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롤 글럭-김은실 대담] 민족주의를 넘어서: 현재 진행형 일본군‘위안부’ 역사와 젠더 정치

캐롤 글럭(Carol Gluck) 김은실

  • 게시일2022.08.11
  • 최종수정일2022.11.25
2022 기림의 날 특별 대담 (이 대담은 영문웹진 KYEOL에 게재된 “Beyond Nationalism: The Ongoing History of the “Comfort Women” and Gender Politics“를 국문으로 옮긴 것입니다.)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는 8월 14일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기림의 날을 맞아 역사학자 캐롤 글럭 교수와 페미니스트 인류학자 김은실 교수의 특별 대담을 마련했다. 이번 대담에서는 시민사회, 국가, 국제사회를 포함해 다양한 차원에서 전개되어온 ‘위안부’ 운동을 통해 형성된 초국적 연대의 의미를 조명해본다.

캐롤 글럭 컬럼비아대학교 역사학과 교수는 일본 근대사, 20세기 국제사, 제2차 세계대전, 역사 서술, 아시아 및 글로벌 공공기억 등을 연구해왔다. 최근 연구로는 “세계가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빚진 것(What the World Owes the Comfort Women)”(2021)과 “정치적 현재로서의 국민적 과거: 동아시아의 전쟁 기억”(2022) 등이 있다.

김은실 교수는 1995년부터 이화여자대학교 여성학과 교수로 재직했다. 여성의 신체, 섹슈얼리티, 생명권력(biopower), 한국의 국민국가 형성, 민족주의, 젠더 정치, 글로벌화에 대해 연구해왔다. 현재 식민지 시대와 냉전 시대에 발생한 여성에 대한 젠더 기반 성폭력을 연구하고 있다.

 

 

‘위안부’문제와의 만남
 

역사학자, 페미니스트 학자로서 ‘위안부’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무엇인지요?

 

김은실

1993년 미국에서 귀국했을 때 ‘한국 여성학의 전망과 과제’라는 주제로 열린 한국여성학회 창립 10주년 기념 컨퍼런스에 연사로 초청받았습니다. 컨퍼런스에서 한국 여성학이 무엇이고 어떻게 정의되고 있는지에 대한 논문을 발표했습니다. 그리고 한국 여성학을 정의하는 데 있어 민족주의 담론이 작용하고 있다고 주장했죠. 구체적인 사례로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의 첫 증언집[1]을 고찰함으로써 민족주의 담론이 ‘위안부’들의 증언을 재구성하는 데 깊게 관여하고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러한 발언은 상당히 파격적이었고 엄청난 반발을 불러 왔습니다. 이 사건으로 나에게는 민족주의를 비판하는 페미니스트라는 꼬리표가 붙게 되었어요. 그 이후로는 학계에서 페미니즘의 시각을 바탕으로 민족주의를 공격하는 한국 페미니스트 학자로 알려지게 되었고요. 페미니즘과 민족주의의 대립에 관한 담론이 일어날 때 나는 페미니즘을 옹호하는 사람으로 종종 언급되고 있지요. 

당시 사람들은 내게 “이해가 되지 않는다. 여성을 옹호하기 위해 어떻게 민족주의를 비판할 수 있는가? 국가가 없다면 여성을 어떻게 구할 수 있는가? ‘위안부’도 여성이지 않은가. 동시에 그들은 한국 사람이기도 하다. 여성을 어떻게 국가로부터 분리할 수 있는가? 여성은 한국이라는 국가의 한 부분이다.”라고 말했어요. 나는 이에 대해 “여성이 곧 국가이다. 여성은 한국 국민이다. 국가를 대표로 간주하고, 여성을 국가의 종속된 부분으로 간주해 여성의 이익이 국가의 이익에 종속되는 경우 ‘위안부’문제의 해결은 어렵다. 국가는 여성의 이익을 대변해야 한다. 여성이 국가의 이익을 위해 침묵해야 한다는 식으로 국가를 우선시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라고 답했어요. 그때가 처음으로 ‘위안부’문제를 공부하기 시작한 때였습니다. 1993년의 일이었죠. 1994년 발간한 내 논문 ‘민족 담론과 여성: 문화, 권력, 주체에 관한 비판적 읽기를 위하여’[2]는 젊은 여성 대학원생들과 연구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고 있다는 평을 들었습니다. 다수의 젊은 여성들이나 페미니스트들이 이 논문을 읽고 ‘위안부’를 페미니즘의 틀로 접근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는 말을 듣곤 했습니다.

