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치 독일 여성 수용소 ‘라벤스브뤼크 기념관’을 가다

정용숙춘천교육대학교 사회과교육과 교수

  • 게시일2024.05.06
  • 최종수정일2024.10.31

과거 청산 '모범국'마저 외면한 성 강제노동 피해자들

독일을 포함해 나치가 점령한 유럽 전역에서 강제로 끌려온 여성들을 격리한 국제 수용소이자 최대 여성 수용소였던 라벤스브뤼크. 강제노동을 비롯해 인체 실험 등 잔혹한 범죄가 자행되었고, 절멸 수용소 역할까지 한 이곳에서 나치는 다른 수용소들의 남성 수인 노동력을 착취하기 위해 만든 '수용소 매춘소'에 동원할 여성 수인들을 차출하였다. 아이러니는 정부와 재계가 협력해 외국인 강제노동 피해 보상을 추진해 '과거 청산 모범국'으로 칭송받는 독일이 성 강제노동에 동원된 여성들은 애초부터 피해 대상에 포함하지 않았고, 지금도 법적 피해자 지위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지난 2월 연구 작업 일환으로 '라벤스브뤼크 강제수용소 기념관'을 다녀온 정용숙 교수의 방문 후기를 싣는다.

 

지난 2월, 독일 연구 출장 계획을 이야기하던 자리에서 '라벤스브뤼크 수용소 기념관' 방문 후기를 의뢰받고 선뜻 승낙했다. 라벤스브뤼크는 개인적 목적으로 이전에도 두어 번 방문했기에 비교적 잘 알고, 체류 예정지인 베를린에서 그리 멀지도 않아 아무 때고 하루 일정으로 다녀올 수 있는 곳이니 말이다. 다만, 내가 쓸 방문 후기가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가 생각하는 방향과는 조금 다를 수 있는 점이 걸렸다. 한국에서는 주로 독일의 '위안부'와 관련 있는 장소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라벤스브뤼크'의 역사적 의미는 그것을 훨씬 넘어서기 때문이다.

 

일본 정부 압박 때 자주 소환되는 독일의 한계

동아시아 사회가 넘어서지 못한 과거를 대표하는 일본군'위안부'문제에서 한국인들은 곧잘 독일을 소환한다. '과거 청산 모범국' 독일의 사례를 들어 일본 정부를 압박하기 위해서다. 독일이 이처럼 긍정적인 이미지를 획득한 것은 2000~2007년 정부와 기업이 공동 설립한 <기억 책임 미래 재단 >을 통해 외국인 강제노동 피해자들에게 보상금을 지급한 일이 계기였다. 하지만 독일 내에서는 한계를 지적하는 목소리가 높다. 독일의 대책이 많이 늦었던 데다 내용적으로도 역사 정의의 실현보다는 정치적 해법에 가깝다는 분석이다. 실제로 피해 인정 절차가 엄격해 거부당하거나 배제된 피해자들이 적지 않았고, 지급액도 기대에 훨씬 못미치는 수준이었다. 특히 성 강제노동 피해자들의 상황은 더 심했다. 독일 군대와 친위대가 운영한 '매춘소'에 동원된 성 강제노동 피해자는 애초부터 고려 대상이 아니었고, 지금까지도 이들에 대한 법적 피해자 지위 인정과 배보상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사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은 일본보다 훨씬 체계적으로 '위안부' 시스템을 운영한 국가였다. 독일 군대와 친위대는 자국 영토에 있는 강제 노동자를 비롯해 점령지 내 자국 군대, 나아가 강제 수용소의 남성 수감자를 위해서도 '위안소'를 직접 운영했다. '위안소'라는 명칭은 일본군의 독자적인 명명으로, 독일에서는 성매매 업소에 대한 일반 용어인 '보르델(Bordell)'이라 불렀다. 이 가운데 강제수용소 위안소는 비교적 자세히 연구된 분야인데, 친위대는 수용소 내 남성 수인들의 노동력을 좀 더 효과적으로 착취하기 위해 친위대가 위안소를 직접 운영했다. 여기에 필요한 여성들을 아우슈비츠 비르케나우 수용소와 라벤스브뤼크 수용소의 여성 수인들 중에서 차출했다. [사진 1] 라벤스브뤼크에는 나치의 성 강제노동에 희생된 여성들의 흔적이 남아 있다. [사진 2] 다만 이것은 라벤스브뤼크 수용소 역사의 일부다.

