을 짜기에는 시간이 부족했는지 2017년 봄학기가 그냥 지나가더라고요. 통합교육구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과 ‘위안부’ 역사를 같이 가르치라고 제안했는데, 보통 샌프란시스코 교육 커리큘럼에서는 그걸 봄학기에 많이 가르치거든요. 발의안이 2015년에 통과되었는데 2016년 봄학기도 넘기고 2017년 봄학기까지 넘기게 되다 보니, 그냥 직접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2017년 말부터 자료를 모아서 만들기 시작해서 2018년 3월에 교재를 출간하게 된 거죠. Q. 교재는 어떻게 구성되었나요? 교사용과 학생용이 있어요. 교사용 지침서는 세 부분인데, 첫 부분은 ‘위안부’ 역사의 배경이에요. 한국에서 시작해서 다른 나라로 퍼져간 ‘위안부’ 운동사와 기림비 건립 및 제작 과정을 다룹니다. 두 번째 부분에서 사료, ‘위안부’ 관련 1차 문서를 소개하고, 세 번째 부분에 학습안과 활동지를 담았어요. 학습안은 샌프란시스코 현직 교사들이 직접 만들었고, 활동지는 학부모님들과 함께 만들었어요. 학생용 교재에는 교사가 보는 학습안 부분만 빠져있습니다. Q. 교재에 대한 현지 반응은 어땠을지 궁금해요.  참 좋아요. 작년 4월에 교육구에 교재를 가지고 가니, 담당자가 직접 샌프란시스코 18개 공립 고등학교에 전부 배포했어요. 지금은 고등학교, 대학교 특강과 워크숍 등에 활용되면서 교재가 다른 여러 도시로 퍼지고 있습니다. 두 달 전에는 샌프란시스코의 어느 대학교에서 특강을 했는데, 그 수업의 교수님이 저희 교재가 아주 잘 만들어졌다며 앞으로도 수업 시간에 활용하겠다고 말씀하셨어요. 고무적인 반응이죠. Q. 직접 워크숍도 열고 계시죠?  네, 캘리포니아의 교육제도는 교사들의 자율 영역이 굉장히 커서, 중앙에서 무엇을 가르치라고 해도 교사들이 스스로 움직이지 않으면 제안으로 끝나버리는 경우가 많아요. 위에서 아래로 전달은 됐으니, 이제 재단이 밑에서 위로도 일을 해야죠. 그래서 저희가 만든 교재로 직접 워크숍을 합니다. 교재를 그냥 드리는 것보다 워크숍을 하면서 몇 쪽에는 어떤 내용이 있고 몇 쪽에는 무슨 문서가 있다고 얘기하면, 교사분들이 좀 더 쉽게 접근할 수 있잖아요. 직접 워크숍을 열기도 하고 고등학교와 대학교에 강의를 나가기도 하는데, 워크숍에는 샌프란시스코뿐만 아니라 다른 도시의 교사들도 많이 오세요.    난관과 도움, 잊을 수 없던 순간들 Q. 샌프란시스코 기림비 설립 과정에서도 어려움이 많았는데, 재단의 활동을 반대하거나 방해하는 움직임은 없나요? 저를, 저희 재단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엽서는 받아요.(웃음) 확실히 미국에 있는 일부 역사수정주의자들이 손 놓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아요. 최근에는 어떤 단체가 프린스턴 대학교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데 Princeton Institute for Asian Studies 라는 이름을 내걸고 ‘위안부’ 자료를 자기네 입맛에 맞추어 써서 캘리포니아 전역에 배포한다는 소식을 접했어요. 그런 말을 들으면 미국에서 저희가 할 일이 더 많아졌구나, 꾸준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죠.  그런데 참 역설적인 게 뭐냐면요, 일본 수정주의자들이 이러면 이럴수록 사람들 사이에서 ‘위안부’에 대한 문제의식이 점점 더 커져요. 물론 의도하진 않았겠지만, 그들이 오히려 기회를 만들어주는 것 같아요. 오사카 시장이 샌프란시스코 시에 ‘위안부’ 기림비가 세워지는 것을 적극 반대하더니 작년에 결국 1957년에 맺은 샌프란시스코-오사카 자매 도시 결연을 파기했습니다. 그런데 그게 오히려 ‘위안부’ 문제를 더 많은 사람들이 인식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죠.  또 한 가지 말씀 드리고 싶은 것은, 생각보다 많은 일본인들이 이 운동을 지지하고 도와주신다는 겁니다. 생각해보면 음으로 양으로 다들 도와주시는 것 같아요. 반대를 해도 결국은 도움이 되고, 도와주시는 것도 도움이 되는 거고. 전 그렇게 생각합니다. Q. 워크숍을 하시면서 특별히 기억에 남는 순간이 있나요? 재미난 에피소드는 아니고, 좀 마음에 남는 일이 있었어요. 작년 가을이었죠. 한 일본인 교사가 워크숍이 끝난 후 질의응답 시간에 손을 번쩍 들고 하시는 말씀이, 본인이 일본 사람이라 약간 걱정을 하셨대요. 