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대한’ 정책에 따른 ‘결정’
중국에서 일본군 성폭력 피해를 입은 여성들이 일본 정부에 사죄와 배상을 청구하는 재판을 시작한 것은 1992년이다. 이에 따라 중국에서 강간에 대한 조사와 논의로 1997년 북경출판사의 『일본군 중국침략 폭행실록』이 나왔다. 그전까지는 중국에서 일본군‘위안부’나 성폭력은 거의 논의 대상이 되지 않았다.
그런데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후 중국 정부는 1,000명이 넘는 전범 용의자를 구류하였으며, 피해자 측과 아울러 조사를 실시한 바 있다. 1945년 러시아 군대에게 체포되어 러시아로 압송되었던 일본전쟁범죄자들은 1950년 7월 중국에 인도되어 푸순(抚顺) 전쟁 범죄자 관리소(사진1)에 감금되어 있었다. 그리고 1956년 4월 25일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중국침략 전쟁 중 일본전쟁범죄자 처리에 관한 결정」(이하 ‘결정’으로 약칭)이 통과되어 마오쩌둥(毛澤東) 주석령으로 공포되었다.
중화인민공화국 최고인민법원은 이 결정에 따라서 특별군사법정을 조직하여 1956년 6월과 7월, 랴오닝성(辽宁省) 선양(沈阳)시와 산시성(山西省) 타이위안(太原)시에서 공개재판을 했다. 재판의 공소서와 변론은 모두 ‘결정’에 근거하여 주장되고 판결되었다. ‘결정’은 일본의 전범들이 국제법과 인도에 반하는 죄로 중국의 인민에게 막대한 피해를 주었기 때문에 마땅히 엄벌해야 한다고 선언한다. 그러나 곧바로 일본이 투항한 지 10년이 지나면서 상황과 환경에 많은 변화가 있었다. 그리고 최근에 중일 양국 인민의 우호 관계가 발전하였다. 게다가 구속 기간 중 전범자들이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절대 다수가 자신의 죄를 반성하였다고 말한다. 따라서 ‘결정’은 ‘관대한’ 정책에 따라 전쟁 범죄자들을 분별 처리한다고 선언한다.
이 ‘결정’은 두 차례에 걸쳐 ‘관대한’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전범에 대한 사면을 암시한다. 실제로 법정 변호인단의 변론 역시도 상투적이다시피 ‘결정’이 제시하고 있는 관대 이유 세 가지를 들고 있다. 세 가지는 현재 상황 변화, 피고인의 사죄와 반성, 중일 양국의 우호적 관계 회복 등을 말한다. 그리고 일본 전범자들에 대해 관대한 판결을 요구하는 변호의 논리는 다음과 같다. 첫째, 피의자가 제국주의 국가와 군부, 그리고 각각의 국가기관에 속해있는 구조 속 부품에 지나지 않았다. 둘째, 군국주의 교육과 환경 속에서 군국주의자로 성장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중국정부의 교화 노력을 통하여 깊이 반성하고 있다.
실제로 중국은 1950년 러시아 정부로부터 인도받은 포로들에게 ‘세심하고도 꾸준한 배려’에 입각한 ‘교화’사업을 진행했으며 이 과정에서 포로들의 “인식과 태도에 근본적인 전환이 일어났다”고 한다. 어떤 면에서는 교화사업에 성공했다는 자신감이 재판으로 이어졌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중국공산당 정부의 교화사업은 판단 여하에 따라 제네바 협약 총칙 제3조 ‘신앙에 따른 불리한 대우를 받지 않는다’는 조항을 위반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법정에서는 사회주의 교화에 대한 낙관적 정치철학이 주요한 전범자들을 옹호하는 변호 논리로 작용하였다.
다케베 류조(武部六藏) 등 28명의 전쟁범죄안건에 대한 공소인은 리푸산이었다. 그는 돌아가신 분들의 마음을 품고 공소자인 자신이 국제법과 인도를 위반한 전쟁범죄자들에게 응분의 책임에 따른 징벌을 내려 달라고 요청한다고 하였다. 이외 스즈키 히라쿠(鈴木啓久) 등의 공소 내용을 보면 상당수의 양민학살과 부녀자들에 대한 강간, 그리고 “중국부녀를 일본군대 ‘위안소’로 보내어 강간한 일” 등을 중요한 공소 이유로 들고 있다. 그러나 재판은 시종일관 ‘결정’의 원칙에 따라 변호와 공소가 제기되었기 때문에 이러한 범죄에 대하여 심각하게 다루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변론의 주요한 논거에 대한 검찰의 이의제기가 전혀 없지는 않았다. 스즈키 히라쿠 등 8명의 전쟁범죄를 기소한 것은 왕즈핑이었다. 그는 개인이 사회의 영향과 역사적 제약을 받는 존재이지만, 결코 개인의 능동적 역할을 부정할 수 없다고 말한다.
