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그 검색
-
- 2024년 에세이 나치 독일 여성 수용소 ‘라벤스브뤼크 기념관’을 가다
-
과거 청산 '모범국'마저 외면한 성 강제노동 피해자들 독일을 포함해 나치가 점령한 유럽 전역에서 강제로 끌려온 여성들을 격리한 국제 수용소이자 최대 여성 수용소였던 라벤스브뤼크. 강제노동을 비롯해 인체 실험 등 잔혹한 범죄가 자행되었고, 절멸 수용소 역할까지 한 이곳에서 나치는 다른 수용소들의 남성 수인 노동력을 착취하기 위해 만든 '수용소 매춘소'에 동원할 여성 수인들을 차출하였다. 아이러니는 정부와 재계가 협력해 외국인 강제노동 피해 보상을 추진해 '과거 청산 모범국'으로 칭송받는 독일이 성 강제노동에 동원된 여성들은 애초부터 피해 대상에 포함하지 않았고, 지금도 법적 피해자 지위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지난 2월 연구 작업 일환으로 '라벤스브뤼크 강제수용소 기념관'을 다녀온 정용숙 교수의 방문 후기를 싣는다. 지난 2월, 독일 연구 출장 계획을 이야기하던 자리에서 '라벤스브뤼크 수용소 기념관' 방문 후기를 의뢰받고 선뜻 승낙했다. 라벤스브뤼크는 개인적 목적으로 이전에도 두어 번 방문했기에 비교적 잘 알고, 체류 예정지인 베를린에서 그리 멀지도 않아 아무 때고 하루 일정으로 다녀올 수 있는 곳이니 말이다. 다만, 내가 쓸 방문 후기가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가 생각하는 방향과는 조금 다를 수 있는 점이 걸렸다. 한국에서는 주로 독일의 '위안부'와 관련 있는 장소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라벤스브뤼크'의 역사적 의미는 그것을 훨씬 넘어서기 때문이다. 일본 정부 압박 때 자주 소환되는 독일의 한계 동아시아 사회가 넘어서지 못한 과거를 대표하는 일본군'위안부'문제에서 한국인들은 곧잘 독일을 소환한다. '과거 청산 모범국' 독일의 사례를 들어 일본 정부를 압박하기 위해서다. 독일이 이처럼 긍정적인 이미지를 획득한 것은 2000~2007년 정부와 기업이 공동 설립한 <기억 책임 미래 재단 >을 통해 외국인 강제노동 피해자들에게 보상금을 지급한 일이 계기였다. 하지만 독일 내에서는 한계를 지적하는 목소리가 높다. 독일의 대책이 많이 늦었던 데다 내용적으로도 역사 정의의 실현보다는 정치적 해법에 가깝다는 분석이다. 실제로 피해 인정 절차가 엄격해 거부당하거나 배제된 피해자들이 적지 않았고, 지급액도 기대에 훨씬 못미치는 수준이었다. 특히 성 강제노동 피해자들의 상황은 더 심했다. 독일 군대와 친위대가 운영한 '매춘소'에 동원된 성 강제노동 피해자는 애초부터 고려 대상이 아니었고, 지금까지도 이들에 대한 법적 피해자 지위 인정과 배보상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사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은 일본보다 훨씬 체계적으로 '위안부' 시스템을 운영한 국가였다. 독일 군대와 친위대는 자국 영토에 있는 강제 노동자를 비롯해 점령지 내 자국 군대, 나아가 강제 수용소의 남성 수감자를 위해서도 '위안소'를 직접 운영했다. '위안소'라는 명칭은 일본군의 독자적인 명명으로, 독일에서는 성매매 업소에 대한 일반 용어인 '보르델(Bordell)'이라 불렀다. 이 가운데 강제수용소 위안소는 비교적 자세히 연구된 분야인데, 친위대는 수용소 내 남성 수인들의 노동력을 좀 더 효과적으로 착취하기 위해 친위대가 위안소를 직접 운영했다. 여기에 필요한 여성들을 아우슈비츠 비르케나우 수용소와 라벤스브뤼크 수용소의 여성 수인들 중에서 차출했다. [사진 1] 라벤스브뤼크에는 나치의 성 강제노동에 희생된 여성들의 흔적이 남아 있다. [사진 2] 다만 이것은 라벤스브뤼크 수용소 역사의 일부다. 수용소 수감자 80% 이상이 여성 정치범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기 몇 달 전인 1939년 4월, 베를린 북쪽으로 약 90km 떨어진 휴양지 퓌르스텐베르크 인근의 작은 마을 라벤스브뤼크에 새로운 수용소가 문을 열었다. 이곳은 독일을 포함해 나치가 점령한 유럽 전역에서 끌려온 여성들을 격리한 국제적 수용소이자 최대의 여성 수용소로 성장했다. 전체 수감자의 80% 이상이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 반나치 레지스탕스 등 정치범이었다. 히틀러 암살 작전인 '발키리'의 주역 슈타우펜베르크 대령의 부인이 게슈타포에 체포 돼 이송된 곳이 라벤스브뤼크였다. 체포 당시 임신 중이던 그는 수감 상태에서 막내를 출산했다. 전후 프랑스 초대 대통령을 지낸 드골의 조카 제네비에브 드골-안토니오즈도 레지스탕스로 체포 돼 라벤스브뤼크로 이송되었고, 그 경험을 반세기 후에 회고록으로 출간했다. 그러나 라벤스브뤼크에 여성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1941년 소규모의 남성 수용소가 추가됐고, 1942년에는 인접한 우커마크에 청소년 수용소가 들어섰다. [사진 3] 1939년부터 1945년까지 약 30개국 출신의 여성과 어린이 12만 명, 남성 2만 명, 청소년 1,200명이 이곳을 거쳐간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수감자 중 가장 규모가 컸던 집단은 폴란드인으로 약 4만8,500명이었고, 이어 소련(2만8,000명), 독일과 오스트리아(2만4,000명), 프랑스(8,000명) 순이었다. 유대인은 약 2만 명 정도로 알려져 있다. [사진 4] 강제노동부터 의학 실험, 절멸 수용소 역할까지 애초 정치범 수용소였던 라벤스브뤼크는 규모가 커지면서 독일 군수산업에 노동력을 공급하는 강제노동 수용소로 기능했다. 대표적인 군수업체가 인근에 공장을 둔 지멘스였다. 1854년 베를린에서 설립된 전기회사 지멘스는 베를린 인근 수용소들이 공급하는 강제노동의 주요 수요자였다. 그러다 1942년부터 라벤스브뤼크에도 군수품 공장을 짓고 전화기, 라디오, 계측기를 생산했다. [사진 5] 이때문에 지멘스에는 전범기업이라는 오명이 뒤따르고, 1941년부터 1956년까지 지멘스 대표를 지낸 헤르만 폰 지멘스는 1945년 뉘른베르크 전범 수용소에 일시 수용돼 증인으로 심문도 받았다. 하지만 최종적으로는 기소되지 않았다.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라벤스브뤼크 수용소에서는 더욱 가혹한 일들이 자행되었다. 반인도적인 인체 실험이 이뤄졌고, 가스실을 가동해 '절멸 수용소' 역할까지 했다. 1941년부터는 처형장에서 사형이 집행되었다. [사진 6] 전쟁 막바지인 1945년 초에는 화장장 옆 오두막에 임시 가스실이 설치되었다. [사진 7] 그 해 1월 말부터 4월까지 석 달이 조금 넘는 기간에 약 5~6천 명이 가스실에서 살해당했다. 라벤스브뤼크에서 가스실, 교수형, 굶주림, 질병, 의학 실험, 중노동 등 다양한 이유로 사망한 여성 수감자 수가 최소 3만 명, 많게는 5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남성도 소수 있었다. 수인들이 행군한 길을 따라 걷다 베를린 중앙역에서 기차로 약 1시간을 가서 퓌르스텐베르크-하펠역에 내려 라벤스브뤼크로 가는 방법은 두 가지다. 하나는 노선 버스를 이용하는 것. 그러나 나는 기차역에서 라벤스브뤼크까지 약 2km를 직접 걷는 쪽을 택한다. 버스가 자주 오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2차 세계대전 당시 열차로 이송된 수인들이 역에 도착해 수용소까지 행군한 그 길은 피해자들의 고통과 나치 범죄를 기억할 수 있는 역사적 현장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2차선 도로를 따라 이어지는 길은 마을의 가장자리를 지난다. [사진 8] 그 길을 걷다 보면 라벤스브뤼크 수용소 기념관 입구가 모습을 드러낸다. 그 안으로 들어서면 나무 창문과 발코니가 달린 이층집들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잿빛 수용소 분위기와 뚜렷이 대비되는 목가적인 풍경이다. 이곳은 여성 수인들을 감시하는 여성 경비원들의 숙소로, 일부는 자녀들과 함께 살기도 했다. 원형이 잘 보존된 8개의 건물은 내부 개조를 거쳐 2002년부터 국제청소년교육센터와 유스호스텔로 사용되고 있다. 90여 개의 침대를 갖춘 기숙사 3개 동과 세미나 동, 식당으로 이뤄져 있다. 