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미야마 다에코의 예술-운동: 비/인간 존재의 ‘포스트 메모리’를 기다리며 (2)

신지영

  • 게시일2022.12.26
  • 최종수정일2023.01.27

#샤먼의 도입: 가해성을 인식하고, 문답적 증언과 전형적 표상을 벗어나다 

두 번째 물음. 비체험자이자 구조적 가해자의 위치에서, 어떻게 피해 당사자에게 공감하고 자신의 문제로 연결시킬 수 있을까?

도미야마의 예술-운동의 핵심에는 가해성에 대한 성찰이 있다. 영상 〈금지된 이미지〉에서 도미야마는 전쟁에 대한 일본의 가해성과 책임이 애매하게 이야기된다고 비판한다. 

일본의 패전이란 말은 항상 애매한 말이죠. 그래서 ‘종전’이라고도 하고 전쟁을 마치 흘러간 추억처럼 이야기하기는 해도 가해적 측면에서 일본인이 아시아에 대해 뭘 했는지에 대해서는 정말 미디어든 뭐든 깊이 다루지 않죠. 그래서 전쟁의 기억이 점차 애매해졌죠.-중략-그래서 80년 광주를 그린 뒤에는 제 일생 동안 전쟁 책임의 문제를 해야겠다고 결심했어요, 아무도 하지 않으니까, 반드시 해내야겠다고요.(금지/5:26)

샤먼은 피식민자의 고통을 가해자의 위치에서 대변할 수 없다는 윤리의식에서 도입되지만, 바로 그 구조적 한계를 넘어설 수 있는 장치이기도 하다. 도미야마는 “가해자인 일본인이 피해자를 주체적으로 그릴 수 없다”고 생각해 샤먼을 끌어들이지만, 동시에 스스로 “샤먼이 되어 지쿠호 탄광에서 일해야 했던 죽은 조선인 탄광부를 불러들”인다.[1] 샤먼이 등장하는 슬라이드 작품에서는 음악, 영화, 등 다양한 장르와의 협업이 두드러지는데, 이러한 변화를 일컬어 도미야마가 대위법적으로 ‘복수의 타자’의 시점을 확보한 것이라고 평가되기도 한다.[2] 이처럼 샤먼은 기록될 수 없었던 ‘위안부’의 이야기뿐 아니라, 그/녀들과 연결되어 있던 동시대인의 이야기, 더 나아가 흐느낌·탄식·바람소리·바다울림 등 비/인간의 소리를 담아낸다. 

〈튀어라 봉선화〉에는 네 층위의 소리가 겹쳐진다. 질문하는 츠치모토 감독, 대답하는 도미야마, 증언·구술의 내레이션, 시·소문·의성어·의태어이다. 내레이션 낭독은 재일조선인 연극인 이려선이 담당하는데 “신세타령”, “어머니” 등은 한국어 음독(밑줄로 표시) 그대로 발음된다. ‘신세타령: 죽은 조선인 광부가 말한다’라는 첫 부분은 샤먼을 부르며 시작한다. 이후 영상이 진행됨에 따라 탄광에서 죽은 조선인의 흐느낌·울음이 뒤섞인 증언이 나온다. 

제 마음에는 지금 조선 무당, 샤먼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리는 듯합니다. 일본이라는 이국 땅에 ‘어떤 조선인’으로 묻힌 사람들의 한의 목소리, 그 애끓는 신세타령을 말하게 해주세요. (봉선화/14:00)
‘배가 고파요, 어머니. 석탄을 캐야 하는데 배가 고파 죽을 것 같아요.’ 이렇게 말하자 목각으로 맞았다. -중략- 감독관 놈이 무서워 작은 목소리로 불렀어. 어머니...어머니...(봉선화/27:30)

『강제연행 강제동원-지쿠호 조선인 광부의 기록』 표지 캡처본 ⓒ신지영

 

이러한 안용한의 사정은 1981년에 출판된 『강제연행 강제동원-지쿠호 조선인 광부의 기록』에 실린 ‘안용한(49세)’의 구술과 거의 일치한다.[3] 더욱 흥미로운 것은 ‘봉선화 밤의 깊이로’ 부분에서 배경음으로 펼쳐지는 탈춤소리, 〈황토의 길〉 연작을 배경으로 들리는 노랫말과 소문 등이다.

