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맣게 굳은 소독약과 파편들… 할머니는 왜 그렇게 오래 간직하고 있었을까

소현숙일분군'위안부'문제연구소 학술연구팀장

  • 게시일2024.11.12
  • 최종수정일2024.12.10

까맣게 굳은 소독약과 파편들…
할머니는 왜 그렇게 오래 간직하고 있었을까
《상하이 중국'위안부'역사박물관》

일러스트 ⓒ이사각

 

1931년 일어난 만주사변, 1937년부터 중국 전국토에서 전개된 중일전쟁, 1941년부터 1945년까지 벌어진 아시아・태평양전쟁에 이르기까지, 일본 제국주의의 광범위한 침탈 현장이었던 중국은 당시 일본군이 조직적으로 운영한 위안소의 역사가 녹아있는 현장이기도 하다.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는 지난 6월 19일부터 21일까지 사흘 동안 아시아 지역 일본군'위안부' 문제 연구와 함께 일본군'위안부' 관련 기억의 전승을 위한 중국의 노력 등을 살펴보기 위해 가장 치열했던 전장인 난징과 상하이를 찾았다. 현지 일본군'위안부' 유적지 및 박물관 탐방기를 3회에 걸쳐 싣는다.

 

본격적인 더위가 시작되기 전인 6월 중순이었지만 중국 상하이는 매우 습하고 무더웠다. 간간이 내리는 부슬비 덕분에 숨이 턱턱 막히는 더위를 그나마 피할 수 있어 다행이었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를 맞으며 상하이 남역에서 택시를 잡아타고 가기를 10여 분, 도착한 곳은 상하이사범대학교 앞이었다. 이곳에 우리가 방문하려는 '중국'위안부'역사박물관'이 있다. 정문 앞에서 박물관의 정확한 위치를 찾기 위해 지도를 보니, 공교롭게도 근처에 중일우호공원(中日友好园)이 있다. 중국과 일본의 우호관계를 다지며 세운 공원 옆에 '위안부' 박물관이라니… 진정한 우호 관계를 이루기 위해서는 어두웠던 과거의 역사를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는 의지가 담겨 있기를 바라며 학교 안으로 들어섰다.

 

[사진 1] 박물관이 위치한 상하이사범대학교 원위안빌딩

       

 

상하이, 자료상으로 발견되는 최초의 위안소가 지정된 곳

중국 문화와 경제의 중심지이자, 서구식 건물들이 즐비한 와이탄과 예원노가(豫园老街)의 전통 상가들이 조화를 이루는 곳 상하이. 서울 면적의 10배가 넘는 이 거대한 도시는 오늘날 중국을 넘어서 아시아의 상업과 금융 거점이자, 동서양의 문화가 융합된 매력적인 도시로 꼽힌다. 

그러나 이 화려한 도시 상하이는 불과 한세기 전 참혹한 전쟁의 그늘을 피하지 못한 곳이기도 하다. 1930년대 일본 제국주의가 벌인 침략전쟁의 주요 전장이었던 상하이는 일본군'위안부' 제도의 발상지이자, 위안소가 가장 오래 존재한 곳이라는 참혹한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1932년 상하이 사변을 기점으로 상하이에 주둔한 일본 해군 육전대는 군인들에게 소위 '위생적' 성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해군 특별위안소를 지정했다. 이것이 자료상으로 발견되는 최초의 위안소이다. 이를 기점으로 만들어지기 시작한 위안소는 1937년 일본의 전면적인 중국 침략 과정에서 급격히 증가해, 현재까지 밝혀진 바에 따르면 상하이 안에서만 무려 180곳이 넘는 위안소가 존재했다. 순간 이렇게 가파르게 늘어난 위안소의 규모가 수많은 여성이 '위안부'로 강제 동원되었음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어두운 역사를 품고 있는 상하이에 중국'위안부'역사박물관이 자리잡고 있는 것이 당연하게 느껴진 순간이었다. 

