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에세이] 2021 평화로드
1. 서울편 - “기억의 길”을 걷다 – 일본군‘위안부’ 기억의 터와 기림비
2. 통영편 - 아름다운 항구, 통영에 자리한 아픈 역사의 길을 걷다
3. 천안편 - 하늘아래 가장 편안한 곳에 잠든 당신들의 안식을 기원하며
4. 대구편 - 희움일본군‘위안부’역사관으로 떠나는 근대문화거리 투어
5. 제주편 - 총구는 늘 약자를 향한다–전쟁과 일본군‘위안부’, 그리고 제주도
남산예장공원[이회영 기념관, 기억6전시관] → 남산인권숲 → 일본군 ‘위안부’ 기억의 터[대지의 눈, 세상의 배꼽, 통감관저 터 표석, 거꾸로 세운 동상] → 국치길[통감관저 터 → 조선총독부 터 → 노기신사 터 → 경성신사터·일제갑오역기념비 → 한양공원 기념 비석 → ‘삼순이 계단’] → 서울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기림비
#기억의 터
남산 자락 ‘일본군‘위안부’ 기억의 터’로 가는 길목에는 ‘남산예장공원’이 있다. 공원은 세종호텔 건너편으로 남산 1호 터널과 남산으로 올라가는 도로 사이, 서울소방재난본부 아래쪽에 있는데 오랜 공사 끝에 2021년 6월 개장했다.
공원은 두 개 층으로 나뉜다. 들머리를 따라 친환경 버스 환승센터를 지나면 공원 아래층엔 ‘예장마당’과 ‘이회영 기념관’이 있다. 전 재산을 들여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해 평생 조국 독립에 헌신한 독립운동가 이회영 선생과 여섯 형제를 기념하는 공간이다.
공원의 윗부분은 푸른 소나무 숲, 명동~남산을 보행으로 연결하는 진입광장, 샛자락 쉼터 등을 두어 시민들의 휴식처로 꾸며졌다. 하지만 여기서 더 눈에 띄는 것은 빨간색 우체통 모양의 ‘기억6전시관’이다. 전시관은 국가권력에 의한 인권침해라는 아픈 역사를 돌아보는 공간으로 옛 중앙정보부의 지하 고문실을 재현해 두었다. 기억6전시관 앞에는 재생사업 과정에서 발굴된 조선 총독부 관사의 기초 일부분을 그대로 보존한 유구터를 비롯해 철거 당시의 콘크리트 잔해와 부서진 기둥을 활용한 벤치 등이 놓여 있다.
예장공원의 ‘남산위에 저 소나무 오솔길’을 지나면 서울소방재난본부에서 서울유스호스텔까지 이어지는 ‘남산인권숲’으로 들어선다. 이 일대가 1960년대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 중앙정보부(안전기획부) 자리였기 때문에 붙은 이름일 것이다. 그리고 일본군‘위안부’ 기억의 터도 여기에 있다.
바닥에 그려진 노란 나비가 기억의 터에 다 왔음을 알려준다. 기억의 터 오른쪽에는 키오스크가 설치되어 있다. 기억의 터 소개와 조성 과정, 작품 해설, 함께 만든 이들에 대한 설명이 자세하게 되어 있고 영어, 일본어, 중국어로도 볼 수 있다. 특히 “올해 나이 92세 이름은 김.복.동, 피해자입니다”로 시작되는 ‘위안부’피해자 김복동 님의 인터뷰는 이곳을 찾은 사람의 마음을 다잡게 한다.
기억의 터는 서로 전혀 어울리지도 않고 받아들일 수도 없는 두 가지 주제가 함께 하는 곳이다. 식민지 침탈의 중심이었던 ‘통감관저 터(총독관저 터)’와 그 피해를 가장 심하게 당한 ‘위안부’를 위한 장소가 함께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를 기리는 ‘대지의 눈’과 ‘세상의 배꼽’ 사이에 ‘통감관저 터 표석’과 ‘거꾸로 세운 동상’이 있다. 그래서 이곳을 만든 임옥상 작가는 “포위하되 포용하고 꾸짖되 용서하는 모성으로 세상을 보듬는” 의미의 작품을 구상했다고 한다. 기억의 터는 직선의 통감관저 터 표석과 거꾸로 세운 동상을 부드러운 곡선의 대지와 조형물로 감싸고 있다.
대지의 눈은 등 뒤에 야트막한 둔덕을 얹은 반달 모양 벽으로 둘려 있다. 이 벽은 ‘통곡의 벽이자 화해와 치유의 벽’이다. 벽의 맨 위에는 “우리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우리의 이 아픈 역사가 잊혀지는 것입니다”라고 적혀 있다. 그다음 “이렇게 끌려갔다”, “너무 험한 악몽이다”, “해방 후 귀국·귀향”, “반세기의 침묵을 깨다”, “수요시위”, “소녀상”, “나비기금”, “인권평화운동” 순서로 피해자들과 관계자들의 증언이 새겨져 있다.