캐롤 글럭

나는 ‘위안부’ 문제를 일본의, 그리고 일본과 아시아 국가들 사이의 전쟁 기억, 기억의 정치라는 좀 더 큰 맥락에서 접하게 되었습니다. 처음부터 내 관심사는 기억이 역사와 관련되는 방식이었어요. 내가 역사라고 알고 있던 것과 공공 기억 속에 자리잡은 것 사이에 괴리가 있었고, 이 때문에 기억이 만들어지고, 유지되고, 변화하는 과정을 연구하게 되었습니다.

‘올바른 역사’를 ‘올바른 기억’과 연결시키려는 목표를 추구하면서, 나는 세계대전이라는 전지구적 충돌에 대해 우리가 이야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제2차 세계대전에 대한 거의 모든 기억은 국경과 국가라는 틀 안에서 말해지고, 쓰여지고, 집중되어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역사적인 측면에서 봤을 때 이 점은 이해가 되지 않았지요. 그래서 나는 ‘세계를 제2차 세계대전 안에 담아두는 것’을 슬로건으로 삼았습니다. 이에 다양한 지역에서 공공 기억이 형성, 유지, 변화하는 과정을 연구했지요.

내 첫 번째 목표는 현재 사회에서 기억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이해하는 것이었어요. 개인의 기억과 집단기억은 모두 특정한 때에 형성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유지되기도 하고 변화하기도 해요. 기억이 어떻게 변했는지를 연구하면서 두 번째 목표를 규정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나는 ‘공공 기억을 바꾸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예를 들어, 강고하게 민족주의적인 내러티브들에 맞서 ‘세계’를 어떻게 제2차 세계대전 안에 담아낼 수 있는가?’, ‘역사와 기억을, 과거와 현재 및 미래를 더 바람직하게 연결지으려는 희망을 가지고 어떻게 기억형성 과정에 개입할 것인가?’라는, 점점 더 시급해지는 질문에 대한 답을 내놓고자 했어요. 이런 상황이 내가 1991년 ‘위안부’문제를 접했을 때의 맥락이었고이후에도 이러한 관점을 견지하고 있습니다.

홀로코스트와 마찬가지로 ‘위안부’는 오랜 과정을 통해 공공 기억 속에 자리 잡았습니다. 유대인 대학살은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종식된 후 유럽인들의 기억 속에서 전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아니었어요. 대부분 지역에서 이러한 상황이 바뀌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 이후였습니다. ‘위안부’는 1990년대가 되어서야 비로소 공공 기억에 눈에 띄게 자리 잡게 되었죠. 사실 감춰진 것은 없었어요. 사람들은 유대인이나 ‘위안부’를 알고 있었어요. 이들은 이미 소설이나, 연극, 시각예술에 등장하고 있었거든요. ‘위안부’의 경우 일본 의회에서 논의까지 되었어요. 문제는 알고 있느냐가 아니라, 공공 기억 속에 이들의 존재가 부재하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21세기에 접어들면서 ‘위안부’는 대학살하면 홀로코스트를 떠올리는 것처럼 여성에 대한 성폭력을 대변하는 개념으로 전 세계에 알려지게 되었죠. 

나는 처음에 ‘위안부’ 문제를 국가와 집단을 넘어서, 그리고 국가와 집단 안에서 기억이 어떻게 변하는지의 사례로  바라보았습니다. 이 주제에 접근해온 방식이 서로 다를지언정 김은실 교수님과 나는 젠더와 국가의 관계에 대한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있음을 알 수 있지요.

캐롤 글럭(왼쪽), 김은실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김은실

페미니스트 인류학자로서 나는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의 신체에 가해진 성폭력과 고통이 어떻게 표현되고 재현되는지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어떤 내용이,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 말해지고어떤 권력이 ‘위안부’ 내러티브를 통제하는가에 관심이 있었죠. 또 이들의 경험이 증언집이나 다큐멘터리를 통해 어떻게 대변되는지에도 관심이 있었어요. 1990년대, 2000년대, 그리고 현재 ‘위안부’ 생존자들의 증언 내용과, 청자/청중이 이들의 이야기를 이해하고 해석하는 방식은 변해왔습니다. ‘위안부’가 처한 상황이 시간이 지나면서 변화했다는 사실은 우리 모두 알고 있다고 생각해요.
 

