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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년 에세이 나는 일본군 성노예였다: 네덜란드 여성이 증언하는 일본군 ‘위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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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자가 소개하는 얀 루프-오헤른, 『나는 일본군 성노예였다: 네덜란드 여성이 증언하는 일본군 ‘위안소’』 지난 8월 19일, 이 책의 저자 얀 루프-오헤른 여사께서 향년 96세로 영면하셨다. 굴곡진 인생을 용감하고 멋지게 살아낸 저자는 역사에 큰 업적을 남겼다. 이 글을 통해 루프-오헤른과 그녀의 책을 소개하려 한다. 루프-오헤른은 유럽인으로는 처음으로 이른바 일본군 ‘위안부’였음을 공개적으로 밝힌 인물이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은 네덜란드령이었던 자바섬을 점령한 뒤, 그곳에 살던 네덜란드인들을 수용소에 감금했다. 그리고 몇 달 뒤인 1944년 2월 26일, 수용소에서 17세 이상의 미혼 여성들을 강제로 징발하여, 여러 일본군 ‘위안소’들로 끌고 갔다. 19세였던 저자는 그 중 ‘칠해정’이라는 일본군 ‘위안소’로 이송되었다. 정확한 날짜를 자신 있게 쓸 수 있는 이유는 저자가 손수건에 날짜와 동료들의 이름을 적어 보관했기 때문이다. 지금 이 손수건은 오스트레일리아 전쟁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저자를 비롯해 일곱 명의 네덜란드 젊은 여성들은 약 석 달 동안 ‘칠해정’에서 일본군의 성노예로 살았다. 저자가 당시 경험을 공개적으로 밝힌 것은 70세를 두어 달 앞둔 1992년이었다. 거의 50년 만에 입을 연 것이다. 이 책의 영어 제목은 『50년 동안의 침묵: 어느 전쟁 강간 생존자의 특별한 회고록(Fifty Years of Silence: The Extraordinary memoir of a war rape survivor)』이다. 그러나 50년의 세월이 무색할 정도로 이 책에는 수용소와 일본군 ‘위안소’로 끌려갔던 과정과 그 안에서의 일상이 자세하게 서술되어 있다. 일본군이 강제로 여성들을 데려가 ‘위안부’로 삼은 일은 없었다는 일본 정치인들의 주장 사이에서 이 책은 역사를 밝히는 소중한 사료가 되고 있다. 일본군 ‘위안부’ 경험을 공개한 뒤, 그는 같은 경험을 했던 네덜란드 친구들과 반세기 만에 연락이 닿아 만날 수 있었다. 한 친구는 저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처음 네 기사를 보고, 나는 회피하고 싶었어. ... 하지만 곧 너에게 감탄했어. 나는 아직도 자녀들에게 내 이야기를 하지 못하고 있단다. ... 나도 너처럼 당시 일들을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어.” 또 다른 친구는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나도 이전에 너처럼 내 경험을 공개적으로 발표하라는 부탁을 받은 적이 있어. 그러나 혼자 이야기해서는 소용이 없다고 생각하면서 망설이고 있었어. 그런데 네가 공개적으로 말했다는 보도를 접하고, 나도 돕겠다고 결심했어.” 저자는 50년 만에 자바섬을 찾아, 자신이 다녔던 가톨릭계 학교를 방문했다. 그곳에서 그녀의 교사였고, 함께 수용소에 수감되기도 했던 수녀님을 만나기도 했다. 그 수녀님은 수용소에 강제로 징발된 어린 여성들의 숫자까지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저자의 이런 만남은 활자뿐만 아니라 영상으로도 기록되어 있다. 지금은 저자가 일본군 ‘위안부’의 유일한 유럽인 증인은 아니다. 그가 나서기 시작하자 여기저기서 이야기를 뒷받침해주는 증인들이 등장했다. 특히 인상적인 것은 노령의 일본군 출신들과 만남이다. 일본군 ‘위안소’에 대해 당시에도 잘못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냐고 그녀가 그들에게 물었다. 그러자 한 사람이 이렇게 답했다. “그때는 그게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군 시스템 일부였지요. 우리는 위안소가 군대의 사기를 위해 좋은 것이라고 들었어요. 위안소는 우리에게 선물처럼 주어진 것이었지요. 그게 바로 전쟁이라고 들었습니다. 여성은 전쟁에서 강간을 당하게 되어 있고, 강간은 우리의 권리라고 들었습니다.” 사실 대답을 한 사람은 “들었다”고 하는 표현으로 자신이 감당해야 하는 도덕적 책임을 은근히 회피하는 비겁한 화법을 취하고 있다. 그러나 어쨌든 당시 병사들을 교육했던 일본군 지도부가 여성을 어떻게 여겼고 이용했는지를 보여주는 증언이기도 하다. 일본군 출신에게서 이런 발언을 끌어 낼 수 있었던 것도 저자의 큰 업적 중 하나이다. 일본인 중에는 일본군 ‘위안부’가 창녀였다고 여기는 이들이 적지 않다. 그런데 창녀란, 혹은 성매매 여성이란 “금전적 대가를 얻기 위해 성적인 서비스를 제공하며 자신의 몸을 기꺼이 팔지만, 원하지 않을 경우 언제든지 ‘싫다’고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다.[1] 루프-오헤른의 증언에 따르면, 일본군 들은 강제로 여성들을 끌고 갔다. 당시 일본군은 조직적으로 인신을 납치했고, 일본군 ‘위안부’는 납치 감금되어 폭행과 성폭행을 당했다. 전쟁 상황이지만 개인의 신체에 대한 이런 잔혹한 폭력은 엄연한 중범죄이다. 『나는 일본군의 성노예였다: 네덜란드 여성이 증언하는 일본군위안소』(얀 루프 오헤른 저, 최재인 역) 표지 저자는 50년의 침묵을 깨고 나서게 된 배경으로 두 가지를 말한다. 첫째는 한국의 일본군 ‘위안부’였던 분들의 활동을 접하면서 우러나온 마음 때문이었다. “그들이 진실을 밝혀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일 때마다 나는 ... 그들에게 팔을 뻗어 포옹하고 싶었다. 그들과 함께 하고 싶었다…. 나는 아시아 일본군 ‘위안부’들을 유럽 여성들이 지원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 일은 네덜란드 소녀들도 겪었다. 유럽 여성이 나서게 되면, 일본이 무시하지 못할 것이라 생각하기도 했다.” 두 번째 배경은 1990년대 벌어진 보스니아 전쟁이었다. 그녀는 그 전쟁에 관한 기사를 보며 이런 생각을 했다. “세계는 별로 변하지 않았다. 전쟁이 강간을 정당화할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한다. 전쟁 과정에서 발생한 강간 사건은 늘 가벼이 여겨진다. 내가 당했던 일이 과거사인 것만은 아니다.” 루프-오헤른은 이런 생각을 하며, 강간이 전쟁범죄임을 분명히 알리는 활동을 인생의 과업으로 삼게 된다. “내 이야기를 해야만 한다. 나에게 가해졌던 잔혹 행위들이 더 일어나지 않게 하려면 내 입으로 내 이야기를 해야 한다. 전쟁 중에 군인이 자행한 강간도 범죄라는 것을 세상이 알도록 만들어야 한다.” 나이 칠십에, 그녀는 새로운 소명을 가진 삶을 시작한다. 이후 그녀는 열심히 자신의 이야기를 하며, 일본 당국이 일본군 ‘위안부’를 조직적으로 운영했던 과거를 인정하고 사과하라고 요구했다. 책을 쓰고, 인터뷰하고, 세계 곳곳에서 연설도 했다. 그 과정에서 큰 상도 많이 받았다. 오스트레일리아에서 국민훈장을 받았고, 영국 여왕과 네덜란드 여왕으로부터도 훈장을 받았다. 그녀가 살면서 거쳐 갔던 서구의 나라들은 그녀에게 가장 영예로운 상을 주었다. 가톨릭 교황으로부터도 훈장을 받았다. 이 큰 상들은 그녀가 당했던 고통에 온 나라가, 온 교인이 함께 아파하고 슬퍼한다는 의미였다. 반세기 동안 아픔을 숨기며 지내왔던 그녀에게 큰 위로와 힘이 되었을 것이다. 이 책은 손녀에게 오래된 사진첩을 보여주며 어린 시절을 회고하는 이야기로 시작한다. 저자는 자바섬에서 4대째 정착해 살던 네덜란드계 집안에서 다섯 남매 중 셋째로 태어났다. 인도네시아의 아름다운 산과 강을 쏘다니며 자란 이야기, 할아버지와 부모님과 집안일을 돌봐주는 인도네시아인 일손들로부터 받은 큰 사랑과 잘못했을 경우 받은 따끔하고 엄격한 가르침에 대해 재미나게 들려준다. 이렇게 서로 사랑하고 격려하며 살던 귀한 여성들을 일본군들이 물건처럼 짓밟았다고 말해주는 일화이기도 하다. 루프-오헤른은 위안소에서 풀려난 직후, 한 영국 군인과 연애하며 다친 몸과 마음을 조금씩 달랠 수 있었다. 연인에게 겪었던 일을 이야기했고 그의 태도는 변하지 않았다. 연인은 그녀에게 “사랑해, 얀. 너는 아름다워”라고 했는데, 당시 그녀에게는 그 말이 너무 중요하고 필요했다고 한다. 두 사람은 만난 지 두 달 만에 약혼했고, 영국으로 가서 결혼했다. 영국에서 14년을 산 뒤, 부부는 오스트레일리아로 이주했다. 거기에는 여러 사연이 있었지만, 이주하면서 “네덜란드로부터 멀리 떨어진 오스트레일리아”이기 때문에 자신의 과거 비밀을 아무도 알 수 없을 것이라는 안도감도 있었다고 한다. “강간당한 피해자라는 사실을 여전히 수치심으로 떠안고” 살았던 것이다. 이 책에서 저자가 전해주는 고통스러운 경험은 비단 일본군 성노예였던 3개월간의 이야기만은 아니다. 이 책의 영어 제목이 시사하는 것처럼, 이 책의 주요 주제 중 하나는 50년간 침묵해야 했던 상황과 고통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저자는 매일 저녁 어두워질 무렵이면 엄습하는 불안감과 두려움에 떨었고 식은땀을 흘렸다고 한다. 온전히 평온하게 하루를 보낸 적이 없었다고 한다. 저자는 결혼 후 두 딸을 얻었고 단란한 가정을 꾸렸다. 교사와 성가대원으로 사회활동도 열심히 하면서 겉보기에 평탄한 삶을 살았다. 그러나 몸과 마음은 그 시절의 고통을 떨쳐버릴 수 없었고, 평생을 통증과 불안감에 시달렸다. 이는 일본군 ‘위안부’였던 분들이 공통으로 토로하는 내용이기도 하다. ‘위안부’ 피해자들뿐 아니라, 전쟁을 겪으며 신체적 정서적 고통을 겪었던 사람들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평생을 그 상처와 함께 살아간다. 필자의 집안 어른 중에는 전쟁 기억의 고통을 평생 홀로 견디시다가 임종 즈음 병상에서야 비로소 말씀하신 분들이 계셨다. 공식기록에서 제2차 세계대전은 1945년에 마무리되지만, 저자와 같은 피해자들에게 몸과 마음의 상처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전쟁으로 인해 평생을 고통 속에 사신 분들의 이야기가 널리 공유되어야 한다. 