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픽 노블 『풀』 일본어 출판을 통해

쓰즈키 스미에(都築寿美枝)

  • 게시일2022.08.05
  • 최종수정일2022.11.25

1. 시작


만화 『풀』(김금숙, 보리, 2017)은 일본군 성노예제 피해자 이옥선 님의 삶을 바탕으로 세계 공통의 소망인 인간의 존엄과 평화에 대해 이야기한다. 나는 히로시마현의 중학교 교사 시절 평화교육과 성교육의 관점에서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를 학생들에게 가르쳤고, 또 한 시민으로서 피해자 지원 운동과 한일시민연대 활동을 해왔다. 우경화되는 일본 사회에서는 일제강점 식민지 지배의 역사와 전쟁 피해자에 대한 배상과 명예회복을 요구하는 목소리를 내기 어렵고, 자민당 정권은 가해 사실을 왜곡·은폐하고 배상도 거부하고 있다. 일본 헌법이 보장한 삼권분립에도 불구하고 법원은 정부의 이런 태도를 추종하는 듯한 판결을 계속 내놓고 있다. 학교 교육이 수험교육 위주로 편중되면서 근현대사는 경시되고, 뜻있는 교사와 만날 기회가 없는 대부분의 학생들은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를 비롯해 과거 일본이 저지른 가해 사실을 배울 기회가 적다. 이런 상황은 전쟁이 단순히 가해와 피해의 이항 대립이 아니라 가해와 피해의 관계가 복잡하게 뒤섞이는 구조적인 문제라는 것을 알아채기 어렵게 한다. 나는 독서를 기피하는 일본 젊은이들에게 만화라는 매체를 이용해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를 알리고 평화를 희구하는 태도를 배양하기 위해 『풀』의 일본어 출판에 나섰다.

 

2. 그래픽 노블 『풀』과의 만남


퇴직 후 2013년 한국으로 어학유학을 온 나는 일본군 성노예제 피해자들이나 시민들과 교류를 거듭하면서 2014년에 김금숙 작가를 만났다. 취약계층에 빛을 비추는 작품을 그려온 김 작가에게 친근감을 느끼고 교류를 하며 함께 베트남 장애인에게 휠체어를 운반하는 봉사활동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리고 2017년 8월 14일 김금숙 작가가 일본군 성노예제 피해자 이옥선 할머니의 삶을 그린 그래픽 노블 『풀』이 한국에서 발간됐다.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로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를 중단하려는 일본 정부와 이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려는 일본 사회를 생각할 때 『풀』은 빛나 보였다.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는 어렵거나 자신과 상관없는 과거의 문제라는 사람들에게 이 작품은 한 여성의 삶을 통해 문제의 본질을 구체적으로 알려주는 훌륭한 소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나를 움직인 힘은 주인공 이옥선 할머니를 비롯해 작품과 관련된 사람들이 운동적으로 나와 연결돼 있었다는 점이다.

게다가 『풀』이 프랑스어로 출판되고 영어판도 준비된다는 얘기를 들으며,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를 책임져야 할 일본에서 가장 먼저 읽혀야 할 책이 일본 이외의 국가들에서 먼저 출간되는 것에 조바심을 느꼈다. 서울 만화박물관에서 열린 『풀』 원화전에서 만난 한 여중생의 어머니는 “성폭력에 대해서는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쉽게 가르치기 어렵지만 이런 식으로 접할 수 있다는 것은 매우 좋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했다. 나라는 다르더라도 누구나 안심하고 평화롭게 살 수 있는 사회를 원한다. 일본에 이런 생각을 공유하기 위해서라도 이것은 어떻게든 일본어로 출판되어야 할 책이라고 확신했다. 독서를 기피하는 일본 젊은이들에게 만화라는 매체는 효과적이라고 생각했다. 합천원폭피해자복지회관에서 만난 한국인 학생 자원봉사자는 만화 『맨발의 겐』(작가 나카자와 게이지가 자신의 피폭 체험을 바탕으로 한 자전적 만화)을 읽고 활동을 시작했다고 한다. 나에게는 만화로 인류 보편의 주제를 국경을 넘어 전할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다.

