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테말라 여성인민법정 - 서로의 고통을 물려받은 지구 반대편 여성들의 이야기

심아정독립연구활동가

  • 게시일2020.12.07
  • 최종수정일2021.11.25



 


 

프롤로그
'국제법의 인민화'라는 흐름


민간 주도의 법정은 대부분 소멸시효나 면책규정 등으로 현실의 법정에서는 범죄의 책임을 묻는 것이 불가능해진 상황에서 시도된다. 실정법에서는 권력에 의거하여 법의 효력을 가늠하지만, 실정법으로 해소 불가능한 앙금을 다루는 '인민법정'에서는 그 효력과 권위의 토대를 '인민(people)'의 층위에 두고 있다. 2000년 12월 8일부터 12일까지 일본 도쿄에서 열린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국제법정(이하 2000년 여성법정)은 법적 실효성을 갖는 국제법정을 일본 정부의 협조 하에 개최하는 것이 더 이상 곤란해진 상황에서 차선책으로 강구된 방법으로, 가해국 일본정부와 히로히토 천황에게 전쟁범죄의 책임을 묻는 인민법정[1]이었다. 

2000년 여성법정의 판사였던 크리스틴 친킨(Christine Chinkin)에 따르면, "법은 정부에 속하지 않는 시민사회의 도구이며, 국가가 정의를 보장하는 의무를 이행하지 못할 경우, 시민사회가 '개입'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인민법정은 이러한 전제에 기반한다. 또한 인민법정은 형벌을 내리거나 보상을 명할 수는 없지만, 법적인 판결의 가치와 도덕적인 강제성에 의한 권고는 할 수 있다.[2]

따라서 인민법정의 권위는 인민에 의거하며, 법정의 판결과 그에 부수하는 권고의 집행 여부는 법정의 유래인 인민, 즉 '국경을 넘은 인민'의 힘에 달려 있다. 국제법이 국가 간의 약속이라는 낡은 사고방식을 고집해 온 일본의 법원은 '국제법을 인민화'[3]하는 당시의 국제적 흐름으로부터 완전히 뒤쳐져 있었다. 이런 이유로 2000년 여성법정은 일본 사법부의 구태의연한 국가주의적 태도에 대항하는 국경을 초월한 인민들의 도전이기도 했다. 

 

"나는 그녀들의 고통을,
그녀들은 나의 고통을 물려받았다"


선주민에 대한 경멸과 인종주의를 극단적으로 드러낸 과테말라 내전의 직접적 계기가 된 것은 미국의 내정간섭이었다. 1944년부터 아레발로(Juan José Arévalo)와 아르벤스(Jacobo Arbenz Guzmán)와 같은 과테말라의 혁신적 대통령들이 등장하여, 19세기 이래로 계속되어온 바나나 플랜테이션의 수탈구조를 개선하고자 개혁을 단행했다. 특히 1951년에 당선된 아르벤스는 유나이티드 푸르트(United Fruits Company) 보유지를 비롯해 착취구조의 근원들을 다수 국유화하는데 전력을 쏟았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은 1954년, 미국의 아이젠하워 정권의 군사적 개입으로 쿠데타가 일어나면서 무산되었다.[4]

결국 1960년에 미국과 결탁한 정부군과 무장 게릴라 세력 간의 내전이 발발했고, 특히 반공주의 독재자 리오스 몬트(José Efrain Rios Montt)는 1982년~1983년 사이에 게릴라와 전투를 치르면서 민간인을 강제로 포섭한 자경단(Patrulla de Autodefensa Civil, PAC)과 군대를 동원하여 선주민에 대한 집단학살과 강간을 자행했다. 

