숏폼과 ‘세 줄 요약’이 트렌드인 시대임에도 ‘기지촌’이 뭐냐고 물어본다면 설명하기가 여전히 쉽지 않다. 다만 내가 감각하고 있는 기지촌은 폭력이 난무하나 그 폭력에 저항하는 목소리조차 묵살되는 시공간이며 그 ‘바깥’은 이러한 일상을 모르거나, 외면하거나, 멸시하고 있는 현실이다.
그리고 기지촌 안과 밖을 나누고, 그 안에서 벌어져 온 일들을 지우려는 시도는 기울어진 권력 관계 위에서 국가와 지방자치단체, 일부 지역사회에 의해 오랫동안, 강하게 이루어져왔다. 동두천시에는 미군 ‘위안부’를 대상으로 강제적인 성병 검사를 시행하고 ‘탈락’한 이들을 ‘치료’ 명목으로 감금하다시피 한 성병관리소 건물과 자리가 남아있다. 현재 동두천시는 소요산 일대를 관광개발(소요산 확대개발사업)[1] 하고자 성병관리소를 철거하려고 한다.
이처럼 공권력을 앞세운 이 막강한 ‘지움’을 어떻게 인식하고 대응해야 할까. 성병관리소가 철거되도록 내버려 두어야 할까, 아니면 철거되지 않도록 목소리를 내야 할까. 후자라면 이 문제에 대해 어떻게 균열을 내고 개입하고 기억할 것인가? 성병관리소 철거에 반대하는 평화 활동가들의 투쟁이 하루씩 늘어갈 때마다 고민이 깊어졌다.
이러한 고민을 안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뜻있는 단체들(두레방, 반성매매인권행동 이룸, 역사문제연구소)이 모여 기지촌 답사와 간담회를 기획했다! 목표는 기존 문제의식에 페미니즘적 관점을 더하고 기지촌 여성운동을 둘러싼 다각적인 대화의 장을 만들자는 것이었다. 두레방과 이룸 그리고 역사문제연구소(이하 역문연)은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이 문제에 대해 균열을 내고, 개입하며, 기억하면서 연루되기를 택했다. 군사주의와 자본주의, 가부장제가 공고히 교차하고 있는 현실, 그리고 반성매매가 아닌 자본주의적 ‘재개발’에 입각한 기지촌·집결지 ‘소거’에 반대하는 하나의 실천적인 방법으로써 이 공간과 활동가들의 역사에 연루되고자 한 것이다. 기지촌 여성의 삶을 드러내는 동시에 그들과 함께 호흡한 활동가들의 현장을 답사지로 꾸렸다. 또한 세미나와 기획회의를 통해 용어와 시각을 점검하고 토론했다.
이러한 준비를 거쳐 지난 5월 23일 오전 10시, <기지촌, 지워지는 역사를 페미니즘적으로 균열내고 기억하며 개입하기-동두천×의정부>라는 주제로 2026 동두천-의정부 기지촌 답사가 출발했다. 동두천 옛 성병관리소의 철거 저지를 위한 공동대책위원회 농성지 → 일명 ‘윤금이 사건’으로 불리는 ‘주한미군 케네스 마클 성폭력 살인 사건’ 현장인 보산동 기지촌 → 주한미군 범죄에 분노하는 시민들의 대규모 시위가 열렸던 캠프 케이시 앞과 보산동 클럽 거리 → 구 상패동 공동묘지 → 턱거리마을(캠프 호비 및 ‘박순자의 묘’) → 의정부 빼뻘마을(캠프 스탠리 및 의정부 성병진료소-옛 두레방 자리)로 이어지는 일정은 의정부문화역 이음에서 참여자들과의 간담회를 끝으로 마무리되었다.
첫 답사지인 소요산 초입에 위치한 동두천 성병관리소 앞에 도착했다. 답사팀이 선 곳은 성병관리소에 들어갈 수 없게 막아둔 철책과 그물 앞이었다. 바로 옆에는 자유수호평화박물관 안내판과 ‘동두천 옛 성병관리소 철거 저지를 위한 공동대책위원회(이하 공대위)’ 농성 천막이 자리해 묘한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역문연 이지완 연구원이 먼저 성병관리소 운영의 역사적 맥락을 소개했다.
