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숨-소영현 대담] 최초의, 최선의, 최후의 질문 ‘듣기’

김숨 작가 소영현 한국문학번역원 교수

  • 게시일2022.08.01
  • 최종수정일2022.11.25
 

발화되지 못한 말을 듣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김숨 작가의 중편소설 『듣기 시간』에 나타난 ‘침묵들이 말이 되는 자리’는 그간 우리가 놓친 증언자의 목소리를 되찾게 한다.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김복동, 길원옥 님의 증언 구술 채록을 통해 정서를 나누고, 자신을 돌아보고, 질문하고, 기록하며 침묵을 듣는 곳까지 도달한 작가는 마침내 “최초의, 최선의, 최후의 질문은 ‘듣기’”라는 선언을 이루어낸다. 

‘위안부’ 소설 『한 명』을 시작으로 『흐르는 편지』, 『숭고함은 나를 들여다보는 거야』(일본군 ‘위안부’ 김복동 증언집), 『군인이 천사가 되기를 바란 적 있는가』(일본군 ‘위안부’ 길원옥 증언집), 그리고 『듣기 시간』에 이르기까지 작가의 문제의식은 어떻게 변화하고 또 발전했을까. 구술 채록은 증언자의 목소리를 그대로 받아적는 것이 아니라 채록자와 증언자 간의 관계를 통해 의미가 계속해서 바뀌는 작업이라는 점을 미루어 봤을 때, 증언을 하는 자와 듣는 자 간의 관계는 때로는 조화를, 때로는 불화를 낳기도 한다. 

구술 채록 과정에서 작가가 갖게 된 문제의식에 대해 들어보기 위해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는 김숨 작가와 문학박사 소영현(한국문학번역원 교수)의 대담 자리를 마련했다. 『듣기 시간』을 중심으로 ‘증언’과 ‘듣기’, ‘들을 수 있음’의 사이사이를 경유하며 두 사람이 나눈 이야기를 전한다. 

김숨 작가(왼쪽)와 소영현 교수 ©오늘의 나

 

소영현

증언에 대한 질문으로 시작해보려고 합니다. 김복동, 길원옥 할머니의 증언을 채록하는 과정을 통해 자신이 성숙해졌다는 언급을 여러 차례 하신 바 있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과정을 거쳤고 그 과정에서 경험한 것은 무엇이었나요.

김숨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분들은 우리가 알고 있듯 살아 돌아오시고, 자신의 삶을 살아내시며,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회복한 분들이세요. 상상을 초월하는 끔찍한 트라우마를 끌어안고 하루 또 하루 살아내신 분들을 가까이에서 뵙는 것 자체가 경탄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소영현

김복동, 길원옥 두 분에 대한 증언소설을 다시 읽다보니 두 소설의 사뭇 다른 분위기가 새롭게 눈에 띄더라고요. 김복동, 길원옥 할머니가 지닌 각각의 면모가 작품에도 녹아들었을 텐데, 두 분을 만나 뵈었을 때 느낌이 어떻게 달랐는지, 직접 구술 채록자의 입장이 되어 작업해본 경험은 어떠했는지 여쭤보고 싶습니다.

김숨

두 분이 정말 다르세요. 한 공간에 살고 계셨지만 다른 기질과 개성을 갖고 계셨고 다른 언어로 말씀하셨어요. 김복동 할머니는 선이 굵으셨어요. 꼭 해야 할 말씀만 아껴 하시는, 대쪽 같은 선비 이미지가 저절로 겹쳐 떠오르는 분이셨지요. 뵙자마자 권위가 느껴졌는데 할머니께서 갖고 계신 ‘강함’은 누구나 느낄 수 있을 만큼 겉으로 드러났어요. 굉장한 인내심의 소유자이시기도 했고요. 반면에 길원옥 할머니는 상냥하고 애교가 넘치셨어요. 하지만 그분 역시 만만찮은 인내심의 소유자이시지요. 

