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연합군번역통역부(ATIS) 조사보고서 제120호
2부. 연합군번역통역부(ATIS)가 생산한 포로 심문보고서
3부. 미 전시정보국(OWI) 49번 보고서
4부. 동남아시아 번역통역부(SEATIC) 심문회보 제2호
미 전시정보국(OWI)
49번 보고서의 특이성
이 보고서는 미 전시정보국(OWI, Office of War Information) 심리전 팀이 생산한 심문 보고서로 연합군 번역통역부(ATIS)의 제120호 조사보고서와 함께 연합군의 가장 중요한 자료 중 하나이다. 보고서는 버마(현재 미얀마) 북부의 미치나(Myitkyina) 지역에서 포로가 된 조선인 ‘위안부’ 20명의 심문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20명이나 되는 ‘위안부’가 한 번에 포로가 되어 심문 보고서까지 남긴 경우로는 유일한 사례이다.
연합군 측에서도 최일선 전장에서 정체불명의 젊은 여성 20명이 포로로 잡힌 상황을 매우 기이하게 여겼다. 따라서 전담 심문관을 배치하여 20여 일에 걸쳐 자세한 심문 보고서를 작성하게 한 것이다.
이 문서가 유명해진 이유는 문서 자체의 희귀성과 특이함에만 있지 않다. 이 문서는 ‘위안부’들의 삶과 존재에 대해 주관성이 강한 평가를 하고 있다. ‘위안부’들에 대해 ‘일본인과 백인의 관점에서 예쁘지 않다’고 한다거나 ‘유치하고 이기적’이라고 하는 등 지극히 주관적으로 평가한 대목이 여러 곳에서 보인다. 또한, ‘위안부’들의 삶이 비교적 풍족했고 버마 다른 지역에 비해 사치스러울 정도(near-luxury)였다고까지 했다.
이러한 내용은 ‘위안부’ 문제에 적대적인 세력과 개인에게 매력적인 요소로 여겨졌고, 일본의 극우세력을 비롯한 많은 이들이 이 자료를 근거로 ‘위안부’ 문제를 공격해왔다. 그러나 이 문서는 상당히 조심스럽게 이해해야 한다. 내용만 피상적으로 검토해서는 이 문서의 의미를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 문서를 생산하는 과정은 물론이고 생산자, 즉 조선인 ‘위안부’ 20명을 심문한 인물의 특성 등을 세심하게 분석할 필요가 있다.
이 문서는 다른 여타 심문 보고서와 달리 문서 작성자의 주관적 편견과 느낌이 과도하게 투영되어 있다. 다른 보고서들은 건조한 문투로 사실관계를 서술하는 것이 일반적인 데 반해 이 문서는 굳이 심문자의 느낌이나 견해가 곳곳에 들어가 있어 상당히 특이한 사례이다. 그렇기에 논란이 될만한 부분에 대해서는 다른 자료와의 교차 검토 등을 통한 충분한 검증이 필요하다. 특히, 이 문서는 ‘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기억의 정치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고 있기에 더욱 신중한 검토가 필요하다. 그렇다고 해서 ‘위안부’의 존재를 부정하거나 뒤틀리게 이해하고자 하는 세력들에 맞서 이 문서의 존재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 문서를 통해 위안소와 ‘위안부’에 대한 보다 정확하고 풍부한 사실관계를 규명하는 것이다.
49번 보고서의 특이성을
잘 이해하고 분석해야 하는 이유
이 문서는 버마 미치나 지역에서 조선인 ‘위안부’ 20명이 포로가 된 것을 계기로 생산됐다. 1944년 8월 10일 미치나 인근에서 포로가 된 ‘위안부’들은 미치나 비행장에 임시로 수용되었다가 8월 15일에 인도 레도(Ledo) 기지로 이송되었다. 본격적 포로 심문은 8월 20일부터 9월 10일까지 20여 일 간 진행되었다. 그런데 보고서가 완성된 날짜는 10월 1일이었다. 이는 심문이 끝난 다음에도 20일가량 추가적인 조사나 심문이 이루어졌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즉 40일 정도가 전체 조사 기간이었다고 하겠다.