세계를 여행하는 소녀상: 맥락과 위치성
 

일본군‘위안부’문제가 국가적 차원을 넘어설 수 있을까요? 세계 곳곳에 설치된 평화의 소녀상은 일본군‘위안부’문제가 초국적인 문제임을 보여주는데요. 이런 점에서 평화의 소녀상이 세계 여러 지역에 건립된 것을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김은실

평화의 소녀상은 한국의 ‘위안부’들이 겪었던 강압적 성폭력과 고난을 상징합니다. 소녀상은 두 가지 측면을 대변하고 있어요. 하나는 전쟁 시 여성이 겪어야 했던 성폭력과 강간이 보편적이고 일반적이었다는 측면을 상징합니다. 다른 하나는 식민지 지배 하에 있던 한국의 순진무구한 소녀들이 일본군 위안소로 끌려가 ‘위안부’가 되었다는 한국의 특수한 맥락을 살펴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국에서 소녀상이 만들어졌을 때 순진한 소녀들이 취직을 시켜준다는 거짓말에 속아 사기를 당하고 강제 연행되어 위안소로 끌려갔다는 이야기에 중점을 두면서 한국 ‘위안부’ 피해자들이 겪었던 강제 연행과 피해를 대변하는 데 강하게 초점이 맞춰졌습니다. 이것은 강력한 이미지이자 메시지였습니다. 하지만 소녀상은 일본군 위안소로 강제로 끌려간 다양한 여성들의 경험과 이야기를 침묵시켜버리는 상징이라는 비판이 일었어요. 소녀상의 이미지가 특정 여성들만이 ‘위안부’ 피해자에 해당한다고 각인시킬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나도 처음에는 소녀상에 대해 비판적이었습니다. ‘위안부’ 피해자를 특정한 방식으로 재현하고 국한시킬 수도 있기 때문이었죠.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소녀상이 일본군‘위안부’들이 겪은 다양한 경험을 모두 대변할 필요는 없고 전쟁에 동원되어 성폭력을 겪었던 여성들을 대변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소녀상이 전시 여성폭력과 그들의 고통을 재현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재현이 처음에 특정한 의도를 가지고 이루어졌다고 해서 항상 모두에게 동일한 의미를 갖는 것은 아니잖아요. 그 의미는 소녀상이 대변하는 표상이 어느 시대, 어느 장소에서 누구와 조우하는가에 따라 달라질 거예요.

세계 곳곳에 소녀상이 설치되면서 많은 논란이 불거질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에서 다른 나라로 소녀상을 보내는 것은 일본 정부가 일제강점기의 ‘위안부’ 문제를 인정하지 않고 사죄하지 않는 것을 비판하려는 측면이 강합니다. 여기서 한국의 민족주의가 강하게 시사돼요. 평화의 소녀상이 설치된 글렌데일, 샌프란시스코, 베를린의 경우 현지 사람들에게 소녀상이 전달하는 의미는 한국인들에게 전달되는 의미와 같지 않습니다. 소녀상이 주는 메시지는 그 지역의 사람들, 역사와 만날 때 만들어지는 것이죠.
 

캐롤 글럭

하나의 동상에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는 것 같습니다. 먼저 소녀상이 무엇을 상징하고 있는지에 대한 질문인데, ‘위안부’를 순진한 소녀에 국한시키는 것은 확실히 환원적인 관점입니다. 한편, 베를린의 경우 소녀상이 일반적인 성폭력을 대변하기 때문에 소녀상 본래의 의미를 잃고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 같아요. 아마도 소녀상의 의미가 축소되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시간과 장소를 불문하고 소녀상이 지속적인 의미를 전달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는 것 같습니다.

소녀상이 상징하는 순수성에 대한 비판은 가부장제와 순결을 강조하는 한국적 맥락에서는 이해될 수 있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비슷한 동상이 베를린 미테(Mitte)에 설치되면 그 맥락은 달라집니다. 방문객은 한국에서 그 동상이 갖는 의미를 모를뿐더러 같은 관점으로 그 동상을 바라보지도 않을 거예요. 상징성 자체가 캘리포니아나 베를린에서 같을 수가 없어요.

이 점은 의미가 환원되고 쉽게 변하는 경향이 있는 기념물이나 기념비 일반에 적용됩니다. 하지만 동상이 여러 곳에 설치되는 경우 환원되거나 의미를 띠는 방식은 다를 수 있어요. 베를린 미테의 경우 소녀상은 한국의 순진한 소녀라기보다는 전 세계 어디에서나 일어날 수 있는 여성 성노예, 전시 강간, 성폭력의 상징으로 인식돼요. 미테의 소녀상은 최근 들어 아시아계 이민자들 사이에서 자신들의 커뮤니티를 강화하기 위한 모임의 장소가 되었고, 이는 평화의 소녀상에 또 다른 의미를 부여해 주고 있습니다.
 

