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장 없는 '주전장'과 정쟁화된 '위안부' 문제

이지은

  • 게시일2024.06.17
  • 최종수정일2024.06.27

미디어 속 일본군'위안부' 깊이 읽기 <2부>
 

'미디어 속 일본군'위안부' 깊이 읽기' 시리즈가 두 번째로 선택한 것은 일본계 미국인 미키 데자키가 감독한 영화 <주전장>이다. 영화는 일본군 '위안부' 담론에 참여하고 있는 여러 주체들의 다양한 주장을 상호 교차적으로 보여주면서 '강제성'과 '자기 의지', 미국의 책임 등 '위안부' 문제의 주요 쟁점을 논리적으로 논파해 나간다. 하지만 그 사이 정치적 언어가 증식하면서 운동의 본질을 흐려 어느새 '위안부' 문제를 가벼운 국제정치적 '논란거리'로 만드는 지점도 읽힌다.

<1부> 영화 「아이 캔 스피크」와 '서발턴'의 말하기
<2부> 전장 없는 '주전장'과 정쟁화된 '위안부' 문제

 

다큐멘터리 <주전장> 포스터

 

'주전장'의 참여자들

일본계 미국인 미키 데자키(Miki Dezaki)가 감독한 영화 <주전장(主戰場)>(2019, 원제 Shusenjo: The Main Battleground of Comfort Women Issue)은 기존의 '위안부' 영화와 달리 피해자의 삶이 아니라 '위안부' 문제의 담론 지형에 초점을 맞춘다. 영화는 일본군 '위안부' 담론에 참여하고 있는 여러 주체들, 곧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현 정의기억연대)나 '여성들의 전쟁과 평화 자료관'(wam)처럼 일본군'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적극 활동해 온 시민단체부터 역사학자, 국제법학자, 변호사, 정치인, 역사 부정론자들, 그리고 부정론자들의 스피커가 되고 있는 백인-미국-남성 인플루언서들까지 다양한 주체의 주장을 상호 교차적으로 보여주면서 '위안부' 문제의 주요 쟁점을 논파해 나간다. <주전장>은 특히 미국 캘리포니아주 글렌데일 시의 '위안부' 소녀상 설치(2013), 일본 국회의 고노담화 재검토 논의(2014), 한·일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문제 합의(2015.12.28) 등 국제적으로 '위안부' 논의가 뜨거웠던 2010년대 중반 일련의 사건을 비추면서 소위 '역사전쟁', '기억전쟁'이라 일컬어지는 '위안부' 담론을 둘러싼 갈등과 그 참여 주체들의 진영을 해부한다.

 

강제성과 노예제도 성립의 핵심, '자신의 의지에 반하여'

우선 <주전장>의 장점은 역사 부정론자들의 주장을 검증하는 논의의 수준이 상당히 높다는 것이다. 의외로 부정론자들은 일본군 '위안부'의 존재 그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들이 일본 정부를 면책하는 주된 논리는 '협의'의 강제성이 없었으며, '위안부'는 성노예가 아니라 '매춘부'였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영화는 인권 변호사 토츠카 에츠로, 국제법 교수 아베 코키의 법적 견해를 통해 적절하게 반박한다. 중요한 대목이니 직접 인용해 본다.

아베 씨는 '강제'라는 단어에 대해서 밧줄로 묶어서 데리고 가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강제'라는 단어를 법적으로 설명하자면 '자유 의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유 의지가 아니라는 것은 아까도 말씀드린 대로 속아 넘어가는 것도 자신 본연의 의지는 아닌 겁니다. 
-토츠카 에츠로의 발언 (<주전장>, 00:47:30~00:48:00)