이는 매우 이례적으로 긴 심문과 조사 기간이었음이 분명하다. 당시 심문관과 같은 부대에 근무했던 동료의 증언에 따르면 다른 부대원들이 매우 바쁜 와중에도 ‘위안부’ 심문 담당자는 20명의 여성만을 전담하고 있어 상당히 불쾌했다고 한다. 즉 당시 레도 기지의 미군 심리전 팀은 ‘위안부’ 심문과 조사에 상당한 관심을 기울였음을 알게 해준다.
49번 보고서를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심문관에 대한 분석이 필요하다. 이 문서는 조선인 ‘위안부’ 20명의 발언과 증언이 직접적으로 기록된 형식이 아니라 문서 작성자가 20명의 심문기록을 종합해 별도의 보고서를 만든 것이기 때문이다. 심문보고서는 여러 가지가 있다. 한 명의 포로를 집중적으로 심문하여 기록한 경우도 있고 때에 따라서는 여러 사람의 심문기록을 종합하여 보고서가 작성되기도 한다. 어쨌든 포로들의 발언과 증언이 그대로 보고서에 실리는 경우는 드물다. 필요에 따라 직접 인용되는 문구가 있기도 하지만 전체적으로 보고서는 심문관이나 문서 작성자의 분석과 판단을 거쳐 작성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 문서의 작성자는 알렉스 요리치(Alex Yorichi)다. 이 인물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2차대전 시기 미 서부지역에 거주하고 있던 일본인 이주민들의 상황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미 루스벨트 정권은 2차대전에 참전하면서 독일, 이탈리아 그리고 일본계 이주민을 강제 수용하는 정책을 추진했다. 동부의 독일과 이탈리아계 이주민에 대해서는 이주 기간도 오래되었고 동일한 코카시안 계열이라 분리해내기도 쉽지 않아 수용정책은 사실상 유야무야되었다.
그러나 서부지역 일본인 이주민은 대대적으로 강제 수용되었고 그 피해가 상당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세칭 니세이(Nisei)로 불리는 일본 이주민 2세들이 미군에 대규모로 자원입대하게 된다. 가족들이 강제수용되어있는 상황 속에서 미국의 시민임을 증명하기 위해 가장 확실한 방법이 곧 군인이 되어 참전하는 것이었다. 유럽 전선에는 니세이만으로 구성된 전투부대가 참전하여 상당한 전공을 세우기도 했지만, 아시아 태평양 전쟁은 일본을 상대로 한 것이었기에 독립적인 전투부대 편성은 없었다. 대신 니세이들은 심리전, 포로심문 등에 집중적으로 투입되었다.
알렉스 요리치는 이러한 니세이 중의 하나였다. 이들의 심리상태는 매우 복잡했다. 자신의 모국과 현 거주국 사이의 전쟁으로 가족들은 수용소에 감금되어 있고 자신들은 모국과의 전쟁에 직접 참여해야 하는 모순적인 상황이었다. 이러한 복잡한 상황이 심문관들의 정체성을 일차적으로 규정하고 있었다. 이들이 미국과 일본 사이에서 미국 쪽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지향했던 것은 분명하다고 보인다. 그러나 일본과 한국 사이의 식민-피식민 관계에 대한 인식이나 입장은 분명치 않다. 코카시안과 일본인의 입장에서 ‘위안부’들을 평가하는 것을 보건대, 요리치가 자신을 일본인으로 인식하고 있었음도 분명해 보인다.
요컨대 요리치는 미국 군인으로서의 정체성과 함께 일본인으로서의 정체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고 하겠다. 이러한 복합적 정체성이 요리치가 조선인 ‘위안부’들을 바라보는 시선을 규정했을 것이다. 그 시선이 ‘위안부’들에 대해 우호적이지 않았음은 보고서 내용이 잘 보여준다. 요리치의 태도는 레도 기지 심리전 팀의 또 다른 아시아계 요원이었던 원 로이 챈(Won Loy Chan)과도 대비된다. 챈은 중국계 미군 대위로 스탠포드 대학을 나온 엘리트 장교였다. 그가 쓴『Burma: The Untold Story』에는 자신이 만났던 미치나의 조선인 ‘위안부’에 대한 깊은 연민이 잘 드러나 있다.
