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하이당안관 소장자료
『日僞上海特別市政府』 문서철 중
일본군‘위안부’ 관련 사료
일본제국은 일본군‘위안부’제도를 전시 노동 동원이나, 군동 원처럼 일원화된 제도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여러 제도를 이용하여 불법을 은폐하면서 다양한 형태로 운영했다. 몇몇 학자들이 위안소와 ‘위안부’를 유형화하거나 분류하기도 하는데, 그러한 작업은 특별한 ‘위안부’피해를 규명하는 데는 유용할 수 있지만, 전체상을 알기에는 부족하다. 실제로 일본제국은 전시 상황에 따라, 식민지든 점령지든 전장지든 매우 유연하게 여러 방식으로 ‘위안부’를 제공하고 이용했다.
여기에서는 중국 점령 후, 상하이에 설립된 일본 군용 ‘위안부’ 제도에 대한 사료를 소개하는 것으로 그 다양성의 일면을 보겠다. 이번 소개할 상하이당안관 소장 상하이 특별시 관련 사료, 『日僞上海特別市政府』철은 그 다양한 일본군‘위안부’제도의 한 유형으로, 일본이 상하이를 점령한 후, 상하이 해군특별육전대(上海海軍特別陸戰隊)를 주둔시키면서 세운 친일정부를 이용해 만든 ‘위안부’제도에 관한 것이다.[1]
사료의 역사적 배경 : 일본군의 상하이 점령
상하이시에는 아편전쟁 이후, 불평등 조약인 난징조약에 의해 프랑스 조계지와 영국, 미국, 일본의 공동조계지가 형성되었다. 중국 국민당 장개석이 중화민국으로 중국을 다스리게 된 1928년에 상하이시는 상하이 특별시로 개칭되었다. 그래서 상하이 지역은 상하이 특별시, 프랑스 조계지, 공동조계지로 나누어져 각각 행정체계가 달랐다. 상하이 특별시는 국민정부에 의해 지배되었지만, 프랑스 조계지의 경우에는 프랑스 식민지의 일부로 취급되었고, 공동조계지는 각국의 총영사와 영국, 미국, 일본 등의 관료 및 중국인이 공동으로 운영하는 공부국(工部局)이 담당하였다. 따라서 조계지는 중화민국의 치외법권 구역이었다. 당시 일본인과 조선인은 공동조계지 중 소위 일본 조계지로 불렸던 곳인 훙커우(虹口)에 집중해서 거주했다.
상하이에는 각기 자국민을 보호한다는 이유로 미군, 영국군, 프랑스군, 이탈리아군이 주둔해 있었다. 일본 역시 1932년 10월 1일 소위 제1차 상하이사변 이후부터 일본해군 특별 육전대를 주둔시켰다. 주둔지는 조계지역 밖의 자베이(閘北)의 지앙완루(江湾路)에 사령부를 두었다. 주둔군의 규모는 초기 2,500명에서 1937년 8월 13일 제2차 상하이 사변 당시에는 5,000여 명으로 늘었다. 제2차 상하이 사변 때, 일본은 해군 특별 육전대 이외에도 육군으로 구성된 상하이 방면군을 파견하여 시가전을 벌였다. 그 결과 상하이 특별시를 점령하고, 1937년 12월 첫 친일정부인 대도(大道) 정부를 앞세웠다. 1938년 10월 이후 난징(南京)에 세워진 친일정권인 유신정권이 들어서자 대도 정부를 없애고, 상하이 특별시로 편입했다.[2] 1941년 상하이 방면군과 함께 황푸장(黄浦江)에 정박해 있는 미군함과 영국포함을 장악하여, 공동조계를 접수한 일본은 상하이 지역 전체를 손아귀에 넣었다. 이번에 소개할 자료군은 이 시기에 생산된 사료이다.
