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수남과 함께하는 ‘여행’

오이와케 히데코 웹진 <결> 편집팀

  • 게시일2024.08.06
  • 최종수정일2024.08.07

<2024 웹진 '결' 온라인 영화제> 상영작 이야기
박수남과 함께하는 '여행'

[사진 1] 웹진 결 온라인 영화제 - 아리랑의 노래 ⓒ이사각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웹진 <결>은 '2024 기림의 날'을 기념하는 온라인 영화제를 개최한다. 2024년 8월 14일부터 8월 27일까지 퍼플레이 온라인 극장에서 함께할 수 있는 <웹진 '결' 온라인 영화제>는 '입을 떼다', '귀를 열다' 두 개의 주제로 나누어 일본군'위안부' 문제와 관련해 다양한 결을 포착해 담아낸 국내외 영화를 소개한다. 국내 최초로 선보이는 작품을 비롯해 접할 기회가 많지 않았던 작품도 여럿 포함돼 있다.
웹진 <결>은 영화제 관련 소식과 함께 작품에 대한 이해를 돕는 컨텐츠를 4회에 걸쳐 게재한다.

 

예닐곱 살에 재일조선인으로 사는 슬픔을 알아버린 아이가 있었다. 열세 살에 자신이 자신으로 살아가는 것을 짓밟는 강력한 권력이 있다는 것을, 또 자신이 자신으로 있기 위해서는 싸워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몸소 배운 소녀가 있었다. 1935년생이니 올해로 여든아홉 살, 평생을 수많은 차별과 폭력에 반대하며 싸워온 다큐멘터리 감독 박수남 이야기다. 

일본군'위안부'와 강제노동에 동원된 조선인 군속, 재일조선인 같이 '낮고 상처 많은' 이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온 그에게 야마타니 데쓰오 등 일본 다큐멘터리 감독들이 존경을 보냈다. 특히 작가이자 편집자인 오이와케 히데코의 글에는 박 감독이 걸어온 길에 대한 웅숭 깊은 존경이 가득하다. 이번 <웹진 '결' 온라인 영화제>에서도 박 감독의 <아리랑의 노래 – 오키나와의 증언>을 만날 수 있다. 2023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비프메세나상'을 수상하는 등 국내에서도 점점 주목도를 높이고 있는 박 감독의 영화를 만나기 전후 오이와케 히데코의 글 두 편을 소개한다. 소제목을 붙이고 문장을 다듬는 등 약간의 편집 과정을 거쳤음을 밝힌다. 

 


#1_ 작가 오이와케 히데코가 말하는 박수남
하얀 한의 길

 

박수남은 '여행'이라는 말을 자주 사용한다. 그것은 '나는 누구인가'를 계속 자문해 온 여행이다. 재일조선인 2세로 태어난 그녀가 일본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여행이다. 그 속에서 그녀는 많은 동포의 삶과 만난다. 교수형을 당한 이진우, 히로시마의 재일조선인 피폭자, 배봉기 씨 등 조선인 '위안부', 그리고 조선인 군속들 등이다.

스스로 존재의 부조리를 물을 때, 그곳에는 마찬가지로 인생을 역사에 농락당하고 존재가 말살된 동포들이 있었다. 즉, 자신의 정체성을 묻는 여행은 언제나 '역사의 어둠을 따라 내려가는 여행'이 되었다. 거기서 그녀의 저서나 영화가 탄생했지만, 그녀를 움직이게 한 것은 자기 자신의 존재와 동시에 오빠의 존재였던 것 같다. 유능했지만 젊어서 자살한 오빠의 한. 그녀는 영화 속에서 종종 '오빠와 언니를 찾는 여행'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데, 언제나 만나는 사람들에게 오빠의 인생을 겹쳐온 것처럼 느껴진다.

