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에서의 ‘위안부’ 문제와 사회적 인식

김동엽부산외대/HK교수

  • 게시일2019.07.12
  • 최종수정일2022.11.28

필리핀에서의 ‘위안부’ 문제와 사회적 인식

필리핀에서 일본 점령기에 발생한 ‘위안부’ 문제는 필리핀 국민들의 인식 속에 그다지 깊이 자리 잡고 있지 않다. 필리핀의 언론들도 ‘위안부’ 피해자들의 시위나 요구를 그다지 비중 있게 다루지 않는다. 필자가 2017년 12월 마닐라만 산책로에 세워진 필리핀 ‘위안부’ 동상을 방문했을 때에도 주위의 필리핀 사람들에게 동상의 의미를 물었더니 제대로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필리핀에서 ‘위안부’ 문제가 그 실체를 드러낸 것은 1992년 핸슨(Maria Rosa Henson) 할머니가 자신의 ‘위안부’ 경험을 최초로 대중 앞에서 증언하면서부터였다. 그녀의 증언 이후 피해자들이 하나둘씩 나타나면서 어두운 역사의 진실이 드러났다. 조사에 따르면 당시 필리핀에는 약 1,000여 명의 ‘위안부’가 존재했으며, 그들 중 174명의 필리핀 ‘위안부’ 피해자들이 공식적으로 증언했다. 현재 이들 대부분은 사망했고 일부 생존자들은 두 개의 ‘위안부’ 관련 시민단체의 도움으로 일본으로부터의 공식적인 사과와 배상을 위한 운동에 참여하고 있다. 

필리핀 ‘위안부’ 문제의 실체는 그 맥락에 있어서 한국인들의 경험과 일부 다를 수 있다. 그러나 피해자들의 인권 유린과 전시 성폭력 그리고 이로 인한 고통의 무게는 다르지 않을 것이다. 필리핀에서 발생한 ‘위안부’ 피해 사실의 실체를 살펴볼 수 있는 다양한 자료들이 존재한다. ‘위안부’ 문제 관련 시민단체에서 피해자들의 다양한 인터뷰 자료들을 수집하고 있고, 또한 좀 더 대중적으로 ‘위안부’ 문제를 소재로 한 영화들도 만들어졌다. 그러나 그 모든 기억과 재현들의 모태가 되었던 것은 핸슨의 증언과 본인이 직접 쓴 자서전(『Comfort Woman: Slave of Destiny』, 1996)일 것이다. 핸슨의 자서전에는 그녀의 출생부터 성장배경, 그리고 ‘위안부’ 경험과 그 후의 생활 등 험난한 삶의 여정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이 책의 내용을 간단히 소개함으로써 필리핀 ‘위안부’ 문제의 실체적 진실에 한 걸음 다가가 보고자 한다.

 

핸슨의 자서전 『Comfort Woman: Slave of Destiny』(Maria Rosa Henson, 1996) 표지

 

 

소녀 마리아의 ‘위안부’ 이야기

핸슨의 엄마인 줄리아는 가난한 소작농의 딸로 태어나 가족들의 생계를 위해 14살 어린 나이로 지주의 집에 하인으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줄리아가 지주로부터 겁탈을 당해 낳은 아이가 바로 핸슨인 마리아였다. 마리아의 출생은 지주의 집에는 비밀이었으며, 지주인 마리아의 아버지는 정기적으로 남몰래 돈을 보내 마리아와 그 가족의 생계를 도왔다. 마리아는 가족을 위해 자기의 삶을 희생한 엄마를 무척이나 사랑했고, 엄마 또한 마리아가 유일한 삶의 희망이었다. 마리아는 함께 살지는 않지만 은밀하게라도 돈을 보내 가족의 생계를 이어갈 수 있게 해준 아버지에 대해 그리움과 고마운 마음을 간직하며 총명한 소녀로 자랐다. 마리아의 학창시절 꿈은 의사가 되는 것이었다. 이웃에 있는 병원의 의사이자 친한 친구의 아버지가 그 모델이었다. 그 의사는 마리아를 볼 때면 똑똑하고 공부도 잘하니 꼭 의사가 될 것이라고 격려해 주었다.