휴전협정이나 평화조약을 통해 문서상으로나 국제법적으로 전쟁이 마무리될 수는 있겠지만, 각 개인에게 남은 상처와 고통은 사라지지 않는다. 이 책이 특히 청소년들 사이에서 널리 읽혔으면 하고 바라는 것은 전쟁에 대한 구체적인 이해가 있어야 미래에 평화가 확고하게 자리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독자들이 이 책을 읽다 보면 이의를 제기하고 싶은 부분들도 있을 것이다. 나에게 거슬렸던 부분은 저자의 인도네시아인에 대한 서술 중 몇 부분이다. 저자가 가까이 접했던 인도네시아인들은 주로 가사를 위해 고용되었던 사람들이다. 저자는 이들을 가족과 같이 생각했고, 책에서도 깊은 애정과 호의를 표했다. 그러나 그것은 어쨌든 선량한 어린 네덜란드인의 관점에서 가진 생각이다. 인도네시아인 입장에서는 네덜란드인을 마냥 호의적으로만 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저자의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지는 못했다. 예를 들어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인도네시아 상황에 대해 저자는 이렇게 서술한다. “인도네시아인은 네덜란드 지배 체제로 돌아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전쟁 내내 일본인이 했던 반네덜란드 선전에 고무된 인도네시아인들은 우리에게 적대적이고 폭력적인 태도를 취했고, 심지어 우리를 죽이려고까지 했다.” 인도네시아인이 네덜란드 지배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것이, 일본인의 선전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저자는 인도네시아가 네덜란드 식민지였던 시절을 “두 문화가 나란히, 또 조화롭게 공존”하던 시절이었다고 회고한다. 인도네시아인들은 이런 저자의 생각에 아마도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누구도, 어느 책도 완벽할 수 없다. 독자가 저자의 생각에 모두 동의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나는 이렇게 한계를 노출하는 진솔한 서술이 이 책의 장점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누구나 자신의 눈으로는 볼 수 없는 자기 시대의 한계, 자기가 속한 집단의 한계를 갖고 있다. 이 책의 저자는 자신의 입장을 세련되게 포장하기보다, 솔직하고 진지하게 표현했다. 이 책을 통해 독자는 제국주의가 가진 다양한 얼굴에 대해 생각해 볼 기회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2018년에 이 책을 내면서, 역자 후기에서 저자가 “살아계시는 동안 이 책의 한국어판도 내놓게 되어 기쁘다”라고 했다. 일 년 뒤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이 글을 쓰고 있자니, 저자가 한국을 방문하셨으면 좋았을 텐데 하는 회한이 든다. 저자는 한국의 일본군 ‘위안부’ 분들을 “참으로 사랑하는 친구들”이라고 말하곤 했다. 지난 8월 21일에 열렸던 서울의 일본대사관 앞 수요집회에서 저자는 영정 사진으로나마 한국인 일본군 ‘위안부’ 분들과 함께했다. 용기를 내서 진실을 이야기해주신 얀 루프-오헤른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얀 루프-오헤른님의 명복을 빕니다. 각주 ^ 수 로이드 로버츠, 『여자 전쟁』, 출판사 클, 2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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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년 좌담 2011년 헌법재판소의 부작위위헌 결정, ‘위안부’ 문제의 흐름을 바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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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담회]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외교적 쟁점과 방향 1부 2011년 헌법재판소의 부작위위헌 결정, '위안부' 문제의 흐름을 바꾸다 현재 한일 외교 관계는 갈등 상황에 놓여 있다. 대법원의 일제 강제징용 배상 판결에 대한 일본 정부의 경제 보복 조치에 대하여, 최근 한국 정부는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지소미아, GSOMIA)을 종료하기로 결정하였다. 외교 갈등 국면이 이어지는 한편,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대한 책임 인정과 배상 등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외교적 쟁점도 해소되지 않고 있다. 한일 간의 외교 문제는 비단 지금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외교적 쟁점은 과거에도 존재했고 앞으로도 숙제로 남아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위안부' 문제 진실 규명을 위한 한일 간의 책임있는 대화가 이어지기 위해 어떤 움직임을 보여야 할까.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웹진 <결>은 이러한 고민을 담아 지난 2019년 6월 5일 좌담회를 진행했다. 본 좌담회는 지금의 한일 외교 갈등이 일어나기 전 시점에 이루어진 것으로 최근의 이슈와 관련된 내용을 담고 있지는 못하지만, '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외교적 쟁점과 맥락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1부 : 2011년 헌법재판소의 부작위위헌 결정, '위안부' 문제의 흐름을 바꾸다 2부 : 2015년 12.28. 한일 '위안부' 합의 법적 구속력은 어디까지인가 3부 : 진실 규명을 위한 양국간의 책임있는 대화가 이루어지기 위해서 좌담회 일자 : 2019년 6월 5일 사회 :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패널 : 남기정 (서울대학교 일본연구소) / 조양현 (외교안보연구소) / 조시현 (민족문제연구소) *본 좌담회에 참여한 패널의 입장은 각 소속 기관과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의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일본군'위안부'문제를 둘러싼 한일 간의 외교적 현안과 국제적 맥락 Q.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대한민국 국민에게 익숙한 이슈죠. 하지만 '위안부'문제를 둘러싼 한-일 간의 외교적 현안과 지금까지의 진행 과정은 따라가기가 힘든 부분이 있습니다. 뉴스에서도 자주 다루어지지만, 아무래도 어려운 용어가 많고 워낙 다양한 사건들이 있었잖아요.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외교적 사건과 맥락을 웹진 <결> 독자분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정리를 해주실 수 있을까요? 남기정 90년대 초반,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증언이 나오기 시작하면서, 이 문제와 관련된 한일 간의 외교적인 문제가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대한민국 정부의 입장은 일본에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제기하고, 해결은 일본 쪽에 맡긴다는 것이었어요. 일본 내에서 자발적인 조치를 취해줄 것을 요구했습니다. 일본 정부도 이를 수용해서 외무성에서 직원들을 파견하여 '위안부' 문제를 조사했어요. 일본 정부의 조사 결과, '위안부' 문제는 일본 정부가 일정한 대응을 하는 것이 맞다고 인식을 했고, 그 입장을 정리한 결과가 1993년의 고노담화입니다. 일본 정부가 처음으로 '위안부' 문제와 관련한 입장을 정리한 것이었죠. 이어서 일본 정부는 민간기금의 형식으로 아시아여성기금을 만듭니다. 그러나, 일본 정부의 입장은 '법적 문제는 (1965년 한일 청구권협정으로 이미) 해결된 것이고, 이는 도의적인 책임에 따라서 하는 것이다'라는 것이었어요. '위안부' 문제에 관한 일본 정부의 공식적인 해결 노력이라기보다는 일본 국민의 성의라는 느낌이 강했습니다. 그래서 한국 내에서는 일본이 제대로 된 법적 책임을 지지 않았다는 비판이 나왔죠. 그래서 한국 내에서 '위안부' 문제에 관련해 일본 정부에 제대로 된 해결과 법적인 책임을 요구하는 시민사회의 운동이 전개되었습니다. 양상이 결정적으로 변하게 된 사건은 2011년 헌법재판소 부작위 위헌 결정이었습니다. 대법원의 결정으로 대한민국 정부는 일본 정부에 정식으로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제기할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위안부' 문제가 한일 간의 외교 현안으로 본격적으로 등장하게 된 것이죠. 이후, 대한민국 정부는 '위안부' 문제에 관해서 일본에 한일 청구권협정 3조에 따른 협의 요청을 하기도 했는데, 일본 정부에서는 이를 거부했습니다. 박근혜 정부 때 한국 내에서는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외교 문제로 풀어야 한다는 요구가 줄곧 제기되었습니다. 박근혜 정부는 한일 외교에 대해 소위 말하는 원 트랙 방식*을 취하고 있었고,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한일 외교에 걸림돌이 되는, 치워야 하는 현안이었죠. 