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알려달라’ 하신 마지막 부탁을 이어갑니다 - 지역 인권 역사 플랫폼 꿈꾸는 경남 남해 ‘박숙이기록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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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양하
  • 2026-06-24
‘나를 알려달라’ 하신 마지막 부탁을 이어갑니다 지역 인권 역사 플랫폼 꿈꾸는 경남 남해 ‘박숙이기록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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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알려달라’ 하신 마지막 부탁을 이어갑니다
지역 인권 역사 플랫폼 꿈꾸는 경남 남해 ‘박숙이기록관’

경남 남해에 ‘박숙이기록관’ 건립 사업이 추진되고 있다. 특별한 지점은 남해군 의회와 ‘박숙이평화기림사업회 추진위원회’, 남해여성회 등 공공과 민간이 협업하는 지역사회 프로젝트라는 사실이다. 일본군‘위안부’ 피해 생존자에서 지역사회 어른이자 인권 활동가로 자리 잡은 박숙이 할머니가 상징하는 반전과 평화, 여성 인권, 남해의 지역성을 기억과 기록으로 오롯이 담아내기 위해 고민하는 지역의 이야기를 들었다.

 

 

경남기록원 민간기록물 제1호 주인공이 되다

“박숙이기록관, 남해에 만들어야지요. 힘 좀 보태주세요.”
2025년 여름, ‘남해여성회’ 김정화 회장의 전화 한 통에 진주, 창원에서 한걸음에 남해로 달려온 이들이 있었다. 지역에서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지원 및 기림운동을 하는 활동가의 어깨에 지워진 짐이 얼마나 무거운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이들이었다. 그리고 이들은 조금이라도 힘을 나눌 수 있는 일이라면, 더욱이 그것이 ‘박숙이기록관’ 건립과 관련한 일이라면 할 수 있는 일들을 차근차근 찾아 추진하기로 했다.

박숙이기록관 건립 사업의 출발은 202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박숙이 할머니 관련 활동 자료와 기록물, 박물류 314점이 경남기록원 민간기록물 제1호로 지정되는 ‘경사’가 있던 때다. 당시 경상남도 차원에서 일본군‘위안부’ 경남역사관 건립을 추진했고, 완공까지 남해여성회에서 박숙이 관련 기록물을 보관하기로 했다. 그러다 도지사가 바뀌면서 타당성 부족을 이유로 경남역사관 건립 계획이 불투명해지는 상황이 발생했다. 어떤 방식으로든 박숙이 관련 민간기록물을 안전하고 안정적으로 보존하고 전시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했다. 이를 위해 김정화 회장은 여러 차례 남해군수와 군의회를 찾아갔다. 박숙이 할머니 자체로 현대사를 온몸으로 통과한 어른이자 나아가 평화와 인권의 상징이라는 지역사회의 목소리를 끊임없이 전달했다. 협의가 거듭됐고, 마침내 2025년 9월 19일 의미있는 결과가 나왔다. 남해군 의회에서 ‘박숙이기록관’ 건립을 위한 설계비를 확보한 것이다. 얼마 뒤에는 시설비까지 확정됐다.

 

[사진 1] 고 박숙이 할머니의 생전 모습을 남해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강동학 미술가가 그린 것이다. (출처: 남해시대)

 

 

9년 만의 귀국, 그러나 고향에 가지 못한 사연

박숙이(1922-2016) 할머니의 고향은 경남 남해군 고현면 관당리였다. 1939년, 16살에 이웃에 살던 사촌언니 쌍가매와 ‘바래’를 가다가 일본군 2명에게 납치, 트럭에 실려 부산으로 끌려갔다. 남해 지역 토속어인 바래는 바다가 열리는 물때에 맞춰 갯벌에서 파래, 미역, 조개 등 해산물을 채취하는 작업을 뜻한다. 부산에서 배를 타고 일본 나고야로 갔던 박숙이 할머니는 다시 만주 위안소와 상해 위안소까지 끌려가 ‘위안부’ 생활을 해야 했다. 전쟁이 끝나면서 상해 위안소를 탈출했으나 중국인 홀아비 집에서 2년여를 살다가 도망쳐 간신히 고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때가 1948년이었다. 9년만인 스물 다섯이 되어 부산에 도착한 할머니는 그러나 바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할머니가 기억하던 고향이 ‘애로리’였기 때문이다. 한글을 몰랐던 할머니는 애로리의 행정구역상 명칭은 ‘관당’이라는 사실도 알지 못했다. 어린 시절 글 배우러 가는 오빠를 종종 따라나서자 아버지는 “계집아이가 글을 배우면 건방져서 사내 머리 꼭대기에 올라선다”며 야단쳤고, 결국 아버지의 이름도, 마을의 이름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게 되었다. 부산에 눌러 앉아 애기보기를 하며 지내던 박숙이는 어느 날, 음력 4월 초파일(부처님 오신 날)이 되어 어머니가 한복을 차려입고 ‘화방사’를 다녀온다고 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화방사가 어디에 있는지 알아보니 남해에 있는 절이었다. 얼마 뒤 박숙이는 남해로 가는 버스에 올랐다.