 

사람들의 말을 잇는 무녀

박수남을 만난 것은 20년 전인 1991년, 그녀의 두 번째 작품 <아리랑의 노래-오키나와의 증언>이 완성되어 오키나와에서 상영회가 열렸을 때였다. 당시 나는 마이니치신문사의 『LOOK BACK』이라는 연감을 편집하며, 거기에 몇 편의 르포를 썼다. 그 중 하나로 박수남을 인터뷰하기 위해 오키나와를 찾아 약 10일간 상영위원회의 사무실에서 함께 지내며, 아카 섬과 자마미 섬에 동행했다. 당시 박수남은 55세, 온화한 따뜻함과 동시에 언제나 무엇인가에 대한 격렬한 분노 모두를 지니고 있었고, 그 열량의 크기와 타협을 허락하지 않는 엄격함에 놀랐던 기억이 있다. 실제로 눈앞에서 전화 상대와 격렬하게 말다툼하는 모습을 몇 번이나 목격했다. 나중에 그 말다툼 중 몇 개는 영화 장면 삭제 요구였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박수남에 대해 정말 놀란 것은 그게 아니었다. 증언하는 사람들에 대한 깊은 애정과 관계성을 소중히 여기는 그 철저한 자세였다. 예를 들어, 그 상영회 전후 아카 섬이나 자마미 섬의 노인들 집에 박수남은 자주 방문해 술을 나눴다. 그들로부터 이미 여러 번 이야기를 들었고, 그것은 영화 필름에도 기록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박수남은 또 몇 번이고 방문해 귀를 기울이며 진지하게 이야기를 들었다. 그래서 나는 박수남도 처음 방문한 집인 줄 알았다. 

언론의 취재에서는 '증언 채록'을 중요하게 여기고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소홀히 하는 경향이 있는데, 박수남의 자세에서는 그것을 전혀 느낄 수 없었다. 그녀는 자신의 작품을 위해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혹독한 경험과 마음에 감추어 둔 이야기를 풀어내고 전달하기 위해, 자신이 매개체가 되고 있는 것 같은 인상을 받았다. 말하고 싶어도 말할 수 없는 사람들로부터 말을 끌어내는 무녀처럼. 

그것은 영화에서도 강하게 느껴졌다. 한국과 오키나와에서 사람들은 박수남과 만나지 않았다면 평생 말하지 않았을 생각들을 풀어내고 있다. 두 번의 큰 병을 겪고 난 박수남이 2006년 오랜만에 오키나와를 방문했을 때, 섬의 노인들이 그녀를 따뜻하게 맞이하며 한 말이 상징적이다.

"네가 다시 올 수 있었던 것은, 신이 너를 데려왔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시간이 없다. 이 섬에서는 죽은 자도 아직 성불하지 못했다."

그런 박수남의 자세가 있었기에 20여 년의 세월을 거쳐 이번 영화가 완성될 수 있었다고 밖에 말할 수 없다. 세토우치 자쿠초 씨가 영화 전단지에 써 준 글 중에 "진실은 이렇게 반드시 누군가의 힘으로 세상에 전해지는군요."라는 문장이 있다. 그렇다, 박수남은 역사의 깊은 어둠에 봉인되어 있던 진실을 이 세상에 전하는, 역사의 무녀일지도 모른다.

 

고마쓰가와 사건, 이진우와의 만남

박수남은 1935년 일본 미에현에서 태어나 요코하마에서 자랐다. 아버지는 토목 공사 현장 감독이었다. 부하라 불린 낮은 직급의 인부들은 조선인 부락에 살았지만 박씨 집은 일본인 주택가에 있었고, 비교적 부유한 생활을 했다. 그러나 다섯 살 때 치마저고리를 입은 어머니가 돌을 맞고 욕설을 들은 무서운 경험을 한다. 그녀 또한 초등학교에서 괴롭힘을 당했다.

"이 세상에 존재해서는 안 되는 것 같은 눈길로 일본인들에게 배척당했다. 지금까지 함께 놀던 여자 아이들도 같이 놀지 않게 되었다. 가족에게 사랑받으며 자란 내게 밖에서 배척을 당하는 일은 엄청난 충격이었다. 안데르센의 인어 이야기는 눈물 없이 읽을 수 없었다. 만약 마녀가 나를 일본인으로 만들어준다면 목소리뿐만 아니라 다리도 기꺼이 바칠 것 같았다."

더욱이 '일본인인 척'하면 배척당하지는 않을지라도 그것은 더 깊은 고통을 낳는다고 그녀는 말한다.
"일본인인 척하고 있는 나를 견딜 수 없고, 자신이 찢겨 나가는 것 같았다. 자신이 찢겨 나간다는 것은 자연과 분리되는 것이다. 빨간 꽃이 빨갛게 보이지 않게 된다. 자연의 색 모두가 바래져 간다. 햇빛이 얇은 베일에 덮인 것처럼 보인다. 이상한 경험이었다. 내 영혼은 그 당시 병들어 있었다."