그 결과 우리로서는 굉장히 미흡한 내용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일본군'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합의(이하 12.28 합의)가 나오게 된 거죠. *편집자 주 원 트랙 방식 : 과거사 문제와 한일 관계 정상화를 하나의 외교적 사안으로 바라보는 방식 투 트랙 방식 : 과거사 문제와 한일 관계 정상화를 다른 사안으로 분리하여 대응하는 방식 Q. 2011년 헌법재판소의 부작위결정과 2015년의 12.28 합의는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외교 현안을 이야기할 때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사건인 것 같습니다. 이에 대한 이야기는 조금 뒤에 본격적으로 나누어보도록 하고요. 외교적, 법적 문제를 잘 모르는 입장에서 보면 일본군'위안부'를 둘러싼 정부의 방침들이 엎치락뒤치락하는 느낌이 들 것 같습니다. 외교적 현안을 이해할 때 어떤 맥락으로 이해하면 좋을지 포인트를 짚어주실 수 있을까요. 조양현 12.28 합의가 어떻게 나오게 되었는지 설명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포인트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첫 번째 포인트는 각 정권이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어떻게 바라보는지와 관련이 있습니다. 대한민국에서는 김영삼 정부 이후 대체로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적극적으로 대응하려고 하는 움직임이 강했어요. 물론, 이명박 정부와 같이 일본군'위안부' 문제보다는 한일 신뢰관계를 우선으로 하는 방침도 있기는 했습니다. 일본의 경우, 일본군'위안부' 문제가 제기된 90년대 초까지만 하더라도 역사문제에 있어서 (고노담화에서 볼 수 있듯이) 저자세를 취했는데요, 2006년 아베 정부가 들어오면서 '위안부' 동원의 강제성 부인 등 고노담화를 재검증하려고 하는 듯한 보수적인 모습을 보였어요. 역사수정주의 담론이 나오기 시작한 거죠. 일본군'위안부' 문제가 약 30년 가까이 되다 보니까 (한일 양국의) 정권, 그리고 그 정권을 담당하는 최고 지도자의 개인의 이념이 이 문제를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에 상당히 많은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2011년 헌법재판소 부작위 위헌 결정이었다고 봅니다. 대법원의 결정이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대한 대한민국의 방침을 실질적으로 변경시킨 효과가 있었어요. 이 결정이 나오기 전, 이명박 정부 초기에는 일본과 실리위주의 관계를 우선으로 하고 과거사에 관한 것은 외교부의 아젠다로 삼지 않겠다고 표명을 했었습니다. 그런데 헌법재판소 부작위위헌 결정이 나오니까 입장을 바꿉니다. 그리고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일본과의 공식 외교 아젠다로 제기합니다. 2011년 12월 교토회담이 이렇게 이루어지죠. 약 1시간 정도의 회담 내용 중 약 80%가 일본군'위안부' 문제, 과거사 문제에 대한 논의였다고 합니다. 2005년 노무현 정부 때 민관공동위원회에서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청구권 협정으로 해결된 것이 아니며, 일본 정부의 법적 책임이 남아있다"는 입장을 냈지만, 일본의 미온적인 대응으로 자칫 이 문제가 묻히기 쉬운 상황까지 갔었습니다. 그런데, 헌법재판소의 부작위위헌 결정이 이러한 흐름을 역전시키는 모멘텀이 되었던 것이죠. 이것은 대단히 획기적인 것이라고 봅니다. 사법판단이 외교정책에 영향을 미친 것입니다. 세 번째 포인트는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다루는 시각의 변화입니다. 초기의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한일) 양자 간의 문제라는 인식이 강했습니다. 일본이 식민지배라는 불법적인 행위를 했고, 거기에 대해서 한국은 배상·보상을 요구할 수 있다, 과거 일본의 식민침략과 관련된 진실 규명을 해야한다는 거죠. 그런데 이것이 2000년대 들어가면서 (이미 국제 사회에서는 냉전 이후 90년대 중반부터 활성화됩니다만,) 전시 여성 성범죄 문제의 일환으로써 다루어져야 한다는 움직임이 나타납니다. 과거사에 국한되는 문제가 아닌 현재 살아있는 이슈가 되는 거죠. 국제 사회에서의 여성 인권의 문제로 제기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조시현 2004년에 일제강점하강제동원진상규명위원회가 특별법에 따라 활동을 개시했다는 점도 주목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최근, 작년이죠. 2018년 10월 30일, 한국대법원에서 (일본 정부와 기업의) 강제동원으로 정신적인 피해를 받은 피해자들의 위자료청구권을 인정하고, 이에 따라서 일본 가해 기업들에게 배상을 명하는 판결(일제 강제징용 배상 판결)을 했습니다. 강제동원피해라는 것은 아시다시피 일본군'위안부' 문제도 포함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저는 일본군'위안부' 문제와 강제동원의 문제가 연관되어 있다고 보고, 이러한 측면에서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풀어가는 방향을 점검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일본군'위안부' 문제가 국제사회에서 다루어 지고 있다는 것도 중요한 지점입니다. 아시다시피 1991년 김학순 피해자의 증언 직후 당시 UN인권위원회의 인권소위원회에서 이 문제가 여성에 대한 폭력 문제로 다뤄지면서 국제사회에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한국과 일본이 가입한 각종 인권 조약 하에서 한국과 일본의 인권 상황을 심의하는 절차들에서도 문제가 됩니다. 자유권위원회, 여성차별철폐위원회, 인종차별철폐위원회, 고문방지위원회 등 UN차원에서 일본 정부의 책임이행을 촉구하는 권고들이 지속적, 주기적으로 채택이 되어왔습니다.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고요. 2015년의 일본군'위안부' 문제 합의 자체에 대해서도 UN의 각종 인권 보장 기구들이 이런저런 발언을 하고 있습니다. 이는 뚜렷한 국제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전 세계적으로 소녀상 설립운동을 펼치기도 했고요. 이런 국제적인 흐름들이 계속되어 왔던 것이죠. 좌담회 전경 2011년 헌법재판소의 부작위위헌 결정의 배경과 쟁점 Q. 2011년 헌법재판소의 부작위 결정은 국민이 가장 의미 있다고 뽑은 헌재 결정이기도 하죠. 조양현 선생님께서 말씀해주신 것처럼, 일본군'위안부' 문제의 흐름을 바꿀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했고요. 그렇다면 헌법재판소의 결정은 어떤 맥락에서 나올 수 있었을까요. 조시현 2000년에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국제법정에서 '위안부'에 대한 가해는 국제법상 범죄이고 일본의 국가책임이 성립한다는 판결을 내립니다. 민간법정이었기 때문에 일본 정부의 태도 변화를 이끌어내지는 못했죠. 한국에서는 국회 법률에 따라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를 보상하는 생활안정지원법이 있었지만, 이는 (일본이 아닌) 한국 정부의 대응이고, 더군다나 일시금을 지급했지만 인도적인 지원금일 뿐 제대로 된 보상이 아니라는 인식이 있었습니다. 이밖에도 강제동원에 대한 진상규명 노력들이 있긴 했지만, 일본 정부의 책임을 추궁하기에는 상당히 어려운 측면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국가 대 국가 차원의 외교현안으로 만들기 위해서 한국 정부가 일본 정부에 이 문제를 정식으로 제기할 필요가 있다는 의견이 시민사회 측에서 나오게 됩니다. '국가는 외교적으로 국민을 보호할 의무를 지는데, 그런 의무를 다하지 않았다. 이러한 의무를 다하지 않는 것은 부작위이다, 국민을 위해서 외교적 보호권을 행사해야 한다'는 운동단체의 요구가 있었던 겁니다. 재판이 굉장히 오래 걸렸죠. 판결이 5년 만에 나왔는데, 다행히 훌륭한 결정이었습니다. 한일 양국이 청구권협정을 놓고 다투고 있으니까, 한국 정부는 그러한 분쟁을 외교적인 노력을 통해 해결해야 하는데, 현재는 그러지 않고 있다고 질책하는 결정이 나온 거죠. 이명박 정부도 이를 받아들이고 바로 일본 정부에 협의요청을 합니다. 2011년 8월 30일 헌재 결정이 났고 9월 15일 일본 정부에 대해 협의요청을 했으니까 보름 만에 행동을 취한 거죠. 어쨌든 아베 1차 내각의 설립 이후 '위안부' 강제동원 부정 등 부정적인 움직임 속에서 헌법 소원이 좋은 결과를 맺었습니다. 헌법 재판의 결과는 2012년 한국대법원의 강제동원 판결, 즉 신일본제철과 미쓰비시 중공업에 배상책임을 묻는 첫 번째 대법원 판결에서도 그 논리가 그대로 인정이 되었다고 보입니다. 일본의 식민지배는 불법적인 강점이고 그것을 전제로 한 강제동원은 반인도적인 불법행위이다. 따라서 거기에 대해서 일본기업이 손해배상을 해야 한다는 판결이었지요. 헌법재판소는 청구권협정에 강제동원 문제가 포함되어 있지 않다, 협정 바깥에 있는 문제라고 봤습니다. 이에 따라 '한국 정부가 외교적 보호권을 포기한 것이 아니다'라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헌법재판소의 논리, 즉 한국 정부가 문제해결을 위해서 적극적으로 노력해야 한다는 논리와 외교적 보호권이 살아있다는 논리가 사실은 같은 이야기예요. 남기정 2005년도 한국대법원의 입장은 '1965년 청구권협정에서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있다'는 겁니다. 그 중에서 특히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판단이 있었기 때문에 한국 정부에 대응을 요구했던 것으로 기억하거든요. 굉장히 복잡한 문제지만, 청구권협정에서 해결되지 않았던 문제를 이제까지 한국 정부가 손 놓고 있었기 때문에, 이것을 해결하라는 걸로 저는 이해를 했었어요. 청구권협정에 관한 해석의 문제가 아니고요. 