“ ‘눈만 감으면 기억은 하는데, 길가에 풀까지도 기억이 나고, 길가에 나뭇가지 어디 쯤에 나무가 있었고, 여기는 누구 집이었고, 다 기억이 나는데 그런 동네가 없다고 하니 정말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는 겁니다.”(김정화 구술, 2021)

노량에서 버스를 내리자마자 당신이 그토록 그리워하던 고향 산천이 눈앞에 있었다. 감격한 할머니는 그 자리에서 고무신을 벗고 큰절을 올렸다고 한다. 할머니는 오래도록 “내가 글을 몰라서”라며 원통해 했다. 하지만 할머니의 귀향길을 가로막은 건 할머니의 무지가 아니라 여자아이의 배움을 허락하지 않았던 당시의 가부장적 사회 분위기였다.

박숙이는 부산을 떠나 남해읍 오동마을에 정착해 아들 하나, 딸 둘을 입양했다. 상하이 위안소에서 나와 홀아비 집에 있을 때 근처 한약방에서 어깨 너머로 곁눈질하며 보았던 침과 부황, 그리고 길쌈으로 생계를 이었고, 신내림을 받아 집안에 칠성신을 모시기도 했다. 불행히도 남편마저 일찍 떠나보내고 아이 셋을 홀로 키우면서도 배곪리지 않은 것은 물론 아들딸을 시집, 장가 보내고 손주들 학비까지 댔을 정도로 생활력이 강했다. ‘위안부’ 생활로 온몸이 망가졌으니 어떻게 애가 생기겠냐고 한탄하기도 했지만 할머니는 그 상처에 머물지 않고 평생을 바쳐 어머니가 되고, 할머니가 되었다.

텔레비전를 보다 일본군‘위안부’ 피해를 증언하고 해결을 요구하며 시위에 나선 할머니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손주들에 대한 걱정으로 고등학교를 마치고 당신 품을 떠나면 그때 밝히기로 한 것이었다. 그러나 결심을 하고도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아 3년여를 동사무소 앞에서 서성이다가 돌아서기를 반복했다. 그러던 어느 날, 출장 나온 한 공무원에게 가슴 속에 묻어 두었던 과거를 털어놓았다. 그 사연은 ‘일본군’위안부’할머니와함께하는마창진시민모임’ 이경희 대표에게 전해졌고, 마침내 피해자 신고로 이어졌다. 양아들은 피해자 신고 전까지 자신의 입양 사실도, 어머니에게 그런 아픔이 있었다는 것도 전혀 알지 못했다.

2012년 9월, 박숙이 할머니는 236번째로 등록한 일본군‘위안부’ 피해 생존자였다. 아흔의 늦은 나이에 피해자로 등록하며 할머니는 구십 평생 간절히 “훌훌 털어버리고 싶었다”고 전했다.