과거 군국주의가 지배하던 일본에는 이를 추종하는 세력이 있었지만 동시에 평화를 사랑하는 진보적인 힘도 있었다. 그런데 피고인은 인간이 지녀야 할 최소한의 양심을 저버리고 ‘목적의식적으로 다양한 죄악을 저질렀다.’ 따라서 그들이 저지른 엄혹한 죄에 대한 법률적 책임을 피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또한, 피고인의 범죄행위가 명령의 집행이었다고 하지만 일정한 직책을 지닌 자들은 국제법을 알고 있었다. 따라서 비무장 양민학살과 마을 파괴, 부녀강간, 독가스 살포 등이 모두 엄중한 범죄행위임을 알고 있었다고 본다. 그렇다면 최소한의 양심을 지닌 인간이라면 상급의 명령을 변경하거나 저지 가능했을 것이기 때문에 중대한 책임을 피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마지막으로 피고인들이 법정에서 자신의 잘못을 인정했다고 하지만 “초기에는 죄를 인정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중국침략이 일본 군인의 직무”라고 저항하였다면서 그 죄를 묻고 있다. 그러나 이후 어떤 변호사도 이 점에 대해 반박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공소인도 충분한 이해를 표하면서 의견 표명을 하지 않았다.
결국, 타이위안에서 9명이 유죄판결을 받았으며, 120명이 유죄를 인정했지만 불기소되었다. 9명 전범의 죄상 중에는 강간 범죄가 3명이었다. 120명 중 자료가 남아있는 118명이 강간, 윤간을 자행하였으며, 여성을 강제로 ‘위안부’로 만든 죄가 있는 자가 43명이다. 그중 70명은 수십 명을 강간, 윤간하였으며 유아 강간을 인정한 자도 있다. 여기서 불기소된 120명의 범죄의 중요 내용을 구성하고 있는 것은 강간, 윤간이라는 여성에 대한 성폭력이다. 그럼에도 대부분 불기소 처분되었다.
중국 정부는 이 재판을 통해서 전쟁범죄를 따지고자 했다기보다 중국의 ‘관대함’을 보여주는 ‘정의’의 실현을 통하여 일본과의 국교 수립이라는 실리를 꾀했던 것 같다. 당시 총리 저우언라이(周恩來)는 6월 28일 전국인민대표대회 제3차 회의에서 “중국 정부의 전쟁범죄자들에 대한 처리는… 양국이 빠른 시일에 정상적 관계를 회복하기를 강렬하게 원하고 있는 점을 고려한 것이다”라고 솔직하게 말한 바 있다.
하지만 피해자들은 어떠한 심정으로 재판에 임하고 재판과정을 지켜봤을까? “돌아가신 분들의 마음을 품고 죄를 묻는 일이” 공소인들에게 부여된 권능일까? 전쟁범죄자들에 대한 용서의 주체는 누구일까? 증인으로 출석하여 자신들이 겪은 피해를 진술한 많은 이들은 입을 모아 정부를 향하여 자신들을 대신해 원수를 갚아 달라고 호소하였다.
용서와 화해란 누가 청할 수 있는 것일까?
전범자들 중에는 앞서 논한 산시성 피해자들에게 직접적인 가해를 입혔던 스미오카 요시카즈(住岡義一), 사가라 게이조(相樂圭二) 등도 있었다. 이들이 산시성 일대에서 자행한 부녀에 대한 폭력(강간, 윤간, ‘위안소’)으로 심신이 망가진 여성들에 대한 이야기도 재판 과정의 여러 곳에서 나오고 있다. 그런데 재판이 끝나자마자 실형을 선고받고 복역하게 된 이들을 제외하고 기소를 면한 이들과 질병으로 석방을 허락받은 이들은 3차에 걸쳐 일본의 적십자에서 보내온 일본 윤선 고안호를 타고 귀국하게 된다. 복역을 선고받은 이들도 대부분 형기를 앞당겨 1960년대 중반까지는 모두 석방되어 일본으로 귀환한다.
그런데 인상적인 것은 귀국하는 고별사의 보도 내용이다. 1차로 불기소 처분되어 귀국하는 도미나가 준타로(富永順太郞)는 ‘잘못을 하면 바로 고치는 것을 주저하지 말라(過則勿憚改)’는 고사성어를 인용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확실히 잘못했다. 오늘 나는 충분히 반성할 기회를 얻었다. 나는 아주 기쁘다. 많은 재난과 고통을 입은 중국 인민에게 죄송하다. 나는 사람이 변하여 좋은 사람이 된 것보다 더 유쾌한 일은 없다고 생각한다. 나는 오늘부터 인생의 제일보를 걷고자 한다. 나는 후반생은 좋은 사람이 되고자 한다. 여러분에게 감사한다. 지금 내 마음은 유쾌함으로 충만해 있다.”