상하이사범대학 안에 중국'위안부'역사박물관이 설립된 것은 이 학교의 교수로 재직해 온 쑤즈량(蘇智良) 교수의 역할이 컸다. 1990년대 일본에 방문 학자로 갔던 쑤즈량 교수는 이를 계기로 '위안부'문제의 중요성을 인식했다. 그리고 1999년 상하이사범대학교에 '중국'위안부'문제연구센터'를 설립하고 이 문제와 관련된 연구에 매진했다. 대표적인 활동이 약 50명의 특별연구원과 함께 중국 전역을 조사해 피해 생존자들을 찾고 그들로부터 증언을 듣고 자료를 모은 것이었다. 이러한 활동에 힘입어 2007년 소규모 자료관이 설립됐고, 2016년 오늘날과 같은 역사박물관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사진 2] 중국'위안부'역사박물관 모습

 


박물관의 규모는 그리 크지 않았다. 중국 정부가 운영하는 난징의 대도살기념관(侵华日军南京大屠杀遇难同胞纪念馆)이나 난징 리지샹위안소 유적전시관과 비교하면 소박한 편이었다. 하지만 이 작은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유물이 약 2만 점에 달한다. 전시된 것은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고 하니 전시장 공간만 보고 과소평가할 수 없는 곳이다. 더구나 지금도 중국 곳곳에서 '위안부'와 관련된 유물들이 기증되고 있다고 한다. 쑤즈량 교수는 특히 중국에 거주하는 '위안부' 피해 생존자들의 육성을 담은 궈커 감독의 다큐멘터리 <22>가 2017년 중국에서 개봉해 크게 흥행하면서 이 문제에 관한 중국인들의 관심이 커진 후 많은 성금과 함께 관련 자료를 발굴해 제보하는 사례가 늘었다고 전했다. 앞으로 어떤 자료와 유물이 새롭게 발굴돼 공개될까, 미래를 기대하게 하는 설명이었다.

[사진 3] 궈커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22> 포스터

 

차분한 분위기의 전시장 입구에서 가까운 벽에 붙은 패널에는 '위안부' 동원의 역사에 대한 전반적인 설명과 더불어 상하이의 대표적 위안소를 안내하고 있었다. 그리고 피해 생존자들의 사연, 증언과 함께 콘돔, 성병약 등 위안소에서 사용된 물품들과 전쟁 시기의 사진과 지도, 그릇, 화장품, 호구부 등 다양한 유물들이 당시의 상황을 증거하고 있었다.

그중 중국인 위안부 피해자 레이꾸이잉(雷桂英) 할머니가 위안소에서 가지고 나온 소독약품 과망간산칼륨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위안소에서 소독약으로 쓰던 것을 할머니가 들고나와 전후에도 계속 보관하고 있다가 기증한 것이라 한다. 까맣게 굳어버린 소독약에 세월이 켜켜이 쌓여있다. 할머니는 왜 이 소독약을 들고나와 그렇게 오래 간직하고 있었던 걸까. 
콘돔 두 개의 파편이 담긴 병도 눈에 띄었다. 도쿄 나가노에 살던 전 일본 해병대 장교가 소유하던 것으로, 그는 전쟁 중 상하이에서 해군 위안소를 관리했다고 한다. 까맣게 말라버린 파편을 오래 바라봤다. 저 작은 도구가 얼마나 많은 여성을 고통으로 몰아넣은 도구로 쓰였을까, 보고 있지만 그 사실은 실감나지 않았다.


[사진 4] 콘돔 파편이 든 병과 그 뚜껑이다.

 

 

조선인 '위안부' 피해자의 호구부가 전하는 먹먹한 사연

유물 중에는 조선인 '위안부' 피해자의 것들도 있었다. 그 가운데 1922년생으로 전라북도 출신 모은매(毛銀梅) 할머니의 호구부가 있다. 그녀의 원래 이름은 박차순이었다. 할머니는 1945년 초 취업을 알선해준다는 일본인에게 속아 중국 우한으로 끌려왔고, 곧 한커우의 위안소로 보내져 '위안부'가 되었다. 일본이 패망하면서 허베이 샤오간으로 탈출한 그녀는 이후 중국식으로 이름을 바꾸고 현지에 남는 길을 선택했다. 어린 나이에 타지로 끌려와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은 후에도 끝내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박 할머니의 사연과 유품을 보는 내내 가슴이 먹먹했다.