김은실 

평화의 소녀상이 상징성을 띠는 것은 확실합니다. 소녀상은 하나의 상징으로서 전시 성폭력의 피해를 대변해요. 인종적으로 소녀상은은 백인 주도 사회에서의 아시아 여성을 나타냅니다. 이런 점에서 서구사회의 경우 소녀상이 설치된 장소는 디아스포라, 이민자, 소수인종이 모이는 만남의 장소로서 비서구권과 아시아에서 온 사람들, ‘위안부’의 역사를 꼭 알지는 못하지만 현재 어려운 삶을 이어나가는 사람들을 대변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글럭 교수님께서 기억과 공공 기억이 변하는 과정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세월이 흐르면서 공공 기억이 변하는 과정을 직접 보면서 해외에 동상을 건립하는 것을 꼭 부정적으로 볼 필요는 없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다이나믹스가 초국적 차원에서 흥미롭게 생각되었습니다. 동시에 소녀상의 역사도 이러한 맥락에서 재위치되고, 수정되며, 변형되고 있지요.
 

캐롤 글럭

‘위안부’ 문제를 논할 때 다민족 정치에 방점이 찍히는 미국과는 달리, 독일의 경우 소녀상은 이민자들과 더 연계되는 것 같습니다. 또는 캘리포니아 글렌데일 평화의 소녀상 설치를 지지했던 아르메니아계 미국인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잊혀졌던 과거의 공포와 관련되어 있을 수도 있어요. 각각의 사례마다 맥락은 다르고 그것은 중요하죠. 

일본 정부가 한 몫을 한 것도 인정해주어야 합니다. 일본 정부가 세계 곳곳에 소녀상이 건립될 때마다 매번 요란스럽게 항의하지 않았다면 ‘위안부’는 지금보다 덜 알려졌을 것이고 조직적인 성 노예제가 갖는 상징적 의미가 전 세계인들에게 효과적으로 전달되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죠. 그런 점에서 일본 정부는 ‘위안부’ 운동에 도움을 주었어요. 일본 정부가 어느 한 지역에 설치될 소녀상에 반대할 때마다 또 다른 소녀상이 다른 곳에 세워지고 있기 때문이죠. 이것은 완벽한 기념비 ‘건립’ 정치예요. 

소녀상이 설치되는 위치 또한 중요합니다. 베를린의 도심이든 글렌데일의 교외든 애틀랜타 외곽의 공원이든 그 지역성을 반영하기 때문이에요. 이렇게 다양한 기념물에 결부된 의미 또한 시간이 지나면서 변합니다. 한 세대에게 의미 있었던 기념비나 동상이 50년이 지난 후에는 후손들이 빨래를 널어놓는 물건이 될 수도 있습니다. 평화의 소녀상이 시간과 장소를 넘어 ‘위안부’에 대한 기억을 전달하는 주요 매개체가 아니라 일부분일 뿐이라는 사실은 어쩌면 좋은 일인지도 몰라요.

여성 연대의 물결 4 ⓒ백정미

 
 

베를린에 설치된 소녀상과 관련한 비판도 있습니다. 독일 사회가 제2차 세계대전 말에 발생한 전시 성폭력, 특히 소련군이 자행한 독일 시민 강간 사실에 대해 오랜 시간 침묵해왔다는 비판이 그것이죠.

 

김은실

어느 전쟁에서나 여성을 대상으로 한 성폭력은 다양한 형태로 존재합니다. 하지만 전쟁 관련 역사와 연구에서조차도 지금까지 성폭력은 다뤄지지 않았어요. ‘위안부’문제는 독일 페미니스트 학자들이 제2차 세계대전 말에 일어난 성폭력 문제를 제기하고 조사하게 만든 중요한 촉매제였습니다. 베를린 소녀상을 둘러싼 논쟁과 논란이 있었지만, 논란 당시 독일의 전시 성폭력 문제는 함께 논의되지 않았어요. 평화의 소녀상은 일본과 한국 사이의 문제, 특히 약자로서 식민지 한국의 여성이 처했던 문제였죠.

일반화할 수는 없겠지만 아시아 여성의 문제가 서구권이나 일본에서 다뤄지는 경우 여성의 문제가 ‘비서구권’ 또는 ‘아시아’의 문제가 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여기에 문제가 좀 있다고 느껴지는데, 특히 젠더를 자신들의 문제가 아닌 것처럼 외주화(아웃소싱)하는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독일의 성폭력 문제는 한국의 ‘위안부’ 문제를 다룰 때 함께 다뤄지지 않는 것 같습니다. 때로는 독일인들이 자국보다 덜 ‘발전한’ 나라들의 문제를 자신들의 문제와 함께 논의하는 것이 쉽지 않아 보입니다. 아시아나 아프리카의 젠더 관련 문제들을 독일인들 자신의 문제와 동일하게 보지 않는 게 아닐까 반문하게 됩니다. 
 

