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안부’ 역사, 아시아 최대 위안소 유적 위에 복원되다

윤은자

  • 게시일2024.11.05
  • 최종수정일2024.11.06

'위안부' 역사, 아시아 최대 위안소 유적 위에 복원되다
《난징 리지샹위안소 유적전시관》

 

1931년 일어난 만주사변, 1937년부터 중국 전국토에서 전개된 중일전쟁, 1941년부터 1945년까지 벌어진 아시아・태평양전쟁에 이르기까지, 일본 제국주의의 광범위한 침탈이 있었던 중국은 당시 일본군이 조직적으로 운영한 위안소의 역사가 녹아있는 현장이기도 하다.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는 지난 6월 19일부터 21일까지 사흘 동안 중국의 일본군'위안부' 관련 연구 및 기억의 전승 현황을 살펴보기 위해 가장 치열했던 전장인 난징과 상하이를 찾았다. 현지 일본군'위안부' 유적지 및 박물관 탐방기를 3회에 걸쳐 싣는다.

 

 

1937년 12월 13일 일본군 점령과 동시에 난징(南京)은 일본군 점령지 수도이자 대중국 작전 수행 거점 도시로 변모했다. 일본 군정기관은 계획적이고 주도적으로 상하이, 난징과 그 주변 지역에 신속하게 위안소를 설치하고 '위안부' 제도를 구축해 나가기 시작했다. 군 위안소의 설치는 일본군 내에서 공식화되었고 전쟁의 확대에 따라 일본군 주둔 지역으로 확산되었다. 중일전쟁 8년 동안 난징 도심과 외곽에 60여 개의 위안소가 설립되었다. 난징의 일본군 위안소에는 일본인·중국인 외에 조선인 '위안부'와 '업자'들이 있었다.

 

 

난징의 조선인 '위안부'와 위안소

일본군 점령 시기 난징에는 중국의 북방 혹은 상하이나 장강 연안 도시에서 이주했거나 한반도에서 간 조선인들이 있었다. 그들은 다양한 업종에 종사했고 일본군 위안소 운영자, 전당업자, 군속 상인 이외에 다수의 일본군 '위안부'를 비롯하여 밀매업자 등이 있었다. 이 시기 난징의 조선인 규모는 평균 500명 정도였고 그중 여성은 거의 반수에 근접했다. 이는 점령 이전 난징 거주 조선인 중 여성이 20명 정도로 총수의10%에도 미치지 못했던 상황과 비교하면 차이가 컸다. 당시 난징의 조선인 여성 중에는 일본군'위안부'가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였다. 1940년 말 난징 주재 일본총영사관 경찰서에서 작성한 난징 조선인의 직업·호구 통계 중 1인 1호를 구성한 84명 여성의 직업이 '창기'였다. 이들은 일본군'위안부'로 판단되며, 조선인 성인 여성 총 207명 중 40.6%를 차지하였다. 동일 통계에서 위안소 경영자는 6호 15인(남 7, 여 8)이 있었다. 사실 일본군 내에서 '위안부'는 '군수품'으로 간주되었고 위안소의 설치와 운영 또한 전장의 확대 변화에 따라 유동적일 수밖에 없었다. 

일본군의 난징 점령 초기에는 군 직영∙ 이동식 위안소가 많았다. 이들 위안소에는 군과 함께 혹은 군을 따라 이동한 일본인・조선인 업자와 '위안부'들 그리고 현지에서 징발된 중국인 여성들이 있었다.  난징 치안이 점차 안정되면서 일본군은 점령지에서 접수한 건물들을 위안소로 개조해 운영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따라 일본군과 일본영사관의 관리・감독 하에 민간업자가 경영하는 위안소가 점차 증가했다.