♪쌀이 나는 논은 신작로가 되고 /말 좀 하는 이는 감옥으로 가네. /일 좀 하는 이는 공동묘지에 가고 /어려도 아이를 낳을 수 있는 계집은 유곽으로 보내졌네. /미쳐버린 이는 꿈에서 깨고 /멀리서 날이 밝아오고 있네.♪
바닷길 조선해협 현해탄을 건너 일본에 가면 “배불리 밥을 먹을 수 있다”고 들었다. 일본에 가면 “3년 일해 돈을 모을 수 있다”고 들었다. “한 번 데려가면 돌아올 수 없는 지옥의 연락선”이라고 사람들은 불렀다. (봉선화/17:10, 이탤릭 표시는 소리의 톤이 바뀌는 부분-인용자) 

마당놀이, 탈춤소리, 노랫말, 소문…. 이 소리들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세상에 대한 비판, 가난 속의 들뜬 희망 등을 담고 있는 ‘증언 속 증언’이다. 〈튀어라 봉선화〉에는 윤동주의 시가 등장하는데 이를 둘러싼 도미야마와 한국 민주화 운동의 연계도 확인된다. 예를 들어 윤동주의 시 「십자가」가 〈벽 안의 원한〉을 배경으로, 「서시」가 〈유라시아 성좌에〉를 배경으로 들린다. 도미야마는 재일조선인 김소운이 번역한 윤동주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참고했거나[4] 민주화 운동에서 낭독되던 「서시」를 전해 들었을 것이다. 이처럼 구전되는 노래와 소문, 민주화 운동과의 관련성을 보여주는 시 등은 강제동원된 당사자와 주변의 동시대인을 연결하는 ‘확장된 증언’이다.

특히, 샤먼의 도입이 그 여성주의적 의미를 심화시키는 것은 〈바다의 기억〉연작 및 슬라이드 작업에서다. 도미야마는 “남성들이 그린 것은 전장의 슬픔이었어요. 그렇지만 여성들이 마주해야 했던 것은 남겨진 사람들이었죠”(봉선화/4:15)라며 남성 화가들의 피해 의식에 젖은 전쟁 표현을 비판한다. 그리고 〈바다의 기억〉에서 저항과 해방을 외칠 수조차 없는 ‘위안부’의 경험을 그릴 방법을 모색한다. 그때 다시 등장하는 것이 ‘샤먼’이다.

〈바다의 기억〉 은 ‘바다의 기억’, ‘머나먼 남쪽 자바’, ‘태평양 해저에서’, ‘위안부 여성들의 이야기’, ‘가룽간 축제의 밤’, ‘말하자! 목소리를 높이자!’라는 6개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도입인 ‘바다의 기억’은 “제2차대전 때 일본군‘위안부’로 끌려간 조선의 여성들에게 바칩니다”(바다/00:28)라는 말로 시작하고 이어 무당의 소리-무당에게 부탁하는 소리가 서로 응답한다. 즉 샤먼의 도입은 ‘위안부’의 증언을 문답 구조가 아닌 응답 구조로 바꾸어 놓는다. 

