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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년 좌담 지금, 여기에서 일본군위안부‘문제’란 무엇인가 〈3부〉 - 따옴표 옮기기: ‘위안부’에서 ‘문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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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위안부’문제를 다룬 학술의 장이 마련될 때면 청년·미래 세션이 빠지지 않는다. 피해 생존자와 연결된 실질적 감각이 부재한 포스트 메모리(후-기억) 세대에 대한 우려와 기대가 드러나는 부분이다. 기실 여성학, 법학, 외교학, 사회학, 역사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신진 연구자들의 연구성과는 축적되고 있다. 일본군‘위안부’문제 공론화 이후로 적지 않은 시간이 흐른 지금, 이곳에서 젊은 연구자들이 던지고 있는 질문은 무엇일까. 웹진 <결>은 이들의 관점에서 일본군‘위안부’문제가 어떻게 의미화되고 있는지 알아보는 자리를 마련했다. -좌담회 일자: 2022년 6월 22일 -사회: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이헌미, 황진경, 이안, 장소정 -대담: 백재예(University of Massachusetts-Amherst 정치학과 박사과정), 송혜림(연세대 비교문학 협동과정 박사과정), 전소현(성공회대 국제문화연구학과 석사과정), 정희윤(University of Massachusetts-Amherst 사학과 박사과정) Q. 정희윤 선생님의 논문 <21세기 식민주의 유골 반환의 딜레마>는 다양한 맥락이 있지만, 유골이 본국으로 반환되어야 한다는 사고 자체가 국가주의적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논문 제목에서도 ‘딜레마’라고 표현하셨는데요, 식민주의 폭력 희생자의 유골은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작업 이후 ‘딜레마’ 해체에 더 다가간 부분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정희윤 2014~2015년경 홋카이도에서 서울로, 베를린에서 나미비아 빈트후크로 봉환된 식민주의 폭력 희생자들의 유해가 소위 ‘본국’으로 반환되는 과정을 분석한 바 있습니다. 반환의 과정은 탈식민적인 활동이었고 윤리를 행하기 위한 노력이었을 텐데, 딜레마로 여겨지는 구간이 있었습니다. 제국의 인종주의, 노동문제, 인종차별 문제보다는 남한이나 나미비아 같은 국가적 상징이 더 강력하게 읽혔기 때문입니다. ‘위안부’가 “성노예다, 아니다”라는 언어에 갇혀 그 이름을 잃어버린 것이나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 희생자들이 “빨갱이다, 아니다”라는 이분법에 갇혀버린 것도 비슷한 맥락이라고 생각합니다. 식민주의 유해 반환은 “본국인이다, 아니다”라는 미로 속에 갇혀 이름들을 잃어버리는 기분이 들어서 이러한 현상을 딜레마라고 표현했습니다. 그 이름들을 어떻게 되찾아줄 수 있을까 계속 고민하고 있지만 잘 모르겠습니다. 모든 정세 판단이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것처럼, 어떤 유해는 반환되는 게 옳고, 또 어떤 유해는 그대로 두는 게 낫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럼 이와 같은 딜레마를 해체하기 위해 국가를 해체해야 할까요? 그것은 말이 안 되지요. 결국 일상에 잔존하는 폭력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언어를 찾아야 하고, 폭력에 대한 감수성을 기르기 위해 기념과 애도 작업을 한다고 생각하는데, 이외의 방법을 찾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게 됩니다. 결국 딜레마를 해체하기보다는 그대로 둬야 하고, 불화는 계속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불화의 과정이 애도의 가능성과 맞물리는 지점이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Q. 송혜림 선생님의 <감정의 재의미화와 기억의 해방:4.3 피해자 증언을 중심으로>라는 논문은 ‘감정기억’이라는 개념을 끌어왔다는 점에서 증언과 기억을 대하는 자세에 시사점을 주는 것 같습니다. 증언/기억에 감정을 개입시키는 것이 새로운 가능성이자 해방이라고 보셨는데, 이를 통해 증언/기억은 현재로 불려오게 됩니다. 분유(分有) 가능성에 대한 고민을 하고 계신다고 하셨는데 그에 대한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송혜림 증언의 어원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그 사건의 제삼자가 사건을 투명하게 진술하는 언어이고, 다른 하나는 사건에서 살아남은 생존자의 입장에서 말하는 진술이죠. 그렇기에 후자는 객관적이고 실증적일 수 없는 고통의 언어예요. 현재의 증언 담론은 전자에 치우쳐 성립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후자의 언어를 더 잘 듣기 위해서는 명료한 언어나 표현에 다 담기지 못해 잉여의 의미들이 잔존하는 정동의 언어로 들어야 해요. 이는 증언자에게서 언어가 실패할 수밖에 없는 지점이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기도 하고, 증언의 그러한 한계를 적극적으로 의미화할 청자의 책임을 요청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또 다른 점에서는 기억 분유와 연결될 텐데, 증언을 매개할 때 독자 혹은 관객을 정동적으로 연루시켜야 한다고 봅니다. 저는 증언을 들을 때마다 인지적 이해보다는 감정적인 동요가 먼저 일어나는데요, 증언의 순간에 함께 있던 연구자나 활동가의 서사를 통해서도 그들이 현장에서 느꼈던 감정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증언을 듣고 ‘정말 고통스럽고 힘들었겠구나,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건 듣고 기억하여 전달하는 것이겠구나’라는 책임을 나눠 갖는 것 자체가 기억 분유의 중요한 특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위치는 학술적인 영역에 있지만 저는 기억 분유를 절대 학술적인 전형성 안에서만 반복되는 방식이 아닌, 더 많은 이들이 증언을 만날 수 있도록 확장된 영역으로 키우고 싶습니다. Q. 백재예 선생님은 <체계적으로 관리된 성폭력, 일본군‘위안부’제도>라는 논문에서 “연합군의 자료를 통해 인식을 살펴보는 것은 일본군‘위안부’ 제도가 가진 분쟁하 여성에 대한 폭력으로서의 보편적 측면의 인식을 확장하는 것이다. 이에 연합군 자료가 축적되어 연합군의 인식을 포착하고, 그것이 어떻게 전후 전범재판에 반영되었는지를 규명하는 연구가 필요하다”고 하셨습니다. 지금 박사과정에서 국제법을 전공하고 계신 만큼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있어서 어떤 언어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그리고 우크라이나 사태와 같이 현시점에도 이어지고 있는 전시 성폭력 문제를 방지할 수 있는 기틀을 국제사회가 앞으로 어떻게 마련해갈 수 있을까요. 백재예 그 두 가지 질문이 논문 주제를 설정하고 계속되었던 고민입니다. 기존에 주어져 있는 법 제도에 미뤄봤을 때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느냐 없느냐, 만약 가능하다면 어떤 법을 적용할 수 있는가’와 같은 법학 연구가 현재는 주를 이룹니다. 그런데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 국제법이 어떻게 변화되어야 할 것인가를 다양한 학제에서 연구하고 제시하는 것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이유로 법을 사회적 구성물로 바라보는 법사회학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에 대한 관심을 확장시키면 일본군‘위안부’ 제도와 운동은 전시 성폭력에 대한 정의 실현이라는 보편적 질문에 많은 시사점을 줄 수 있다고 봐요. 우크라이나 사태에도 적용될 수 있고요. 침략국이 전시 성폭력을 반성하지 않고 군인들을 처벌할 의지가 없는 상황에서는 ‘피해 생존자들이 어떻게 법을 동원하고 자신들의 피해를 구제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가 남을 텐데, 30년간 축적된 ‘위안부’ 운동의 경험과 노하우를 비롯해 우리 사회가 맞닥뜨렸던 한계가 그 문제에 실존적 함의를 던져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전시 성폭력 재발 방지에 있어서 가장 크게 느꼈던 문제점은, 국제법이나 법 자체가 형사법 체제하에 있기 때문에 가해자 처벌에 집중돼있다는 것이에요. 반면에 생존자가 자신을 위해 활용할 수 있는 민사법적 접근은 충분하지 않습니다. 결국 모든 책임이나 권한은 국제형사재판소의 검사나 판사에게 있는 것이죠. 따라서 국제법 자체도 형사법적 정의뿐만 아니라 피해자가 주체로서 자신의 피해 구제와 정의를 실현할 수 있는 방향으로 확장되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더불어 국제법의 유효성을 살펴볼 때도 가해자 처벌 여부에만 치중하거나 국가별 법안 입법 여부를 따지기보다는, 국제법이 생존자들의 요구에 얼마나 기여하는지를 살펴보는 등 지표가 확장돼야 합니다. 그 지점에서 일본군‘위안부’ 운동의 경험이 시사하는 점이 많을 것 같습니다. Q. 전소현 선생님의 <장애인의 시설화되는 삶을 교차적으로 읽기>를 읽고 ‘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돌봄 구조에 대해 생각하게 됐습니다. ‘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보상 및 지원에 대한 논의는 많았지만, 그 과정에서 ‘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돌봄은 주요 의제가 되지 못하고 연구 또한 미비해 아쉬운데요. 앞으로 연구자들은 ‘위안부’ 피해자 관련 시설 안팎의 돌봄을 어떻게 기록하고 해석할 수 있을까요. 전소현 “돌봄은 일방적인 과정이 아니고, 돌봄을 받는 사람과 하는 사람의 위치는 고정돼있지 않다”는 말이 있지요. 그런데 저에게 돌봄은 굉장히 일방적인 억압의 경험으로 기억되고 있었어요. 소논문 발표 후 한 토론자분께서 해주셨던 말이 기억납니다. “돌봄을 억압의 과정으로만 생각하게 되면, 돌봄의 상호적인 과정이나 사람들의 행위자성을 개념화하기 어려울 수 있다”는 말이었죠. 옳은 지적이라고 생각했어요. 누군가를 일방적으로 돌보고 있다는 생각에는 개인의 능력, 역량, 독립성, 자율성에 대한 기존의 주류적 관점이 포함되어 있으니까요. 주류적인 방식으로 생각했을 때 돌봄을 제도화한다는 것도 관료적이거나 일방적인 방식이 될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그렇기에 국가의 돌봄 정책이나 보상이 어떤 정책적 개입이나 비개입을 통해 이뤄지고, 사각지대가 활동가들에게 어떠한 노동으로 전가되는지 함께 짚어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나눔의 집 활동가분들이 수행했던 돌봄 노동에 대한 재조명도 필요하다고 봐요. 돌봄을 억압적인 방식으로만 생각하면 그분들이 오랜 시간 피해자들의 곁을 떠나지 않고 함께한 이유에 답할 수 없다고 생각해요. 피해자의 문제를 조력자들이 자신의 문제로 주체화하는 과정이 있었기 때문에 힘들어도 함께해올 수 있었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어떤 방식으로 당사자와 조력자가 자신의 정체성을 구축해나갔는지 그 과정을 제대로 들여다봐야 하지 않을까요. 