김복동 할머니를 뵈었을 때는 항암치료를 하고 계셔서 대화를 나누는 게 어려웠어요. 그래서 멀찍이서 지켜보기만 했습니다. 그런데 아무 말씀도 들려주시지 않는 그 시간에도 할머니께서 끊임없이 어떤 말씀을 들려주고 계시는 것 같다는 생각이 어느 순간 들었어요. 침묵이 단지 침묵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지요. 길원옥 할머니는 손발이 딱딱 맞아 얼굴만 보고 있어도 그저 좋은 친구 같은 느낌을 선물해주셨어요. 할머니와의 대화가 무척 문학적으로 느껴져서 흥분이 되곤 했어요. 대화가 뜬금없고 엇갈리고 엉뚱한 곳에 도달하지만 그럼에도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흘러갔어요. 할머니와 대화를 계속 나누고 싶었지만 사정상 중단되어 무척 아쉽습니다.

소영현

할머님들의 성격이 증언소설에 드러난다고 생각했는데 직접 뵈었을 때의 느낌이 반영된 것이었군요. 길원옥 할머님을 두고 쓰여진 증언소설 『군인이 천사가 되기를 바란 적 있는가』는 특히 문학적 성격이 짙어서 시적이란 생각도 했습니다. 

김숨 작가 ©오늘의 나

 

김숨

제가 시를 쓰는 사람은 아니지만 시를 쓰는 기분으로 할머니와 대화했어요. 뵙는 자리에서 즉흥적으로 떠오르는 질문을 드리고, 할머니께서 뭔가 (질문과 어긋나는 대답이어도) 어떤 대답이든 해주시면, 그 대답을 듣고 떠오르는 질문을 즉흥적으로 드리는 방식이었어요. 그래서 어떤 날은 오전부터 저녁때까지 길게 대화가 이어지기도 하고 어떤 날은 짧게 끝났어요. 그리고 할머님을 뵙고 돌아오면 마치 천사들이 날아다니는 천상 세계에, 선(善)한 세계에 다가갔다 지상으로 내려온 기분이 들었어요. 한없이 더러운 저라는 인간이 감화를 받고 조금 선해져서 돌아온 것 같은 기분이요. 

소영현

두 분을 만나 뵙고 증언소설 집필 후 『듣기 시간』을 쓰셨죠. 이 작품은 어떻게 작업하게 되셨는지요. 

김숨

『듣기 시간』은 과거에 다른 제목으로 발표했던 단편소설 「녹음기와 두 여자」를 퇴고한 것이에요. 할머니들을 뵙기 전에 쓴 소설이죠. ‘위안부’ 증언집에 증언을 채록하고 기록하신 면담자들이 남긴 후기가 실려 있는데, 그 글들이 굉장히 흥미로워 증언이 이뤄지는 과정에 대해 써보고 싶었죠. 그런데 「녹음기와 두 여자」는 그렇게 만족스러운 소설은 아니었던 것 같아요. 

소영현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 『21세기문학』에 실렸을 때 저는 좋아했는걸요. 그 작품에 대해 글을 쓰기도 했고요.

김숨 작가 ©오늘의 나

 

김숨

너무 허술해요. 그 소설을 잊고 있다가 다른 ‘위안부’ 소설인 『흐르는 편지』를 쓰고, 이후 할머니들을 직접 만나 뵌 뒤 두 권의 소설을 내고 나서 자연스레 그 작품을 들여다보게 됐어요. 할머니들을 짧게나마 뵙는 동안 저절로 퇴고가 되고 있었다고 해야 할까요. 그래서 『듣기 시간』은 시기상으론 가장 먼저 썼지만, 사실상 두 권의 소설(『군인이 천사가 되기를 바란 적 있는가』, 『숭고함은 나를 뒤돌아보는 거야』) 뒤에 놓여야 하는 작품인 것이지요.

