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의 목소리로 만나는 <오키나와의 할머니>

야마타니 데쓰오 웹진 <결> 편집팀

  • 게시일2024.08.06
  • 최종수정일2024.08.07

<2024 웹진 '결' 온라인 영화제> 상영작 이야기
감독의 목소리로 만나는 <오키나와의 할머니>

[사진 1] 웹진 결 온라인 영화제 - 오키나와의 할머니 ⓒ이사각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웹진 <결>은 '2024 기림의 날'을 기념하는 온라인 영화제를 개최한다. 2024년 8월 14일부터 8월 27일까지 퍼플레이 온라인 극장에서 함께할 수 있는 <웹진 '결' 온라인 영화제>는 '입을 떼다', '귀를 열다' 두 개의 주제로 나누어 일본군'위안부' 문제와 관련해 다양한 결을 포착해 담아낸 국내외 영화를 소개한다. 국내 최초로 선보이는 작품을 비롯해 접할 기회가 많지 않았던 작품도 여럿 포함돼 있다.
웹진 <결>은 영화제 관련 소식과 함께 작품에 대한 이해를 돕는 컨텐츠를 4회에 걸쳐 게재한다.

 

<2024 기림의 날 웹진 '결' 온라인 영화제>의 첫 상영작인 <오키나와의 할머니>. 야마타니 데쓰오 감독은 김학순 할머니가 1991년 대한민국에서 처음으로 '위안부' 피해 사실을 공개 증언하기 12년 전인 1979년 일본에서 '위안부'의 존재를 세상에 알렸다. 여러 해에 걸친 자료 조사에 이어 마침내 배봉기 할머니를 만난 야마타니 데쓰오 감독은 '누군가 기록을 남겨야 한다'는 말을 남겨 놓았다. '최초'라는 점에서 그 의미를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영화 <오키나와의 할머니>가 나오기까지 감독의 심경을 쫓아가본다.

남자인 내가 여성의 시점으로 이 영화를 만드는 것은 애초에 무리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별로 다뤄지지 않았던 침략당한 측의 가난한 사람들, 그 중에서도 여성의 역사를 기록하는 것은 남녀를 불문하고 기록자의 의무가 아닐까.

1979년 <오키나와의 할머니>를 완성한 야마타니 데쓰오 감독이 직접 작성한 '감독 노트' 중 5월 3일에 남긴 기록의 일부이다. 영화의 주인공인 배봉기 씨를 처음 취재하기 시작한 1977년부터 영화가 완성되기까지, 야마타니 감독의 마음 한 켠을 무겁게 누르고 있던 것은 자신이 이 기록을 남길 '적격자'가 아닐 지도 모른다는 내면의 끊임없는 질문이었다. 

그는 남성인 자신보다는 같은 민족의 여성이 이 기록을 받아 적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하는 회의감에 내내 휩싸였으나, 그럼에도 끝끝내 카메라를 놓지는 않았다. "누군가는 기록을 남겨야 한다"는 기록자로서의 의무감이 발동했기 때문이다. 야마타니 감독은 "언젠가 나타날 여성 기록자에게 바통을 넘겨줄 생각"으로 <오키나와의 할머니>를 만들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는 카메라 앞에 서서 증언하는 이가 배봉기 씨 혼자일지라도 그녀의 말 뒤에 수많은 여성들이 있음을 상기하기를, 영화를 통해 '위안부'들의 존재가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은 이들에게 알려지기를 바라며 첫 상영 소감을 짧게 남겼다.

그로부터 40여 년 뒤인 2016년 , <오키나와의 할머니>가 한국DMZ영화제에 초대받아 한국에서 상영되었다. 영화는 당시 큰 반향을 일으켰고, 이 작품을 본 재일한국인 박수남 감독이 야마타니 감독에게 연락을 하게 되면서 두 감독의 만남이 성사되었다. 그리고 2018년 12월 일본 업링크 시부야에서 <오키나와의 할머니>와 박수남 감독의 <침묵>(2016)이 함께 상영되었다. 기대 이상의 반응이었다. 넘치는 관객들을 그대로 돌려보낸 것이 미안하고 아쉬워 3개월 뒤 같은 장소에서 앵콜 상영까지 진행하였다.

