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에세이] 아름다운 항구, 통영에 자리한 아픈 역사의 길을 걷다

송도자

  • 게시일2021.09.10
  • 최종수정일2022.11.25
코로나 팬데믹으로 ‘여행’의 가능성이 차단된 시대, <결>은 이에 대한 갈증을 글로나마 풀며 여행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여행에세이 [2021, 평화로드]는 일제 침탈과 일본군‘위안부’관련 흔적이 남아있는 지역을 살펴보고 그 안에 담겨있는 아픈 역사를 되돌아보고자 하는 시도입니다. 서울, 통영, 천안, 대구, 제주 등 ‘위안부’ 역사와 관련된 다섯 지역을 따라가며, 꼭 기억해야 하지만 쉬이 알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만나보는 것은 어떨까요.
 
[여행에세이] 2021 평화로드
1. 서울편 - “기억의 길”을 걷다 – 일본군‘위안부’ 기억의 터와 기림비
2. 통영편 - 아름다운 항구, 통영에 자리한 아픈 역사의 길을 걷다
3. 천안편 - 하늘아래 가장 편안한 곳에 잠든 당신들의 안식을 기원하며
4. 대구편 - 희움일본군‘위안부’역사관으로 떠나는 근대문화거리 투어
5. 제주편 - 총구는 늘 약자를 향한다: 전쟁과 일본군‘위안부’, 그리고 제주도

 

*통영 인권평화길 투어 추천코스
일본군‘위안부’피해자 정의비(남망산조각공원 입구) ⇒ 강구안(거북선, 판옥선) ⇒ 충렬사 방향으로 이동(충렬로) ⇒ 서피랑 99계단 ⇒ 야마호텔 옛터(현재 도로로 정비) ⇒ 서포루(360도 통영항 전경) 

서피랑에서 바라본 통영 ©송도자


남쪽 반도 끝자락에 위치한 한국의 나폴리라 불리는 아름다운 항구 통영. 통영은 따뜻한 기후와 풍부한 수산자원, 여기에 한 폭의 수채화처럼 펼쳐진 천혜의 자연경관이 더해져 예로부터 살기 좋은 곳으로 알려져 왔다. 동네 갯가에만 나가면 바지락, 굴, 파래, 톳, 청각, 미역 등이 지천으로 널려 있어 캐 와서 요리해 먹기만 하면 되었고, 집이 아닌 곳에서 대충 잠을 자도 얼어 죽지 않을 정도로 따뜻한 곳이었기에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 시기 타지역의 가난한 문화예술인들이 통영을 찾은 것도 바로 이런 연유 때문이었다고 한다. 윤이상, 전혁림, 박경리 등 수많은 문화예술인들을 배출한 통영은 예향의 도시로도 유명하다. 또한 임진왜란 때 설치되었던 삼도수군통제영(현재의 해군본부)과 부속 12공방은 통영의 문화예술 전반에 걸쳐 많은 유·무형 유산을 남겼다. 나전칠기, 소목장, 대발, 갓 등 수많은 무형문화재와 함께 독특한 음식문화까지 더해진 문화예술자원의 보고로 통영은 전국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도시가 되었다.

이렇듯 아름다운 예향의 도시 통영에도 아픈 역사가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은 1990년대 중반에서야 알려졌다. 그것은 바로 일본군‘위안부’의 존재였다. 

1991년 8월 14일, 고 김학순 할머니의 일본군‘위안부’피해 최초 공개 증언으로 나라 안팎은 그야말로 충격에 휩싸였고, 뒤를 이어 터져 나온 또 다른 피해생존자들의 “나도 피해자다”라는 목소리는 일본군‘위안부’문제 해결 운동에 불을 지폈다. 1991년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에 신고전화가 설치되고 이듬해부터는 전국 읍면동사무소에 정신대 피해 신고전화가 설치되면서 해방 후 반세기 동안 침묵을 강요받았던 피해생존자들과 유족들의 신고가 줄을 이었다. 신고자들은 정부의 심사에서 인정되어야 일본군‘위안부’피해자로 공식 등록될 수 있었다. 신고 이후 등록된 피해생존자들을 대상으로 한국정신대연구소(1990년 설립)는 전국을 돌며 이들의 구술을 채록하였고, 그 과정에서 통영을 방문한 연구원을 통해 통영에도 일본군‘위안부’의 아픈 역사가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게 되었다.