청구권협정의 바깥에 있는 문제들을 이제는 구체적으로 한국 정부의 노력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판단을 여기서 처음 내렸다고 하는 것이죠. 1965년도에 우리가 포기하지 않았던 외교적 보호권도 있지만, 우리가 발휘하지 않은 외교적 보호권도 있다는거죠. 그것을 이행하라는 것으로 저는 이해했습니다. 조시현 외교적 보호권이 요구하는 것과 헌법재판소의 판결은 궁극적으로 같은 맥락이라고 생각합니다. 국제법상 외교적 보호권은 자국민이 해외에서 권리침해를 당했을 때 국가가 해결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의무를 뜻합니다. 외교적 보호권의 대상이 되는 사항들은 대게 해외에서 발생하기 때문에 그 나라의 주권이 문제가 되고 내정간섭의 소지가 있지만, 자국민의 보호를 위해서는 본국이 개입해서 권리구제에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차원에서 외교적 보호제도가 있는 것이죠. 구체적인 형태를 보면 협의 요청, 즉 대화입니다. 외교적 교섭이 있을 수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중재와 같은 국제재판을 통해서 해결안이 모색될 수도 있고요. 다양한 형태의 외교적 노력을 지칭하는 용어가 외교적 보호권이라고 이해하시면 됩니다. 물론 정부가 아무것도 안 해온 건 아니잖아요? 그렇지만 헌법재판소는 정부에게 좀 더 적극적으로 나가야 한다고 주문을 한 거죠. 알기 쉬운 헌재 결정 헌법재판소 홈페이지에서는 주요 결정 25선을 만화로 쉽게 표현하여 설명하고 있다. 25선 중에는 정부의 '위안부' 피해 외교적 방치 위헌 결정도 포함되어 있다. https://www.ccourt.go.kr/cckhome/kor/ccourt/maindecision/maindecision.do 2부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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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년 인터뷰 할머니의 내일 - 나눔의 집 김대월 학예실장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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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위안부’ 할머니들에게 삶의 터전을 마련해주고자 만들어진 <나눔의 집>은 1992년 개소 이래 ‘위안부’ 문제의 상징적인 공간으로 자리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 정부에 등록된 생존 ‘위안부’ 피해 할머니는 총 스무 분. <나눔의 집>에 거주하고 계신 할머니는 여섯 분. 안타깝지만 우리는 피해자 할머니들이 한 분도 남지 않은 날을 준비해야만 한다. <나눔의 집> 역시 마찬가지다. <나눔의 집>이 앞으로도 후손에게 올바른 역사관을 정립하는 데 앞장서는 기관으로 자리하기 위해서는 어떤 준비가 필요할까. <나눔의 집> 김대월 학예실장은 젊은 연구자임과 동시에 활동가다. 그를 만나 일을 통해 만났던 할머니들의 일상과 연구자 및 활동가로서 개인적인 목표, 그리고 <나눔의 집>이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한 개인적인 생각을 들어보았다. 고대사 전공자,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관심을 가지다 Q. 간단한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저는 나눔의 집에서 학예실장으로 일하고 있는 김대월이라고 합니다. 박물관 전시 총괄, 할머니들 유품 보존관리 등의 일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할머니의 내일 展> 전시 기획 총괄을 맡고 있고요, 국민대학교 국사학과에서 박사과정 중입니다. Q. 나눔의 집에서 일하기 전에는 어떤 일을 하셨나요? 원래 전공은 고대사예요. 고대사를 주제로 석사까지 마치고 학원 쪽 일을 했었어요. 학원에서 7, 8년 정도 일을 하다 보니 강사라는 직업에 회의가 들더라고요. 그래서 다시 공부하려고 박사과정에 들어갔다가 우연히 일본군‘위안부’ 관련 수업을 듣게 되었어요. 사실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대략적인 것만 알고 있었지, 깊이 알지는 못했거든요. 공부를 하다 보니 박사 논문 주제를 여성독립운동가 혹은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로 잡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런 생각을 할 때쯤 정말 우연히 <나눔의 집> 채용공고를 본 거예요. 그래서 혹시나 하고 넣어봤는데 면접을 보러 오라 하더라고요. 그리고 일사천리로 이렇게 됐어요. Q. <나눔의 집>은 활동의 성격이 강한 곳이잖아요. 김대월 선생님 같은 연구자가 <나눔의 집>에서 일하게 된 경위가 궁금합니다. 저도 합격하고 되게 의아했어요. 이 분야에서 활동한 경력이 거의 없잖아요. 그런데 들어와 보니까 그 이유를 알겠더라고요. <나눔의 집>에 있으면 돈을 쓸 일이 없어요. 돈을 쓸 수 있는 곳이 없으니까요. 그만큼 외진 곳에 있어요. 차가 없으면 출퇴근도 어렵죠. 그리고 <나눔의 집> 특성상 주말에 일해야 해요. 월급은 적고요. 그러니까 많은 사람이 굳이 오려고 하지 않죠. 면접 봤을 때 제 역량에 관한 질문보다 주말에 일을 할 수 있는지, 출퇴근은 잘 할 수 있는지를 먼저 물어보시더라고요. 그래서 근처에 방 하나 얻겠다고 했죠. (웃음) Q. 어려운 결정일 수도 있는데 비교적 쉽게 생각하셨네요? 저한텐 전혀 어려운 결정이 아니었어요. 시골에서 사는 것도 좋아하고 낚시도 좋아하고 그래서요. <할머니의 내일 展> ‘퇴근’ 후 할머니의 일상을 보여주다 Q. <나눔의 집>에 입사하신 지 1년 남짓 만에 학예실장이 되어 전시총괄을 맡게 되셨는데요, 일하실 때 특별히 중점을 두는 부분이 있나요? 저는 전시와 진열은 다르다고 생각하거든요. 전시는 메시지를 전달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메시지 없이 가지고 있는 것을 단순히 펼쳐놓는 것은 진열에 불과하죠. 기존 <나눔의 집>은 진열 위주였어요. 그래서 여러 번 건의를 했더니, ‘그럼 네가 해라’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렇게 하나둘 맡다 보니 이렇게 되었지요. Q. 전시를 통해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하셨나요? 할머니를 피해자로만 보지 말자는 거예요. 인터넷에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 이름을 검색하면 할머니가 수요집회에 나온 모습, 힘차게 팔 휘두르는 모습, 그리고 할머니에게 망언했던 사람들… 그런 이미지들만 나와요. ‘출근’하셨을 때의 모습만 나오는 거죠. 그런데 저는 주로 ‘퇴근’했을 때의 모습을 보거든요. 제가 아는 할머니의 모습과 언론에 나오는 모습이 너무 다른 거죠. 그래서 ‘퇴근’했을 때의 할머니 모습도 사람들이 알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할머니들을 피해자로만 보지 말고 하나의 인간으로 봐달라는 거죠. 지금 전시하고 있는 <할머니의 내일 展>에서는 이런 점들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평범하지 않은 아픔을 가지고 있을 뿐 우리와 같은 평범한 사람이다’ 그게 전시의 모토예요. Q. 할머니들의 활동을 ‘출근’이라고 표현하셨는데, 특별히 그렇게 표현하시는 이유가 있으신가요? 수요집회를 나가시고, 인터뷰하는 등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알리는 인권활동가라는 직업으로서의 활동이 ‘출근’이라면, 그 밖의 모든 활동은 ‘퇴근’ 후 보통 사람들과 똑같은 일상을 보내세요. ‘출근’했을 때의 모습은 보통 할머니의 24시간 중에 30분도 안 되는 시간이에요.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출근’했을 때의 모습만 보고 ‘퇴근’ 후의 모습은 보지 않죠. ‘퇴근’ 후의 할머니들의 일상은 다른 보통 할머니들과 똑같아요. 평소에는 저랑 고스톱도 치시고요, 과자 선물이 들어오면 서로 시샘도 하고 그래요. 어떤 할머니는 커스터드가 먹고 싶은데, 다른 할머니에게 드리면 화도 내시고 그러죠. 자기는 왜 안 주냐면서요. (웃음) ‘월’ 자 발음을 잘 못 하셔서 저를 “대열이~” 이렇게 부르시는데, 찾아가면 “아이스크림 좀 먹자” 그래요. 그럼 저는 “그래? 할머니, 그러면 한두 시쯤 나갈까?” 하고요. 저는 할머니들과 이런 일상을 보내고 있는데, ‘출근’하는 모습만 본 사람들이 <나눔의 집>에 방문하면, ‘할머니 어떻게 그런 고생을 버티셨어요’ 하면서 펑펑 울고 가세요. 그러면 할머니도 의아해하죠. ‘쟤는 왜 울지?’ Q. <할머니의 내일 展>에서는 주로 ‘퇴근’ 후의 할머니의 모습을 볼 수 있겠군요? 그렇죠. 할머니들은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로만 기억되기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하나의 이웃으로, 사람으로 봐주길 원했어요. 다행히도 서울에서 전시했을 때 깜짝 놀랄 정도로 반응이 좋았어요. 전시에 관객이 참여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었는데, 거기에 ‘할머니들을 피해자로만 기억해서 죄송해요’ 이런 말들이 쓰여 있더라고요. 블로그에도 전시 내용에 공감한다는 이야기도 많이 올라왔어요. Q. 현재 독일에서도 전시가 진행되고 있다고 들었어요. 네. 독일 베를린에서 전시를 하고 있어요. 코리아협의회라고 <나눔의 집>과 협력관계를 맺고 있는 독일의 시민단체가 있어요. 그 단체의 도움으로 독일에서 전시를 하게 되었는데, 국내 전시 내용과는 조금 달라요. 독일에서는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모르는 사람이 많기 때문에 ‘위안부’ 문제를 알리는 방향으로 전시를 구성했죠. 나치와는 어떤 점이 같고 또 다른지를 보여주고, 할머니들이 해방 이후 어떻게 생활하셨는지 그런 것들이요. 작은 전시장이라 사람이 별로 안 올 줄 알았는데 오프닝 때 100명 가까이 오셨어요. 