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토에세이] 역사의 뒤안길에서 만난 조선인 피해자들 02. 배삼엽 이야기 – 홀로 눈물 흘린 한 많은 세월

안세홍

  • 게시일2021.09.23
  • 최종수정일2021.10.22

사진작가 안세홍(비영리 단체 ‘겹겹프로젝트’ 대표)은 25년간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의 증언과 고통을 사진으로 기록해오고 있습니다. 그는 한국과 중국에 남겨진 조선인뿐만 아니라 필리핀, 인도네시아, 동티모르, 중국 등 여러 아시아 국가에서 140여명의 피해자들을 만났고, 사진에는 그들의 가슴 속 깊은 한이 담겼지요. ‘이것은 과거의 것이 아닌 우리가 풀어야 할 미래의 메시지’라고 말하는 그 목소리를 더 자세히 들어보고 싶었습니다.  
 
예술작품이자 또 하나의 증언으로써 우리에게 당도한 사진 속 이야기들을 이곳에서 풀어보고자 합니다. 안세홍 작가가 2001년부터 2017년까지 중국에서 만난 이들의 목소리를 포토에세이 [역사의 뒤안길에서 만난 조선인 피해자들]에서 전합니다. 
 
[포토에세이] 역사의 뒤안길에서 만난 조선인 피해자들
(1)이수단 이야기 – 중국에 남겨진 70년 세월
(2)배삼엽 이야기 – 홀로 눈물 흘린 한 많은 세월
(3)백넙데기 이야기 – 쓴 웃음에서 전해진 역경의 세월 
(4)박우득 이야기 - 평생을 위안소에 갇힌 삶

 

배삼엽
1925년 조선 경상남도 하동군에서 태어남. 1937년 13세에 중국 내몽고 바오터우(包头)로 3~4년간 동원됨. 


“한국에서 살 곳도 없고, 늙어서 돈을 어디다 쓰갔어. 귀찮아.”


중국 우한(武汉)에서 일본군’위안부’피해자 김의경을 만난 후 경비를 절감하기 위해 야간 휘처잉워(딱딱한 침대 기차)를 타고 10시간 만에 베이징(北京)에 도착했다. 새벽 뿌연 안개에 싸인 역에서 배삼엽이 사는 톈단(天坛) 호텔까지 택시를 탔다. 2001년 피해자의 집을 방문하면서 전화번호만 받아 두었었다. 그에게 전화를 걸어 현재의 위치를 설명해 주었더니, 그는 양딸을 마중 보낸다 했지만, 서로 다른 곳에서 기다리고 있어 만날 수 없었다. 한참을 헤매던 중 예전에 보았던 톈단 호텔이 저 멀리 보이기 시작했다. 그 앞에 다다랐을 때는 그의 딸이 나를 먼저 알아보았다. 첫 만남이었지만, 나의 옷차림과 큰 가방을 끄는 행색으로 나를 알아본 듯했다. 

딸을 따라 회이퉁(골목길)에 들어서니 저 멀리 지팡이를 한 배삼엽이 눈에 들어왔다. 밤 기차를 타고, 반나절을 길을 찾아 헤매느라 나의 모습이 초췌해 보였는지, 그는 먼저 나를 조선족 식당으로 데리고 갔다. 그는 냉면 두 그릇과 만두를 시켰다. 한 그릇이면 족하다고 했지만, 남자라면 이 정도는 먹어야 한다며 주문을 했다. 

피해자를 만나면서 항상 어떡하면 그들과 가까워질 수 있을까 고민을 했다. 처음 ‘나눔의 집’에서 피해자들을 대면하면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내가 어떻게 이야기를 끌어가야 할지 망설여지기도 했다. 지금은 피해자들과 같이 밥을 먹고, 며칠을 지내다 보면 마음의 공감대가 형성된다. 우리말 중에는 ‘식구’라는 말이 있듯이 혈연 관계인 가족만큼 한솥밥 먹는 것을 중요시했다. 그래서인지 피해자가 주는 것들을 사양 않고 다 먹다 보면, 그것으로 마음의 문이 열리는 듯하다. 

