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리발, 무성의, 냉담에 맞서 싸우다

장영은

  • 게시일2024.10.14
  • 최종수정일2024.10.17

오리발, 무성의, 냉담에 맞서 싸우다
'관부재판' 이끈 김문숙의 삶


김문숙(1927-2021)은 영화 〈허스토리〉에서 배우 김희애가 연기한 '원고단장 문정숙 역'의 실제 인물이다. 1992년부터 1998년까지 6년 동안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3명과 근로정신대 피해자 7명 등 총 10명의 원고단은 야마구치 지방재판소 시모노세키 지원에 제소했다. 김문숙은 원고단과 함께 일본의 시모노세키와 부산을 오가며 관부재판을 승리로 이끌었다. 일본 사법부 역사상 처음으로 "일본 정부는 피해여성 1인당 30만 엔씩을 배상하라"는 승소판결을 이끌어낸 것이다. 역사적인 '관부재판'을 이끈 김문숙, 무엇이 그를 '위안부' 운동으로 이끌었을까? 김문숙의 삶의 궤적 속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김문숙의 역동적이고 광활한 삶 전체를 관부재판만으로 설명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화여대 약학과를 중퇴한 그는 1963년에 경기대 관광학과를 졸업하고 1965년 부산에서 아리랑관광여행사를 세웠다. 1985년에는 초대 부산여성경제인협회장을 맡을 정도로 성공한 사업가가 되었지만, 김문숙은 이 무렵부터 여성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는 부산여성의전화, 부산여성폭력상담소 등의 설립 및 운영에 매우 헌신적이었다. 특히, 정신대문제대책부산협의회 회장 직을 맡으면서 김문숙은 일본군'위안부' 문제와 자신의 삶을 한 순간도 분리시키지 않았다. 관부재판을 승리로 이끌었지만, 그것으로 자신의 소임이 끝났다고 여기지 않았다. 2004년에는 사비를 털어 〈민족과여성역사관〉을 설립하고, 역사적 정의를 회복하는 일에 몰두했다. 2021년 작고할 때까지 김문숙은 일본군'위안부' 문제와 함께 했다. 현재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는 김문숙이 남긴 역사적인 기록물들을 이관받아 아카이빙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기생관광 반대운동과 김문숙의 부끄러움

사업가로서 안락한 삶이 보장되었던 김문숙은 왜 '위안부' 문제에 뛰어 들었을까? 부산에서 여행사 대표로 사회적 입지를 확실하게 다진 김문숙이 60대에 '위안부' 문제라는 '가시밭길'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간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사실 사업가에서 여성운동가로의 변신이 갑작스러운 일은 아니었다. 1970년대부터 시작된 기생관광 반대운동은 김문숙의 전회(轉回)에 도화선이 되었다. 

1968년 한국 정부는 외화 획득을 목적으로 기생관광 정책을 추진하고, 외국인 관광객에 한해 유흥음식세를 면제하는 한편 접객 여성에 대한 성병 검진과 서비스 교육을 강화했다.[1] 그리고 1970년대부터 한국을 방문하는 일본의 남성 단체 관광객들에게 기생파티는 대표적인 관광 상품으로 소개되었다. 1972년 일본교통공사가 발행한 관광안내서에는 '한국은 인간이 가질 수 있는 모든 욕망을 충족시키는 나라.'[2] 라는 문구가 버젓이 포함되어 있을 정도였다. 여러 폐해를 파생시킨 기생관광이 사회적 이슈로 부상하자 한국과 일본에서 반대운동이 일어났지만, 1980년대에 들어서도 사라지지는 않았다. 