예전에 라벤스브뤼크 기념관이 매년 주최하는 여름대학에 참가했을 때 며칠 머물렀던 적이 있는데, 발코니에서 푸른 숲과 호수가 내려다보이는 아름다운 곳이다. 그러나 같은 공간이어도 몸의 각도를 틀면 다른 상상을 하게 된다. 경비원 구역과 구분되는 건너편이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수감자들의 막사와 가스실이 있던 자리였기 때문이다. [사진 9] 고문과 살해 등 악명 높았던 여성 감시관 직업의 출발지 수용소 여성 경비원들은 '여성 감시관', 독일어로 '아우프제어린(Aufseherin)'이라고 불렸다. 20세에서 40세 사이 젊은 여성 중에서 모집된 그들은 잔인하고 가학적인 구타, 고문과 살해로 악명이 높았다. 라벤스브뤼크는 특히 여성 감시관 훈련소라는, '특이한' 직업의 출발지 역할을 한 수용소이기도 했다. 이곳에서 경력을 쌓아 아우슈비츠 비르케나우, 베르겐벨젠 등 '죽음의 수용소'로 옮겨간 여성 감시관 규모는 약 3,500명. 그러나 이들 가운데 전범 재판에 회부된 여성 감시관은 77명에 불과했고, 실제로 유죄 판결을 받은 사람은 극소수였다. 여성 감시관들은 대개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학교를 일찍 그만두고 변변한 직업 교육도 받지 못한 하층계급 여성들이었다. 좋은 임금과 무료 숙식 그리고 멋진 제복이 보장되는 감시관은 분명 괜찮은 직업이었을 것이다. 10대 시절 나치 청소년단체에서 인종주의 이데올로기에 세뇌되었다면 감시관이라는 직업은 적과 싸우고 조국에 봉사하는 가치있는 일이라는 확신도 있었을 것이다. 1995년 독일에서 출판된 소설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는 바로 이 나치 여성 감시관을 다룬 작품이다. 소설 속 여주인공, 동명의 영화에서 배우 케이트 윈슬렛이 연기한 인물 '한나'는 공장 노동자였다가 여성 감시관이 된 인물이다. 한나는 '문맹'이라는 남모르는 장애와 그 결과인 무지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여성 감시관이 되었고 평생 속죄하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이 소설을 나는 나치 범죄에 직접 연루되지 않은 전후 세대 독일인들이 앞 세대의 죄와 씨름하는 이야기로 읽었고, 죄와 사랑에 대한 깊은 문제의식은 오래도록 여운을 남겼다. 그러나 궁여지책으로 감시관이 되었다는 설정은 논란이 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전후 서독에서 나치의 전직 여성 감시관들은 '무력한 조력자'를 자처하며 자신들의 죄를 회피하기에 급급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상 당시 수용소 감시관이라는 직업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 결코 아니었다. '그 일'의 끔찍한 실체를 깨닫고 떠난 사람들이 있었고, 그들은 불이익을 받지 않았다. 라벤스브뤼크 기념관에는 여성 감시관 숙소 외에도 수용소장과 친위대 장교 관사, 본부 건물도 잘 보존되어 있다. 수인 막사와 사령부 건물, 경비원 숙소 등을 모두 내려다볼 수 있는 언덕 위에 자리했던 소장 관사는[사진 10] 전쟁이 끝나고 1977년까지 소련군의 장교용 관사와 사무실로 사용됐다. 이곳을 비롯해 호수 주변의 기념관 시설 등 일부를 제외한 수용소 전체 부지는 1994년까지도 군사 목적으로 사용되었다. [사진 11] 이중 삼중으로 배제된 성 강제노동 피해자들 수용소 본부 공간을 개조해 2013년 개관한 건물 2층에는 친위대의 수용소 성 강제노동 관련 기록을 볼 수 있는 <라벤스브뤼크 여성 수용소. 역사와 기념> 상설전이 열리고 있다. [사진 12] 지금까지 파악된 수용소 성 강제노동 피해자는 모두 210명, 그 중 이름이 확인된 이는 174명이다. 절반 이상이 독일인 여성이고 나머지는 폴란드인, 러시아인, 동유럽인, 네덜란드인 등이었다. 절대 다수인 85%가 '사회부적응'을 이유로 끌려온 사회적 약자들이었다. 여기에는 부랑자, 극빈자, 성매매 여성, 레즈비언 등이 속했고 검은 역삼각형 표지를 착용하도록 했다. [사진 13] 반면 남성 동성애자는 검은색이 아닌 분홍 역삼각형 표지로 구분했고 '사회부적응'에도 속하지 않았다. 상설 전시는 수용소의 역사와 함께 기념관을 설립하는 과정의 역사도 다루고 있다. 전쟁이 끝난 후 라벤스브뤼크는 소련군 관할을 거쳐 구동독 지역에 속했다. 소련군은 수용소 부지와 건물들을 자신들의 군사적 목적에 사용했는데, 생존 희생자들은 수용소 일부만이라도 보존하기 위해 노력했다. 1948년 9월에 첫 추모식이 열렸고, 화장장 주변에서 발견된 유골들을 수습, 매장한 묘지가 조성되었다. 1959년 라벤스브뤼크 수용소는 구동독 정부에 의해 국립 기념관이 되었다. 이때 건축가들은 화장장과 감옥 등 옛 수용소 건물 일부와 4m 높이의 수용소 담장 일부를 기념관에 포함시켰다. 훗날 '통곡의 벽'으로 불리는 수용소 담장의 서쪽 구역 밖에는 다시금 묘지가 조성되었다. 빌 라메르트(Will Lammert)의 청동 조각 '짐을 진 여인들(Die Tragende)'도 이때 만들어진 것이다. '통곡의 벽'과 그 앞에 자리한 '짐을 진 여인들'은 기념관 디자인의 핵심으로 1950~1960년대 동독 기억 문화의 시각적 측면을 보여준다. [사진 14] 구동독 초기에 설립된 라벤스브뤼크 국립 기념관은 독일 재통일 후인 1993년 라벤스브뤼크 기념관(Ravensbrück Memorial)으로 재단장해 오늘에 이른다. 독일 연방 정부와 브란덴부르크 연방주의 지원을 받는 브란덴부르크 기념재단(Stiftung Brandenburgische Gedenkstätten)이 관리하고 있다. 희생자들의 출신국명이 부착된 '통곡의 벽'과 '짐을 진 여인들'은 구동독 시기 기억문화의 유물로 지금도 여전히 라벤스브뤼크 기념관의 상징으로 남아 있다. 소녀상과 라벤스브뤼크의 기억 문화 2019년 초 라벤스브뤼크 기념관에서는 일본군'위안부'를 상징하는 소녀상 철거 소동이 있었다. 문제가 된 것은 베를린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시민단체 '코리아페어반트'에서 2017년 기념관에 선물한 작은 소녀상이었는데, 이를 알게 된 일본대사관 측에서 항의와 함께 집요하게 철거를 요구했다. 작은 소녀상은 기념관 상설 전시에 속하지 않았기 때문에 기념관 측은 해당 소녀상을 치우는 것으로 사태를 마무리했다. 당시 인자 에셰바흐(Insa Eschebach) 관장은 "이 조그만 모형이 그렇게 큰 일이 될 줄은 상상도 못했다"며 고개를 저었다. 2월 초 기념관을 찾은 날은 우연히도 새로운 특별전 개관일이었다. 전시 주제는 <나치 시대의 동성애>였다. 소규모인 전시 패널에는 라벤스브뤼크 수감자였던 중국인 여성 나딘 황의 이야기도 만날 수 있었다. [사진 15] 중국 외교관의 딸이었던 나딘은 1944년 레지스탕스 혐의로 라벤스브뤼크에 끌려왔다가 벨기에 레지스탕스인 오페라 가수 넬리 무셋-보스를 알게 된다. 수용소에서 만나 평생의 반려자가 된 두 여성은 한동안 헤어지기도 했지만 끝내 생존했고, 전쟁이 끝난 후에는 부부가 아닌 사촌이나 친구로 가장해 여생을 함께했다. 이들의 드라마틱한 이야기를 담은 다큐멘터리 <넬리와 나딘>은 2022년 EBS국제다큐영화제에 선보여 큰 주목을 받기도 했다. 여성 수감자들의 국적이 다양했던 만큼 생존자들은 이후 각국에서 라벤스브뤼크 생존자 단체를 꾸려 활동하였다. 일반적으로 나라마다 문화권마다 저마다의 기억 문화를 반영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동유럽과 서유럽에 광범위하게 걸쳐 있는 라벤스브뤼크 희생자 국제 연대는 구동독 시기부터 라벤스브뤼크 기념관의 기억 문화가 만들어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고, 그 전통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
- 2024년 논평 Uncovering the Tragic Legacy: Movement for the Victims of Japanese Military Sexual Slavery in Timor
-
본 콘텐츠는 영문으로 발행되었습니다. 오른쪽 상단의 [EN]을 클릭하여 영문 웹진 <KYEOL>을 통해 보실 수 있습니다.