전시장이 꽉 차서 밖에 줄을 설 정도였어요. 독일 사람들이 인권에 참 관심이 많다는 걸 느끼게 되었죠. 어제 없는 오늘 없고, 오늘 없는 내일이 없듯이 ‘내일’은 과거 현재 미래를 담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제를 통해 오늘을 보며 내일을 가늠할 수 있습니다. <나눔의 집>은 <할머니의 내일>을 통해 피해자가 아닌 인간으로서 할머니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에 대하여 함께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우리 사회에서 할머니들은 항상 피해자라는 수식어와 함께 피해자로서의 모습만이 노출되어왔습니다. 때문에 우리에게 할머니는 안타까움과 연민의 대상으로 기억될 뿐 한 명의 인간으로서 할머니를 바라보고 있지 못합니다. 할머니는 우리와 다른 사람이 아닙니다. 기쁜 일에는 웃고, 슬픈 일에는 눈물을 보이며, 작은 일에도 토라지고 샘을 내는 우리와 똑같은 평범한 사람입니다. 다만 평범하지 않은 아픔을 가지고 있을 뿐입니다. 20년 넘게 할머니들이 생활해 오신 <나눔의 집>에는 할머니의 喜怒哀樂(희로애락)과 수많은 추억이 기록되어있습니다. 이에 <나눔의 집>에서는 이번 전시를 통해 할머니들이 일본군‘위안부’ 피해자가 아닌 우리와 똑같은 사람임을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할머니의 내일 展> 리플렛 내용 중 피해자로 박제될 수 없는 보통의 일상 Q. <나눔의 집>에서 할머니들의 평소 스케줄은 어떻게 되나요? 아침 식사하시고 직원들이랑 좀 노시고 프로그램도 하시고요. 외출 프로그램 있으신 할머니들은 외출하시고 병원 가실 할머니들은 병원 가시고 그래요. 점심시간 때 할머니 방에 가면 민원이 많으세요. 남대문시장에 가야 한다, 옷을 사야 한다, 그러면 체크해놨다가 스케줄 봐서 모시고 가요. 저는 사회복지를 전공하지 않아서 잘 몰랐는데 꽃꽂이, 마늘 까기, 멸치 똥 따기, 이런 소소한 활동들이 할머니들의 활력을 더해준다고 하더라고요. 얼마 전에 이옥선 할머니는 김치도 직접 담그셨어요. 93세이신데요. 배추를 배차라고 하시는데, ‘배차를 소금에 절여라.’ 해서 소금에 절여드렸더니 ‘고춧가루가 있어야 한다’고 해서 고추가루 사다 드리고. ‘기름이 있어야 한다’고 해서 참기름, 들기름 사다 드리고. 할머니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최대한 하려고 노력해요. 그리고 저는 그걸 기록하는 일을 해요. 할머니가 남대문시장에 가면 옷 사는 모습을 영상으로 찍고 기록해서 서버에다가 ‘201X년 OO 할머니 남대문시장 나들이’ 폴더를 만들어서 저장하죠. 이런 일상의 모습들을 데이터베이스화 해놨다가 이번 <할머니의 내일 展> 전시에서 썼습니다. Q. 지적해주셨듯 할머니들은 증언 이후 줄곧 ‘출근’의 모습만 언론에 비춰짐으로써 그들 또한 보통의 사람이란 사실이 가려진 것 같습니다. 이에 대해 본인들은 어떻게 받아들이시나요? 받아들이시는 것 같아요. 어느 순간부터 스스로의 개인적인 모습을 알리는 것을 내려놓으신 것 같기도 해요. 부산 이옥선 할머니 같은 경우에는 오히려 ‘위안부’ 문제를 알리는 활동을 통해서 자기 삶의 의미를 찾으시는 것 같아요. 이옥선 할머니는 인터뷰를 하면 그다음 날에 컨디션이 좋아지세요. 반면에 속리산 할머니[1](대구 이옥선, 이하 ‘속리산 할머니’)같은 경우에는 나가서 쇼핑하셔야 힘이 나는 분이시고요. Q. 일상에서의 말투나 화법이 언론에서 인터뷰할 때와 차이가 있을까요? 똑같은 할머니도 있고요. 다른 할머니도 있고요. 이옥선 할머니가 두 분이 계시잖아요. 부산 출신 이옥선 할머니는 언론이 오면 좀 정제된 말투나 언어를 쓰시는데, 속리산 할머니는 평소랑 똑같이 말씀하세요. Q. 최근에 한일 간의 외교적 갈등이 심화되었잖아요. 최근의 문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계실까요? 알고 계세요. 뉴스를 보니까요. 평상시에 뉴스를 보면서 부산 이옥선 할머니는 아베 집안의 역사가 안 좋다고 말을 하세요. 12.28 합의를 한 박근혜 대통령도 안 좋아하시고요. 속리산 할머니는 일본은 안 될 나라라고 하세요. 전쟁이 나면 사람을 죽일 수도 있는데, 갖가지 못된 방법으로 죽였다면서요. 그래서 그 죄가 있기 때문에 일본은 곧 망할 거다, 이런 식의 인식을 보이세요. Q. 최근에 소녀상을 테러한 한국 청년들이 <나눔의 집> 와서 반성도 하고 사죄도 하고 그랬는데, 화가 많이 나셨겠어요. 그때 영상공개를 아주 일부분만 했거든요. 속리산 할머니가 너무 화를 내셔서요. 그 사람들이 오기 전에는 “앞으로 그러지 말라고 하면 되지, 뭐” 이렇게 말씀하셨는데, 막상 그 사람들이 오니까 소리 지르시면서, “일본한테 돈 받고 하는 거냐, 돈도 안 받으면서 거기서 천왕 만세까지 외치냐. 이놈의 새끼들”이라고 하면서 지팡이 집어 던지시고 엄청 화를 내시더라고요. 부산 이옥선 할머니도 화가 많이 나셨어요. Q. 사과하러 왔던 사람들이 반성하긴 했나요? 네. 울기도 하고 자기도 할머니랑 자랐는데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면서 펑펑 울면서 미안하다고 하더라고요. 그 중에 한 명은 정신적으로 장애가 있었어요. 그래서 아버지랑 같이 왔어요. 아버지는 독립운동가 후손이시래요. 그러니까 더 속상해하시면서 무릎 꿇고 자신의 잘못이라며 싹싹 빌었죠. 사과하러 오기 전에 확인 차원에서 제가 그 사람들을 따로 만났어요. 할머니들한테 무슨 위해를 가할지도 모르니까요. 이야기를 나눠보니까 이 사람들도 사회의 피해자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사회 인식이라든지 좀 달라요. 어느 사회에서도 자기들을 받아주지 않는 거죠. 친구도 많지 않고요. 그런데 극우 집회에 가면 자기들을 대우해 준다는 거예요. 자기가 뭔가 투사가 되는 것 같고. 그곳에서 커뮤니티를 형성하고 자신이 사회적 동물이라는 것을 느끼는 거죠. 그러다 보니 인정받기 위해서 더 극한 발언과 행동을 하는 것 같다고 본인들이 이야기하더라고요. 우리 사회가 그들을 보듬어주지 않기 때문에 특정 세력이 그들을 이용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어요. 한국 사회의 2차 피해를 기록하고 싶다 Q.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관해서 연구자로서 개인적인 목표가 있다면 무엇인가요? 할머니들이 한국 사회로부터 당한 2차 피해를 기록해보고 싶어요. 증언집에는 ‘위안부’ 피해 이후의 삶에 대한 내용이 적어요. 아무래도 증언의 내용이 당시의 피해 상황에 집중되어 있으니까요. 아쉬운 부분이죠. 한국 사회 내에서 할머니들에게 가해진 2차 피해도 심각했는데 말이에요. 속리산 할머니 같은 경우에는 전쟁이 끝나고 고향인 대구에 돌아와서 보니까 그 동네에서 자기만 살아 돌아왔더래요. 그러니까 동네 사람들이 와서 ‘왜 너만 살아서 돌아왔나, 내 딸은 어디 갔냐’ 물어보면서 매일 괴롭히더래요. 그렇게 돌아오고 싶었던 고향인데 6개월 만에 고향을 떠나셨어요. 아빠한테 말도 안 하고요. 걸어서 속리산까지 가서 그곳에서 평생을 사시다가 <나눔의 집>에 오셨어요. 할머니가 어렸을 적 국악을 배우신 적이 있었는데, 속리산에 관광객이 오면 장구를 치고 노래를 부르면서 생계를 유지하셨대요. 할머니가 돈을 많이 버니까, 그때 스님이 그랬대요. ‘위안부가 무슨 돈이 필요하다고 저렇게 돈을 버냐’면서요. 저는 이런 기록들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제가 논문 쓰려고 하는 주제도 한국 사회의 2차 가해예요. 1945년에 해방이 되었잖아요. 1946년까지는 일본군‘위안부’에 관한 기사가 신문에 등장해요. 그런데 1990년에 윤정옥 교수님이 한겨레 신문에 ‘위안부’에 관한 글[2]을 쓰기 전까지 약 45년 동안 일본군‘위안부’를 말하는 우리 사회의 목소리가 없었어요. 그럼 약 45년 동안 한국 사회가 이 문제를 몰랐냐는 거죠. ‘위안부’가 무슨 돈이 필요하냐고 말했던 그 스님도 ‘위안부’를 알고 있었잖아요. 그런데 모른 척을 했다는 거죠. 김학순 할머니가 1991년에 증언을 하고 난 후에서야 갑자기 몰랐던 사실을 알았던 냥 되게 들끓었잖아요. 알고 있었으면서 침묵했다는 것도 2차 가해라고 생각해요. 1991년 이후 한국 사회도 크게 다르진 않았어요. 그때만 해도 아직 할머니들이 젊으셨을 때니까 심리치료 등을 통해 피해자들을 신경 쓰고 살폈어야 했는데, 정부는 계속 돈 문제에만 집중했어요. 그리고 ‘위안부’ 문제를 한일 관계에서의 외교적 카드로만 이용하고요. 이렇게 할머니들은 개인이 아니라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로서만 대상화된 거죠. 이외에도 수많은 2차 가해가 있는데, 일본이 아닌 한국 사회의 내부 비판이 되어버려서 조심스러운 부분이 많은 것도 사실입니다. Q. <할머니의 내일 展>도 비슷한 맥락에서 기획된 거군요. 네, 맞아요. 학교 폭력 피해자, 성폭력 피해자 등을 피해자로서만 대상화해서 바라보면 안 되잖아요. 이런 인식들이 할머니들의 문제로 인해서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다면, 우리 사회의 인권 의식이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바람도 있어요. 그들을 동정의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고 한 명의 인간으로 바라보아야 피해자들도 아픔을 극복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Q. <나눔의 집> 할머니들의 사례를 통해 한국 사회의 인권 의식이 좀 더 성숙해지시길 바라시는 거군요. 뭐랄까. 한국에서 피해자라는 수식어를 들으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게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잖아요. 그러니까 이 문제를 통해 성숙한 인권 의식을 바라는 메시지를 주고 싶은 거죠. 만약 한국 사회의 인권 의식이 충분히 성숙했다면, 애초에 <나눔의 집>은 필요하지 않았을 거예요. 굳이 이렇게 모여 살지 않고 각자의 영역에서 보통 다른 사람들처럼 평범하게 살고 계셨겠죠. Q. 언젠가는 <나눔의 집>에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이 한 분도 계시지 않을 때가 찾아올 텐데요. 