부산에서 기생관광 반대운동을 주도한 사람들 가운데 김문숙이 있었다. 수십 년 동안 싸워왔지만 근절되지 않는 기생관광을 조직적인 여성 운동으로 발전시킬 방법을 모색하던 중 그는 한 일본인 관광객에게 항의를 받았다. 일본 남성은 "전쟁 시에는 처녀들이 몸 팔러 얼마나 왔는데, 그때야 우리가 돈이 없어 얼마 못 줬지만 지금은 많이 주는데 왜 반대하느냐."[3]고 따졌다. 김문숙은 경악했다. 동시에 여성운동가를 자처해 온 자신이 20세기 최대의 여성 수난사인 ''위안부' 문제' 를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에 큰 부끄러움을 느꼈다.[4] 

부끄러움의 원천은 자신의 무지였다. 김문숙은 역사적 사실을 직접 파악하기로 결심했지만, 이내 난관에 부딪혔다. 당시 한국에서는 '한 조각의 자료'도 찾기 힘든 실정이었다. 김문숙의 회고에 따르면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대해 한국 정부는 '무성의'했고, 일본 정부는 계속 '오리발'을 내밀었다. 한국 국민들은 '냉담'했다. 때로 결핍이 강력한 에너지로 작용하는 것처럼 김문숙은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점차 몰입하게 되었다. 한국에 '위안부' 관련 자료가 없는 것도 문제였지만, 자료가 없다고 해서 문제를 공론화시킬 수 없다는 입장에 결코 동의할 수 없었다. 

왜 제대로 된 자료가 없는 것인가? 그 역사적 맥락에 관해서는 누구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김문숙은 일본 정부와 한국 정부는 물론이고 '위안부' 문제에 무관심한 한국인에게 비판적이었다.  

"전쟁에 희생된 군인이나 민간인들은 그 혼령을 모시고 역사에 기록을 남기는데, 성의 도구로 쓰이다 죽어간 이 여성들은 아무데서도 돌보지 않습니다. 그러니 정신대 문제는 여성운동의 차원에서 문제가 되는 겁니다. 지금도 온 동남아를 휩쓰는 일본 남자들의 매춘관광 문제, 우리나라에서 성행하는 매매춘 문제는 여성운동이 극복해야 할 과제입니다. 지금 매매춘 문제의 뿌리에는 정신대 수난사가 은폐돼 있어요. 정신대의 수난사에 대한 진실 규명과 반성이 이루어지지 않는 한 우리 민족과 여성의 해방은 불가능합니다."[5] 

 


왜 그토록 오랫동안 '위안부'의 존재를 몰랐을까?

김문숙은 분초를 아껴 움직이면서도 운동 과정에서 겪은 자신의 경험을 한 자 한 자 기록으로 남기는 일에 최선을 다했다. 개인의 기록이 역사의 일부가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동시에 직접 글을 쓰고 나서야 자신이 왜 오랫동안 '위안부'의 존재를 몰랐는지 그 해답을 찾을 수 있게 되었다. 

김문숙은 식민지 시기 명문이었던 대구공립여자고등보통학교(현 경북여고) 재학 중에 군수공장으로 가거나 종군 간호원이 되어 일본에 충성하라는 말을 들은 적은 있었지만, '위안부'에 대한 언급은 기억에 없었다. 일본인 교장은 학생들에게 황국 여성이 될 것을 강조한 사람이었다. 김문숙이 학교에서 배운 내용은 철저하게 일본 제국주의와 군국주의를 옹호하는 내용이었다. 학창 시절 '식민지 교육에 세뇌된 철부지'가 아니었다고 스스로 부인하기 어려웠다. 특히 여성의 경제적 자립과 인권 향상을 위해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고 자부해왔던 김문숙이었기에 '위안부'의 존재를 전혀 몰랐다는 사실이 더욱 수치스럽고 통탄스러웠다. 이화여대 중퇴 후 경북 중등교원 양성소 지리과를 나와 진주여고 교사로 일한 것조차 마음에 걸렸다. 일제 말기에 교사 자격증이 있으면 공장에 가지 않아도 된다는 말을 듣고 교사 자격증부터 따서 동원을 피할 수 있었던 여성이 당시 몇 명이나 되었을까 되짚어 본 것이었다. 

자기 성찰의 시간을 가진 김문숙은 불행한 역사를 답습해서는 안 된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때부터 절박한 심정으로 역사 공부에 매달렸다. 한국 고대사부터 현대사까지 방대한 자료를 섭렵하며 통시적인 관점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했다. 한국인이 망각해서는 안 될 역사적 사실들이 무엇인지 집요하게 조사했다. 그때부터 독학자의 삶이 시작되었다. 혼자서 공부하고 혼자서 자료를 모으는 일은 외롭고도 치열했다.