이 일련의 과정을 지켜본 야마타니 감독은 궁금했다. 40년 가까이 지난 '낡은 영화'에 왜 이다지 관객들이 모이는가! 이 '서툰' 영화의 무엇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있는 것인가? 2018년 <침묵>과 동시상영을 했던 당시, 야마타니 감독이 남긴 소회의 글에서 이러한 질문에 대한 감독 나름의 생각을 엿볼 수 있다.

첫째, 감독(나) 자신이 '위안부'였던 배봉기 할머니의 말에 넘어가, 미소라 히바리의 '사과의 추억'을 음치인 목소리로 열창하는 것이다. 배 할머니는 전후, 오키나와의 술집에서 일하며 남자를 다루는 것에 익숙해졌다. 이 장면에서는 조용했던 관객석이 폭소로 가득 찼다. 하지만 나는 부끄럽다. '위안부'를 일면적인 피해자로 '섹슈얼라이즈'하는 것은 잘못되었다. '위안부'라는 존재는 인간적으로 더 복잡한 면을 지니고 있다.

둘째, 배 할머니는 누구에게나 "일본이 이기기를 바랐어요. 네, 저는 이길 줄 알았어요"라고 태연하게 단언한다. '전 조선인 위안부'가 자신 있게 단언하면, 녹음하고 있던 내가 주눅이 들 정도였다. 내 어리둥절한 목소리가 그대로 동시녹음 마이크에 담겨 있다. 전쟁 전, 조선총독부가 추진한 '내선일체'가 배 할머니에게는 전후에도 살아있다. 배 할머니는 철저한 '황국 할머니'였다. 일본이 36년간 조선반도에서 무엇을 했는지, 배 할머니가 그 생생한 증인이다.

셋째, 영화는 공개 직후, 전국적으로 반향이 있었고, 배 할머니에게 많은 성금이 모였다. 나는 즉시 그 성금을 가지고 할머니에게 달려갔다. 할머니가 처음 산 것은 금반지(조선에서는 결혼의 상징)였다. 그리고 나를 집에서 준비한 저녁식사에 초대해 주었고, 식사 후 "맛있었네, 부부 같아."라고 갑자기 고백하는가 하면, 어머니에게 버림받아 극도로 가난한 생활을 했던 소녀 시절을 떠올리며 울기도 했다.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그저 우왕좌왕할 뿐이었다. 

야마타니 감독이 생각하기에 일본군'위안부'라는 존재가 가진 인간적인 복잡성이야말로 <오키나와의 할머니>에 깃들어 있는, 사람들을 움직이게 하는 힘이었다. 굳어진 선입견을 버리고, 치밀하고 복잡한 현실을 직시하게 만드는 힘이 이 영화에 있었다. 그 중요성을 가르쳐주고 있다는 것, 그것이 <오키나와의 할머니>가 이토록 오랫동안, 지금도 여전히 상영되는 의미이다. 

 

관련 상영작품 

🎬 오키나와의 할머니 | 일본 | 야마타니 데쓰오 | 1979년
상영 기간 : 8월 14일(수) ~ 8월 20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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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야마타니 데쓰오

일본 다큐멘터리 영화 감독이다. 1979년 <오키나와의 할머니>를 통해 일본 오키나와에 살고 있던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배봉기의 존재를 세상에 알렸다. 와세다대학 재학 중 독립영화 제작 단체를 설립해 오키나와에서의 집단자결, 강제이주 등 아픈 역사를 다룬 작품들을 만들어왔다.

글쓴이 웹진 <결> 편집팀

Editorial Team of Webzine <Kyeo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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