마리아의 삶에 전쟁의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한 것은 그녀가 14살이었던 1941년 12월 일본군이 필리핀을 점령하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마닐라로 몰려오는 일본군을 피해 마리아는 가족들과 함께 피난을 떠나 시골 한 동굴에 잠시 머물렀다. 그러나 동굴 생활의 어려움과 질병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일본군의 점령지가 된 마닐라로 다시 돌아왔다. 마리아의 삼촌들은 생계를 위해 인근에 있는 과거 미군기지에서 땔감을 모아다가 파는 일을 했다. 1942년 2월 마리아는 일을 나서는 삼촌들을 쫓아 땔감을 모으러 나갔다. 미군기지 인근에 도달하여 땔감을 줍던 마리아는 일본군 병사 2명에게 붙잡혔다. 그들은 마리아를 겁탈하려 했고, 마리아는 이에 강하게 저항했다. 그때 일본군 장교 한 명이 나타나 병사들에게 소리치며 꾸짖었다. 마리아는 그 장교가 자신을 구해줄 것으로 생각했지만 그는 자신이 먼저 마리아를 겁탈한 후 두 병사에게 넘겨주었다. 두 병사는 차례로 마리아를 겁탈한 후 그 자리에 내버려 두고 떠났다. 다행히 그곳을 지나던 인근에 사는 농부가 쓰러져 있는 마리아를 발견하고 자신의 집으로 데려가 치료해 주었다. 이틀 후 회복된 마리아는 철길을 따라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돌아와 엄마에게 자신이 겪었던 사실을 얘기하니 엄마는 그 사실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했다. 

다시 2주가 지나고 마리아는 엄마의 허락도 없이 다시 이웃들을 쫓아 땔감을 구하는 일에 나섰다. 마리아는 함께 간 사람들의 시선에서 벗어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땔감 줍는 장소에 도달했을 때 또다시 일본군 병사를 만나게 되었다. 그중에는 일전에 마리아를 최초로 겁탈한 장교도 있었다. 그는 다시 마리아를 붙들어 일행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겁탈하고 떠났다. 그 일을 알게 된 마리아의 엄마는 자신의 고향으로 마리아를 데리고 떠났다.      

마리아가 새로이 머물게 된 곳은 마닐라에서 북쪽으로 약 80km 떨어진 팜팡가 지역 앙겔레스 인근 숲속에 있는 한 마을이었다. 마리아는 엄마와 함께 대나무로 엮어 만든 삼촌의 집에 머물렀다. 당시 삼촌은 비밀리에 일본군에 저항하는 게릴라 조직(Hukbalahap, 항일국민군)의 지휘관이었다. 그 집에서는 게릴라 대원들의 회의가 자주 열렸다. 자신을 겁탈한 일본군에 대한 증오심이 컸던 마리아는 곧 게릴라 조직의 일원이 되었다. 그녀의 임무는 주로 마을로부터 게릴라 대원들이 쓸 음식과 약 그리고 옷가지 등을 모아서 전달하는 것이었다. 위험한 일이기는 했지만, 마리아는 그 일을 할 때가 가장 행복했다. 함께 부르던 게릴라 대원들의 노래 가사 중 “그들이 우리의 재산을 강탈하고, 우리의 여자들을 겁탈한다”라는 대목이 나올 때면 마리아의 눈에 저절로 눈물이 흘렀다.

1942년 4월 미군이 필리핀에서 일본군에게 패배하고 호주로 철수한 후, 필리핀 사회는 일본군과 마카필리(Makapili)라고 불리던 일본군 앞잡이들의 횡포로 공포의 날들이 이어졌다. 그런 와중에도 마리아는 게릴라 조직의 연락책 활동을 계속했다. 1943년 4월 어느 날 마리아는 다른 게릴라 대원과 함께 보급품을 숨긴 수레를 끌고 일본군 검문소를 지나게 되었다. 수레를 수색한 일본군 초병은 마리아 일행을 통과시켰다. 그러나 잠시 후 일행을 다시 불러 세워 마리아만 남기고 다른 사람들은 보냈다. 그들은 마리아를 일본군이 거주하는 막사로 데리고 갔다. 그 막사는 과거 마을의 병원으로 사용되던 건물이었다. 그들은 마리아를 건물 2층으로 데려가 문도 없이 커튼으로 가려진 작은 방에 넣었다. 방 안에는 작은 대나무 침대가 하나 놓여 있었다. 그 일본군 막사에는 마리아와 같은 처지의 여섯 명의 다른 여성들이 있었다.