 

 

『난징 일본군위안소 실록(南京日軍慰安所實錄)』(南京出版社, 2017)에는 난징 지역 총 64개 위안소에 대한 조사 기록이 있다. 이들 위안소는 일본군 직영, 일본∙조선∙중국인 민간인 운영, 기타 운영자 미상 등으로 구분된다. 조선인 여성을 수용한 것으로 확인된 위안소는 17곳이다. 그중 일본군 직영 위안소는 6곳으로, 일본군 16사단 '제38연대 제1대대'∙'제33연대 제3대대'∙'후쿠치야마(福知山) 제20연대'위안소, 안락주점(安樂酒店)위안소, 천복구락부(天福俱樂部), 천춘(陳村)위안소이다. 민간인 운영 위안소는 10곳으로, 동운(東雲)위안소, 만월원(滿月園), 조일루(朝日樓), 일이삼정(一二三亭)위안소, 금수루(金水樓), 화월루(花月樓), 송하부귀루(松下富貴樓), 청남루(青南樓), 철로교(鐵路橋)위안소, 탕산 까오타이포어(湯山高台坡)위안소 등이 있었다. 마지막으로 운영자 미상인 써산(蛇山)위안소가 있다. 이들 위안소의 위치는 난징 도심 중부∙남부와 북부 샤관(下關), 외곽의 푸커우(浦口)와 탕산 지역 등에 분포하였고 일부는 위치 확인이 불가하였다. 각 위안소의 '위안부'는 조선인만 있는 경우, 조선∙중국∙일본∙대만 여성들이 혼재한 경우가 있었다. 

최근 발간된 증언 자료나 당시 기록 중 난징 지역 위안소를 거쳐 간 조선인 '위안부'로는 박영심, 배족간 등 9명이 확인되었다. 이들은 1937~1942년 기간에 중국으로 갔으며 다수가 1938년에 모집되었다. 모집 당시 연령은 17~20세로 모집 방식은 취업 사기가 많았다. 난징 체류 기간은 며칠 거쳐 가거나 수년간 장기 체류한 경우로 각기 달랐다. 난징에 도착한 지 1년만에 전차금을 갚거나 일본군 장교의 도움으로 귀국한 경우도 있지만, 수년간 '위안부' 생활을 하다가 종전 후 9년 만에 귀국한 상황도 있었다. '위안부' 피해자들이 이동한 지역을 모두 나열하면 중국 내 만주, 상하이, 항저우, 안칭, 우후, 우한, 창사, 한커우, 이창, 윈난의 쑹산과 미얀마가 포함되었다. 9명 중 3명은 종전 후 귀국하지 않고 중국에 남았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1940년 말 난징에서 조선인 위안소 경영호는 6호였다. 1940년대 발간된 『재지반도인명록(在支半島人名錄)』 등 자료를 참고해 조선인 위안소 경영자와 관련자를 나열하면, 고봉인·고흥인(朝日樓, 太平路瑞麟里1號), 이상우·이영섭(東雲위안소, 利濟巷普慶新村), 원치복·원경양(花月樓, 下關大馬路商埠街153號), 김재익(滿月園, 相府營), 김병건(一二三亭위안소, 浦口大馬路), 김옥남·김상호(金水樓, 浦口大馬路7號) 등이다. 그중 동운위안소와 만월위안소는 1939년 1월 중화민국 유신정부 행정원 선전국 신문훈련소가 편찬한 『난징지남(南京指南)』 91쪽에 업소명과 주소가 소개되었다. 당시 난징 조선인 중 위안소 경영자는 일정 정도 자산을 소유한 실력자에 속했다. 1940년 '난징 조선인 실력인물 조사표'(조선총독부 경무국 문서)에는 2만엔 이상의 자산 소유자 19인을 소개하였다. 그중 여관 운영자 이상우, 위안소 운영자인 고봉인·원치복·김병건·김상호가 자산 2~3만엔 정도의 자산을 소유하고 있었다.