사료의 의의 및 금후 연구 방향
본 상하이 특별시 관련 자료는 일본군이 상하이를 점령한 후 1938년부터 1941년까지 일본군의 행정력이 모두 미치는 상하이 특별시 지역에서의 위안소 설립과 '위안부' 동원, '위안부' 및 위안소 관리 등 제도 설립에 일련의 행정문서이다. 일본군과 점령지 친일정권이 합심하여 일본군‘위안부’제도를 만들어 갔던 과정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사료이다. 일본군과 상하이 특별시는 1939년에는 일본군을 위한 오락소 및 위안소 개설과 ‘위안부’동원에 관련한 문건을 주고받았고, 1941년에 이르러서 ‘창기취체규칙’ 등 관련법을 만들었다. '창기취체규칙'은 기본적으로 창기에 관련한 불법적 행위를 규제하는 데 목적을 둔 규칙이다. 원칙대로라면, 규칙이 먼저 만들어지고 그 규칙에 따라 창기, 즉, ‘위안부’를 동원하게 해야 한다. 하지만, 위안소가 만들어지고, ‘위안부’ 동원이 이미 이루어진 상태에서 ‘창기취체규칙’을 만든 것은, 일어날 수 있는 불법적 행위를 규제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이미 동원한 ‘위안부’를 합리화하기 위한 것으로 제도적 사후 승인이라 할 수 있다.
본 사료를 통해 일본제국이 ‘위안부’ 제도를 어떻게 전쟁 수행을 위해 만들고 이용했는지를 보다 긴밀하게 연구할 수 있다. 또한 난징, 베이징, 텐진 시의 유사 사료와 비교 검토도 가능하고, 더 나아가 식민지 타이완과 조선에서 ‘위안부’ 동원체계의 유사성과 차이점 등을 다양하게 연구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1) 위안소 설치에 관한 사료군
상하이 특별시의 행정체계는 시장을 필두로 사회국, 공안국, 재정국, 공무국, 교육국, 위생국, 토지국, 공용국으로 구성된다. 일본군이 점령한 후, 상하이 특별시는 상하이 방면군 육군 특무부가 관할했다. 육군 특무부는 상하이 육군 특무반을 두고 총무과, 시부(市府)과, 계획과, 서무과, 선전과, 조사과 등 6부로 구성하고, 상하이 특별시 정부를 앞세워 통치했다. 겉으로 보면 중국인 시장과 중국인 관료들이 행정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대부분의 결정은 육군특무반에 보고·승인되는 절차를 거쳤다.
여기에서 소개할 사료는 1938년 10월 상하이 특별시를 점령한 후, 총 조계지를 제외한 지역에 일본군 위안소를 만들어 가는 과정에 관한 사료이다.[3]
사료에 의하면 일본군 위안소는 육전 대본부가 있는 자베이(閘北) 지역(지도상 1지역), 미군과 영국군의 함대가 정박해 있어 일본군이 경비하고 있었던 황푸강(黄浦江) 근처의 푸둥(浦東)(지도상 2)과 차오전(草鎮) 지역(지도상 3)에 설치되었다. 푸둥과 차오전의 주둔군들은 1941년 미군, 영국군 함대를 공격하여 승리했다.
① 소장번호 『R-3-134』
「가오챠오구 분국의 보고, 시민 양수이창이 동구포상로 6호에서 위안소 개설 상황」
「爲據 高橋區 分局 呈報 市民 楊水長 在東溝浦上路 六號 開設 慰安所 情形 祈鑑 核備 査由」
소장번호『R-3-134』의 「가오챠오구(高橋區) 분국에 시민 양수장이 東溝 浦上路 6호에 위안소를 개설 상황 보고하기 위한 예비 조사 사유에 대한 안건」은 앞의 [그림1]에 표시된 2 지역, 푸둥 지역에 설치하는 위안소에 관련한 사료이다.
본 사료는 상하이 특별시 경찰국 보고문건으로 상하이 특별시 경찰국장이 시장에게 보내는 문건이다. 첨부 문건으로는 명부와 지도가 있다. 1939년 2월 25일, 푸둥의 둥고우(東溝) 분주소의 순관(巡官), 즉 경찰이 가오챠오구(高橋区)의 분국(分局)에 보고한 것을 토대로, 상하이 특별시 국장이 시장에게 보고한 내용이다. 이 문건을 보면, 위안소를 개설하려는 시민 양수장은 상하이 특별시의 「지령」으로, 일본군 푸둥헌병대와 둥고우육군경비대, 둥고우지도관공소 등의 허가를 받아야만 했다.