앞으로는 그런 관점에서 기록이나 연구가 진행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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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년 논평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생존자는 셀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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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의 제목과 내용은 다음 졸고에서 추린 부분이 많다. 이혜령, 「그녀와 소녀들: 일본군 ‘위안부’ 문학/영화를 커밍아웃 서사로」, 오혜진 외, 『문학을 부수는 문학들』, 민음사, 2018. 2015년 한일 일본군 위안부 합의 폐기와 재협상을 촉구하는 논의가 장미대선으로 당선된 문재인 정부 출범과 함께 활발했던 당시,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중 생존자가 몇 분 남았는가가 각별한 관심사였다. 2017년 7월 23일 김군자 님이 돌아가셨을 때, 한 신문은 「이제 37송이, 시간이 없다」는 헤드라인으로 2015년 한일 일본군 위안부 합의의 폐기와 재협상을 촉구하는 1면 기사를 내보냈다.[1] 그 후로도 여러 분들이 세상을 떠나셨다. 윤석열 정부의 여성가족부 폐지 공약이 기정사실화되고, 우크라이나 전쟁 이외에 다른 전쟁 또한 유발될 것 같은 신냉전의 세계정세 속에서였다. 2022년 5월 2일 또 한 분의 일본군‘위안부’ 피해 생존자이자 운동가이셨던 김양주 님의 별세를 알리는 기사가 올라왔다. 김양주 님의 부고가 언론을 통해 알려지고 장례식이 치러지는 과정은 지역과 한국 사회에서 일본군‘위안부’ 피해 생존자의 죽음에 이르러서야 ‘위안부’ 문제가 더 활성화되는 정치적, 사회적 연결망들을 드러내는 것 같다.[2] 그 기사는 2022년 5월 2일 정부 등록자 240명 중 11명이 생존해 있음을 아울러 보도했다.[3] 기사는 1면을 차지하지는 않았다. 2017년에는 정부 등록자가 239명이었는데, 그 사이에 등록자가 1명 늘어 240명이 되었지만 피해 생존자는 이제 11명이다. 부고와 함께 셈해지는 일본군‘위안부’ 피해 생존자 숫자는 정부에 등록된 피해자 중 살아있는 이들의 숫자이다.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란 1993년 6월 11일 「일제하 일본군위안부에 대한 생활안정지원법」 제정과 함께 피해자 신고, 심의, 결정을 통해 ‘위안부’ 피해자로 등록된 자를 뜻한다.[4] 이것이 ‘위안부’ 피해 생존자를 셀 수 있게 된 근거라고 할 수 있다. 피해 생존자가 얼마 남지 않았으며 그들이 모두 사라지기 전에 ‘위안부’ 문제가 조속히 해결되어야 한다는 인식은 정작 피해 생존자의 의사를 전혀 묻지 않고 진행된 한일 일본군 위안부 합의만이 아니라 피해자를 추모하고 애도하는 시민들에게서도, 또 일본군 성노예 문제 해결을 위해 운동해왔던 생존자들에게서도 주장되는 바이다. 최근 이용수 할머니는 “살아있는 내가 책임이 너무 무거워서 요즘 잠이 오지 않는다. ‘할머니들 다 죽기를 바라느냐’고 말하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하지 않았다. 남아있는 할머니들 소원이라도 풀어줘야 한다”고 말했다.[5] 그런데 애초에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생존자는 셀 수 있는 존재였던가? 어떻게, 얼마나, 어디에서 모집, 동원되었는지 그 전모를 증명할 증거 따위는 없다는 것이 일본 정부와 국내외 역사부정주의자들의 기본 입장이며, 발굴 및 공개된 증거는 부분적인 것일 뿐이기에 그 주장은 과장되거나 날조된 것이라는 논리를 편다. 그런데 생각해보라. 그런 따위의 증거 부족, 증거 부재야말로 ‘위안부’는 셀 수 없는, 애초에 그 삶과 죽음이 셀 필요조차 없는 존재였음에 대한 역설적 웅변 아닌가. 20만 명을 상회할지도 모른다고 추정되는 조선인 ‘위안부’는 그 추정치가 일본군, 일본군 부대의 숫자에 근거해서 이루어진다.[6] 일본군‘위안부’에 비해 일본군으로 동원된 조선인 수의 추정은 아주 구체적이다. 일본 정부의 공식통계 가운데 최저치를 적용하면 육군특별지원병 16,830명, 학도지원병 3,893명, 육군징병 166,257명, 해군(지원병 포함) 22,299명 등 군인 동원 총수는 209,279명이라고 한다.[7] 그런데 어떻게 이들은 세세히 셈해질 수 있었는가? 다카시 후지타니는 “조선인의 전시동원으로 인해 이들은 직접적으로 생명, 건강, 생식, 그리고 행복의 가치가 있는 인구 구성원이 되었다. 즉 조선인들은 생명관리권력(bio-politics)과 통치성의 레짐 안으로 편입하게”[8] 되었다고 주장한다. 이 주장도 그들의 죽음까지 셈할 수 없었다는 데서 문제가 있으나, 조선인 일본군‘위안부’는 생명, 건강, 생식, 그리고 행복의 가치가 있는 인구 구성원 자체에 포함되지 않았으며 이는 비단 조선인 ‘위안부’에 국한되지 않는 특성일 것이다. 셀 수 없게 된 근본적인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셀 수 없는 자들을 셀 수 있는, 가시적이고 기지적(旣知的)인 존재로의 범주화는 피해 생존자 김학순(1922-1997)의 커밍아웃에서 본격적으로 개시된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운동과 거기에 조응한 한국 정부의 지원에 따른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신고 및 등록에 의해 이루어졌다. 신고 및 등록은 피해자/생존자를 셀 수 있는 범주로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신고와 등록 절차에는 커밍아웃이라는 과정이 수반되어 있으며, 무엇보다 등록은 커밍아웃으로서의 증언, 증언으로서의 커밍아웃을 공신력 있는 것으로 만드는 장치였다는 점에서 운동을 안정화, 규범화하는 데 기여하였다.[9] 증언의 집적인 일본군‘위안부’ 증언집은 신고와 등록의 절차를 밟은 피해자들의 증언을 통해 만들어진 것이다. 그런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운동의 성과로 주어진 대상자 등록이란 최종적으로는 심의와 결정, 통지의 과정을 통해서 이루어졌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자신이 일본군‘위안부’ 피해 생존자라는 진술이 심의 결과 부정되어 등록되지 못한 분들은 과연 없었을까? 해봄직한 상상 아닌가? 신청사항을 증명할 수 있는 자료(본인 진술서, 사진이나 목격자 등 제3자의 증언)가 있었다면 어땠을 것인가? 대상자 등록 신청은 한 번의 기회만이 주어진 것일까? 결정을 통보받지 못한다면, 그는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생존자인가 아닌가? 이런 의문을 품는 것은 일본군‘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운동의 성과로서의 이 법의 제정과 시행 과정을 폄하하기 위함이 아니다. 법의 제정과 시행 또한 일본군‘위안부’ 피해 생존자의 출현과 증언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함을 말하기 위함이다. 또한 일본군‘위안부’를 한국 정부의 법적 등록의 대상으로 범주화하고 거기에 안착해 있는 상황은 이제 한계 지점에 이른 것 같다. 지금까지 효과를 발휘했던 범주화는 ‘위안부’ 피해 생존자의 삶과 죽음에 대한 중층적이고도 복합적인 이해를 어렵게 만든 지점이 있기 때문이다. 김학순의 증언이 있기 16년 전인 1975년 자신이 일본군‘위안부’였음을 증언한 피해 생존자 배봉기(1914-1991)의 삶은 이 지점에서 시사점을 던져준다. 미군이 통치하던 오키나와가 1972년 일본으로 반환된 후 오키나와에 거주하는 외국인의 법적 지위 문제가 새롭게 부각되자 1975년 배봉기는 자신이 일본군‘위안부’로 오키나와에 오게 되었음을 증언함으로써 ‘특별 재류’ 자격을 얻게 된다.[10] 임경화는 “이로써 배봉기는 30년 만에 국가에 등록되었다”[11]라고 썼다. 배봉기의 삶은 보이지 않게 살았던, 즉 셈해질 필요가 없었던 존재로서의 일본군‘위안부’의 비인구적 성격을 삶 자체로 구현하고 있다. 그러한 성격은 한편으로 침묵됨으로써 생겨났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최근 김현경은 “귀환하지 않은/못한 일본군‘위안부’”인 배봉기의 삶과 죽음은 포스트식민 냉전 체제라는 힘이 주조했으며 미국, 일본, 남한 간의 위계질서의 착종 속에서 일분군‘위안부’ 문제를 비가시화하고 서발턴의 침묵을 지속시키고 있었음을 날카롭게 논증하였다.[12] 미국 신탁 통치하 오키나와 조선인을 불가시화화하는 법적 구조의 포위망 속에서, 또 일본군‘위안부’로서의 삶과 전쟁 경험, 전후의 고통을 발화할 수 있는 장이 없었기 때문에 배봉기의 삶은 가시화될 수 없었다. 1975년 공적 증언에 의해 배봉기의 삶이 알려졌으나, 냉전의 남북 체제 대결 구도가 일상화된 남한 사회에서 그즈음 조총련 활동가들과 친분을 맺고 있던 그의 이야기에 귀 기울일 수 있는 청중은 없었다. 나아가 그의 유골의 소유권을 두고 민단과 조총련은 배봉기를 대신하여 말하고자 함으로써 배봉기의 목소리를 지우고 말았으며, 남한에서는 당시 일본군‘위안부’ 문제의 이슈화가 한창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국가의 경계 안에 있지 않은 ‘위안부’들에 대한 시야가 확보되지 않은 채로 그의 주검과 귀향을 둘러싼 논의에 무관심으로 일관했다고 비판한다.[13] 국가의 경계 안에 있는 ‘위안부’들이라 하더라도 그들의 삶과 죽음이 비가시화와 침묵의 세계 속으로 가라앉지 않을 것인가의 전망이 밝은 것은 아니다. 국내 반페미니즘 정서와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확고해진 신냉전에의 편승 기류가 심상치 않다. 여성가족부 사이트에 시, 도별 지원 대상자의 수를 써넣은 간단한 도표는 언젠가 축소되어 마지막 한 명조차 유명을 달리해 사라질 날을 초조하게 또는 공연히 기다리고 있다는 느낌을 자아낸다. 그나마 등록자가 240명이었음을 그 표에서는 확인할 수 없었다. 이헌미는 240명과 20만 명 사이에서 ‘가라앉은 자’들의 이름을 불러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14] 이헌미는 도미야마 이치로의 말을 언급했지만, 나는 도미야마 다에코(1921-2021)의 그림 <바다의 기억> 시리즈가 떠올랐다.[15] 남태평양 바닷속에 가라앉아 있지만 죽어서도 살아있는 ‘위안부’들과 해골들, 일본군, 총과 사물들, 샤먼과 원주민들, 물고기와 새, 나무들. 그 존재들을 셈할 수 있는가? 배봉기와 김학순, 그리고 결코 계량화될 수 없는 증언들이 열어젖힌, 전쟁 속에서의 살아남음과 목격한 죽음들, 강간과 모욕과 멸시와 가난, 체념과 침묵, 그리고 원망과 의지의 카오스 속으로 들어가는 일은 일본군 성노예 문제 해결이라는 과제를 감당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처음인 것처럼 반복해야 하는 자맥질일 것이다. 도미야마 다에코 작가의 ‘바다의 기억’ 연작 중 <남태평양 해저에서> 이미지는 다음 기사를 참조 >> 한겨레, 일본 100살 거장의 ‘기억’…야만 들추고 약자 보듬다, 노형석 기자, 2021.03.24. 각주 ^ 『경향신문』, 「이제 37송이, 시간이 없다」, 2017.7.23. ^ 다음을 참조. 