소영현

「녹음기와 두 여자」, 『듣기 시간』 사이에는 큰 변화가 있습니다. 구술 채록된 증언을 소설 안으로 들여오는 방식도 달라졌고, 채록자를 중심에 둔 성격이 좀 더 뚜렷해지기도 했고요. 피해자의 침묵 사이를 채록자의 이야기가 채우고 있는 점에도 주목하게 됩니다만, 무엇보다 단편소설에서는 두 할머니의 비중이 비슷하지만 『듣기 시간』에서는 다르죠. 주로 황 할머니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고, 문 할머니와의 일화는 거의 언급되지 않아요. 퇴고하시면서 어떤 생각을 하셨는지 궁금합니다. 

김숨

3~40년 긴 시간을 두고 할머니들과 소통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야 그분들의 고통을 진심으로 이해하고, 그분들에 대해 좀 더 정확하고 예리하게 이야기할 수 있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동안 저희는 언론을 통해 영웅화된 분들만 주로 뵈었던 것 같은데, 트라우마를 끝끝내 극복하지 못하고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신 분들도 계시고, 비관 속에 숨어 살다 돌아가신 분들이 많으시거든요. 그분들이 들려주시는 말씀도 담아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런 반성을 시작하며 『듣기 시간』을 퇴고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이야기들은 되도록 배제하려고 했어요. 증언 채록자분들을 만나 뵈면서, 제가 읽었던 자료들에는 나와 있지 않은 진솔한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고요. 할머니들이 자신이 피해자라는 걸 인식하고 선언하실 수 있도록 옆에서 도왔던 분들을 만나 뵙고 새롭게 깨달은 것들을 『듣기 시간』에 담으려 나름 애를 쓴 것 같아요. 그래서 「녹음기와 두 여자」와 『듣기 시간』은 저에겐 다른 소설로 다가올 수밖에 없습니다.

소영현

일본군‘위안부’ 피해 증언집을 보면 1권에서 3권으로 넘어가면서 성격이 달라집니다. 일본군‘위안부’ 문제가 대두된 초기에는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피해를 입증하기 위해 ‘살아 있는 증거’로서의 피해자 증언 자체가 중요했다면, (침묵이나 표정까지 포함한) 말을 문자로만 이루어진 글로 옮기는 구술 작업을 하면서 채록자들이 직접 대면해야 하는 많은 문제들이 생겨났고 구술이나 증언에 대한 고민도 구체화되었다고 할 수 있는데요. 피해자의 증언을 기록으로 남긴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 기록으로 남기기 위해서는 어떤 부분까지 염두에 두어야 하는지 고민이 깊어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는 소설을 쓸 때도 하게 되는 고민일 것 같은데요, 그런 차원에서 『한 명』과 『듣기 시간』 사이에 존재하는 증언 인용 방식의 차이는 어떤 인식의 변화에서 비롯된 것인지 궁금합니다.  

김숨

『한 명』에서는 증언을 소설 안으로 끌고 들어올 수밖에 없었어요. 그 증언이 허구가 아니라는 걸 저 자신에게 일깨워주기 위해서, 독자분들에게는 피해자가 겪었던 일을 과장 없이 알려드리고 싶었어요. 몸에 각인된 트라우마에 시달리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속되는 인생을 살아내고 계신 분들의 ‘하루’를 보여드리고 싶었고요. 할머니 한 분의 몸 안에 복수의 목소리를 담아내면서 소설이 시작되었는데요, 증언들을 읽고 체화하는 과정이 쉽지 않았지만 할머니들께서 하신 말씀들을 제 안으로 갖고 오면서 소설을 쓸 수 있었습니다. 이후 할머니들을 직접 뵙고 침묵을 몸소 경험하며 『듣기 시간』을 펴낼 수 있었습니다. 