-
- 2024년 인터뷰 국제사회 왜곡 막고 공감 넓힐 영문 ‘위안부’ 증언집 발간되길
-
징 윌리엄스 사회교육학 부교수 & 필리스 김 CARE 대표 인터뷰 <2부> 미국 사우스다코타대학교 사회교육학 징 윌리엄스 교수와 '배상과 교육을 위한 '위안부' 행동'의 필리스 김 대표, 미국인들에게 '먼 나라의 오래전 불행한 역사'라 할 수 있는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꾸준히 제기하고 인권 문제로 접근해 교육하고 활동하는 이들이다. 2018년에 처음 만난 이후 '위안부' 문제 연대 활동을 해온 두 사람은 현재 공동 저술 작업을 진행 중이다. 내년쯤 나올 예정인 이 책은 미국에서 '위안부' 문제를 가르치는 방법을 담은 첫 번째 출간물이 될 예정이다. 웹진 <결>은 연구차 한국을 방문한 징 윌리엄스 교수와 서울에 체류 중인 필리스 김 대표를 인터뷰해 2회에 걸쳐 싣는다. <1부> 미국 사회에서 '위안부' 문제는 자국중심주의 극복하는 글로벌 시민교육 <2부> 국제사회 왜곡 막고 공감 넓힐 영문 '위안부' 증언집 발간되길 교육 현장에서 활용할 수업 지도안, 자료집 중요 Q. 사실 지금 한국에서는 '위안부' 강제 동원 사실 등을 부정하고 오히려 왜곡하는 역사 수정주의가 강화되고 있고, 그들의 주장이 인터넷에 광범위하게 유포되면서 이를 접한 학생들이 선생님을 공격하거나 수업을 흐트러뜨리는 경우가 자주 발생하고 있습니다. 미국 사회에도 그런 분위기가 보이나요? 🧶 징 윌리엄스 : 사실 미국에서 '위안부' 문제를 가르치면서 부정하거나 공격당한 경험은 없습니다. 자료를 준비할 때 CARE에서 받은 자료, '위안부' 할머니들의 이송 근거 같은 일본 정부의 기록, 또 미군의 증언 등 역사적 자료를 기반으로 하고, 강의가 서로의 생각이나 의견을 나누는 대화와 토론 방식이라 공격적인 태도를 드러내기 어려울 겁니다. 다만 아직도 이 역사를 부정하는 사람들이 있으니 우리는 잘못된 의견에 맞서 싸워야 한다는 설명을 덧붙이기는 합니다. 🧶 필리스 김 : 2016년에 캘리포니아 주 교과 과정에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포함시키기 위한 캠페인을 할 때 주 교육부에서 주최한 큰 공청회가 있었어요. 다양한 이슈가 논의된 그 자리에서도 '위안부'는 거짓말이다, 매춘부였다, 포함되면 안 된다는 주장이 나왔는데 결국 이사회에서 저희의 주장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결정됐어요. 그랬는데 마지막에 주 교육부 관계자가 나와서 '뜨거운 논쟁이 있었던 이슈가 몇 가지 있다, 그중 하나가 '위안부' 문제였다, 상반되는 의견이 팽팽해 타협안으로 '위안부' 문제를 포함시키되 마지막에 한국과 일본 정부가 2015년에 '위안부' 문제에 대해 합의했다는 문구와 함께 일본 외무성의 링크를 포함을 시키기로 했다'는 발표를 했어요. 그 상태로 개정안이 통과가 된 거예요. 나중에 알고 보니 당시 일본 정부만이 아니라 한국 정부도 주 교육부에 와서 그렇게 해달라고 요청했더라고요. 저희도 할 말이 없었어요. 그래서 교육 현장에서 활용할 수업 지도안이나 자료집이 더욱 중요해요. 어쨌든 '위안부' 문제가 주제로 포함되기는 했으니까 선생님들을 돕는 자료집을 만들었어요. 선생님들이 이용하기 쉽게 온라인에도 올리고요. 그런데 한 번은 사회학 컨퍼런스에 설치한 우리 부스에 한 교수님이 와서 캘리포니아 교사들을 위한 '위안부' 문제 자료집을 만들고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잘됐다 하면서 초안을 공유해주면 피드백을 드리겠다고 했어요. 초안이 왔는데, 문제는 일본측 시각이 강한데다 2015년 합의문을 과도하게 분석하는 등 적절한 자료에 근거하지 못한 내용이 상당했어요. 일본이 엄청난 예산을 들여 왜곡된 주장을 많이 퍼트려놨기 때문에 그런 정보를 접하기가 쉬웠을 거예요. 바로 연락해 여러 참고문헌과 자료를 제공하면서 저희를 언급하지 않아도 좋으니 잘못되거나 오해할 수 있는 부분은 꼭 반영해 달라고 했어요. 결과물에 100%는 아니지만 다행히 꽤 반영이 됐고요. 한편으로는 일본과 대조적으로 다양한 자료 제공에 소극적인 한국 현실도 많이 아쉬웠어요. 할머니들이 증언하신 지가 30년이 넘었는데 학술적으로 '사이테이션(citation)', 공식적으로 인용할 수 있는 증거 자료가 정말 부족하거든요. 사실 교사나 학생, 나아가 연구자들에게 할머니들의 증언만큼 중요한 출처이자 진실이 어디 있겠어요. 일본 공문서도 1차 자료로 중요하지만 할머니들의 증언에는 거기에 담기지 못한 진실이 훨씬 많잖아요. 할머니들을 모시고 '스피킹 투어'를 다니다 보면 '서바이버', 즉 피해자들의 목소리가 얼마나 힘있는 자료인지 느낄 수밖에 없어요. 미국에서는 지금도 항상 억눌려진 피해자들의 목소리를 더 들어야 한다는 '피해자 중심주의'가 화두라 '위안부' 문제에서도 피해 할머니들의 목소리와 생생한 증언이 제대로 전달이 되는 게 너무나 중요한데 이걸 인용할 수 있는 학술적인 증언집이 없다는 게 너무나 안타깝고, 빨리 해결해야 할 문제라고 꼭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 Q. 저희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가 중요한 숙제를 받은 것 같습니다. 🧶 필리스 김 : 그동안 비매품으로 번역되어 나온 증언집이 있긴 한데, 많은 할머니들이 익명으로 처리돼 있어요. 또 시대적 배경이나 문화적 차이 등에 대한 설명, 할머니들의 증언도 여러 이유로 오해할 수 있는 부분을 불식시킬 수 있는 설명 등을 담은 영문 번역집을 제공하는 게 정말 필요해요. 일본 정부의 역사 수정주의가 자금력을 바탕으로 추진되고 있어 저희도 우려를 하면서 휘둘리지 않기 위해 신경을 많이 쓰고 있습니다. Q. 수업 지도안이나 교재를 적용하다 보면 현장에서 수정 아이디어나 보완이 필요한 사항이 발견되기도 합니다. 혹시 '위안부' 수업을 하면서 접한 에피소드가 있을까요? 🧶 징 윌리엄스 : 자료는 오랜 시간 고민하며 준비하기 때문에 대부분의 학생들이 만족합니다. 학생들이 '위안부' 피해 할머니의 경험에 많이 공감하고 정서적으로 유대감을 쌓는 경험을 하게 되고요. 강의 후 설문조사를 할 때 만약 할머니를 실제로 만날 수 있으면 어떤 말을 하고 싶은지 물어봤는데 '사실 어떤 말을 해야 될지 모르겠다. 그 어떤 말로도 위로가 되지 않을 것 같다. 다만 꼭 드리고 싶은 말씀은 할머니의 이야기를 우리는 이미 들었고 알고 있고 전혀 잊지 않았고 우리가 대신 분노하고 있기 때문에 억울해하지 마셨으면 한다'는 반응이 기억납니다. "제 '위안부' 강의 보호가 가장 큰 어려움" Q. 