붉은 벽돌로 지어진 5층짜리 아파트 복도는 불이 들어오지 않아 안쪽에 자리한 그의 집까지는 벽을 더듬으며 들어섰다. 20㎡ 넓이의 거실 겸 침실로 쓰는 방안에는 침대, 소파, TV 등이 2년 전 그대로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다만 그의 머리카락은 더 허예졌고, 등은 더 구부정해져 오랜 시간 바로 앉아 있기 힘들어 보였다. 1985년도부터 앓아온 백내장은 더 방치하면 실명까지 갈 수 있다 하여 수술 날짜를 잡았으나, 내가 온다는 소식에 며칠 늦추었다고 하니 괜스레 미안한 마음이 앞섰다. 중국의 의료비가 얼마나 드는지 알 수 없지만, 다행히도 그가 젊었을 때 일하던 박스를 만드는 공작소에서 수술비 상당 부분을 부담해주기로 해 천만다행이었다. 


“‘아! 이거 속았구나’ 가슴이 철렁했어….”


배삼엽이 태어난 곳은 경상남도 하동이다. 그가 10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13살에 어머니마저 돌아가셨다. 이 무렵 계급장이 없는 군복을 입은 사람이 찾아와 ‘만주에 가면 여러 일 중 골라서 할 수 있고,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며 여자들을 모집하고 다녔다. 그는 엄마를 잃은 슬픔에 모집책을 따라 나설 결심을 했다. 여기에 오빠의 설득도 한몫했다. 오빠는 모집책에게 4년간 일 하는 조건으로 선금 400원을 받고 그를 중국으로 보냈다. 
부산에서 경성까지 기차로, 인천에서 톈진(天津)까지 배로, 톈진에서 내몽고 바오터우(包头)까지 갔다. 역에서 얼마 안 되는 거리에 ‘아사히칸(朝日)’이라는 간판이 내걸린 유곽에서 화려한 화장과 기모노 차림의 여자들을 보자마자 ‘아! 이거 속았구나’ 하고 가슴이 철렁했다. 2층 5번 방에 배정받은 배삼엽은 그곳에서 게이코(ゲイコ)로 통했고 군인들은 ‘조쎈삐(朝鮮屄)’라 불렀다.

그가 어리고 처녀라는 이유로 위안소 주인과 일본군 장교 사이에는 하룻밤에 군표 100원이라는 거금이 오갔다. 피해자는 ‘일주일 동안 거기서 피가 나고 칼로 베는 듯 아파서 걷지도 못했다’라고 증언했다. 유곽 형태의 위안소 생활이 얼마나 고달프고 힘들었는지 여자 두 명이 아편을 먹고 자살할 정도였다. 그곳에서의 생활이 3년이 될 즈음 그는 밥 한 술만 먹어도 피를 토하는 병에 걸렸다. 군의관은 여기서는 병명을 알 수 없고, 고칠 수도 없으니 본국으로 돌아가라고만 했다. 위안소 주인 또한 차비를 주며 그를 조선으로 돌려보냈다. 

 

미련 없는 조선을 등지고 다시 중국으로 

 

배삼엽은 부산에 도착해 이모의 집에서 한약 3첩을 먹으며 몸조리를 하고서야 병이 나았다. 이모는 조카 귀남(배삼엽의 아명)이가 돈을 벌러 싱가포르에 갔다고 말하는 순간 그곳에 무엇을 하러 갔는지 눈치챘지만, 배삽엽은 차마 이모에게 무슨 일을 했는지 이야기할 수 없었다.[1]  조선에 머무는 동안 친척 집을 오가며 지냈지만, 부모님도 안 계시고 친척에게 신세 지기 싫어 그는 홀로 중국으로 향했다. 일본군을 상대하는 위안소로는 가지 않고 톈진에서 미군을 상대로 춤을 추고 돈을 받는 클럽에서 일하며 살았다. 그리고 해방을 맞으면서 베이징으로 이주해 살게 되었다. 