한 줄 한 줄 나지막이 소리 내어 읽어 내려간다. 눈으로 볼 때와 달리 소리를 내었을 때 점차 피해자들의 절절한 아픔과 절망과 눈물이 배어든다. 무엇보다 읽는 이의 가슴을 아리게 하는 것은 첫 증언자 김학순 님의 “차라리 속이 후련하다. 하나님이 지금까지 나를 살려준 것은 이 문제를 위해 싸우라는 뜻이라 생각한다”라는 증언이다. 이용수 님은 “나는 여기 저와 함께 있는 이 여성들 때문에 이렇게 과거의 아픔을 이기고 여러분 앞에 당당히 설 수 있었습니다”라고, 길원옥 님은 “우리 아이들은 평화로운 세상에서 살아야 해요…… 다시는 이런 전쟁을 하지 말라고 요구했습니다”라고 하셨다. 원망과 아픔에 온몸과 마음이 찔려 아물기 힘들 상처를 끌어안고서 증언하고, 당당하게 싸우고, 다른 이들을 위해 평화를 요구한다. 적당히 세상과 불의에 타협하고 사는 사람으로서 감히 엄두도 못 낼 용기에 먹먹해진다. ‘위안부’피해자들은 다만 ‘잊혀지는 것이 두렵다’고 했지만, 그들이 말한 것은 ‘잊지 말고’ ‘정의와 평화와 인권을 위해 함께 힘을 내야’ 한다는 다그침이리라.
이런 사연들 왼쪽에는 기억의 터를 조성하는 의미로 피해자 247명의 이름을 적어놓았다. 오른쪽에는 피해자 김순덕 님의 ‘끌려감’이란 그림이 있다. 무궁화 가득 핀 한반도에 서 있는 한 여성의 팔목을 바다 건너 끌어당기는 손. 동그랗게 뜬 여성의 눈에서 당황스러움과 무서워 온몸이 얼어붙는 공포가 그대로 전해진다.
벽을 마주하고 서서 내용을 읽다가 문득 발밑을 보면 까맣고 둥근 동그라미 위에 내가 서 있고, 이 동그라미에 내 모습이 비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역사를 돌아보고 미래를 지켜보는 대지의 눈이다. 대지의 눈에서 돌길을 따라 세상의 배꼽으로 간다. 세상의 배꼽은 부드러운 언덕으로 둥글게 감싸져 있다. 언덕에는 여름에 빨갛게 꽃피는 백일홍나무와 아직은 감이 두세 개만 열리는 어린 감나무가 자라고 있다. ‘배꼽’ 안으로 통하는 작은 길은 양쪽으로 나 있다. 안으로 들어서면 가운데에 보름달같이 둥글고 큰 돌이 있고, 그 주변에 80여 개의 크고 작은 돌들이 흩어져 있다. 둥근 돌에 앉으면 언덕 때문에 밖이 보이지 않아 포근하고 호젓한 기분으로 숲과 하늘을 바라볼 수 있다.
둥글고 큰 돌은 배꼽을 뜻한다. 어머니와 아기의 생명을 잇는 배꼽처럼 피해자들과 지금 여기 살고 있는 우리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돌에는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된다”라는 글귀가 한국어, 영어, 일본어, 중국어로 적혀 있다. 마주 잡은 두 손을 그린 윤석남 작가의 작품도 새겨져 있다. “기억하지 않으면 되풀이될 것”이고, 기억하기 위해서는 혼자가 아니라 “서로 손을 맞잡고” 나서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듯하다. 둥근 돌에 앉아 몸에 힘주어 돌을 흔들어본다. 생각지도 못했는데 돌이 흔들흔들 묵직하게 흔들린다. 돌의 흔들림과 그 위에 앉은 우리의 흔들림이 함께 물결처럼 언덕을 넘어 저 바깥 멀리까지 퍼져나간다. 일본군‘위안부’피해자에 대한 기억과 공감의 물결이다. 배꼽 돌 옆에 여기저기 놓인 돌들은 전국 곳곳에서 가져온 돌로, 고향을 떠나온 피해자분들의 마음이라고 한다. 돌들을 가로지르는 길 끝에는 기억의 터를 만드는 과정에 함께해준 분들의 이름을 새긴 명패가 있다.
기억의 터는 일본 제국주의 침략과 우리 민족의 치욕스러운 역사를 함께 품고 있다. 식민지 민중의 가슴 아픈 고난을 상징하는 일본군‘위안부’피해자를 기억한다는 것은 식민지 역사의 극복이고 미래를 향한 다짐이 될 것이다.