노예제라는 것은 사람이 물건처럼 취급되는 것을 말합니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 의해 완전히 지배당하는 상태를 뜻하죠. 이런 상태를 '전적인 지배'라고 합니다. 따라서 '위안부' 여성들이 '전적인 지배' 하에 있었다면 '노예제'가 성립됩니다. 이때 그녀들이 고액의 보수를 취하고 있었건 아니건 이는 노예제의 성립 여부와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큰 돈을 받았을 때는 노예가 아니고 돈을 안 받았을 때는 노예다'라는 것은 국제법상에 일언반구도 언급되어 있지 않습니다. 또한 역사학자들이 밝힌 자료나 역사적 서술에 기술되어 있듯이 돈을 받거나 만찬을 즐기거나 외출을 했던 것은 사실입니다만, 그것이 본인의 자유 의지에 의한 것인가 하면 그렇지 않고, 자유 의지를 현저하게 박탈당한 상황 속에서 '전적인 지배' 제도 하에서 허가를 받아야지만 그런 활동이 가능했던 사실을 미루어 본다면 그것은 '노예제'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아베 코키의 발언(강조-인용자. <주전장> 01:08:37~01:10:01)

일반적으로 '강제 연행', '성노예'라고 하면 군인이 총을 앞세워 물리적인 폭력을 행사해 연행하거나 쇠사슬에 묶여 지하에 감금되어 있는 극단적인 이미지를 떠올리곤 한다. 이러한 왜곡된 관념은 '위안부' 피해자가 '속아 넘어간 것이니', 또 '돈을 받았으니' 강제 연행이나 성노예는 아니라는 주장이 널리 통용되는데 일조한다. 그러나 법적 강제성이나 노예제도의 핵심은 '자유 의지에 반해' 혹은 '자유 의지를 박탈당한 상태에서' 행위를 강제 당했다는 데 있다. 그러니 'wam'의 사무국장 와타나베 미나의 말처럼 “자유를 빼앗긴 채 지속해서 강간당했는데 1억 엔을 준다고 해서, 그걸 받았다고 하더라도, 왜 성노예라고 하면 안 되는지” 오히려 되물을 필요가 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있어 또 다른 행위자 '미국'

<주전장>에서 또 하나 주목해야할 점은 이 영화가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있어 미국의 책임을 놓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일본 우익들에게 '시카고 대디'라 불리며, 미국 사회에서 역사 부정론자들의 스피커로 활동하고 있는 미국인 유튜버 토니 머라노. 그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글렌데일 시의 '위안부' 소녀상 철거를 주장하며 “우리와는 상관도 없는 문제에 우리나라를 연관시키려는 사람들이 정말이지 망신스럽습니다. 이것은 일본과 미국 간에 의견만 분분하게 할 뿐이죠.”라고 말한다. 토니 머라노가 '헤이트 스피커(Hate Speaker)'이긴 하지만, 사실 이러한 논리는 '위안부' 문제에 무관심한 미국인들에게 꽤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질 것이다. 미국인들은 그들의 나라가 한일 간 분쟁에 연루되는 것을 원치 않으며, 그 중에는 '위안부' 문제가 미국 내 아시아계 민족 사이의 불화를 일으킨다고 여기기도 할 터이다. 

그러나 <주전장>은 일본군'위안부' 문제와 관련해 미국이 결코 외부자적 위치에 있지 않음을 보여준다. 영화는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과 2015년 한일 일본군'위안부' 합의를 겹쳐 놓으면서, 미국이 정의 구현이라는 가치보다 '한-미-일' 우방을 통해 얻어지는 자국의 이익을 위해 조약에 압력을 가했다고 지적한다. 나아가 종전 후 냉전체제에서 미국은 공산권을 견제하기 위해 일본의 재군비에 압력을 가했으며, 이를 위해 A급 전범 혐의자로 수감되어 있던 키시 노부스케를 석방하여 총리가 되도록 지원했음을 밝힌다. 그리하여 마침내 <주전장>은 전후 동아시아에 대한 미국의 개입이 오늘날 일본의 부정론자들을 야기한 것일지도 모른다고 지적한다. 

