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미야마 다에코의 예술-운동: 비/인간 존재의 ‘포스트 메모리’를 기다리며 (1)

신지영

  • 게시일2022.12.26
  • 최종수정일2022.12.26

#당사자와 동시대인의 죽음 앞에서
 

외할머니의 100살 생신에 다녀왔다. “내가 100살이래”라며 환하게 웃으시는데, 한 세기를 살아낸 그 작고 늙은 몸이 부러워졌다. 그러다 문득, 1922년생이면 일본군‘위안부’나 근로정신대로 끌려갈 수도 있었겠구나 싶었다. 그리고 최근 2~3년간 ‘위안부’ 생존자만이 아니라, 그들과 동시대를 살았던 분들도 세상을 떠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한 세기의 저물어감이란, 당사자뿐 아니라 당사자와 연결되어 있고, 연결되어 있음을 자각하려 했던 동시대인들의 죽음과 함께이다. ‘위안부’로 끌려가기 직전 도망쳤던 경험을 지니고 ‘위안부’ 피해자를 위한 활동을 펼쳐 온 윤정옥은 1925년생이고[1], 윤정옥과 함께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를 만들었던 여성학자 이효재는 1925년생으로 2020년에 세상을 떠났다. 다큐멘터리 감독으로 ‘위안부’의 모습을 기록해 온 재일조선인 박수남은 1935년생이다. 평생을 식민주의·전쟁·가부장제·자본주의와 대결하며 아시아 여성에 대한 (성)착취와 (성)폭력을 알리는 예술-운동을 펼쳐온 도미야마 다에코는 1921년생으로, 100세를 맞이한 2021년에 세상을 떴다. 그의 작업 전체상이 연세대학교 박물관의 〈기억의 바다로: 도미야마 다에코의 세계〉(2021년 3월 12일~6월 30일, 이후 8월 30일까지 연장)에서 소개되던 중이었다. 
 

 

올해 5월, 1924년생인 김양주 님이 별세하면서 일본군‘위안부’ 생존자는 11명이 되었다. 그러나 그 트라우마적 경험은 세어질 수 없는 일생과 연결되어 있다. 또한 그/녀들 주변에는 간발의 차이로 끌려가지 않았던 여성들, 위안소를 주변에서 목격했던 오키나와 주민들[2], 구조적 가해성을 깨닫고 ‘위안부’의 피해를 알리기 위한 예술 운동을 펼쳤던 도미야마 다에코와 같은 동시대인들의 세어질 수 없는 경험들도 있다. 김숨의 소설 『한 명』(현대문학, 2016)이 ‘위안부’ 경험을 증언할 당사자가 ‘한 명’도 남지 않게 되는 것에 대한 걱정이 아니라, 그 경험을 한명 한명의 자리에서 어떠한 미래의 기억/기록으로 만들어갈 수 있을까라는 현재적 물음이 되어야 하는 것은, 이러한 동시대인들과의 연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최근 일본군‘위안부’의 증언과 경험에 대해서 여러 형태의 재현이 시도되고 있는 것은 기대와 우려를 동시에 불러일으킨다. ‘당사자성’에 시간, 공간, 존재의 이행을 삽입하는 것은 어떻게 이뤄질 수 있을까? 피해를 직접 경험하지도, 당사자와 친밀하지도 않은 위치에서 ‘위안부’의 경험에 대한 포스트 메모리[3]를 만들어 간다는 것은 과연 가능할까?

도미야마 다에코가 ‘위안부’의 삶에 공감하며 벌였던 예술-운동은, 당사자와 친밀한 관계가 없는 비체험자의 위치에서, 뒤늦게 당사자와 마주한 가해자의 위치에서 그 간극을 극복하고 연결되고자 형식과 내용을 혁신했던 과정이었다. 이는 일본군‘위안부’ 당사자가 사라질 시대의 재현을 향해, 세 가지 물음을 던진다. 

 

#석판화와 슬라이드: 어둠을 표현하고 장르를 파격하고 운동을 촉발하다

 
첫 번째 물음. 새로운 기술과 형식의 도입은 어떻게 이뤄져야 하는가?

도미야마의 표현법은 당대의 문제와 첨예하게 싸운 결과물이다. 40년대에는 전쟁에 대한 거부를, 50년대에는 탄광 노동자의 투쟁을, 60년대에는 라틴 아메리카의 탈식민을 향한 몸짓을, 70년대에는 한국의 민주화에 대한 지지를, 80년대에는 광주의 들끓는 저항적 힘에 대한 공감을, 80~90년대에는 일본군‘위안부’의 고통을, 2000년대에는 911테러 속 지워진 팔레스타인 난민과 팔려 간 아시아 여성들을, 2010년대에는 3.11의 재난 속 ‘자연’의 모습을 그렸다. 