'고마쓰가와 사건'의 이진우와 관련이 깊어진 건 이러한 경험이 있기 때문이었다. 고마쓰가와 고등학교 야간부에 다니는 여학생과 세 살 여아를 살해한 혐의로 당시 열여덟 살이던 이진우가 체포된 것은 1958년 여름이었다. 그는 극빈한 환경 속에서도 '명랑하고 활달한' 학년 리더, 일본인 '가네코 진우'로 살았다. 그러나 체포 후 "꿈속의 꿈처럼, 그녀들은 베일 너머에 있었고, 자신이 죽였다는 실감이 나지 않는다. 정말 내가 죽인 것일까."라고 고백했다. 이 고백에 박수남은 자신이 겹쳐지는 것을 보았다.

"눈이 시릴 정도로 충격이었다. 이진우는 나이기도 했다. 자신으로부터 도망쳤을 때 어떻게 인격이 분열되는지, 나는 너무 잘 알았다."
박수남은 당시 22세였다. 2년 전부터 시가현의 한 시골 초등학교에 다니는 민족학교 교사였던 박수남은 담임의 가방에서 급식비를 훔친 소년 사건을 계기로 남북 아이들이 함께 공부할 수 있는 민족교육을 제안하면서 교사 집단에서 고립됐고, 도망쳤다. 그런 박수남에게 이진우는 "그 마을에 두고 온 소년들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가와사키에서 작은 사설 학교를 열고, 유흥가를 떠도는 불량 청소년들을 "조직화"하며, "자신을 회복시키는 장소"를 만들려고 했다. 그녀는 조선 중·고등학교에 진학하며 자신의 문화에 대해 알게 되면서 "색이 돌아오고, 자신이 조선인임을 느끼며 버틸 수 있게 되었다." 사설 학교에서 사용한 교재는 "내 이야기를 쓸 것이다-검고 아름답다"고 쓴 미국 흑인 시인 랭스턴 휴즈의 시집 『니그로와 강』이었다. 그리고 가와사키의 동포 소년들에게 다가가듯이 이진우에게 편지를 쓰고 면회실을 교실로 만들었다. 두 사람의 편지를 묶어 엮은 서한집 『죄와 죽음과 사랑과』는 나중에 출간돼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조선인도 일본인도 아닌 반쪽발이의 비참함, "하얀 시선의 포위" 속에서 "광대 역할을 하며" "자신을 죽여 가는" 동포들. 당시 박수남이 반복해서 쓴 문제의식이다. 

"우리는 존재와 비존재의 사이에 매달려, 찢겨 나간다. 그때 갑자기 죽음이 떨어지는 것이다."

1962년 1월, 체포 후 4년 만에 이진우는 교수형에 처해졌다. 향년 22세. 그로부터 3년 전에 형이 자살했다.

 

"어머니 보고 싶어요, 배가 고파요, 고향에 가고 싶어요"

박수남의 여행은 1964년부터 시작된다. 그녀는 조총련(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으로부터 '공화국의 재외 국민에게 범죄자는 존재하지 않는다'며 고마쓰가와 사건에 관여하는 것을 금지 당했다. 한편 1960년 민주화와 남북통일을 요구한 4월 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을 무너뜨린 청년들에게 충격을 받아 한국 유학을 신청했지만 입국을 거부당했다.
"나는 남북의 경계, 틈새에 서 있었다. 내가 설 수 있는 기반이 없었다." 

그런 그녀에게 '부모의 역사를 아는 여행'은 지쿠호와 히로시마에서 시작되었다. 지쿠호의 폐허가 된 탄광 마을을 방문했을 때 검은 벽에 쓰인 세 줄의 한글 낙서에 그녀는 큰 충격을 받았다.

"어머니 보고 싶어요, 배가 고파요, 고향에 가고 싶어요"

산사태 사고로 사망한, '코바토(小鳩)'로 불리던 하얀 피부의 14세 소년의 글이었다. 개와 고양이의 무덤에 묻혔다는 소년의 간절한 외침. 이것이 박수남의 원점이 되었다. 

"이 소년의 어머니를 만나고 싶은 마음이 계속 있었다. 이전 작품의 한국 로케 때 소년의 고향을 찾아갔지만 찾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이 소년이 내 영혼 깊은 곳에서 계속 울려 퍼지며, 나를 여행으로, '누치가후'에 이르게 하는 여행으로 이끌었다고 생각한다."