캐롤 글럭

동의합니다. 국제적인 또는 초국가적인 관점에서 봤을 때 사실이에요. 예를 들어 미국의 인종주의를 비판하는 것이 자기 사회의 인종차별을 대면하는 것보다 편합니다. 이렇게 국가중심적인 근시안은 새로운 것이 아니에요. 이런 시각은 다른 나라에 대한 지식이나 이해의 부족에서 기인합니다. 또한 고정관념에도 영향을 받죠.

그런 점에서 “유리로 된 집에 사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에게 돌을 던져서는 안 된다(*편집자 주: 비난받을 여지가 많은 사람은 남을 비난해서는 안된다는 의미)”는 오래된 격언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군요. 독일 학자들과 기억 운동가들이 독일이 겪은 붉은 군대(Red Army)에 의한 전시 강간을 외주화하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소련군이 자행한 강간 사건의 대부분이 발생했던 구 동독에서 이 문제가 정치적으로 금기시된 것은 사실이에요. 이탈리아 남부, 프랑스 및 다른 국가의 여성들처럼 많은 독일 여성들이 오랜 세월 이에 대해 침묵해왔다는 것 또한 사실이고요. 하지만 이 주제는 이제 독일의 공공 기억의 일부분이 됨과 동시에, 학계의 연구(다른 연합군들에 의해 자행된 성폭력을 다룬 미리암 게브하르트 저 <무언의 범죄(Crimes Unspoken)> 참조) 뿐만 아니라 뒤늦게나마 피해자들을 인정하고자 하는 측면에서도 지속적인 노력이 이뤄지고 있어요.

한국의 일부 운동가들은 ‘위안부’에만 지나치게 초점을 맞춘 나머지 보편적이라고 할 수 있는 전시 성폭력 경험을 ‘내주화(인소싱)’하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각각의 맥락은 달랐어요. 1945년의 베를린은 1944년의 이탈리아 남부나 1970년대 아르헨티나의 ‘더러운 전쟁’(Dirty War), 1990년대 보스니아나 르완다와는 다릅니다. 하지만 전시 성폭력이 어디에서 발생하든지 간에 그것은 참담하게도 똑같아요. 일본의 ‘위안부 제도’만큼 광범위하고 잔혹하지는 않았더라도 군 매춘소 또한 드물지 않았습니다. 물론 일본이 점령한 여러 아시아 국가 출신의 ‘위안부’는 수십만 명이었죠. 이는 단순히 한국만의 문제나 기억이 아니에요. 
 

김은실

‘외주화’가 여기서는 적절한 단어가 아닐 수도 있겠네요. 하지만 젠더 문제가 항상 어떻게 전치되는지에 대해 조금은 비판적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외주화’라는 말을 썼어요.

글럭 교수님께서 한국의 일부 활동가들이 보편적이라고 할 수 있는 전시 성폭력 경험을 ‘위안부’에 초점을 맞춰 ‘내주화’하고 있다고 말씀하셨는데, 흥미롭고 통찰력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한국 학자들이 전 세계 다른 사례들을 깊이 있게 탐구하지 못하고, 전지구적으로 발생하는 전시 또는 분쟁 시 성폭력 문제 해결에 연대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은 지적되어야 합니다. 분쟁 중 발생한 성폭력 문제를 제기했던 많은 사회가 한국의 일본군‘위안부’ 운동에 영향을 받았지만, 한국의 ‘위안부’ 운동은 전 세계의 다른 사례들과 접점을 만들고 연구한 경험이 많지 않습니다.
 

캐롤 글럭

서로 다른 맥락에 놓여 있는 상황에서 다른 고민을 가진 사람들이 함께 모여 동일한 것에 대해 말할 때, 마법과도 같은 일이 일어나죠. ‘위안부’라는 말이 어떻게 ‘성노예’가 되었는지를 그 예로 들 수 있어요. ‘성노예’는 1990년대 국제변호사들과 페미니스트들이 보고서에서 강조의 뜻으로 썼던 용어입니다. 지금은 물론 그 단어가 폭넓게 사용되고 있고 일본 정부가 극렬히 반대하는 바람에 오히려 이 단어의 사용이 더욱 확고해지기도 했어요.