일본의 전범 책임이라든가 일본인 혐오라든가 한일 양국의 대립 같은 것이 언급될까 걱정했는데, 막상 와서 들어보니 그런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교육을 통해서 인권을 보장하고 전쟁 없는 세상에서 평화롭게 다 같이 잘 살 수 있을지, 우리 교사들이 머리를 맞대고 고민을 하는 자리여서 너무 좋았다고요. ‘위안부’ 문제를 좀 더 폭 넓게 이해하게 되었고, 이제는 본인도 가르칠 수 있을 것 같다고 말씀을 해주셔서 정말 감사했어요. Q.  그 때 정말 보람이 크셨겠네요. 이 일을 하면서 감사와 보람을 느낄 때가 참 많아요. 지난 6월 19일에 세계 전시성폭력 추방의 날을 맞아 정의기억연대에서 주최한 교사워크숍과 국제 심포지엄에 참석했는데, 그곳에 콩고, 우간다 그리고 코소보 성폭력 피해자와 활동가들이 오셨어요. 저희 발제가 끝난 다음에 그분들이 오셔서 교재를 달라고 하시더라고요. 귀국해서 지침서처럼 쓰시겠다고 하셔서, 정말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교재를 쓰신 교사 중에 크리스티나 탱이라는 분이 계신데요. 탱 선생님은 고등학생 때 우연히 ‘위안부’ 역사에 대해 알게 돼서, 만약 나중에 교사가 된다면 이 문제에 대해 가르치겠다고 자신과 약속하셨대요. 그런데 진짜 고등학교 역사 교사가 되셔서, 그 약속을 지키고 계셨어요. 제가 만나기 몇 년 전부터. 이런 분들과 함께 일하다 보니 정말 감동을 많이 받고 큰 힘을 얻습니다.   가부장제, 전시 성폭력, 미투 운동 - ‘위안부’ 문제는 현재의 현실이다 Q. 미국 학생들에게 ‘위안부’ 문제가 낯설 듯도 한데, 수업 후의 반응은 어떤가요? 고등학교 수업에 가서 직접 강의를 해보면, 아이들이 굉장히 세심하게 잘 들어요. ‘위안부’ 피해자들의 당시 연령이 학생들과 비슷해서 더 잘 공감하고 이해하는 것 같아요. 수업에서 현재 벌어지는 여러 전시 성폭력 문제도 함께 이야기하기 때문에, 이 문제를 한국과 일본의 정치에 국한된 문제로 학생들이 받아들이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위안부’ 문제는 연결되는 주제가 많은 것 같아요. 가부장제라든가, 식민지라든가, 제국주의라든가, 여성혐오라든가. 그리고 불행하게도 이러한 문제가 너무나 많은 나라에서 아직 진행 중이다 보니, 우간다나 콩고에서는 전시 성폭력 문제에 접목을 시킬 수 있을 것 같고, 다른 나라에서도 현재의 문제에 ‘위안부’ 문제를 접목시켜서 교육하는 게 효과적이지 않을까 생각해요.  캘리포니아 주에서는 ‘위안부’ 문제를 제2차 세계대전과 함께 가르치라고 제안하죠. 샌프란시스코 교육위원회에서는 여성 인권 문제와 관련하여 가르치도록 제안하고요. 실제로 둘 다 굉장히 중요한 문제이지만, 막상 저희에게 강의 요청이 들어오는 것을 보면, 요새는 미투 운동 그리고 성폭력, 그 다음에 샌프란시스코의 ‘위안부’ 운동 역사, 이런 것이 제일 많아요. 그러면 저희도 그분들이 알고 싶어 하는 이슈부터 시작해서, ‘위안부’ 문제 관련 사료처럼 기본적인 부분까지 함께 알려드리고 있죠. Q. 미국 내에서는 미투 운동(Me Too Movement)과 같은 맥락에서 할머니들의 피해생존자로서의 증언, 고발과 그 이후 인권운동가로서의 면모에 관심을 두고 있군요. 맞아요. 저는 미투 운동에 대해 이야기할 때, 1990년대에는 미투라는 용어가 쓰이지 않았지만, 피해자 할머님들을 미투 운동의 선구자로 볼 수 있다고 설명해요. 너무나도 불행하게 1990년대에도 고발을 했는데, 지금까지도 고발을 해야 하고 운동을 하고 있으니, 좀 더 많은 사람들이 분발해야 되지 않겠느냐, 이런 이야기를 하죠. 성폭력을 이야기할 때에도,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이 겪은 성폭력, 다른 나라 다른 상황에서 성폭력을 당한 여성들의 이야기도 함께 하고요. 미국은 다인종이 모인 나라이다 보니, 다른 나라 피해자들도 얘기하는 게 너무나 당연해요. 자칫하면 한국 피해자한테만 관심이 있고 다른 사람들 인권에는 관심이 없는 걸로 오해를 살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도 안되고요.   피해자가 스스로 바로잡아가는 역사, 그 어마어마한 움직임과 함께 Q. 계속 활동을 이어가는 힘을 어디서 얻으시나요? 원동력이요? 마음이 맞는 사람끼리 의미 있는 일을 같이 하면서 느끼는 보람, 감동이라고 할까요. 2017년 말에 갑자기 교재를 쓰게 되었는데, 너무나 많은 분들이 열정적으로 도와주셨어요. 