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양국의 시민들과 함께 ‘위안부’문제에 관한 공동연구를!

하나후사 도시오

  • 게시일2022.08.12
  • 최종수정일2022.11.28
 

2022년 기림의 날 특집: 현재진행형 ‘위안부’ 역사와 공존을 향한 연대

1991년 8월 14일, 대한민국 생존자 최초로 김학순 님이 공개 증언하고 30여 년이 흘렀습니다. 한 세대의 통념적 주기가 지난 지금, 일본군‘위안부’ 역사는 전시 성폭력과 여성 인권 침해를 상징하는 초국적 참조점이 된 동시에, 여전히 ‘현재의 문제’로 남아 있습니다. 웹진 결은 세계 일본군‘위안부’ 기림일 11주년인 2022년을 맞아, 경계를 넘어 ‘위안부’ 역사를 확장해 나가고 있는 다양한 행위자들을 조명합니다.       

‘위안부’ 피해자 지원 활동을 해온 한국과 일본의 시민들, 미투(Me Too)와 위드유(With You)로 성폭력과 여성혐오에 맞선 젊은 여성들, 대학과 연구기관에서 비판적 담론을 생산하고 후속세대를 교육하는 연구자들, 전쟁과 제노사이드, 이민자와 소수자 차별에 반대하는 해외 디아스포라 커뮤니티에 이르기까지, 각자의 자리에서 ‘위안부’ 역사의 교훈과 함께 더 나은 세계를 만들기 위해 분투하는 사람들을 만나보시죠.   

 

 

들어가며


1990년대 초기 일본에 사죄와 배상을 요구하는 ‘위안부’(이하 ‘’생략)재판이 일본에서 총 8건 시작되었습니다. 그 내용은 한국인 2건, 재일한국인 1건, 중국인 2건, 대만인 1건, 필리핀인 1건, 네덜란드 1건입니다. 관부재판의 특징은 피고 일본국의 수도 도쿄가 아니라 야마구치현 시모노세키시에 있는 재판소에 제소되었다는 점과 원고 10명 중 위안부 원고는 3명, 그 외는 여자근로정신대였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유일하게 1심 재판에서 위안부 원고가 승소하여 사회적으로 커다란 반향을 일으킨 재판이라는 점입니다.

부산 정대협(고 김문숙 회장)에 신고한 위안부 피해자와 여자근로정신대피해자 각각 두 분이 1992년 12월에 야마구치재판소 시모노세키지부에 일본 정부를 상대로 “국회와 유엔에서 공식사죄와 배상”을 요구하며 제소하였습니다. 후쿠오카에 피해자분들을 모시고 재판지원을 준비하고 있던 우리 회원 10여명이 직접 요리를 만들어 나누면서 환영회를 열었습니다. 원고의 한 분이셨던 박두리 님은 “일본인은 모두 악마라고 생각했는데 어째서 이렇게 친절하게 해주는 거냐”고 말씀하시며 울음을 터뜨리셨습니다. 지원모임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요동치게 했던 만남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 후 진행된 추가 제소에서는 위안부 원고 3명, 여자근로정신대 원고 7명으로 늘어났습니다. 원고들이 관부(関釜) 페리 연락선을 타고 와서 재판에 참여한다는 뜻에서 통칭 ‘관부재판’이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지원모임의 연회비 3,000엔과 후원금은, 원고들의 재판을 위한 연 4회 도항비, 체류비, 관부재판 뉴스레터 발행비용 등으로 썼습니다. 원고 분들은 우리 집과 교회에서 숙박하고 지원모임 회원들과의 식사 모임과 교류회를 통하여 점차 친분과 신뢰를 쌓아갔습니다. 방청석을 가득 채운 지원자들이 경애의 마음으로 지켜보는 가운데, 원고들은 재판에서 일본국 대리인에게 피해를 호소하고 규탄하였습니다. 사죄와 배상을 요구하는 과정에서 자존감을 회복하시며, 재판을 이유로 일본을 방문하는 것을 즐거워하시게 되었습니다. 