원 로이 챈과 니세이들의 관계는 썩 좋지 않았다고 한다. 원 로이 챈은 장교였고 니세이들은 대부분 사병이었다. 요리치는 나중에 장교가 되어 소령으로 전역하였지만 2차대전 당시에는 사병이었다. 이러한 계급 차이뿐만 아니라 중국과 일본이라는 모국의 차이가 큰 역할을 했을 것이다. 일본과 전쟁을 하고 있는 미군 속의 중국계와 일본계의 차이가 조선인 ‘위안부’에 대한 태도의 차이와 무관치 않다고 보인다.
49번 보고서의 내용을 이해할 때 또 하나 중요한 점은 보고서가 조선인 ‘위안부’들의 목소리를 직접 반영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다. 이는 기본적으로 언어 문제였다. 즉 요리치는 일본어와 영어는 가능했지만 한국어는 전혀 몰랐고 ‘위안부’들은 일본어에 서툴렀을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보고서에 따르면 19세에서 31세 사이의 조선인 ‘위안부’들은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했고 무지하다고 했다. 또한 ‘위안부’들의 한국 이름이 영어로 채록되어 있는데, 소리 나는 대로 받아 적었다고 했다. 이러한 점을 고려해보면 ‘위안부’들의 일본어가 유창하다고 보기는 힘들다.
결국 심문은 마마상, 파파상으로 불렸던 위안소 업자들을 통해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높았다. 기타무라(Kitamura, 北村) 부부가 조선인 ‘위안부’들의 업주였는데, 이들이 통역 겸 대변인 역할을 했다고 보인다. 위안소 업주가 ‘위안부’들을 대변했다면 그 내용이 업주에게 유리한 것으로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이렇게 심문관과 심문 과정의 특이성을 잘 이해하고 보고서 내용을 면밀히 분석해야 할 것이다.
‘위안부'에 대한 주관적 편견이 가득한 보고서
49번 보고서는 서문, 모집(recruiting), 성격(Personality), 생활 및 노동조건, 요금체계, 이용 일정, 보수와 생활 조건, 일본군에 대한 반응, 군인의 반응, 군사 상황에 관한 대응, 후퇴와 포획, 선전, 요청 등의 목차로 구성되어 있다. 여기에 ‘위안부’ 20명의 한국 성명 명단과 위안소 업주 부부의 이름이 부록으로 첨부되어 있다. 본문 6쪽과 부록 1쪽을 합쳐 총 7쪽 분량이다.
보고서 서문에서는 ‘위안부’를 병사들을 위해 일본군에 배속된 창기(prostitute)라고 단정했다. 모집 부분에서는 1942년 5월 초, 일본인 업자들이 동남아시아의 일본군 "위안 서비스"(comfort service)를 위해 조선인 여성들을 모집하기 시작했음을 설명했다. 업자들이 사용한 방식은 일종의 사기술에 가까웠다. 즉 업무는 병원에서 부상병들을 돌보는 일로 둘러댔고 싱가포르에서 새로운 삶이 가능하다고 설득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돈이었다. 가족의 빚을 청산하고 많은 돈을 벌 수 있음을 강조했다.
여성들 대부분은 무지하고 무학이라고 했으며 몇몇은 "지구상에서 가장 오래된 직업"의 종사자였음을 밝혔다. 그러나 대부분은 처음으로 ‘위안부’가 되었다고 했다. 전체 규모는 대략 800여명 정도였고 8월 20일 즈음에 랭군에 도착하였다. 도착 이후 8명에서 22명 사이 그룹으로 나뉘어 버마의 여러 곳으로 배치되었다. 이들 중 네 그룹이 미치나에 도착하게 되었는데, 쿄에이, 킨스이, 바쿠신로, 모모야가 그것이었다.
일부 편견과 주관적 평가 부분을 제외한다면 이 자료는 위안소 운영과 ‘위안부’들의 삶에 대해 비교적 많은 정보를 제공해준다. 위안소 운영 시간과 요금체계는 물론이고 ‘위안부’들의 수입에 대한 구체적 정보도 있다. 물론 ‘위안부’들의 수입은 업자와 분할해야 했고 자신들의 몫은 50~60% 정도였다. 위안소를 이용하는 일본군들의 반응도 나타난다. 일본군 중에는 줄 서서 위안소를 이용하는 것에 수치감을 표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보고서는 작성자의 편견이 노골적으로 드러나 있다. 이 보고서의 편견과 문제점은 다음에 소개할 동남아시아번역심문센터(SEATIC)가 작성한 심문회보 제2호의 내용과 비교해보면 더욱 분명해진다. 미치나의 조선인 ‘위안부’ 20명의 사례는 일본군 위안소 제도를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였기에 다양한 문서들에서 다루어졌다. 요리치가 작성한 보고서와 달리 SEATIC 심문회보 2호는 사실관계 중심으로 건조하게 서술되었다.
