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민 거주 공간으로 활용돼 살아남은 위안소의 ‘아이러니’

정혜인

  • 게시일2024.11.18
  • 최종수정일2024.11.20

주민 거주 공간으로 활용돼 살아남은 위안소의 '아이러니' 
《훙커우구 일본군 위안소 유적지》

일러스트 ⓒ이사각

 

1931년 일어난 만주사변, 1937년부터 중국 전국토에서 전개된 중일전쟁, 1941년부터 1945년까지 벌어진 아시아・태평양전쟁에 이르기까지, 일본 제국주의의 광범위한 침탈 현장이었던 중국은 당시 일본군이 조직적으로 운영한 위안소의 역사가 녹아있는 현장이기도 하다.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는 지난 6월 19일부터 21일까지 사흘 동안 아시아 지역 일본군'위안부' 문제 연구와 함께 일본군'위안부' 관련 기억의 전승을 위한 중국의 노력 등을 살펴보기 위해 가장 치열했던 전장인 난징과 상하이를 찾았다. 현지 일본군'위안부' 유적지 및 박물관 탐방기를 3회에 걸쳐 싣는다.

 

한국인이 인식하는 역사 속 중국 상하이는 우리 독립운동의 장(場)이다. 1919년 3.1운동 이후 프랑스조계령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된 이후 상하이는 해외 독립운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1920년에는 흥사단 원동위원부(興士團 遠東委員部)가 상하이 쉬후이구(徐汇区)에 설치돼 활동 기반이 되었고, 1932년 4월 29일 윤봉길(尹奉吉) 의사의 역사적인 의거 현장인 훙커우 공원(現 루쉰공원)도 상하이에 있다. 그 외 인성학교(仁成學校), 영안공사(永安公司), 신규식(申奎植) 거처 등 독립운동의 흔적이 곳곳에 자리하고 있다.

 

 

일본군 직영, 거류민 위탁 등 다양한 방식으로 운영된 위안소 

다른 한편으로 상하이는 일본 제국주의 침탈의 현장이다. 상하이 전역에 산재한 일본군 위안소 터가 그러하다. 상하이는 일본군 위안소가 가장 먼저 만들어졌고, 가장 집중적으로 설치되었으며, 또 가장 오랫동안 존속한 곳이다. 1842년 난징조약(南京條約) 이후 개항한 상하이는 제국주의 국가들의 각축장이면서도 일방적인 식민지와 차별성을 가진 국제적 도시로 변모하였다. 1871년 '청일수호조규(淸日修好條規, 일명 톈진 조약) 조인을 전후해 상하이에 진출한 일본은 1900년대 초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시기 상하이에 거류지를 조성하며 세력을 확장해 나갔다. 그리고 1914년 상하이 거류 일본인들의 보호를 명목으로 일본 해군 특별육전대가 상주하게 되었다. 1차 세계대전 중 서구 제국의 세력이 주춤해진 틈을 타 일본은 상하이 내 세력을 더욱 키워갔는데, 1932년 중국과 일본의 군사적 충돌인 '1차 상하이 사변' 시기 일본군을 위한 '위안' 시설을 본격적으로 구상하여, 위안소를 지정하고 관리, 통제하기 시작했다.  

1932년 1월 일본 해군은 상하이에 최초의 해군위안소를 지정했고, 1932년 3월 1차 상하이 사변 전투가 종결된 후 일본 육군도 육군위안소를 개설하였다. 위안소는 특정 지역에 밀집돼 있었는데, 상하이의 관문인 우쑹(吳淞)과 쓰촨베이루(四川北路) 일대가 대표적인 지역이다. 일본군 주둔지이자 전략적 요충지였던 이 지역에서는 약 70여개의 위안소가 조사, 발굴됐다.

첫 해군위안소 지정 후 1년 만인 1933년 17곳으로 늘어난 위안소는 지속적으로 증가하다가 1937년 중일전쟁 및 2차 상하이 사변을 기점으로 급증했다. 위안소는 일본군이 직접 설치한 곳, 일본군이 감독하고 일본 거류민이 위탁해 운영한 곳, 소위 '한간(汉奸)'으로 불린 친일 중국인 또는 친일 한국인이 운영한 곳, 군 또는 민간인이 경영한 유동적 임시 위안소 등 다양한 방식으로 운영되었다. 일제는 1940년 2월 훙커우구(虹口区)와 자베이구(閘北区)에 위안조합회를 설립해 늘어나는 위안소를 관리하였다.