위의 기관에서 허가를 받은 양수장은 위안소 개설허가증과 더불어 위안소 고용인원의 성명, 연령, 출신지 등을 기록한 명부, 위안소 약도를 갖추어 지역 경찰서에 보고하게 되어 있다. 먼저 위안소에서는 사고가 발생하지 않도록 하고, 사고가 났을 때는 위의 헌병대, 육군경비대 등에 보고해야 한다는 것을 명시하고 있다.
이 위안소는 일본 육·해군을 상대로 하는 것으로 “중국인은 사용하지 못하도록” 했다. 위안소에는 위안소를 관리하는 고용인과 통역, 그리고 위안부 7명을 고용하고 있다. 고용인으로는 남성 1명과 46세 여성 1명을 고용했다. 위안부는 7명으로, 연령별로 보면 23세 1명, 22세 2명, 21세 1명, 20세 1명, 17세 1명, 15세 1명을 고용하고 있다. 위안부들의 출신지는 상하이 3명 창수(常熟) 1명, 단양(丹陽) 1명, 창저우(常州) 1명, 장두(江都) 1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1939년 당시 15세의 여성도 고용되어 있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② 소장번호 『R1-4-364』
「가오챠오 경찰서 보고에 의하면 양수이창이 차오전(草鎭) 71호에서 위안소를 개설」
「爲據 高橋警署 呈報 楊水長 在草鎭 七一號 開設 慰安所 抄具 略圓 轉報鑑核備査由」
본 문건은 상하이 특별시 경찰국에서 시정부로 보내는 보고건이다. 지도가 첨부되어 있다. 이 문건은 상하이시 정부 「지령」으로 분류되는 서류이다. 결재라인은 주임, 과장, 주임 비서를 거쳐 비서장에서 시장까지 거치는 문건이다.
본 문건에서 나오는 위안소는 앞의 [그림1]의 3 지역이다. 1939년 10월 13일 난탕자이(南塘宅) 39호에 고용인 1명 통역 1명 기녀 5명, 여고용인 1명을 두고 양수장이 위안소를 개설했다. 위의 사료에서 위안소의 개설 목적은 일본군의 오락을 공급하기 위한 것이라고 보고하고 있다.
기녀 중 특히 초심자(純系)는 일본군에게 공급하기로 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초심자를 일본군에게 공급한다는 것은 원래 기녀가 아니었던 여성을 일본군 ‘위안부’로 했다고 볼 수 있는 증거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 난탕자이 39호 위안소는 1940년 12월 26일, 영업 부진이라는 이유로 기녀 5인, 남녀 고용 3인과 함께 차오전 71호로 장소를 옮겼다. 위안소의 장소를 옮길 때도 일본군 푸둥북부대 연락관 사무소, 일본군 푸둥헌병분견대 및 가오챠오경비대, 차오전 부대에서 영업허가를 받았다.
이 서류에서는 핫토리(服部) 반장의 소속이 명시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조심스럽기는 하지만, 다른 문서 등에 비추어 보아 일본군 특무기관의 지역반 반장으로 보인다. 이 부분에 관련해서는 좀 더 조사가 필요하다.
2부에서 계속됩니다.
각주
- ^ 이 사료는 2013년 「한·중 연구자 네크워크 구축과 상하이·난징지역 ‘위안부’관련 자료조사
- ^ 神戶輝夫, 「日中戦争における文化侵略(4)」, 『大分大学教育福祉科学部研究紀要』,2001년.
- ^ 지도는 다음 사이트에서 인용하여 필자가 사료에서 위안소 설립지역을 표시 가공했다. https://minkara.carview.co.jp/userid/203735/blog/c891166/
연결되는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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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군은 중국 점령 후 어떻게 ‘위안부’를 제도화했는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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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혜인 (성균관대학교 동아시아역사연구소 객원연구원)
- 글쓴이 한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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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평화와역사연구소 연구위원으로, 역사 분쟁 및 역사 대화를 주제로 연구하고 있다. 2014년부터 현재까지 ‘일본군‘위안부’기록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공동등재를 위한 국제연대위원회’ 사업단에서 활동하고 있다.
hanhi822@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