 

수용소 수감자 80% 이상이 여성 정치범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기 몇 달 전인 1939년 4월, 베를린 북쪽으로 약 90km 떨어진 휴양지 퓌르스텐베르크 인근의 작은 마을 라벤스브뤼크에 새로운 수용소가 문을 열었다. 이곳은 독일을 포함해 나치가 점령한 유럽 전역에서 끌려온 여성들을 격리한 국제적 수용소이자 최대의 여성 수용소로 성장했다. 전체 수감자의 80% 이상이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 반나치 레지스탕스 등 정치범이었다. 히틀러 암살 작전인 '발키리'의 주역 슈타우펜베르크 대령의 부인이 게슈타포에 체포 돼 이송된 곳이 라벤스브뤼크였다. 체포 당시 임신 중이던 그는 수감 상태에서 막내를 출산했다. 전후 프랑스 초대 대통령을 지낸 드골의 조카 제네비에브 드골-안토니오즈도 레지스탕스로 체포 돼 라벤스브뤼크로 이송되었고, 그 경험을 반세기 후에 회고록으로 출간했다.

그러나 라벤스브뤼크에 여성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1941년 소규모의 남성 수용소가 추가됐고, 1942년에는 인접한 우커마크에 청소년 수용소가 들어섰다. [사진 3] 1939년부터 1945년까지 약 30개국 출신의 여성과 어린이 12만 명, 남성 2만 명, 청소년 1,200명이 이곳을 거쳐간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수감자 중 가장 규모가 컸던 집단은 폴란드인으로 약 4만8,500명이었고, 이어 소련(2만8,000명), 독일과 오스트리아(2만4,000명), 프랑스(8,000명) 순이었다. 유대인은 약 2만 명 정도로 알려져 있다. [사진 4]

  

 

강제노동부터 의학 실험, 절멸 수용소 역할까지

애초 정치범 수용소였던 라벤스브뤼크는 규모가 커지면서 독일 군수산업에 노동력을 공급하는 강제노동 수용소로 기능했다. 대표적인 군수업체가 인근에 공장을 둔 지멘스였다. 1854년 베를린에서 설립된 전기회사 지멘스는 베를린 인근 수용소들이 공급하는 강제노동의 주요 수요자였다. 그러다 1942년부터 라벤스브뤼크에도 군수품 공장을 짓고 전화기, 라디오, 계측기를 생산했다. [사진 5] 이때문에 지멘스에는 전범기업이라는 오명이 뒤따르고, 1941년부터 1956년까지 지멘스 대표를 지낸 헤르만 폰 지멘스는 1945년 뉘른베르크 전범 수용소에 일시 수용돼 증인으로 심문도 받았다. 하지만 최종적으로는 기소되지 않았다.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라벤스브뤼크 수용소에서는 더욱 가혹한 일들이 자행되었다. 반인도적인 인체 실험이 이뤄졌고, 가스실을 가동해 '절멸 수용소' 역할까지 했다. 1941년부터는 처형장에서 사형이 집행되었다. [사진 6] 전쟁 막바지인 1945년 초에는 화장장 옆 오두막에 임시 가스실이 설치되었다. [사진 7] 그 해 1월 말부터 4월까지 석 달이 조금 넘는 기간에 약 5~6천 명이 가스실에서 살해당했다. 라벤스브뤼크에서 가스실, 교수형, 굶주림, 질병, 의학 실험, 중노동 등 다양한 이유로 사망한 여성 수감자 수가 최소 3만 명, 많게는 5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남성도 소수 있었다.

 

수인들이 행군한 길을 따라 걷다

베를린 중앙역에서 기차로 약 1시간을 가서 퓌르스텐베르크-하펠역에 내려 라벤스브뤼크로 가는 방법은 두 가지다. 하나는 노선 버스를 이용하는 것. 그러나 나는 기차역에서 라벤스브뤼크까지 약 2km를 직접 걷는 쪽을 택한다. 버스가 자주 오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2차 세계대전 당시 열차로 이송된 수인들이 역에 도착해 수용소까지 행군한 그 길은 피해자들의 고통과 나치 범죄를 기억할 수 있는 역사적 현장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2차선 도로를 따라 이어지는 길은 마을의 가장자리를 지난다. [사진 8] 그 길을 걷다 보면 라벤스브뤼크 수용소 기념관 입구가 모습을 드러낸다. 그 안으로 들어서면 나무 창문과 발코니가 달린 이층집들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잿빛 수용소 분위기와 뚜렷이 대비되는 목가적인 풍경이다. 이곳은 여성 수인들을 감시하는 여성 경비원들의 숙소로, 일부는 자녀들과 함께 살기도 했다. 원형이 잘 보존된 8개의 건물은 내부 개조를 거쳐 2002년부터 국제청소년교육센터와 유스호스텔로 사용되고 있다. 90여 개의 침대를 갖춘 기숙사 3개 동과 세미나 동, 식당으로 이뤄져 있다. 예전에 라벤스브뤼크 기념관이 매년 주최하는 여름대학에 참가했을 때 며칠 머물렀던 적이 있는데, 발코니에서 푸른 숲과 호수가 내려다보이는 아름다운 곳이다. 그러나 같은 공간이어도 몸의 각도를 틀면 다른 상상을 하게 된다. 경비원 구역과 구분되는 건너편이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수감자들의 막사와 가스실이 있던 자리였기 때문이다. [사진 9]