나는 무당이다. 바닷새와 물고기의 이야기를, 반세기 전에 태평양 밑으로 가라앉은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그것은 전쟁의 이야기. 나는 무당이다. 나는 죽은 이들의 목소리를 듣는다.(바다/01:25) 
무당이여, 무당이여, 들어 주소서. -중략- 우리 언니 김순덕은 대체 어디에 있나요. 살아는 있나요? 죽어버렸나요?(바다/03:00)

언니를 찾아달라는 부탁을 받은 무당은, 남태평양 바닷속을 안내해 줄 자바의 정령 와양(Wayang)을 불러낸다. 와양은 인도네시아의 전통 인형극이다. 조선의 무당이 인도네시아의 인형극 와양을 만나 바닷속에 가라앉은 존재들의 이야기를 듣고 끌어낸다. 사실 증언을 포함한 모든 인터뷰 형식은 고해성사, 법정 심문 등을 기원으로 한다는 점에서 경험자/해석자 사이의 위계를 심화시킬 수 있다.[5] 그러나 〈바다의 기억〉에서는 증언하는 피해 당사자와 그것을 듣는 비체험자 사이에 샤먼이 개입함으로써 이 위계적 문답 구조를 해체하고 당사자의 호소를 동시대를 살았던 다른 존재들에게 연결시킨다. 

‘위안부의 이야기’에서도 ‘위안부’로 끌려갔던 피해 당사자들의 말이 직접적으로 노출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무명의 집단적 발화이며, 의성어·의태어·말줄임표로 점철되어 인간/비인간 표현의 경계를 넘나든다.

아이고! 뼈가 쑤신다! 우리나라를 빼앗고, 내 청춘을 짓밟고, 내 목숨을 빼앗은 일본군! 아이유..., 그로부터 사십여 년 이 머나먼 남쪽 바다에 가라앉은 나. 외롭고 외로워.... 아무도 찾지 않는 바닷속에 묻혀버린 뼈인 나(바다/16:00). 

결국, 동생은 언니 순덕을 찾지 못한다. 바다의 광활함 때문이 아니다. 마을 사람들이 ‘위안부’였던 순덕을 ‘수치’로 치부해 버려 진심으로 찾길 원치 않기 때문이다. 화자인 ‘나’는 남자들은 첩을 두고 기생과 놀아나도 비난받지 않는데, 전장에서 돌아온 여자들은 죄인처럼 숨어 살아야 한다고 울분을 토한다. “얼마 안 남은 인생, 고향을 꿈에 그리면서도 돌아가지 못한 여성들이여, 말해라, 목소리를 높여라!!”(바다/24:00) 이 말은 그/녀들을 맞이해야 할 공동체의 응답을 촉구한다.

마지막으로 주목하고 싶은 것은, 무당이 순덕이를 찾아다니며 만나는 다층적 존재들이다. 무당은 “거기 있는 당신은 누구?”라고 물으며 남태평양 해저를 종횡한다. 이 질문에 일본 배에서 새우잡이를 했던 자바인, 서핑하다 파도에 휩쓸려온 도쿄의 대학원생, 해군 병장, 육군 보병, 노무자였던 수라바야의 행상인 등이 답한다. 바닷속에는 ‘위안부’, 가족을 두고 죽는 것을 고통스러워하는 이등병, ‘천황’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해군항공대원이 뒤섞여 있다. 그리고 동생은 언니 대신, 대구에서 ‘위안부’로 끌려간 이혜경, 광주에서 끌려간 양지순과 만난다. 이처럼 “거기 있는 당신은 누구?”라는 질문이 닿은 곳은, 남태평양 해저에 가라앉아 있는 결코 손쉬운 ‘화해’를 입에 담을 수 없는 온갖 죽은 존재들의 관계이다. 

도미야마가 ‘위안부’를 소재로 하여 그린 바다에는 생선, 하얗게 도드라진 해골, 쇠사슬, 꽃, 인어, 소라, 일본 국기 등이 뒤섞여 서로 저항한다. ‘위안부’ 표상의 전형성을 깨뜨리는 이런 이미지에 대해서 레베카 제니슨은 표상의 지배적 시스템을 근원에서 교란하는 힘이 있다고 분석한다.[6] 이처럼 가해성의 구조적 인식에서 도입된 샤먼이라는 매개는, 증언이 지닌 문답 구조의 폭력성, ‘위안부’의 고통만을 초점화한 표상의 전형성을 벗어나, ‘위안부’와 함께 바다에 가라앉은 가해/피해가 뒤섞인 존재들 사이의 불화/연결을 상상하게 한다.

