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일본군 성폭력 문제 방법으로 사유하기 〈2부〉 - 중국의 일본군 성폭력 피해 재현의 딜레마: 딩링(1904년~1986년)의 작품과 피해자들

Lee Sun-yi

  • 게시일2019.03.13
  • 최종수정일2023.09.21

중국의 일본군 성폭력 피해 재현의 딜레마:
딩링(1904년~1986년)의 작품과 피해자들

 

1편에서 소개한 피해자들의 증언은 허우둥어(侯冬娥, 1921년생)가 말문을 열기 시작한 1992년부터 2000년 사이에 이루어졌다. 허우둥어를 포함한 중국의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의 구술을 접하게 되면, 중일전쟁시기(1937년~1945년) 일본군이 자행한 성폭력 문제를 다룬 중국 작가 딩링(丁玲)의 작품과 작품에 대한 중국사회의 반향을 떠올리게 된다. 전쟁터의 성폭력과 재현, 그에 대한 전후 중국사회의 대응과 증언의 등장, 각 사안은 서로 연동되어있으며 그곳에 중요한 무엇인가가 함의되어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딩링은 1927년에 문단에 데뷔한 이후 1942년 정치 운동에서 비판받기까지 여성주의적 색채를 농후하게 지닌 작품을 발표한 작가이다. 딩링은 상하이(上海), 베이징(北京) 등 도회지에서 활동하다가 1936년 중국공산당 근거지인 옌안(延安)으로 간다. 딩링은 화북(華北)의 전쟁터를 돌며 다양한 경험을 하면서, 일본군의 성폭력 문제를 다룬 작품을 몇 편 썼다. 1937년 작 『재회』, 1939년과 1941년에 쓴 『새로운 신념』과 『내가 노을 마을에 있었을 때』가 바로 그 작품들이다.

 

젊은 시절의 딩링

 

새로운 신념

세 개의 작품은 딩링이 전쟁과 성을 직접적인 테마로 다룬 작품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중에서 우선 1939년 『새로운 신념』의 내용을 살펴보자. 주인공 천 할머니는 마을에 온 일본군에게 손자들과 함께 잡혀서 강간당하고 ‘경로회’로 보내져 세탁 등의 잡일을 강요당한다. 그리고 일본군들 앞에서 중국인과의 성행위를 강제당하는 등의 치욕을 경험한다. 함께 잡힌 손자는 살해되고 손녀는 강간당한 후 ‘위안부’로 어디론가 보내졌다. 천 할머니는 구사일생으로 마을로 돌아왔지만, 줄곧 혼수상태가 이어진다. 천 할머니 아들은 일본군에 의해 엄마와 고향 마을, 산시, 중국이 유린당하였다는 사실에 분노하며 사람들에게 항일을 위해 떨쳐 일어나도록 고무한다. 천 할머니는 의식이 돌아오면서 일본군이 자신에게 범한 강간을 공공연하게 드러내어 일본군의 잔혹성을 고발한다. 그리고 아들을 홍군에 보내 항일전쟁에 나설 것을 촉구한다. 한편 천 할머니의 손녀 진구는 할머니의 곁에서 강간으로 깊게 상처 입은 여성에 대한 공감과 이해를 보여주고 있다. 피해자 완아이화(万愛花, 1930년생)와 난얼푸(南二僕, 1912년생)의 양녀들은 피해 사실을 알게 된 후 엄마를 진심으로 이해하며 서로 따뜻한 교감을 나누었는데, 천 할머니와 진구의 모습과 오버랩된다.   

 

내가 노을 마을에 있었을 때

딩링은 『새로운 신념』을 발표한 지 3년이 지난 후 『내가 노을 마을에 있었을 때』를 쓴다. 이 작품은 마찬가지로 일본군의 전시 강간을 다루지만 전혀 다른 각도에서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새로운 신념』은 일본군의 ‘강간’을 유린당한 ‘민족’이라는 담론 안에서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에 굳이 분류한다면 항일전쟁을 위한 전의 고양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작품이 중국 사회에서 ‘문제’가 되는 일은 없었다. 그런데 『내가 노을 마을에 있었을 때』는 강간을 ‘치욕’이라 여기는 인식을 문제 삼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딩링은 1937년에 『재회』라는 희곡을 발표하였다. 희곡 속 주인공 지식인 여성 바이란은 일본군에게 포로로 잡힌 후 위장 투항해서 스파이가 될 것을 요청받는다. 이를 받아들인 바이란과 포로로 잡힌 옛 동료가 마주치면서 생기는 비극을 다루고 있다. 이 작품은 전쟁이라는 거대한 체제 속에서 무력한 ‘개인(여자)’이 어떻게 전쟁의 도구가 되어가는지 말하고 있다. 이 작품을 1941년에 쓴『내가 노을 마을에 있었을 때』와 함께 읽으면 『재회』에서 관념적이고 추상적이었던 문제가 더 구체적으로 나타난다.