이 과정을 거치면서 김문숙의 삶의 방향은 또 한 번 달라지게 된다. 김문숙은 인생의 목표를 '위안부' 문제 활동가로 완전히 새롭게 설정했다. 김문숙에게는 당장 자료집 출간이 시급한 과제였다. 1990년 자비를 들여 정신대의 자취를 좇은 취재여행기 『말살된 묘비-여자정신대』를 펴냈다. 하지만 한국 정부와 국민들에게 호응을 얻지는 못했다. 자료집 출간 약 한 달 전인 1990년 11월, 김문숙은 평생을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천착한 윤정옥 교수 등과 함께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를 발족시켰다. 이듬해인 1991년 5월 '아시아의 평화를 위한 여성의 역할' 심포지엄에 이어 8월에는 '아시아태평양지역 전후 보상 국제포럼'에 참가하며 '위안부'문제가 국제사회에서 제대로 언급조차 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목격했다. 

 

 

하늘의 별을 따는 각오로 진행된 '관부재판'

1991년 8월, 피해 생존자 김학순의 공개 증언은 부산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활동에도 큰 분기점이 되었다. 기자회견을 자청해 "당시 당했던 일이 하도 기가 막히고 끔찍해 평생 가슴 속에만 묻어두고 살아왔지만 요즘 서울거리에 일장기가 나부끼고 국민 모두 과거를 잊은 채 일본에 매달리는 걸 보니 도저히 참을 수가 없다"[6]며 고발한 김학순의 증언은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해 10월, 김문숙은 부산에 '정신대신고전화'를 개통했다.

이듬해인 1992년 1월에는 일본 언론에 10대 초반의 나이 어린 조선인 제자들을 정신대에 보낸 뒤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살아온 일본인 교사 이케다 마사에의 고백이 전해졌다. 김문숙은 식민지 시대 초등학교 5, 6학년 학생들을 근로정신대에 보낸 사실을 고백하며 "정신대 동원 명령은 거절할 수 없는 천황의 명령"이었음을 밝힌 이케다의 양심선언에 박수를 보냈다. 일본 정부를 향한 비판이 점점 거세졌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1992년 7월 "군의 관여는 인정되나 강제연행에 대해서는 자료가 없다."[7]는 입장을 발표하며 문제의 본질을 회피했다. 

김문숙은 일본 사회에 경종을 울려야겠다는 일념으로 자비로 냈던 『말살된 묘비-여자정신대』의 일본어판 출간을 결심했다. 하지만 일본에서 책 출간은 시작에 지나지 않았다. 사법적 정의와 진실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의지를 멈출 수 없었던 김문숙은 '하늘의 별 따기'를 어떻게든 시도해야 했다. 일본 법정에서 사법 투쟁을 벌이는 관부재판의 서막을 열어젖힌 것이다. 1992년 12월, '위안부' 및 근로정신대 피해자들이 야마구치 지방재판소 시모노세키 지방법원에 '부산 군대위안부·여자 정신대 공식사죄 및 배상청구 소송'을 접수했다. 피해자들의 건강 상태와 경비 등 현실적인 문제를 고려해 부산에서 가까운 지역을 선택한 것이었다. 

1993년 9월 시모노세키지부 제3법정에서 이뤄진 첫 구두변론을 시작으로 1998년까지 총 23번에 걸쳐 진행된 재판. 거동조차 불편한 피해자도 있었지만 변론은 계속됐다. 무료로 변론을 맡아준 13명의 변호인단과 200여 명의 일본 후쿠오카 후원회 회원들의 도움이 컸으나 6년 동안 소요된 경비는 만만찮았다. 김문숙은 그 비용을 기꺼이 떠안았다. 1998년 4월 27일, 시모노세키 지방법원은 '입법부작위에 의한 국가배상책임에 대해 원고측 주장을 일부 인정'하고,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각 30만 엔을 지불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위안부' 피해자의 소송 중 유일하게 원고의 청구가 인용된 역사적 판결이었다. 물론 2001년 히로시마 고등재판소에서 시모노세키 지부의 판결을 취소하고 원고 소송을 기각한 데 이어 2003년 최고재판소마저 항소를 기각해 원고측 최종 패소가 확정됐지만 1998년 판결의 의미는 결코 퇴색되지 않는다. 