과정에서의 어려움, 그러니까 미국 사회에서 '위안부' 문제를 가르치는 교육자로서의 어려움 혹은 도전 과제도 있을 것 같습니다. 🧶 징 윌리엄스 : 제 강의가 항상 효과적이고 실용적이어야 하지만 동시에 사우스다코타라는 주와 어느 정도 연관이 있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무슨 말씀이냐면 제가 가르치는 주제와 미국 주의 기준이 어느 정도 맞아야 된다는 거예요. 사우스다코타는 굉장히 보수적인 주이고 주지사가 '글로벌 스터디스(Global Studies)'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분이기도 합니다. 사우스다코타 고등학교에서는 2차 세계대전이 왜 발발했는지, 전 세계가 어떤 영향을 받았는지 등을 가르쳐요. '위안부'는 그 전쟁의 일부이자 일부의 역사라는 생각으로 가르치고 있는데, 저로서는 제 강의를 보호하는 일 자체가 가장 큰 어려움이기도 합니다. 🧶 필리스 김 : 저의 도전과제를 말씀드리면, 사실 모든 활동이 도전입니다. 교육은 교실에서만 이뤄지지 않잖아요. 저희 단체 이름이 '배상과 교육을 위한 위안부 행동'인데, 배상 파트가 있고 교육 파트가 있어요. 배상에는 금전적인 요구만이 아니라 영어로 '리드레스(redress)', 원래 상태로 복구시키는 모든 것을 아울러요. 그런 의미에서 할머니들에게 정의를 가져다 드리는 모든 캠페인, 의료 지원 활동, 또 소녀상을 세우는 활동도 배상 활동입니다. 교육 활동은 배상을 위한 캠페인, 액티비즘하고 많이 겹쳐요. 예를 들면 저희가 많이 한 소녀상과 기림비 설치 운동은 인식을 높이는 과정에서 교육적인 효과도 있으니까 배상 활동인 동시에 교육 활동이에요. 소녀상 설치를 추진하는 분들과 협력해 캠페인을 하고, 컨퍼런스를 열고, 독일어 등 현지어로 교육 자료집을 만들어 나눠드리는 일이 다르지 않고요. 또 계속 새로운 일을 만듭니다. 학생들이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해마다 콘테스트를 열고 있어요. 첫 해는 그림, 이듬해는 동영상, 세 번째는 에세이 순으로 콘테스트를 했는데, 학생들이 점점 적극적으로 참여해 창의적이고 훌륭한 작품도 나와요. 한 고등학생은 애니메이션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싶다고 연락이 와서 이용수 할머니와 연결시켜드렸더니 너무나 훌륭한 10분 분량의 애니메이션을 제작했더라고요. 작년부터는 기부를 받아 미국 소재 6개 대학교에 장학금을 지원하는 일을 시작했어요. 장학금을 받은 분들은 프로젝트를 해요. 그림이나 영화, 음악이 될 수도 있고 연구 과제도 가능해요. 저희는 다 모아서 발표회를 열고요. 올해도 진행 중인데, 오는 7월과 8월 중순에 각 2명씩, 그 장학금을 받는 학생 중 4명이 한국을 방문할 예정이에요. 연구소도 방문할 기회가 있으면 좋겠네요. 교수님 중에도 관심을 나타내는 분들이 있어요. 그런 식으로 미국 사회에 '위안부' 문제에 대한 관심을 당연한 것으로 만들기 위한 작은 씨앗을 심는 거죠. 또 '영원한 증언 프로젝트', 연구소의 지원을 받아 진행한 1차 번역 프로젝트를 기반으로 한 'UCLA 한국학연구소' 온라인 아카이브도 만들고 있어요. 아카이브에는 정리를 마친 1차 자료뿐 아니라 다큐나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할머니들 증언이나 인터뷰도 올렸어요. 수업 지도안 같은 자료도 조만간 업로드 할 예정입니다. 또 한 가지 중요한 일은 소녀상을 세운 다음 그곳을 중심으로 계속 활동이 있어야 돼요. 저희는 할머니가 돌아가실 때마다 거기서 추모제를 지냈어요. 그때 항상 커뮤니티 동포들이 와주시고 중국계, 아르메니아 분들도 와서 같이 추모했어요. 계속 관심을 갖게 하기 위해서 연례 행사도 하고요. 작년에 10주년 행사를 크게 했죠. 올해는 캘리포니아 LA시에서 운영하는 사회정의박물관에서 '위안부' 문제와 함께 할머니들의 목소리를 알리고 학생들의 예술 작품을 포함한 전시회도 열고 있어요. 징 교수님도 도와주셨어요. 또 '위안부' 문제에 관심있는 교수님들이 저를 직접 부르는 경우가 있어요. 액티비스트 관점을 학생들한테 알려주고 싶은 거죠. 이 이슈가 많은 이들에게 알려지고 호응을 얻게 된 이유가 여러 캠페인을 하면서 싸움이 일어나고 논란이 증폭되면서 왜 그럴까 하는 관심으로 옮아가는 거잖아요. 학생들한테 사회 변혁을 위해서는 시민들의 풀뿌리 운동이 중요하다는 걸 가르치는 거예요. 그런 분들은 너희가 해온 활동에 대해서도 알려달라는 요구를 하세요. 저희가 '위안부' 문제와 함께 미국에서 어떤 활동이 있었는지 이야기를 해주면 학생들이 굉장히 관심 있어 해요. 나중에 보면 중고등학교 때의 인연으로 대학에 가서도 계속 관심을 가지고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찾는 학생도 있는데, 그럴 때 엄청난 보람을 느낍니다. 미국에서 '위안부' 문제를 가르치는 방법 담은 첫 출판물 준비 중 Q. 말씀 중에 글렌데일 소녀상 이야기가 잠깐 나왔습니다. 소녀상과 관련해 민감한 이슈가 생기고 있는 상황이라 글렌데일 소녀상의 근황을 여쭤봅니다. 🧶 필리스 김 : 상징성이 큰 글렌데일 시 평화의 소녀상은 시의회에서 정식으로 통과된 다음 시에서 제공한 부지에 세워졌어요. 부지에 약간의 변동 사항이 있긴 했지만 시 소유라 잘 보호되고 있습니다. 시를 상대로 한 일본의 철거 소송도 이겨냈거든요. 저희가 소녀상을 반드시 공공부지에 세워야 한다고 노래를 부르는 이유가 그런 안전성, 안정성 때문이에요. 지금도 일본 총영사가 바뀔 때마다 대놓고 소녀상을 없애는 것이 최우선 목표라는 얘기가 들리지만, 글렌데일 소녀상은 크게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Q. 듣던 중 반가운 소리입니다. 두 분은 협업하며 액티비스트 못지않게 많은 활동을 해오셨습니다. 자료 조사를 하던 중 지금 책 발간 작업을 함께 하는 중인 걸 알았습니다. 어느 정도까지 진척됐고 각각 어떤 내용을 담을 예정인지 궁금합니다. 🧶 징 윌리엄스 : 작년에 필리스 김 대표님과 미국 유일의 사회학 교사 단체인 '전미사회학컨퍼런스(NCSS)'에 함께 참가했어요. '위안부' 관련 책을 출판할 수 있는 공신력 있고 잘 알려진 출판사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얘기를 나눴습니다. 