정갑숙,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고 김양주 할머니를 보내드리며…」, 『결』(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웹진), http://www.kyeol.kr/ko/node/457 게시일: 2022.06.10 최종수정일: 2022.06.14 ^ 『한겨레』,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김양주 할머니 별세…생존자 11명」, 2022.5.2 ^ 등록 절차와 관련된 법은 2002년 「일제하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생활안정지원 및 기념사업 등에 관한 법률」로 개정된다. 2018년 법률명 등이 바뀌어 「일제하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보호․지원 및 기념사업 등에 관한 법률」로 시행되었으며 2020년 일부 개정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법률 제정은 정대협 운동의 한 성과라고 할 수 있다.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20년사 편찬위원회 엮음, 『한국정신대문제 대책협의회 20년사』, 한울, 2014, 59-62쪽. ^ 『한겨레』, 「주일대사 내정자 만난 ‘위안부’ 피해 이용수 할머니…“죽기 전에”」(김규현 기자), 2022.6.21 ^ 강정숙, 「일본군 ‘위안부’제의 식민성 연구: 조선인 ‘위안부’를 중심으로」, 성균관대 박사학위논문, 2010, 75-80쪽 참조. 특히 표2-2 군‘위안부’총수에 대한 여러 의견, 79쪽 참조. ^ 대일항쟁기간강제동원피해조사및국외강제동원희생자등지원위원회 편, 『위원회 활동 결과보고서』, 2016, 124쪽. 다음에서 재인용.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 사이트 https://www.fomo.or.kr/kor/contents/40 ^ 다카시 후지타니, 박선경 역, 「죽일 권리, 살릴 권리: 2차 대전 동안 미국인으로 살았던 일본인과 조선인으로 살았던 조선인들」, 『아세아연구』 제51권 2호, 고려대 아세아연구소, 2008, 23쪽. ^ <일제하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보호․지원 및 기념사업 등에 관한 법률 시행령(별지 제1호서식) (개정 2018.6.5.)>인 <대상자 등록신청서>에는 신청인(피해자)의 신원과 함께 ‘일제하 당시 생활했던 상황’에 대한 란이 마련되어 있다. ‘강제동원 연도(년, 월)’, ‘강제동원 장소’, ‘귀환 연도(년, 월)’, ‘귀환 장소’, ‘강제동원 상황’, ‘현지 생활’, ‘귀환 상황’, ‘현재 생활’에 대한 진술을 해야 한다. 신청인 제출서류로는 다음 세 가지가 제시된다. 1. 재외 국민등록부 등본 1부(국외 거주자만 해당합니다) 2. 보호자임을 증명하는 자료(보호자가 대신 신청하는 경우에만 해당합니다.) 3. 그 밖에 신청사항을 증명할 수 있는 자료(본인 진술서, 사진, 목격자 등 제3자 증언 등) ^ 임경화, 「마이너리티의 역사기록운동과 오키나와의 일본군 ‘위안부’」, 『대동문화연구』112, 성균관대 대동문화연구원, 2020, 493~495쪽. ^ 위의 글, 494쪽. ^ 특히 “포스트식민 냉전체제”라는 용어와 서발턴의 침묵을 지속시키는 다양한 층위를 분석하는 데 있어 활용된 방법적 개념과 관련한 대목을 볼 것. 김현경, 「냉전과 일본군 ‘위안부’: 배봉기의 잊혀진 삶 그리고 주검을 둘러싼 경합」, 『한국여성학』제37권 2호, 한국여성학회, 2021, 208~214쪽. ^ 위의 글, 216~229쪽 참조. ^ 이헌미, 「당신의 이름은」, 『결』(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웹진), http://www.kyeol.kr/ko/node/456 게시일: 2022.06.07 최종수정일: 2022.06.08 ^ 5.18 광주의 화가로 더 잘 알려진 도미야마 다에코는 윤정옥, 이효재와의 만남을 통해 큰 영향을 받는다. 그들은 모두 조선인 일본군 ‘위안부’와 같은 세대였다. 도미야마 다에코는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전쟁 책임의 문제를 ‘위안부’를 주제로 한 <바다의 기억> 시리즈를 1986년 완성한다. 이에 대해서는 미나베 유코, 「월경하는 화가, 도미야마 다에코의 인생과 작품 세계: 포스트콜로니얼리즘과 페미니즘의 교차지점으로부터」, 『민주주의와 인권』제21권 1호, 전남대학교 5.18연구소, 2021, 94-101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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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년 인터뷰 [김숨-소영현 대담] 최초의, 최선의, 최후의 질문 ‘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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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화되지 못한 말을 듣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김숨 작가의 중편소설 『듣기 시간』에 나타난 ‘침묵들이 말이 되는 자리’는 그간 우리가 놓친 증언자의 목소리를 되찾게 한다.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김복동, 길원옥 님의 증언 구술 채록을 통해 정서를 나누고, 자신을 돌아보고, 질문하고, 기록하며 침묵을 듣는 곳까지 도달한 작가는 마침내 “최초의, 최선의, 최후의 질문은 ‘듣기’”라는 선언을 이루어낸다. ‘위안부’ 소설 『한 명』을 시작으로 『흐르는 편지』, 『숭고함은 나를 들여다보는 거야』(일본군 ‘위안부’ 김복동 증언집), 『군인이 천사가 되기를 바란 적 있는가』(일본군 ‘위안부’ 길원옥 증언집), 그리고 『듣기 시간』에 이르기까지 작가의 문제의식은 어떻게 변화하고 또 발전했을까. 구술 채록은 증언자의 목소리를 그대로 받아적는 것이 아니라 채록자와 증언자 간의 관계를 통해 의미가 계속해서 바뀌는 작업이라는 점을 미루어 봤을 때, 증언을 하는 자와 듣는 자 간의 관계는 때로는 조화를, 때로는 불화를 낳기도 한다. 구술 채록 과정에서 작가가 갖게 된 문제의식에 대해 들어보기 위해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는 김숨 작가와 문학박사 소영현(한국문학번역원 교수)의 대담 자리를 마련했다. 『듣기 시간』을 중심으로 ‘증언’과 ‘듣기’, ‘들을 수 있음’의 사이사이를 경유하며 두 사람이 나눈 이야기를 전한다. 소영현 증언에 대한 질문으로 시작해보려고 합니다. 김복동, 길원옥 할머니의 증언을 채록하는 과정을 통해 자신이 성숙해졌다는 언급을 여러 차례 하신 바 있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과정을 거쳤고 그 과정에서 경험한 것은 무엇이었나요. 김숨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분들은 우리가 알고 있듯 살아 돌아오시고, 자신의 삶을 살아내시며,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회복한 분들이세요. 상상을 초월하는 끔찍한 트라우마를 끌어안고 하루 또 하루 살아내신 분들을 가까이에서 뵙는 것 자체가 경탄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소영현 김복동, 길원옥 두 분에 대한 증언소설을 다시 읽다보니 두 소설의 사뭇 다른 분위기가 새롭게 눈에 띄더라고요. 김복동, 길원옥 할머니가 지닌 각각의 면모가 작품에도 녹아들었을 텐데, 두 분을 만나 뵈었을 때 느낌이 어떻게 달랐는지, 직접 구술 채록자의 입장이 되어 작업해본 경험은 어떠했는지 여쭤보고 싶습니다. 김숨 두 분이 정말 다르세요. 한 공간에 살고 계셨지만 다른 기질과 개성을 갖고 계셨고 다른 언어로 말씀하셨어요. 김복동 할머니는 선이 굵으셨어요. 꼭 해야 할 말씀만 아껴 하시는, 대쪽 같은 선비 이미지가 저절로 겹쳐 떠오르는 분이셨지요. 뵙자마자 권위가 느껴졌는데 할머니께서 갖고 계신 ‘강함’은 누구나 느낄 수 있을 만큼 겉으로 드러났어요. 굉장한 인내심의 소유자이시기도 했고요. 반면에 길원옥 할머니는 상냥하고 애교가 넘치셨어요. 하지만 그분 역시 만만찮은 인내심의 소유자이시지요. 김복동 할머니를 뵈었을 때는 항암치료를 하고 계셔서 대화를 나누는 게 어려웠어요. 그래서 멀찍이서 지켜보기만 했습니다. 그런데 아무 말씀도 들려주시지 않는 그 시간에도 할머니께서 끊임없이 어떤 말씀을 들려주고 계시는 것 같다는 생각이 어느 순간 들었어요. 침묵이 단지 침묵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지요. 길원옥 할머니는 손발이 딱딱 맞아 얼굴만 보고 있어도 그저 좋은 친구 같은 느낌을 선물해주셨어요. 할머니와의 대화가 무척 문학적으로 느껴져서 흥분이 되곤 했어요. 대화가 뜬금없고 엇갈리고 엉뚱한 곳에 도달하지만 그럼에도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흘러갔어요. 할머니와 대화를 계속 나누고 싶었지만 사정상 중단되어 무척 아쉽습니다. 소영현 할머님들의 성격이 증언소설에 드러난다고 생각했는데 직접 뵈었을 때의 느낌이 반영된 것이었군요. 길원옥 할머님을 두고 쓰여진 증언소설 『군인이 천사가 되기를 바란 적 있는가』는 특히 문학적 성격이 짙어서 시적이란 생각도 했습니다. 김숨 제가 시를 쓰는 사람은 아니지만 시를 쓰는 기분으로 할머니와 대화했어요. 뵙는 자리에서 즉흥적으로 떠오르는 질문을 드리고, 할머니께서 뭔가 (질문과 어긋나는 대답이어도) 어떤 대답이든 해주시면, 그 대답을 듣고 떠오르는 질문을 즉흥적으로 드리는 방식이었어요. 그래서 어떤 날은 오전부터 저녁때까지 길게 대화가 이어지기도 하고 어떤 날은 짧게 끝났어요. 그리고 할머님을 뵙고 돌아오면 마치 천사들이 날아다니는 천상 세계에, 선(善)한 세계에 다가갔다 지상으로 내려온 기분이 들었어요. 한없이 더러운 저라는 인간이 감화를 받고 조금 선해져서 돌아온 것 같은 기분이요. 소영현 두 분을 만나 뵙고 증언소설 집필 후 『듣기 시간』을 쓰셨죠. 이 작품은 어떻게 작업하게 되셨는지요. 김숨 『듣기 시간』은 과거에 다른 제목으로 발표했던 단편소설 「녹음기와 두 여자」를 퇴고한 것이에요. 할머니들을 뵙기 전에 쓴 소설이죠. ‘위안부’ 증언집에 증언을 채록하고 기록하신 면담자들이 남긴 후기가 실려 있는데, 그 글들이 굉장히 흥미로워 증언이 이뤄지는 과정에 대해 써보고 싶었죠. 그런데 「녹음기와 두 여자」는 그렇게 만족스러운 소설은 아니었던 것 같아요. 소영현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 『21세기문학』에 실렸을 때 저는 좋아했는걸요. 그 작품에 대해 글을 쓰기도 했고요. 김숨 너무 허술해요. 그 소설을 잊고 있다가 다른 ‘위안부’ 소설인 『흐르는 편지』를 쓰고, 이후 할머니들을 직접 만나 뵌 뒤 두 권의 소설을 내고 나서 자연스레 그 작품을 들여다보게 됐어요. 할머니들을 짧게나마 뵙는 동안 저절로 퇴고가 되고 있었다고 해야 할까요. 그래서 『듣기 시간』은 시기상으론 가장 먼저 썼지만, 사실상 두 권의 소설(『군인이 천사가 되기를 바란 적 있는가』, 『숭고함은 나를 뒤돌아보는 거야』) 뒤에 놓여야 하는 작품인 것이지요. 소영현 「녹음기와 두 여자」, 『듣기 시간』 사이에는 큰 변화가 있습니다. 구술 채록된 증언을 소설 안으로 들여오는 방식도 달라졌고, 채록자를 중심에 둔 성격이 좀 더 뚜렷해지기도 했고요. 피해자의 침묵 사이를 채록자의 이야기가 채우고 있는 점에도 주목하게 됩니다만, 무엇보다 단편소설에서는 두 할머니의 비중이 비슷하지만 『듣기 시간』에서는 다르죠. 주로 황 할머니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고, 문 할머니와의 일화는 거의 언급되지 않아요. 퇴고하시면서 어떤 생각을 하셨는지 궁금합니다. 김숨 3~40년 긴 시간을 두고 할머니들과 소통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야 그분들의 고통을 진심으로 이해하고, 그분들에 대해 좀 더 정확하고 예리하게 이야기할 수 있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동안 저희는 언론을 통해 영웅화된 분들만 주로 뵈었던 것 같은데, 트라우마를 끝끝내 극복하지 못하고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신 분들도 계시고, 비관 속에 숨어 살다 돌아가신 분들이 많으시거든요. 