“1970년대 박정희 정권에서는 미군 주둔 유지를 위해 정책적으로 ‘기지촌정화사업’을 실시했습니다. 이때 ‘기지촌 정화’의 주요 내용은 기지촌 성매매 여성을 경찰 및 보건소에 등록시켜 검사하고 치료하는 성병 관리였고요. 그러나 이 성병 관리 정책은 여성들에게만 일방적으로 적용됐습니다. 여성들만 의무 검사 대상이었고, ‘토벌’과 ‘컨택’이라 불린 접촉 확인 체계도, 이어진 강제수용과 치료 또한 여성들에게만 행해졌어요. 성병 치료용으로 강제 사용된 ‘페니실린’ 부작용으로 사망한 여성도 적지 않았습니다. 국가와 미군이 기지촌 여성들에게 자행한 ‘국가·군사폭력’이었습니다.”
상층 일부가 무너진 채 방치돼 있지만 건물 자체는 견고한 편인 성병관리소는 기지촌정화사업이 이뤄진 핵심 공간 중 하나였다. ‘외화벌이 애국자’나 ‘민간외교관’으로 포장되다가도 성병 검진증이 없거나 양성 판정을 받은 기지촌 여성은 이곳에 ‘치료’ 명목으로 강제 수용당했다. 대지 2,371평, 각 층별 100평 규모의 2층 건물은 1973년부터 1993년까지 운영되다가 1996년이 되어서야 폐쇄되었다. 정면에서 성병관리소를 보기 위해 자리를 옮긴 뒤에는 공대위 최희신 집행위원장이 설명을 이어갔다.
“1층에는 진료실·검진실 등이, 2층에는 20명 정도 수용 가능한 7개의 입원실 등이 있었어요. 입원실에는 도주를 막는 쇠창살이 설치돼 있었고요. 사진 기록 등에 남아 있어요.”
성병관리소는 성병 검사에서 탈락한 여성들을 수용한다는 의미의 ‘낙검자수용소’라는 이름뿐만 아니라 쇠창살에 매달린 여성들이 원숭이같다며 ‘몽키하우스’라는 이름으로도 불렸다. 미군과 한국정부가 기지촌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통치의 수단으로 적극 ‘동원’, 관리하는 한편 앞장 서서 사회적 낙인을 찍었던 곳이었다.
2014년 이에 대한 항의가 공식화됐다. 기지촌 여성 당사자들이 한국 정부를 상대로 국가손해배상청구 소송을 제기한 것이다. 2022년 9월 대법원은 ‘성매매를 부추기고 성매매 여성들을 조직적으로 관리했다’며 국가의 책임을 공식 인정했다.[2]
다른 한편 2023년 2월, 동두천시가 소요산 관광지 확대개발사업을 추진하면서 성병관리소 철거 계획을 밝히면서 건물 존치 문제가 급부상했다. 철거 계획은 경기북부평화시민행동을 비롯한 시민사회가 꾸린 공대위에 의해 반대에 직면했다. 그렇다면 왜 이 건물을 보존해야 하는 것일까라는 질문이 나올 수밖에 없다. 건물이라는 물리적 실체만 보존한다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것보다는 왜, 그리고 어떻게 이 건물과 그를 둘러싼 역사를 기억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고민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지 않을까? 철거 저지의 의미에 대해 공대위는 이렇게 답하고 있다. 기지촌 여성들의 인권을 유린한 국가폭력 현장을 평화와 인권의 기억 공간으로 보존해야 한다고! 그들은 5월 23일 현재 634일째 철거 저지 투쟁을 이어오고 있다. 그러는 사이 울타리에 갇힌 성병관리소는 무성한 풀들 사이에서 오늘도 무너져 내리고 있다.
현재 동두천시에는 보산동의 캠프 케이시와 광암동의 캠프 호비 두 곳만 남아있지만 한때는 6곳이나 되는 미군기지가 있었다.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동두천시의 세금 80%가 기지촌에서 나왔다고 할 만큼 지역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높았다. 하지만 지역 경제의 ‘번영’ 뒤에는 기지촌 여성들이 겪는 폭력이 공존하고 있었다.
1992년 10월 28일 보산동의 작은 셋방에서 윤금이 씨가 피살된 채 발견됐다. 범인은 미8군 2사단 의무대 소속 케네스 리 마클이었다. 동료 김윤자(가명)씨가 기지촌 여성과 아동들의 쉼터인 ‘다비타의 집’에 알렸고, 지역사회부터 한국 사회 전체로 문제제기가 급속히 확산됐다. 약 일주일 뒤인 11월 5일 동두천민주시민회, 두레방 등 40여개 시민사회단체가 ‘주한미군의 윤금이씨 살해사건 공동대책위원회’를 구성해 살해미군 구속 처벌 등을 요구하는 투쟁에 돌입했다.