소영현 교수 ©오늘의 나

 

소영현 

『듣기 시간』을 통해 “최초의, 최선의, 최후의 질문이 ‘듣기’”라고 하셨습니다. “녹음기 400개의 구멍으로도 부족하다”는 표현에서도 알 수 있듯 ‘듣기’의 중요성을 강조하셨는데요, 그렇다면 ‘듣기’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오랫동안 타자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온 학자인  오카 마리(현대 아랍 문학, 제3세계 페미니즘 사상 연구자)가 강조했던 것처럼, 모든 피해자는 각자의 방식으로 계속해서 목소리를 내어 말해왔고, 그런 의미에서 피해자의 목소리가 없었던 게 아니라, 그것을 들을 귀가 없는 우리가 진짜 문제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역사적 과거가 아니라 지금 이곳의 문제이고, 피해자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는 우리 사회의 문제라고 해야 할 것 같은데요. ‘들을 수 있음’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도 묻고 싶습니다.

김숨

내가 듣기를 잘하는 사람인가 자문했습니다. 김복동 할머니께서 아무 말씀도 들려주실 수 없는 상태로 누워 계실 때 저 또한 어떤 질문도 던질 수 없었어요. 그래서 침묵이라도 적어보자 했지요. 침묵을 듣고 기록해나가기 시작했어요. 그러면서 듣기가 어려운 행위라는 것 또한 깨달았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침묵한 채 입이 아닌 다른 것으로 끊임없이 말하기도 하니까요. 가령 눈동자의 움직임이나 표정, 몸짓, 탄식, 한숨 등으로요. 그래서 특히 피해자의 말은 온 감각을 열어놓고 들어야 해요. 침묵을 연달아 들려줄 때 침묵이 담고 있는 의미가 다르기 때문에 그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고, 곡해하지 않기 위해서는 더 예리한 감각으로 들어야 합니다.

돌아보자면, 우리가 ‘위안부’ 피해자들께서 들려주신 말들 중 듣고 싶은 말만 골라서 들었던 게 아닌가, 듣고 싶은 대답을 듣기 위해 특정 질문을 반복해서 드렸던 것은 아닌가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위안부’ 문제에 대해 모두가 잘 알고 있는 것 같지만 실제로 증언을 읽어본 사람은 많지 않을 거라 생각해요. 피해자들이 어떻게 끌려갔고, 어떤 고초를 겪었고, 어떻게 살아 돌아왔고, 이후 어떤 왜곡된 삶을 살았는지 처음부터 끝까지 아는 분이 얼마나 될까요. 한 분의 증언조차 제대로 읽어보지 않았음에도 잘 알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듣기’를 잘 못하고 있는 것 아닌가 저 자신부터 먼저 반성하게 됩니다. 

소영현

폭력적인 고통이나 기억을 들으려고 하기보다는 듣지 않으려고 선택하는 사람들이 훨씬 많은 거죠. 불편하다는 이유로 회피하려는 것일 수도 있고, 고통의 말과 몸짓을 듣거나 봤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제대로 표현할 수 있는 언어가 없는 것일 수도 있고요. 그래서 피해자분들이 말씀을 하셔도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고, 말을 해도 어차피 수용되지 않을 것이란 생각에 더욱 말씀을 안 하게 되시는 것 같습니다.

김숨 작가 ©오늘의 나

 

김숨

우리가 듣기를 잘했다면 더 다양한 질문들을 드릴 수 있었을 텐데 아쉬워요. 그 과정을 통해 ‘위안부’ 피해자들에 대한 이해와 공감을 넘어 인간에 대한 통찰도 할 수 있었을 거라 생각해요. 할머니와의 첫 만남에서 “뭐가 가장 보고 싶고 그리우시냐”고 여쭌 적이 있어요. 그런데 여태 들어보신 적 없는 질문이었는지 당황해하셨죠. 저는 할머니가 누구를 가장 그리워하는지, 어디에 가장 가고 싶으신지, 가장 좋아하는 꽃은 무엇인지 궁금했거든요. 그 질문에 할머니께서는 사적인 이야기를 차차 들려주셨고, 이전에는 말씀하지 않으셨던 이야기로 자연스레 이어지기도 했어요. 