#도래할 예술-운동: ‘위안부’에서 ‘자파유키’로, 그리고 비/인간 존재로 

세 번째 물음. ‘위안부’ 재현이 고통의 순간을 영원히 반복하는 게 아니라, 다른 존재와 연결되고 당사자와 비체험자 모두를 해방시키는 순간을 낳을 수 있을까?

한 달 전쯤 ‘위안부’ 증언을 초점화한 전시 〈증언을 만나다(Encountering Testimonies)〉[7]를 보러 갔다. 여기서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를 AI로 구현한 콘텐츠 〈영원한 증언〉을 보게 되었다. 팸플릿에는 “일본군‘위안부’ 생존자들의 녹화된 증언과 인공지능(AI) 기술을 활용하여 관람자들이 증언자들과 대화를 나눌 기회를 제공하는 새로운 형태의 전시 프로젝트”라고 소개되어 있었다. 

사실 이 콘텐츠는 이전에도 전시된 적이 있고 그에 대한 다양한 비판적 논점도 제기된 바 있다. 이지은은 〈일본군‘위안부’ 증언의 과거와 미래(2): 영원(永遠)한 증언과 ‘오지 않은(未來)’ 증언〉[8]에서 이 콘텐츠에 대한 논의가 이뤄졌던 학술 워크숍 〈다차원의 증언을 만난다는 것〉(2022년 7월 29일)에 참여한 토론자들의 발언을 정리해 주었다. 그 논의를 요약하면, 이 콘텐츠가 역사 부정론과 역사 왜곡의 공격이 거세어지고 고령인 피해 증언자들이 점차 세상을 떠나는 등 “오늘날 증언이 당면한 문제를 돌파”하기 위해 기획되었음을 인정하면서도, 자칫‘위안부’의 피해자적 면모만 부각할 수 있다는 점에 우려를 표하는 견해들이었다. 또한 발언자들은 콘텐츠의 질의응답이 사전에 모두 결정되어 있다는 점을 들면서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며 공감대를 형성하고 이로써 집단적 기억을 만들어가는” 진정한 대화가 될 수 있을지에 대한 물음도 제기한다. 이지은은 이 글 끝에서 “‘영원한 증언’은 증언자를 ‘보존’하는 방식이 아니라, 새로운 세대, 그야말로 ‘오지 않은(未來)’ 증인을 초대함으로써도 가능할 것”이라는 의견을 제시한다.

이처럼 여러 각도에서 진심 어린 비판적 논점이 제기되었기 때문에, 이번 새로운 전시에서는 콘텐츠의 변화가 있으리란 기대를 안고 갔지만 그렇지는 않았다. 앞으로의 변화 가능성을 열어둔다고 해도, 현재의 이 변화 없음은 ‘위안부’를 둘러싼 재현의 전형화를 보여주는 한 예가 아닐까 싶어 우려된다. 이러한 고민은 도미야마 다에코의 예술-운동이 제기한 물음들─기술과 형식의 도입, 가해성을 포함한 위치성의 인식, 비체험자로 확대된 공감 가능성이 어떻게 가능할까─과도 만난다.

‘위안부’ 피해 생존자들의 경험을 기억/기록하는 힘은, 당사자의 증언을 반복하는 게 아니라, 현재에도 비가시화된 젠더기반 폭력의 문제와 싸우는 힘들과 연결될 때 비로소 펼쳐질 수 있는 게 아닐까. 도미야마가 일본군‘위안부’에 천착해서 만든 슬라이드 〈바다의 기억〉의 상영이 다른 존재들과 연결되면서 만들어낸 예술-운동의 궤적은 그런 점에서 중요하다.