타국에서 홀로 살아가는 것이 순탄할 리가 없었다. 고달픈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아편을 먹기도 하고 수면제 200알을 한꺼번에 먹고 자살을 여러 번 기도하기도 했다. 배삼엽은 친자식이 없어 36살 때 조선족 여아를 입양해 키웠다. 딸은 같은 아파트 3층에 살면서 그를 보살피고 있었지만, 사위가 마카오에 일자리를 구해 1년의 대부분을 홀로 지내는 경우가 많아졌다. 그는 베이징에 살면서도 조선말을 잊지 않기 위해 일제 강점기 시절 유행하던 ‘눈물 젖은 두만강’, ‘목포의 눈물’ 등을 부엌일 할 때마다 혼자 흥얼거리며 눈물 흘린 세월이 반이라 했다. 

1999년까지만 해도 그는 북조선의 국적을 가지고 있었다. 한국을 방문하기 위해 국적을 중국으로 바꾸고 한 달간 고향 방문을 하며 조카를 만나며 다녔다. 그는 한국에서 ‘위안부’피해자로 등록을 하려 했지만, 이미 호적에 사망신고가 되어 있고, 1년 이상 걸리는 국적 회복과정이 쉽지 않아 그냥 중국으로 돌아갔다. 그 이후에도 국적 회복의 기회가 있었지만, 더는 조선에 미련이 없다며 포기했다. 

2011년에 돌아가셨지만, 2014년 그의 딸이라도 만날 수 있을까 싶어 그가 살던 집으로 찾아갔다. 문이 잠겨 있었고 창 사이로 방안은 깨끗이 비워져 있었다. 그 앞을 서성이는 나를 발견한 한 청년이 아는 체를 했다. 아파트 앞 노상에서 자전거를 수리하는 이였는데, 몇 년이 지났음에도 나를 알아보고 말을 건넨 것이었다. 그를 통해 피해자가 베이징 근교 무덤에 안치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혹여나 마카오에서 사업을 하는 딸이 돌아올지 모른다는 생각에 안부를 묻고 연락을 부탁한다는 편지를 문틈으로 남기고 돌아왔지만, 지금까지 연락은 오지 않았다. 

[사진 설명] 중국 위안소에서의 삶, 그리고 남겨진 이후 삶이 평탄하지 않았다. 배삼엽은 1960년대 중국 혁명가 저우언라이(周恩来)를 본 후 직장을 구하는 등 그가 자신의 삶을 바꾸어 주었다고 생각했다. 그의 사진을 방에 걸어 두었고 그에게는 그것이 사진 이상의 의지와 힘이 되었다.
 

[사진 설명] 그가 유일하게 연락했던 조선인은 차로 30-40분 걸리는 곳에 사는 피해자 이귀녀이다. 서로 몸이 불편해 오가며 만날 수 없어 전화로 연락을 주고 받으며 안부를 물었다. 생전, 그의 전화 번호마저 기억에 없고 눈마저 보이지 않아 그전만큼 연락이 수월하지 않았다.

 

각주

  1. ^ 가족들은 귀남이 싱가포르로 동원됐다고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그는 만주와 인도네시아로 동원됐다.

 

 기사 게재일: 2021.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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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안세홍

사진가. 한국을 비롯하여 아시아의 일본군성노예 피해자들을 사진 및 영상으로 기록하고 그들의 삶을 지원하는 비영리 민간단체 ‘겹겹프로젝트’를 25년간 진행하고 있다. 저서로 『나는 위안부가 아니다』(2020, 글항아리), 『겹겹: 중국에 남겨진 일본군 ‘위안부’ 이야기』(2013, 서해문집)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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