 

침묵을 촬영하다, 영상의 세계로

히로시마의 동포들이 사는 원폭 슬럼에 들어간 것도 1964년이었다. 당시는 조선인 피폭자의 존재조차 알려지지 않았던 때였다.
"내 여행은, 죽은 자들을 포함해 존재들을 찾아내는 것에서 시작된다. 존재 그 자체를 발굴하는 작업이다. 그들은 가난한 원폭 슬럼에 살면서도 피폭 경험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고 있었다." 

박수남은 원폭 슬럼의 피폭자 집에 기숙하며, 그곳 할머니와 함께 작업화를 신고 실업대책 사업 현장을 돌며, 한 사람 한 사람 피폭자를 발굴해 이야기를 듣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쓰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영상에 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히로시마에서도 탄광에서도, 그 시대에 일본의 정책에 협력했던 조선인들은 매우 유창한 일본어로 얼마나 끔찍한 일을 당했는지 말한다. 자기비판은 전혀 없이. 하지만 실제로 가장 고통받은 동포는 일본어는 서툴고 조선어도 소박해 말할 수 있는 언어가 없다. 그들이 더듬더듬 말할 때의 표정과 침묵, 이것이 대단하다. 눈 속에 파란 도깨비불 같은 것이 타오른다. 한이라고 생각했다. 억울한 생각이다. 침묵이 그들의 말이라고 생각했다. 이것을 내 말로 표현하면, 그 침묵을 떨어뜨리는 것 같았다. 이것은 영상이다, 카메라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영화 <또 하나의 히로시마-아리랑의 노래>의 크랭크인은 1986년, 이듬해 완성했다. 증언 발굴부터 무려 20여 년의 세월이 걸렸다. 이 작품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10만 명에 달하는 조선인 피폭자의 존재를 무시해 온 일본의 반전 반핵 운동에 큰 충격을 주었고, 전국적으로 자발적인 상영이 물결처럼 퍼졌다. 그리고 상영을 계기로 1987년 세계 원수폭금지세계대회에서 처음으로 조선인의 피폭 문제가 다뤄졌고, 피폭자에 대한 국가 보상 요구까지 채택됐다.
나도 이 영화를 보았을 때의 충격을 잊지 못한다. 모든 빛을 두려워하며, 깜깜한 좁은 벽장 속에 갇혀 있던 소녀, 원폭 슬럼에 사는 할머니들의 모습. 목소리를 높이는 영화가 아니다. 조용히 차분히 그 억울함과 슬픔이 다가온다.

 

오키나와와의 만남, 깊은 침묵의 섬으로

박수남이 오키나와와 처음 만난 것은 1972년이었다. 오키나와 반환의 해, "나는 속아서 도카시키 섬의 위안소로 끌려갔다"고 밝힌 배봉기 씨의 존재를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박수남의 주장은 '전장에서 성을 팔며 다닌 창녀'라는 기존의 통설이나 속설을 뒤엎고, 강제 동원된 남성과 마찬가지로 '국가에 의한 성 노예'라고 인식했다. <또 하나의 히로시마-아리랑의 노래>가 상영되면서 그 배봉기 씨가 오키나와를 방문한 1987년, 언론에 노출됐다. 그곳에서도 그녀는 '강제 동원된 피해자'가 아니라 '국가와 군대에 성을 판' 여자로 취급받았다.

"동성으로서 그것들은 견디기 어려웠다. 같은 조선인 여성의 손으로 만든 영상으로 그녀가 고발한 진실을 복권시키고 싶다고 생각했다."
'아직 전쟁이 끝나지 않은' 오키나와, 전쟁 중에 강제 연행된 옛 군속들의 존재, 배봉기 씨. 이들에 대한 생각이 두 번째 작품 <아리랑의 노래-오키나와의 증언>으로 이어졌다.

"처음에는 제가 조선인이라서 받아들여졌다고 생각했다. 섬 사람들에게 위안소의 여성이나 군속들의 이야기를 들으러 가면 '당신은 가족인가요?' 라고 묻곤 했다. 나라를 빼앗긴 운명을 공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나의 오키나와 취재는 시작됐다. 그러나 침묵은 매우 깊었다."
상영 후에도 박수남은 '위안부'들의 사죄와 전후 보상을 요구하는 싸움을 지원했고, 1997년 도카시키 섬에 배봉기 씨 등 '위안부'의 영혼을 위로하는 '아리랑 위령의 기념비'를 건립했다. 그러나 일본 정부의 '국민 기금 정책'으로 전환된 이후 그 운동은 고립되기 시작했다. 