 

미래의 ‘위안부’ 기억과 행위자로서의 여성

 

캐롤 글럭

나는 이 글을 읽으실 많은 분처럼 활동가는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는 ‘위안부’ 제도가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 되고 다시는 반복되어서도 안 되는 성노예 제도였다는 것에 공감하고 있어요. 내 요점은 이러합니다. 나는 ‘위안부’에 대한 기억이 세계에 영향을 주었으면 좋겠어요. ‘위안부’에 대한 기억이 현재와 미래의 여성들에게 변화를 가져다주기를 바랍니다. ‘위안부’ 여성들이 겪었던 일을 기억함으로써 그러한 종류의 제도와 성착취 및 성폭력이 덜 빈번하게 일어나고, 그것들을 더욱 범죄적인 일로 만드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나는 공공 기억을 도구적으로 이용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기억이 일을 해주었으면 해요. 피해자들을 위해 무언가를 해주고, 피해자들이 세상을 떠난 뒤에는 더 많은 일을 해주고, 미래 여성들을 위해서도 무언가를 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다른 점에서는 의견이 다를 수도 있는 사람들과 국경을 넘어 서로 연결되고,  협업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피해자들이 목소리를 내어 자신의 사연을 들려주고, 공공 기억에 그것이 담겨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고 용기 있는 행동입니다. 하지만 증언 자체로는 절대 충분하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피해자들의 경험을 공공 기억으로 가져오고 효과를 발휘하도록 만드는 다른 행위자들이 필요합니다. 1991년부터 지금까지 ‘위안부’ 문제에서 바로 그런 양상이 보였습니다. 행위자로서의 여성에 대해 마지막으로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여성은 근대 세계의 거의 모든 사회에서 억눌려왔고 억압받아왔어요. 안타깝지만 그것이 사실이에요. 하지만 여성은 또한 행위자이고 항상 행동하고 있습니다. 페미니즘은 이들이 취하는 행동 중 하나이자, 변화를 가져오는 데 도움이 된 것들 중 하나이죠. 하지만 (남성을 포함한) 다수의 다른 행위자들의 목소리와 시각도 도움이 되었어요. ‘위안부’ 문제가 이러한 예입니다. 기꺼이 목소리를 내고자 하는 피해 당사자들뿐만 아니라 이들을 위해 일하는 기억 활동가들과 지원자들을 통해서도 잘 드러나지요.
 

김은실

글럭 교수님께 멋진 생각을 배웠습니다. 그런데 그 ‘행위자들’에 대해 여쭤보고 싶은 것이 있어요. 본인이 피해 당사자는 아니지만 피해자를 위해 일하고 있는 활동가들이 많습니다. 현재 그 행위자들을 둘러싼 다양한 목소리와 갈등이 있는데요. 이러한 경우, 우리는 모두 ‘피해자의 목소리’에 대해 말합니다. ‘위안부’문제를 둘러싸고 행위자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경합과 긴장감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이용수, The Moral Witness ©Cornell University Press

 

캐롤 글럭

이용수 님의 사례가 여러 가지 면에서 흥미롭다고 생각해요. 그가 최근에 개입한 배경에는 맥락이 있습니다. 부분적으로는 한국의 대표적인 지원 단체와 관련된 사태(‘정의연 사태’)가 있고, 부분적으로는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를 포함한 여러 변화로부터 기인한 것이죠. 비록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이전의 ‘위안부’ 피해자들이 수년에 걸쳐 행동한 것을 보면, 이용수 님 혼자만 거침없는 것은 확실히 아닙니다. 그가 최근에 취한 행동은 그 자신의 완강함, 지원 단체 관련 사태, 변화하는 시대와 맞물려 촉발된 것이에요. 