샌프란시스코 기림비 건립 발의안을 상정하고 통과시킨 에릭 마 시의원, 기림비 작가 스티븐 화이트, 엘렌 위슨도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기고를 해주셨고, 교재 디자인해주신 분들은 제가 부탁하지 않아도 스스로 개선점을 찾아 작업해주시기까지 했어요. 너무 감사하더라고요. 저희가 비영리단체이다 보니 사례금을 아주 작게 드릴 수밖에 없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사 두 분이 함께 학습안을 쓰셨어요. 나중에 이분들께 작은 사례를 하는데 정말 안 받으시려는 걸 우겨서 드렸어요. 많은 분들이 개인적인 이익을 생각하지 않고 교육을 위해서 열성적으로 동참해 주셨어요. 저희 홈페이지에도 교재 안에 있는 나비 그림이 있는데요. 학습안을 쓰신 페이 콴이라는 교사분이 직접 그려주신 거예요. 정말 이 프로젝트는 완전히 집단의 노력이에요. 저는 협업의 중요성을 진짜 믿습니다. Q.  앞으로 교육 이외의 활동도 더 확대하실 계획인가요? 저는 교육이면 돼요. 다른 것은 많이 부족하고요. 교육은 해왔던 것이고 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하는 거죠. 할 수 있는데 아무것도 안 하면 안 되잖아요. 그런데 이번에 교사들과 한국에 와서 느낀 것인데, 미국 교사들이 한국에 대해 아는 지식이 좀 협소한 것 같아요. 교사뿐만이 아니겠죠, 일본에 의해 강점당한 것, 한국전쟁이 있었던 것. 요 두 가지로만 많이 생각하는 것 같아요. 사실 우리나라가 굉장히 멋진 나라인데 말이죠. 그래서 기회가 닿는 대로 한국 역사, 문화, 사회, 국제사회에서의 역할, 그런 것도 교사들한테 같이 알리고 싶어요. Q. 마지막으로 한국 독자들께 전하고 싶은 말씀 남겨주시겠어요. 우선, 저희를 지지해 주시고 응원해 주시는 분들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제가 이중언어교사였고 언어에 관심이 많아서인지 몰라도, 모든 언어가 동등하게 중요하고 존중받아야 하듯이 모든 사람들의 역사는 중요하고 존중받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힘없는 사람의 이야기가 기록되고 기억되어서, 가진 자들만의 역사가 아닌 모든 이들의 역사가 교육될 수 있게, 좀 더 정의롭고 평화롭고 조금 더 인간적인 사회가 만들어질 수 있도록, 저희 재단은 계속 전진하겠습니다. 그리고 꼭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있어요. ‘위안부’ 운동 역사는 한국에서 ‘위안부’ 피해자들을 중심으로 시작되었잖아요. 그게 운동사의 맥락에서 보면 상당히 큰 의미를 가지고 있죠. 제가 한국인이다 보니, ‘위안부’ 문제를 중심으로 한 국제 이슈에서 한국이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는 사실에 주목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전시 성폭력의 피해자가 주도해서 가해자 중심으로 서술되는 역사를 바로잡았다는 게 어마어마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해외에 사는 교포로서 이 움직임이 한국에서 시작되고 한국에서 이끌고 있다는 걸 국제적으로 알릴 수 있다는 게 기분이 좋고, 참 뿌듯합니다. 사회정의교육재단(Education for Social Justice Foundation, ESJF)은, 미국 학교 역사 교육과정에서 여러 이유로 등한시되고 있는 소수의 역사를, 교육을 통해 학생∙교사∙교수들에게 알리고자 하는 이들이 자발적으로 모여 탄생한 비영리 교육단체이다. 손성숙 대표는 15살에 부모를 따라 미국으로 이민 간 1.5세대로, 언어학과 국문학을 공부한 후 샌프란시스코 교육구에서 한글 이중언어 교육프로그램을 최초로 실시했다. 범아시아계 ‘위안부정의연대’(CWJC·2015년 10월 결성) 교육위 공동의장으로 ‘위안부’ 교육 교재 만들기를 주도했고, 아시아계를 넘어 많은 사람들과 함께 ‘소수의 역사’, ‘잊혀진 역사’를 다시 써 나가고자 사회정의교육재단을 출범시켰다. 사회정의교육재단 홈페이지 http://www.e4sjf.org

    웹진 <결> 편집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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