1999년에 발표된 '역사적진실규명위원회'(Comisión para el Esclarecimiento Histórico, CEH)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1960년부터 1996년까지의 내전 기간 동안 과테말라에서는 약 5만 명의 실종자를 포함해 20만 명 이상이 살해당했고, 전쟁고아가 약 25만 명에 이르렀으며, 약 150만 명이 삶의 터전을 잃고 난민이 되었다.[5]

과테말라에서 '여성인민법정'을 발의한 요란다 아기라르(Yolanda Aguilar)는 과테말라 내전 시기 성폭력 피해자로서 2000년 여성법정 기간 중 넷째 날에 열린 국제 공청회 <현대 분쟁 하의 여성에 대한 범죄>에서 증언대에 섰던 인물이다. 요란다는 1960년대와 70년대 과테말라시티에서 가톨릭 계열의 학교를 다니며 농민과 노동자의 권리를 옹호하는 부모 밑에서 자랐다. 그는 사회의 빈곤과 불평등에 대해 일찍 눈을 떴고, 러시아 작가 고리키의 『어머니』를 읽고 여성 공장 노동자가 겪는 고난에 대해서도 문제의식을 가지게 되었다. 1975년에 아버지와 남동생이 군부 집권세력에 의해 살해당한 후, 어머니는 무장혁명조직 FAR(las Fuerzas Armadas Rebeldes)의 활동을 시작했고, 요란다도 13세 때부터 노동자들에게 글 읽는 법을 가르치거나 화염병을 만드는 등의 활동을 했다. 그리고 1979년, 15세 때 전단지를 나눠주다가 체포되어 구타와 윤간을 비롯한 끔찍한 성고문을 당했다. 

요란다는 그후 3개월 동안 시력을 잃었는데, 구타로 인한 염증 때문이기도 했지만, "머리와 몸이 아무것도 보고 싶어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회상한다. 1980년에 과테말라를 떠나 멕시코로 갔을 때 비로소 시력이 회복되었고, 곧장 쿠바로 떠나 2년을 살았다. 성폭력 때문에 임신한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어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낙태 수술을 받았다. 

그는 1983년에 과테말라 북쪽의 접경지역 페탱(Petén)으로 가서 반군(反軍)과 함께 사회적 계층이나 계급이 없는 세계를 건설하려던 동료들과의 깊은 연대 속에서 5년을 머물렀다. 5년 뒤 다시 돌아온 과테말라에는 여전히 성폭력이 만연했다. 요란다는 강간당한 여성들의 이야기를 듣고 기록하는 작업을 1992년부터 1996년까지 했지만, 당시에는 성폭력 피해자들의 정의가 구현될 수 있는 방법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 과테말라 내전 당시 피해자들의 증언 수집을 위해 만든 조직인 레미(REMHI)[6]에서 일할 것을 제안받았다. 요란다는 무력분쟁의 증언을 듣고 기록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이야기가 그녀들의 이야기들과 이어져 있음을 확인했다고 한다. 요란다는 그때의 감회를 이렇게 밝혔다. 

"나는 그녀들의 고통을, 그녀들은 나의 고통을 물려받았다. 우리는 서로의 고통을 물려받았다."[7]

 

 

2000년 여성법정에서
과테말라의 성폭력 피해와 생존 경험을 나누다


요란다는 REMHI 보고서를 번역하던 일본인 여성에게 처음으로 일본군'위안부'와 관련된 이야기를 들었고, 2000년 여성법정에서 과테말라 내전 시기에 겪었던 성폭력 피해의 경험을 증언해 줄 것을 제안받았다. 2000년 여성법정 공청회에서 요란다는 청중들이 이미 짐작하고 있을 잔인함에 대해서 증언하는 대신 자신이 겪은 압도적인 폭력을 함께 극복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 할머니와 어머니 그리고 자신에게서 본 힘을 이야기했다. 

"가장 어려운 상황, 가장 끔찍한 혼란, 가장 깊은 위기 속에서도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다른 세상을 만들 수 있었다."