출판물이 있으면 선생님들이 많은 걸 배울 수 있겠다 싶어서요. 같이 그런 출판사를 찾아 헤맸는데 잘 안됐어요. 그러다 NCSS에서 출판됐다고 하면 많은 선생님들이 공신력을 믿고 사용할 것 같아 저희가 제안을 했습니다. NCSS도 저희 제안에 관심이 많은데, 출판되면 미국에서 '위안부' 문제를 가르치는 방법을 담은 첫 번째 출간물이 될 겁니다. 다만 NCSS에서는 '위안부' 문제만이 아니라 인권 문제, 성별 문제 등 연관될 수 있는 다른 주제도 함께 포함해 달라는 조언을 받았습니다. 목차를 개략적으로 말씀드리면 첫 번째 챕터는 '위안부'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으로 시작합니다. 구조를 보면 각 챕터가 있고, 그 챕터 관련 내용과 함께 가르칠 수 있는 45분 정도 분량의 레슨 플랜, 수업 지도안으로 구성됩니다. 질문 중에는 '위안부'는 누구인가, 전 세계가 '위안부' 문제를 어떻게 알게 되었나, 이 '위안부' 문제에 대해 일본 정부는 어떻게 반응하는가, 수요시위는 무엇인가, 그리고 미국은 '위안부' 문제에 어떻게 반응하고 있는가, '위안부' 할머니들의 증언이 왜 이렇게 뜨거운 논쟁인가, 지금 생존하고 계시는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은 어떤 이야기를 하는가 등이 있습니다. 또 한국과 일본 간 2015년 협상은 어떤 내용이고, 무슨 문제가 있는가, '위안부'에게는 인권이 있는가, 그리고 가장 최근 '위안부'를 부정한 사건은 무엇인가, 이런 내용들입니다. 말씀드렸다시피 각 토픽에 대한 내용이 나오고 옆에는 레슨 플랜을 제시하고 있어 역사를 배우면서 가르치는 방법까지 깨닫게 되는 출판물입니다. 또 '위안부' 할머니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는 영어 어린이책, 다큐멘터리 리스트 등과 함께 할머니들의 증언과 자료도 정리할 거예요. 미래 선생님들이 지도안을 만들 수 있도록 최대한 풍부하게 자료를 담을 예정입니다. 🧶 필리스 김 : 이 한 권을 보면 어느 정도 믿고 가르칠 수 있는 자신감이 생길 수 있는 책을 만들려고 합니다. 미리 말씀 드리는 건 부담스러운데, 내년에 나올 수 있도록 애쓰고 있습니다. Q. 출판이 돼 국내 교육에도 활용되길 기대하겠습니다. 책이 나오면 한국의 교사들도 영감을 받을 거 같은데, 미국과 한국의 역사 교사들이 협업해 볼 수 있는 기회나 방법도 좀 있을까요? 🧶 필리스 김 : 사실 한국, 중국, 일본 교사들 간 협업은 여러 차례 있었고, 아시아평화와역사연구소에서도 의미 있는 활동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아요. 제가 한국이라는 특성 때문에 어려운 지점으로 생각하는 부분은 '위안부' 문제를 너무 민족주의적인 관점으로 보는 거예요. 미국이나 다른 나라에서는 보편적인 여성 인권 문제로 보거든요. 이런 관점이 우리 한국 사회 내 인식에도 상당히 변화를 줄 수 있지 않을까, 그런 기대와 바람이 있습니다. 관련해 선생님들의 역할이 굉장히 중요한 축이 될 수 있겠다 싶습니다. 선생님들께 응원을 전합니다. Credit 인터뷰어: 손정미, 소현숙 인터뷰이: 징 윌리엄스 사회교육학 부교수, 필리스 김 CARE 대표 글/정리: 손정미 사진 : 팝콘(popcon) 인터뷰 일시: 2024년 6월 3일 월요일
-
- 2024년 에세이 까맣게 굳은 소독약과 파편들… 할머니는 왜 그렇게 오래 간직하고 있었을까
-
까맣게 굳은 소독약과 파편들… 할머니는 왜 그렇게 오래 간직하고 있었을까 《상하이 중국'위안부'역사박물관》 1931년 일어난 만주사변, 1937년부터 중국 전국토에서 전개된 중일전쟁, 1941년부터 1945년까지 벌어진 아시아・태평양전쟁에 이르기까지, 일본 제국주의의 광범위한 침탈 현장이었던 중국은 당시 일본군이 조직적으로 운영한 위안소의 역사가 녹아있는 현장이기도 하다.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는 지난 6월 19일부터 21일까지 사흘 동안 아시아 지역 일본군'위안부' 문제 연구와 함께 일본군'위안부' 관련 기억의 전승을 위한 중국의 노력 등을 살펴보기 위해 가장 치열했던 전장인 난징과 상하이를 찾았다. 현지 일본군'위안부' 유적지 및 박물관 탐방기를 3회에 걸쳐 싣는다. (1) 중국 위안소 유적지·박물관 탐방기 1부 - 난징 리지샹위안소 유적전시관 (2) 중국 위안소 유적지·박물관 탐방기 2부 - 상하이 중국'위안부'역사박물관 (3) 중국 위안소 유적지·박물관 탐방기 3부 - 상하이 훙커우구 일본군 위안소 유적지 본격적인 더위가 시작되기 전인 6월 중순이었지만 중국 상하이는 매우 습하고 무더웠다. 간간이 내리는 부슬비 덕분에 숨이 턱턱 막히는 더위를 그나마 피할 수 있어 다행이었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를 맞으며 상하이 남역에서 택시를 잡아타고 가기를 10여 분, 도착한 곳은 상하이사범대학교 앞이었다. 이곳에 우리가 방문하려는 '중국'위안부'역사박물관'이 있다. 정문 앞에서 박물관의 정확한 위치를 찾기 위해 지도를 보니, 공교롭게도 근처에 중일우호공원(中日友好园)이 있다. 중국과 일본의 우호관계를 다지며 세운 공원 옆에 '위안부' 박물관이라니… 진정한 우호 관계를 이루기 위해서는 어두웠던 과거의 역사를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는 의지가 담겨 있기를 바라며 학교 안으로 들어섰다. 상하이, 자료상으로 발견되는 최초의 위안소가 지정된 곳 중국 문화와 경제의 중심지이자, 서구식 건물들이 즐비한 와이탄과 예원노가(豫园老街)의 전통 상가들이 조화를 이루는 곳 상하이. 서울 면적의 10배가 넘는 이 거대한 도시는 오늘날 중국을 넘어서 아시아의 상업과 금융 거점이자, 동서양의 문화가 융합된 매력적인 도시로 꼽힌다. 그러나 이 화려한 도시 상하이는 불과 한세기 전 참혹한 전쟁의 그늘을 피하지 못한 곳이기도 하다. 1930년대 일본 제국주의가 벌인 침략전쟁의 주요 전장이었던 상하이는 일본군'위안부' 제도의 발상지이자, 위안소가 가장 오래 존재한 곳이라는 참혹한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1932년 상하이 사변을 기점으로 상하이에 주둔한 일본 해군 육전대는 군인들에게 소위 '위생적' 성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해군 특별위안소를 지정했다. 이것이 자료상으로 발견되는 최초의 위안소이다. 