상하이사범대학교 쑤즈량(苏智良) 교수를 비롯, '중국'위안부'문제연구센터'를 중심으로 한 연구자들의 조사에 의하면 당시 상하이 소재 위안소는 180여 곳 이상이었으며, 조사를 진행하면 더 발견될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상하이 위안소 유적지 답사는 상하이 사범대에서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연구하는 장루이(張如意) 선생, 후왕신위(黃心宇) 선생의 안내와 설명으로 진행됐다. 상하이 훙커우구에 소재한 위안소를 답사하고, 다이살롱(大一沙龍), 수장(曙庄), 쓰촨리 52호, 어메이루(峨眉路) 400호 등 4곳을 확인했다.  

 

 

다이살롱, 가장 오래 유지된 위안소 

이른 아침 상하이사범대학교에서 첫 답사지인 다이살롱으로 출발했다. 다이살롱은 상하이 훙커우구(虹口区) 둥바오싱루(东宝兴路) 125농(弄)에 위치해 있다.

알려진 바와 같이 다이살롱은 일본 해군이 최초로 지정한 위안소 중 하나이다. 원래 이 주소지에는 광둥(廣東) 지역 사람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1931년 만주사변 이후 광둥 사람들이 악화된 정세를 피해 거주지를 떠나며 빈 공간이 된 것을 일본인 이주자 곤도 미츠코(近藤美津子) 부부가 차지해 일본식 유흥업소, 이른바 '대좌부(大座敷)'를 운영하였다. 이듬해 1월 일본 해군은 상하이 주둔 해군육전대 대원들을 위한 위안소를 지정하는데, 다이살롱이 그 중 하나였다. 이는 1차 상하이 사변 발발 시기와 맞물린다.

 

[사진 1] 다이살롱 입구 모습

[사진 2] 외부에서 바라본 다이살롱 건물들

 

다이살롱 부근에 일본 해군육전대 집결지가 있었고 인근 쓰촨베이루는 일본 해군육전대 사령부 소재지였다. 1932년 당시 1호 건물에 일본인 '위안부' 7명으로 운영된 다이살롱은 일제의 침략 전쟁이 장기화되고 전선이 확대되어감에 따라 '번성'해 위안소를 5개 동까지 확장하고 '위안부' 수도  늘었다. 처음에는 민간 일본인들도 출입했는데, 1937년 8월 13일 일본군이 상하이를 침공한 이후, 즉 2차 상하이 사변 이후부터는 일본군만 출입이 가능해졌다. 다이살롱이 일제의 침략이 진행됨에 따라 병력이 증가하면서 그 성격과 규모가 더욱 강화된 것이다.

다이살롱에 있었던 '위안부'들에 대한 정보나 정확한 통계는 확인된 바 없다. 그러나 다이살롱이 위안소였음을 확인해 준 증언자들에 따르면 일본인뿐 아니라 중국인, 조선인 '위안부'들도 있었다. 증언자들은 당시 주변에서 거주하거나 다이살롱에 고용된 사람들로 '고려 여인들(조선인 여성)'과 일본인 주인을 도왔던 관리자 고려인(한인)을 기억하고 있었다.


[사진 3] (좌) 건물 내부 바닥재. 당시에 바닥재로 깐 타일이 그대로 남아 있다. / (우) 밀집해 있는 다이살롱 건물들. 건물들은 작은 육교로 연결되어 있었으나 현재 육교는 철거된 상태이다.

[사진 4] 다이살롱 건물 후미에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일본식 정원

 

종전 때까지 운영된 다이살롱 건물은 적산(敵産)으로 묶여 있다가 국공내전이 종결된 후 일반에 분배되어 지금까지 거주지로 활용되고 있다. 2018년까지 다이살롱에는 여러 거주자들이 생활했는데, 지금은 1가구만 남고 모두 퇴거한 상태이다.