 

[사진 2] 박숙이 할머니가 잘못 기억했던 ‘애로리’는 행정구역상 ‘관당’의 명칭이었다. 할머니는 여든이 넘어 마을회관에서 글을 배웠고 당신의 이름을 한글로 써서 전셋집 벽에 ‘박숙이’라고 써 놓았다. 왼쪽 첫 번째가 할머니가 직접 쓴 첫 문패이다. 가운데는 드나드는 손님을 위해 아들이 만들었고, 오른쪽은 디자인을 하는 강동학 님이 만들어준 것이다. (출처:  오마이뉴스, 2016,12.09, ‘고 박숙이 할머니 집, 남아 있는 문패 3개의 애틋함’)

 

 

트라우마의 치유, 어머니 되기와 말하기

박숙이 할머니가 고향 남해에서 엄마가 되어 한평생을 살았다는 것은 진정한 모성의 획득 과정이라고도 볼 수 있다. “내는 죽더라도 아들이라도 살거로(살게) 해주고 가야재. 내한테 부치서(의지해서) 묵고(먹고) 살아왔는데 내가 죽으모(죽으면) 아무것도 없는 불쌍한 사람 아이가. 그때까지는 내가 우찌해도(어쨌든) 살아있어야 안 되것나... 지나 내나 다 불쌍한 인생인기라...,”(김정화 논문)라는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불쌍한 것에 대한 연민으로 자식을 돌보았다.

이러한 연민은 사회적 연민으로 나아갈 수 있는 동기가 되었다. 2013년 남해여성회에서 조직적으로 심리정서안정화 사업을 맡아 진행할 무렵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이냐는 물음에 할머니는 학생들을 만나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했다. 그해 12월 고3 학생들을 대상으로 처음 강연을 했다. 이듬해부터는 <할머니 들려주세요> 프로그램으로 남해 지역 중고등학교 방문 강연을 했고, 건강이 악화된 2015년 이후에는 할머니 집 마당에서 학생들과 함께 <박숙이가 들려주는 이야기 한마당>을 열었다.

박숙이 할머니는 살면서 말하지 못한 것들이 많았다. 고향에 돌아왔지만 사촌들이 10년 동안 어디서 무얼 하다가 왔길래 거지꼴이냐고 물을 때도 말하지 못했다. 동사무소 직원이 뭐 하러 왔냐고 물을 때도 입을 떼지 못하고 돌아섰다. 참담했던 시절의 이야기는 더더욱 할 수가 없었다. 위안소에서 군인을 거부하다가 야구방망이로 맞아 허리뼈가 부러지고, 안으로 따라가지 않으려다가 손을 다치고, 차라리 죽자고 면도칼로 손목도 그었다. 죽지도 못하고 발각되어 죽도록 맞았다. 같이 상해 위안소를 탈출하다가 총을 맞아 죽은 쌍가매 언니 이야기도 하지 못했다. 여전히 지워지지 않고, 아니 지우지 않고 속 깊이 묻어두었던 기억이 있었다.

“늘 그놈들한테 당하는 그런 꿈을 꿔. 이젠 안 꿔야 될낀데. ... 열여섯에 당한 기 지금 나이가 구십이 넘었는데도 못 이자삐고.” (『들리나요? 열두 소녀 이야기』중 인용)

 

[사진 3] 박숙이 할머니는 생전에 <할머니 들려주세요> 프로그램으로 남해 지역 중고등학교 방문 강연을 했고, 건강이 악화된 2015년 이후에는 집 마당에서 학생들과 <박숙이가 들려주는 이야기 한마당>을 열었다. 사진은 2014년 6월, 강연 후 박숙이 할머니와 남해고 학생들이 기념 촬영한 모습이다. 사진은 일본군‘위안부’ 피해 생존자 지원을 하며 박숙이 할머니의 ‘딸’이 된 남해여성회 김정화 회장이 촬영했다.

 

 

아이들아, 고개 빳빳이 들고 다녀라!

어린 학생들을 만난 할머니는 가슴에 억눌렸던 말을 꺼내놓았다.
“일본에 지지 말라. 고개 빳빳이 들고 다녀라!”
스피박(Spivak)이 말하는 '서발턴(Subaltern)'의 외침이었다. 이는 말할 수 없던 것을 말하게 되는, “훌훌 털고 싶다”는 할머니 식의 트라우마 치유이기도 했다. 할머니는 (사)남해군 향토장학회에 장학금도 기부했다. 할머니에게 꼭 돌아가야 할, 눈에 선한 고향이었지만 상처를 드러낼 수 없는 곳이었던 남해는 ‘어머니 되기’를 통해 진정한 어머니가 될 수 있었던 장소로 거듭났다. 동시에 남해의 젊은 세대를 만나 말하기를 통해 자신의 상처를 드러낼 수 있었던 트라우마 치유의 장소이기도 했다.