그날부터 오후 2시경부터 저녁 10시경까지 줄지어 들어오는 일본군 병사들의 ‘위안부’ 생활이 시작되었다. 12명씩 짝을 지어 오는 병사들을 상대하고 나면 30분씩 휴식 시간이 주어졌다. 18살 정도 되어 보이는 어린 병사들이 자신의 성욕을 제대로 채우지 못하면 상대 여자에게 폭력으로 화풀이를 했다. 그렇게 매일 마리아는 20~30명의 일본군 병사를 상대해야 했다. 병사들이 오지 않는 오전에는 칸막이도 없는 막사 한쪽 물가에서 병사들이 훔쳐보는 가운데 몸을 씻고 빨래를 해야 했다. 매주 수요일에는 검진을 위해 의사가 방문하는데 대부분 일본인 의사였고, 가끔 필리핀 의사도 있었다. 다른 여자들은 한 달에 한 번 생리하는 며칠 동안 쉴 수 있었지만, 아직 생리를 시작하지 않은 마리아는 그런 휴식도 없었다.

마리아는 병원 건물 막사에서 3개월을 보낸 후 다른 여자들과 함께 정미소로 사용되던 건물로 이동했다. 그곳에서도 전과 마찬가지로 ‘위안부’ 생활이 계속되었다. 하루는 장교 몇 명이 찾아와서 여자들을 데리고 지주의 저택으로 데리고 가서 그곳에서 겁탈한 후 돌려보내기도 했다. 이런 생활을 거듭하던 마리아는 말라리아에 걸려 심하게 앓기도 했다. 하루는 하혈을 많이 해서 의사에게 검진을 받으니 태아를 유산한 것이라고 했다. 아직 생리도 시작하지 않은 자신이 임신하고 유산했다는 의사의 말을 마리아는 믿을 수 없었다. 매일 밤 마리아는 어떻게 하면 도망갈 수 있을까, 아니면 어떻게 하면 죽을 수 있을까를 생각했다. 하지만 그럴 때면 엄마의 얼굴이 떠올라 어찌할 수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마리아는 우연히 병사들이 하는 말을 듣게 되었는데, 마리아의 집이 있는 마을이 게릴라 근거지로 밝혀져 일본군이 습격할 것이라는 얘기였다. 마리아는 막사 인근을 지나던 사람에게 몰래 이 사실을 알려 마을에 전하도록 했다. 일본군이 마을을 습격했을 때 이미 모두가 떠난 것을 알았고, 마리아가 정보를 누설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일로 마리아는 모진 구타를 당해 탈진한 상태가 되었다. 그때 인근 마을에서 활동하던 게릴라들이 마리아가 있던 일본군 막사를 습격했다. 그들은 탈진해 있는 마리아를 발견하고 데리고 가려 했지만 여의치 않자 길가 어두운 곳에 남겨두고 달아났다.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는 마리아를 인근에 살고 있던 마리아의 이모가 알아보고 엄마에게 연락하여 데려가도록 했다. 그때가 1944년 1월이었다. 그 날은 마리아가 일본군에 붙들려 ‘위안부’ 생활을 한 지 9개월 만에 자유를 얻게 된 날이었다. 

 

상처받은 삶, 무거운 기억

돌아온 마리아는 엄마의 극진한 보살핌으로 2달 만에 정신이 제대로 회복되었다. 그러나 겁탈과 폭력의 후유증으로 오랫동안 걷지도 못하고 말도 하지 못했다. 말라리아 후유증으로 머리가 모두 빠져 마리아는 언제나 수건을 머리에 두르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고 몸은 회복되었지만, 여전히 말을 더듬고 또한 입가에서 침이 흘러나오는 증상은 지속되었다. 마리아의 엄마는 세탁일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미군 부대에서 일하며 빨랫감을 가져오던 도밍고라는 남자가 자주 들렀다. 엄마는 남자에게 공포심이 있는 마리아가 도밍고처럼 좋은 남자를 만나면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며 마리아를 설득하여 서로 사귀도록 했다. 마리아는 도밍고에게 자신이 일본군으로부터 겁탈을 당했다고 고백했지만, 차마 ‘위안부’ 생활을 했다는 말은 하지 못했다. 그 일은 오직 마리아와 엄마만이 알고 있는 비밀이었다. 마리아는 친절하고 이해심 깊은 도밍고와 결혼해서 행복한 가정을 이루게 되었다. 그러나 그녀의 결혼 생활은 그리 길게 지속되지 못했다. 어느 날 남편 도밍고가 누군가에게 납치되어 반정부 게릴라 조직의 일원이 되었고, 그 후로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도밍고와의 사이에서 낳은 딸 둘과 아들 하나는 오로지 마리아의 책임이 되었다. 가족의 생계를 위해 인근 담배회사에 청소부로 일을 시작한 마리아는 1990년 6월 63세의 나이로 은퇴할 때까지 그 회사에서 일했다.