 

난징 리지샹 동운위안소와  조선인 '위안부' 박영심 

일본군은 난징을 점령한 후 도심 리지샹(利濟巷)에 있는 푸칭신춘(普慶新村)을 차지하고 위안소를 설치하였다. 푸칭신춘은 원래 국민당 군관 양푸칭(楊普慶)이 거주와 임대를 목적으로 1935~1937년 건립한 건물군이다. 구역 내 건물들의 용도는 다양했다. 우선 북쪽에 위치한 리지샹 18호(현 C·D 6개 동) 건물들은 연립주택, 중간에 위치한 리지샹 2호(현 B동)는 여관, 거리와 인접한 L자형 건물은 리지샹 4-6호(현 A동)로 1층은 상점 2층은 주거용과 창고로 사용하였다. 일본군은 후에 리지샹 2호를 동운위안소, 리지샹 18호는 고향루(故鄕樓)위안소라하고 각기 조선인과 일본인 '위안부'를 수용하였다. 당시 동운위안소는 '동방여관(東方旅館, 東方アパート)'으로 혹은 '까오리야오즈(高麗窯子)'로 불리었다.

그런데 1940년대 푸칭신춘에 주소를 두고 동운위안소 경영에 관여한 조선인 남성 3인의 존재가 확인된다. 초대 난징조선인친목회 회장을 지낸 이상우(李相祐・李相佑・李相裕・李相祜, 松田相光)와 이영섭(李永燮, 松田寅雄), 신익균(申益均, 淺田益均)이다. 이들에 대해서는『재지반도인명록(在支半島人名錄)』, 조선총독부 경무국 자료(1940), 난징 주재 일본총영사관 경찰서 자료(1940) 등에 관련 기록이 있다.

 

 

동운위안소는 건물 남쪽 1층 중앙에 출입문이 있다. 출입문 안에 계산대가 놓여있고 벽에는 일본어로 쓴 위안소 이용 규정과 '위안부' 명패가 걸려 있었다. 건물 내부를 동서로 관통하는 복도가 있고 그 양쪽으로 작은 방들이 문을 마주하고 있다. 1, 2층에 각 14개의 방이 있는데, 2층 19호 방이 조선인 '위안부' 피해자 박영심(1921~2006)이 치욕의 나날을 보낸 장소라고 한다. 

박영심은 고향이 평남 남포로, 18살이던 1938년 3월 돈벌이가 있다는 일본 경찰의 말에 20여 명의 젊은 여성들과 함께 평양역에서 기차에 올랐고 후에 난징에 도착했다. 난징에서 우타마루(歌丸)라는 이름으로 3년간 일본군 성노예 생활을 하였다. 그녀는 난징에서 '긴스이로'(1998.5.27. 증언 영상)에 수용되었는데, 일본군 병영에서 500m 떨어진 3층 벽돌집이었다. 1942년 초여름 다시 상하이,싱가포르를 거쳐 미얀마 라모(拉孟) 위안소로 보내졌다. 그곳에서 2년을 보내고 다시 윈난성 쑹산 위안소에 수용되었다가 1944년 중국군에 의해 발견되었다. 이후 일본군 포로와 함께 쿤밍 수용소에 수감되어 7개월을 보내고 해방 후 광복군이 있는 충칭으로 보내졌다. 1946년 2월 인천 서울을 거쳐 9년 만에 고향 남포에 도착하였다. 1993년 여름 북한 '종군위안부 및 태평양전쟁 피해자 보상대책위원회' 관계자가 그녀를 찾아 방문하고 사실을 확인했다. 이후 그녀는 2000년 12월 일본 도쿄에서 개최된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국제법정'에 참여했다. 당시 현장 배경에는 윈난 쑹산에서 촬영된 '만삭의 '위안부'' 사진이 올려졌고, 중국 측 대표들과의 만남에서 두 장의 나체 '위안부' 사진이 그녀라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2003년 박영심은 난징 리지샹 위안소 유적을 방문하고 그곳이 바로 자신이 '위안부' 생활을 했던 고통의 현장임을 확인하였다.