 

 

93세에도 김문숙은 역사 공부를 멈추지 않았다.

관부재판 과정에서 김문숙이 가장 실망한 부분은 일본 정부에게 공식 사죄의 의무는 없다는 재판부의 태도였다. 한국 정부의 무관심에도 다시 한 번 큰 상처를 입었다. 이는 김문숙이 역사 교육에 직접 나서야겠다고 결심한 계기가 되었다. 사회에서 배제된 위치, 주변적 위치에 놓인 소수자들의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기록하고 모으는 일을 실행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2004년 9월, 사재 1억 원을 들여 조성한 <일본군'위안부' 할머니들을 위한 민족과여성역사관>이 문을 열었다. <MBC 다큐에세이 그 사람 - 허스토리 실제 주인공 수향 김문숙>에는 매일 역사관에 출근해 방문자들과 대화를 나누며 역사의 진실을 강조하는 김문숙의 일상이 기록되어 있다. 전 재산을 여성운동에 내놓을 정도로 배포가 컸지만, 김문숙의 생활은 소박했다. 대중교통을 이용하며 검소하게 살아가는 김문숙의 일상이 다큐멘터리에서 잔잔하게 조명되었다. 무엇보다 자기 자신에게 편지를 쓰는 김문숙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실제로 김문숙이 펴낸 책 가운데에는 자기 자신에 관한 이야기가 많다. 

"창문을 닫고 원고지를 당겨 본다. 내가 할 일이 무엇이며, 내가 내 인생에서 바라는 것은 무엇이었던가.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옳게 사는 것일까?" [8]

인생을 '배움의 연속'이라 생각했던 김문숙은 93세에도 일과 공부를 멈추지 않았다. 그로부터 2년 뒤인 2021년 김문숙은 세상을 떠났다. 자신의 무지를 부끄러워하며 스스로를 성찰하고 역사를 공부했던 김문숙에게 '앎'이란 정의, 윤리, 용기, 자긍심과 같은 뜻이었다. 김문숙은 일본군'위안부' 관련 자료를 찾기 어려웠던 한국의 현실에 분노하며 〈민족과여성역사관〉을 건립하고, 5톤 트럭 2대 분량의 역사 자료를 평생에 걸쳐 모았다. 일본 정부의 오리발, 한국 정부의 무관심, 한국 사회의 냉담함과 맞서 싸워온 김문숙의 삶이 그 속에 켜켜이 녹아 있다. '김문숙 아카이브'가 곧 공개될 예정이라고 한다. 어지럽고 혼란스러운 때일수록 역사에서 길을 찾고 싶다. '김문숙 아카이브'에서 역사의 난제를 대면하고, 그 해법의 단초를 얻을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각주

  1. ^ 박정미, 「발전과 섹스-한국 정부의 성매매관광정책, 1955년-1988년」, 『한국사회학』 48(1), 2014 참조.
  2. ^ 김문숙, 『소녀와 할머니』, 정신대문제대책부산협의외 민족과여성 역사관, 2018, p.10.
  3. ^ 김문숙, 『소녀와 할머니』, 앞의 책, p.12.
  4. ^ 김문숙, 「정신대를 두 번 죽인다」, 『사월의 비는 오월의 꽃을 실어온다』, 예인당, 1993, p.32.
  5. ^ 김문숙, 『소녀와 할머니』, 앞의 책, p.33.
  6. ^ 김문숙, 『소녀와 할머니』, 앞의 책, p.64에서 재인용.
  7. ^ 김문숙, 『소녀와 할머니』, 앞의 책, p.72.
  8. ^ 김문숙, 「소인의 탄식」, 『사월의 비는 오월의 꽃을 실어온다』, 예인당, 1993, p.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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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장영은

성균관대학교 동아시아학과에서 「근대 여성 지식인의 자기서사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저서로 『쓰고 싸우고 살아남다』, 『여성, 정치를 하다』, 『변신하는 여자들-한국 근대 여성 지식인의 자기서사』 등이 있다. 성균관대학교 동아시아학술원 초빙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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