1992년 6월 어느 날 핸슨 할머니는 라디오에서 일본군 점령 시기에 있었던 ‘위안부’ 문제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듣게 되었다. 그리고 그 방송 끝에 피해 당사자를 찾고 있다는 광고를 들었다. 처음에는 지금까지 지켜온 비밀을 드러내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부끄러움에 그 광고를 무시해 버렸다. 그러나 점차 그동안 마음속 깊이 쌓아 놓았던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동안 망설이다 핸슨은 방송국에서 알려준 주소로 연락해 1992년 9월 10일 ‘위안부’ 대책위원회 관계자를 집 근처에서 만나게 되었다. 처음에는 공개적으로 증언할 엄두를 내지 못했지만, 대책위원회 관계자의 설득과 또한 자신처럼 무거운 기억을 짐처럼 안고 살아가고 있을 피해자들에게 힘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1992년 9월 18일 핸슨은 필리핀에서 최초로 공개 기자회견을 통해 자신의 ‘위안부’ 경험을 폭로했다. 그 후 핸슨은 국내외적으로 ‘위안부’ 문제 관련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녀의 활동에 용기를 얻은 다수의 필리핀 ‘위안부’ 피해자들이 자신의 경험을 증언했다. 1995년 말 핸슨은 자신이 직접 쓴 자서전을 필리핀 한 언론 기관(PCIJ)에 가지고 갔다. 그녀의 기록이 역사적 의미가 크다고 판단한 그 기관에서 이를 편집하여 1996년에 핸슨의 자서전으로 출판했다. 자서전 말미에 핸슨은 “내가 죽기 전에 정의가 바로 세워지기를 바란다”라고 썼다. 핸슨은 자신이 부르짖던 정의가 실현되는 것을 보지 못한 채 1997년 8월 18일 69세의 나이로 고인이 되었다.

 

기억의 소환과 재현 그리고 역사

핸슨의 증언과 자서전은 필리핀 사회에서 ‘위안부’ 문제라는 과거의 기억을 현실로 소환하여 기록하고 재현하는 데 중요한 자료로 사용되고 있다. 필리핀 ‘위안부’ 문제는 사과와 배상을 요구하는 피해자 할머니들의 외침과 함께 영화나 기념비 등으로 재생산되어 대중들의 인식 속에 전파되고 있다. 이러한 과거 기억에 대한 소환과 재현은 오늘날 필리핀 국민들의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인식에 많은 영향을 주고 있다. 1994년에 필리핀에서 개봉된 영화 <‘위안부’ : 정의를 위한 외침>은 필리핀 ‘위안부’ 문제를 소재로 다룬 최초의 영화였다. 이 영화의 내용 중에는 일본군에 저항하는 게릴라의 활동이 특히 부각되고 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도 게릴라 조직이 일본군을 응징하고 ‘위안부’를 구출해 내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영화의 주제가 ‘위안부’에 관한 것이지만 그 초점을 피해자들이 겪어야 했던 전시 폭력과 인권 유린의 진실보다는 일본군에 대한 집단적 저항과 해방에 두고 있다.

<‘위안부’ : 정의를 위한 외침> 영화 포스터(1994년)

<마르코바: 게이 ‘위안부’> 영화 포스터(2000년)

 

2000년에 개봉된 또 다른 영화 <마르코바: 게이 ‘위안부’>는 마르코바라는 한 게이의 고백을 중심으로 ‘위안부’ 문제에 게이라는 다소 드라마틱한 인물을 등장시켰다. 필리핀의 유명 배우 부자(父子)가 이 영화의 주인공을 맡아 대중적 이목을 집중시켰으며, 각종 영화제에서 다수 수상함으로써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진 작품이다. 이 영화는 주인공 마르코바가 게이라는 정체성으로 살아가는 삶의 역경을 중심으로 전개되며, 일본군 점령기에 클럽 무용수로 일하다가 동료 게이들과 일본군에게 겪게 되는 수모를 다루었다. 이 영화의 장면 중에는 핸슨의 자서전을 떠오르게 하는 정미소, 저택, 그리고 저항과 같은 소재들이 등장하기도 한다. 이 영화는 대중들의 많은 관심을 받았지만, 내용의 사실 여부에 대한 논란이 일어나기도 했다. 이러한 논란은 필리핀 ‘위안부’ 문제와 피해자들의 증언 전반에 대한 대중적 불신으로 이어질 여지를 남겼다. 필자가 필리핀 사람들과 ‘위안부’ 문제를 놓고 대화할 때 일부는 ‘위안부’ 문제가 제대로 검증되지 않은 이야기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 영화는 ‘위안부’ 문제라는 무거운 역사적 비극을 하나의 흥미로운 볼거리로 만들었다는 비판을 받을 수도 있다. 