1998년 4월 27일 시모노세키 판결이 나왔습니다. 위안부 피해자들의 가혹한 피해가 받아들여져 승소하였습니다. 일본정부에 피해자를 구제하기 위한 입법조치를 명하는 획기적인 판결이었습니다. 안타깝게도 여자근로정신대 원고는 “위안부 원고에 비해 피해가 가볍다”는 이유로 패소하였습니다.

그 후, 원고와 피고 모두 상급 법원에 항소하였습니다. 히로시마고등재판소의 재판관은 국가에 ‘위안부’ 이슈와 관련하여 이견을 말할 수 있는 줏대 있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2심은 2001년 3월에 패소하였으며, 2003년 3월 최고재판소에서 상고 기각되었습니다.

여성 연대의 물결 1 ⓒ백정미

 

여자근로 정신대와 위안부의 혼동


2021년 1월과 4월에 서울에서 위안부 피해자들이 제소한 재판의 판결이 나왔습니다. 판결문의 “위안부 모집”항목에 “학교 등을 통해서 모집하는 방식”, “근로정신대 *** 동원 방식”이라고 적혀져 있습니다. 재판소에 제출한 역사 인식과 관련한 내용은 정대협(정의연)이 작성하였다고 들었습니다. 이용수 님은 2020년 5월 두 차례에 걸쳐 정대협의 윤미향 님을 향한 기자회견을 열어 위안부와 여자근로정신대는 다르다고 비판했습니다. 이용수 님은 관부재판, 히로시마 고등재판소 재판 지원 모임에 여러 차례 참가하셨습니다.

당시 교류회에 참석한 근로정신대 원고 한 분이 “해방 후, 정신대인데 위안부라고 잘못 알려져서 부끄러웠다”고 발언한 적이 있습니다. 이용수님은 “나는 부끄럽지 않다. 부끄러운 것은 위안부 제도를 만든 일본정부다”라고 말씀하시며 격노하셔서 발언자가 사죄하기도 하였습니다. 이용수 님은 근로정신대 피해자들 가운데 위안부라고 여겨져 가정폭력이나 이혼을 당하고 혼자서 아이를 키우고 고생하며 산 경우가 있음을 알게 되셨습니다. 저는 그 때문에 2020년 회견에서 이용수 님이 근로정신대와 위안부를 혼동한 정대협을 비판하신 것으로 이해합니다.

여자근로정신대는 초등학교 6학년 혹은 졸업 후 1~2년 정도가 되는 소녀들이 1944~45년에 걸쳐 담임 선생님에게 “너는 애국을 위해 일본 공장에 가서 일해라, 일하면서 여학교에 다닐 수 있고 돈도 많이 벌 수 있다”라고 권유받아 지원하였습니다. 도야마현 후지고시 공장에 1,060명, 나고야 미쯔비시 비행기 공장에 300명, 시즈오카현 도쿄아사이토 공장에 300명이 동원되었습니다. 그녀들은 남성 노동자가 군대에 간 사이 빈 자리로 남아있던 선반공 등의 중노동을 감당하였습니다. 식사량도 적고, 학교에 다니지도 못하고, 밤에는 미군 공습에 위협당하는 가혹한 나날들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완전히 속아 월급도 받지 못한 채 결국 야윈 얼굴로 부모 곁으로 돌아왔던 것입니다. 그녀들은 사기와 강제 노동에 대해 사죄하라, 급료를 돌려달라는 너무나 당연한 요구를 하면서 재판에 임했습니다. 

 

<관부재판> 한국어판 출판 계기와 영화 <허스토리>에 대한 문제의식

 
2018년 한국에서 관부재판을 주제로 그린 영화 <허스토리>(민규동, 2018)가 제작되었습니다. 지인이 보내준 DVD를 보고, 그 내용에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여자근로정신대 박OO님(익명)이 일터에서 위안부로 여겨졌고, 원고들이 재판 때 일본에 방문하면 돌멩이가 날아들었으며, 재판에 우익이 몰려들어 더러운 욕설을 퍼붓고, 숙박했던 여관에서 차별받는 등 사실과는 전혀 다른 내용 일색이었기 때문입니다.