앞으로 <나눔의 집>은 어떤 공간으로 자리를 잡아야 한다고 생각하시나요? 개인적으로 <나눔의 퓨집>은 할머니들이 다 돌아가셔도 계속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를 위해서만 존재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나눔의 집>은 단순 요양 시설이 아니니까요. 현재 할머니들이 생활하시고 있는 공간은 그 자체로 하나의 박물관이에요. 할머니들 사진, 소품 등 모든 것을 그대로 보존해야 한다는 게 제 주장이에요. 2차 세계대전 피해자들이 공동생활하는 사례도 유례가 없을 뿐더러 그분들이 생활했던 공간이 그대로 남아있는 곳도 없거든요. 이런 부분에서 역사적 가치가 충분하다고 생각해요. 각주 ^ 편집자 주 : 나눔의 집에서는 두 분의 이옥선 할머니가 거주하고 있다. 언론을 통해 자주 소개된 부산 출신의 이옥선 할머니와 비교적 언론 노출이 적은 대구 출신의 이옥선 할머니다. 대구 출신의 이옥선 할머니는 본인을 속리산 할머니로 불리기를 좋아한다. 본 인터뷰에서는 할머니의 희망에 따라 속리산 할머니로 표기했다. ^ 한겨례신문 1990년 1월 4일자. 윤정옥 교수의 ‘정신대 취재기’는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에서 확인할 수 있다.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0010400289113001&editNo=4&printCount=1&publishDate=1990-01-04&officeId=00028&pageNo=13&printNo=507&publishType=0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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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년 논평 중국의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와 소송 2부 - 중국 정부가 ‘위안부’ 문제에 있어 소극적인 태도를 보일 수밖에 없었던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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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와 소송 1부. 하나의 논문으로 시작된 대일배상청구소송 2부. 중국 정부가 ‘위안부’ 문제에 있어 소극적인 태도를 보일 수밖에 없었던 이유 중국 정부가 ‘위안부’ 문제에 있어 소극적인 태도를 보일 수밖에 없었던 이유 ‘위안부’ 피해자를 비롯한 중국 내 일본 침략전쟁 피해자들의 대일손해배상소송 움직임이 가속화되자, 1995년 3월 중국 외교부부장 첸치천(钱其琛)은 전국인민대표회의에서 "중국이 포기한 것은 국가의 배상청구권이며, 민간 개인청구권은 소멸되지 않았다."라고 배상 문제에 대한 입장을 표명했다. 그러나 ‘위안부’ 피해자의 배상 문제가 제기된 후 중국 정부는 일본 정부에게 적절한 조치를 취할 것을 권고하는 정도에 그치는 등 ‘위안부’ 문제에 대해 비교적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처럼 중국 정부가 ‘위안부’ 문제에 있어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는 이유는, 중국이 일본과의 국교 정상화 당시 국가 배상 청구권 및 외교 보호권을 포기했기 때문이다. 전후 미국의 주도하에서 국제사회가 대만을 중국 전체를 대표하는 유일한 합법 정부로 승인하면서 중국은 국가 통일을 이루지 못했고, 외교정책에서도 많은 제약을 받아왔다. 중국은 국제사회에 '하나의 중국' 원칙을 인정하게 함으로써 중국대표성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이에 따라 국교 정상화를 통해 일본에 대만과의 단교를 요구하고, 대만의 외교적 고립을 가속하고자 했다. 이처럼 국교정상화 당시 중국대표성 문제 해결을 위해 국가의 배상청구권을 스스로 포기했던 중국은 정부차원에서 배상 문제를 일본에 다시 제기하기 어려웠다. 또한 경제, 안보 등 일본과의 우 협력관계를 고려해야 하는 정부 입장에서 ‘위안부’ 문제가 국가 관계에 미치는 부정적인 영향도 우려해야 했다. 그런데 중국 정부가 ‘위안부’ 문제에 있어 적극적으로 대응한 사례도 있다. 첫 번째는 2005년 3월 18일 산시 ‘위안부’ 피해자의 제2차 대일 손해배상청구 소송 판결 내용에 관해서였다. 당시 2심 재판에서 도쿄고등법원은 처음으로 청구권 포기 논리를 원용하여 피해자의 청구를 기각했는데, 1952년 일화평화조약 체결로 중국인의 개인청구권이 소멸되었다고 판결한 것이다. 2005년 3월 25일 중국 정부는 일본 재판부의 결정에 강력하게 불만을 표명했다. 중국 외교부는 "일화평화조약은 불법적이고 유효성 없는 조약으로, 이는 1972년 중일 공동성명 서명과 동시에 폐기되는 것으로 양국 간 합의를 마쳤다. 그런데 일본재판부가 일화평화조약을 근거로 ‘위안부’ 피해자의 청구를 기각한 것은 중일 공동성명을 위반한 것이다. 중국 정부는 일본 지도자 및 사법당국이 중일 공동성명에 따라 대만문제에서 일본측이 약속했던 사항을 제대로 이행해 달라고 요구한다. 더불어 ‘위안부’ 문제에 있어 일본이 성실한 태도로 적절한 조처하길 바란다"[1]며 강경한 입장을 보였다. 두 번째 또한 제2차 대일 손해배상청구 소송 최종 재판 내용 때문이었는데, 2007년 4월 27일 일본 최고법원은 중일 공동성명으로 중국인의 개인 청구권은 이미 소멸되었다며 피해자의 상고를 기각했다.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중국은 중일 관계의 회복과 양국 인민들의 우호 관계를 위하여 중일 공동성명에서 국가의 배상청구권을 포기했다. 중일 공동성명에 대한 일본 최고법원의 해석은 잘못되었다"며 강하게 대응했다. 이처럼 비록 중국 정부는 일본 정부 및 사법기관이 중국의 핵심 국가이익인 대만 문제, 즉 '하나의 중국' 원칙과 관련된 부분을 침해할 경우, 강경한 태도를 보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중국 정부는 ‘위안부’ 문제에 대한 전폭적인 외교적 지원이나 해결 방안 모색 등 문제 해결을 위해 적극적으로 행동하고 있지 않다. 이러한 중국 정부의 무관심한 태도는 ‘위안부’ 피해자의 법적 배상문제 해결을 어렵게 만드는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중국 내 일본군‘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시민사회의 노력 국내 학자와 시민사회의 노력으로 ‘위안부’ 문제의 참상이 중국에 알려졌으나, 문제 해결을 위한 길은 순탄치 않았다. 중국 정부는 ‘위안부’ 문제에 대해 무관심했고, 일본 정부 또한 피해자들의 요구에 별다른 조처를 하지 않았다. 통정은 배상 문제를 담당해줄 변호사를 찾아다녔지만, 변호 비용으로 10만 위안(약 한화 1700만 원)을 요구받는 등 적합한 인물을 구하기 힘들었다.[2] 중국의 이러한 상황을 알게 된 일본의 오노데라 토시타카 변호사가 중국 ‘위안부’ 피해자의 소송대리인을 맡으면서, 배상 문제가 본격적으로 전개될 수 있었다. 1995년 중국 ‘위안부’ 피해자의 대일 손해배상청구소송이 제기된 이후로, 중국의 민간단체는 일본 정부의 공식 사죄 및 법적 책임 이행을 끌어내기 위해 힘썼다. 2001년 5월 30일, 산시성 ‘위안부’ 피해자의 제1차 대일 손해배상청구 소송 1심 재판에서 일본재판부가 ‘위안부’ 제도의 운영 및 강제동원 사실을 부정하는 판결을 내리자 중화 전국변호사협회, 중화 전국부녀연합회, 중국 인권발전기금회는 강력히 반발하며 6월 19일 도쿄지방법원에 항의 성명을 보냈다. 또한, 피해 사실 입증을 위해 일본재판부에 피해자 할머니들의 정신적 피해에 대한 검사를 요청하였고, 제1차, 3차 소송의 피해자들을 대상으로 정신감정이 이뤄졌다. 정신감정 결과를 통해 피해 사실을 입증할 수 있었고, 일본재판부로부터 공소 사실 인정이라는 판결을 끌어냈다. 또한 중화 전국변호사협회와 중국법률지원기금회(中国法律援助基金会)는 ‘위안부’ 피해자를 찾고, 위안소 유적 및 관련 당안들을 발굴하기 위하여 중국 ‘위안부’ 피해사실조사위원회(中国原"慰安妇"受害事实调查委员会)를 조직하였다. 2006년 9월부터 2009년까지 중국 산시성, 운남성, 하이난성, 랴오닝성, 길림성 등 중국 각지를 돌며 ‘위안부’ 피해 사실에 대한 전면 조사를 실시했다. 조사를 통해 새로운 피해자 19명 및 친족 2명을 발견했고, 위안소 유적 및 위안소 운영 관련 당안들을 발굴해냈다. 중국 유일의 ‘위안부’ 연구소인 상하이사범대학교 중국‘위안부’문제연구소는 2007년 연구소 내에 자료관을 열고, 관련 다큐멘터리 영화 제작 지원을 통해 대중들에게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대해서 알리고 있다. 또한, 2018년 10월에는 일본군‘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생애를 소재로 한 다큐멘터리 <22(二十二)>(2018)의 감독 궈커(郭柯)와 함께 상하이사범대학 교육 발전기금회 내에 위안부 연구 및 지원이라는 이름의 특별조성금을 만들고 피해자 생활 지원 및 ‘위안부’ 사업 연구 발전에 힘쓰고 있다. 이와 같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위안부’ 피해자들의 소송이 모두 패소하자, 중국‘위안부’문제연구소의 쑤즈량 교수는 2017년 12월 18일 91세의 ‘위안부’ 피해자 천리엔촌(陈连村), 화동정법대학교 국제학과 교수 지엔치앙(建强), 베이징시방원변호사사무소(北京市方元律师事务所律)의 캉지엔 변호사 및 지원자와 함께 중국 외교부에게 외교보호권을 요청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들은 기자회견을 통해 천리엔촌을 포함한 5명의 ‘위안부’ 피해자 및 12명의 친족들이 중국정부가 외교보호권을 행사하여, 일본 정부에게 피해자들에 대한 사죄 및 법적배상을 요구해달라는 내용의 공개서한을 외교부에 전달하였다고 밝혔다. 그러나 피해자 및 민간단체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중국 정부는 현재까지 이에 대한 답변을 내놓고 있지 않다. 