그분들이 들려주시는 말씀도 담아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런 반성을 시작하며 『듣기 시간』을 퇴고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이야기들은 되도록 배제하려고 했어요. 증언 채록자분들을 만나 뵈면서, 제가 읽었던 자료들에는 나와 있지 않은 진솔한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고요. 할머니들이 자신이 피해자라는 걸 인식하고 선언하실 수 있도록 옆에서 도왔던 분들을 만나 뵙고 새롭게 깨달은 것들을 『듣기 시간』에 담으려 나름 애를 쓴 것 같아요. 그래서 「녹음기와 두 여자」와 『듣기 시간』은 저에겐 다른 소설로 다가올 수밖에 없습니다. 소영현 일본군‘위안부’ 피해 증언집을 보면 1권에서 3권으로 넘어가면서 성격이 달라집니다. 일본군‘위안부’ 문제가 대두된 초기에는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피해를 입증하기 위해 ‘살아 있는 증거’로서의 피해자 증언 자체가 중요했다면, (침묵이나 표정까지 포함한) 말을 문자로만 이루어진 글로 옮기는 구술 작업을 하면서 채록자들이 직접 대면해야 하는 많은 문제들이 생겨났고 구술이나 증언에 대한 고민도 구체화되었다고 할 수 있는데요. 피해자의 증언을 기록으로 남긴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 기록으로 남기기 위해서는 어떤 부분까지 염두에 두어야 하는지 고민이 깊어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는 소설을 쓸 때도 하게 되는 고민일 것 같은데요, 그런 차원에서 『한 명』과 『듣기 시간』 사이에 존재하는 증언 인용 방식의 차이는 어떤 인식의 변화에서 비롯된 것인지 궁금합니다. 김숨 『한 명』에서는 증언을 소설 안으로 끌고 들어올 수밖에 없었어요. 그 증언이 허구가 아니라는 걸 저 자신에게 일깨워주기 위해서, 독자분들에게는 피해자가 겪었던 일을 과장 없이 알려드리고 싶었어요. 몸에 각인된 트라우마에 시달리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속되는 인생을 살아내고 계신 분들의 ‘하루’를 보여드리고 싶었고요. 할머니 한 분의 몸 안에 복수의 목소리를 담아내면서 소설이 시작되었는데요, 증언들을 읽고 체화하는 과정이 쉽지 않았지만 할머니들께서 하신 말씀들을 제 안으로 갖고 오면서 소설을 쓸 수 있었습니다. 이후 할머니들을 직접 뵙고 침묵을 몸소 경험하며 『듣기 시간』을 펴낼 수 있었습니다. 소영현 『듣기 시간』을 통해 “최초의, 최선의, 최후의 질문이 ‘듣기’”라고 하셨습니다. “녹음기 400개의 구멍으로도 부족하다”는 표현에서도 알 수 있듯 ‘듣기’의 중요성을 강조하셨는데요, 그렇다면 ‘듣기’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오랫동안 타자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온 학자인 오카 마리(현대 아랍 문학, 제3세계 페미니즘 사상 연구자)가 강조했던 것처럼, 모든 피해자는 각자의 방식으로 계속해서 목소리를 내어 말해왔고, 그런 의미에서 피해자의 목소리가 없었던 게 아니라, 그것을 들을 귀가 없는 우리가 진짜 문제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역사적 과거가 아니라 지금 이곳의 문제이고, 피해자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는 우리 사회의 문제라고 해야 할 것 같은데요. ‘들을 수 있음’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도 묻고 싶습니다. 김숨 내가 듣기를 잘하는 사람인가 자문했습니다. 김복동 할머니께서 아무 말씀도 들려주실 수 없는 상태로 누워 계실 때 저 또한 어떤 질문도 던질 수 없었어요. 그래서 침묵이라도 적어보자 했지요. 침묵을 듣고 기록해나가기 시작했어요. 그러면서 듣기가 어려운 행위라는 것 또한 깨달았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침묵한 채 입이 아닌 다른 것으로 끊임없이 말하기도 하니까요. 가령 눈동자의 움직임이나 표정, 몸짓, 탄식, 한숨 등으로요. 그래서 특히 피해자의 말은 온 감각을 열어놓고 들어야 해요. 침묵을 연달아 들려줄 때 침묵이 담고 있는 의미가 다르기 때문에 그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고, 곡해하지 않기 위해서는 더 예리한 감각으로 들어야 합니다. 돌아보자면, 우리가 ‘위안부’ 피해자들께서 들려주신 말들 중 듣고 싶은 말만 골라서 들었던 게 아닌가, 듣고 싶은 대답을 듣기 위해 특정 질문을 반복해서 드렸던 것은 아닌가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위안부’ 문제에 대해 모두가 잘 알고 있는 것 같지만 실제로 증언을 읽어본 사람은 많지 않을 거라 생각해요. 피해자들이 어떻게 끌려갔고, 어떤 고초를 겪었고, 어떻게 살아 돌아왔고, 이후 어떤 왜곡된 삶을 살았는지 처음부터 끝까지 아는 분이 얼마나 될까요. 한 분의 증언조차 제대로 읽어보지 않았음에도 잘 알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듣기’를 잘 못하고 있는 것 아닌가 저 자신부터 먼저 반성하게 됩니다. 소영현 폭력적인 고통이나 기억을 들으려고 하기보다는 듣지 않으려고 선택하는 사람들이 훨씬 많은 거죠. 불편하다는 이유로 회피하려는 것일 수도 있고, 고통의 말과 몸짓을 듣거나 봤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제대로 표현할 수 있는 언어가 없는 것일 수도 있고요. 그래서 피해자분들이 말씀을 하셔도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고, 말을 해도 어차피 수용되지 않을 것이란 생각에 더욱 말씀을 안 하게 되시는 것 같습니다. 김숨 우리가 듣기를 잘했다면 더 다양한 질문들을 드릴 수 있었을 텐데 아쉬워요. 그 과정을 통해 ‘위안부’ 피해자들에 대한 이해와 공감을 넘어 인간에 대한 통찰도 할 수 있었을 거라 생각해요. 할머니와의 첫 만남에서 “뭐가 가장 보고 싶고 그리우시냐”고 여쭌 적이 있어요. 그런데 여태 들어보신 적 없는 질문이었는지 당황해하셨죠. 저는 할머니가 누구를 가장 그리워하는지, 어디에 가장 가고 싶으신지, 가장 좋아하는 꽃은 무엇인지 궁금했거든요. 그 질문에 할머니께서는 사적인 이야기를 차차 들려주셨고, 이전에는 말씀하지 않으셨던 이야기로 자연스레 이어지기도 했어요. 소영현 구술 채록 과정에서 피해자에게 건넬 수 있는 적절한 질문은 무엇일까 고민하게 되네요. 기본적으로 기억은 왜곡, 변형, 취사선택될 수도 있기 때문에 증언을 역사적 사실인 것처럼 활용하는 건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더구나 피해자의 삶이 진상규명을 위한 증거로 축소되어버려서는 안 되고, 그렇기 때문에 피해자 모두가 증언자가 될 수도, 될 필요도 없지 않은가 생각하고 있기도 한데요. 작가님의 말을 듣고 보니, 증언하지 않는 방식으로 증언하거나 증언을 거부하면 거부하는 대로 그 자체로서 한 분 한 분의 기록을 남겨도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것이 증언인가에 대해서는 논의가 필요하겠지만 다양한 방식의 ‘증언’에 대한 기록이 축적되는 것도 의미가 있겠다고 생각됩니다. 증언에 대해 여러 각도에서 고민하면서도 이런 방식으로는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아요. 또 다른 형태의 편견을 갖고 있었던 듯하여 반성하게 됩니다. 김숨 ‘위안부’ 피해자분들의 이야기를 쓰게 된 뒤로 늘 반성의 연속인 것 같습니다. 소영현 구술 채록자가 어떤 사람이냐에 따라 증언의 내용 또한 달라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증언이라는 것은 구술 채록자의 질문과 피해자의 답변(목소리가 아니더라도 행위, 침묵 등 모든 것)이 모두 합쳐진 작업이기 때문인데요, 그래서 구술 채록자의 면모 또한 증언이라는 전체 논의 속에서 함께 고려되어야 하는 것 같아요. 김숨 맞아요. 구술 채록 작업을 해오신 분들의 글들도 굉장히 흥미로워요. 대단하신 분들이라고 생각해요. 그분들이 해놓으신 작업 덕분에 소설도 쓸 수 있었고요. 그분들에게 빚을 졌다고 생각합니다. 소영현 『듣기 시간』의 화자 성윤주가 구술 채록 작업을 회상하며 할머니와 친밀해지려고 노력한 것에 대해 이렇게 표현한 대목이 있습니다. “역겹다 못해 환멸스럽다.” 자신의 행위에 대해 이렇게 표현하게 된 이유가 있을까요. 이 대목을 쓰면서 작가님은 어떤 생각을 하셨는지요. 김숨 면담 후기를 읽으면서 채록자분들께서 이런 감정을 느낀 순간이 있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저도 할머니들께서 피해 경험을 말씀하시도록 하는 게 가혹한 일이라는 걸 알면서도 여쭤보게 되는 순간이 있었어요. 그럴 때 저 자신에게 어떤 환멸 같은 걸 느꼈는데, 구술 채록자들은 이와 비슷한 경험을 저보다 더 진하게 하셨을 것 같았습니다. (인내심을 가지고 구술채록을 하는) 내 앞의 살아남은 피해자가 인격적으로 성숙하고 존경스러울 수도 있지만, 한없이 비참하게만 보일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이런 비참함까지 담아내는 것이 문학의 역할 아닐까 싶습니다. 소영현 증언이 기록물로 남지 못하는 데에는 많은 이유들이 있습니다. 피해자 본인 또는 가족이 증언을 기록물로 남기는 걸 원하지 않는 경우도 있고요. 그런 점에서 『듣기 시간』에 등장하는 황 할머니의 여동생 캐릭터가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는 피해자 신고를 반대하고 구술 작업에도 거부감을 드러내는 인물이죠. 그런데 흥미롭게도 황 할머니가 자신의 삶에 대해 거의 침묵으로 일관한다면, 여동생은 언니의 피해에 대해 누구보다 많은 말을 전합니다. 넓은 의미에서 보면 여동생은 피해자이면서 가해자이기도 하고, 어떤 의미에서는 피해를 말할 수 없게 하는 ‘우리’를 대표하기도 할 텐데요. 그 인물은 어떻게 탄생하게 되었나요. 김숨 증언집을 읽을 때 인상적이었던 대목이 있었어요. 자신의 피해 사실을 가족이 알게 될까 봐 할머니가 불안해하시는 부분이었는데요, 자신이 피해자임을 인식하는 것은 당사자뿐만 아니라 가족들에게도 중요하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그런데 그 과정이 참 어렵죠. 본인이 피해자라는 것을 세상에 말하면 가족과 절연하게 될 상황에 계셨던 분들의 증언을 읽으면서 여동생 캐릭터가 자연스럽게 그려졌어요. 『듣기 시간』의 여동생이 어쩌면 저 자신일 수도 있었으니까요. 소영현 ‘위안부’ 문제를 피해자 중심으로만 다뤄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피해자 중심으로 ‘위안부’ 문제를 다루는 것의 의미와 위험성이 동시에 존재하는 것 같고요. 이제 ‘위안부’ 문제를 다른 관점에서 다룰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문학에서도 새로운 시선이 등장해야 하지 않을까요. 작가님께서는 다른 관점에서 이 문제를 다뤄보고 싶은 생각이 있으신지요. 김숨 ‘위안부’ 소설은 쓰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부여되는 면이 있지만, 동시에 엄연히 문학이기 때문에 의미뿐만 아니라 문학적 성취 또한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런 점에서 처음에 펴낸 『한 명』은 부족함이 곳곳에서 보이는 아쉬움이 많고 부끄러운 소설이에요. 마지막으로 펴낸 『듣기 시간』은 오히려 나름의 만족감을 주는 소설이고요. 