 

마닐라만 산책로의 ‘위안부’ 동상(1998년, 필자 촬영, 현재는 철거된 상태이다.)


필리핀에서 ‘위안부’ 문제의 당사자이자 피해자들은 기억의 소환과 재현 과정에서 주변적 인물로 다루어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은 필리핀 사회에서 일부 시민단체와 ‘위안부’ 피해자들의 사과와 보상을 위한 외침이 그다지 대중적 공감을 사지 못하고 사회적 이슈로 부각 되지 못하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필자는 지난 2017년 마닐라만 산책로에 세워졌던 필리핀 ‘위안부’ 동상의 작가와 많은 얘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그가 ‘위안부’ 문제에 관해 관심을 두게 된 계기는 동상 제작에 대한 논의가 시작된 이후라고 했다. 그는 자신의 작품에 생명력을 불어넣기 위해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을 찾아가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고, 그때야 비로소 ‘위안부’ 문제의 진실을 알게 되었다고 했다. 그가 ‘위안부’ 피해자들로부터 느끼고 동상에 표현하고자 했던 감정은 “비탄”(grief)이었다. 즉 피해자들의 슬픔, 고통 그리고 실망이라는 복잡한 감정을 동상의 얼굴에 묘사했다고 했다. 그러한 감정은 단지 가해자인 일본군에 대한 것뿐만 아니라, 과거 사실을 외면하고 무시하는 오늘날 국가와 국민을 향한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작가로서 그들의 정의를 위한 외침이 끊임없이 지속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동상에 표현했다고 했다. 

마닐라만 산책로에 세워졌던 필리핀 ‘위안부’ 동상은 2018년 4월 27일 세워진 지 4개월 만에 철거되었다. 필리핀 언론에서는 ‘위안부’ 동상의 제작 배경과 일본으로부터의 외교적 압력, 그리고 이에 대응하는 필리핀 정부의 태도 등, 다양한 내용이 보도되었다. ‘위안부’ 동상 제작을 의뢰한 단체는 중국계 필리핀 사업가가 만든 뚤라이 재단이며, 이는 필리핀보다 ‘위안부’ 문제가 더 심각한 중국의 영향에 의한 것이라는 의견을 듣기도 했다. 과거의 기억을 소환하여 재현하는 행위는 다름 아닌 역사 쓰기의 과정이다. 파편적 기억들이 소환되어 모아지고, 또한 기념비와 동상 그리고 책이나 영화 등 다양한 형태로 되살아나 현재를 사는 우리의 마음속에 각인되는 것이다. 비록 복잡한 국제관계와 국익이라는 현실적 문제로 인해 표현의 자유가 제한되고, 외침에 울림이 적을지라도 ‘위안부’ 문제가 잊혀지지 않고 후세에 기억되기 위한 올바른 역사 쓰기는 지속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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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김동엽

필리핀국립대학교 정치학과에서 1990년대 한국과 필리핀의 통신서비스산업 자유화 정책에 대한 비교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부산외대 동남아지역원 HK교수로 재직 중이다. 학술 활동으로 학술지 『아시아연구』 편집위원장과 한국동남아학회 부회장을 역임하고 있다. 최근 저서로는 『동남아의 역사와 문화』(2012, 공역), 『나를 만지지 마라 I & II』(2015, 역서), 『민주화운동의 세계사적 배경』(2016, 공저), 『동남아의 이슬람화 2』(2017, 공저) 등이 있으며, 논문으로는 “Transforming Western Democracy in Southeast Asia: The Case of Lanao del Sur, the Philippines” (2018), “필리핀 2018: 권력집중, 경기위축, 자주외교” (2019) 등이 있다.

kimdy@isea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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