또한 2015년의 인터뷰[8]에서 "나는 2000년 여성법정을 통해 아프리카, 아시아, 유럽 및 라틴 아메리카 등 세계 어느 곳에서나 자신이 겪은 폭력에 대해 기꺼이 논의하려는 많은 여성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감동했다. 그녀들은 그 이야기를 하기 위해 50년을 기다려온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전시성폭력 피해자로부터 변혁의 주체로'
프로젝트 


요란다는 2000년 여성법정에 참여한 것을 계기로 금기시되어왔던 내전 시기 성폭력 피해의 경험을 말하고 그러한 아픔을 공유하는 장(場)을 만들 것을 여러 여성 단체에 호소하였고, 2002년에 '전시성폭력 피해자에서 변혁의 주체로'(이하, '피해자에서 주체로')라는 프로젝트를 시작하게 되었다. 프로젝트에서 제일 먼저 착수한 일은 각지에서 선주민들의 언어와 스페인어를 동시에 구사할 수 있는 여성 프로모터를 양성하는 일이었다. 무엇보다 '강간'과 '성노예'는 마야 선주민들의 언어로는 쉽게 번역되는 단어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사진출처: 야요리상 홈페이지[9])

 

다음은 주요 증언들 중 하나이다. 

"'저놈들은 다 죽은 목숨이야.' 군인들은 말했습니다. 그리고는 '어떻게 즐길까' 라며 포로들을 데려왔습니다. 거기엔 남자도 여자도 병사도 있었습니다. 웃음소리가 들려와서 무슨 일인가 하고 가보았더니, 군인들이 포로들에게 여자를 강간하라고 명령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걸 보면서 자기들끼리 웃고 있었던 거예요. 포로들은 굶주리고 잠도 못 잔 상태여서 휘청거렸는데, 그 상태에서 강간을 강요한 겁니다." (중요증언 027 가해자 1982년)[10]

내전 시기에 여성들은 공포와 폭력으로 가득 찬 일상을 살아야 했다. 살상을 눈 앞에서 목격하면서 자기에게 다가올 죽음이 시시각각 엄습해오는 중에도 그녀들은 군인들에게 밥을 해서 나르고, 춤 추고, 강간당하고 행진을 강요당했다. 
 

 

과테말라 내전은 1996년 12월 29일에 게릴라 세력인 '과테말라 민족혁명연합(URNG, Unidad Revolucionaria Nacional Guatemalteca,)'과 정부군 사이에서 맺어진 평화협정으로 종결되었다. 피해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가해자의 처벌과 보상이었고, 이를 위해서는 사법제도에 기반한 재판이 요청되어야 마땅했다. 하지만 과테말라에서는 평화협정 때 국가권력이 만든 「국민화해법」에 의해 내전 중 발생한 정치범죄에 대해서는 면책이 보장되어 있었고, 성폭력에 있어서는 피해자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사회적 인식이 만연했다. 이런 이유로 형사재판의 실현이 어려워지자, '피해자에서 주체로' 프로젝트에서는 2007년부터 국제사회에 피해의 실태를 호소하여 내전 중에 전투수단의 하나로서 성폭력이 행해졌다는 사실을 밝히고, 2010년에는 드디어 국가에 대해 재발방지를 위한 권고를 목표로 하는 민간 주최의 법정을 개최하게 된다. 

 

2010년 과테말라 여성인민법정,
성폭력에 대한 면책을 해제하다 


2010년 3월 4일부터 이틀간 과테말라시티대학에서 500명 이상이 참여한 가운데, '과테말라 여성인민법정'(이하 '여성인민법정')이 개최되었다. 각국이 국제 인도법과 국제 인권법에 따라 무력 분쟁 기간과 그 이후의 불/비처벌을 종식할 것을 권고하고, 특히 여성과 여아가 성폭력의 (공격) 대상이 된다는 사실, 그리고 이런 식으로 자행된 성폭력이 어떤 경우에는 전쟁 종식 이후에도 지속된다는 것에 주목했던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안 1820'[11]이 통과된 지 2년 만이었다. 