귀국자들은 “일본과 중국은 빨리 국교를 회복하여 정상화하여야 하며 재차 형제와 같은 우정을 만들어 가야 한다”며 이를 위해 노력하겠다는 다짐을 하면서 돌아갔다. 물론 이와 같은 내용은 중국의 보도자료이기 때문에 실제로 그들이 남긴 말이 무엇이었는지 정확하게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적어도 중국 정부가 이 보도를 통하여 전범자들을 불기소 처리하고 귀국시킨 이유를 유추해볼 수는 있다.
피해자의 절규와 중국 정부의 ‘관대’하고 ‘정의로운’ 재판, 그리고 스스로 용서받아 ‘좋은 사람’이 되었다는 전범자의 자부를 보면서 용서와 화해를 청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무엇이 전제되었을 때 용서와 화해란 가능한 것일까? 라는 사유가 과제로 제기된다. 법학자 이재승은 용서와 화해에도 도덕적 문법이 있는가 고민하면서 국가권력이 범죄자의 처벌과정을 독점하고, 정의의 유일한 실현자로 나선다면 피해자의 소외, 배제, 파멸이 예정된다고 말하였다. 이재승의 지적은 중국의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허우둥어(侯冬娥)의 고통을 이해하는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한다.
중국의 전범관리소에서 ‘교화’되어, 관대한 전범 재판을 거친 일본 군인들은 귀국하여 ‘중국귀환자연락회’를 조직하여 중·일의 친선을 위하여 노력했다. 그런데 피해자 허우둥어는 자신의 피해를 말하겠다는 고통스러운 결심을 한 날에도 한나절 동안 비통한 눈물만 흘렸을 뿐 차마 입을 열지 못했다. 그리고 중일수교가 맺어진 지금(1992년)은 책임을 묻는 일이 더욱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1952년 장제스 국민당 정권(타이완)은 일본과 맺은 평화조약인 「일화조약·부속의정서(日華條約·附屬議定書)」 1항에서 “일본 인민에 대하여 관대하고 우호적인 뜻을 표시하기 위하여 중화민국은 스스로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 제14조 갑항 제1항의 일본국이 제공해야 하는 용역의 이익을 포기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로부터 20년 후인 1972년 9월 29일 중국과 일본 양국 대표는 인민대회당에서 중일 수교 정상화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공동성명서 제7조는 전쟁배상 문제에 대해서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는 선언한다. 중일 양국 인민의 우호 관계를 위하여 일본국에 대한 전쟁배상 요구를 포기한다.”고 규정하였다.
이로써 엄청난 피해는 발생했지만 그로 인하여 피해를 입은 ‘개인’은 누구에게도 책임을 물을 수 없는 상황이 만들어졌다. 일본군에 의해서 자신의 존엄에 심각한 상처를 입은 피해자들은 피해가 ‘창부’라는 오욕으로 뒤바뀌어 일상생활에서도 심대한 타격을 입으며 다시 한번 깊은 상처를 입게 되었다. 거기다 그녀들을 ‘지키지’ 못했던 남성들의 자존도 깊게 상처 입어 ‘대국’ 중국의 과시에 편승하여 피해의 실태를 알면서도 봉인함으로써 피해 여성들은 존엄을 회복할 길을 오랫동안 잃어버리게 되었다.
피해 여성들 대부분은 가난하고 편벽한 시골에서 태어나 전족을 하고 있었으며, 글자도 모르고 마을에서 발생한 엄청난 폭력적 상황이 왜 생겨났는지 채 알지 못하였다. 그런 여성들이 자신의 피해에 대해서 입을 열고 이야기하기 시작하였다. 그녀들의 증언은 피해를 ‘목격’했던 딩링(丁玲)이 1941년 작품 속 주인공 전전을 통해서 만들고자 했으나 채 만들 수 없었던 피해 여성 시점의 바로 그 언어일 것이다. 그 언어가 새로운 역사를 써 내려가는 언어가 되었으면 하고 바라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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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이 (경희대학교 인문학연구원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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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이 (경희대학교 인문학연구원 연구교수)
- 글쓴이 Lee Sun-y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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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author is a historian who conducts research at the Kyunghee University Institutes of Humanities and teaches at the graduate school of education. Her recent work involves analyzing the statements of Japanese war criminals who committed violence on the battlefield. She is interested in revealing gender construction in relation to the Japanese military “Comfort Women” issue by comparing the narratives of perpetrators and the oral statements of victims. She has authored “Ding Ling: A Journey of Chinese Feminism,” co-authored “Intellectuals in Modern China” and “War and Women’s Human Rights,” and translated “The Politics of Memory Surrounding ‘Comfort Women’” and “Damage Data Collection on War Crimes/Japanese Military ‘Comfort Wome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