메타포를 거부하는 이 예술-운동을 관통하는 것은, 1937년 하얼빈의 여학생 시절 마주했던 식민주의와 전쟁의 참혹함이다.[4] 거리에 굴러다니던 시체, 버려지고 팔리는 아이들, 매독으로 얼굴이 망가진 채 쓰레기 더미에서 자는 여성을 마주하며 등교했던 도미야마는, “이건 얼마나 어두운, 얼마나 깊은 어둠인가…”라고 전율했다.[5] 이 원체험은 1937년이란 시간, 하얼빈이란 공간, 개인화된 공포에 갇히지 않고, 식민주의·자본주의·전쟁·가부장제로 인한 폭력과 고통에 저항하는 사건과 마주할 때마다 떠올라 매 순간 변형되며, “포스트임페리얼/포스트콜로니얼한 상황”을 “마치 자기 일처럼 인식”할 수 있는 힘이 된다.[6]

석판화와 슬라이드는 바로 이러한 식민주의·자본주의·전쟁·가부장제로 인한 어둠과 슬픔을 담아내기 위해 고심한 기술이자 형식으로, 주류 미술계의 문법에 파격을 가했다.  

먼저 석판화(Lithograph)를 보자. 도미야마는 일본인이라는 가해자의 위치에서 강제동원된 조선인의 어둠과 슬픔을 표현하기 위해 석판화를 선택한다. 츠치모토 노리아키가 도미야마 다에코를 찍은 영화 〈튀어라 봉선화: 나의 지쿠호 나의 조선〉[7]은 “이 영화를 지쿠호 탄전과 그 땅 밑에 잠들어 있는 조선인 강제동원 희생자에게 바친다”는 문구로 시작한다.(봉선화/00:10) 첫 장면에서 츠치모토는 도미야마에게 왜 그렇게 어둠에 천착하는가를 질문한다. 그러자 도미야마는 자신은 일본인이지만 식민지 전쟁 당시 만주와 조선에서 봤던 일본인들을 정말 증오했다고 말한다.(봉선화/01:10) 그리고 “어떤 조선인(某鮮人)”이라고 적힌, 탄광에서 사망한 무명의 조선인 유골과 만났을 때의 전율을 고백한다.[8] 그 유골 앞에서 화가인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강제동원되어 지쿠호 탄광에 묻힌 조선인 광부들의 “깊은 고독과 한의 소리를 듣”고, “조선인의 뼈를 기리고 기억을 전달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9]

그러나 유화로는 이 짙은 어둠을 그릴 수 없었다. 그래서 도미야마는 당시 미술계의 주류였던 유화를 버리고, 1971년 여름 석판화 기계를 주문한다.[10]

처음 탄광을 그리고자 했을 때는 말이죠, 유화로 그렸기 때문에 10년간 계속 실패했어요. 역시 그것을요 처음부터 흑백 리토그래프로 그렸더라면 더 많이 그릴 수 있었을 텐데 말이죠. 이~러한 검은색은 안 나오죠. 다른 것으로는요.(봉선화/7:00) 

〈튀어라 봉선화〉에서 클로즈업되는 작품 〈땅 깊은 데서의 원한〉, 〈신세타령〉 연작, 〈지쿠호 탄전〉 연작, 〈남태평양 해저에서〉에는, 깊은 어둠 속에 묻힌 하얀 뼈나 해골이 두드러진다. 일본 내부에 불발탄처럼 숨어 있는 조선인의 뼈-가해의 증거-와 대면하면서 전후 일본의 번영이 어떤 고통 위에 세워진 것인지 드러낸다.

다음으로 슬라이드 작품을 보자. 슬라이드 형식은 김지하의 민주화 운동을 소개하는 방송 프로그램이 중지당하자 모색된 것으로, 검열에 대한 저항을 계기로 품고 있다. 도미야마는 1975년 중반, 나카지마 마사아키 목사와 함께 ‘니혼 텔레비전’의 방송 프로그램 〈종교의 시간〉에서 “암흑 속 그리스교도 김지하[11]”를 기획하지만 “국제친선을 해친다”는 이유로 중지된다.[12] 그러자 방송을 준비하던 사람들이 중심이 되어 슬라이드를 만들고 영어판을 제작한다. 도미야마는 슬라이드가 “절절히 마음에 호소해 오는 독특한 미디어”였다고 말한다.[13] 이후 도미야마는 슬라이드 제작을 본격화하고, 1976년 이후 9개의 슬라이드 작품을 만든다. 