한편 영화 상영 후인 1992년, 박수남은 살아 돌아온 군속들을 오키나와로 초대하는 데 분주했다. 이 통곡과 위령의 여행이 이번 영화의 후반부에 그려져 있다. 또한 두 번째 작품 취재를 통해 사람들의 가슴 속에 봉인된 '옥쇄'의 실체를 밝히고자 하는 생각이 생겼다. 그러나 1990년대 후반, 영화 제작은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왼쪽 눈의 실명, 맹학교 입학, 대장암, 그리고 재발….

"더 이상 영화 제작은 무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옥쇄'의 10만 피트가 신경 쓰이고 신경 쓰여, 죽을 수도 없었다."
전환점은 2005년이었다. 야마가타 국제 다큐멘터리 영화제에 참가하면서 "포기했던 영화 제작에 대한 의욕이 솟구쳐 올랐다." 동시에 암 수치가 사라지고 체력이 회복되고 있음을 실감하며 후지산 등반도 했다. 2006년 1월, 박수남은 오랜만에 오키나와의 게라마 제도를 방문했다. 그곳에서 자마미 섬에 주둔했던 전 육군 대장 우메자와 히로시 씨 등이 옥쇄 명령은 군 명령이 아니라며 이와나미 서점 등을 제소한 이야기를 들었다. 옥쇄 명령은 마을 조장의 명령이었다는 것이다. 그 증거로 제시된 것은 전후 조장의 동생이 쓴 '기억노트'였다. 

그러나 15년 전, 그 조장의 동생은 박수남에게 술에 취해 속았다며 후회한다는 이야기를 했었다. 당시 박수남은 터무니없는 이야기라고 반신반의했지만, 그것이 재판의 증거로 제출되었다. 그녀는 나하의 병원에 입원 중인 조장의 동생을 찾아갔다. 동생은 중태임에도 명확히 말했다. 박수남은 그 내용을 모두 녹음하고 촬영했다. 

이렇게 등을 떠밀리듯 세 번째 영화 작업이 재개되었다. 그 이듬해인 2007년 문부과학성이 교과서 검정에서 '옥쇄의 군 명령을 삭제하라'는 수정 의견을 붙였다. 옥쇄를 강요받은 오키나와 사람들의 억울함, '치무구루시(チムグルシ. 오키나와 방언으로 한과 비슷한 뜻)'는 어디로 가는 것인가. 정말로 오키나와 할머니의 말대로 '신이 당신을 다시 데려왔다'는 타이밍에 <누치가후>가 완성됐다.

아마도 박수남의 여행은 계속될 것이다. 나는 다시 한 번, 50년에 걸친 '박수남의 여행'이 우리에게 가르쳐준 진실의 크기와 깊이에 놀라고 있다.

 

[사진 2] 2018년, 영화 '침묵' 상영과 함께 영화 '오키나와의 할머니'가 다시 상영되는 것에 관하여 소회를 밝힌 오이와케 히데코의 글이 담긴 글 원문

 

 


#2_ 박수남의 목소리
자신을 빼앗기고 있는 사람은 경험도 빼앗기고 있다

 

영화 <아리랑의 노래-오키나와의 증언>(1991)이 '나는 어디서 왔는가'라는 내레이션으로 시작하듯이 나는 반생을 나 자신을 발견하고 확인하며 일본에서 살아가는 정체성을 창출해가는 여행 속에서 살아온 것 같다. 그 여행 속에는 히로시마도 있었고, 히로시마에서 오키나와로의 여행도 있었다.
패전 후 아버지는 절의 본당에서 한글 교실을 열었고, 딸에게 민족교육을 받게 하려고 나를 조선 중·고등학교에 입학시켰다. 처음에는 싫었다. 그러나 거기서 역사를 배우고, 자신의 나라의 문화를 알게 되면서 색이 돌아오고, 빛이 나기 시작했다. 자신이 조선인임을 견뎌낼 수 있게 되었다.