방청석에는 110명의 피해 여성들이 원고로서 앉아있었고, '명예판사'로는 과테말라에서 치안부대에 의해 구류된 여성들을 강간한 범죄에 대해 처음으로 유죄판결을 받아낸 마야족 여성 후아나 멘데스, 후지모리 정권하 페루에서 성폭력 피해를 입은 구라데스 카나레스, 우간다 전시성폭력 문제 해결을 위해 활동했던 티디 아팀, 2000년 여성법정의 참가자였던 아라카와 시호코(荒川志保子)가 명예판사로 임명되었다. 중요한 점은 이들이 모두 법률가가 아니라 성폭력에 맞서 싸운 여성들이었다는 것이다.[12]

여성인민법정이 2000년 여성법정과 크게 다른 점이 있다면, 원고들의 익명성을 중시했다는 점이다. 증언자의 신분을 보호하기 위해 단상의 증언석에는 증언자의 실루엣만 보일 정도로 가림막을 설치했다. 원고들 중에는 가족들 모르게 법정에 나온 이들도 있었고, 아직까지 가해자들과 같은 동네에서 살고 있는 이들도 있었기 때문이다. 첫 날 증인들의 증언에 이어 둘째 날에는 9명의 전문가 증언이 있었는데, 원고가 익명이었기 때문에 개별 사례들에 대한 증거 수집을 하지는 않았고, 내전이라는 맥락 속에서 성폭력을 어떻게 취급해야 할지, 책임의 소재는 누구에게 있는지에 초점이 맞춰졌다. 

명예판사들이 읽어 내려간 최종판결문에는 내전 시기 과테말라 형법 및 국제법에 의거할 때 중요한 위반행위가 자행되었음을 인정하고, 공무원 및 군과 경찰에 의해 자행된 행위의 책임은 정부에게 있다고 선고한 내용이 포함되었다. 또한 최종판결은 면책과 그로 인한 불처벌이 계속됨으로 인해 성폭력이 현재까지 끊이지 않고 있음을 지적하고, 내전 시기 인권침해에 대한 면책 해제, 국제형사재판소 설치조약의 비준, 국가 및 관계기관의 정보공개, 피해자에 대한 보상의 실행, 재발방지를 위한 정책입안 등 정부에 대해 15개 항목을 권고하였다.[13]

 

2016년 전직 군인이 유죄 판결을 받은 첫 사례,
세푸르 자르코 재판


'피해자에서 주체로' 프로젝트는 '침묵을 부수는 여성들' 프로젝트로 발전하였다. 이는 여성 변호사 조직인 세 단체, '과테말라 전국여성연합(UNAMG)', '사회심리행동과 공동체연구 그룹(ECAP)', '세계를 바꾸는 여성들(MTM)'에 의해 공동으로 운영되었다. 2011년 과테말라 동부 세푸르 자르코(Sepur Zarco) 지역의 성폭력 피해생존자 여성 15명이 지역 여성 단체와 유엔(UN WOMEN)의 지원을 받아 과테말라 최고 법원에 가해자 처벌을 요구하는 소송을 제기했다. 22회의 청문회를 거쳐 2016년 3월 2일, 드디어 법원은 강간, 살인, 노예로 인한 반인도적 범죄 혐의로 전직 군인 2명을 기소하고, 여성 생존자들과 지역사회에 18개의 보상조치를 부여했다. 과테말라 국내 법원이 국내법과 국제 형사법을 이용하여 분쟁 중 성노예 혐의를 고려한 것은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14]


이들은 내전이 가장 격렬했던 1982년, 군에 의해 남편들이 '강제 실종'되고 집이 불태워진 후 수 년에 걸쳐 마을에 남아있던 군의 주둔지에서 성노예가 되었다. 주둔지는 1988년에 폐쇄되었고 피고는 당시 군인과 자경단원 등을 비롯한 직접적인 가해자와 명령을 내린 사령관이었다. 재판을 통해 여성에 대한 성폭력이 군에 의한 반란 진압 작전의 일환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 싸움의 역사적인 성과는 여성에 대한 폭력을 저지하고 전시 성폭력의 정의를 확립한 것이었다. 법원은 국가가 마을과 그 주변 마을에 집단 배상금을 지불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이 조치는 과테말라의 원주민과 농촌 지역 사회가 종종 부정당하는, 기본적인 사회/경제적 권리를 확보하도록 한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갖는다. 처음으로 지역에 고등학교와 보건 클리닉을 세우고, 살해당한 여성의 남편들에게 기념비를 만드는 것 또한 이 조치에 포함되었다.[15]


 