『풀』 앞에 모인 세대를 아우르는 여성들 ©백정미

 

3. 일본어 출판 경과


일본에서 번역된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를 다룬 한국 그림책으로는 『꽃할머니』(『花に水をやってくれないかい?』, 권윤덕, 쿠와하라 유카 번역, ころから, 2018)와 『끝나지 않은 겨울』(『終わらない冬』, 강제숙(글), 이담(그림), 양유하/쓰즈키 스미에 번역, 日本機関紙出版センター(일본 번역서 제목), 2015) 등이 있다. 이 작품들이 일본에서 출판되기까지 여러 우여곡절이 있었다. 일본 우익세력의 공격과 그 영향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출판 업체, 도서관의 태도가 장벽이었다. 그럼에도 기획자들의 열의와 시민들의 협조가 큰 힘이 되어 출판을 실현할 수 있었다. 이 선례를 참고로 『풀』의 일본어 출판은 많은 시민과 협력하는 것을 중요시해 진행하기로 했다.

우선 『풀』 일본어 출판위원회를 구성했다. 공동대표는 ‘여성들의 전쟁과 평화자료관(wam)’ 명예관장인 이케다 에리코 씨와 ‘일본군 위안부 문제해결 히로시마 네트워크’ 사무국장 오카하라 미치코 씨, 그리고 나, 셋이 됐다. wam은 두 차례나 우익의 폭파 협박을 받은 적이 있고, 이케다 씨는 조금 망설이기도 했지만 『풀』 일본어 출판의 의의를 중요시하며 함께 일어섰다. 우리는 학습회와 강연회, 그동안 쌓아온 네트워크를 통해 홍보활동을 진행했다. 강연회장에서 일본어 출판을 열심히 해달라고 즉석에서 후원해 주는 지원자도 있었다.

『풀』 일본어 출판 자금 모금과 그 의미를 널리 알리기 위해 우리는 “세계에서 읽히고 있는 ‘위안부’ 만화 풀을 번역 간행하고 싶다!”라는 제목으로 크라우드 펀딩(이하 CF)을 시작했다. 2019년 9월 7일 출범한 CF는 호조를 보였고, 『풀』이 뉴욕타임스 등 해외 언론에 소개되기도 했으며 프랑스 일간지 휴머니티가 선정하는 ‘휴머니티 만화상’에서 심사위원 특별상을 수상한 것도 훈풍이 됐다.  우리의 상상을 훌쩍 뛰어넘은 펀딩 금액과 뜨거운 지원의 목소리 덕분에 책 판매가격을 예정보다 낮출 수 있었고, 김금숙 작가를 일본으로 초청해 4곳에서 작가와의 만남을 개최할 수 있었다. 접수된 응원 메시지 중에는 “뭔가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는데 구체적으로 움직이지 못해 몸부림치고 있었다. 멋진 발상을 알고 응원하고 싶다”,  “표현의 자유를 방해하는 움직임에 의구심을 느낀다(CF 시작 전 평화의 소녀상 등 전시를 우익이 방해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국제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풀』을 빨리 읽고 싶다” 등의 뜨거운 생각이 담겨 있었다. 당초 일본 우익의 방해를 우려했던 김금숙 작가는 일본에서의 활동을 높이 평가하며 코로나 유행이 우려되는 시기였지만 과감히 일본을 찾아줬다.

 

4. 일본어 번역 작업의 과정

『풀』의 일본어 번역에는 몇 가지 넘어야 할 문제가 있었다. 우선 번역 수준의 문제다. 이것은 우리가 시작한 샘플 번역이 한국출판문화사업진흥원의 해외번역 조성사업으로 선정되고 강력한 협력자를 얻으면서 불식되었다. 공동번역자 리령경은 ‘정신대할머니와함께하는시민모임’ 회원으로 대구 경북지역 피해자들을 지원하면서 그 만남과 인연으로 평화학에 매진하는 데에 방향을 잡았다. 『풀』의 주인공 이옥선 할머니의 통역을 맡기도 한 그는 일본어 출판 운동에 관여하고 싶다고 주체적으로 의사를 밝혔다. 그는 사투리 번역뿐 아니라 사실 검증 작업에도 힘을 발휘했다. 그가 오랜 세월 피해자들의 지원 활동을 해온 것과 대구 출신이라는 점에서 이옥선 님의 부산 사투리를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 김금숙 작가를 크게 안심시켰다.