박물관에는 피해자의 유품이나 가해 군인들이 쓰던 물건들 외에 위안소 모습을 재현해 둔 공간도 있었다. 특히 재현된 위안소에 달린 문짝은 실제 하이나이자(海內家) 위안소에 있던 것을 그대로 가져와 복원한 것이었다. 1939년 설립된 하이나이자 위안소는 일본 해군이 사카시타 쿠마조라는 일본인에게 전권을 위임해 운영하게 한 위안소였다. 당시 사카시타 쿠마조는 상하이에서 콩자반 가게를 하던 이였는데, 아내의 반대를 물리치고 '국가'를 위해 힘을 기울여달라는 해군의 요구에 부응해 합작으로 위안소를 만들었다. 물론 이 위안소에도 조선인 '위안부'들이 있었다. 아주 좁은 방에 침상과 몸을 씻기 위한 양동이 몇 개가 덩그러니 놓인 위안소의 모습에 마음이 점점 착잡해졌다.   

중국'위안부'역사박물관의 가장 큰 특징은 연구자가 중심이 되어 만든 박물관인만큼 연구를 거쳐 새롭게 발굴된 내용을 그대로 전시에 녹여낸 부분이었다. 쑤즈량 교수는 현지 조사를 통해 피해 생존자를 찾고 자료를 모은 지 30년이 되어가지만 아직도 조사가 끝나지 않았고, 앞으로도 연구가 계속될 것이라 강조했다. 후세대 연구자들에 의해 지역별 연구가 이어지고 있는 만큼 중국'위안부'역사박물관의 아카이브는 물론 전시 또한 꾸준히 보완될 것이라는 설명이다. 


[사진 5] 조선인 위안부 피해자 모은매 할머니의 외국인 호구부

[사진 6] 박물관에는 하이나이자 위안소의 문짝 등 실제 위안소의 공간을 재현해 놓았다. 

 

 

언제든 나타날 피해자를 위해 비워 둔 의자 하나

박물관을 둘러보고 나오자 안내자가 교정에서 들어오는 길에 소녀상을 보지 않았냐고 묻는다. 아, 교정에 소녀상이 있구나! 미처 몰랐다는 표정이 보였는지 안내자는 소녀상을 보여주겠다면서 친절히 건물 밖으로 우리를 이끌었다. 따라가보니 건물 왼쪽의 잔디밭에 아담한 소녀상 두 개가 나란히 의자에 앉아 있었다. 하나는 우리에게 익숙한 조선인 '위안부'의 모습이고, 다른 하나는 중국 전통 옷을 입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 빈 의자 하나가 놓여 있었다. 언제든 나타날 수 있는, 아직 만나지 못한 피해자를 위한 자리였다. 이미 많은 분들이 돌아가셔서 새로 나타날 피해 생존자가 얼마나 있을지 낙관하기 어려운 시대이다. 그 사실을 모르지 않는 우리에게 비어 있는 의자가 조용히 전하고 있었다. '포스트 피해자의 시대'를 예비해야 하는 오늘날 후세대들이 함께 배우고, 연대하기 위한 자리로 만들어보라는 것이었다.      


[사진 7] 상하이사범대 교정에 있는 소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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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소현숙

현재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학술연구팀장이다. 한국근현대 가족사, 사회사, 여성사, 마이너리티 역사 전공. 논문으로 “Collaboration au féminin en Corée”, 〈식민지시기 ‘불량소년’ 담론의 형성〉, 〈'만들어진 전통'으로서의 동성동본금혼제와 식민정치〉, 〈식민지 조선에서 ‘불구자' 개념의 형성과 그 성격〉, 〈전쟁고아들이 겪은 전후:1950년대 전쟁고아 실태와 사회적 대책〉 저서로 《이혼법정에 선 식민지 조선 여성들》, 공저로 《일상사로 보는 한국근현대사》 《식민지 공공성》 《日韓民衆史硏究の最前線》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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