이를 기점으로 만들어지기 시작한 위안소는 1937년 일본의 전면적인 중국 침략 과정에서 급격히 증가해, 현재까지 밝혀진 바에 따르면 상하이 안에서만 무려 180곳이 넘는 위안소가 존재했다. 순간 이렇게 가파르게 늘어난 위안소의 규모가 수많은 여성이 '위안부'로 강제 동원되었음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어두운 역사를 품고 있는 상하이에 중국'위안부'역사박물관이 자리잡고 있는 것이 당연하게 느껴진 순간이었다. 상하이사범대학 안에 중국'위안부'역사박물관이 설립된 것은 이 학교의 교수로 재직해 온 쑤즈량(蘇智良) 교수의 역할이 컸다. 1990년대 일본에 방문 학자로 갔던 쑤즈량 교수는 이를 계기로 '위안부'문제의 중요성을 인식했다. 그리고 1999년 상하이사범대학교에 '중국'위안부'문제연구센터'를 설립하고 이 문제와 관련된 연구에 매진했다. 대표적인 활동이 약 50명의 특별연구원과 함께 중국 전역을 조사해 피해 생존자들을 찾고 그들로부터 증언을 듣고 자료를 모은 것이었다. 이러한 활동에 힘입어 2007년 소규모 자료관이 설립됐고, 2016년 오늘날과 같은 역사박물관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박물관의 규모는 그리 크지 않았다. 중국 정부가 운영하는 난징의 대도살기념관(侵华日军南京大屠杀遇难同胞纪念馆)이나 난징 리지샹위안소 유적전시관과 비교하면 소박한 편이었다. 하지만 이 작은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유물이 약 2만 점에 달한다. 전시된 것은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고 하니 전시장 공간만 보고 과소평가할 수 없는 곳이다. 더구나 지금도 중국 곳곳에서 '위안부'와 관련된 유물들이 기증되고 있다고 한다. 쑤즈량 교수는 특히 중국에 거주하는 '위안부' 피해 생존자들의 육성을 담은 궈커 감독의 다큐멘터리 <22>가 2017년 중국에서 개봉해 크게 흥행하면서 이 문제에 관한 중국인들의 관심이 커진 후 많은 성금과 함께 관련 자료를 발굴해 제보하는 사례가 늘었다고 전했다. 앞으로 어떤 자료와 유물이 새롭게 발굴돼 공개될까, 미래를 기대하게 하는 설명이었다. 차분한 분위기의 전시장 입구에서 가까운 벽에 붙은 패널에는 '위안부' 동원의 역사에 대한 전반적인 설명과 더불어 상하이의 대표적 위안소를 안내하고 있었다. 그리고 피해 생존자들의 사연, 증언과 함께 콘돔, 성병약 등 위안소에서 사용된 물품들과 전쟁 시기의 사진과 지도, 그릇, 화장품, 호구부 등 다양한 유물들이 당시의 상황을 증거하고 있었다. 그중 중국인 위안부 피해자 레이꾸이잉(雷桂英) 할머니가 위안소에서 가지고 나온 소독약품 과망간산칼륨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위안소에서 소독약으로 쓰던 것을 할머니가 들고나와 전후에도 계속 보관하고 있다가 기증한 것이라 한다. 까맣게 굳어버린 소독약에 세월이 켜켜이 쌓여있다. 할머니는 왜 이 소독약을 들고나와 그렇게 오래 간직하고 있었던 걸까. 콘돔 두 개의 파편이 담긴 병도 눈에 띄었다. 도쿄 나가노에 살던 전 일본 해병대 장교가 소유하던 것으로, 그는 전쟁 중 상하이에서 해군 위안소를 관리했다고 한다. 까맣게 말라버린 파편을 오래 바라봤다. 저 작은 도구가 얼마나 많은 여성을 고통으로 몰아넣은 도구로 쓰였을까, 보고 있지만 그 사실은 실감나지 않았다. 조선인 '위안부' 피해자의 호구부가 전하는 먹먹한 사연 유물 중에는 조선인 '위안부' 피해자의 것들도 있었다. 그 가운데 1922년생으로 전라북도 출신 모은매(毛銀梅) 할머니의 호구부가 있다. 그녀의 원래 이름은 박차순이었다. 할머니는 1945년 초 취업을 알선해준다는 일본인에게 속아 중국 우한으로 끌려왔고, 곧 한커우의 위안소로 보내져 '위안부'가 되었다. 일본이 패망하면서 허베이 샤오간으로 탈출한 그녀는 이후 중국식으로 이름을 바꾸고 현지에 남는 길을 선택했다. 어린 나이에 타지로 끌려와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은 후에도 끝내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박 할머니의 사연과 유품을 보는 내내 가슴이 먹먹했다. 박물관에는 피해자의 유품이나 가해 군인들이 쓰던 물건들 외에 위안소 모습을 재현해 둔 공간도 있었다. 특히 재현된 위안소에 달린 문짝은 실제 하이나이자(海內家) 위안소에 있던 것을 그대로 가져와 복원한 것이었다. 1939년 설립된 하이나이자 위안소는 일본 해군이 사카시타 쿠마조라는 일본인에게 전권을 위임해 운영하게 한 위안소였다. 당시 사카시타 쿠마조는 상하이에서 콩자반 가게를 하던 이였는데, 아내의 반대를 물리치고 '국가'를 위해 힘을 기울여달라는 해군의 요구에 부응해 합작으로 위안소를 만들었다. 물론 이 위안소에도 조선인 '위안부'들이 있었다. 아주 좁은 방에 침상과 몸을 씻기 위한 양동이 몇 개가 덩그러니 놓인 위안소의 모습에 마음이 점점 착잡해졌다. 중국'위안부'역사박물관의 가장 큰 특징은 연구자가 중심이 되어 만든 박물관인만큼 연구를 거쳐 새롭게 발굴된 내용을 그대로 전시에 녹여낸 부분이었다. 쑤즈량 교수는 현지 조사를 통해 피해 생존자를 찾고 자료를 모은 지 30년이 되어가지만 아직도 조사가 끝나지 않았고, 앞으로도 연구가 계속될 것이라 강조했다. 후세대 연구자들에 의해 지역별 연구가 이어지고 있는 만큼 중국'위안부'역사박물관의 아카이브는 물론 전시 또한 꾸준히 보완될 것이라는 설명이다. 언제든 나타날 피해자를 위해 비워 둔 의자 하나 박물관을 둘러보고 나오자 안내자가 교정에서 들어오는 길에 소녀상을 보지 않았냐고 묻는다. 아, 교정에 소녀상이 있구나! 미처 몰랐다는 표정이 보였는지 안내자는 소녀상을 보여주겠다면서 친절히 건물 밖으로 우리를 이끌었다. 따라가보니 건물 왼쪽의 잔디밭에 아담한 소녀상 두 개가 나란히 의자에 앉아 있었다. 하나는 우리에게 익숙한 조선인 '위안부'의 모습이고, 다른 하나는 중국 전통 옷을 입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 빈 의자 하나가 놓여 있었다. 언제든 나타날 수 있는, 아직 만나지 못한 피해자를 위한 자리였다. 이미 많은 분들이 돌아가셔서 새로 나타날 피해 생존자가 얼마나 있을지 낙관하기 어려운 시대이다. 그 사실을 모르지 않는 우리에게 비어 있는 의자가 조용히 전하고 있었다. '포스트 피해자의 시대'를 예비해야 하는 오늘날 후세대들이 함께 배우고, 연대하기 위한 자리로 만들어보라는 것이었다.
