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군‘위안부’란 일본 제국이 아시아 침략전쟁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일본군에 의해 기만적인 수단으로 강제동원되어 군 위안소에서 성적 착취를 당한 여성들을 지칭한다. 군 위안소는 1932년 중국에서 일어난 상하이 사변을 계기로 만들어졌고 중일전쟁과 아시아태평양전쟁으로 확전된 1937년~1945년 사이에 집중적으로 설립되었다. 식민지 한국과 대만은 물론, 중국·인도네시아·필리핀·동티모르 등 일본이 점령했던 다수 지역의 여성들이 ‘위안부’로 동원되었다.
나무막사로 지어진 상해 육군 오락소 (출처 : 아카이브814)
제12특별근거지대사령부 해군위안소 이용내규
(출처 : 아카이브 814)
1990년대 일본군‘위안부’ 문제가 공론화된 이후 관련 연구가 진척됨에 따라 피해자를 지칭하는 명칭도 변화해 왔다. 초기에는 ‘정신대(挺身隊)’라고 불렸으나, '정신대'가 전시하에서 군수공장 등으로 노동력을 동원하기 위해 만든 조직임이 밝혀지면서 ‘위안부’와는 다르다는 점이 드러났다.
정신대와 일본군‘위안부’를 구별하게 된 이후로 ‘종군위안부’라는 용어가 ‘정신대’를 대체하여 사용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종군’이라는 표현이 ‘종군작가’나 ‘종군기자’처럼 자발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어 ‘위안부’를 지칭하기에는 적절치 않다는 지적이 제기되었다. 또한 ‘위안’이라는 말은 ‘위로하여 마음을 편안하게 해준다’는 의미로, 폭력을 미화하는 지배자와 군인들의 시각을 담고 있어 적절치 않다는 비판 또한 제기되었다.
일본군‘위안부’의 상황을 개념적으로 가장 정확히 포착한 용어는 일본군‘성노예’이다. 이 용어는 현재 유엔 등 국제사회에서 자주 사용된다. 위안소에서 이루어진 여성들에 대한 폭력이 성적 노예화였음을 고발함으로써 일본군‘위안부’제도가 갖는 폭력성을 명확히 드러내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노예라는 명칭이 생존한 피해자들에게 지속적인 고통을 상기시킬 수 있기 때문에, 개별 피해자들을 지칭할 때는 일본군‘위안부’피해자 혹은 생존자라고 부르고 있다.
위안소 분포 지도 - © 액티브 뮤지엄 「여자들의 전쟁과 평화 자료관」(https://wam-peace.org/ianjo/)
군 위안소는 중국, 대만, 필리핀,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일본, 조선, 미크로네시아, 솔로몬 제도 등 일본군이 주둔했던 아시아 태평양 전역에 설치되었다. 군 위안소의 설치 목적은 점령지 여성에 대한 강간 방지, 병사들의 성병 예방, 성적 ‘위안’을 통한 병사들의 사기 진작, 군사기밀 유출 방지 등을 명목으로 내세웠으나, 결국 제국주의 침략전쟁을 효율적인 수행을 위해 여성에 대한 성적 폭력을 노골적으로 제도화한 것이었다. 군 위안소는 일본군이 직접 설치·운영하거나 설치만 하고 운영은 민간에 위탁하는 경우, 혹은 주둔지 주변 유곽을 점거하여 군인만 이용하게 하는 등 그 형태나 운영 방식은 시기나 장소에 따라 다양했다. 그 형태가 어떠했든지 일본군은 군 위안소의 전반적인 상황을 통제하고 감독했다.
일본군‘위안부’는 초기에는 주로 일본과 조선, 대만 등 일본 ‘본토’와 식민지 출신 여성들이 동원되었다. 그러나 전쟁이 장기화하고 전선이 확대됨에 따라 중국, 필리핀, 베트남, 인도네시아 등 점령지의 여성으로까지 확대되었고, 심지어 인도네시아에 거주하던 네덜란드 여성처럼 백인 여성도 포함되었다. 많은 여성이 납치, 인신매매, 취업 사기 등의 다양한 방식을 통해 군 위안소로 동원되었으며 일본군은 ‘위안부’의 모집과 이송에도 깊숙이 관여하였다. ‘위안부’로 동원된 여성의 정확한 규모는 알 수 없으나, 그 추정치는 학자에 따라서 8만 명에서 40만 명까지 다양하게 제시되고 있다.