문제 해결을 위해 중국 정부의 적극적인 태도가 필요하다 중국의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대일 손해배상청구 소송 전개과정을 살펴본 결과, 소송이 제기된 이후 일본 정부를 향해 사죄 및 피해 배상을 강력히 요구해온 민간단체 및 피해자와는 달리, 중국 정부는 배상 문제에 있어 소극적인 태도를 보여왔음을 알 수 있다. 일본군‘위안부’ 제도의 최대 피해국으로서, 일본 정부에게 전쟁배상을 강력하게 요구할 수 있는 우위를 점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중국 정부가 ‘위안부’ 문제 해결에 있어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에 대한 필자의 생각은 다음과 같다. ‘위안부’ 피해자들의 배상문제가 국가 간 분쟁으로 쟁점화되었을 때, 일본과의 국교정상화 교섭 과정에서 과거사 청산 작업을 철저히 하지 않았던 과거 정부의 과오가 드러나는 것이 우려되어 ‘위안부’ 문제에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않는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한국 또한 ‘위안부’ 문제가 한일 양국 간 외교현안으로 발전하고, 문제에 대한 시민사회의 관심이 증가하면서 청구권문제 및 과거사 문제를 제대로 청산하지 않았던 과거 정부에 대한 비판이 이어졌다. 이와 같이 스스로를 인민을 위한 나라로 칭하는 공산당 정권이 국익이라는 이름 아래 중국 인민들의 인권을 침해한 사실이 국내에 알려진다면, 정부의 정당성 및 신뢰성에 타격이 불가피할 것이다. 그러나 중국 정부는 이를 우려하여 또 다시 ‘위안부’ 피해자들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 피해자 및 민간단체는 정부에 외교보호권을 요청하는 등 ‘위안부’ 문제에 해결에 있어 정부의 역할을 기대하고 있다. 과오를 반성하고 외교적 또는 국내적 측면에서 ‘위안부’ 피해자들의 명예 회복을 위한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이 필요하다. 중국 정부가 피해자 및 민간단체와의 지속적인 소통을 통해 정부와 시민사회가 모두 받아들일 수 있는 ‘위안부’ 문제 해결방안을 도출할 수 있기를 바란다. 각주 ^ 外交部发言人刘建超就日本法院判决"慰安妇"诉讼案中国原告败诉答记者问, (2005/03/25), https://www.fmprc.gov.cn/web/wjdt_674879/fyrbt_674889/t188947.shtml ^ 《环球》杂志:对日本索赔 几十年来一路是荆棘(2004/12/31), http://news.sohu.com/20041231/n223744137.s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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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년 좌담 독자에게 묻는다. 2019년 웹진 〈결〉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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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토크] 독자에게 묻는다 2019년 웹진 <결> 어땠나요? 2019년 10월 18일,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에서는 2019년 한 해 동안 진행된 웹진 <결> 사업을 독자로부터 평가받고 의견을 듣는 독자 간담회 시간을 가졌다. 일본군’위안부’ 이슈의 전문가뿐 아니라 미디어 종사자, 연구자, 자원활동가, 주부 등 다양한 독자들로부터 웹진 <결>이 목표했던 메시지가 어느 정도 전달되었는지 확인할 수 있는 귀중한 시간이었다. 웹진 <결> 편집팀은 보다 심층적인 이야기를 듣기 위해 지난 10월에 진행했던 독자 간담회에서 주요한 의견을 피력한 세 분을 모시고 별도의 독자토크를 진행했다. 독자들은 어떤 글을 가장 좋아했고, 의미 있다고 생각했을까. 그리고 웹진을 이용하면서 어떤 부분을 불편해했을까. 독자토크 일자 : 2019년 10월 31일 사회 : 현승인, 최지은 (슬로워크) 패널 : 김연정 (요크대학교 여성학 박사수료) / 이상미 (웹진’아이돌로지’ 에디터) / 김보경 (슬로워크 콘텐츠 팀) *본 좌담회에 참여한 패널의 입장은 각 소속 기관과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의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처음 만난 웹진 <결> 어땠나요? 현승인 안녕하세요. 독자 토크에 참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먼저 간단한 자기소개와 웹진 <결>을 보고 느꼈던 첫인상을 말해주세요. 먼저 제 소개를 하자면 웹진 <결>의 편집을 맡은 현승인입니다. 최지은 저는 슬로워크에서 웹진 <결> 사업의 PM을 맡고 있는 최지은입니다. 김연정 안녕하세요. 저는 여성학을 전공하고 있는 김연정입니다. 요크대학에서 박사수료를 했어요.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늘 관심이 있었고요. 웹진 <결>을 처음 보고 ‘어..?’ 하는 느낌을 받았어요. 사실 정부에서 하는 사업이라 크게 기대하지 않고 있었거든요. 생각보다 굉장히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균형 잡힌 시각으로 다루고 있어서 깜짝 놀란 거죠. 한국에서는 이 문제를 주로 한일관계에 치우쳐서 이야기하거나, 피해자 중심으로 많이 다루잖아요. 그런데 웹진 <결>은 그런 부분에서 균형을 잘 잡으려고 하는 노력이 보였어요. 너무 재미있어서 신이 난다고 해야 할까요? 이런 걸 할 수 있는 시간이 오긴 오는구나.. 하는 생각을 했어요. 이걸 하기 위해 얼마나 치열했을까 싶고요. 이상미 저는 웹진 ‘아이돌로지’의 에디터 이상미라고 합니다. 저는 웹진 <결>을 처음 모바일로 접속을 했었는데, 흥미를 끌 만한 글이 몇 가지 있었어요. <지금/여기 ‘위안부' 영화의 안과 밖> 글처럼 대중매체를 다루는 글이 흥미로웠어요. 관심이 가는 글에 ‘연결되는 글’들을 타고 가다가 꽤 깊은 곳까지 들어갔던 것 같아요. ‘자료해설’과 같이 어려운 콘텐츠를 보면서 굉장히 깊이 있게 다루시는구나 하는 인상을 받았어요. 그리고 ‘위안부' 할머니들을 피해자화하거나 대상화하지 않기 위해서, 전체적으로 건조하게 문제를 다루는 게 인상적이었어요. 보통 ‘위안부' 문제는 감정적으로 호소하는 것을 목적으로 둔 것이 많았잖아요. 김보경 저는 지금 슬로워크 콘텐츠 팀에서 기획 업무를 하고 있는 김보경이라고 합니다. 저는 첫인상으로 좀 어려울 것 같다는 인상을 많이 받았어요. 웹진 <결>을 처음 들어갔을 때 보이는 썸네일 이미지들이 딱딱해서 그런지, 읽기도 전에 내용이 쉽지는 않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뭐랄까, 사이트의 전체적인 분위기가 잘 차려입은 느낌이에요. 그래서 쉽게 다가가기 어려운..? 그래도 카테고리 정리가 잘 되어있고, 타이틀을 짧고 굵게 잘 써서 눈길을 끄는 좋은 요소들이 있는 것 같아요. 웹진 <결>을 주변인에게 추천한다면? 김연정 ● 할머니의 내일 - 나눔의 집 김대월 학예실장 인터뷰 ● 정영환X박노자 온라인 대담 - 탈분단적 시각으로 바라봐야 할 ‘위안부’ 문제 ● 지금/여기 ‘위안부' 영화의 안과 밖 - <할머니의 내일 - 나눔의 집 김대월 학예실장 인터뷰> 웹진 <결>에서 처음 본 글이었어요. ‘위안부' 할머니를 피해자화하는 문제에는 논쟁 지점이 있잖아요. 그런데 이 문제를 활동가의 관점에서 평이한 언어로 잘 정리했다고 생각해요. - <정영환X박노자 온라인 대담 - 탈분단적 시각으로 바라봐야 할 ‘위안부’ 문제> 이 글도 추천하고 싶어요. 대한민국 중심으로 이야기되는 ‘위안부' 문제를 탈분단적인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게 화두를 잘 던졌다고 생각해요. 아쉬운 점은 너무 많은 이야기를 간결하게 다루다 보니 깊이가 부족하다는 느낌이었어요. 나중에 각각의 논쟁 지점을 따로 떼어서 기획 기사로 만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 <지금/여기 ‘위안부' 영화의 안과 밖> ‘위안부'를 다루는 영화를 소개하고 비평하는 글도 좋았어요. 누군가에게 추천할 때 약간 마음에 걸리는 부분은 어려운 전문용어와 학술 이론이 많아서 해당 학문의 전공자가 아니면 이해하기 어려울 것 같아요. 이상미 ● 지금/여기 ‘위안부' 영화의 안과 밖 ● 일본의 미투 운동과 ‘위안부’ 문제 ● 김학순을 추억하다 - <지금/여기 ‘위안부' 영화의 안과 밖> 썸네일이 <허스토리> 포스터 이미지여서 제일 먼저 살펴봤어요. 제가 <허스토리> 단체관람을 뛰었을 정도로 이 영화를 좋아했거든요. 이 글은 기존 <허스토리>를 다루던 기사들과 다른 시각을 보여주고 있어서 흥미로웠어요. ‘위안부' 문제를 다루는 관점에서 영화의 의의와 한계를 깊이 있게 짚어 주잖아요. 그만큼 호흡이 긴 편이라서 버거운 감이 있긴 하지만요. 그래도 많이 알려진 영화이기 때문에 웹진 <결>을 처음 접하는 사람들에게 추천하기 좋을 것 같아요. - <일본의 미투 운동과 ‘위안부’ 문제> 일본의 페미니즘과 백래시 문제가 이해하기 쉽게 잘 설명되어 있어요. 제가 일본 거주 경험이 있는데요, 한국과 달리 일본에서 페미니즘이 가시화되지 않는 부분에 대해 늘 답답함이 있었거든요. 저도 그렇고, 제 주변에도 페미니스트들이 많기 때문에 이 글에 많은 관심을 가질 것 같아요. - <김학순을 추억하다> 이건 정말 쉽게 다가왔어요. 담백하고요. 저는 김학순 할머니를 뵌 적도 없지만, 할머니에 관한 증언들이 잔잔한 울림으로 다가왔어요. 이건 굳이 대중문화나 페미니즘에 관심이 없어도 누구나 재밌게 읽을 수 있을 것 같아요. 김보경 ● 김학순을 추억하다 ● 할머니의 내일 - 나눔의 집 김대월 학예실장 인터뷰 ● 일본군'위안부' 문제 관련 한국 정부가 취해 온 조치와 미결 과제의 대응 방향에 대한 전망 - <김학순을 추억하다> 할머니들에 관한 에세이들이 좋았어요. 학창 시절 때에는 ‘위안부'라고 하면 늘 피해자, 상처받은 사람으로 배웠던 것 같아요. 사실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모두가 알고 있긴 하지만, 깊게 알지는 못하잖아요. 큰 관심도 없고요. 이런 사람들에게 <김학순을 추억하다> 같은 에세이를 추천하면 좋을 것 같아요. 단순한 피해자가 아닌 한 사람의 삶을 보여주잖아요. 