에필로그
다시, 불/비처벌의 문제와 식민지 책임을 묻다


그러나 세푸르 자르코 재판 이후로도 성폭력과 여성에 대한 살해, 즉 페미사이드(Femicide)는 지속적으로 발생했고, 과테말라 정부는 법원이 명령한 집단 배상 조치의 대부분을 실행하지 않았다. 세푸르 자르코의 사례는 16세기부터 스페인에 의해 식민지배를 받았던 과거의 범죄에서부터 최근의 인권 침해에 이르기까지, 몇 세기에 걸쳐 공동체와 지역 사회가 심각한 타격을 받았고 그럴 때마다 이에 맞서 싸워온 이들이 있었음을 알려준다. 하지만 동시에 여전히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는 것 또한 증명했다.  

과테말라 내전에서는 20만 명이 사망 또는 실종되었는데, 피해자의 83%가 마야 족이었고, 기록된 626건의 학살 또한 대부분 마야 공동체에서 발생하였다. 과테말라 내전 시기 전시 성폭력은 억압받는 마야 선주민과 정부군 병사의 가해라는 구도만으로는 제대로 설명될 수 없는 복잡한 맥락에 놓여 있다. 때문에 스페인의 식민지였던 과테말라의 상황, 미국과 쿠데타 세력의 공모, 과테말라의 미사용 토지를 보유한 해외 기업의 문제, 성범죄에 대한 사회적 인식의 결여, 인종주의 등이 착종하는 지점을 살피며 섬세하게 다루어야 한다. 2000년 여성법정과 이를 계승하여 10년 뒤에 열린 과테말라 여성인민법정은 미완의 과제로서 식민지 책임과 (식민)기업에 대한 책임, 그리고 불/비처벌의 문제를 공통으로 떠안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는 과거의 역사에 머무르지 않고 현재의 상황에도 영향을 미친다. 2019년, 과테말라에서 10~14세 여성들의 임신이 큰 커다란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는 사실이 기사화되었다. 이들 대부분은 빈곤가정 출신인 동시에 성폭행 피해자였다. 폭력의 가해자가 가족인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다는 점도 심각한 문제다. 이 같은 성폭력은 선주민들이 사는 지역에서 빈번하게 발생하는데, 오지인 탓에 통신 연결이 원활하지 않아 피해자가 외부에 도움을 요청하기도 어렵다.[16] 이러한 현실을 역설적으로 드러내는 것이 선주민 소녀들 사이에서 생겨난 호신술 열풍이다. 2015년 이후 태권도 등 자신을 방어할 수 있는 호신술이 선주민 여성들 사이에서 인기를 끌고 있다고 한다. 2019년 과테말라 태권도 대회의 우승자 미리암 쿠쿨 샘(17)은 이렇게 말한다. 

"예전에 학교에서 남자들은 여자들보다 힘이 더 세다며 항상 우리를 괴롭혔어요. 이제 남자들의 괴롭힘은 두렵지 않아요. 태권도는 나 자신을 존중하는 법을 알게 해줬어요."[17]

 

10대 선주민 여성들이 직면하는 어려움은 COVID-19 기간 중에 더욱 악화되었다. 인터넷, 스마트폰, 컴퓨터에 대한 접근의 어려움은 교육의 부족으로 이어졌다. 이들은 증가하는 가정폭력에 직면하고 있으며, 학대자와 계속 살도록 강요당하고 있지만 이들이 지원받을 수 있는 서비스는 제한적이다. 그 결과 10대 임신과 모자 사망률이 증가하고 있고, 의료 서비스에 대한 접근성이 현저히 부족한 농촌에서는 상황이 더욱 심각하다. 이에 10대 여성들은 스스로의 문화 활동을 이끄는 Las Niñas Lideran(Girls Lead) 라는 조직을 만들어 자살율을 줄이고, 교육 접근성을 높이며 의료 서비스를 늘릴 것, 폭력 생존자에 대한 서비스를 강화할 것 등을 정부에 요구하기 시작했다.[18] 우리가 이들의 홈페이지에서 처음 마주하게 되는 슬로건은 이렇다. 