다른 관점에서 이 문제를 다뤄보고 싶다는 생각보다 ‘위안부’ 소설을 다시 쓰게 된다면, 혹은 다시 퇴고를 하게 된다면, 인간에 대한 통찰로 이어지는, 어쩔 수 없이 인간인 ‘나’ 자신에 대한 통찰로 이어지는 소설을 쓰고 싶습니다. Credit 인터뷰어: 소영현 인터뷰이: 김숨 정리: 퍼플레이 강푸름 사진: 오늘의 나 기획/진행: 퍼플레이컴퍼니 일시: 2022년 7월 7일 목요일 장소: 서울특별시 동작구 서달로14가길 5 1층 흑석커피 *본 인터뷰는 신종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확산방지 예방수칙, 행동수칙에 따라 안전하게 진행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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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년 에세이 그래픽 노블 『풀』 일본어 출판을 통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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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시작 만화 『풀』(김금숙, 보리, 2017)은 일본군 성노예제 피해자 이옥선 님의 삶을 바탕으로 세계 공통의 소망인 인간의 존엄과 평화에 대해 이야기한다. 나는 히로시마현의 중학교 교사 시절 평화교육과 성교육의 관점에서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를 학생들에게 가르쳤고, 또 한 시민으로서 피해자 지원 운동과 한일시민연대 활동을 해왔다. 우경화되는 일본 사회에서는 일제강점 식민지 지배의 역사와 전쟁 피해자에 대한 배상과 명예회복을 요구하는 목소리를 내기 어렵고, 자민당 정권은 가해 사실을 왜곡·은폐하고 배상도 거부하고 있다. 일본 헌법이 보장한 삼권분립에도 불구하고 법원은 정부의 이런 태도를 추종하는 듯한 판결을 계속 내놓고 있다. 학교 교육이 수험교육 위주로 편중되면서 근현대사는 경시되고, 뜻있는 교사와 만날 기회가 없는 대부분의 학생들은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를 비롯해 과거 일본이 저지른 가해 사실을 배울 기회가 적다. 이런 상황은 전쟁이 단순히 가해와 피해의 이항 대립이 아니라 가해와 피해의 관계가 복잡하게 뒤섞이는 구조적인 문제라는 것을 알아채기 어렵게 한다. 나는 독서를 기피하는 일본 젊은이들에게 만화라는 매체를 이용해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를 알리고 평화를 희구하는 태도를 배양하기 위해 『풀』의 일본어 출판에 나섰다. 2. 그래픽 노블 『풀』과의 만남 퇴직 후 2013년 한국으로 어학유학을 온 나는 일본군 성노예제 피해자들이나 시민들과 교류를 거듭하면서 2014년에 김금숙 작가를 만났다. 취약계층에 빛을 비추는 작품을 그려온 김 작가에게 친근감을 느끼고 교류를 하며 함께 베트남 장애인에게 휠체어를 운반하는 봉사활동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리고 2017년 8월 14일 김금숙 작가가 일본군 성노예제 피해자 이옥선 할머니의 삶을 그린 그래픽 노블 『풀』이 한국에서 발간됐다.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로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를 중단하려는 일본 정부와 이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려는 일본 사회를 생각할 때 『풀』은 빛나 보였다.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는 어렵거나 자신과 상관없는 과거의 문제라는 사람들에게 이 작품은 한 여성의 삶을 통해 문제의 본질을 구체적으로 알려주는 훌륭한 소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나를 움직인 힘은 주인공 이옥선 할머니를 비롯해 작품과 관련된 사람들이 운동적으로 나와 연결돼 있었다는 점이다. 게다가 『풀』이 프랑스어로 출판되고 영어판도 준비된다는 얘기를 들으며,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를 책임져야 할 일본에서 가장 먼저 읽혀야 할 책이 일본 이외의 국가들에서 먼저 출간되는 것에 조바심을 느꼈다. 서울 만화박물관에서 열린 『풀』 원화전에서 만난 한 여중생의 어머니는 “성폭력에 대해서는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쉽게 가르치기 어렵지만 이런 식으로 접할 수 있다는 것은 매우 좋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했다. 나라는 다르더라도 누구나 안심하고 평화롭게 살 수 있는 사회를 원한다. 일본에 이런 생각을 공유하기 위해서라도 이것은 어떻게든 일본어로 출판되어야 할 책이라고 확신했다. 독서를 기피하는 일본 젊은이들에게 만화라는 매체는 효과적이라고 생각했다. 합천원폭피해자복지회관에서 만난 한국인 학생 자원봉사자는 만화 『맨발의 겐』(작가 나카자와 게이지가 자신의 피폭 체험을 바탕으로 한 자전적 만화)을 읽고 활동을 시작했다고 한다. 나에게는 만화로 인류 보편의 주제를 국경을 넘어 전할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다. 3. 일본어 출판 경과 일본에서 번역된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를 다룬 한국 그림책으로는 『꽃할머니』(『花に水をやってくれないかい?』, 권윤덕, 쿠와하라 유카 번역, ころから, 2018)와 『끝나지 않은 겨울』(『終わらない冬』, 강제숙(글), 이담(그림), 양유하/쓰즈키 스미에 번역, 日本機関紙出版センター(일본 번역서 제목), 2015) 등이 있다. 이 작품들이 일본에서 출판되기까지 여러 우여곡절이 있었다. 일본 우익세력의 공격과 그 영향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출판 업체, 도서관의 태도가 장벽이었다. 그럼에도 기획자들의 열의와 시민들의 협조가 큰 힘이 되어 출판을 실현할 수 있었다. 이 선례를 참고로 『풀』의 일본어 출판은 많은 시민과 협력하는 것을 중요시해 진행하기로 했다. 우선 『풀』 일본어 출판위원회를 구성했다. 공동대표는 ‘여성들의 전쟁과 평화자료관(wam)’ 명예관장인 이케다 에리코 씨와 ‘일본군 위안부 문제해결 히로시마 네트워크’ 사무국장 오카하라 미치코 씨, 그리고 나, 셋이 됐다. wam은 두 차례나 우익의 폭파 협박을 받은 적이 있고, 이케다 씨는 조금 망설이기도 했지만 『풀』 일본어 출판의 의의를 중요시하며 함께 일어섰다. 우리는 학습회와 강연회, 그동안 쌓아온 네트워크를 통해 홍보활동을 진행했다. 강연회장에서 일본어 출판을 열심히 해달라고 즉석에서 후원해 주는 지원자도 있었다. 『풀』 일본어 출판 자금 모금과 그 의미를 널리 알리기 위해 우리는 “세계에서 읽히고 있는 ‘위안부’ 만화 풀을 번역 간행하고 싶다!”라는 제목으로 크라우드 펀딩(이하 CF)을 시작했다. 2019년 9월 7일 출범한 CF는 호조를 보였고, 『풀』이 뉴욕타임스 등 해외 언론에 소개되기도 했으며 프랑스 일간지 휴머니티가 선정하는 ‘휴머니티 만화상’에서 심사위원 특별상을 수상한 것도 훈풍이 됐다. 우리의 상상을 훌쩍 뛰어넘은 펀딩 금액과 뜨거운 지원의 목소리 덕분에 책 판매가격을 예정보다 낮출 수 있었고, 김금숙 작가를 일본으로 초청해 4곳에서 작가와의 만남을 개최할 수 있었다. 접수된 응원 메시지 중에는 “뭔가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는데 구체적으로 움직이지 못해 몸부림치고 있었다. 멋진 발상을 알고 응원하고 싶다”, “표현의 자유를 방해하는 움직임에 의구심을 느낀다(CF 시작 전 평화의 소녀상 등 전시를 우익이 방해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국제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풀』을 빨리 읽고 싶다” 등의 뜨거운 생각이 담겨 있었다. 당초 일본 우익의 방해를 우려했던 김금숙 작가는 일본에서의 활동을 높이 평가하며 코로나 유행이 우려되는 시기였지만 과감히 일본을 찾아줬다. 4. 일본어 번역 작업의 과정 『풀』의 일본어 번역에는 몇 가지 넘어야 할 문제가 있었다. 우선 번역 수준의 문제다. 이것은 우리가 시작한 샘플 번역이 한국출판문화사업진흥원의 해외번역 조성사업으로 선정되고 강력한 협력자를 얻으면서 불식되었다. 공동번역자 리령경은 ‘정신대할머니와함께하는시민모임’ 회원으로 대구 경북지역 피해자들을 지원하면서 그 만남과 인연으로 평화학에 매진하는 데에 방향을 잡았다. 『풀』의 주인공 이옥선 할머니의 통역을 맡기도 한 그는 일본어 출판 운동에 관여하고 싶다고 주체적으로 의사를 밝혔다. 그는 사투리 번역뿐 아니라 사실 검증 작업에도 힘을 발휘했다. 그가 오랜 세월 피해자들의 지원 활동을 해온 것과 대구 출신이라는 점에서 이옥선 님의 부산 사투리를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 김금숙 작가를 크게 안심시켰다. 말풍선 안에 들어가는 글자 수로 원작의 의미를 정확히 표현해야 하는 만화의 독특한 번역 작업은 주인공인 이옥선 님과 작가의 심정을 제대로 대변할 수 있을지 늘 묻는 작업이기도 했다. 한 가지 예를 소개한다. 작중에 작자가 이옥선 님을 찾는 장면이 있다. 나눔의 집 마당에 있는 피해자들을 모티브로 한 여성 반라상 그림에는 작가의 심정이 담겨 있다. 이옥선 할머니의 끔찍한 체험을 어떻게 들려줄까 라는 작가의 갈등이 그 장면에 투영돼 있다. 직역에 가까운 번역에 출판사로부터 ‘더 시적인 표현’을 요구받았다. 피해 체험 증언은 당사자에게 피해 사실을 재현시켜 강한 트라우마에 시달리게 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일본군 성노예제 피해자로부터 “증언을 한 날에는 당시 일이 떠올라 밤에 잠을 잘 수 없게 된다”고 들은 적이 있다. 증언을 듣는 사람은 피해자의 입에서 나오는 생생한 사실을 역사의 진실로 받아들이고 자신이 설 위치를 생각하는 지표로 삼을 수 있다. 그러나 증언을 한다는 것은 증언자로 하여금 피해 기억이 재연되게 하고, 고통을 동반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증언자가 대가를 치르면서까지 증언하는 만큼 우리는 겸손해야 한다. 고민 끝에 이 부분의 번역은 다음과 같이 되었다. ‘벌써 도착했어! 입구에 있는 늙은 여자의 나신상이 묻는다. “당신도 자기 작품 때문에 우리에게 그 악몽을 말하게 하느냐고” 라고’. 주인공 이옥선 할머니는 ‘가시나’로 불리며 수양녀가 되어 기생이 있는 기루에서 일했다. 번역 작업을 하면서 그의 삶에 유교·도덕적 가부장제로 인한 여성의 인권 침해와 일제강점 식민지 지배로 인한 빈곤-계급 문제가 크게 관련됨을 새삼 절감했다. 번역 작업을 하며 『풀』의 작품성을 살리면서도 일본의 우익 대책에도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숫자 하나까지 트집을 잡아 작품 전체를,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 자체를 부정하려는 우익에게 공격의 틈을 주지 않도록 해야 했다. 일본 상황을 잘 아는 김금숙 작가는 일본 독자들이 받아들이기 쉽도록 내용을 변경해도 괜찮다고 승낙해 줬다. 작중 등장인물의 나이는 일본식으로 만 연령으로 환산하고 역사학자 요시미 요시아키 주오대 교수와 가사하라 도쿠지 쓰루 문과대 명예교수에게 지도와 조언을 받으면서 외국에서는 문제가 되지 않았던 난징대학살 장면 등에 일본어판의 독자적인 번역을 넣었다. 이 역시 원작 그림에 맞게 해야 하는 지난한 과정이었다. 5. 작가와 만나는 모임 도쿄·오사카·히로시마·후쿠야마의 네 개 장소에서 개최한 ‘작가와 만나는 모임’에는 합계 282명의 시민이 참가했다.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 활동가, 재일 코리안(한국인과 조선인) 인권 문제 활동가, 조선학교 학생, 장애인 문제와 환경 문제 활동가, 단체, 교사들이 열심히 김금숙 작가와 교류했다. 