군 위안소 일본군‘위안부’들의 생활은 비참했다. 이들이 상대해야 했던 일본군 수는 지역과 시기에 따라 매우 다양했는데, 특히 일요일에는 군인들이 끊임없이 들어왔기 때문에 몇 명을 상대했는지 셀 수 없었다는 피해자의 증언도 있다. 외출은 거의 허가되지 않았고 정기적으로 성병 검진을 받아야만 했다. 임신하였을 때는 강제로 유산시키거나 낳은 아기를 즉시 빼앗아 갔으며, 성적 착취 외에도 빨래와 바느질 등 노동 착취를 당하였고, 감금, 구타, 고문 등 말로 표현하기 힘든 참혹한 폭력에 노출되었다.
아시아태평양전쟁이 끝나고 전쟁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피해자들은 아시아의 가부장적인 분위기 속에서 자신의 피해를 부끄러운 과거로 인식하며 침묵했다. ‘처녀공출’이니 ‘정신대’니 하는 일들을 이미 많은 이들이 알고 있었지만, 이를 문제시하는 시각은 없었다. 성폭력 피해자를 오히려 ‘몸을 더럽힌 죄인’으로 보는 사회 분위기에서 ‘위안부’ 피해는 개인적 수치일 뿐 구조적 폭력으로 인식되지 않았던 것이다.
강고하던 가부장적 분위기에 균열이 나타나기 시작한 건 1980년대 말부터였다. 민주화와 더불어 활발해진 한국여성운동의 흐름 속에서 1990년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가 발족되었고 일본군‘위안부’ 문제의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위한 활동을 본격화하였다. 이러한 움직임은 마침내 1991년 8월 14일 ‘위안부’ 피해자 김학순의 공개 증언으로 이어졌다. "내가 살아있는 증거다"라고 외친 김학순의 증언은 반세기 만에 ‘위안부’ 문제가 공론화되는 결정적인 계기로 작용하였다. 이후 피해자들의 증언과 일본군‘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움직임은 전 세계로 빠르게 확산하였다.
1991년 도쿄지방재판소 기자회견에서 증언하는 김학순
(출처 : 아카이브 814)
(왼쪽) 2000년 12월 8일 일본 도쿄에서 열린 ‘2000년 일본군성노예전범 여성국제법정’(국제연대위원회제공)
(오른쪽) 일본군‘위안부’ 기록물 선정을 위한 회의(국제연대위원회제공)
(첫번째) 2000년 12월 8일 일본 도쿄에서 열린 ‘2000년 일본군성노예전범 여성국제법정’(국제연대위원회제공)
(두번째) 일본군‘위안부’ 기록물 선정을 위한 회의 (국제연대위원회제공)
전 세계에 자신의 경험을 증언한 피해 생존자들과 이들을 지원하고 연대해 온 많은 이들은 지난 30여 년간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진실 규명과 정의로운 해결을 거듭 촉구해 왔다. 이들은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아시아연대회의>를 통해 국경을 넘어 연대하고, 수요시위를 비롯한 거리에서의 활동과 역사 교육 등을 통해 이 문제를 알려 나가며 이 같은 참혹한 역사가 되풀이되지 않도록 노력해 왔다. 또한 국제노동기구(ILO)와 유엔 등 국제기구에 이 문제를 제기하여 일본군‘위안부’ 문제가 전시 여성 인권 옹호를 위한 역사적 지렛대로 작동하도록 만들었다. 특히 2000년, 남한과 북한뿐 아니라 일본, 중국, 인도네시아, 네덜란드 등의 피해자와 시민들은 ≷2000년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국제법정>을 개최하여 일본 히로히토 천황에게 위안소 운영과 ‘위안부’ 동원에 대한 책임을 물어 유죄 판결을 내렸다. 국제적 시민연대들의 활동은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전 세계에 널리 알리는 것은 물론, 전시하에 이루어지는 성폭력이 중대한 범죄이자 여성 인권 유린이라는 국제적 기준을 정립하기에 이르렀다. 동시에 과거 일본의 식민지 또는 점령지에서 발생했던 일본군‘위안부’ 문제가 아시아를 넘어 국제적으로 여성 인권 증진과 평화의 지평을 열어가기 위해 기억해야 할 역사적 사건으로 자리매김되었다.
이러한 흐름에 힘입어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는 현재 일본군‘위안부’ 관련 기록물의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활동을 지원하고 있다. 2014년부터 추진된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활동은 한국, 일본, 중국, 대만, 인도네시아, 필리핀, 동티모르 등 7개국 14개 단체가 참여하고 있으며, 일본군‘위안부’ 역사를 여성 인권 회복의 지렛대이자, 인류 보편의 인권 신장과 항구적 평화에 기여하는 ‘세계의 기억’으로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한다. 피해 생존자가 얼마 남지 않은 현재, 미래 세대에게 일본군‘위안부’ 역사의 비극을 알리고 이러한 참혹한 인권 유린의 역사가 다시는 되풀이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노력해야 할 책임이 우리 모두에게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