거주자의 승낙으로 내부를 둘러볼 수 있었다. 흔쾌히 생활공간을 개방해주는 '마지막' 거주자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는데, 연구를 진행하며 꾸준히 다이살롱 거주자들과 유대관계를 쌓아온 상하이사범대 중국'위안부'문제연구센터 연구자들의 노력 덕분으로 보였다.

서양식 2층 건축 양식을 지닌 총 5개 동으로 이뤄진 다이살롱 건물은 대체로 원형을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당시 구비되어 있었다는 일본군의 '위락'을 위한 노천 무도회장, 연못, 바(bar), 일본식 정원 등은 사라지고, 일본식 정원의 형태만 남아 그때를 증명해주고 있었다.

현재 다이살롱은 유적지화를 둘러싸고 여러 입장이 상충하고 있는 상황이다. 상하이 시는 보존에 무게를 두고 있으나 개발을 원하여 이를 반대하는 훙커우구로 인해 마지막 거주자가 건물을 떠나면 어떤 방향으로 결정될지는 알 수 없는 상태라고 한다. 퇴거를 거부하는 거주자의 개인적 이유로 이 위안소 건물은 여전히 자리를 지킬 수 있었던 것이다.

 

 

수장 위안소∙쓰촨리 52호 위안소,
잘 구축된 시설로 종전 후 주민 거주 공간으로 활용

다음으로 쓰촨베이루 쓰촨리에 위치한 수장(曙庄) 위안소와 쓰촨리 52호 위안소 현장을 찾았다. 쓰촨베이루는 일본 해군육전대 사령부가 소재한 곳이었다.

쓰촨리 1604농 41호에 위치한 수장 위안소의 주소패가 걸려있는 철문 안으로 들어가면 3층 건물 두 동이 마주보고 서 있는데, 모두 위안소로 활용된 곳이었다. 수장 위안소 역시 원 거주민이 살고 있던 것을 1937년 2차 상하이 사변 이후 일본군이 무력으로 차지한 뒤 위안소로 사용되었다. 무도회장, 욕조, 서구식 화장실 등 각종 시설이 잘 구축돼 있었고, 건물 앞 공터에는 방공호도 구축되어 있었다고 한다. 양호한 시설 때문에 일본군 장교가 출입했던 위안소로 알려져 있으며, 종전 후 주민들이 곧바로 생활 공간으로 활용하였다.


[사진 5] 수장 주소패가 걸려있는 철제 대문

[사진 6] 수장 위안소 건물은 서로 마주보고 서 있는데, 시절이 양호해 종전 후 주민들이 곧바로 생활 공간으로 사용해 오고 있다. 


건물 1층은 장교 전용 바였고, 2~3층에 '위안부'들의 방이 있었다. 일본군은 쓰촨베이루 일대 건물들을 강점한 뒤 개축해 사용하였고, 그 영향으로 수장에는 미닫이 창문과 같은 일본식 건축양식이 일부 남아 있다.  

수장위안소는 1938년에 가장 번성하였다가 1944년부터 상하이 주둔 일본군 수가 줄어들게 되자 점차 쇠락했다. 수장 위안소에 동원된 '위안부'의 수는 파악하기 어려우나 수십 명의 일본인 '위안부'들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수장 위안소에서 도보로 1~2분 거리에 있는 쓰촨리 52호 건물 역시 일본군 위안소로 활용된 곳이다. 수장과 마찬가지로 3층 건물이며, 일본군 장교들이 주로 출입하였다. 두 위안소 모두 일본인 업자들이 운영했는데, 쓰촨리 52호 건물도 현재까지 거주민들이 실제 생활하는 거주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어메이루 해군직영위안소, 한 향토사학자의 집요한 추적으로 확인

마지막으로 찾은 곳은 훙커우구 어메이루(峨眉路) 400호에 남아 있는 일본 해군 직영 위안소 건물이다. 凹 형태의 5층 건물로, 앞서 찾은 다른 위안소 건물처럼 거주민들의 실생활 터전이었다.

