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토에세이] 역사의 뒤안길에서 만난 조선인 피해자들 03. 백넙데기 이야기 – 쓴 웃음에서 전해진 역경의 세월

안세홍

  • 게시일2021.10.05
  • 최종수정일2021.10.22

사진작가 안세홍(비영리 단체 ‘겹겹프로젝트’ 대표)은 25년간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의 증언과 고통을 사진으로 기록해오고 있습니다. 그는 한국과 중국에 남겨진 조선인뿐만 아니라 필리핀, 인도네시아, 동티모르, 중국 등 여러 아시아 국가에서 140여명의 피해자들을 만났고, 사진에는 그들의 가슴 속 깊은 한이 담겼지요. ‘이것은 과거의 것이 아닌 우리가 풀어야 할 미래의 메시지’라고 말하는 그 목소리를 더 자세히 들어보고 싶었습니다.  

예술작품이자 또 하나의 증언으로써 우리에게 당도한 사진 속 이야기들을 이곳에서 풀어보고자 합니다. 안세홍 작가가 2001년부터 2017년까지 중국에서 만난 이들의 목소리를 포토에세이 [역사의 뒤안길에서 만난 조선인 피해자들]에서 전합니다. 

[포토에세이] 역사의 뒤안길에서 만난 조선인 피해자들
(1)이수단 이야기 – 중국에 남겨진 70년 세월
(2)배삼엽 이야기 – 홀로 눈물 흘린 한 많은 세월
(3)백넙데기 이야기 – 쓴 웃음에서 전해진 역경의 세월 
(4)박우득 이야기 - 평생을 위안소에 갇힌 삶

 

“听不东 (팅부동)[1], 왜 같은 말을 자꾸 물어”


백넙데기
1922년 전라남도 승주군에서 태어남. 1939년 18세에 중국 난징, 우한으로 6년간 동원되었다가 중국에 남겨짐.

 

중국의 옌볜(延边)에서 베이징(北京), 상하이(上海)에 이르기까지 여러 곳에서 조선인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를 만났지만, 내륙 깊숙한 후베이(湖北)성 우한(武汉)까지 위안소가 설치되고 피해자가 남아 있을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지금에야 비행기로 3시간이면 갈 수 있는 곳이지만, 당시에는 상하이에서 배를 타고 양쯔강(长江)을 따라 난징(南京)을 거쳐 3일 넘게 가야만 도착할 수 있는 곳이었다. 일본군은 중국 내륙진출을 위한 교두보로 삼기 위해 국민당의 수도이자 교통의 사통팔달인 우한을 점령하려 했다. 일본군은 국민혁명군과 5개월이 넘도록 ‘우한전투’를 치열하게 벌이고서야 우한을 차지했다. 이후 이곳에는 대규모의 일본 해군과 육군 본부가 주둔했고, 군을 위한 위안소도 도시 곳곳에 우후죽순처럼 설치되었다. 대표적으로 양쯔강 가까운 지칭리(积庆里)의 한 골목에는 20개의 위안소가 생겨났고, 전쟁이 끝날 때까지 300여 명의 일본/조선 여자가 있었다. 그 골목은 도시개발 속에서도 사람이 살고 있어 그 형태가 유지될 수 있었고, 시에서도 역사적으로 중요하게 보존하고 있다.   

이곳을 처음 찾은 2001년에는 3명의 생존자를 만날 수 있었지만, 90년대 초반에는 13명의 피해자가 생존해 있었다. 우한 시내에서 피해자 하상숙과 김의경을 만나고, 또 다른 피해자 백넙데기를 만나기 위해 하상숙을 따라 택시를 타고 시 외곽으로 갔다. 어디가 어디인지 모르는 상황에서 한 시간을 달려 황피(黄陂)의 작은 마을에 도착했다.  이른 아침이어서인지 시장통으로 보이는 골목길에는 상가 문이 닫혀 있고, 그 가운데 백넙데기의 집이 있었다. 그의 집 근처에 다다르자 미리 연락을 받은 그의 아들 내외가 먼저 반겨주었다. 언뜻 작은 식당을 하는 듯 보였고, 피해자가 사는 2층 방으로 안내를 받았다. 

”안녕하세요, 할머니. 한국에서 왔어요.” 

그는 나의 말을 알아듣는지 마는지 경계하는 눈웃음으로 들어오라는 손짓만 할 뿐이었다. 다른 피해자들과 다르게 우한에서 멀리 떨어져 살고 교류가 없어 간단한 조선말조차 잊은 지 오래인 듯 보였다. 하상숙을 통해 중국어로 얘기를 나누었지만, 그 조차도 황피 특유의 사투리가 심해 의사소통이 녹록하지 않았다.

“할머니 어디서 태어났어요?”라고 묻는 말에 그는 짧게 “세평리”라고만 답을 했다. 이후 한국으로 돌아온 후 지도에서 전라남도 승주군에서 세평마을을 찾을 수 있었고, 호적을 찾아보았지만 그의 이름은 없었다. 