활동가들끼리 서로 싸우는 양상에 대해서는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싸움을 통해 ‘위안부’ 문제가 더 역동성을 갖게 된다면 더 낫다는 입장입니다. 캐롤린 딘(Carolyn Dean)은 홀로코스트 기억에 관한 글을 쓰면서 그가 ‘지구적 피해자’라고 부르는 사람들을 대신해 발화하는 사람들을 ‘도덕적 증인(moral witnesses)’이라고 정의했고, 때로는 사람들이 활동가들의 목소리만 듣는다고 했어요(『The Moral Witness』, Cornell University Press, 2019). 캐롤린 딘은 활동가들이 증인을 대신해 증인으로서 행동하기 시작할 때 문제가 발생한다고 말해요. 그렇다면 모든 활동가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게 되겠죠.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왜 하고 있는가, 누구를 위해 하고 있는가, 우리가 하는 일에서 얻고자 하는 개인적인 이득은 무엇이며 개인적으로 그 일과 어떤 관련이 있는가’하는 질문들 말이에요. 운동, 즉, 액티비즘이 항상 열린 마음으로 좋은 의도를 갖고 특정한 입장 없이 취하는 행동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에요. 우리는 모두 맥락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용수 님은 아직 살아계시고 목소리를 내고자 하는 결연한 의지를 갖고 계세요. 하지만 10년 뒤면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이 세상을 떠나시겠죠. 그런데 우리는 여전히 ‘위안부’ 기억에 대해, 대신 목소리를 높이는 지원가와 활동가를 둘러싼 문제를 안고 있어요. 우리의 동기가 무엇인지 자문해야 해요. 이것은 정직성, 지성적이고 정치적인 정직성에 관한 문제입니다. 저는 이것이 진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성차별과 전시 성폭력을 논할 때, 분단으로 인해 심하게 군사화된 한국만의 고유한 상황을 고려하게 됩니다. 군사와 안보에 우선순위를 두면서 한국의 가부장적인 사회구조가 형성되었는데요. 글럭 교수님은 제2차 세계대전을 연구하면서 일본군 성노예 연구에 관심을 두게 되셨고 또 전후 일본사 연구의 권위자이시기도 하시죠. 군사화된 상황, 가부장적인 사회구조, 성차별 사이의 관계성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캐롤 글럭 

한국뿐만 아니라 세계 다른 지역에서도 제2차 세계대전은 1945년에 종식되지 않았어요. 영토분할과 상실, 강제 인민 교환, 반식민주의 투쟁 등은 모두 수년간, 수십 년간 몇몇 지역에서 계속되었어요. 이런 점에서 동아시아와 동유럽은 유사해요. 두 지역 모두 냉전이 종식된 후 전쟁 기억으로 돌아가 과거를 새롭게 대면했고, 이는 대개 민족주의적 측면에서 이뤄졌죠. 한국이 고도로 군사화되고 남성중심적인 유일한 지역은 아니라는 점 또한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전쟁 기억의 정치는 오늘날 동아시아에서만큼이나 동유럽에서도 활발히 다뤄지고 있습니다. 두 지역 모두 국가 내에서, 그러나 무엇보다 국가 간에 이러한 정치가 이뤄지고 있습니다. 역사를 이데올로기적 도구이자 정치적 무기처럼 휘두르고 있는 부정론자, 남성주의자, 지도자들 모두 이 두 지역에 존재하고 있고 이 점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사태에서 더욱 극명하게 나타났어요. 눈에 띄게 대조적인 사실 하나는 ‘위안부’ 운동 때문에 소위 ‘여성 문제’라는 것이 다른 지역보다 한국에서 대중적으로 더 크게 부각되었다는 점입니다. 이런 점에서 누군가는 한국의 ‘위안부’ 문제가 특수하다고 말할지 모르겠지만 나는 이것이 특정 민족의 역사로 인한 결과라고 보지는 않습니다.
 

국가 차원에서, 초국가적인 차원에서 일본군‘위안부’ 역사를 가지고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김은실

국가 차원에서는 여성에게 가해지는 성폭력을 둘러싼 개념과 사회적 제도가 한국 사회에서 변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평화시 성폭력과 싸우기 위해서는 남성 중심 성 규범과 관행을 바꿔야 합니다. 평화시와 전시의 성폭력은 서로 관련되어 있고 연결되어 있어요. 따라서 젊은 여성들 중심으로 시작된 미투 운동은 사회에 만연한 성폭력에 대해 다시 깊게 생각해보고 멈출 수 있는 중요한 실천이에요. 남성 중심의 섹슈얼리티나 욕망의 구조로 도배된 관행이 평화시에 바뀌지 않는다면 전시에 여성을 상대로 한 성폭력을 멈추기는 어려워요. 젊은 여성들이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과 스스로를 연루시킨 한국의 미투 운동은 매우 중요합니다. 성폭력을 문제화한 미투 운동과 성폭력 피해자들과의 연대를 바탕으로 한 위드유 운동은 평화시의 성폭력과 전시의 ‘위안부’ 문제를 함께 연결시키는 중요한 정치적 운동이죠. 저는 이것이 긍정의 윤리학을 실천하는 방식이 될 수 있다고 믿어요. 초국가적인 차원을 말하자면, 글럭 교수님이 말씀했던 것처럼 일본군 성노예 문제가 어디에서나 똑같은 기억을 소환해내는 것은 아니에요. 서로 맥락이 다르기 때문이죠. 또한 초국가적인 ‘위안부’ 운동을 통해 조금 더 많은 사람이 일본군 성노예 문제에 관심을 가질 수 있다면, 평화시의 성폭력 문제가 더 크게 논의되는데 기여할 수 있다고 봅니다. 이러한 변화들을 서로 연결시키면시켜 더욱 의미 있는 대의를 성취할 수 있을 겁니다.