다시 세상의 배꼽을 되돌아 나오면 대지의 눈 사이에 두 가지 조형물이 있다. 서울 유스호스텔과 남산으로 올라가는 계단 앞에는 통감관저 터 표석이 놓여 있다. 기억의 터는 2017년 8월 29일에, 이 표석은 2010년 8월 29일에 세워진 것이다. 기억의 터가 있기 이전에 이곳은 통감관저 터였다. 대한제국 시기 1905년 11월 을사늑약으로 통감부가 설치됐는데, 지금의 서울애니메이션센터 자리다. 그리고 일본공사관이었던 이곳은 통감관저로, 1910년부터 1939년까지는 총독관저로 사용됐고 이후에는 시정기념관으로 이용됐다. 1960년대 남산 자락에 중앙정보부가 들어서고 1996년 이후에야 남산이 시민들에게 다시 공개됐을 때엔, 통감관저가 언제 어떻게 없어졌는지 알 수 없게 됐다. 기록들과 당시 사진에서의 400년 넘은 느티나무와 은행나무 그리고 하야시 곤스케(林権助)의 동상 좌대 판석이 발견되면서 이곳이 통감관저였다는 것을 추정할 수 있었다. 그리고 2010년 국치 100주년을 기념해 통감관저 터라는 표석을 세우게 됐다.
1910년 8월 22일 이완용과 데라우치 통감은 이 통감관저에서 한일강제병합 조약을 체결했다. 8월 29일 순종과 일왕의 조서가 정식으로 공포되면서 조선과 대한제국의 역사는 끝을 맺게 됐다. 바로 ‘경술국치’이다. 절대 잊어서는 안 될 역사의 현장이기에 여기에 표석을 세웠다.
울퉁불퉁한 대리석으로 된 거꾸로 세운 동상은 표석을 마주하고 있다. 이것은 하야시 곤스케라는 일본 외교관 동상을 받치는 받침석이었다. 하야시 곤스케는 러일전쟁 당시 일본 공사(公使)였다. 그는 일제의 러일전쟁 승리를 위해서 대한제국을 압박해 한일의정서, 한일협약, 을사조약을 맺게 한 장본인이다. 일본 입장에서는 뛰어난 업적을 발휘한 외교관이었기에 남작 작위를 주고 1934년에는 아직 살아 있음에도 동상을 만들어 이곳(당시는 총독관저)에 세워주었다. 사진을 보면 거의 실물 크기 동상으로 좌대 판석까지 합치면 4m 이상은 될 것 같다. 이 동상도 해방 이후 어떻게 파괴됐는지 알 수 없지만 2006년 이곳에서 발견된 좌대 판석 3개를 활용하여 2015년 광복 70주년을 기념해 여기에 다시 세웠다.
하지만 곱게 세우지는 않았다. 거꾸로 그리고 뒤집어서 치욕스럽게 세웠다. 원래는 울퉁불퉁한 면이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동상 뒤쪽으로 돌아가면 “男爵林林権助君像(남작하야시곤스케군상)”이란 글씨가 거꾸로 되어 있다. 이를 자세히 읽기 위해 허리를 꺾을 필요는 없다. 발아래 반짝이는 까만 돌에 글씨가 비쳐 제대로 읽을 수 있다.
#국치길
서울시는 2018년 통감관저 터를 시작으로 하는 ‘국치길’을 조성했다. 국치길은 우리가 걷고자 하는 ‘기억의 길’이기도 하다. 국치길은 통감관저 터에서 시작해 남산으로 올라가는 도로를 따라간다. 첫 번째 만나는 곳이 ‘조선총독부 터’(지금의 서울애니메이션센터)이다. 버스 정류장 옆에 김익상 의사의 ‘조선총독부투탄의거(1921년)’를 기념하는 안내판도 함께 있었으나 서울애니메이션센터 재건축이 진행되면서 잠시 치워졌다.
조선총독부 터에서 다시 ‘소파로 길’을 따라 약 400m 남짓 올라가면 리라아트고등학교가 있고, 학교 안 남산원에는 ‘노기신사 터’가 있다. 노기신사는 일본인들이 러일전쟁의 영웅으로 여기는 노기 마레스케(乃木希典)를 신으로 삼아 1934년 세워졌다. 리라아트고등학교 옆 숭의여자대학교는 ‘경성신사 터’였다. 경성신사는 조선신궁이 세워지기 전까지 총독부가 제의를 관장했던 최고의 신사였다. 또 한편에는 일제의 청일전쟁 당시 일본군 전사자를 추모하는 ‘일제갑오역기념비’도 있다. 숭의여자대학교를 나와 남산케이블카를 100여m 지나면 남산 일대에 살던 일본인들을 위해 만든 ‘한양공원’의 기념 비석이 있다.