-
- 2024년 논평 싱가포르 일본군'위안부'들의 침묵에 대한 기록
-
싱가포르 일본군'위안부'들의 침묵에 대한 기록 그동안 싱가포르에는 조선인, 일본인, 중국인, 대만인, 인도네시아 등 타지역에서 끌려온 '위안부'는 존재했지만, 싱가포르 출신 '위안부'는 없다고 알려져 왔다. 이 때문에 싱가포르에서는 전후 다른 아시아 국가의 피해 생존자들처럼 증언을 하고 정의 구현과 배상을 요구하는 움직임이 없었다. 필리핀이나 이웃 국가인 말레이시아에서 자국 출신의 성노예 피해 여성이 있었던 것과 대조된다. 그 배경에는 싱가포르 출신의 '위안부' 피해 여성이 없다는 의견을 피력해 온 정치가 리콴유의 역할이 있었다. 싱가포르 초대 총리(1965~1990)에 이어 내각 선임장관(1990~2004)까지 지내며 막강한 권력을 행사한 리콴유의 견해는 싱가포르 내 일본군 성노예 문제에 관한 생각과 행동에 큰 영향을 미쳐왔다. 최근 『역사와 기억 속의 싱가포르 위안부 여성들(The Comfort Women of Singapore in History and Memory)』을 집필하여 주목받은 싱가포르 난양기술대학교 케빈 블랙번 교수의 기고를 통해 이러한 잘못된 인식이 형성된 역사적 맥락과 싱가포르 내 '위안부' 문제의 현황에 대해 짚어본다. 내가 『역사와 기억 속의 싱가포르 위안부 여성들』을 집필한 이유는 '위안부' 피해 여성들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입증하지 않으면 그들의 침묵이 존재에 대한 부정으로 이어질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침묵을 어떻게 기록할 수 있을까? 1942년부터 1945년까지 일본군 점령기를 겪은 싱가포르 여성들의 기억에는 일본군이 '위안소'라는 완곡한 표현으로 불렀던 공간에 끌려가 성노예가 될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새겨져 있다. 케빈블랙번_사진 1.jpg 침묵의 벽 2000년대 초, 나는 난양기술대 산하의 국립교육원에서 학생들과 함께 지역 사회를 대상으로 대규모 구술사 인터뷰를 진행했다. 이 과정에서 싱가포르 출신의 '위안부'가 존재했으나 증언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오직 가까운 동성 친구, 자매, 사촌, 이웃들만 당시 상황을 설명해주었고 그들이 아는 피해 여성들이 세상을 떠난 후에야 비로소 말문을 열었다. 그들은 어떻게 소녀들과 젊은 여성들이 일본군에 의해 강간당하고 납치된 후 위안소로 보내져 성적인 노예가 되었는지를 설명해주었다. 다시 20년이 지나 그 여성들 대부분이 세상을 떠난 뒤, 나는 그들의 존재와 삶을 밝혀야 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과거 인터뷰 당시 싱가포르에서는 자신의 과거를 나서서 밝힌 여성이 있었더라도 정의 구현과 배상을 받았으리라 확언할 수 없다. 말레이시아 여성들 역시 그렇지 못했다. 그들은 배상을 받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누군가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해보라고 설득하는 일은 그 자체로 해결할 방법이 없는 딜레마였다. 1990년대 싱가포르 정부는 '위안부' 피해 여성들에게 전혀 공감하지 않는 듯 보였으며, 그들이 존재하지 않기를 바라는 듯했다. 정부의 입장은 싱가포르 내 '위안부'는 한국인과 일본인이었다는 것이었다. 정부는 '위안부' 논란을 싱가포르와 관련이 없는 논쟁적인 역사 문제로 보았고, 이를 싱가포르 내부에 들여놓지 않으려 했다. 이런 태도는 2013년 한국의 피해 생존자들이 싱가포르 내 예전 위안소 자리에 '위안부' 소녀상을 설치하려 했을 때 불허한 것에서 잘 드러난다. 싱가포르 국립아카이브 구술사센터가 1981년부터 수집한 방대한 일본군 점령기 구술 기록 중에는 싱가포르 출신 '위안부'의 증언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구술사 연구자들은 전쟁에서 살아남은 '위안부' 여성이 있었고, 그들이 자신의 비밀을 무덤까지 가져갔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2014년 세인트 앤드루스 중등학교의 학생 200명이 수행한 대규모 구술사 프로젝트에서도 싱가포르 출신 '위안부'의 존재를 발견했지만, 이 여성들은 자신의 경험을 인터뷰에서 밝히는 것을 거부했다. 1990년대에 영자신문 <스트레이츠 타임스(Straits Times)>의 팬밍옌, 말레이어 신문 <베리타 하리안(Berita Harian)>의 하니 무스타파, 중문 신문 <연합조보(Lianhe Zaobao)>의 훠유에웨이 등 기자들도 이 여성들을 찾았지만 침묵의 벽에 부딪혔다. 여성들은 자신이 '위안부'였다는 사실을 공개적으로 밝히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들은 가부장적 사회에서 자신의 사생활을 지키고자 했고, 성적 과거를 공공의 판단에 맡기고 싶어하지 않았다. 남겨진 증언들 싱가포르 출신의 '위안부'들이 죽을 때까지 지킨 이 침묵에도 불구하고 역사가들이 역사의 조각들을 맞춰볼 방법은 있다. 싱가포르 국립기록원(National Archives of Singapore)에 이들을 목격한 사람들이 남긴 증언을 통해서다. 젊은 여성들이 성폭행 당하고 집에서 끌려간 뒤에 위안소에서 성 노예로 전락했다는 놀라운 구술 증언도 있다. 국립교육원의 구술사 컬렉션에는 일본군에 점령된 상태였던 1942년 당시 25세였던 주부 웡와이콴의 증언이 있다. 그녀는 세랑군 지역의 테라스 하우스에 두 자녀와 살면서 겪은 충격적인 사건들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그놈들 말이야, '일본 귀신들(日鬼. 일본군)' 말이야, 진짜 사람도 아니었어. 젊은 여자만 보면 눈이 뒤집혀서 남의 집에 함부로 막 들어오고, 길 가는 애들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잡아갔다니까. 글쎄, 중국에서처럼 애들을 겁탈한다는 소문이 파다했어. 운 좋은 애들은 며칠 만에 풀려나긴 했는데, 얼굴이 넋 나간 것처럼 변해 있더라고. 어떤 애들은 집에 돌아오지도 못하고 군대 기지로 끌려가서 '위안부'가 됐다는 얘기도 들었어. 그래도 다행인 건, 결혼한 여자들은 거의 안 잡아갔다는 거야. 우리 시누이가 그때 18살이었거든. 아직 어리고 예쁘니까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지. 왜놈들 손아귀에 넘어갈까 봐 옆집 총각이랑 급하게 결혼시켰잖아. 불쌍한 우리 시누이, 얼굴도 모르는 사람이랑 억지로 결혼해서, 결혼식도 제대로 못 올리고…. " (국립교육원 구술사 컬렉션의 웡와이콴 증언) 한편, 강제로 끌려가지 않고 저항한 여성의 증언도 있다. 광둥 출신의 '고급' 창부였던 호콰이민의 구술에 따르면, 일본군은 중국인 협력자와 함께 차이나타운에 있는 그녀의 성매매 업소에 찾아와 자신과 또 다른 '고급' 창부에게 '위안부'가 될 것을 요구했다. 그녀는 이를 거부했다. 호콰이민은 자신이 속해 있던 성매매 업소 주인 '마담'의 도움을 받아 두 명의 '하급' 창부들에게 자신을 대신해 가도록 설득했다. 대신 끌려간 두 여성은 나중에 말라야의 위안소가 있던 군기지에서 폭발 사건이 발생하자 혼란한 틈을 타 도망쳐 싱가포르로 돌아왔다. 차이나타운에서는 50명의 '고급' 광둥계 창부들이 강제로 끌려가 '위안부'가 되었으며, 그 중 20명은 말레이의 타이핑으로, 30명은 태국으로 보내졌다. 지역 주민 구술사 인터뷰는 '위안부'들이 있었던 위안소 위치를 기록하고 있다. 이런 지역 증언들은 일본 군인들이 회고록에 남긴 증언과도 일치한다. 케빈블랙번_사진 2.jpg 싱가포르 공식 기록에서 사라진 '위안부'들의 존재 싱가포르 출신 '위안부' 여성들이 침묵한 배경은 전후 초기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전쟁이 끝난 후 싱가포르에 있던 일본인과 조선인 출신 '위안부'들은 본국으로 송환되었다. 이들은 과거를 숨기고 본국의 가부장적 사회로 돌아갈 수 있었다. 