세상 밖으로 나온 그들 

김학순 할머니의 공개 증언이 언론에 보도되고 신고를 받는다는 이야기가 동네방네 입소문을 타고 퍼져나간 후, 통영지역 피해생존자들이 가족이나 친지, 주변 지인 등으로부터 소식을 듣고 신고하기 시작한 때가 1993~1995년 무렵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살기가 어려워도, 정부가 보상을 해준다고 해도 신고하지 않은 피해자가 더 많았다는 사실은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다. 

연구원을 통해 알게 된 통영지역 등록피해자는 6명이었다. 이는 등록 당시 거주 지역을 기준으로 한 것으로 대부분의 피해자들은 중일전쟁 이후인 1938~1939년 사이 동원됐다. 통영지역 피해자들의 특징은 대부분 일찍 동원되어 6~7년간 장기간에 걸쳐 피해를 입은 ‘위안부’피해자들로 연령대가 전국 최고령이라는 점이다. 1918년생 맏언니부터 1924년생 막내까지, 이들 모두 고무공장 등 좋은 공장에 취직된다거나 돈 많이 벌게 해주겠다는 말에 속아 상해, 대련, 대만, 필리핀, 인도네시아, 버마 등지의 일본군 위안소로 동원됐다. 

통영지역에 등록된 피해생존자들이 많은 관계로 연구자와 활동가들이 구술채록을 위해 통영을 자주 드나들면서 자연스레 할머니들의 증언을 접하게 되었고, 이들 모두가 당시 해상교통 중심지였던 통영 강구안에서 배에 태워져 끌려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동원의 출발지, 통영 강구안

통영 강구안 일대는 통영 관광의 중심지로 거북선과 판옥선 4대가 있어 관광객들이 필수코스로 들르는 장소이다. 강구안은 삼도수군통제영 당시 수군들의 배들이 정박해있던 천혜의 군사 요새였으며, 일제강점기에는 일제의 수탈에 대항하여 통영 최초의 항일 의거가 일어난 곳이기도 하다. 인근에는 세병관과 충렬사, 동피랑, 서피랑, 남망산공원, 중앙시장 등이 있어 늘 관광객들로 붐비는 핫플레이스로 많이 알려져있는 곳이다.

한산도를 비롯한 통영 앞바다는 일제강점기 당시 세계 3대 어장으로 유명하여, 1910년 한일합방 이전에 이미 개항해 뱃길이 발달해 있었으며 합방 이후에는 상선과 무역선들이 수시로 드나들었던 항구였다. 또한 온난한 기후와 풍부한 어족 자원은 일본인들이 일찍이 대거 통영으로 들어와 거류민 부락을 형성하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일본인 거류민이 있는 곳엔 언제나 공창 형태의 유곽이 형성됐는데, 통영도 예외는 아니었다. 유곽이 들어섬에 따라 여성을 공급하는 소개소가 생겨난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현재 통영 강구안 ©김상현 제공


일본이 중일전쟁을 일으키며 전선을 확대해감에 따라 수많은 일본 군인들이 전쟁터로 동원됐다. 오랜 전쟁을 수행해온 일본 군인들은 부대에서 자행되는 폭력으로 엄청난 고통을 겪어야만 했고 그로 인한 불안과 불만은 난징대학살과 난징강간이라는 잔인한 폭력으로 귀결되었다. 군대에 만연했던 성병은 군의 사기를 더욱 떨어트렸으며, 일본군의 중국 현지 민간여성 강간 사건은 국제사회에 큰 문제로 대두되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일본군은 군위안소를 설치하여 ‘위안부’를 모집하기로 계획을 세우고 이를 실행했던 것이다. 