한 명의 삶 이야기를 자주 들려주다 보면 자연스럽게 ‘위안부' 문제도 고민해보지 않을까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 <할머니의 내일 - 나눔의 집 김대월 학예실장 인터뷰> 비슷한 맥락에서 이 인터뷰가 좋았어요. 사실 다른 글들은 많이 어려웠어요. 그런데, 이 인터뷰는 쉽게 읽혔어요. 할머니들의 활동을 출근과 퇴근이라고 표현하는 것도 공감이 갔고요. 역사 교과서를 통해 배운 ‘위안부’ 할머니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고 눈물이 나서, 피하고 싶은 어두운 이야기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이 글을 통해 할머니들 역시 우리가 일상에서 만나는 할머니와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동안 우리가 할머니들을 너무 피해자화했다는 사실도 깨달았고요. - <일본군'위안부' 문제 관련 한국 정부가 취해 온 조치와 미결 과제의 대응 방향에 대한 전망> 예전에는 수요집회를 자주 나갔었는데, 잘 안 나가게 됐던 때가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 시점부터였어요. 합의 반대 시위가 격해지면서 관여하는 것이 점점 무서워졌거든요. 처음에는 가볍게 집회에 참여하는 것이 목표였는데, 어느 순간 부담스럽고 무섭게 느껴졌어요. 그래서 예민한 문제들에 대해 외면하고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웹진 <결>에서 한일 ‘위안부' 합의 이후의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 잘 보여주고 있더라고요. 이런 이야기들을 어디서 자세하게 본 적이 없는 것 같아요. 웹진에서 이런 부분들을 계속 잘 정리해주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웹진 <결> 메인 화면 웹진 <결>, 너무 어려워요!? 현승인 <결>의 내용이 전체적으로 어렵다는 의견들이 있네요. 이 문제에 대해 좀 더 이야기를 나눠볼까 합니다. 글의 길이, 가독성, 호흡 등을 모두 포함해서 웹진 <결>의 어떤 점이 어려웠나요? 김보경 전반적으로 내용이 어려워요. 특히, 인도네시아나 필리핀 등 다른 나라의 ‘위안부' 문제를 다루는 글들이 힘들었어요. 저는 근현대사에 관심이 많은 편이라, 어느 정도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어요. 최근에 친구가 제게 “일본의 식민지는 한국인데, 왜 할머니들이 여기저기를 돌아다닌 거야?” 묻더라고요. 사람들은 생각보다 ‘위안부' 문제의 배경을 잘 알지 못해요. 이런 상황에서 웹진 <결>의 글은 어려울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그렇다고 전쟁의 맥락을 다 설명해줘야 한다는 것은 아니에요. 그렇게 되면 어려워서 더 안 보지 않을까 싶어요. 저는 오히려 전쟁의 배경보다, 전쟁으로 인해 피해를 입은 사람들에 초점을 맞춰서 공감대를 높이는 것이 좋다고 생각해요. 김연정 애당초 일본군‘위안부' 문제가 어려운 주제이기 때문에 소화하기 쉽지 않다고 생각해요. 글의 호흡이 길 수밖에 없고요. 비교적 쉽게 접근하려 노력하고 있는 것이 보이기는 하지만, 내용이 어려운 것은 어쩔 수 없는 부분이라고 생각해요. 독자분들의 문해력이 상이하다 보니 어디까지 배려해야 할지도 고민이겠고요. 저는 웹진 <결>이 어쩔 수 없이 학술지적 성격을 띨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보통의 학술지와 다른 점이 있다면, 학술지는 전공 중심이기 때문에 잘 모르는 내용은 자책하면서 더 공부하면 되는 문제인데, 웹진 <결>은 하나의 주제를 중심으로 다양한 전공이 모였기 때문에 배경지식이 사방으로 넓어질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그래서 더 접근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죠. 결국엔 타깃을 분리해서 접근해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어떤 글은 전문성을 갖춰 깊이 있게 접근하는 반면, 어떤 글은 더욱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기 위해 대중성을 고려하는 식으로요. 글마다 타깃을 달리 하는 거죠. 현승인 어려움을 알아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웃음) 편집자 입장에서는 어디에 기준을 맞춰야 할지 정말 헷갈려요. 아까 이상미 님께서 <일본의 미투 운동과 ‘위안부’ 문제>가 비교적 이해하기 쉽다고 말씀하셨는데, 사실 이 글도 쉬운 글은 아니라고 생각하거든요. 다만, 현재 한국에서 페미니즘에 대한 관심도가 높고 전문적인 콘텐츠가 대중들에게 많이 소비되고 있기 때문에 다른 글에 비해 비교적 언어의 친숙함이 높지 않았을까 생각해요. ‘카테고리'와 ‘엮어보기' 최지은 웹진 <결> 내용상의 어려운 점을 이야기했으니, 다른 것도 이야기해보면 좋을 것 같아요. 웹진은 두 가지 리터러시에 관한 고민이 있어요. 첫 번째는 텍스트 리터러시, 두 번째는 디지털 리터러시에요. 텍스트 리터러시만큼 디지털 리터러시 역시 어디에 기준을 맞춰야 할지 고민을 많이 했어요. 웹진 <결>은 상대적으로 웹에서 많이 쓰이는 기호 표현 등으로 리터러시를 낮췄다고 생각했는데, 어렵다는 의견도 많이 들었습니다. 여러분은 웹진 <결>을 사용하실 때 어려운 점은 없으셨나요? 김연정 저는 좀 어려웠어요. 디지털 문맹이라 그런지 다른 분이 말씀해주시기 전까지는 ‘햄버거' 기호를 누르면 카테고리를 볼 수 있다는 것도 몰랐어요. 그렇다고 딱히 불편하지는 않았던 것이 ‘전체기사보기'가 있어서 그중에서 보고 싶은 것들을 골라보는 게 편했거든요. 김보경 저도 ‘옛날 사람’이라는 별명을 들을 정도로 디지털 활용을 잘 못 하는데요, 저한테는 오히려 쉬웠어요. ‘카테고리’ 정리가 잘 되어있었고, ‘엮어보기' 기능이 좋았어요. 특히, ‘인물'에서 김학순 할머니 관련 글들을 한눈에 모아볼 수 있어서 좋았어요. 이상미 저는 ‘엮어보기' 기능을 알고 있긴 했는데, 사용해보지는 않았어요. 뭘 아는 게 있어야 그 안에서 엮어보든지 말든지 할 테니까요. (웃음) 그래도 좋은 기능이라고 생각해요. 나중에 특정 영화와 관련한 글들을 찾아보는 등 관심 주제가 생기면 많이 이용할 것 같아요. 나중에는 오히려 ‘카테고리'보다는 ‘엮어보기'를 많이 이용하지 않을까 싶어요. 최지은 제가 요새 느끼는 것은 과거, 현재, 미래가 한 시대에 같이 있다는 인상을 많이 받아요. 누군가는 자연스럽게 스마트폰으로 캡처 후 스마트 펜으로 밑줄을 그어서 자기 글을 SNS에 올리지만, 누군가는 기본적인 웹 사이트 접근도 어려워하시죠. 이 격차가 너무 크다고 생각해요. 이 중에 우리의 독자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겠고요. 거의 다 있을 확률이 높겠지만요. 누군가는 인쇄해서 봐야 하고 누군가는 핸드폰으로 캡처해서 보고 있겠죠. (웃음) 중심을 어디에 잡아야 할지 늘 고민하고 있습니다. 웹진 결 카테고리 설명 엮어보기.jpeg 2020 웹진 <결>에 바란다 현승인 혹시 앞으로 웹진 <결>에서 보고 싶은 콘텐츠가 있다면 어떤 것이 있을까요? 콘텐츠의 형식에 받지 않고 개인적으로 희망하는 콘텐츠가 무엇인지 말씀해주시면 좋겠어요. 김연정 <할머니의 내일 - 나눔의 집 김대월 학예실장 인터뷰>와 같은 글들이 많아지면 좋겠어요. 보다 많은 대중에게 쉽게 읽히면서 의미 있는 메시지를 주잖아요. 개인적으로는 ‘위안부'를 재현하는 데 있어서 소녀 아니면 할머니, 이렇게 이분법적으로 재현하는 문제에 대해서 짚어주는 글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김보경 저는 일본군‘위안부' 문제가 단순 여성의 문제가 아니라 한 인간의 문제라고 생각해요. ‘위안부' 할머니의 일상을 보여주는 것처럼 대상화되지 않은 한 사람의 자연스러운 모습을 보여줬으면 좋겠어요. 텍스트도 좋지만, 영상으로 담으면 그 자연스러움이 더 고스란히 표현되지 않을까 싶어요. 아무리 전문가분들이 글로 풀어서 설명한다고 한들, 하나의 영상만큼 그분들의 자연스러운 모습을 잘 담기는 어렵다고 생각해요. 이상미 독자들이 흥미를 쉽게 가질만한 소재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개인적으로 대중문화를 다루는 글이 흥미를 끌기 쉽다고 생각해요. 영화와 같이 대중매체를 통해 바라보는 ‘위안부' 문제에 관한 쉽다고 생각하거든요. 영화라든지 대중매체를 통해 바라보는 ‘위안부’ 문제와 같은 글들이 더 많아지면 좋을 것 같아요. 그런데 이건 제 개인적인 바람이고요. 솔직하게 드리고 싶은 말씀은 지금처럼 계속하시면 될 것 같아요. 몸집이 커지고 콘텐츠가 늘어가다 보면 모두 해결될 문제라고 생각해요. 최지은 하다 보면 해결될 문제라니. 엄청나게 큰 응원인데요. 김연정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에 정말 찬사를 보내요. 한국에서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다루는 것은 전쟁과도 같다고 생각해요. 정부에서 하는 사업인 경우 내셔널리즘에 빠지기도 쉽고요. 이런 부분에서 웹진 <결>이 치열한 전쟁터에서 정치를 잘해가시면서 진행하시는 게 눈에 보여요. 앞으로 더 용기 내서 전선에서 싸워주셨으면 좋겠어요. 계속 용기를 잃지 말아 주세요. 김보경 이건 꼭 말하고 싶었어요. 제가 친구들이랑 얘기할 때 ‘위안부' 문제가 궁금하면 어디를 보라고 자신 있게 얘기를 못 했거든요. 이제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어요. 웹진 <결>을 보라고. 이런 공간이 있다는 것 자체가 좋더라고요. 현승인 좋은 의견 정말 감사합니다. 격려가 큰 힘이 됩니다.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와 웹진 <결> 편집팀을 대표해서 2020년에는 보다 나은 웹진 <결>로 발전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이것으로 2019년 독자토크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내년 독자토크 때는 어떤 이야기들이 나올지 벌써부터 기대되네요. 다시 한 번 귀한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