한 교사는 “일년에 한번 ‘위안부’ 문제 수업을 한다. 식민지 시대에 조선인이 조선말을 쓰면 교사가 폭력을 행사하는 것도 일상적이었다. 현재의 일본 정부도 (본질적으로는) 마찬가지다. 우리 일본인이 이웃에게 어떻게 해왔는지를 따지는 의미에서도 『풀』은 아주 좋은 책이라고 생각한다”며 평화와 성교육 부교재로 『풀』을 활용하겠다고 했다. 또 한 시민은 “한국에서는 젠더 문제와 함께 계급문제라는 시각이 시민들 사이에 공유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자신들과 국가 사이에 거리를 두고 여러 문제를 비판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 같다. 총중류(總中流: 일본 국민 대다수가 자신을 중산층으로 의식하는 현상)로 불려온 일본에서는 중산층이 무너지자 사람들은 거기서 흘러내리지 않으려고 급급하고, 이를 위해 스스로를 국가와 일체화하려는 것 아닌가. 국가가 일으킨 죄로 학대받은 사람으로서 한국과 일본 민중이 공감하고 권력에 맞서기 위해 어떤 시각이 필요한지 생각하게 됐다”고 말했다. 이처럼 『풀』은 인권과 평화라는 인류 보편의 가치가 국경을 넘어 사람들을 연결시킨다는 것을 알려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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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년 인터뷰 [캐롤 글럭-김은실 대담] 민족주의를 넘어서: 현재 진행형 일본군‘위안부’ 역사와 젠더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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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기림의 날 특별 대담 (이 대담은 영문웹진 KYEOL에 게재된 “Beyond Nationalism: The Ongoing History of the “Comfort Women” and Gender Politics“를 국문으로 옮긴 것입니다.)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는 8월 14일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기림의 날을 맞아 역사학자 캐롤 글럭 교수와 페미니스트 인류학자 김은실 교수의 특별 대담을 마련했다. 이번 대담에서는 시민사회, 국가, 국제사회를 포함해 다양한 차원에서 전개되어온 ‘위안부’ 운동을 통해 형성된 초국적 연대의 의미를 조명해본다. 캐롤 글럭 컬럼비아대학교 역사학과 교수는 일본 근대사, 20세기 국제사, 제2차 세계대전, 역사 서술, 아시아 및 글로벌 공공기억 등을 연구해왔다. 최근 연구로는 “세계가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빚진 것(What the World Owes the Comfort Women)”(2021)과 “정치적 현재로서의 국민적 과거: 동아시아의 전쟁 기억”(2022) 등이 있다. 김은실 교수는 1995년부터 이화여자대학교 여성학과 교수로 재직했다. 여성의 신체, 섹슈얼리티, 생명권력(biopower), 한국의 국민국가 형성, 민족주의, 젠더 정치, 글로벌화에 대해 연구해왔다. 현재 식민지 시대와 냉전 시대에 발생한 여성에 대한 젠더 기반 성폭력을 연구하고 있다. [2022년 기림의날 특집] 현재진행형 ‘위안부’ 역사와 공존을 향한 연대 1. 한일양국의 시민들과 함께 ‘위안부’문제에 관한 공동연구를! 2. 다큐멘터리 〈애프터 미투〉를 통해 본 증언을 기록하는 일 3. ‘지역’에서의 일본군‘위안부’ 운동: 경상도 지역 역사관과 ‘지역성’에 대하여 4. [캐롤 글럭-김은실 대담] 민족주의를 넘어서: 현재 진행형 일본군‘위안부’ 역사와 젠더 정치 5. [라다 이베코비치-백영경 대담] 젠더화된 폭력과 전쟁으로 얼룩진 우리 시대의 여성 연대 ‘위안부’문제와의 만남 역사학자, 페미니스트 학자로서 ‘위안부’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무엇인지요? 김은실 1993년 미국에서 귀국했을 때 ‘한국 여성학의 전망과 과제’라는 주제로 열린 한국여성학회 창립 10주년 기념 컨퍼런스에 연사로 초청받았습니다. 컨퍼런스에서 한국 여성학이 무엇이고 어떻게 정의되고 있는지에 대한 논문을 발표했습니다. 그리고 한국 여성학을 정의하는 데 있어 민족주의 담론이 작용하고 있다고 주장했죠. 구체적인 사례로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의 첫 증언집[1]을 고찰함으로써 민족주의 담론이 ‘위안부’들의 증언을 재구성하는 데 깊게 관여하고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러한 발언은 상당히 파격적이었고 엄청난 반발을 불러 왔습니다. 이 사건으로 나에게는 민족주의를 비판하는 페미니스트라는 꼬리표가 붙게 되었어요. 그 이후로는 학계에서 페미니즘의 시각을 바탕으로 민족주의를 공격하는 한국 페미니스트 학자로 알려지게 되었고요. 페미니즘과 민족주의의 대립에 관한 담론이 일어날 때 나는 페미니즘을 옹호하는 사람으로 종종 언급되고 있지요. 당시 사람들은 내게 “이해가 되지 않는다. 여성을 옹호하기 위해 어떻게 민족주의를 비판할 수 있는가? 국가가 없다면 여성을 어떻게 구할 수 있는가? ‘위안부’도 여성이지 않은가. 동시에 그들은 한국 사람이기도 하다. 여성을 어떻게 국가로부터 분리할 수 있는가? 여성은 한국이라는 국가의 한 부분이다.”라고 말했어요. 나는 이에 대해 “여성이 곧 국가이다. 여성은 한국 국민이다. 국가를 대표로 간주하고, 여성을 국가의 종속된 부분으로 간주해 여성의 이익이 국가의 이익에 종속되는 경우 ‘위안부’문제의 해결은 어렵다. 국가는 여성의 이익을 대변해야 한다. 여성이 국가의 이익을 위해 침묵해야 한다는 식으로 국가를 우선시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라고 답했어요. 그때가 처음으로 ‘위안부’문제를 공부하기 시작한 때였습니다. 1993년의 일이었죠. 1994년 발간한 내 논문 ‘민족 담론과 여성: 문화, 권력, 주체에 관한 비판적 읽기를 위하여’[2]는 젊은 여성 대학원생들과 연구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고 있다는 평을 들었습니다. 다수의 젊은 여성들이나 페미니스트들이 이 논문을 읽고 ‘위안부’를 페미니즘의 틀로 접근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는 말을 듣곤 했습니다. 캐롤 글럭 나는 ‘위안부’ 문제를 일본의, 그리고 일본과 아시아 국가들 사이의 전쟁 기억, 기억의 정치라는 좀 더 큰 맥락에서 접하게 되었습니다. 처음부터 내 관심사는 기억이 역사와 관련되는 방식이었어요. 내가 역사라고 알고 있던 것과 공공 기억 속에 자리잡은 것 사이에 괴리가 있었고, 이 때문에 기억이 만들어지고, 유지되고, 변화하는 과정을 연구하게 되었습니다. ‘올바른 역사’를 ‘올바른 기억’과 연결시키려는 목표를 추구하면서, 나는 세계대전이라는 전지구적 충돌에 대해 우리가 이야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제2차 세계대전에 대한 거의 모든 기억은 국경과 국가라는 틀 안에서 말해지고, 쓰여지고, 집중되어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역사적인 측면에서 봤을 때 이 점은 이해가 되지 않았지요. 그래서 나는 ‘세계를 제2차 세계대전 안에 담아두는 것’을 슬로건으로 삼았습니다. 이에 다양한 지역에서 공공 기억이 형성, 유지, 변화하는 과정을 연구했지요. 내 첫 번째 목표는 현재 사회에서 기억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이해하는 것이었어요. 개인의 기억과 집단기억은 모두 특정한 때에 형성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유지되기도 하고 변화하기도 해요. 기억이 어떻게 변했는지를 연구하면서 두 번째 목표를 규정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나는 ‘공공 기억을 바꾸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예를 들어, 강고하게 민족주의적인 내러티브들에 맞서 ‘세계’를 어떻게 제2차 세계대전 안에 담아낼 수 있는가?’, ‘역사와 기억을, 과거와 현재 및 미래를 더 바람직하게 연결지으려는 희망을 가지고 어떻게 기억형성 과정에 개입할 것인가?’라는, 점점 더 시급해지는 질문에 대한 답을 내놓고자 했어요. 이런 상황이 내가 1991년 ‘위안부’문제를 접했을 때의 맥락이었고이후에도 이러한 관점을 견지하고 있습니다. 홀로코스트와 마찬가지로 ‘위안부’는 오랜 과정을 통해 공공 기억 속에 자리 잡았습니다. 유대인 대학살은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종식된 후 유럽인들의 기억 속에서 전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아니었어요. 대부분 지역에서 이러한 상황이 바뀌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 이후였습니다. ‘위안부’는 1990년대가 되어서야 비로소 공공 기억에 눈에 띄게 자리 잡게 되었죠. 사실 감춰진 것은 없었어요. 사람들은 유대인이나 ‘위안부’를 알고 있었어요. 이들은 이미 소설이나, 연극, 시각예술에 등장하고 있었거든요. ‘위안부’의 경우 일본 의회에서 논의까지 되었어요. 문제는 알고 있느냐가 아니라, 공공 기억 속에 이들의 존재가 부재하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21세기에 접어들면서 ‘위안부’는 대학살하면 홀로코스트를 떠올리는 것처럼 여성에 대한 성폭력을 대변하는 개념으로 전 세계에 알려지게 되었죠. 나는 처음에 ‘위안부’ 문제를 국가와 집단을 넘어서, 그리고 국가와 집단 안에서 기억이 어떻게 변하는지의 사례로 바라보았습니다. 이 주제에 접근해온 방식이 서로 다를지언정 김은실 교수님과 나는 젠더와 국가의 관계에 대한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있음을 알 수 있지요. 김은실 페미니스트 인류학자로서 나는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의 신체에 가해진 성폭력과 고통이 어떻게 표현되고 재현되는지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어떤 내용이,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 말해지고어떤 권력이 ‘위안부’ 내러티브를 통제하는가에 관심이 있었죠. 또 이들의 경험이 증언집이나 다큐멘터리를 통해 어떻게 대변되는지에도 관심이 있었어요. 1990년대, 2000년대, 그리고 현재 ‘위안부’ 생존자들의 증언 내용과, 청자/청중이 이들의 이야기를 이해하고 해석하는 방식은 변해왔습니다. ‘위안부’가 처한 상황이 시간이 지나면서 변화했다는 사실은 우리 모두 알고 있다고 생각해요. 세계를 여행하는 소녀상: 맥락과 위치성 일본군‘위안부’문제가 국가적 차원을 넘어설 수 있을까요? 세계 곳곳에 설치된 평화의 소녀상은 일본군‘위안부’문제가 초국적인 문제임을 보여주는데요. 이런 점에서 평화의 소녀상이 세계 여러 지역에 건립된 것을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김은실 평화의 소녀상은 한국의 ‘위안부’들이 겪었던 강압적 성폭력과 고난을 상징합니다. 소녀상은 두 가지 측면을 대변하고 있어요. 하나는 전쟁 시 여성이 겪어야 했던 성폭력과 강간이 보편적이고 일반적이었다는 측면을 상징합니다. 