"우리 안에 있는 에너지가 매일 우리의 행동에 반영되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조건을 변화시키기 위해"

 

아직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과테말라의 여성들은 지금도 일상화된 성폭력에 맞서기 위한 여러 시도들의 한가운데에 함께 서 있다. 재판에서 승소했으나 배상받지 못한 여성들은 자신들이 했던 노력을 그들의 주식인 옥수수에 비유해서 말한다. 

"우리는 옥수수 씨를 뿌렸어요. 우리가 먹을 순 없겠지만, 우리 아이들이 먹을 수 있는 옥수수 씨를 말이죠."

 

 

 

각주

  1. ^ 한때 금칙어였던 '인민(people)'은 한국인들에게 여전히 불편한 단어다. '인민' 대신 한국은 '국민'이라는 말을 사용했는데, 지배 주체인 국가 없이는 사람들이 존재할 수 없다고 보는 이 단어는 어쩌면 무시무시한 말일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이제 '인민' 개념은 다시 사유되고 규정되어야 한다. 사회주의 몰락 이후 자유주의적 의회민주주의는 '인민 주권'을 사실상 선거를 통한 주권의 위임이라는 소극적인 의미로 한정하고 있다(알랭 바디우 외 지음, 서용순 외 옮김, 『인민이란 무엇인가』, 현실문화, 2014년, pp.185~189). 이렇듯 '인민'을 제한적으로 파악하는 '국민' 혹은 '시민' 개념은 필연적으로 비국민, 난민 등의 '배제된 존재들'을 양산하고, '민중'은 한국에서 있었던 특정한 시기의 민주화운동을 상기시키기에 people의 번역어로 적합하지 않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새로운 인민'의 가능성, 즉 국가가 셈하는 인민과는 '다른 인민'을 산출하여 그 자체로 또 다른 공동체의 공간을 구축할 수 있는 가능성을 모색하기 위해 people의 번역어로 '인민'이라는 번역어를 사용하고 People's Tribunal 또한 '인민법정'이라 부르기로 한다
  2. ^ 일본의 전쟁 책임 자료센터 엮음, 강혜정 옮김 『일본의 군 '위안부' 연구』, 동북아역사재단, 2011년, pp.300~301.
  3. ^ 한일 양국 정부는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나 한일협정을 근거로 줄곧 법적 판단을 미루어 왔는데, 거꾸로 그런 종류의 국제법이나 국가 간 조약 등을 피고 혹은 판단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 바로 '인민화된 국제법'이이다. 그런 점에서 2000년 여성법정은 인민화된 국제법에 상응하는 새로운 법정 혹은 새로운 법적 형식의 발명이라는 의의를 갖는다. (심아정, 「'권력 없는 정의'를 실현하는 장소로서의 '인민법정'-2000년 여성국제전범법정의 사례를 중심으로」『일본연구』 제30집, 고려대일본연구소, 2018년, 48쪽
  4. ^ 노용석, 「20만 명 숨진 과테말라 내전, 과거사 청산의 기록들」, 『오마이뉴스』 (기사입력일: 2018년 3월24일, 기사검색일: 2020년 11월14일).
  5. ^ 박구병, 「과테말라의 내전 종식 이후: 평화협정 이행의 험로」, 『Asian Journal of Latin American Studies』 vol.31, No4, 2018년, 21쪽.
  6. ^ Recuperación de la Memoria Histórica, 일명 역사적 기억의 회복 프로젝트. 1998년 4월 26일, REMHI 프로젝트의 최종 보고서를 공개한 지 이틀 만에 이 프로젝트를 이끌었던 후안 제라디 주교는 집 밖에서 암살되었다. REMHI는 36년에 걸친 과테말라 내전 기간 동안 저질러진 잔혹행위를 기록하기 위해 가톨릭 교회가 이끌었던 전례 없는 시도로, 대교구는 1995 년에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7. ^ 요란다의 생애는 주로 아래의 인터뷰 기사를 참고하여 작성하였다.  https://storiesfromguatemala.com/ (기사입력일: 2020년5월15일 최종검색일: 2020년10월20일)
  8. ^ 2015년 2월 26일 과테말라 시티에서 Katia Orantes가 진행한 비디오 인터뷰. Stephen O'Brien이 수집한 구두증언에 대해서는 Stories from Guatemala(Oral testimony illuminating historical and social conditions)의 홈페이지를 참고할 것. https://storiesfromguatemala.com/ (기사입력일: 2020년5월15일 최종검색일: 2020년10월20일)