이제 길의 거의 끝에 왔다. 이른바 ‘삼순이 계단’이라는 계단이 남산을 향해 쭉 뻗어 있다. 친구들과 가위 바위 보하며 오르기도 했고 로맨스 드라마 주인공들이 아름다운 입맞춤을 했던 이 계단은 누가 언제 왜 만들었을까?
남산은 산 위에서 한양 시내가 모두 들여다보이기 때문에 조선 시대 내내 백성들은 함부로 오를 수 없는 산이었다. 또 국가 제사 시설인 국사당이 있던 신성한 산이었다. 그러나 일제는 국사당을 인왕산 아래로 쫓아버리고 한양 성곽도 무너뜨리면서 1925년 조선신궁을 지어 일본 태양신 아마테라스 오미카미(天照大神)와 메이지왕(메이지천황)의 신위를 안치했다. 조선신궁은 우리 민족에 대한 정신적, 종교적 수탈의 장소였다. 삼순이 계단은 바로 조선신궁으로 참배하러 가는 계단이었다.
#기림비
계단을 다 오르면 가쁜 숨을 몰아쉬며 뒤로 돌아 서울을 한 번 내려다보면서 시원한 바람을 맞는다. 그러고 나서야 몸을 돌려 남산공원을 둘러본다. 계단 끝 느티나무 한쪽에는 서울시교육청 교육정보연구원, 한쪽에는 ‘서울 일본군‘위안부’피해자 기림비’가 있다. 남산으로 올라가는 길목에서 몇십 년 전 기억으로 식물원과 분수대를 찾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그 자리에는 ‘조선신궁 배전 터’와 ‘분수대 터’, ‘한양도성유적전시관’이 복원되어 있고, 공원 끝에는 남산도서관과 안중근의사기념관이 있다.
일본군‘위안부’ 피해를 입은 한국, 중국, 필리핀 등 미국 내 13개국 커뮤니티가 연합해 일본의 압박과 방해를 이겨내고, 2017년 샌프란시스코 세인트 메리 광장에 ‘위안부’ 기림비를 세웠다. 그리고 3·1운동 100주년을 맞이하여 김진덕·정경식재단 등 샌프란시스코 교민들이 자발적으로 뜻을 모아 샌프란시스코 기림비와 같은 모양으로 서울 일본군‘위안부’피해자 기림비를 서울시에 기증했고, 그것을 2019년 8월 14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기림의 날에 여기에 세웠다.
왜 남산에 세웠을까? 서울특별시, 서울특별시교육청, 정의기억연대는 시민들이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를 좀 더 가까이 접하고 기억할 수 있기를 기대했다. 그래서 시민들이 많이 찾는 일상적 공간이자 일제 침탈의 아픔을 간직한 역사적 장소인 이곳에 평화와 인권의 상징물인 기림비를 설치하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샌프란시스코 기림비는 높은 단 위에 서 있는 세 여성을 김학순 님이 올려다보는 모습이다. 반면, 서울의 기림비는 김학순 님과 세 여성 모두 평지에 나란히 서 있고 세 여성 사이에 한 사람이 더 들어가 함께 손잡을 수 있도록 자리가 비워져 있다. 누구든지, 몇 사람이든지 손을 이어 잡을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기림비 옆에 있는 다섯 개의 앉음돌은 김학순 님이 태어난 중국 지린성, 돌아와 살았던 평양, ‘위안부’ 피해를 당했던 베이징, 도망친 후 살았던 상하이, 해방 후 돌아온 서울, 이렇게 다섯 장소와 거쳐 온 시간을 의미한다.
기림비는 김학순 님이 서로 손을 굳게 맞잡고 서 있는 한국·중국·필리핀의 세 여성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다. 김학순 님은 자갈밭에, 여성들은 맨발로 거친 흙 위에 서 있지만, 굳은 의지로 가득 찬 눈동자와 꽉 다문 입, 당당하게 편 가슴, 서로 깍지 낀 손은 아주 단단해 보인다. “여성 강인함의 기둥”이라는 샌프란시스코 기림비의 제목이나 “정의를 위한 연대”라는 서울 기림비의 제목은 기림비가 지닌 의미를 그대로 전해준다. 전쟁 중 벌어지는 여성에 대한 인권침해와 성폭력, 인신매매는 과거의 사건으로 끝나지 않고 현재도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으며, 이를 멈추게 하기 위한 여성들의 투쟁과 연대는 계속되어야 할 것이다.
기억의 터에서 시작한 기억의 길은 여기서 마무리된다. 나라를 잃고 일제의 침략 현장이었던 국치길과 함께하는 기억의 길은 왜, 무엇을, 어떻게 기억해야 하는가를 되새기는 길이며, 기억이 왜곡되지 않고 정의와 인권과 평화를 향한 길을 잃지 않도록 되새기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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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오하라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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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기행 문화체험 전문 사회적기업 ‘(주)우리가 만드는 미래’에서 강사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