어쨌든 요리치 보고서는 조선인 ‘위안부’가 “무학이며, 유치하고 이기적”임을 강조했는가 하면 “자기중심적”이며 "여자의 속임수를 알고" 있다고도 했다. 앞에서도 얘기했지만 심문관 요리치의 편견과 주관적 평가가 두드러진 대목이다. 편견은 ‘생활 및 노동조건’ 부분에서도 나타난다. 요리치는 미치나의 조선인 ‘위안부’들이 다른 곳에 비해 호사스러운 수준으로 살았다고 했다. 특히 2년째 생활이 그러했다고 강조했다. 물건을 구매할 충분한 돈이 있었고 위문대를 받은 병사들로부터 선물도 많이 받았다고 했다. 또한 ‘위안부’들이 체육대회나 각종 소풍, 오락, 사교 행사 등에 참가하여 즐겼다는 기록도 남겼다.
이러한 진술이 ‘위안부’들에게서 나온 것인지 아니면 위안소 업자들에게서 나온 것인지는 불분명하다. 어쨌든 요리치가 보기에 ‘위안부’들의 삶이 빈곤과 물자부족으로 고통을 겪는 수준은 아니었음을 강조한 셈이다. 그러나 이는 일면적인 파악이다. 일본군의 버마 점령 초기상황은 나쁘지 않았다. 미치나 지역을 점령한 일본군은 지역의 모든 물자와 설비를 매우 용이하게 사용할 수 있었다. 그것은 위안소로 사용되었던 학교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위안소로 사용된 학교는 애초 미국 선교사가 운영하던 미션 스쿨이었으며 심지어 목사 사택까지 위안소로 사용하였다. 미션 스쿨을 징발해 위안소로 이용할 정도로 일본군의 위세는 거침이 없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위안부’들에게 일정한 물질적 재화를 보장할 수 있었다고 하겠다. 그러나 그것은 불과 1년 남짓한 기간이었고 1944년 중반부터 연합군의 대대적인 공세가 시작되면서 ‘위안부’들의 삶과 운명은 급전직하했다.
후퇴하면서 ‘위안부’들은 3시간의 시차를 두고 일본군을 따라갈 것을 명령받았으며 그 와중에 전투에 휘말려 사망자가 나오기도 했고 전투가 치열한 상황에서도 ‘위안부’ 업무를 수행해야만 했다. 특히 ‘위안부’들은 포로가 된 이후 자신들이 생포된 사실을 일본군에 알리지 말 것을 요청했다. 그 이유는 다른 부대의 ‘위안부’들이 위험에 빠질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일본군은 항복과 생포되는 것을 극단적으로 부정했다. 따라서 전투원이 아닌 ‘위안부’들조차 포로가 되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매우 큰 위험에 노출될 수 있었다.
‘위안부’들이 일정 기간 물질적으로 열악하지 않은 상황에 처해 있었다거나 일본군의 각종 모임에 참여했다는 점 등은 사실 지엽적인 문제들이다. 주인의 재산인 노예들도 안정적인 노동력 확보를 위해 기본적인 의식주가 제공되었다. 즉 더 큰 이익과 욕망을 위해 노예들이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하는 것이 주인에게는 바람직했다. 일본군의 성적 욕구를 해결하기 위해 설치된 위안소와 ‘위안부’들 역시 일본군의 만족을 극대화하기 위해 가급적 좋은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필요했을 뿐이다. ‘위안부’들이 항상적으로 기아선상에서 헤맨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자료가 있다고 해서 그것이 위안소 제도의 비인간성과 ‘위안부’들의 고통을 부정하는 것이 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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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황병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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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관, 한국의 근대적 변화과정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고 있으며, 현재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일본군‘위안부’ 전쟁범죄 관련 사업을 담당하고 있다.
aviantibj@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