음악, 미술, 영상이 어울어진 종합 예술인 슬라이드는 “미술관의 권위나 화랑 비즈니스에 의존하고 싶지 않았던 도미야마가 작품을 보여줄 장을 스스로 만들기 위해 생각해낸 기법”이었다.[14] 많은 작품을 30분 정도의 영상에 담아 쉽게 이동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슬라이드는 예술-운동에 적합한 미디어이기도 했다. 그러나 하기와라는 운동성뿐 아니라 표현적 급진성에도 주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15]  슬라이드를 제작할 때, 하나의 작품은 분절되고 콜라주 형태로 재구축된다. 이 과정에서 유화, 석판화, 실크 스크린, 콜라주, 설치미술 등 각 장르가 지닌 질감과 표현법이 뒤섞인다. 이는 미술의 장르적 권위에 저항하고, 예술 문법에 길들여진 시각에 파격을 선사한다. 

 

특히 〈바다의 기억〉[16]은 슬라이드 제작과 상영과정 자체가 정치적 운동이자 예술적 파격이었고, 나아가 비가시화된 존재들을 위한 아카이브의 구축이었다. 슬라이드 〈바다의 기억〉은 도미야마의 일본군‘위안부’ 경험을 다룬 〈바다의 기억〉 유화 연작(〈먼 남쪽 나라 자바〉, 〈가룽간 제삿날 밤〉, 〈남태평양 해저에서〉)을 기반으로 한다. 이들 연작은 1987년 5월 말 극단 ‘68/71 쿠로이로 텐트’에 의해 〈바다 울고 꽃 밀려든다〉로 상연되고, 7월에는 다큐멘터리 〈바다 울고 꽃 밀려든다 - 쇼와 일본 여름〉으로 제작된다.[17] 다시 1988년 영국 런던의 개인전에 맞춰, 슬라이드 〈바다의 기억〉이 제작된다.[18]

그런데 도미야마가 ‘위안부’의 존재를 알고 <바다의 기억>을 제작하게 된 계기에는 〈튀어라 봉선화〉의 상영 운동이 있었다. 상영회에 온 많은 조선인 한국인들이 남방에 ‘위안부’로 끌려가 소식이 끊어진 친구의 이야기 등 강제동원과 관련된 이야기를 전해 주었기 때문이다.[19] 1987년 ‘쿠로이로 텐트’의 〈바다 울고 꽃 밀려든다〉 상연도 ‘위안부’의 존재를 세상에 알리고 아카이빙하는 예술-운동의 성격이 명확하다. 

1987년 당시, 거기에 온 젊은 여성 관객들은 위안부에 대해서 대부분 몰랐다. 조선인 강제연행으로 일본에 온 나이 든 재일조선인들은, 너무 고통으로 가득 찬 과거를 아이들에게 말할 수 없었다 한다. 하물며 위안부가 된 여성들은 더욱 과거를 봉인해 버렸다. 거기에 역사의 거대한 어둠이 있었다. 富山妙子, 위의 책, 2009, 208쪽 


슬라이드 〈바다의 기억〉은 1989년 5월에는 베를린에서, 8월에는 리버티 오사카에서 연속하여 상영된다.[20] 예술과 정치의 접점에서 나타난 파격의 형식인 슬라이드, 그것은 상영되는 장소마다 풍부한 이야기, 급진적 표현, 정치적 운동성을 담고 변화한다. 

이어지는 글>> 도미야마 다에코의 예술-운동: 비/인간 존재의 ‘포스트 메모리’를 기다리며 (2)

 