『아시아와 여성해방』 창간호 첫 페이지 캡처본 ⓒ신지영

 

하나는 ‘위안부’와 ‘팔려 온’ 태국 이주 여성 (성)노동자의 연결이다. 도미야마는 한국의 민주화 운동 및 여성운동과 긴밀한 연계를 맺고 있었으며[9], 일본 ‘아시아여성의모임’과 기관지 『아시아와 여성해방』[10]에 참여하는 등 아시아 여성에 대한 일본의 신식민주의적 (성)착취에 대한 비판 의식을 지니고 있었다. 이런 문제의식 속에서 1989년 방콕에서 <바다의 기억>을 상영한 날 도미야마는, 다음에는 “태국을 테마로 하겠”다는 약속을 했고, 이 약속은 〈돌아오지 않는 소녀(帰らぬ少女)〉로 구체화된다.[11]

1990년대 일본은 버블 경기였고, 태국, 미얀마, 중국, 라오스 등 아시아 여기저기서 소녀들이 일본으로 ‘팔려’ 들어왔다. 그중에서도 동남아시아에서 ‘팔려 온’ 많은 여성들은 ‘자파유키’라고 불렸다.[12] 〈돌아오지 않는 소녀〉를 제작하는 동안에도, 일본의 버블 경기를 떠받치고 있는 그/녀들의 죽음은 끊임없이 일어났다. 태국 출신 여성 노동자가 우쓰노미야 호텔에서 피살(91년 3월)되었고, 태국 출신 미등록 이주여성이 오사카에서 투신 자살했으며(91년 3월), 이바라키현에서는 태국 여성의 구출을 요청하는(91년 5월) 일들이 연속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도미야마는 ‘위안부’로 끌려갔다 돌아오지 못하는 여성들과 ‘팔려 온’ 태국 이주여성 노동자가 구조적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간파한다. 도미야마가 연결한 이 실타래는 현재 한국에 거주하는 이주여성, 난민여성, 그리고 성노동자에게로 향하게 한다. 동시에 현재 강렬한 파동을 품고 펼쳐지고 있는 한국의 이주여성, 난민여성, 성노동자 운동들은[13], 전형화된 피해자 형상에 타격을 가한다. 
 
다른 하나는, ‘위안부’에서 비/인간 존재로의 연결이다. 식민주의와 전쟁에 대한 원체험을 안고, 소수자의 곁에 선 기록작가가 되겠다는 도미야마의 결심은, 3.11 재해 이후 인간중심주의에 대한 처절한 반성과 함께 비/인간 존재에게로 확장된다. 〈바다로부터의 묵시〉(2012)에 삽입된 바람소리, 흐느낌, 침묵, 비명 등은 〈바다의 기억〉 속 목소리 없는 자들을 상기시키는 동시에 비/인간 존재들의 경험을 담은 또 하나의 기억의 ‘바다’를 개방한다.

도미야마의 예술-운동은, 시공간적 거리와 인/종적 장벽을 훌쩍 뛰어넘어 폭력과 차별에 노출된 채 삶을 버텨온 존재들을 알리고 연결시키려는 끊임없는 시도였다. 도미야마가 드러낸 ‘위안부’와 근로정신대의 고통은 2020년 12월 농촌 비닐하우스에서 동사한 이주노동자 여성에게로, 2022년 8월 16일 부산출입국·외국인청에 구금된 지 8시간 만에 사망한 A씨에게로, 팬데믹의 원인이 된 공장식 축산 속 비/인간 동물의 죽음으로 연결되어 간다. 그리고 이 모든 새로운 형태의 식민주의와 전쟁과 자본주의와 가부장제 속에서, 저항조차 불가능한 위치에서도 끊임없이 해수면 위로 떠오르는 비/인간 존재들의 어둠 속 몸부림을 하얗게 비춘다.