시민사회의 문제제기에도 불구하고 당시 주한미군의 법적 지위를 규정한 SOFA(한미주둔군지위협정. Status of Forces Agreement)의 구조적 문제로 인해 한국의 사법 당국은 살인자 신병을 확보할 수 없었다. 체포 후 범인이 미군헌병대에 인계된 상태로 재판은 진행됐고, 1993년 3월 의정부지방법원은 마클에게 사형을 선고했으나, 가해자는 복역하던 중 가석방 되어 미국으로 송환됐다. 이제는 다른 건물이 된 현장(셋방) 터를 둘러보며 역문연 최우영 연구원은 당시 한국사회가 놓친 부분을 냉정하게 짚어보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윤금이씨 사건’은 전국적 공분을 일으켰지만 결국 한국인에 대한 미군 범죄, 민족적 자존심 문제로만 환원됐습니다. 정작 기지촌 안에서 일상적으로 자행되던 인권 유린과 성폭력 문제는 제대로 포착되지 못한 거죠. 미군만이 아니라 클럽 주인, 지역 남성들이 자행해온 착취와 폭력 구조는 논의 대상에도 오르지 못했습니다. 살아서는 사회 구성원으로 인정받지 못했던 여성이, 참혹한 죽음을 맞이한 뒤에야 비로소 ‘민족 주권’의 상징으로 소비되는 역설적인 상황이었던 거예요. ‘윤금이씨 사건’은 미군 기지촌 구조에서 주변부로 밀려나 있던 여성들의 존재를 어떤 시선으로 복원할 것인가 하는 문제와 맞닿아 있는 것 같습니다.”
답사팀은 대로 하나를 사이에 두고 ‘윤금이씨 살인 만행 규탄 시민대회’가 열렸던 캠프 케이시 앞을 지나 기지촌 여성들이 일했던, 그러나 지금은 많은 이주 여성들이 일하고 있는 클럽 거리로 이동했다. 동행했던 두레방의 나길 활동가로부터 기지촌 여성들의 생활과 ‘노동’ 조건, 클럽의 공간적 구조, 현재 E-6비자를 통해 들어온 이주 여성들의 클럽 유입 경로 등에 관해 듣고, 옛 클럽 건물로 이동했다. 현재 수리 중이라 주위에 양해를 구하고 잠깐 내부를 들여다볼 수 있었는데, 매우 좁고 가파른 계단 위로 방들이 미로처럼 연결돼 있었다.
1990년대 당시 ‘윤금이씨 사건’이 반미·민족주권의 문제 안에서 주목되었지만, 동시에 여성계에서는 이 문제의 근원이 성폭력을 비롯한 여성 인권 침해에 있다는 문제제기가 진행되었다. 이러한 문제의식의 연장선상에서 윤금이 씨의 죽음을 알린 동료 김윤자 씨의 용기를 떠올리며 ‘윤금이씨 사건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또다른 기지촌 여성인 이주 여성들과 어떻게 연대할 수 있을까, 지금 이 순간 우리 앞에 놓인 질문을 생각한다.
캠프 케이시 앞에서 차로 약 5분 거리, 동두천시 상패동의 오래된 공동묘지는 공원으로 재탄생 중이었다. 신원이나 사망 시점을 특정할 수 없는 묘가 많았던 상패동 공동묘지에는 기지촌 여성들도 다수 안장되었고, 윤금이 씨 역시 화장 후 이곳에 뿌려졌다고 한다. 5월 23일 기준 묘지의 흔적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져 멀끔한 ‘근린공원’만이 자리하고 있었다.
