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일자리가 있다고 속여 일본 여성을 중국 상하이 소재 해군 위안소로 끌고 간 일본인에게 1936년 일본 나가사키 지방재판소가 유죄를 선고한 판결. '위안부'의 강제 동원을 유죄로 인정하고 가해자를 처벌한 판결로 주목받았다. 전쟁 당시 이미 일본 사법이 '위안부' 모집 과정에서의 문제를 범죄로서 재판했음을 보여주는 사건으로, 2004년에 도쓰카 에쓰로(戶塚悅朗) 변호사가 당시 재판 판결문과 공소판결문을 나가사키 지방검찰청에서 찾았다.
일본군의 침략에 따라 중국 상하이에서 벌어진 중일 양국 간 무력충돌사건을 말하며, 제1차 상하이사변과 제2차 상하이사변으로 나뉜다. 1차 상하이사변의 경우 만주사변을 계기로 중국 내의 항일운동이 거세지자 이를 진압하기 위하여 일본이 상하이에 군대를 투입하고, 한달 여간 중국군과 전투를 벌인 사건이다. 2차 상하이 사변은 일본이 중국 침략전쟁을 확대하기 위해 노구교사건을 조작하고 중국군과 전투를 개시한 사건이다.
상하이사범대학교 역사학 교수인 쑤즈량(苏智良)에 의해 1999년 설립된 연구소. 중국내에서 '위안부' 문제를 연구하는 유일한 연구소이다. 2007년 자료관을 개관하여 대중들에게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알렸으며, 2016년 10월에는 상하이사범대학교 캠퍼스 내에 '한·중 평화의 소녀상'을 건립하는 동시에 '중국 '위안부' 역사박물관'도 개관하였다. 상하이사범대학에 세워진 평화의 소녀상은 중국 본토에 세워진 첫번째 소녀상이자 미국, 캐나다, 호주에 이어 세계 4번째로 세워진 소녀상이기도 하다. 2018년, 피해자들의 생애를 다룬 다큐멘터리 “22(二十二)” 의 감독 궈커(郭柯)와 함께 상하이사범대학교육발전기금회 내에 '위안부연구 및 지원’이라는 이름의 특별조성금을 만들고 피해자 생활 지원 및 ‘위안부’ 사업 연구 발전에 힘쓰고 있다.
일본 공창제의 역사를 따라가다 만나게 되는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일본 국가 차원의 책임
일본 군인들이 남긴 수많은 회고록을 통해 확인하는 '위안소'의 역할과 기능
전쟁 후 네덜란드는 전범재판을 위한 바타비아 임시군사재판(Temporaire Krijgsraad in Batavia)을 실시하였는데, 이 재판은 전쟁 중 행해진 성폭력과 일본군‘위안부’ 관련 사건을 다루고 있어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일본군은 왜 '위안부' 명부의 작성과 관리를 중시했을까. 일본군이 만든 '위안부' 관련 명부 종류와 연구의 의미를 살펴본다.
일본군'위안부'에 관한 미국보고서 자료해제 2부. 연합군번역통역부(ATIS)가 생산한 포로 심문보고서
상하이 훙커우구에 소재한 4곳의 일본군 위안소 유적지 답사기
중국 상하이에 남겨져 있는 '위안부' 유적지와 박물관을 찾아 떠난 여행의 첫 탐방지 '중국'위안부'역사박물관' 이야기
중국 잡지를 통해 보는 연합군 구출 당시 '위안부' 피해 생존자들의 모습 만삭의 임산부를 포함해 네 명의 일본군’위안부’ 모습을 담고 있는 ‘유명한’ 사진이 있다. 1944년 연합군이 중국 윈난성 쑹산에서 촬영한 것으로, 이 사진 속 임산부는 잘 알려진 ‘위안부’ 피해생존자 박영심이었다. 구조돼 병원에서 안정을 취한
20세기 가장 비극적인 인권 유린 범죄 중 하나인 일본군'위안부' 피해는 재발을 막고 미래세대에게 교훈을 주기 위해서라도 역사적인 기록유산으로 채택, 관리되어야 한다.
원폭을 그린 영화들 역시 히로시마·나가사키의 역사적 의미에 대한 재고찰에 참여하면서 3.11 이전의 원폭 영화와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