1938년 일제의 전시총동원령이 내려지면서 일본과 식민지 조선이 전시체제에 돌입함에 따라 전쟁 수행을 위한 대대적인 인적 동원이 시작되었고, 통영도 모든 시스템이 전시 동원 체제로 편입된다. 일본 거류민을 따라 생겨났던 소개소도 일본군‘위안부’ 동원의 말단조직으로 편입되면서 위안소에 여성들을 동원하기 시작했다. 통영지역이 경남지역에서 피해자가 많은 지역 중 한 곳이 된 이유는 바로 이런 구조적인 결합과 해상교통의 발달로 ‘위안부’ 집결지였던 부산으로의 동원이 용이했기 때문이다. 통영, 거제 지역에서 모아온 여성들을 강구안에 있는 여관에 가둬놓고 목표치가 채워지면 배에 모두 태워 최종 집결지인 부산으로 수송해갔다. 통영 강구안은 통영, 거제 등 인근지역에서 동원해온 여성들의 1차 집결지였다. 

강구안은 당시 대부분 15~16세의 어린 소녀들이 돈 많이 벌어서 부모님과 동생들을 호강시켜주겠다는 부푼 꿈을 안고 눈물을 흘리며 배를 타고 갔던 장소였다. 그들이 천지도 모르는 낯선 땅 중국, 대만, 필리핀, 버마, 인도네시아 등지의 위안소로 갈 줄 꿈엔들 생각했으랴. 도착할 곳이 공장이 아니라 일본군 위안소일 것이라고 상상이나 했을까. 10대에 끌려가 해방 이후 20대가 되어서야 겨우 배를 타고 또 타고서 살아 돌아올 수 있었던 일본군‘위안부’피해자들에게 아름다운 고향 통영의 강구안은 가슴에 맺힌 한 많은 장소로 자리하게 되었다.

1930년대 당시 통영항


남망산공원에 자리한 정의비

강구안에서 바다 쪽을 바라보면 앞에 얕은 남망산이 보인다. 통영시민문화회관과 통영조각공원이 있는 남망산공원은 도심 시민휴식공원으로 통영시민의 삶이 깃든 곳이며 시민과 관광객이 즐겨 찾는 전망이 아름다운 곳 중 하나다. 강구안 해안을 따라가다 보면 남망산공원 입구가 나오는데, 오르막길을 걸어 오르면 제일 먼저 두 팔을 벌리고 서 있는 조각상이 눈에 들어온다. 바로 일본군‘위안부’피해자 명예와 인권을 위한 정의비다. 두 팔을 벌린 채 서 있는 정의비는 2013년 4월 6일 민간이 주체가 되어 세운 기림비다. 

아픔이 서린 통영 강구안을 내려다보며 서 있는 정의비는 할머니들과 함께 동고동락해온 일본군위안부할머니와함께하는통영거제시민모임(2002년 설립, 이하 시민모임)이 2012년 하반기부터 통영지역일본군‘위안부’추모비건립추진위원회를 구성해 모금 운동을 전개하여, 통영시민, 학생, 경남도민 등 시민 모금에 통영시의 건립비 보조금, 부지제공, 경상남도의 건립비 보조금 지원이 보태져 세워졌다.