 

난징 리지샹위안소 유적전시관에서 만난 '눈물'과 기록  

이번 중국 위안소 유적지・박물관 탐방에서 방문한 난징 리지샹위안소 유적전시관(南京利濟巷慰安所舊址陳列館)은 2015년 12월 1일 개관했다. 현주소는 난징시 친화이취 리지샹 2호(秦淮區利濟巷2號)이다. 일본군 위안소 유적을 기초로 세워진 '위안부' 역사 전시관으로 부지 3680㎡에 8개(전시관 6, 사무실 2)동 건물로 조성되었다. 현재는 '중국 침략 일본군 난징대학살 희생동포기념관'(侵華日軍南京大屠殺遇難同胞紀念館)의 분관이다. 
전시관의 구조와 전시 내용을 살펴보면, 우선 전시관 중앙 앞쪽 광장에서 관람이 시작된다. 광장은 '눈물'을 테마로 조성되어 '위안부'의 고통을 상징하는 눈물 방울들이 중앙 건물 외벽에 흐르듯 장식되어 있다. 눈물의 벽 앞에는 '만삭의 '위안부'' 청동 조각상이 놓여있다. 광장 한쪽 벽 전면에 70명의 각국 '위안부' 생존자 얼굴 사진들이 있는데, 그 중에는 이미 고인이 된 한국 할머니들의 모습도 보인다. 


 

전시관은 세 구역으로 나뉘어 '기본전시(A구역)', '옛터전시(B구역)', '테마전시(C구역)'의 순서로 이어진다. 기본전시(A구역)는 「제2차 세계대전 중의 성노예 – 일본군 '위안부' 제도 및 그 죄행전」이다. 전시 내용은 5개 부분으로 나누어 일본군 '위안부' 제도의 기원·확립·실시·확대 그리고 '위안부' 문제와 역사의 기억 등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다음으로 옛터전시(B구역)은 「진링의 악몽 – 난징 일본군 위안소와 '위안부'의 역사적 사실전」이다. B구역이 바로 조선인 여성들이 수용되었던 동운위안소 건물로 '위안부' 피해자 박영심이 사용했던 19번 방을 재현해 전시하고 있다. 그리고 난징의 화월루·송하부귀루 위안소, 난징의 '위안부' 피해자 레이구이잉(雷桂英)과 역영란의 사례를 조명하고 있다. 마지막 테마전시(C구역)는 네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즉 「상하이 성노예의 눈물 - 상하이위안소와 일본군 '위안부' 제도의 죄증전」, 「중국 각지 일본군 위안소 - 중국위안부 피눈물의 기억전」, 「고통의 기억과 공소 - 한반도에서 온 일본군'위안부' 피해 역사전」 및 「여러 국적의 성노예」로 구성돼 있다. 전체 전시관의 전시는 일본군 '위안부' 제도의 역사와 그 죄상을 밝힘과 동시에 인권·인간성에 대한 성찰과 반전사상을 강조하고 있다.

 

 

 

난징 리지샹위안소 유적을 다시 찾으며  

난징은 역사 유적이 풍부한 도시이다. 그 중에는 한인들의 사적도 적지 않다. 중국사를 전공한 필자는 난징에서 유학하고 모교에서 한국학을 가르치면서 난징의 한인사, 20세기 전반 난징 한인 관련 기록과 유적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다. 조선인 '위안부'를 수용했던 위안소 유적과 기록들 또한 그 대상이다. 난징 리지샹위안소 유적은 전시관으로 개방되기 전부터 주변을 지나다 방문하곤 했다. 허술한 철문을 비집고 들어가 무너질 듯한 건물들 사이로 쓰레기 더미가 쌓인 현장을 돌아보거나 먼발치에서 건물들을 바라보곤 했었다. 이후 개방된 전시관의 모습은 다소 낯설고 당황스러웠지만 그것은 가치있는 변화였다. 머나먼 이국 땅 난징에서 식민지 조선인 여성들이 흘린 눈물로 얼룩진 역사 현장이 모두가 기억하고 성찰하는 소통의 장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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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윤은자

난징(南京) 한인사 연구자로, 전 난징대학 한국어문학과 부교수를 지냈다. 고려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했고, 중국 난징대학에서 중국근현대사 박사 학위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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