 

영화 <주전장> 스틸컷 ⓒ시네마달

 

전장 없는 '주전장', 희미해지는 운동의 본질

이처럼 <주전장>은 '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역사전쟁'의 중요한 쟁점들을 객관적 사료와 신뢰할 만한 학자들의 견해를 들어 논리적으로 돌파해 나간다. 그러나 영화 <주전장>이 관객에게 선사하는 '재미'는 단지 새로운 지식과 복잡한 담론 지형을 이해하게 되는 인식적 차원에 국한되지 않는다. 영화는 특유의 시니컬한 시선을 통해 부정론자들의 자가당착과 무지성적 태도를 적나라하게 폭로한다. 가령, 일본 자유민주당 국회의원 스기타 미오는 고노담화의 근거는 자칭 '위안부'라 주장하는 이들의 증언밖에 없으며, 그 조차도 일관성이 없으므로 신뢰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런데 이어지는 장면에서 그는 글렌데일 시 '위안부' 소녀상 철거를 주장하기 위해 어느 일본계 미국인의 증언을 근거로 제시한다. 영화는 증언의 가치를 폄훼했던 그의 발언을 다시 보여주며, 스기타 미오가 자기모순에 빠져 있음을 드러낸다. 뿐만 아니라 '새로운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의 후지오카 노부카츠는 “국가는 사죄하지 않는다”라는 말을 서슴없이 내뱉고, 극우 내셔널리스트의 핵심 인물인 카세 히데야키는 스스로를 역사가로 소개하면서도 “저는 타인이 쓴 책은 안 읽어요”라고 당당하게 말한다. 영화는 이들을 어리석다 못해 우스꽝스럽기까지 한 존재들로 그려낸다.  

솔직히 말해 이러한 장면은 모종의 쾌감을 준다. 그것은 이 영화에서만 해도 여러 번 나타나듯, 극우 내셔널리스트들과 역사 부정론자들이 반인륜적인 발언을 일삼아왔기 때문이다. 인종차별적, 성차별적, 파시즘적 혐오 발언을 했던 이들의 '무식한' 실체가 까발려질 때 그간의 불쾌함과 모욕감이 해소되며 통쾌한 기분이 드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물론 이 통쾌함에는 일본 내셔널리스트에 맞서는 한국의 내셔널리즘도 얼마간 섞여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분노가 통쾌함으로 설욕되고, 내셔널리즘과 내셔널리즘이 맞서는 동안, 다시 말해 정치적 언어가 증식하고 국가주의적 파토스가 에너지를 얻는 동안 '위안부' 문제의 본질이 망각되기 쉽다는 점이다. 영화의 전반에 깔려있는 냉소적 어조가 부정론자를 향한 것임에도 이 영화를 통해 얻어지는 쾌감 속에서 어느새 '위안부' 문제가 국제정치적 '논란거리'의 하나로 가벼워지고 있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영화의 제목인 '주전장'은 중의적인 의미를 지닌다. 하나는 군국주의의 부활을 꿈꾸는 일본 우익이 전력을 다해 공격하고 있는 '위안부 문제'라는 담론의 장소이고, 다른 하나는 그 치열한 담론 투쟁의 국제적 무대인 '미국'이다. 그런 점에서 영화가 관객에게 남기는 최종적 메시지는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및 연대 시민단체가 30여 년 간 일관되게 주장해 온 공식 사죄와 법적 배상, 재발 방지에 있다기보다 현재 '위안부' 담론의 '주전장'은 어디이며, 이곳의 전세가 어떠한지 보여주는 데 있다. 이는 현실 정치의 부침 속에서 전개되는 '위안부' 운동에 중요한 시사점을 주긴 하지만, 이러한 인식 구조에서는 여자들이 의사에 반하여 동원되고, 인신을 속박 당하여, 거대한 성폭력 범죄의 피해를 입은, 실제 사건의 장소인 전장이 누락된다. 사건의 장소인 실제 전장이 망각될 때, '위안부' 운동의 최종 목적은 역사 부정론자들과의 대결로 도착되기 쉽다.  

