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군인에게 '위안소 이용'이 의미하는 것

후루하시 아야(古橋綾)

  • 게시일2024.12.04
  • 최종수정일2024.12.04

[일본 군인 회고록 읽기]
일본 군인에게 '위안소 이용'이 의미하는 것

 

'위안소'를 이용한 일본 군인들은 자신들의 경험을 세세하게 상기하며 자유롭게 집필한 많은 회고록을 남겼다. 자기를 만족시켜주고 따뜻한 정서가 있는 장소, '목숨의 세탁소', '공동변소', 안정제, 권리, 남자가 되는 과정…. 회고록에 남긴 이들의 서술을 통해 그들에게 위안소를 이용한다는 것의 사회적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위안소에서 군인을 상대해야 했던 여성은 군인들의 질서 유지와 관리를 위한 도구에 불과했다는 사실도 알 수 있다. 군인 회고록 중 위안소 이용에 관한 서술에 주목해 위안소가 일본군에게 어떤 기능을 했는지 살펴본다.

 

일러스트 ⓒ이사각

 

일본 군인들은 '위안부'나 '위안소'에 관해 많은 기록물을 남겼다. 특히 전 군인들이 자신의 경험을 상기하면서 자유롭게 집필한 회고록에는 그들의 적나라한 생각이 드러난다. 일본에서 연구 활동을 진행하고 있는 '일본전쟁책임자료센터(日本の戦争責任資料センター)'는 1990년대부터 군인들이 펴낸 회고록을 꾸준히 조사해 '위안소'나 '위안부'에 대해 서술하고 있는 사례를 1,000권 가량 발견한 바 있다. 

필자는 오래 전 '위안소' 앞에서 웃음을 지으며 줄을 선 일본 군인들의 모습을 담은 기록을 보고 궁금했다. 힘없는 여성들이 거듭되는 성적 행위를 강요당하고 있는 상황에서 도대체 뭐가 그리 즐거웠을까,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남자들은 성욕을 참을 수 없는 건가? 전쟁터에서 계속된 싸움이 인간을 이상하게 만드는 건가? 그런데 회고록에서 관련 서술들을 연구하다가 '위안소'를 이용한다는 것의 사회적인 의미를 발견할 수 있었다. 여기서는 군인 회고록 중 위안소 이용에 관한 서술에 주목해 위안소가 일본군에게 어떤 기능을 했는지 살펴본다.

 

 

위안소에 갈 수 있는 권리

우선 위안소에는 어떤 군인들이 갈 수 있었을까. 회고록에는 초년병은 가기 어려웠다는 서술이 많다. 시간적·정신적 여유가 없고, 선배 병사들의 눈치도 봐야 했기 때문이리라. 그러다 이년병이 되고 후배가 생기면서 할 일이 줄고, 눈치 볼 선배도 적어지면서 위안소에 가보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후 이년병 이상의 군인 대부분은 당연한 듯 위안소에 다니게 된다. 중국 중부지역 산둥성(山東省)에서 종군했던 일반 병사는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다.

"남자만 있는 매몰차고 흥취가 없는 군대 생활에서, 게다가 내일도 모르는 목숨이기 때문에 외출하는 날 찾는 위안소는 모두에게 자기를 만족시켜주고 따뜻한 정서가 있는 장소였으며, 목숨의 세탁소이기도 하여 그날을 애타게 기다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捜三十二会, 1978: 175-176)."


1937년 중국 중부지역 허베이성(河北省) 부근에 주둔했던 나가이 미치야스(長井通泰)는 다른 표현으로 '위안소'를 말한다.

"우리들은 이 작은 집을 '공동변소'라고 부르고, '공동변소에 갔다온다'고 말했다. 공동으로 사용하는 필수 불가결한 배설 행위로 본 것이다. 내일 전투에 목숨을 거는 젊은이들에게는 안정제와 같은 의미에서 필요했을지도 모르고, 오히려 일본군은 울적함을 발산하는 장소로 이곳을 장려한 것 같았다. 그리고 나와 같이 고향에 약혼자가 있는 사람조차 당연하게 가는 분위기가 되었다(央巧友の会, 1973: 108)."