소영현

구술 채록 과정에서 피해자에게 건넬 수 있는 적절한 질문은 무엇일까 고민하게 되네요. 기본적으로 기억은 왜곡, 변형, 취사선택될 수도 있기 때문에 증언을 역사적 사실인 것처럼 활용하는 건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더구나 피해자의 삶이 진상규명을 위한 증거로 축소되어버려서는 안 되고, 그렇기 때문에 피해자 모두가 증언자가 될 수도, 될 필요도 없지 않은가 생각하고 있기도 한데요. 작가님의 말을 듣고 보니, 증언하지 않는 방식으로 증언하거나 증언을 거부하면 거부하는 대로 그 자체로서 한 분 한 분의 기록을 남겨도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것이 증언인가에 대해서는 논의가 필요하겠지만 다양한 방식의 ‘증언’에 대한 기록이 축적되는 것도 의미가 있겠다고 생각됩니다. 증언에 대해 여러 각도에서 고민하면서도 이런 방식으로는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아요. 또 다른 형태의 편견을 갖고 있었던 듯하여 반성하게 됩니다.    

김숨 

‘위안부’ 피해자분들의 이야기를 쓰게 된 뒤로 늘 반성의 연속인 것 같습니다. 

소영현

구술 채록자가 어떤 사람이냐에 따라 증언의 내용 또한 달라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증언이라는 것은 구술 채록자의 질문과 피해자의 답변(목소리가 아니더라도 행위, 침묵 등 모든 것)이 모두 합쳐진 작업이기 때문인데요, 그래서 구술 채록자의 면모 또한 증언이라는 전체 논의 속에서 함께 고려되어야 하는 것 같아요. 

김숨

맞아요. 구술 채록 작업을 해오신 분들의 글들도 굉장히 흥미로워요. 대단하신 분들이라고 생각해요. 그분들이 해놓으신 작업 덕분에 소설도 쓸 수 있었고요. 그분들에게 빚을 졌다고 생각합니다. 

소영현 교수 ©오늘의 나

 

소영현

『듣기 시간』의 화자 성윤주가 구술 채록 작업을 회상하며 할머니와 친밀해지려고 노력한 것에 대해 이렇게 표현한 대목이 있습니다. “역겹다 못해 환멸스럽다.” 자신의 행위에 대해 이렇게 표현하게 된 이유가 있을까요. 이 대목을 쓰면서 작가님은 어떤 생각을 하셨는지요.

김숨

면담 후기를 읽으면서 채록자분들께서 이런 감정을 느낀 순간이 있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저도 할머니들께서 피해 경험을 말씀하시도록 하는 게 가혹한 일이라는 걸 알면서도 여쭤보게 되는 순간이 있었어요. 그럴 때 저 자신에게 어떤 환멸 같은 걸 느꼈는데, 구술 채록자들은 이와 비슷한 경험을 저보다 더 진하게 하셨을 것 같았습니다. (인내심을 가지고 구술채록을 하는) 내 앞의 살아남은 피해자가 인격적으로 성숙하고 존경스러울 수도 있지만, 한없이 비참하게만 보일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이런 비참함까지 담아내는 것이 문학의 역할 아닐까 싶습니다. 

소영현

증언이 기록물로 남지 못하는 데에는 많은 이유들이 있습니다. 피해자 본인 또는 가족이 증언을 기록물로 남기는 걸 원하지 않는 경우도 있고요. 그런 점에서 『듣기 시간』에 등장하는 황 할머니의 여동생 캐릭터가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는 피해자 신고를 반대하고 구술 작업에도 거부감을 드러내는 인물이죠. 그런데 흥미롭게도 황 할머니가 자신의 삶에 대해 거의 침묵으로 일관한다면, 여동생은 언니의 피해에 대해 누구보다 많은 말을 전합니다. 넓은 의미에서 보면 여동생은 피해자이면서 가해자이기도 하고, 어떤 의미에서는 피해를 말할 수 없게 하는 ‘우리’를 대표하기도 할 텐데요. 그 인물은 어떻게 탄생하게 되었나요. 