고문과 살해 등 악명 높았던 여성 감시관 직업의 출발지

수용소 여성 경비원들은 '여성 감시관', 독일어로 '아우프제어린(Aufseherin)'이라고 불렸다. 20세에서 40세 사이 젊은 여성 중에서 모집된 그들은 잔인하고 가학적인 구타, 고문과 살해로 악명이 높았다. 라벤스브뤼크는 특히 여성 감시관 훈련소라는, '특이한' 직업의 출발지 역할을 한 수용소이기도 했다. 이곳에서 경력을 쌓아 아우슈비츠 비르케나우, 베르겐벨젠 등 '죽음의 수용소'로 옮겨간 여성 감시관 규모는 약 3,500명. 그러나 이들 가운데 전범 재판에 회부된 여성 감시관은 77명에 불과했고, 실제로 유죄 판결을 받은 사람은 극소수였다.

여성 감시관들은 대개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학교를 일찍 그만두고 변변한 직업 교육도 받지 못한 하층계급 여성들이었다. 좋은 임금과 무료 숙식 그리고 멋진 제복이 보장되는 감시관은 분명 괜찮은 직업이었을 것이다. 10대 시절 나치 청소년단체에서 인종주의 이데올로기에 세뇌되었다면 감시관이라는 직업은 적과 싸우고 조국에 봉사하는 가치있는 일이라는 확신도 있었을 것이다.

1995년 독일에서 출판된 소설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는 바로 이 나치 여성 감시관을 다룬 작품이다. 소설 속 여주인공, 동명의 영화에서 배우 케이트 윈슬렛이 연기한 인물 '한나'는 공장 노동자였다가 여성 감시관이 된 인물이다. 한나는 '문맹'이라는 남모르는 장애와 그 결과인 무지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여성 감시관이 되었고 평생 속죄하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이 소설을 나는 나치 범죄에 직접 연루되지 않은 전후 세대 독일인들이 앞 세대의 죄와 씨름하는 이야기로 읽었고, 죄와 사랑에 대한 깊은 문제의식은 오래도록 여운을 남겼다. 그러나 궁여지책으로 감시관이 되었다는 설정은 논란이 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전후 서독에서 나치의 전직 여성 감시관들은 '무력한 조력자'를 자처하며 자신들의 죄를 회피하기에 급급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상 당시 수용소 감시관이라는 직업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 결코 아니었다. '그 일'의 끔찍한 실체를 깨닫고 떠난 사람들이 있었고, 그들은 불이익을 받지 않았다.

라벤스브뤼크 기념관에는 여성 감시관 숙소 외에도 수용소장과 친위대 장교 관사, 본부 건물도 잘 보존되어 있다. 수인 막사와 사령부 건물, 경비원 숙소 등을 모두 내려다볼 수 있는 언덕 위에 자리했던 소장 관사는[사진 10] 전쟁이 끝나고 1977년까지 소련군의 장교용 관사와 사무실로 사용됐다. 이곳을 비롯해 호수 주변의 기념관 시설 등 일부를 제외한 수용소 전체 부지는 1994년까지도 군사 목적으로 사용되었다. [사진 11]

 

이중 삼중으로 배제된 성 강제노동 피해자들

수용소 본부 공간을 개조해 2013년 개관한 건물 2층에는 친위대의 수용소 성 강제노동 관련 기록을 볼 수 있는 <라벤스브뤼크 여성 수용소. 역사와 기념> 상설전이 열리고 있다. [사진 12] 지금까지 파악된 수용소 성 강제노동 피해자는 모두 210명, 그 중 이름이 확인된 이는 174명이다. 절반 이상이 독일인 여성이고 나머지는 폴란드인, 러시아인, 동유럽인, 네덜란드인 등이었다. 절대 다수인 85%가 '사회부적응'을 이유로 끌려온 사회적 약자들이었다. 여기에는 부랑자, 극빈자, 성매매 여성, 레즈비언 등이 속했고 검은 역삼각형 표지를 착용하도록 했다. [사진 13] 반면 남성 동성애자는 검은색이 아닌 분홍 역삼각형 표지로 구분했고 '사회부적응'에도 속하지 않았다.