통영 남망산조각공원 입구에 세워져 있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정의비 ©송도자


정의비는 포천석으로 된 석상으로 두 팔을 벌린 채 반추상적인 여성의 얼굴을 하고 있는 전신상으로, 일본군‘위안부’피해자 중에는 10대 소녀를 비롯해 20대 여성도 있었기에 피해 여성 모두를 상징한다는 것이 특징이다. 두 팔을 벌리고 있는 형상은 일본군‘위안부’피해자들의 정의와 당당함을 나타내고, 가해자의 진심 어린 사죄를 바라며 무언의 미소로 평화의 손짓을 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또한 이 지구상에서 자행되고 있는 전시 성폭력 범죄의 피해 여성들을 감싸 안으며 전쟁과 폭력 없는 평화로운 세상을 염원하는 뜻도 담고 있다. 

전신상 아래에는 원형 기단석이 놓여있고, 기단석 표면에는 일본군‘위안부’피해자들에 대한 강제 동원과 피해실태를 나타내는 공문서와 사진, 그림 작품들이 시대순으로 새겨져 있다. 기단석 정면 중앙에는 비문을 새겨 정의비의 건립 취지와 의미를 방문객들에게 알리고 있다. 방문객들이 자유롭게 앉아서 감상할 수 있는 데크에는 일본군‘위안부’에 대한 반인도적 범죄를 설명해놓은 설명판이 있어 피해역사를 쉽게 알 수 있다. 

시민모임은 매년 4월 7일 정의비 건립일과 8월 14일 일본군‘위안부’피해자 기림의 날에 기념식과 추모제, 세계연대집회를 정의비 앞에서 개최해오고 있으며, 정의비 위쪽에 있는 통영시민문화회관 소극장과 대전시실에서도 영화제와 다양한 전시를 매년 이어오고 있다. 

통영 정의비와 설명판 ©송도자


서피랑 언덕에도 아픔이

정의비에서 다시 강구안 쪽으로 내려와 시내 중앙로를 따라 충렬대로(충렬사) 방향으로 가다 보면 중간 즈음에 서피랑 언덕이 보인다. 벽화마을로 유명한 동피랑과 반대쪽에 있는 서피랑은 꼭대기에 서포루가 자리하고 있다. 최근 몇 년 사이에 마을 만들기 사업으로 통영 전경이 360도로 보이는 전망 좋은 장소로 정비되면서 관광객의 발길이 점차 늘고 있는 곳이다. 

정비 이전 서피랑은 동피랑처럼 언덕에 작은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던 달동네였다. 아주 오래전부터 이곳에 ‘야마호텔’이라 불리는 집창촌이 있었다. 야마호텔은 산(山)의 일본 발음인 야마와 영어인 호텔이 조합된 단어로 집창촌의 이름이었으며 ‘야마골’이라고도 했다. 어린 시절 서피랑 언덕에 줄줄이 빨간불이 켜진 집이 무서웠고, 밤만 되면 귀신이 나올까 봐 그곳엔 얼씬도 하지 않았다. 

서피랑 정비 전에 남아 있던 야마호텔의 일부 건물들 ©김상현 제공


야마호텔이 형성된 시기는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해방 이후라고 전해진다. 당시 통영은 수산업이 매우 활발하던 때라 원양어선 등의 선원들이 주로 이용했고 일반 남성들도 많이 드나들었다고 한다. 야마호텔은 1990년대 이후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고, 2004년 성매매특별법이 제정되면서 정비되었으나 낡은 건물들이 그대로 남아 있다가 2013년부터 서피랑 마을만들기 사업이 추진되면서 해당 건물들이 철거돼 역사 속으로 완전히 사라졌다. 

해방 후 돌아온 일본군‘위안부’피해 여성들은 대부분이 20대 나이였다. 차마 집에 돌아가지 못하고 객지를 떠돌았던 여성들, 그리운 집으로 돌아왔으나 말도 못 하고 눈물로 세월을 보냈을 여성들, 부모와 자신을 원망하며 술로 담배로 고통의 나날을 보냈을 여성들, 감당할 수 없는 상처로 자신의 머리를 대청마루에 찍으며 몸부림쳤던 여성, 살아내기도 죽기도 힘든 처지를 비관하며 자포자기 상태에서 요정으로, 선술집으로, 집창촌으로 향했던 여성들….