김숨 작가(왼쪽)와 소영현 교수 ©오늘의 나

 

김숨

증언집을 읽을 때 인상적이었던 대목이 있었어요. 자신의 피해 사실을 가족이 알게 될까 봐 할머니가 불안해하시는 부분이었는데요, 자신이 피해자임을 인식하는 것은 당사자뿐만 아니라 가족들에게도 중요하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그런데 그 과정이 참 어렵죠. 본인이 피해자라는 것을 세상에 말하면 가족과 절연하게 될 상황에 계셨던 분들의 증언을 읽으면서 여동생 캐릭터가 자연스럽게 그려졌어요. 『듣기 시간』의 여동생이 어쩌면 저 자신일 수도 있었으니까요. 

소영현

‘위안부’ 문제를 피해자 중심으로만 다뤄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피해자 중심으로 ‘위안부’ 문제를 다루는 것의 의미와 위험성이 동시에 존재하는 것 같고요. 이제 ‘위안부’ 문제를 다른 관점에서 다룰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문학에서도 새로운 시선이 등장해야 하지 않을까요. 작가님께서는 다른 관점에서 이 문제를 다뤄보고 싶은 생각이 있으신지요. 

김숨

‘위안부’ 소설은 쓰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부여되는 면이 있지만, 동시에 엄연히 문학이기 때문에 의미뿐만 아니라 문학적 성취 또한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런 점에서 처음에 펴낸 『한 명』은 부족함이 곳곳에서 보이는 아쉬움이 많고 부끄러운 소설이에요. 마지막으로 펴낸 『듣기 시간』은 오히려 나름의 만족감을 주는 소설이고요. 다른 관점에서 이 문제를 다뤄보고 싶다는 생각보다 ‘위안부’ 소설을 다시 쓰게 된다면, 혹은 다시 퇴고를 하게 된다면, 인간에 대한 통찰로 이어지는, 어쩔 수 없이 인간인 ‘나’ 자신에 대한 통찰로 이어지는 소설을 쓰고 싶습니다. 

김숨 작가 ©오늘의 나

 

Credit 

인터뷰어: 소영현
인터뷰이: 김숨
정리: 퍼플레이 강푸름
사진: 오늘의 나 
기획/진행: 퍼플레이컴퍼니
일시: 2022년 7월 7일 목요일 
장소: 서울특별시 동작구 서달로14가길 5 1층 흑석커피

*본 인터뷰는 신종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확산방지 예방수칙, 행동수칙에 따라 안전하게 진행되었습니다.

글쓴이 김숨 작가

소설가. 주요 저서로 「뿌리 이야기」, 『바느질하는 여자』, 『L의 운동화』, 『한 명』, 『흐르는 편지』, 『군인이 천사가 되기를 바란 적 있는가』, 『숭고함은 나를 들여다보는 거야』, 『듣기 시간』 등이 있다.

글쓴이 소영현 한국문학번역원 교수

문학평론가. 한국근현대 문학문화 전공. 논문으로 <포스트 미투 운동과 시민-독자의 자리>, <참여 과잉 시대의 비-시민 정치과 광장의 탈구축>, <징후로서의 여성/혐오와 디아스포라 젠더의 기하학>, <그림자 노동의 (재)발견: 자본과 노동의 성적 분할과 계급 위계-식민지기 ‘남의집살이’ 여성의 노동을 중심으로>, <야만적 정열, 범죄의 과학: 식민지기 조선 특유의 (여성)범죄라는 인종주의> 등이 있다. 저서로는 『올빼미의 숲』, 『하위의 시간』, 『분열하는 감각들』, 『프랑켄슈타인 프로젝트』, 『문학청년의 탄생』, 『부랑청년 전성시대』, 공저로는 『#문학은_위험하다』, 『비평 현장과 인문학 편성의 풍경들』, 『문학사 이후의 문학사』, 『감성사회』, 『감정의 인문학』, 『集體情感的系譜: 東亞的集體情感和文化政治』, 『Bonjour Pansori!』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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