남편은 술집으로, 술집은 위안부로 팔아 넘겨


백넙데기는 소작농 집에서 6남매 둘째 딸로 태어났다. 집안 형편이 어려워 어린 나이에 민며느리[2]로 갔다. 혼례는 치르지 않았지만 남편과는 부부처럼 살았다고 한다. 그러나 남편은 그를 술집에 팔았고, 거기에서 또다시 중국으로 팔려 왔다. 어려서부터 가족과 떨어져 살아서인지 엄마의 얼굴도 기억하지 못한 채 120원에 팔려 갔다. 그 돈은 누가 어떻게 가져 갔는지 그는 몰랐다.  

처음 도착한 베이징에서는 반점에서 두 달 동안 밥과 빨래를 했다. 그리고 20여 명의 여자들과 상하이를 거쳐 난징에 도착하자마자 일본군을 상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열흘 동안 있다가 군부대를 따라 우한으로 왔다. 위안소 주인은 장교로 퇴역한 일본인 2명이었다. 우한에서 좀 더 시골로 들어가 군부대가 있는 곳을 옮겨 다니며 군인을 상대했다. 하루는 일본군을 받지 않으려 하자 주인이 들어와 왼쪽 검지를 칼로 잘라버렸다. 잘린 손가락을 사진으로 찍으려 하자 그는 본능적으로 다른 손으로 재빠르게 가렸다. 얘기를 나누는 동안에도 말이 잘 통하지 않고, 위안소에서의 생활에 관해 묻자 “팅부동, 왜 자꾸 같은 말을 물어”라며 화를 냈다. 

피해자들은 전쟁이 끝났다는 것을 도망가는 일본군이 알려줘서 알았다. 백넙데기와 다른 여자들은 남아 있는 돈을 모아 배를 타고 양쯔강을 따라 한커우(汉口)까지 내려왔다. 그러나 그곳에서 다시 고향으로 돌아갈 방법을 찾지 못했다. 결국에는 그곳에 남아 살 수밖에 없었고, 피붙이 하나 없이 여자 혼자 사는 것이 어려워 지금 있는 곳에서 남편을 만나 살았다. 
 

중국도 북한도 아닌 무국적으로 살아남기
 

나이, 생년 등을 확인하기 위해 그에게 신분증을 보여 달라고 했다. 옆에 있던 며느리는 신분증이 따로 없다며, 낡고 작은 수첩을 들고 왔다. 겉면에는 외국인 거류증이라고 쓰여 있었고, 안쪽에는 그의 사진과 5년마다 공안의 확인 도장이 찍힌 내용만이 있었다. 이름도 백넙데기가 아닌 이잉란(易英兰)이라는 중국식 이름이 있을 뿐이었다. 전쟁이 끝나고서도 50여 년의 세월 동안 시골 마을에서는 이방인에 대한 관심이 요원했다. 일본, 한국, 북한, 중국 등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상황의 연속이었다. 얘기를 나누는 중간에도 백넙데기는 한국으로 귀국을 준비하는 하상숙을 따라가고 싶다는 말을 여러 번 반복했다. 한국으로 돌아가더라도 머물 곳도 없고 가족도 찾을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이곳을 벗어나려는 그의 간절함이 느껴졌다. 사진을 찍는 동안 “쌰오 이쌰오(笑一笑)” 웃어 달라고 부탁을 했지만, 쓴 웃음만이 파인더에 들어오는 것이 그동안 그가 겪은 역경을 보는 듯했다. 

2018년 경남지역 역사 동아리 고등학생들과 역사 투어를 위해 난징을 방문한 적이 있다. 당시 가장 컸던 위안소를 전시관으로 개조한 난징리지샹구위안소전시관(南京利济巷慰安所旧址陈列馆昨开馆)을 찾았다. 그곳에는 위안소 제도의 역사와 함께 피해자 개개인의 방이 마련돼 있었다. 그중 하나가 이잉란의 이름으로 된 백넙데기의 방[3]이었다. 다른 피해자에 비해 사진이나 유품은 적었지만, 이렇게나마 그의 흔적을 마주할 수 있어 반가웠다. 조선인이 아닌 중국인으로나마 그를 기억할 수 있는 공간이 생겼다는 것에 대한 고마움에 그 방을 쉽게 떠날 수 없었다. 


[사진설명] 점심시간이 되자 그는 만두를 담은 작은 그릇과 나무젓가락을 내밀며 얼른 먹으라는 시늉을 했다. 그 모습은 여느 시골 할머니들과 다를 바 없이 친근해 보였다. 

[사진설명] 작은 서랍장에 담긴 그의 옷가지와 물건이 그가 가진 전부이다. 무엇 하나 제 기능을 할 수 없을 만큼 남루해보이지만, 그는 하나하나 다 소중히 여겼다.
 

각주

  1. ^ “못 알아듣겠다”는 뜻의 중국어
  2. ^ 훗날 며느리로 삼기 위해 데려다 기르는 여자아이
  3. ^ 피해자의 이름으로 된 방에는 위안소를 묘사한 방도 있고, 피해자의 유품을 모아놓은 방도 있다.

 

기사 게재일: 202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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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안세홍

사진가. 한국을 비롯하여 아시아의 일본군성노예 피해자들을 사진 및 영상으로 기록하고 그들의 삶을 지원하는 비영리 민간단체 ‘겹겹프로젝트’를 25년간 진행하고 있다. 저서로 『나는 위안부가 아니다』(2020, 글항아리), 『겹겹: 중국에 남겨진 일본군 ‘위안부’ 이야기』(2013, 서해문집)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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