공동변소, 배설 행위, 안정제라는 표현은 모두 위안소가 군인들의 불안한 마음과 두려움을 달래주는 장소로 기능했다는 것을 거침없이 고백하고 있다. 이는 위안소 여성들을 마냥 '변기'로 취급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사진 1] ‘군인클럽이용규정’. 내용을 살펴보면 위안소 이용 시간은 병사 오전 9시 30분~오후 3시 30분, 하사관과 군속은 오후 4시~오후 8시, 장교 등은 오후 8시 30분부터 영업 종료 시간까지였다. (출처: 후루하시 아야, 2021, 『비판적으로 읽는 일본 군인 회고록 속 ‘위안부’』, 46쪽 재인용, 번역문은 아카이브814 참고.)

 

군에서 콘돔을 받고 의기양양하게 위안소로 향하는 모습을 기록한 군인들도 많다. 1945년 일본이 패전하기 직전에 중국 상하이 부근 하이먼(海門)이라는 지역에 있었던 오사다 가즈오미(長田一臣)는 위안소에 간 날을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위안소 사용은 자유로운 것이 아니라 휴일에 한정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날 할당된 병사들은 위병소에서 점호를 받아 이름을 확인하고 '사크(콘돔-인용자)'를 받는다.
'ㅇㅇ상등병 이하 ㅇ명, 지금부터 위안소에 다녀오겠습니다!'라고 보고하면 '응, 잘하고 와라!'라고 사령이 격려해주고 대열을 짜서 영내를 나가는데, 이럴 때는 칼을 휴대할 필요없이 무방비로 가는 것이 허용되었다. 겨우 나에게도 그날이 왔다. 위안소에 갈지 말지는 자유 의지이다. 여기에 있다는 것은 오사다 이등병이 위안소 행 권리를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이다(長田,2001: 167)."


대열을 짜서 위안소로 향하는 군인 행렬의 일원이었던 오사다 병사는 본인의 행위에 대해 '위안소 행 권리를 포기하지 않았다'고 썼다. 주저 없이 위안소에 다닌 병사들이 많았고, 대부분 의심없이 즐겼다. 즉 '내일도 모르는' 나날 속에 있었던 병사들은 위안소에 가는 일을 자신이 누릴 수 있는 권리나 혜택으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여자를 모르는 놈 손 들어봐"

그런데 모든 군인이 처음부터 '위안소'에 가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일본 군인들은 10대 후반부터 20대 초반에 입대한 경우가 많았고, 성 경험이 없는 경우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군인들은 위안소에 가는 것을 부끄러워하거나 민망해하여 스스로 가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런데 그럴 때 동료들이 가만히 있지 않았다. 대신해 위안소에 갈 채비를 해준 것이다. 예컨대 중국 중부지역 산둥성(山東省) 짜오좡(棗荘)에 주둔한 어떤 병사(이름 미상)는 다음과 같이 자세하게 당시 상황을 남겼다.

"짜오좡에는 위안소도 있고 (동료들이 나에게–인용자) 동정을 버리도록 억지로 집어넣어 밖에서 문을 잠궈버린 곤란한 일이 있었다(谷四二〇五部隊第一中隊の集い事務局, 1980: 269)."

 

경리부 간부 후보생이던 니시카와 히로시(西川浩)는 교관에게 위안소에 가라는 명령을 받기도 했다.


"(교관이 명령했다.-인용자) '너희 중에 아직 여자를 모르는 놈 손 들어봐!' 간부 후보생 20명 중 손을 드는 사람은 나를 포함해서 3명이었다. 국군(일본군-인용자)의 간부가 되려는 놈은 알고 있어야 하는 일이다. 전우들이 도와줘라. 다음 외출 때에는 남자가 되게 하라."