 

자신으로 있기 위해선 싸워야 한다는 걸 알아버린 아이

그런데 오래지 않아 조선인학교 폐쇄 명령이 내려졌다. 어느 날 학교에 경찰이 '돌격'해 왔다. 1.5m나 되는 참나무 막대를 휘두르며 들이닥쳤다. 우리는 교실에서 쫓겨 도망쳤다. 운동장에 내몰린 학생 수백 명은 참나무 막대로 무차별 구타당해 피투성이가 되었다. 우리는 아직 어린아이였다. 나는 '도망가면 죽는다!'고 외치며 스크럼을 짜고 '조선인이 일본 학교에 왜 다닐 수 없느냐'며 맞섰다. 이것이 내가 권력과 맞선 첫 경험이었다. 13살이었다. 이때, 자신이 자신으로 살아가는 것을 짓밟는 강력한 권력이 있다는 것을, 자신이 자신으로 있기 위해서는 싸워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몸소 배웠다.

조선고등학교 3학년 때였다. 전학련 대회 때 갔던 센다이에서 조선인 부락을 방문했다. 아이들이 차별받아 일본 학교에 다니지 않고 방황하는 현실을 보고 교사가 되기로 결심했다. 다음 해 민족학급의 교사가 되었다. 민족학급은 간사이 지역에 지금도 남아 있는, 공립 초등학교에 마련된 조선인을 대상으로 한 방과후 교실이다.

그러나 두 번째로 부임한 시가현의 사메가이 마을의 초등학교에서 단 한 학기 만에 그만두고 도망쳐 나왔다. 당시 한국 국적의 4학년 남학생 명연희라는 아이가 담임 교사의 가방에서 급식비를 훔쳐 나간 뒤 며칠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은 일이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빨갱이를 싫어해 아이를 민족학급에 보내지 않았다. 다른 민족학급 교사는 '남자아이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공민이 아니므로 우리와는 상관없다'고 했다. 그러나 같은 동포 아닌가. 재외 공민이 아니라고 배제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런 아이가 올 수 없는 민족교육은 무엇인가. 나는 급여와 보너스로 8천 엔을 만들어 그의 집에 찾아갔다. 끝내 그의 어머니는 학교에서 받을 수 없다고 말하며 돌려주었지만, 이 행위가 영웅주의라는 비난을 받으며 나는 고립되었다. 좌절이었다. 나는 젊었고, 견디지 못해 도쿄로 돌아왔다. 그때 '고마쓰가와 사건'이 있었다. 내가 두고 온 명연희와 이진우가 겹쳐 보였다. 이진우는 명연희였다.

 

이진우와 명연희

이진우가 체포된 것은 1958년 여름이었다.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아찔한 충격이었다. 이진우는 나이기도 했다. 자신으로부터 도망쳤을 때 어떻게 인격이 분열되는지 나는 너무 잘 알았다. 잡히지 않았다면 계속해서 살인을 저질렀을 것이다. 살인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실감이 나지 않았다. 자신을 빼앗긴 사람의 경험은, 경험 그 자체도 빼앗긴 것이다. 살해한 그녀와 자신 사이에 깊은 심연이 가로놓여 있어, 그녀들과 자신이 하나가 될 수 없다. 그녀들은 베일 너머에 있는 것이다. 그 시대, 같은 세대의 동포들 가슴에는 누구나 이진우가 있었다.

'이 소년을 구하는 모임'이 만들어지고 나에게도 호소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나는 이 소년에게 직접 다가가기보다 많은 R들에게 호소하기로 선택했다. 당시 나는 가와사키의 나카토미(현 사쿠라모토)에 작은 학원을 열고 유흥가를 배회하는 '비행' 동포 소년들을 조직하고 있었다. 자신을 회복시키는 장소인 그 학원에서 사용한 교재는 '검고 아름답다'라는 말이 있는 미국 흑인 시인 랭스턴 휴즈(Langston Hughes)의 시집 『니그로와 강』(The Negro Speaks of Rivers)이었다.

그러다 피해자 가족의 집을 방문했다. 피해자의 나이 든 소박한 아버지는 '소년의 성장 과정도 불쌍하다, 그가 훌륭한 사람이 되어 준다면 딸도 기뻐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피해자의 부모님은 '일본인이 조선인에게 끔찍한 일을 했음에도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우리 딸 한 명을 죽인 일로 많은 조선 사람들에게 편지와 향을 받았다. 소년이 훌륭한 사람으로 성장하여 밖으로 나갈 수 있다면, 작은 공간이지만 그를 맞이하겠다'라고 말했다. 