영화는 일본사회가 위안부 차별로 만연해 있는 듯이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90년대 당시 일본사회는 외국인 전쟁피해자에게 호의적이었고, 60건 이상의 전후 보상재판에는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지원 모임을 만들고, 변호사들은 무보수로 자원하여 일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근로정신대와 위안부를 동일시하며 일본 사회를 향한 편견을 조장하는 내용을 방치할 수 없어서 감독에게 항의문을 보냈더니 감독과 프로듀서가 후쿠오카를 방문하였습니다. 감독은 “여자근로 정신대에서 위안부가 되었다는 내용이 담긴 증언집이 한국에서 출판되었다”고 해명했습니다.

여자근로정신대 세 분의 증언이 있다는 것을 일본에서도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들은 후지코시 공장실태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실상과 다른 내용이 책에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떤 증언집에는 “공장이 공습으로 불에 타고 일이 없어지고, 회사로부터 아오모리현에 있는 일본군 위안소에 30명 가량 보내졌다”는 내용도 있는데, 후지코시 공장에 공습피해는 없었고 패전을 맞을 때까지 가동되고 있었습니다. 몇몇 다른 부분도 저희가 아는 내용과 차이가 있었습니다. 

한국에서 위안부 피해자에 국한하여 생활 지원을 하는 점, 근로정신대 피해자의 고통을 도외시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이야기하자 감독은 당황하며 “근로정신대와 위안부는 다르다”라는 자막을 영화의 첫 장면에 넣겠다고 답하고 돌아갔습니다.

『관부재판』 ©도토리숲

 

2015 한일 위안부 합의 이후 한국사회에서 반일 감정을 그리는 영화가 잇달아 제작되는 것에 위기감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관부재판 내용과 일본사회의 실상을 전달하고 싶어 『관부재판』 한국어판(2021, 도토리숲 출판)을 냈습니다. 저는 소녀상이 근로정신대의 소녀를 모델로 한 것은 아닐까 우려하고 있습니다. 단발머리를 하고 있는 의연한 모습의 소녀상은 13세부터 15세 때 동원된 여자근로정신대의 분위기와 닮아있습니다. 위안부로 동원된 농촌의 가난한 소녀, 세 갈래로 머리를 땋은 그녀들과는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한국과 일본 사회에서 위안부 문제 역사인식의 공동연구를!


위안부 문제에 관하여 이 외에도 동원 과정, 피해자 수, 패전 당시의 처우 등에 관해서 일본과 한국 두 사회의 인식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양국의 대립은 이러한 문제와 관련하여 어떤 악순환에 빠져 있습니다. 문제의 극복을 위하여 위안부 이슈 관련 역사 인식을 한일 시민들이 함께 다각적으로, 냉철하게 연구 검토하면서 공동의 인식을 만들어나가는 작업이 급선무라고 생각합니다. 

[함께 읽을 글]
·하나후사 도시오, 하나후사 에미코 지음, 고향옥 옮김, <관부재판: 소송과 한국의 원고 피해자 할머니들과 함께한 28년의 기록>(서울: 도토리숲, 2021)
(책소개 >>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271223391)
·<민족의 희생자 위안부에 대한 일본정부의 사죄와 보상을 요구한 관부 재판의 기록(시모노세키)>, (사)정신대문제대책부산협의회 민족과 여성역사관, 2007. 
·김문숙 펴냄, <소녀와 할머니: 위안부 할머니들과 함께 해 온 시간의 기억>, (사)정신대문제대책부산협의회 민족과 여성역사관, 2018.
·허윤, “목적(어) 없는 ‘기억하겠습니다’: 일본군’위안부’의 서사화와 역사적 상상력”, 한국여성사학회, <여성과 역사> 35권 (2021).
·박정애, “총동원체제기 식민지 조선에서 정신대와 위안부 개념의 착종 연구: 정신대의 역사적 개념 변천을 중심으로”, 숙명여자대학교 아시아여성연구원, <아시아여성연구> 59(2) (2020).
 번역: 퍼플레이 편집팀 

연결되는 글

글쓴이 하나후사 도시오

아내 하나후사 에미코와 함께 ‘전후책임을 묻는 관부재판 지원 모임’을 조직하여, 관부재판의 원고를 돕고 입법 활동을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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