그렇게 통영에서도 야마호텔로, 선술집으로, 요정으로 ‘위안부’ 피해 여성들이 흘러 들어갔다. 식민지의 여성으로 태어나 일본군‘위안부’로 동원되어 멀리 이국땅에서 일본군 성노예로 살아야만 했던 여성들은 고국으로 돌아온 후에도 가부장제 하에서 남성들의 구타와 폭력에 시달리며 살아야만 했다. 비단 ‘위안부’ 피해자만이 아니라 집창촌에 있던 모든 여성들이 가부장제의 폭력으로 고통스러운 삶을 살다 스러져갔으리라. 

서피랑을 찾을 때면 99계단 맨 위쪽에 야마호텔이 있었다는 것을 이제라도 기억하자. 수많은 여성들이 폭력에 신음하며 스러져간 자리, 20대가 되어 돌아온 ‘위안부’ 피해자의 피맺힌 울음이 배여 있는 자리인 야마호텔은 부끄럽고 창피해서 숨기고 묻어야 할 역사가 아니라 드러내어 알려야 할 곳이다. 여성 차별에 기반한 성폭력이 이 지구상에서 더 이상 자행되지 않도록 젠더폭력이 없어지는 그 날까지 새기고 새겨야 할 일이라는 것을 기억하자. 그러기 위해서는 여성들의 아픔을 기리고 위로하는 표지석이라도 세워야 하지 않을까.

서피랑 99계단 꼭대기에 위치한 야마호텔 자리(현재 도로로 정비) ©송도자


내가 바라는 것 한 가지

서피랑을 내려오면서 통영지역 피해 여성들의 삶을 되돌아본다. 남자라면 치가 떨려 조카를 키우며 평생 홀로 사셨던 할머니, 해방 후 고향에 돌아와서도 남성들에 속아 힘겨운 삶을 사셨던 할머니, 아버지뻘 되는 남성에게 후처로 들어가 말 못 할 서러움을 안고 살아야 했던 할머니, 할머니들….
 
그들 바람은 오직 하나였다. ‘나 너무 억울해. 내가 잘못한 것이 아니야, 일본이 나를 속여서 위안소로 데려가 내 청춘을 이렇게 망가트려 놓았으니 책임져야지. 잘못했다고 해야지. 참말로 사죄해야지.’ 할머니들의 목소리가 서피랑을 내려오는 내내 귓가를 맴돌았다. 열네 분밖에 남지 않은 할머니들이 몇 년 후 다 사라지고 나면 우리는 어떻게 일본의 사죄를 받아낼 것인가. 어떻게 할머니들의 외침을 기억하며 이어갈 것인가. 바로 앞에 던져진 우리 모두의 숙제가 아닐까.

일본군‘위안부’할머니와함께하는통영거제시민모임 

단체소개
전시성폭력범죄인 일본군위안부제의 진실과 정의를 올바르게 자리매김하여 피해여성의 인권과 명예 회복을 실현하고 나아가 성차별, 성폭력 없는 평등하고 평화로운 시민사회를 만들고자 2002년 설립, 주로 경남지역을 기반으로 활동하고 있다.

주요활동
-일본군‘위안부’피해자 치유사업 : 정서적 안정 및 심리치유 사업
-일본군‘위안부’피해자 인권명예회복사업: 범시민탄원엽서보내기운동, 평화인권문화제, 피해자 소송지원 사업, 국제공조사업 
-교육사업: 온오프 대중강연 사업, 심포지엄, 청소년공모사업, 온오프 전시회, 다크투어 
-기록사업: 경남지역 피해전수조사사업, 경남지역 피해자료 아카이브 구축사업, 경남지역 해결운동사 기록사업, 경남지역일본군‘위안부’역사관 건립사업 

기사 게재일: 2021.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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