다른 하나는 식민지 지배 하에 있던 한국의 순진무구한 소녀들이 일본군 위안소로 끌려가 ‘위안부’가 되었다는 한국의 특수한 맥락을 살펴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국에서 소녀상이 만들어졌을 때 순진한 소녀들이 취직을 시켜준다는 거짓말에 속아 사기를 당하고 강제 연행되어 위안소로 끌려갔다는 이야기에 중점을 두면서 한국 ‘위안부’ 피해자들이 겪었던 강제 연행과 피해를 대변하는 데 강하게 초점이 맞춰졌습니다. 이것은 강력한 이미지이자 메시지였습니다. 하지만 소녀상은 일본군 위안소로 강제로 끌려간 다양한 여성들의 경험과 이야기를 침묵시켜버리는 상징이라는 비판이 일었어요. 소녀상의 이미지가 특정 여성들만이 ‘위안부’ 피해자에 해당한다고 각인시킬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나도 처음에는 소녀상에 대해 비판적이었습니다. ‘위안부’ 피해자를 특정한 방식으로 재현하고 국한시킬 수도 있기 때문이었죠.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소녀상이 일본군‘위안부’들이 겪은 다양한 경험을 모두 대변할 필요는 없고 전쟁에 동원되어 성폭력을 겪었던 여성들을 대변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소녀상이 전시 여성폭력과 그들의 고통을 재현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재현이 처음에 특정한 의도를 가지고 이루어졌다고 해서 항상 모두에게 동일한 의미를 갖는 것은 아니잖아요. 그 의미는 소녀상이 대변하는 표상이 어느 시대, 어느 장소에서 누구와 조우하는가에 따라 달라질 거예요. 세계 곳곳에 소녀상이 설치되면서 많은 논란이 불거질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에서 다른 나라로 소녀상을 보내는 것은 일본 정부가 일제강점기의 ‘위안부’ 문제를 인정하지 않고 사죄하지 않는 것을 비판하려는 측면이 강합니다. 여기서 한국의 민족주의가 강하게 시사돼요. 평화의 소녀상이 설치된 글렌데일, 샌프란시스코, 베를린의 경우 현지 사람들에게 소녀상이 전달하는 의미는 한국인들에게 전달되는 의미와 같지 않습니다. 소녀상이 주는 메시지는 그 지역의 사람들, 역사와 만날 때 만들어지는 것이죠. 캐롤 글럭 하나의 동상에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는 것 같습니다. 먼저 소녀상이 무엇을 상징하고 있는지에 대한 질문인데, ‘위안부’를 순진한 소녀에 국한시키는 것은 확실히 환원적인 관점입니다. 한편, 베를린의 경우 소녀상이 일반적인 성폭력을 대변하기 때문에 소녀상 본래의 의미를 잃고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 같아요. 아마도 소녀상의 의미가 축소되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시간과 장소를 불문하고 소녀상이 지속적인 의미를 전달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는 것 같습니다. 소녀상이 상징하는 순수성에 대한 비판은 가부장제와 순결을 강조하는 한국적 맥락에서는 이해될 수 있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비슷한 동상이 베를린 미테(Mitte)에 설치되면 그 맥락은 달라집니다. 방문객은 한국에서 그 동상이 갖는 의미를 모를뿐더러 같은 관점으로 그 동상을 바라보지도 않을 거예요. 상징성 자체가 캘리포니아나 베를린에서 같을 수가 없어요. 이 점은 의미가 환원되고 쉽게 변하는 경향이 있는 기념물이나 기념비 일반에 적용됩니다. 하지만 동상이 여러 곳에 설치되는 경우 환원되거나 의미를 띠는 방식은 다를 수 있어요. 베를린 미테의 경우 소녀상은 한국의 순진한 소녀라기보다는 전 세계 어디에서나 일어날 수 있는 여성 성노예, 전시 강간, 성폭력의 상징으로 인식돼요. 미테의 소녀상은 최근 들어 아시아계 이민자들 사이에서 자신들의 커뮤니티를 강화하기 위한 모임의 장소가 되었고, 이는 평화의 소녀상에 또 다른 의미를 부여해 주고 있습니다. 김은실 평화의 소녀상이 상징성을 띠는 것은 확실합니다. 소녀상은 하나의 상징으로서 전시 성폭력의 피해를 대변해요. 인종적으로 소녀상은은 백인 주도 사회에서의 아시아 여성을 나타냅니다. 이런 점에서 서구사회의 경우 소녀상이 설치된 장소는 디아스포라, 이민자, 소수인종이 모이는 만남의 장소로서 비서구권과 아시아에서 온 사람들, ‘위안부’의 역사를 꼭 알지는 못하지만 현재 어려운 삶을 이어나가는 사람들을 대변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글럭 교수님께서 기억과 공공 기억이 변하는 과정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세월이 흐르면서 공공 기억이 변하는 과정을 직접 보면서 해외에 동상을 건립하는 것을 꼭 부정적으로 볼 필요는 없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다이나믹스가 초국적 차원에서 흥미롭게 생각되었습니다. 동시에 소녀상의 역사도 이러한 맥락에서 재위치되고, 수정되며, 변형되고 있지요. 캐롤 글럭 ‘위안부’ 문제를 논할 때 다민족 정치에 방점이 찍히는 미국과는 달리, 독일의 경우 소녀상은 이민자들과 더 연계되는 것 같습니다. 또는 캘리포니아 글렌데일 평화의 소녀상 설치를 지지했던 아르메니아계 미국인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잊혀졌던 과거의 공포와 관련되어 있을 수도 있어요. 각각의 사례마다 맥락은 다르고 그것은 중요하죠. 일본 정부가 한 몫을 한 것도 인정해주어야 합니다. 일본 정부가 세계 곳곳에 소녀상이 건립될 때마다 매번 요란스럽게 항의하지 않았다면 ‘위안부’는 지금보다 덜 알려졌을 것이고 조직적인 성 노예제가 갖는 상징적 의미가 전 세계인들에게 효과적으로 전달되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죠. 그런 점에서 일본 정부는 ‘위안부’ 운동에 도움을 주었어요. 일본 정부가 어느 한 지역에 설치될 소녀상에 반대할 때마다 또 다른 소녀상이 다른 곳에 세워지고 있기 때문이죠. 이것은 완벽한 기념비 ‘건립’ 정치예요. 소녀상이 설치되는 위치 또한 중요합니다. 베를린의 도심이든 글렌데일의 교외든 애틀랜타 외곽의 공원이든 그 지역성을 반영하기 때문이에요. 이렇게 다양한 기념물에 결부된 의미 또한 시간이 지나면서 변합니다. 한 세대에게 의미 있었던 기념비나 동상이 50년이 지난 후에는 후손들이 빨래를 널어놓는 물건이 될 수도 있습니다. 평화의 소녀상이 시간과 장소를 넘어 ‘위안부’에 대한 기억을 전달하는 주요 매개체가 아니라 일부분일 뿐이라는 사실은 어쩌면 좋은 일인지도 몰라요. 베를린에 설치된 소녀상과 관련한 비판도 있습니다. 독일 사회가 제2차 세계대전 말에 발생한 전시 성폭력, 특히 소련군이 자행한 독일 시민 강간 사실에 대해 오랜 시간 침묵해왔다는 비판이 그것이죠. 김은실 어느 전쟁에서나 여성을 대상으로 한 성폭력은 다양한 형태로 존재합니다. 하지만 전쟁 관련 역사와 연구에서조차도 지금까지 성폭력은 다뤄지지 않았어요. ‘위안부’문제는 독일 페미니스트 학자들이 제2차 세계대전 말에 일어난 성폭력 문제를 제기하고 조사하게 만든 중요한 촉매제였습니다. 베를린 소녀상을 둘러싼 논쟁과 논란이 있었지만, 논란 당시 독일의 전시 성폭력 문제는 함께 논의되지 않았어요. 평화의 소녀상은 일본과 한국 사이의 문제, 특히 약자로서 식민지 한국의 여성이 처했던 문제였죠. 일반화할 수는 없겠지만 아시아 여성의 문제가 서구권이나 일본에서 다뤄지는 경우 여성의 문제가 ‘비서구권’ 또는 ‘아시아’의 문제가 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여기에 문제가 좀 있다고 느껴지는데, 특히 젠더를 자신들의 문제가 아닌 것처럼 외주화(아웃소싱)하는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독일의 성폭력 문제는 한국의 ‘위안부’ 문제를 다룰 때 함께 다뤄지지 않는 것 같습니다. 때로는 독일인들이 자국보다 덜 ‘발전한’ 나라들의 문제를 자신들의 문제와 함께 논의하는 것이 쉽지 않아 보입니다. 아시아나 아프리카의 젠더 관련 문제들을 독일인들 자신의 문제와 동일하게 보지 않는 게 아닐까 반문하게 됩니다. 캐롤 글럭 동의합니다. 국제적인 또는 초국가적인 관점에서 봤을 때 사실이에요. 예를 들어 미국의 인종주의를 비판하는 것이 자기 사회의 인종차별을 대면하는 것보다 편합니다. 이렇게 국가중심적인 근시안은 새로운 것이 아니에요. 이런 시각은 다른 나라에 대한 지식이나 이해의 부족에서 기인합니다. 또한 고정관념에도 영향을 받죠. 그런 점에서 “유리로 된 집에 사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에게 돌을 던져서는 안 된다(*편집자 주: 비난받을 여지가 많은 사람은 남을 비난해서는 안된다는 의미)”는 오래된 격언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군요. 독일 학자들과 기억 운동가들이 독일이 겪은 붉은 군대(Red Army)에 의한 전시 강간을 외주화하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소련군이 자행한 강간 사건의 대부분이 발생했던 구 동독에서 이 문제가 정치적으로 금기시된 것은 사실이에요. 이탈리아 남부, 프랑스 및 다른 국가의 여성들처럼 많은 독일 여성들이 오랜 세월 이에 대해 침묵해왔다는 것 또한 사실이고요. 하지만 이 주제는 이제 독일의 공공 기억의 일부분이 됨과 동시에, 학계의 연구(다른 연합군들에 의해 자행된 성폭력을 다룬 미리암 게브하르트 저 <무언의 범죄(Crimes Unspoken)> 참조) 뿐만 아니라 뒤늦게나마 피해자들을 인정하고자 하는 측면에서도 지속적인 노력이 이뤄지고 있어요. 한국의 일부 운동가들은 ‘위안부’에만 지나치게 초점을 맞춘 나머지 보편적이라고 할 수 있는 전시 성폭력 경험을 ‘내주화(인소싱)’하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각각의 맥락은 달랐어요. 1945년의 베를린은 1944년의 이탈리아 남부나 1970년대 아르헨티나의 ‘더러운 전쟁’(Dirty War), 1990년대 보스니아나 르완다와는 다릅니다. 하지만 전시 성폭력이 어디에서 발생하든지 간에 그것은 참담하게도 똑같아요. 일본의 ‘위안부 제도’만큼 광범위하고 잔혹하지는 않았더라도 군 매춘소 또한 드물지 않았습니다. 물론 일본이 점령한 여러 아시아 국가 출신의 ‘위안부’는 수십만 명이었죠. 이는 단순히 한국만의 문제나 기억이 아니에요. 김은실 ‘외주화’가 여기서는 적절한 단어가 아닐 수도 있겠네요. 하지만 젠더 문제가 항상 어떻게 전치되는지에 대해 조금은 비판적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외주화’라는 말을 썼어요. 글럭 교수님께서 한국의 일부 활동가들이 보편적이라고 할 수 있는 전시 성폭력 경험을 ‘위안부’에 초점을 맞춰 ‘내주화’하고 있다고 말씀하셨는데, 흥미롭고 통찰력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한국 학자들이 전 세계 다른 사례들을 깊이 있게 탐구하지 못하고, 전지구적으로 발생하는 전시 또는 분쟁 시 성폭력 문제 해결에 연대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은 지적되어야 합니다. 분쟁 중 발생한 성폭력 문제를 제기했던 많은 사회가 한국의 일본군‘위안부’ 운동에 영향을 받았지만, 한국의 ‘위안부’ 운동은 전 세계의 다른 사례들과 접점을 만들고 연구한 경험이 많지 않습니다. 캐롤 글럭 서로 다른 맥락에 놓여 있는 상황에서 다른 고민을 가진 사람들이 함께 모여 동일한 것에 대해 말할 때, 마법과도 같은 일이 일어나죠. ‘위안부’라는 말이 어떻게 ‘성노예’가 되었는지를 그 예로 들 수 있어요. ‘성노예’는 1990년대 국제변호사들과 페미니스트들이 보고서에서 강조의 뜻으로 썼던 용어입니다. 지금은 물론 그 단어가 폭넓게 사용되고 있고 일본 정부가 극렬히 반대하는 바람에 오히려 이 단어의 사용이 더욱 확고해지기도 했어요. 미래의 ‘위안부’ 기억과 행위자로서의 여성 캐롤 글럭 나는 이 글을 읽으실 많은 분처럼 활동가는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는 ‘위안부’ 제도가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 되고 다시는 반복되어서도 안 되는 성노예 제도였다는 것에 공감하고 있어요. 