  9. ^  https://www.wfphr.org/yayori/award/y_2009.html(기사검색일 2020/11/02).야요리상은 전쟁과 성차별이 없는 21세기를 위해 아시아 각 지역에서 풀뿌리 운동을 하는 활동가, 저널리스트, 아티스트를 선정해 수여하는 여성인권활동장려상이다. 2000년 여성법정을 개최하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한 여성운동가이자 저널리스트인 마쓰이 야요리를 기념하여 이름 붙였다. 2004년부터 10년간 '야요리상'과 '야요리저널리스트상'을 수여해왔으며 2014년에 종료되었다.
  10. ^ 관련 증언들은 마쓰이 야요리상 홈페이지의 '야요리상' 수상 기념 스피치 투어 자료집(2009년 12월)을 참고할 것. http://www.jca.apc.org/recom/sonrisa/200911yayori-siryo.pdf (기사검색일: 2020/11/02).
  11. ^  UN SCR 1820의 원문은 유엔의 홈페이지를 참고할 것. https://www.un.org/ruleoflaw/blog/document/security-council-resolution-1820-2008-on-women-and-peace-and-security/
  12. ^ 柴田修子 「戦時性暴力の被害者から変革の主体へ⎯中米グアテマラにおける民衆法廷の仕組み」 『立命館元号文化研究(23巻)2号』, 2011年, pp.75-76.
  13. ^ 최종판결문은 과테말라 인권위원회(GHRC)의 홈페이지를 참고할 것. https://www.ghrc-usa.org/Resources/2010/tribunal_de_conciencia.htm#pronunciamiento
  14. ^ 「2012年11月14日 「沈黙を破ってーーグアテマラ戦時下性暴力スピーキングツアー2012」 アナ・アリシア・ラミセス・ポップさん」 , 同志社大学 グローバル・スタディーズ研究科, 「女性・戦争・人権」学会 홈페이지 https://www.war-women-rights.com (기사검색일:2020/11/02).
  15. ^ Sepur Zarco case: The Guatemalan women who rose for justice in a war-torn nation: UN WOMEN 홈페이지 https://www.unwomen.org/en/news/stories/2018/10/feature-sepur-zarco-case (기사입력일:2018/10/19, 기사검색일: 2020/11/02).
  16. ^ 손영식, 「여기는 남미: 과테말라 10~14살 임신 급증, 대부분 성폭행 피해자」, 『서울신문』(기사입력일: 2019/03/06, 기사검색일: 2020/11/03)
  17. ^ 변선구, 「과테말라 원주민 소녀들의 태권도 발차기, “성폭력 두렵지 않아요”」, 『중앙일보』(기사입력일: 2019/11/29, 기사검색일: 2020/11/03)
  18. ^ UN WOMEN 홈페이지 https://www.unwomen.org/en/news/stories/2020/11/i-am-generation-equality-ixchel-luc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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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0년만의 판결, 2018년 베트남전 시민평화법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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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원아 2020.12.07

글쓴이 심아정

동물, 여성, 폭력을 키워드로 공부와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난민×현장>, <수요평화모임>,  번역공동체 <잇다>를 통해 대학 바깥에서 새로운 앎과 삶을 시도하고, 다큐멘터리 영화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의 상영/토론의 여정을 기록 중이며, 미군이 떠난 동두천을 드나들며 남은 자들의 삶과 남겨진 공간의 장소성에 대한 글을 쓰고 있다. 최근 동료들과 『난민, 난민화되는 삶』(갈무리, 2020년) 을 함께 썼고, 『일본인 '위안부' - 애국심과 인신매매』(논형, 근간)를 함께 번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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