말풍선 안에 들어가는 글자 수로 원작의 의미를 정확히 표현해야 하는 만화의 독특한 번역 작업은 주인공인 이옥선 님과 작가의 심정을 제대로 대변할 수 있을지 늘 묻는 작업이기도 했다. 한 가지 예를 소개한다. 작중에 작자가 이옥선 님을 찾는 장면이 있다. 나눔의 집 마당에 있는 피해자들을 모티브로 한 여성 반라상 그림에는 작가의 심정이 담겨 있다. 이옥선 할머니의 끔찍한 체험을 어떻게 들려줄까 라는 작가의 갈등이 그 장면에 투영돼 있다. 직역에 가까운 번역에 출판사로부터 ‘더 시적인 표현’을 요구받았다. 피해 체험 증언은 당사자에게 피해 사실을 재현시켜 강한 트라우마에 시달리게 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일본군 성노예제 피해자로부터 “증언을 한 날에는 당시 일이 떠올라 밤에 잠을 잘 수 없게 된다”고 들은 적이 있다. 증언을 듣는 사람은 피해자의 입에서 나오는 생생한 사실을 역사의 진실로 받아들이고 자신이 설 위치를 생각하는 지표로 삼을 수 있다. 그러나 증언을 한다는 것은 증언자로 하여금 피해 기억이 재연되게 하고, 고통을 동반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증언자가 대가를 치르면서까지 증언하는 만큼 우리는 겸손해야 한다. 고민 끝에 이 부분의 번역은 다음과 같이 되었다.  ‘벌써 도착했어! 입구에 있는 늙은 여자의 나신상이 묻는다. “당신도 자기 작품 때문에 우리에게 그 악몽을 말하게 하느냐고” 라고’. 

주인공 이옥선 할머니는 ‘가시나’로 불리며 수양녀가 되어 기생이 있는 기루에서 일했다. 번역 작업을 하면서 그의 삶에 유교·도덕적 가부장제로 인한 여성의 인권 침해와 일제강점 식민지 지배로 인한 빈곤-계급 문제가 크게 관련됨을 새삼 절감했다. 

번역 작업을 하며 『풀』의 작품성을 살리면서도 일본의 우익 대책에도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숫자 하나까지 트집을 잡아 작품 전체를,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 자체를 부정하려는 우익에게 공격의 틈을 주지 않도록 해야 했다. 일본 상황을 잘 아는 김금숙 작가는 일본 독자들이 받아들이기 쉽도록 내용을 변경해도 괜찮다고 승낙해 줬다. 작중 등장인물의 나이는 일본식으로 만 연령으로 환산하고 역사학자 요시미 요시아키 주오대 교수와 가사하라 도쿠지 쓰루 문과대 명예교수에게 지도와 조언을 받으면서 외국에서는 문제가 되지 않았던 난징대학살 장면 등에 일본어판의 독자적인 번역을 넣었다. 이 역시 원작 그림에 맞게 해야 하는 지난한 과정이었다.

 

5. 작가와 만나는 모임


도쿄·오사카·히로시마·후쿠야마의 네 개 장소에서 개최한 ‘작가와 만나는 모임’에는 합계 282명의 시민이 참가했다.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 활동가, 재일 코리안(한국인과 조선인) 인권 문제 활동가, 조선학교 학생, 장애인 문제와 환경 문제 활동가, 단체, 교사들이 열심히 김금숙 작가와 교류했다. 한 교사는 “일년에 한번 ‘위안부’ 문제 수업을 한다. 식민지 시대에 조선인이 조선말을 쓰면 교사가 폭력을 행사하는 것도 일상적이었다. 현재의 일본 정부도 (본질적으로는) 마찬가지다. 우리 일본인이 이웃에게 어떻게 해왔는지를 따지는 의미에서도 『풀』은 아주 좋은 책이라고 생각한다”며 평화와 성교육 부교재로 『풀』을 활용하겠다고 했다.

또 한 시민은 “한국에서는 젠더 문제와 함께 계급문제라는 시각이 시민들 사이에 공유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자신들과 국가 사이에 거리를 두고 여러 문제를 비판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 같다. 총중류(總中流: 일본 국민 대다수가 자신을 중산층으로 의식하는 현상)로 불려온 일본에서는 중산층이 무너지자 사람들은 거기서 흘러내리지 않으려고 급급하고, 이를 위해 스스로를 국가와 일체화하려는 것 아닌가. 국가가 일으킨 죄로 학대받은 사람으로서 한국과 일본 민중이 공감하고 권력에 맞서기 위해 어떤 시각이 필요한지 생각하게 됐다”고 말했다.

이처럼 『풀』은 인권과 평화라는 인류 보편의 가치가 국경을 넘어 사람들을 연결시킨다는 것을 알려줬다.

글쓴이 쓰즈키 스미에(都築寿美枝)

성공회대학교 일반대학원 사회학과 박사과정 수료생(2023년 현재는 한국에서 논문을 쓰고 있음). 일본 히로시마현의 체육보건 교사였고, 시민으로서도 평화·인권활동을 했다. 1980년대 후반부터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과 교류했다. 피해자들이 그린 그림 등을 교재로 만들고 일본군성노예제문제를 학생들에게 가르쳤다. 정년퇴직 후에는 한국에서 평화 운동 및 인권 교육 연구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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