구술을 보면 '위안부' 이력을 끝까지 숨기는 데 성공하지 못한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지역 출신 싱가포르 여성들은 훨씬 더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었다. 그들은 쉽게 과거를 숨길 수 없었다. N.I. 로우와 H.M. 청이 1947년에 출간한 일본 점령기 관련 초기 저서 『이 싱가포르 [우리 도시의 끔찍한 밤] (This Singapore [Our City of Dreadful Night])』에는 인도네시아의 위안소로 끌려갔다가 싱가포르로 돌아온 지역 '위안부'들이 느낀 두려움을 묘사한 대목이 있다. "1946년 3월 6일, 일본의 패망 6개월 후 15명의 소녀들이 싱가포르에 도착했다. 이들은 자바에서 4년 가까이 '위안부'로 지냈다. 이들 중 한 명은 부두에서 그들을 맞이하는 임무를 맡은 사람에게 '아버지가 저를 받아줄까요?' 라고 물었다." 싱가포르 출신 '위안부'들은 이러한 두려움 때문에 성매매를 계속하는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전쟁 전보다 성산업에 종사하는 여성들의 수가 늘어났다. 일부는 거리에서 성매매를 했고, 이들의 존재는 시민들의 눈에 쉽게 띄었다. 영국 식민 정부는 이들을 체포해 소녀직업훈련학교로 보내 가정부나 재봉사, 또는 가정주부가 될 수 있도록 교육했다. 영국군 군정과 초기 사회복지부의 기록에는 이 과정이 문서화되어 있다. '재활'은 성공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여성들은 과거에 대해 침묵을 지켰고, 만약 자신들의 과거에 대해 말한다면 곧바로 배척당했을 가부장적 사회에 재통합되었다. 1950년에 이르러 싱가포르 출신 '위안부'는 공적 논의와 식민지 정부 및 사회복지부의 기록에서 사라졌다. 그러나 1991년 12월, '위안부' 문제가 국제적 논란이 되면서 이들은 다시 공론의 장에 등장했다. 기자들이 '위안부'의 존재 여부를 묻기 시작했으나 누구도 피해 생존자를 찾아내어 증언하도록 설득할 수 없었다. 1992년 2월, 싱가포르 전 총리이자 내각의 일원이었던 리콴유는 일본의 청중들에게 한국인 '위안부'들 덕분에 '싱가포르 소녀들이 정조를 지켰다'며, 싱가포르 여성은 '위안부'로 동원되지 않았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 이처럼 싱가포르는 '위안부' 피해자들이 정의 구현과 배상을 요구하며 나섰던 한국이나 다른 아시아 국가들과는 달랐다. 한국에는 강력한 페미니즘 운동과 비정부조직들이 있어서 '위안부' 피해자들의 정의 구현과 배상 요구를 지원하고 지지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싱가포르에서는 정부나 사회 모두 '위안부' 피해 여성들에 대한 공감이 거의 없었다. 강력한 국가에 의해 지배되는 취약한 시민 사회로 특징되는 싱가포르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는 여성운동 조직이나 비정부기구들에 의한 지원을 기대하기 어려웠다. 오히려 '위안부' 피해자들은 사실을 밝힐 경우 가부장적인 싱가포르 사회에서 성매매와 관련된 낙인이 찍힐 위험을 감수해야 했을 것이다. '위안부' 문제에 대한 싱가포르 정부의 태도는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와 김복동 할머니가 서울 주재 일본대사관 앞에 첫 번째 소녀상을 세우고 난 뒤, 싱가포르의 과거 위안소 자리에 두 번째 소녀상을 세우고자 했을 때도 잘 드러났다. '위안부' 문제가 엄격하게 통제된 싱가포르 시민 사회에 논란을 일으킬 수 있다는 우려를 내세워 소녀상 설치를 전면 불허한 것이다. 2013년 1월 30일의 이 불허 결정은 싱가포르의 국가 문화 유산 기관을 감독하는 정부 부처인 문화·지역사회·청년부에 의해 이루어졌다. 공식적으로 그 이유를 밝히지는 않았지만 싱가포르 정부가 '위안부' 문제를 자국의 시민 사회에 들여오지 않으려는 의도만은 분명했다. 과거 위안소로 쓰인 상가 건물, 최초로 보존 대상으로 선정 그럼에도 불구하고 1990년대 이후 대중문화와 역사 유산 관련 영역에서 싱가포르 출신 '위안부'들에 대한 관심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2001년, 국가 통제 하에 있던 싱가포르 방송국의 텔레비전 드라마 <전쟁 일기 (War Diary)>에 처음으로 싱가포르 출신 '위안부'가 등장했다. '위안부' 역할은 떠오르던 배우 피오나 시에가 맡았다. 2002년, 청팍옌 박사는 자란 주롱 케칠에 위치한 자신의 진료소이자 과거 가족과 함께 살았던 집이 예전에 위안소로 사용됐다는 이유로 보존 대상으로 지정받는 데 성공했다. 청 박사는 유산 관리 기관에 제출한 신청서에 1930년대에 그의 가족이 지은 연립 상가 건물이 위안소로 쓰였던 점을 강조했다. 건물 일부가 과거 위안소였다는 이유로 보존 대상으로 선정된 최초의 사례일 것이다. 같은 해, 말라야 지역의 '위안부'의 삶을 묘사해 크게 호평받은 말레이어 연극 <내 인생 이야기(Hayat Hayatie)>는 현지 '위안부'를 다룬 첫 번째 연극이었다. 케빈블랙번_사진 3.JPG 2010년대와 2020년대에 접어들며 거의 모든 '위안부' 피해 여성들이 세상을 떠난 이후에도 대중의 관심은 지속되었고 이는 문학 작품에도 반영됐다. 2019년 리징징은 싱가포르 출신 '위안부'를 주제로 한 소설 『우리는 어떻게 사라졌는가(How We Disappeared)』를 출간해 큰 찬사를 받았다. 또 2023년에는 나의 책 『역사와 기억 속의 싱가포르 위안부 여성들』이 싱가포르 도서상 비소설 부문 최우수 작품으로 선정되었다. 싱가포르인들은 특히 청팍옌 박사의 과거 가족 소유 상가가 있는 자란 주롱 케칠과 같은 싱가포르 내 위안소 유적지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유명 유산 해설사 크리스 응은 이런 위안소 유적지를 포함한 투어를 진행하고 있다. 싱가포르의 성산업 역사와 홍등가를 둘러보는 '다크 투어리즘' 전문가인 그는 해외 관광객들과 현지인들을 대상으로 해설을 제공하고 있다. 싱가포르인들은 또 서울 외곽에 위치한 '나눔의 집'과 같은 '위안부' 관련 장소를 방문하기 위해 다른 나라로 여행을 떠나기도 한다. 앞으로 싱가포르에도 (공공 장소에는 불가하겠지만) 소녀상이 세워질 것이다. 아마 매주 시위가 열리는 서울의 일본대사관 앞 소녀상과는 달리 조용히 기념할 수 있는 구석진 곳에 설치될 것이다. 청 박사의 상가 건물과 같은 사유지에 세워질 가능성이 높으며, '위안부' 박물관이 설립되거나 기존 박물관에서 '위안부' 관련 전시를 확대할 수도 있다. 이러한 경험을 하고자 하는 싱가포르인들은 실제로 해외로 나가고 있기도 하다. 케빈블랙번_사진 4.jpg 싱가포르에서 점차 확산되는 '위안부' 유산 활동 결론적으로 싱가포르에서 일본군 성노예 문제는 풀기도, 설명하기도 어려운 역설을 보여주고 있다. 싱가포르 '위안부'와 관련된 많은 역사적 자료와 존재를 입증할 충분한 증거가 있고, 실제로 1990년대 이후 싱가포르의 '문화와 유산' 활동에서 이들의 존재가 드러나기 시작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일본군에 점령당한 아시아 국가들처럼 증언에 나서는 이는 없다. 이는 싱가포르 사람들에게 그들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잘못된 인식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피해자들의 침묵은 그들이 살아온 가부장적 사회 분위기와 엄격하게 통제된 시민 사회를 유지하려는 싱가포르 정부의 태도에서 기인한다. 싱가포르 정부는 국제사회에 나타난 '위안부' 논란이 싱가포르 사회에 영향을 미치는 것을 원치 않아 왔다. 만약 싱가포르 출신 '위안부'가 정의 구현과 배상을 요구하며 나섰다면 아무런 지원도 받지 못했을 것이고, 오히려 성매매와 관련된 낙인 때문에 사회에서 배척당했을 수도 있다. 따라서 피해 여성들은 침묵을 선택한 것이고, 이러한 결정은 존중해야 한다. 그러나 그들의 경험은 소설, 드라마, 유산 투어, 박물관 전시와 같은 대중문화와 유산 활동을 통해 기릴 수 있다. 싱가포르에서도 이러한 움직임은 점차 확산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