 

각주

  1. ^ 富山妙子・真鍋祐子, 「対談:なぜ光州を語り, 描き続けるのかー光州事件30周年の年に」, 『月刊百科』,  12월호, 平凡社, 2010, 9쪽.
  2. ^ 마나베 유코 저, 「도미야마 다에코 화백의 작품세계 속 '무당' 모티프」, 김석화 외 지음, 『환동해지역의 오래된 현재』, 해토, 2017, 39쪽, 46쪽.
  3. ^ 林 えいだい, 『強制連行・強制労働―筑豊朝鮮人坑夫の記録』, 現代史出版会, 1981, 139~141쪽.
  4. ^ 윤동주의 시구가 “모든 죽어가는 것을”이라고 쓰여진 것을 볼 때, 김소운의 번역본(金素雲 訳, 󰡔現代韓国文学選集󰡕(第五巻詩集), 冬樹社, 1976년 4월)을 참고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5. ^ 히토 슈타이얼 지음, 안규철 옮김, 『진실의 색』, 워크룸 프레스, 2019, 34쪽, 37쪽. 
  6. ^ 마나베 유코, 앞의 글, 2017, 48쪽.
  7. ^ 2022.10.27.-11.7. 주관: 중앙대학교 산학협력단 접경인문학연구단, 주최: 한국여성인권진흥원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후원: 대한민국 여성가족부.
  8. ^ 이지은 〈일본군 ‘위안부’ 증언의 과거와 미래(2): 영원(永遠)한 증언과 ‘오지 않은(未來)’ 증언〉, <<결: 일본군 ‘위안부’ 문제 연구소 웹진>>, 최종입력:2022.9.26, 최종수정: 2022.11.28, 링크:https://kyeol.kr/ko/node/479
  9. ^ 이미숙, 앞의 글, 2020, 199쪽. 파리의 민주인사 정성배,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의 초대 대표였던 윤정옥 및 이효재와의 연대가 있었다.
  10. ^ アジアの女たちの会, 『アジアと女性解放』 창간호, 1977년 6월. 이 잡지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졸저, 「트랜스내셔널 여성문학의 공백」, 『여성문학연구』 48호, 2019.12를 참조. 
  11. ^ 富山妙子, 앞의 책, 2009, 236-237쪽. 〈돌아오지 않는 여자〉에 대한 한 단락의 설명은 이 페이지의 인용임. 
  12. ^ 이미숙, 앞의 글, 199쪽. 
  13. ^ ‘성노동자해방행동 주홍빛연대 차차’에서는 2022년 12월 16일에 〈2022년 성노동자 추모행동〉으로 “성노동자, 성소수자, 약물 사용자, 이주민, HIV/AIDS 감염인, …, …, …, …, …, 모든 취약한 존재가 초대된 장례식”을 했다. 이 드물고 귀한 자리에 모인 발언자들은 취약성이란 어떤 존재에 내재된 특성이 아니라 어떤 구조적 조건 속에서 심화되는 상태임을 명확히 하고, 취약한 상태에 놓인 존재들 사이의 연결과 힘을 느끼는 시간을 가졌다. 

연결되는 글

글쓴이 신지영

연세대 문과대학/국학연구원 부교수. 1945년 전후 동아시아 유민의 이동과 코뮌을 ‘기록/문학’에 초점을 맞춰 연구하고 있다. 난민·장애·동물을 둘러싼 현재적 활동에 관심을 갖고 있으며, 이를 동아시아 역사와 연결시키는 연구 및 글쓰기를 시도하고 있다. 저서로는 『不부/在재의 시대』(소명, 2012), 『마이너리티 코뮌』(갈무리, 2016), 『동아시아 속 전후일본(東アジアの中の戦後日本)』(臨川書店, 2018, 공저), 『난민, 난민화되는 삶』(갈무리, 2020, 공저), Pandemic Solidarity(Pluto Press, 2020, 공저), 『動物のまなざしのもとで』(勁草書房, 2022, 공저, 일본어) 등이 있다. 최근 논문으로는 「중첩된 재난과 팬데믹 연대-팬데믹 속 한일 장애 활동가 및 간호사 구술을 중심으로」(『역사비평』, 2020), 「수용소 이후의 수용소와 인종화된 식민주의」(『역사비평』, 2021), 「동아시아론과 마이너리티」(『동방학지』, 2022), 「재일조선여성의 ‘마이너 필링스’와 대명사화된 ‘어머니’」(『여성문학연구』, 2022)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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