내 요점은 이러합니다. 나는 ‘위안부’에 대한 기억이 세계에 영향을 주었으면 좋겠어요. ‘위안부’에 대한 기억이 현재와 미래의 여성들에게 변화를 가져다주기를 바랍니다. ‘위안부’ 여성들이 겪었던 일을 기억함으로써 그러한 종류의 제도와 성착취 및 성폭력이 덜 빈번하게 일어나고, 그것들을 더욱 범죄적인 일로 만드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나는 공공 기억을 도구적으로 이용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기억이 일을 해주었으면 해요. 피해자들을 위해 무언가를 해주고, 피해자들이 세상을 떠난 뒤에는 더 많은 일을 해주고, 미래 여성들을 위해서도 무언가를 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다른 점에서는 의견이 다를 수도 있는 사람들과 국경을 넘어 서로 연결되고, 협업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피해자들이 목소리를 내어 자신의 사연을 들려주고, 공공 기억에 그것이 담겨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고 용기 있는 행동입니다. 하지만 증언 자체로는 절대 충분하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피해자들의 경험을 공공 기억으로 가져오고 효과를 발휘하도록 만드는 다른 행위자들이 필요합니다. 1991년부터 지금까지 ‘위안부’ 문제에서 바로 그런 양상이 보였습니다. 행위자로서의 여성에 대해 마지막으로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여성은 근대 세계의 거의 모든 사회에서 억눌려왔고 억압받아왔어요. 안타깝지만 그것이 사실이에요. 하지만 여성은 또한 행위자이고 항상 행동하고 있습니다. 페미니즘은 이들이 취하는 행동 중 하나이자, 변화를 가져오는 데 도움이 된 것들 중 하나이죠. 하지만 (남성을 포함한) 다수의 다른 행위자들의 목소리와 시각도 도움이 되었어요. ‘위안부’ 문제가 이러한 예입니다. 기꺼이 목소리를 내고자 하는 피해 당사자들뿐만 아니라 이들을 위해 일하는 기억 활동가들과 지원자들을 통해서도 잘 드러나지요. 김은실 글럭 교수님께 멋진 생각을 배웠습니다. 그런데 그 ‘행위자들’에 대해 여쭤보고 싶은 것이 있어요. 본인이 피해 당사자는 아니지만 피해자를 위해 일하고 있는 활동가들이 많습니다. 현재 그 행위자들을 둘러싼 다양한 목소리와 갈등이 있는데요. 이러한 경우, 우리는 모두 ‘피해자의 목소리’에 대해 말합니다. ‘위안부’문제를 둘러싸고 행위자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경합과 긴장감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캐롤 글럭 이용수 님의 사례가 여러 가지 면에서 흥미롭다고 생각해요. 그가 최근에 개입한 배경에는 맥락이 있습니다. 부분적으로는 한국의 대표적인 지원 단체와 관련된 사태(‘정의연 사태’)가 있고, 부분적으로는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를 포함한 여러 변화로부터 기인한 것이죠. 비록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이전의 ‘위안부’ 피해자들이 수년에 걸쳐 행동한 것을 보면, 이용수 님 혼자만 거침없는 것은 확실히 아닙니다. 그가 최근에 취한 행동은 그 자신의 완강함, 지원 단체 관련 사태, 변화하는 시대와 맞물려 촉발된 것이에요. 활동가들끼리 서로 싸우는 양상에 대해서는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싸움을 통해 ‘위안부’ 문제가 더 역동성을 갖게 된다면 더 낫다는 입장입니다. 캐롤린 딘(Carolyn Dean)은 홀로코스트 기억에 관한 글을 쓰면서 그가 ‘지구적 피해자’라고 부르는 사람들을 대신해 발화하는 사람들을 ‘도덕적 증인(moral witnesses)’이라고 정의했고, 때로는 사람들이 활동가들의 목소리만 듣는다고 했어요(『The Moral Witness』, Cornell University Press, 2019). 캐롤린 딘은 활동가들이 증인을 대신해 증인으로서 행동하기 시작할 때 문제가 발생한다고 말해요. 그렇다면 모든 활동가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게 되겠죠.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왜 하고 있는가, 누구를 위해 하고 있는가, 우리가 하는 일에서 얻고자 하는 개인적인 이득은 무엇이며 개인적으로 그 일과 어떤 관련이 있는가’하는 질문들 말이에요. 운동, 즉, 액티비즘이 항상 열린 마음으로 좋은 의도를 갖고 특정한 입장 없이 취하는 행동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에요. 우리는 모두 맥락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용수 님은 아직 살아계시고 목소리를 내고자 하는 결연한 의지를 갖고 계세요. 하지만 10년 뒤면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이 세상을 떠나시겠죠. 그런데 우리는 여전히 ‘위안부’ 기억에 대해, 대신 목소리를 높이는 지원가와 활동가를 둘러싼 문제를 안고 있어요. 우리의 동기가 무엇인지 자문해야 해요. 이것은 정직성, 지성적이고 정치적인 정직성에 관한 문제입니다. 저는 이것이 진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성차별과 전시 성폭력을 논할 때, 분단으로 인해 심하게 군사화된 한국만의 고유한 상황을 고려하게 됩니다. 군사와 안보에 우선순위를 두면서 한국의 가부장적인 사회구조가 형성되었는데요. 글럭 교수님은 제2차 세계대전을 연구하면서 일본군 성노예 연구에 관심을 두게 되셨고 또 전후 일본사 연구의 권위자이시기도 하시죠. 군사화된 상황, 가부장적인 사회구조, 성차별 사이의 관계성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캐롤 글럭 한국뿐만 아니라 세계 다른 지역에서도 제2차 세계대전은 1945년에 종식되지 않았어요. 영토분할과 상실, 강제 인민 교환, 반식민주의 투쟁 등은 모두 수년간, 수십 년간 몇몇 지역에서 계속되었어요. 이런 점에서 동아시아와 동유럽은 유사해요. 두 지역 모두 냉전이 종식된 후 전쟁 기억으로 돌아가 과거를 새롭게 대면했고, 이는 대개 민족주의적 측면에서 이뤄졌죠. 한국이 고도로 군사화되고 남성중심적인 유일한 지역은 아니라는 점 또한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전쟁 기억의 정치는 오늘날 동아시아에서만큼이나 동유럽에서도 활발히 다뤄지고 있습니다. 두 지역 모두 국가 내에서, 그러나 무엇보다 국가 간에 이러한 정치가 이뤄지고 있습니다. 역사를 이데올로기적 도구이자 정치적 무기처럼 휘두르고 있는 부정론자, 남성주의자, 지도자들 모두 이 두 지역에 존재하고 있고 이 점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사태에서 더욱 극명하게 나타났어요. 눈에 띄게 대조적인 사실 하나는 ‘위안부’ 운동 때문에 소위 ‘여성 문제’라는 것이 다른 지역보다 한국에서 대중적으로 더 크게 부각되었다는 점입니다. 이런 점에서 누군가는 한국의 ‘위안부’ 문제가 특수하다고 말할지 모르겠지만 나는 이것이 특정 민족의 역사로 인한 결과라고 보지는 않습니다. 국가 차원에서, 초국가적인 차원에서 일본군‘위안부’ 역사를 가지고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김은실 국가 차원에서는 여성에게 가해지는 성폭력을 둘러싼 개념과 사회적 제도가 한국 사회에서 변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평화시 성폭력과 싸우기 위해서는 남성 중심 성 규범과 관행을 바꿔야 합니다. 평화시와 전시의 성폭력은 서로 관련되어 있고 연결되어 있어요. 따라서 젊은 여성들 중심으로 시작된 미투 운동은 사회에 만연한 성폭력에 대해 다시 깊게 생각해보고 멈출 수 있는 중요한 실천이에요. 남성 중심의 섹슈얼리티나 욕망의 구조로 도배된 관행이 평화시에 바뀌지 않는다면 전시에 여성을 상대로 한 성폭력을 멈추기는 어려워요. 젊은 여성들이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과 스스로를 연루시킨 한국의 미투 운동은 매우 중요합니다. 성폭력을 문제화한 미투 운동과 성폭력 피해자들과의 연대를 바탕으로 한 위드유 운동은 평화시의 성폭력과 전시의 ‘위안부’ 문제를 함께 연결시키는 중요한 정치적 운동이죠. 저는 이것이 긍정의 윤리학을 실천하는 방식이 될 수 있다고 믿어요. 초국가적인 차원을 말하자면, 글럭 교수님이 말씀했던 것처럼 일본군 성노예 문제가 어디에서나 똑같은 기억을 소환해내는 것은 아니에요. 서로 맥락이 다르기 때문이죠. 또한 초국가적인 ‘위안부’ 운동을 통해 조금 더 많은 사람이 일본군 성노예 문제에 관심을 가질 수 있다면, 평화시의 성폭력 문제가 더 크게 논의되는데 기여할 수 있다고 봅니다. 이러한 변화들을 서로 연결시키면시켜 더욱 의미 있는 대의를 성취할 수 있을 겁니다. 캐롤 글럭 김은실 교수님의 말에 모두 동의하며, 두 가지만 강조하고 싶습니다. 먼저 전시 성폭력은 만연한 가정폭력과 일상 속의 모든 형태의 여성 폭력을 포함해 여성에 대한 성적 폭력이라는 연속성의 한 극단일 뿐이라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위안부’에 대한 기억이 이 세계에서 할 수 있는 일은,여성 권리의 침해를 연속성이라는 측면에서 사고하고, 분쟁과 전쟁이라는 극단적인 상황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그러한 침해에 맞서 싸울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에요. 다시 말해 인신매매, 가정폭력, 그리고 김은실 교수님이 말씀하신 미투 운동 등이 그 예이죠. 직장에서의 성희롱은 여성이 아주 젊었을 때부터 겪을 수 있는 일례이고, 나이가 들어가면서 이러한 성적 괴롭힘은 극도로 폭력적이거나 생명을 위협할 수도 있습니다. 두 번째로 우리가 초국적으로 연결되기 위해 더 노력하고 공통 기반을 찾기 위해 애써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공통 기반이라고 해서 의견이 일치해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고자 하는 일의 목표가 무엇인가, 우리가 함께 노력해 개선하고자 하는 공통기반은 무엇인가를 묻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물론 국가적, 지역적으로 특수한 맥락을 고려하여 행동해야 하지만 단결된 초국적인 협업은 상당한 가능성을 갖고 있어요. ‘위안부’ 문제가 매우 강력한 대의이기 때문인 연유도 크죠. 아시아에서 ‘위안부’ 연대 컨퍼런스를 개최하는 것뿐만 아니라 초국가적으로 한 자리에 모여 ‘이 기억으로 이제 무엇을 할 수 있을까?’라는 공동의 질문을 던져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21세기의 두 번째 분기점이 곧 시작됩니다. 이제 함께 노력해야 할 때예요. 효과적인 초국적 운동, 즉 액티비즘은 미래 정책에 영향을 미칠 수도 있고 ‘위안부’에 대한 기억과 과거 이들의 고통을 기릴 수도 있는 기회를 가져다준다고 생각합니다. 각주 ^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군위안부들』,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한울, 1993. ^ 김은실, "민족 담론과 여성 - 문화, 권력, 주체에 관한 비판적 읽기를 위하여", 『한국여성학』 제10집, 1994, pp. 18-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