상설 전시는 수용소의 역사와 함께 기념관을 설립하는 과정의 역사도 다루고 있다. 전쟁이 끝난 후 라벤스브뤼크는 소련군 관할을 거쳐 구동독 지역에 속했다. 소련군은 수용소 부지와 건물들을 자신들의 군사적 목적에 사용했는데, 생존 희생자들은 수용소 일부만이라도 보존하기 위해 노력했다. 1948년 9월에 첫 추모식이 열렸고, 화장장 주변에서 발견된 유골들을 수습, 매장한 묘지가 조성되었다. 1959년 라벤스브뤼크 수용소는 구동독 정부에 의해 국립 기념관이 되었다. 이때 건축가들은 화장장과 감옥 등 옛 수용소 건물 일부와 4m 높이의 수용소 담장 일부를 기념관에 포함시켰다.

훗날 '통곡의 벽'으로 불리는 수용소 담장의 서쪽 구역 밖에는 다시금 묘지가 조성되었다. 빌 라메르트(Will Lammert)의 청동 조각 '짐을 진 여인들(Die Tragende)'도 이때 만들어진 것이다. '통곡의 벽'과 그 앞에 자리한 '짐을 진 여인들'은 기념관 디자인의 핵심으로 1950~1960년대 동독 기억 문화의 시각적 측면을 보여준다. [사진 14]

구동독 초기에 설립된 라벤스브뤼크 국립 기념관은 독일 재통일 후인 1993년 라벤스브뤼크 기념관(Ravensbrück Memorial)으로 재단장해 오늘에 이른다. 독일 연방 정부와 브란덴부르크 연방주의 지원을 받는 브란덴부르크 기념재단(Stiftung Brandenburgische Gedenkstätten)이 관리하고 있다. 희생자들의 출신국명이 부착된 '통곡의 벽'과 '짐을 진 여인들'은 구동독 시기 기억문화의 유물로 지금도 여전히 라벤스브뤼크 기념관의 상징으로 남아 있다.

 

소녀상과 라벤스브뤼크의 기억 문화

2019년 초 라벤스브뤼크 기념관에서는 일본군'위안부'를 상징하는 소녀상 철거 소동이 있었다. 문제가 된 것은 베를린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시민단체 '코리아페어반트'에서 2017년 기념관에 선물한 작은 소녀상이었는데, 이를 알게 된 일본대사관 측에서 항의와 함께 집요하게 철거를 요구했다. 작은 소녀상은 기념관 상설 전시에 속하지 않았기 때문에 기념관 측은 해당 소녀상을 치우는 것으로 사태를 마무리했다. 당시 인자 에셰바흐(Insa Eschebach) 관장은 "이 조그만 모형이 그렇게 큰 일이 될 줄은 상상도 못했다"며 고개를 저었다.

2월 초 기념관을 찾은 날은 우연히도 새로운 특별전 개관일이었다. 전시 주제는 <나치 시대의 동성애>였다. 소규모인 전시 패널에는 라벤스브뤼크 수감자였던 중국인 여성 나딘 황의 이야기도 만날 수 있었다. [사진 15] 중국 외교관의 딸이었던 나딘은 1944년 레지스탕스 혐의로 라벤스브뤼크에 끌려왔다가 벨기에 레지스탕스인 오페라 가수 넬리 무셋-보스를 알게 된다. 수용소에서 만나 평생의 반려자가 된 두 여성은 한동안 헤어지기도 했지만 끝내 생존했고, 전쟁이 끝난 후에는 부부가 아닌 사촌이나 친구로 가장해 여생을 함께했다. 이들의 드라마틱한 이야기를 담은 다큐멘터리 <넬리와 나딘>은 2022년 EBS국제다큐영화제에 선보여 큰 주목을 받기도 했다.

여성 수감자들의 국적이 다양했던 만큼 생존자들은 이후 각국에서 라벤스브뤼크 생존자 단체를 꾸려 활동하였다. 일반적으로 나라마다 문화권마다 저마다의 기억 문화를 반영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동유럽과 서유럽에 광범위하게 걸쳐 있는 라벤스브뤼크 희생자 국제 연대는 구동독 시기부터 라벤스브뤼크 기념관의 기억 문화가 만들어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고, 그 전통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사진 15] 나딘 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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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용숙 2020.09.18

글쓴이 정용숙

춘천교육대학교 사회과교육과 교수. 서양 현대사/독일사를 전공했고, 연구 분야는 (탈)산업화와 노동자 가족, 탈산업 시대의 산업유산 등이다. 퍼블릭히스토리 차원의 역사교육에도 관심을 두고 있으며, 주요 논문으로 「나치 국가의 매춘소와 강제성매매 – 그 실제와 전후 시대의 기억」(2018), 「산업유산의 디즈니랜드? -루르의 산업투어리즘과 역사적 진정성」(2018), 「Beyond the Bifurcated Myth: The Medical Migration of Female Korean Nurses to West Germany in the 1970s」(2018) 등이 있다.

yongsuk.jung@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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