『내가 노을 마을에 있었을 때』의 주인공 전전은 마을에 들어온 일본군들에게 강간당한 후 끌려가 일본군 장교의 ‘위안부’가 된다. 그리고 당의 요청에 따라 일본군 아래서 스파이 활동을 하게 된다. 그 후 성병에 걸려 치료를 위해 마을로 돌아온 전전에 대한 마을 사람들의 시선은 차갑고 잔인하다. 딩링은 우선, 전전을 비난하는 마을 사람들에 대한 묘사를 통해 강간을 제멋대로 행하는 일본군에 대한 분노만이 아니라 성폭력 피해를 여성의 치욕으로 삼는 일상 의식을 문제 삼는다. 둘째, 전전의 연인 샤다바오에 대해서 “동정을 나타내고 있는 사람들의 감정과는 다른 연민을 지니고 그녀의 영혼을 따뜻하게 해 줄 필요가 있다”고 느낀다. 셋째, 전전을 ‘영웅’이라고 치켜세우는 젊은이들에 대해 느끼는 위화감을 묘사한다. 본래 적의 강간으로부터 여성을 지켜야 하는 존재(혁명 측)가 국가와 민족을 위해 강간을 인내할 것을 요구한 것에 대한 불신을 드러낸 것으로 읽힌다. 마지막으로 전전이 이 모든 것에서 벗어나 자기 길을 찾아 떠나가는 것을 응원한다.

 

딩링이 만난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

딩링은 혁명 근거지에서의 경험을 쌓고 전쟁터를 돌아다니면서 피해 여성들의 현실과 직면하게 된다. 예민한 감성을 지닌 작가 딩링은 현실을 목격한 후 이 문제의 중층적인 면을 인식하게 되었을 것이다. 1편에서 소개한 6명의 구술내용은 『내가 노을 마을에 있었을 때』의 주인공 전전의 피해와 거의 겹친다. 물론 딩링이라는 작가가 피해자 전전의 삶에 현실을 함축하고, 무엇보다도 현실 세계를 향한 희망을 담았다는 차이는 있다.

전전에게 일본군의 폭력을 견디며 스파이로 복무하라고 했던 공산당원은 허우둥어의 두 번째 피해에 협력했던 공산당 촌장 리부인으로 실재했다. 그는 ‘마을을 위해서’ 일본군의 폭력을 견뎌달라고 허우둥어에게 애원한다. 류멘환(劉面換, 1927년생)은 자신의 피해를 ‘체면이 손상될까’ 차마 말하지 못하는 고통을 겪으면서 남자친구에게도 버림을 받았다. 전전의 남자친구 샤다바오는 전전에게 결혼하자고 하지만 그의 결혼하자는 말의 저변 인식과 류멘환의 남자친구 인식 사이의 거리는 그다지 멀지 않다. 완아이화는 고문과 폭력을 겪은 후 류링웨로 이름을 바꾸고 자신이 살던 마을을 떠나서 가까스로 삶을 유지한다. 그리고 1992년 일본 법정에 제소하기까지 마을로 돌아오지 않았다.

전전이 마을을 떠나 영위한 새로운 삶은 완아이화보다 덜 고통스러웠을까? 난얼푸는 일본군에게 끌려가 폭력을 당한 끝에 임신과 출산을 했다는 이유로 중국의 문화대혁명 당시 심각한 고초를 겪다가 자살했다. 허우둥어 역시 마찬가지로 정치 운동 속에서 당적을 박탈당한 충격으로 자살을 시도하였다. 류멘환도 정치투쟁에서 비판받고 자기비판을 해야 했으며 과거사로 인해 자녀들이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위안주린(袁竹林, 1922년생)과 린야진(林亞金, 1924년생) 역시도 50년대 후반 정치투쟁 속에서 비판받고 삶이 위태로운 지경에 내몰렸다. 대부분의 중국 피해자들은 일본군의 폭력이 자행된 장소가 자신들의 마을과 가까웠기 때문에 이웃 사람들이 피해 사실을 구체적으로 알고 있었다. 따라서 주위의 냉대와 멸시는 한층 더 심각하였으며, 그로 인한 심적 고통을 겪으며 살아내야 했다.