이 건물이 일본군 위안소였다는 사실을 밝혀낸 이는 향토사학자 저우신민(周新民)이었다. 엔지니어 출신인 저우신민은 은퇴 후 상하이 및 주변 도시사 연구에 몰두하던 중 본인이 졸업한 대공직업학교의 역사에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 2012년 9월, 기록보존소인 상하이 당안관에서 '사립대공직업학교 개황에 관한 보고'에 실린 대공직업학교 약사를 검토하던 중 "일본 해군구락부를 접수하여 학교 교사로 삼았다"는 문구를 발견한 것이 단초였다. 이를 확인하기 위해 1여년 간 중국 내 남아 있거나 확인할 수 있는 자료들을 집요하게 추적했지만 실마리를 찾지 못했다. 다만 대공직업학교 교사 사치산 (沙啓善)선생으로부터 학교 건물이 '일본인이 남긴 낡은 집'이라는 사실 정도를 확인할 수 있었다.

[사진 7] (좌) 건물 입구 주소 / (우) 어메이루 400호 건물 모습. 3층에서 5층으로 증축된 상태와 凹 형태가 확인된다.

[사진 8] (좌) 건물 입구인데, 당시 위안소 매표소였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  (우) 어메이루 400호 건물 내부 모습 

 

이후 저우신민은 일본 쪽 자료에 시선을 돌렸다. 추적 결과 어메이루 400호 건물이 일본 해군육전대의 하사관병 집회소였고, 당시 위락시설을 잘 갖춘 3층 건물이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또 일본 해군구락부는 장교 위안소였고, 해군하사집회소는 하사관과 사병이 사용한 위안소였으며 둘 다 일본 해군육전대가 직영하였다는 것도 확인하였다. 어메이루 400호는 일본 해군육전대가 직영한 위안소였던 것이다. 저우신민은 문헌 검토에 이어 어메이루 400호에 거주한 주민들의 진술을 통해 교차 검증에 들어가 1980년대 원래 3층이던 건물이 5층으로 증축되었다는 사실도 확인하게 되었다.

어메이루 400호 건물은 증축이 되긴 했으나 1층에 있는 매표소 공간부터 계단의 모습 등 위안소로 활용되던 당시 모습을 상당 부분 유지하고 있었다. 증언한 주민들에 따르면 지금은 없어진 건물 지하실에 당시 사용하던 집기들도 있었다고 한다.

 

 

철거되거나 잊힐 위기의 위안소, '역사기억공간'으로 전환되길

6월의 상하이 날씨는 체감상 한국의 여름과 비슷한데, 답사 당일은 아침부터 비도 내려 답사가 수월하지는 않았다. 또 우리가 찾아간 상하이 위안소 건물 모두 현재까지 주민들이 거주하며 생활 하고 있는 공간이어서 내부를 살펴보기도 쉽지 않았다. 방문한 위안소 건물에서 다소 생경한 감각을 느낀 것은 그 때문이었다. 위안소라는 역사적 특수성보다 일상생활 공간이라는 점이 더 직접적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수많은 마천루들이 위용을 자랑하는 국제도시 상하이는 개항 후 조성된 근대 건축물도 즐비한 공간이다. 그 당시 지어진 건물 중 다수는 일제의 상하이 침략 이후 원래의 목적을 빼앗기고 일본군을 위한 위안소로 활용되었다. 종전 후 위안소 건물들은 원래의 성격을 되찾았으나 그 과정에서 역사성이 희미해지거나 감추어질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일상성으로 인해 상하이 위안소 건물들은 사라지지 않고 지금까지 남아 있을 수 있었다. 위안소라는 일본 제국주의가 빚어낸 인권 유린의 역사 위에 개인의, 일가족의 생활 터전이 수십 년간 덧입혀지면서 장소는 살아 남았고, 중국 내 일본군'위안부' 연구진들의 노력으로 그 역사성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이렇게 유지되어 온 건물들이 현실적 필요에 의해 철거되거나 잊힐 위기에 놓여 있다는 점이다. 남아 있는 위안소 건물들 중 대표적인 것들을 '역사기억공간'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쑤즈량 교수와 향토사학자 저우신민의 문제제기에 중국 사회가 귀를 기울여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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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정혜인

숙명여자대학교 역사문화학과에서 「전시총동원체제기 일제의 언론 통제와 동원」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주요 논문으로 「중일전쟁기 조선춘추회 결성과 언론 동원」, 「아시아태평양 전쟁기 조선신문회의 조직과 활동」 등이 있으며 일본군'위안부'문제 연구소 연구원으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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