2022 기림의 날을 맞아 마련한 역사학자 캐롤 글럭 교수와 페미니스트 인류학자 김은실 교수의 특별 대담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캐롤 글럭

김은실 교수님의 말에 모두 동의하며, 두 가지만 강조하고 싶습니다. 먼저 전시 성폭력은 만연한 가정폭력과 일상 속의 모든 형태의 여성 폭력을 포함해 여성에 대한 성적 폭력이라는 연속성의 한 극단일 뿐이라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위안부’에 대한 기억이 이 세계에서 할 수 있는 일은,여성 권리의 침해를 연속성이라는 측면에서 사고하고, 분쟁과 전쟁이라는 극단적인 상황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그러한 침해에 맞서 싸울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에요. 다시 말해 인신매매, 가정폭력, 그리고 김은실 교수님이 말씀하신 미투 운동 등이 그 예이죠. 직장에서의 성희롱은 여성이 아주 젊었을 때부터 겪을 수 있는 일례이고, 나이가 들어가면서 이러한 성적 괴롭힘은 극도로 폭력적이거나 생명을 위협할 수도 있습니다. 
 
두 번째로 우리가 초국적으로 연결되기 위해 더 노력하고 공통 기반을 찾기 위해 애써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공통 기반이라고 해서 의견이 일치해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고자 하는 일의 목표가 무엇인가, 우리가 함께 노력해 개선하고자 하는 공통기반은 무엇인가를 묻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물론 국가적, 지역적으로 특수한 맥락을 고려하여 행동해야 하지만 단결된 초국적인 협업은 상당한 가능성을 갖고 있어요. ‘위안부’ 문제가 매우 강력한 대의이기 때문인 연유도 크죠. 아시아에서 ‘위안부’ 연대 컨퍼런스를 개최하는 것뿐만 아니라 초국가적으로 한 자리에 모여 ‘이 기억으로 이제 무엇을 할 수 있을까?’라는 공동의 질문을 던져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21세기의 두 번째 분기점이 곧 시작됩니다. 이제 함께 노력해야 할 때예요. 효과적인 초국적 운동, 즉 액티비즘은 미래 정책에 영향을 미칠 수도 있고 ‘위안부’에 대한 기억과 과거 이들의 고통을 기릴 수도 있는 기회를 가져다준다고 생각합니다.

 

각주

  1. ^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군위안부들』,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한울, 1993.
  2. ^ 김은실, "민족 담론과 여성 - 문화, 권력, 주체에 관한 비판적 읽기를 위하여", 『한국여성학』 제10집, 1994, pp. 18-52. 

 

연결되는 글

글쓴이 캐롤 글럭(Carol Gluck)

캐롤 글럭은 콜롬비아대학교 역사학과 교수이다. 일본 근대사, 20세기 국제사, 제2차 세계대전, 역사 서술, 아시아 및 글로벌 공공기억 등을 연구해 왔다. 최근 저서로는 『세계가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빚진 것(What the World Owes the Comfort Women)』(2021)과 『정치적 현재로서의 국민적 과거: 동아시아의 전쟁 기억』(2022) 등이 있다.

글쓴이 김은실

이화여자대학교 여성학과 교수이자 사회과학대학 학장이며, 한국여성연구원의 원장으로 재임 중이다. 1995년부터 아시아의 페미니스트 학자들의 지적 공동체를 발전시키는 일에 참여해 왔으며, 여성의 신체, 섹슈얼리티, 모더니티, 민족주의의 젠더 정치, 전쟁과 젠더, 페미니스트 지식 생산 및 포스트-개발 이슈에 대해 연구해왔다. 2016-2019년에는 아시아여성학회(AAWS) 회장을, 2012-2013년에는 한국여성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2005년에는 한국에서 열린 세계여성학회의 사무총장을 지냈다. ‘민족담론과 여성’, ‘한국근대화사업의 문화논리와 젠더정치학’, ‘제1공화국 건국기의 공론장 형성과 젠더정치학’, ‘제주 4.3 홀어멍의 ‘말하기’와 몸의 정치’ 등 다수의 논문과 『여성의 몸, 몸의 문화정치학』(2001)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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