그래서 난리가 났다. (전우들은–인용자) 책임을 다해야 하기 때문에 저녁 식사 동안 소란스러웠다. 이치리키(一力)의 모모코(桃子)가 좋다던지, 아사히로(朝日楼)의 하루고마(春駒)가 좋다던지, 시노노메의 폰타를 추천한다는 등 소란스러웠다. 이제 다음 일요일에는 산 외에 있는 병료(兵寮)에 모두 다 같이 가서 마실 줄 모르는 술을 억지로 먹이고 지닝(鶏寧) 거리에 나가 모두 삐야(위안소 -인용자)에 직행한다. 나에게는 순한 애가 좋다며 아케보노의 기요코(清子)로 결정됐고, '돌격일번(일본군이 사용했던 콘돔 이름 -인용자)'이 손에 쥐어져 방으로 들여보내졌다. 쓸데없이 참견하는 놈이 있어 합판으로 만들어진 문틈으로 엿보면서 '야, 빨리 바지 내려', '맞다, 좀더 힘을 줘'라고 시끄럽게 한다. 뭐가 뭔지 모르는 사이에 21년 동안 지켜온 동정을 버렸다. 그래서 무링강(穆稜河)에 가까운 찻집 에투알(エトワール)에서 축배를 들었다.

월요일 훈련을 시작하기 전에 정렬할 때 나와 다른 2명은 한 걸음 앞으로 나와서 교관에게 보고했다.
'교관님! 니시카와 히로시 외 2명은 어젯밤 훌륭히 남자가 되었습니다. 삼가 보고하겠습니다. 경례!'
'훌륭히? 축하한다.'(西川, 1985: 50-51)"


상관이나 동료들, 그리고 본인들도 위안소에 '억지로 갇혀 불편한' 척을 하면서도 거절하지 않았다. 성 경험이 없는 이들에게 위안소에 가서 여성들과 성행위를 하는 것은 '훌륭한 남자가 되는' 과정이라는 생각을 공유했던 것이다. 

[사진 2] 군인 수기에 나오는 일본군‘위안부’ 여성들의 사진. 위의 사진이 조선인, 아래 왼쪽은 중국인, 오른쪽은 일본인 ‘위안부'라고 설명돼 있다. (출처: 후루하시 아야, 2021, 『비판적으로 읽는 일본 군인 회고록 속 ‘위안부’』, 62쪽에서 재인용)


그러면 왜 그들은 성 경험이 없는 이들에게 '명분'까지 제공하며 위안소에 보냈을까. 미국의 젠더학 및 비판 이론 분야 학자인 이브 세지윅(Eve Sedgwick)이 제시한 '동성사회적(homosocial)'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할 수 있다. 즉 남성들은 함께 모여 있는 동안 동성애적 욕망을 억압하고 동성사회적 관계를 유지시키기 위해 여성을 거래한다. 이를 통해 남성들은 서로가 사회성이 있음을 확인하는데, 이때 여성들은 욕망의 대상일 뿐이다. 이렇게 대상화된 여성을 거래하는 것을 매개로 남성 간 연대는 강해진다. 연대감이 필요했던 군대에서 위안소라는 공간과 대상화된 여성들의 존재가 필요했던 이유이다..

 

 

죽음의 공포 달래기

한편으로 이런 상황에서도 위안소에 가지 않겠다고 다짐한 군인도 존재했다. 이들은 군대에서 이질적인 존재로 간주되었다. 남성으로 살아오면서 대부분 군인들이 배워 익힌 동성사회성 규범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강하게 다짐했지만 죽음을 앞두고 있다고 통렬하게 느꼈을 때 그 마음이 무너졌다고 토로하는 병사도 있다.

"나는 결혼할 때까지는 동정으로 살기로 맹세했기 때문에 시야(西椏) 위안소의 앞을 지나가도 흥미조차 갖지 않았다. 그런데 어젯밤 부상병을 보자 언제 죽을지 모르는 '내 몸', 나도 인간인 이상 죽기 전에 한번 여자의 몸을 보고 싶다! 작전을 나와서 수개월 동안 받은 급여도 그대로 있다. 한번 보는 정도라면 괜찮을 것이라고 스스로 타이르며 위안소 입구에 들어갔다(近衛歩兵第五連隊史編集委員会 1990: 141)."

 

"초년병이나 이년병들이 '니시무라(西村) 상등병은 고집이 세네. 남자가 맞냐'라고 놀리고, 고참병은 이전부터 빈번하게 유혹했습니다. 그리고 우수한 선배 전우가 하나의 탄알로 죽어가는 것을 눈앞에서 보고 심경의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지금까지 순결을 지켜왔는데, 한 번에 죽지 않고 부상을 당해 몸이 자유롭지 못하게 될 경우 후회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면서 자신이 없어졌습니다. 나는 위안소 여성들이 돈을 벌러 오는 줄 알고 있었고, 역시 다른 사람만큼 경험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됐습니다(小川, 2005: 101)."    