곧바로 이동해 도착한 곳은 광암동 턱거리마을, 캠프 호비 정문에서 약 1km 떨어진 거리에 조성돼 있는 ‘박순자의 묘’였다. 온데간데 없이 사라진 상패동 공동묘지와는 대조적으로 묘비와 묘소가 잘 갖춰져 있었다. 박순자 씨는 기지촌 여성이었고, 1971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알려져 있으나 정확하지는 않다. 묘비에는 ‘1971년 사망한 SOON JA RAYNOLDS’와 함께 ‘내 사랑 평화롭게 쉬기를. 당신을 영원히 생각하고 있기에 우리의 마음은 하나로 합쳐져 있다오’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과거 기록에 따르면 본래 봉분이 있었다가 어느 순간 미국식 평장으로 바뀌었고, 묘비 아래에 있었다던 “박순자 가지 말아주오”라는 글귀도 지금은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순자’는 지역사회 곳곳에 녹아 있는 것 같다. 2020년 턱거리마을에서 ‘순자’라는 이름을 가진 두 명의 기지촌 여성의 서사를 중심으로 연 ‘순자문화제’에서 그 일단이 엿보였다. 턱거리마을은 이후 2021년과 2023년 두 차례 더 마을 문화제를 개최해 기지촌 역사와 공동체 회복 의지를 담아내기도 했다.[4] 답사팀은 캠프 호비를 내려다보고 있는 묘비 앞에 준비해온 노란 국화꽃을 놓고 묵념 후 걸음을 돌렸다.
의정부시 고산동 산 116-1번지. ‘빼뻘마을’이라는 별칭으로 더 잘 알려진 이곳은 1952년부터 운영되기 시작한 캠프 스탠리 주변 지역으로, 미군 부대가 자리를 잡자 생계 유지가 쉽지 않았던 이들이 자연스레 모여들면서 형성된 마을이다. 이곳에서는 1986년부터 기지촌 성매매를 포함해 성착취·인신매매 근절과 여성들의 자활, 군사주의 반대 활동을 해 온 ‘두레방’의 정강실 활동가가 안내를 맡았다.
“빼뻘마을은 배나무가 많아서 붙여진 것이라지만, 기지촌 여성들에게는 한 번 발을 들이면 빼도 박도 못한다는 의미였다고 해요. 그만큼 힘들고 고약한 곳이었고, 그만큼 여성들의 손을 잡아줄 곳이 절실한 곳이었어요. 25년간 두레방의 둥지였던 여기 고산성병진료소는 이름처럼 ‘언니들’[5]이 매주 2번씩 검사를 받던 곳이었어요. 그러던 곳이 두레방의 터전이 돼 ‘언니들’의 쉼터로 활용되었으니 한 건물에 켜켜이 쌓인 역사의 층이 정말 두터워요. 그런데 저기 걸린 ‘안전진단 진행중’ 현수막에서 알 수 있지만 이 건물도 철거 대상이에요.”
이어 정 활동가와 캠프 스탠리 후문 등 빼뻘마을 구석구석을 살펴보았다. 군데군데 클럽 간판이 걸려 있는데, 현재 운영 중인 곳도 있단다. 자료 상으로는 46개 건물이 유흥음식점, 상가 등으로 등록돼 있으나 문을 닫은 곳이 많다는 설명이다. 골목 안쪽으로 들어간 정 활동가가 낡은 건물 사이로 깔끔한 은회색 외장재가 눈에 띄는 곳에 멈춰 섰다.
“캠프 레드클라우드 앞에서 시작했던 두레방이 이곳 고산동으로 막 이전했을 때 생활했던 초기 두레방 자리예요. 여러 이유로 고달팠던 ‘언니들’과 이야기를 자주 나누는 사랑방이자 우리밀 빵을 만들던 자활 작업장이었어요. 아이들을 잠시 보호하고, 공부를 보살피는 쉼터이기도 했고요. 이곳에 있다가 고산성병진료소로 옮겨 활동을 이어왔어요.”
정 활동가는 ‘예쁨’과 ‘소녀스러움’ 그리고 청춘을 자주 이야기하던 어떤 ‘언니’의 삶도 들려주었다. 옛 고산성병진료소 건물은 한국 정부와 미군에 의한 폭력을 증명하는 장소이지만, 그 위에는 ‘언니들’의 삶과 그들과 함께 호흡한 두레방 활동가들의 삶이 덧씌워져 있다. 역사의 층을 보여주는 진료소가 철거되지 않기를 바란다.[6]
답사 후에는 두레방과 이룸의 활동을 소개하고, 아울러 답사 참가자들이 생각을 나누는 간담회가 진행되었다. 간담회에서는 일본군‘위안부’ 운동과 미군 ‘위안부’ 운동의 연결, 성매매 집결지 ‘소거’에 대한 문제 제기 등이 논의되었다. 각자의 생각은 조금씩 다를지라도, 성매매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배제되고 폭력을 감수해야 했던 역사에 대한 감각과 “그 사람들이 왜 거기 있는지”를 물어보는 마음을 함께 공유한 경험은 이번 답사가 남긴 또 하나의 성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