 

'위안부' 운동의 본질적 목적을 기억하기

강조하고 싶은 점은 이와 같은 전장의 누락과 본질의 도착이 영화 <주전장>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이다. 일찌감치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목소리를 내어 왔던 여성학자 우에노 치즈코는 2012년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되돌아보는 글의 첫 문장을 이렇게 썼다. 

“모든 것은 1990년대부터 시작되었다.”[1] 

비슷한 논법이 부정론자들과 분명하게 선을 긋는다고 밝힌 어느 연구에서도 나타난다. “'위안부' 문제는 원래 있던 문제가 표면화된 것이 아니라 문제라고 간주하기 시작한 사람들의 작용에 의해 사회문제로 출현했다. 이 문제는 담론에 의해 구축된 것이지 전시 중에 위안부 문제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 '위안부' 문제란 구 일본군의 '위안부' 제도가 문제시되어 일본 정부가 대응을 요구하고 있는 문제이다.”[2] 이러한 인식은 “대중문화 작품에서도 1980년대 초까지 '위안부'는 불행하고 불쌍하며, 스스로 또는 남들에게 부끄럽고, 면목 없는 사람들”[3]로 인식되었으므로 “1990년 이전에 위안부 문제란 없었다”[4]고 주장하는 역사 부정론자들과 얼마나 다를까. 진영을 막론하고 공히 이들에게 '문제'로 인식되는 것은 일본군'위안부'를 둘러싼 담론적·정치적 대결이다. 일본군'위안부' '문제'의 '모든 것'에 정작 일본군에 의한 전시 성폭력이라는 '사건'은 소거되어 있는 것이다.

오늘날 정쟁화된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종종 운동의 본질적인 목적을 잊게 한다. '역사전쟁', '기억전쟁'이라는 수사 속에서 역설적으로 무수한 사람들이 죽고 여자들이 강간을 당한 실제 전쟁이 희미해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성찰할 필요가 있다. 역사 부정론자들은 일본군'위안부' 운동이 나아가야 할 길에 놓인 돌뿌리일 뿐이다. 언제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위안부' 운동의 본질적 목적이다. 그것은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군사적 도구로 만드는 전시 성폭력을 단죄하고 피해자의 명예를 회복하며, 이러한 범죄가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법과 제도, 그리고 사람들의 인식을 가꾸는 일이다. 우리가 꿈꾸는 세계로 나아가기 위한 '주전장'이 한낱 돌뿌리와의 싸움일 리는 없다.

 

일러스트 ⓒ이사각

 

 

각주

  1. ^ 우에노 치즈코, 이선이 역, 「내셔널리즘과 젠더를 다시 쓰며」(개정증보판 서문), 위안부를 둘러싼 기억의 정치학, 현실문화, 2014, p. 13.  이헌미는 이 명제가 "위안부 운동과 담론을 둘러싼 역사적 소실점(消失點. vanishing point)을 명쾌하게 보여준다"고 지적하며, "역사의 가속화가 만들어낸 사회적 기억의 단기 소실점을 넘어서, 일본군'위안부'의 현재사에서 망각되고 누락된 지점을 짚어" 볼 필요가 있음을 역설했다. (이헌미, 「한일 위안부 외교의 역사와 쟁점」, 역사연구 42, 2021, p. 98, 102.)
  2. ^ 木下直子, 「慰安婦」門題の言說空間, 勉誠出版, 2017, pp. 1∼2.
  3. ^ 주익종, 「해방 40여 년간 위안부 문제는 없었다」, 반일종족주의, 미래사, 2019, p. 346.
  4. ^ 위의 글, p. 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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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이지은

<일본군 '위안부' 서사 연구>(2023)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일본군'위안부', 기지촌 여성, 탈북 여성 등 국가 경계의 여성 서사에 대해 연구하고 있으며, 문화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다. 최근에는 <역사적 존재의 탈역사화, 그 ‘불공정함'에 대하여>(2022), <일본군'위안부' 운동 초기 증언의 교차적 듣기>(2022), <가부장제 민족주의의 분열증과 여성 생애사 쓰기의 가능성>(2021) 등의 비평 및 논문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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