이들이 위안소에 가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이유를 주목해 보자. 그들은 '결혼할 때까지는 동정으로 살기' 원했다거나 '순결을 지킨다는 이유로 위안소에 가지 않았다. 당시 일본에서 남자 청소년들은 성병에 걸리지 않도록 유곽에 가는 것을 금기시하는 교육을 받았다. 교육 관계자는 건강한 가정을 이루고 출세하고 싶다면 결혼하기 전까지 성병에 걸리면 안 된다고 지도했고, 입대 때는 성병 검사를 엄격하게 실시했다. 즉 성병에 걸리지 않는 것은 남성들이 행복한 미래를 꿈꾸기 위한 필수 요건이라고 교육받았으며, 그 교육을 잘 따른 군인도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런 규범은 죽음의 공포 앞에서 쉽게 무너졌다. 미래를 꿈꿀 수 없는 상황에서 행복한 가정이나 출세를 기대할 수 없게 되자 위안소에 가지 않겠다는 다짐도 무너졌다고 해석할 수 있다.

글을 시작하면서 필자는 회고록을 들여다보면 일본군이 위안소를 이용한 행위의 사회적인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당시 군인들은 위안소에 가는 일을 '내일도 모르는' 생활, 개인의 권리를 주장할 수 없는 전쟁터에서 자신들의 불안과 공포를 대체하는 선택이자 권리로 받아들였다. 또 많은 군인들은 위안소에 가지 않는 동료가 있는 상황을 불편하게 여겼다. 그런 동료들을 설득하고 회유해 위안소 이용 경험을 공유함으로써 동성사회성을 기반으로 한 관계를 구축하였다. 이때 위안소에서 군인을 상대해야 했던 여성은 군인들의 질서 유지와 관리를 위한 도구에 불과했다. 출세를 위해 성병 예방을 실천하던 병사들도 죽음을 앞두고는 위안소로 향했다. 여기서도 위안소 여성들은 죽음의 공포를 넘어서기 위한 도구로만 간주되었다.

결국 '위안소'에 간다는 것은 군인들로 하여금 개인의 자유가 있는 것처럼 착각하게 하고, 동성사회성을 기반으로 한 군대를 보다 강고한 조직으로 발전시키는 역할을 했다. 그리고 위안소를 제공하는 것으로 군인들이 전쟁터에서 잘 싸우도록 만들었다. 위안소는 일본군이 군인들을 잘 관리해 작전을 원활하게 수행하기 위한 장치로 기능했다고 할 수 있다.

 

인용 문헌
- 央巧友の会, 1973, 『白い星』, 私家版.
- 小川健次郎ほか, 2005, 『語り継ごう元戦士たちの証言』, リープル出版.
- 長田一臣, 2001, 『一陣の風』, 新潮社.
- 近衛歩兵第五連隊史編集委員会, 1990, 『近衛歩兵第五連隊史:上巻』, 私家版.
- 捜三十二会, 1978, 『黄塵:捜索第三十二連隊第二中隊史』, 私家版.
- 谷四二〇五部隊第一中隊の集い事務局, 1980, 『山と湖と黄塵を征く:谷四二〇五部隊第一中隊史』私家版.
- 西川浩, 1985, 『私の大東亜戦記』, 私家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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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후루하시 아야(古橋綾)

중앙대학교 사회학과에서 사회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비롯해, 한국과 일본에서 시대를 넘어선 성폭력, 성착취 문제를 연구해왔다. 현재 일본 이와테대학(岩手大学) 교육학과 사회과교육과 부교수로 재직 중이다. 한국어 저작으로는 『비판적으로 읽는 일본 군인 회고록 속 ‘위안부’』(동북아역사재단, 2021), 논문으로는 「포스트식민주의 페미니즘 관점에서 본 일본군 ‘위안부’ 문제 인식: 2014년 일본 신문 사설 분석을 중심으로」(한국여성학회 『한국여성학』 33(1), 2017)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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