각주

  1. ^ <국제법X위안부> 세미나에서 이지은 선생님의 발언을 통해 이 사실을 처음 접했고, 나아가 윤정옥의 위치성을 사유하게 되었다.
  2. ^ 洪玧伸, 『沖縄戦場の記憶と「慰安所」』, インパクト出版会, 2016. 
  3. ^ 배주연, 「포스트메모리와 5.18-다큐멘터리 영화 〈김군〉을 중심으로」, 『서강인문논총』, 서강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2020.4, 12-15쪽; Marianne Hirsch, The Generation of Postmemory: Writing and Visual Culture After the Holocaust, Columbia University Press: New York, 2012, p.5. 
  4. ^ 富山妙子, 『アジアを抱く―画家人生 記憶と夢』, 岩波書店, 2009, ⅴ쪽.
  5. ^ 영상 <「금지된 이미지(禁じられたイメージ)」展>, 2015년 중 3분 37초. 이하 ‘금지/시간’으로 표기.
  6. ^ 마나베 유코, “도미야마 다에코란 누구인가”, 「경계를 넘는 화가-도미야마 다에코의 삶과 예술」, 5.18민주화운동 40주년 기념 학술행사 자료집, 2020년 11월, 18~19쪽  
  7. ^ 츠치모토 노리아키(土本典昭) 작, 〈튀어라 봉선화: 나의 지쿠호 나의 조선(はじけ鳳仙花 わが筑豊わが朝鮮)〉, 제작:幻燈社, 1984년작. 이하 이 영상에서의 인용은 ‘봉선화/시간’으로 표시.
  8. ^ 富山妙子, 앞의 책, 2009, 202쪽.
  9. ^ 富山妙子, 위의 책, 2009, 203쪽.
  10. ^ 富山妙子, 󰡔わたしの解放󰡕, 筑摩書房, 1972, 334쪽.
  11. ^ 김지하는 민주화 운동의 대표에서 보수정권의 지지자로 급격하게 태도를 바꾸었다는 점에서 민주화 운동의 동력에 대한 성찰을 요청하게 하는 아이콘이다. 그러나 도미야마가 1970년대의 김지하의 민주화 운동에 촉발되어 벌였던 예술-운동의 의미는 현재의 김지하와 별도로 조명될 필요가 있다.
  12. ^ 富山妙子, 앞의 책, 2009, 172쪽.
  13. ^ 富山妙子, 위의 책, 2009, 172-173쪽.
  14. ^ 富山妙子, 「アジアの視座からー画家として女として」, 富山妙子、浜田和子、萩原弘子, 『美術史を解き放つ』, 時事通信社, 1994, 77쪽.
  15. ^ 하기와라 히로코, 「도미야마 다에코- 논의와 혁신을 만들어내는 예술가」, 연세대학교 박물관 편저, 『기억의 바다로: 도미야마 다에코의 세계』, (2021.3.12.~2021.6.30./8.31까지 연장), 연세대학교 대학출판문화원, 148쪽. 이 단락의 설명은 이 페이지의 요약임.
  16. ^ 「바다의 기억(海の記憶)」(1988): 원화와 텍스트-도미야마 다에코, 음악- 다카하시 유지, 촬영-모토하시 세이이치, 조명-가토 스미히로, 영번역-더글라스 라미스, 제작-히다네 공방. 이하 이 영상에서의 인용은 ‘바다/시간’으로 기입. 
  17. ^ 이미숙, 「경계를 넘는 연대와 재귀적 민주주의」, 『5.18과 이후: 발생, 감응, 확장』, 전남대학교 출판문화원, 2020, 196~197쪽. 
  18. ^ 위의 글.
  19. ^ 富山妙子, 앞의 책, 2009, 207쪽
  20. ^ 小林宏道編、「年報」、연세대학교 박물관 편저, 앞의 책, 210-216쪽. 

연결되는 글

글쓴이 신지영

연세대 문과대학/국학연구원 부교수. 1945년 전후 동아시아 유민의 이동과 코뮌을 ‘기록/문학’에 초점을 맞춰 연구하고 있다. 난민·장애·동물을 둘러싼 현재적 활동에 관심을 갖고 있으며, 이를 동아시아 역사와 연결시키는 연구 및 글쓰기를 시도하고 있다. 저서로는 『不부/在재의 시대』(소명, 2012), 『마이너리티 코뮌』(갈무리, 2016), 『동아시아 속 전후일본(東アジアの中の戦後日本)』(臨川書店, 2018, 공저), 『난민, 난민화되는 삶』(갈무리, 2020, 공저), Pandemic Solidarity(Pluto Press, 2020, 공저), 『動物のまなざしのもとで』(勁草書房, 2022, 공저, 일본어) 등이 있다. 최근 논문으로는 「중첩된 재난과 팬데믹 연대-팬데믹 속 한일 장애 활동가 및 간호사 구술을 중심으로」(『역사비평』, 2020), 「수용소 이후의 수용소와 인종화된 식민주의」(『역사비평』, 2021), 「동아시아론과 마이너리티」(『동방학지』, 2022), 「재일조선여성의 ‘마이너 필링스’와 대명사화된 ‘어머니’」(『여성문학연구』, 2022)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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