딩링은 홍군의 사기를 고양하는 ‘서북전지복무단’의 단장이 되어 전쟁터를 돌아다니면서 화북지역의 다양한 피해자들을 직간접적으로 목격했다. 거기서 『내가 노을 마을에 있었을 때』를 써서 일본군의 성폭력뿐만 아니라 중국 사회 내부의 문제를 말하였다. 그녀는 전전의 모델이 된 소녀를 만나본 적은 없지만, 전선에서 돌아온 친구로부터 이야기를 듣고 그것을 토대로 작품을 만들었다고 한다.

서북전지복무단

 

딩링은 전전의 모델이 된 인물에 대한 사회의 일상 의식에 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 바 있다.

“나는 마음속으로 그녀를 대단히 동정했다. 전쟁 중에 상당히 많은 사람이 희생자가 되었다. 그녀도 겪어서는 안 될 많은 고난을 겪었다. 운명 속의 희생자였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녀의 일을 잘 모르고 그녀를 이해하고자 하지 않았다. 이해하고자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적에게 능욕당했다고 하는 이유로 그녀를 경멸하기까지 했다. 따라서 나는 오랫동안 생각한 끝에 쓰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피해로부터 반세기가 지나 나온 피해자들의 구술 자료집을 읽다 보면 현실은 딩링의 작품 내용보다 훨씬 더 가혹했던 것 같다. 그런데 1950년대와 60년대를 거치며 ‘역사적 반혁명’이라는 딱지가 붙어 정치적으로 커다란 타격을 입었던 피해자들과 마찬가지로 딩링도 비슷한 시기에 사상 비판을 혹독하게 당한다. 1957년 반우파투쟁(反右派闘争)에서 문학평론가 저우양은 딩링이 『내가 노을 마을에 있었을 때』에서 전전을 “일본 침략자에 의해서 창부가 된 여성을 여신과 같은 존재로 미화하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다. 이 비판을 거쳐 딩링은 정치적으로 회복 불가능한 타격을 입고 춥고 헐벗은 땅으로 떠나야 했다.

 

반우파투쟁시기 딩링

 

딩링은 피해자 전전을 통해서 피해자 여성의 언어를 만들고자 했던 것이리라. 일본 정부를 최초로 제소한 허우둥어가 조사자 장솽빙과 10년간 교류하면서도 자신의 피해에 관해 차마 입을 뗄 수 없었던 상황은 많은 사실을 말해준다. 장솽빙의 끈기 있는 설득에 고통스럽게 입을 떼면서 “중일 수교가 맺어지지 않았을 때도 이 한을 풀어주고자 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는데, 국교까지 수립된 지금 가능하겠는가”라는 속내를 내비쳤다. 나는 여기서 피해 여성 시점에서 일본군의 성폭력을 말할 수 있는 ‘언어’를 만들 수 없었던 역사를 읽는다. 중국의 피해자들이 입을 열어 말하기 시작한 시기는 한국의 김학순 여사의 공식 발언이 없었다면 훨씬 더 늦추어졌을 것이다. 피해자들이 입을 열자 중국 민간에서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 노력하는 이들이 나오기 시작하였다.

나는 피해 여성들의 구술과 딩링의 꿈의 좌절을 통해서 지금 일본제국의 성폭력을 사유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가해의 구조와 일본군과 일본 국가의 책임을 묻는 일은 반드시 해야 할 일이지만 그것만이 물어져서는 근원적 해결로 연결되는 것은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그것은 아주 깊고 고통스러운 사유가 될 것이며 이 문제를 바라보는 우리 개개인의 삶을 성찰하는 일일 것이다. 거기까지 우리의 사유가 이어질 때만이 지금까지와는 다른 역사를 쓰는 일이 가능할 것이다.

 

3부에서 계속됩니다.  

글쓴이 Lee Sun-yi

The author is a historian who conducts research at the Kyunghee University Institutes of Humanities and teaches at the graduate school of education. Her recent work involves analyzing the statements of Japanese war criminals who committed violence on the battlefield. She is interested in revealing gender construction in relation to the Japanese military “Comfort Women” issue by comparing the narratives of perpetrators and the oral statements of victims. She has authored “Ding Ling: A Journey of Chinese Feminism,” co-authored “Intellectuals in Modern China” and “War and Women’s Human Rights,” and translated “The Politics of Memory Surrounding ‘Comfort Women’” and “Damage Data Collection on War Crimes/Japanese Military ‘Comfort Wom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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