이처럼 켜켜이 쌓인 박숙이 할머니의 흔적과 기억이 남해에 있었다. 남해여성회가 ‘박숙이기록관’ 건립을 끈질기게 추진해온 배경이다. 설계비와 시설비를 확보하면서 기록관 건립 계획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박숙이평화기림사업회 추진위원회’와 남해여성회가 지난 4월 3일 <남해 박숙이기록관 건립의 의미와 과제>를 주제로 연 심포지엄은 현 단계 지역사회의 고민을 공유하는 자리였다.

강경화 경상국립대 문화콘텐츠학과 강사는 “남해라는 지역성을 기반으로 하는 고향의식으로 친밀성 연대가 가능했고, 기록화 작업을 통해 박숙이 개인의 삶을 공동체 기억으로 가져갈 수 있었다”면서 “지역 공동체가 ‘박숙이기록관’을 공공 인권 역사 플랫폼으로 만들 수 있는 충분한 가능성을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했다. 또 문경희 국립창원대 국제관계학과 교수는 “일본군‘위안부’ 주제 박물관의 국제적 동향을 보면 전시와 연구, 교육, 아카이빙, 예술의 장으로 확장되고 있다”고 전하고, “특히 해외에서는 민족주의적 서사, 가해-피해의 이분법적 구도는 지워지고 역사관 건립과 기림비 설치 등에서 아리와 누진, 동마이[1]처럼 지역적 특성과 연계한 새로운 상징성이 드러내고 있다”고 강조했다.

 

[사진 4] 지난 4월 3일 <남해 박숙이기록관 건립의 의미와 과제>를 주제로 연 심포지엄은 현 단계 지역사회의 고민을 공유하는 자리였다. (사진 제공: 남해시대)

 

 

반전과 평화, 여성 인권, 남해의 지역성 담아내기

한편 심포지엄에서는 진행 과정에서 불거지고 있는 현안도 도마 위에 올랐다. 대표적인 것이 공간 확보 뒤 남해군이 의뢰한 기록관 설계 용역 중간 결과에 대해 자문위원으로 참여한 연구자들과 활동가들이 재고를 요청하는 등 절차와 방향에서 존재하는 이견이다. 심포지엄 참가자들은 서둘러 완공하기보다 ‘박숙이기록관’의 내용과 형식을 충분히 고민하고 접근할 것, 설계 용역 업체는 일본군‘위안부’ 문제와 남해, 박숙이의 관계 속에서 전시 목적과 방향을 다시 잡을 것 등을 원칙으로 논의를 지속해 나가기로 했다.

박숙이 할머니의 “‘나’를 알려달라”는 말씀을 ‘박숙이기록관’에 구현하기 위해서는 남해와 고향의식, 어머니 되기, 배우지 못한 한글과 이름, 트라우마와 말하기라는 삶의 주제들이 반전(反戰)과 평화, 여성 인권, 남해의 지역성 등의 관계 속에서 숙고되어야 할 것이다.

 

 

각주

  1. ^아리(Ari)는 독일 베를린 미테구에 설치된 소녀상으로, 아르메니아어로 ‘용감한 자’를 뜻한다. 누진(Nujin)은 독일 카셀에 설치된 소녀상으로, 쿠르드어로 ‘새로운 삶’을 의미한다. 동마이(Đồng Mai)는 독일 쾰른 나치 기록박물관 앞에 임시 설치되었다가, 최종적으로 2025년 6월 28일 본 지역 여성박물관 안뜰에 설치된 소녀상 이름이다. 청동으로 만든 매화라는 이 표현은 독일 코리아협의회 베트남 활동가가 지은 이름으로 알려져 있는데, 청동의 영속성과 견고함, 추운 겨울을 이겨내고 피어나는 매화꽃 같은 인내와 강인함을 상징한다.

 

 

  • 글쓴이 한양하
    경상국립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강사이다. 구비문학과 어린이그림책에 관심을 가지고 공부를 시작했다. 이후 합천 원폭피해자 구술,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자 경남 유족 증언집부터 전주 사천 지역 유족 구술, 서부 경남 지역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지원활동가 구술 등 구술 채록 활동을 통한 연구를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