이것은 엄청난 일이었다. 나는 이 말을 듣고 내가 할 일은 무엇인가를 생각했다. 감형 운동을 부탁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먼저 그 소년을 만나 자신의 회복을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가와사키의 학원에서 했던 것처럼. 이렇게 시작되었다. 나머지는 서한집(박수남 편 『이진우 전 서한집』)에 쓰여 있는 대로다. 편지를 쓰고 면회실이 교실이 되었다. 그러나 고마쓰가와 사건에 관여했다는 이유로 나는 조총련에서 추방되었다. 귀환 운동이 전개되고 일한 친선 무드가 고조되는 시기에 이런 파렴치한 사건을 문제 삼는 것은 분위기를 해치고 깎아내리는 것이 된다고. 애초에 그는 한국 국적이고 공화국 공민이 아니므로 상관없다고 했다. 사회주의 환상이 고조되고 있는 '천리마의 나라'를 배경으로 한 조총련에서 추방된다는 것은 엄청난 일이었다.

 

한, 파란 귀신불 같이 타오르는 침묵

나의 긴 여행은 1964년부터 시작되었다. 1960년 4월 혁명으로 이승만을 무너뜨린 청년들을 만나고 싶어서 한국에 유학하려 했으나 박정희 정권에 충성을 맹세하는 것을 거부한 탓에 갈 수 없었다. 북쪽 나라에서도 추방당했는데 말이다. 이때 국가란 무엇인가라는 문제에 직면했다. 개인이 자유롭게 살고, 생각하고, 발언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 것. 나는 일본에 있으면서 두 개의 국가에서 추방당하고, 배제되어, 망명자와 같은 상태였다. 그러한 상황에서 나는 이 나라에 남아 생활하는 의미를 묻기 위해 부모님의 역사를 알기 위한 여행을 시작했다.

히로시마로의 첫 여행은 침묵과의 만남이었다. 조선인들은 확실히 존재했으나, 피폭자로서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정말로 가난한 원폭 슬럼에 살면서도 피폭 경험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들은 전혀 문제로 여겨지지 않았다. 그런 버려진 사람들에게 빛을 비추고 싶었다. 나는 원폭 슬럼의 피폭자 집에 기숙하며, 그곳 할머니와 함께 작업화를 신고 실업대책 사업 현장을 돌아다니며 한 사람 한 사람 피폭자를 발굴해 이야기를 듣기 시작했다.

히로시마에서도, 어느 탄광에서도, 그 시대에 일본의 정책에 협력한 조선인들은 매우 유창한 일본어로 자신들이 얼마나 끔찍한 일을 당했는지를 구술했다. 자아비판이나 전쟁 책임은 전혀 없이. 그러나 실제로 가장 고통받은 동포들은 일본어가 서툴고, 조선어도 소박하며, 말할 수 있는 단어조차 부족했다. 그런 사람들과의 작업은 침묵을 듣는 일이었다. 그들이 더듬더듬 말할 때의 표정이나 침묵, 그것은 대단했다. 주름 속에 깊이 새겨진 눈 속에서 파란 귀신불 같은 것이 타오르고 있었다. 나는 그것을 '한'이라고 생각했다. 억울한 마음, 그것이 눈 속에서 불타고 있었다. 그런 침묵과의 만남이 무엇보다 영화 제작의 계기가 되었다.

 

원폭 슬럼에서 만난 할머니를 찍고 싶었다

말이 필요 없는, 일상만을 영상에 담고 싶다는 할머니가 있었다. 그녀는 전쟁 전에 먼저 온 남편의 부름을 받고 히로시마에 왔다. 그때 폐품 수집을 위해 조선인 슬럼 밖으로 나갔다. 그 마을에서 일본인들이 자신을 보는 눈에 놀랐다고 한다. 문명인일 것 같은 일본인들이 자신들을 보는 눈은 인간의 눈이 아니었다고, 짐승의 눈이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녀는 웃었다. 그 말은 충격적이었다. 나는 마비된 듯했다.

어렸을 때 어머니와 거리를 걷다 보면 돌을 던지고 욕설을 퍼붓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때 주위 사람들이 우리를 보는 눈은 마치 짐승을 보는 눈 같았다. 내가 마치 짐승의 자식인 것처럼. 나는 얼어붙어 걸을 수 없었다. 어머니와 함께 거리를 걷는 것이 싫어졌다. 사랑하는 엄마에게서 도망치고 싶었다. 나는 조선인이 아니라고. 겨우 여섯 살, 일곱 살에 어머니를 사랑하는 것을 빼앗기는 것은 엄청난 일이었다.

그러나 원폭 슬럼에서 만난 그 할머니는 자신들을 보는 일본인들이야말로 짐승의 눈을 가진 짐승이었다고 말했다. 예전에 나와 함께 걷던 어머니가 일본인들을 어떤 눈으로 바라보았는지, 그녀와 만남을 통해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조선인 1세대는 그토록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았던 나락의 밑바닥에서 아이들을 낳고 키웠다. 바닥에서 그들을 지탱시켜준 것은 일본인들과 맞서며 그들이 인간이 아니라고 생각한 것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 2세대는 그들의 눈을 짐승의 눈으로 생각할 수 없었고, 나 자신이 짐승의 자식이라고 생각했다.

할머니와의 만남은 내게 매우 큰 의미가 있었다. 인간이 살 곳이 아니라고 불리는 원폭 슬럼에 사는 그녀의 집 부엌 냄비는 언제나 반짝였고, 이불 시트는 새하얗고, 그녀 자신도 언제나 풀먹인 마 치마저고리를 입은 모습이었다. 나는 그런 것을 찍고 싶다고 생각했다.

 

일본인 자신으로 있는 것을 빼앗긴 일본인

이번 영화 <아리랑의 노래-오키나와의 증언>(1991)에서도 강제로 연행되어 황민화 교육의 강요 속에서 변해간 조선인의 '한'을 다루었다.

일본군'위안부'도 그것만을 분리해서 생각할 문제가 아니라 천황제를 내면화해간 남자들, 여자들의 문제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게까지 완전히 자신을 빼앗겨 간 우리란 무엇인가라는 생각을 했다. 영화 <아리랑의 노래-오키나와의 증언>를 보고 "어디에 '위안부'가 있느냐"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위안부'라는 시스템은 국가 폭력에 의한 일상적인 강간, 윤간이다. 그녀들은 '매춘부'가 결코 아니며, 천황의 군대에 의한 성폭력의 일방적인 피해자 이외의 무엇도 아니었다. 물론 그녀들에게 한 푼의 보상도 없었다. 그것을 정당화한 논리는 천황제였고, 천황제가 무엇인지를 묻지 않고는 '위안부' 문제를 근본적으로 보여줄 수 없다고 생각한다. 전쟁이 시작되면서 전투력을 유지, 관리하기 위해 군이 위안소를 관리했다. 살육의 현장에서 돌아온 남자들이 그 위안소에 몰려들었다고 한다. 살해하는 병사로 만들어진 남자들의 성 또한 군에 의해 철저히 관리되었고, 삶도 빼앗겼다.

나는 과거에 나 자신으로 있는 것을 빼앗겼다. 그러나 지금은 오히려 일본인이 일본인 자신으로 있는 것을 빼앗겼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아시아의 눈으로 침략자를 보는 상상력을 빼앗겼기 때문에, 전후에도 여전히 일본인은 '모모타로'로 만들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상상력을 되찾으려면 역사의 진실을 되찾아야 하는데, 그것마저도 빼앗기고 있다. 영화 <아리랑의 노래>를 본 한 학생이 말했다. "박수남 씨는 '하얀 한의 길'을 걸어왔지만, 가해자인 일본인은 '빨간 한의 길'을 걸어온 건 아니었을까."

 

[사진 3] 1991년, 오이와케 히데코가 박수남 감독을 감독을 인터뷰한 내용을 담고 있는 글 원문

 

관련 상영작품 

🎬 아리랑의 노래 - 오키나와의 증언 | 일본 | 박수남 | 1991년
상영 기간 : 8월 14일(수) ~ 8월 20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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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미요조 2021.10.18

글쓴이 오이와케 히데코

일본 마이니치신문사의 연감을 편집하며, 르포를 쓰기 위해 박수남을 인터뷰한 작가이자 편집자이다.

글쓴이 웹진 <결> 편집팀

Editorial Team of Webzine <Kyeo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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