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정부와 기업은 ‘위안부’ 수송 책임에 답하라!

  • 비평
  • 김민영
  • 2025-11-19
일본 정부와 기업은 ‘위안부’ 수송 책임에 답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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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정부와 기업은 ‘위안부’ 수송 책임에 답하라!

 

전쟁의 배후에서 ‘위안부’를 위안소로 보내는데 협력했던 철도와 선박은 고통을 실어 나른 과오를 제대로 참회했을까?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의 철도와 연락선, 상선은 징용 노무자와 ‘위안부’의 동원을 댓가로 이익을 누렸다. 그러나 이들 수송 기관은 전후 별다른 후속 책임을 지지 않았고 지금까지도 전쟁 범죄와 부당 이득을 부인하고 자신들은 무관하다는 입장을 밝히며 정상적인 영업 활동을 해오고 있다. 오랫동안 강제동원문제에 천착해 온 김민영 교수는 ‘위안부’ 등의 수송에 관여한 일본 정부와 기업의 책임을 다시 물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2025년은 광복 80주년이자 한일수교 60주년을 맞은 기념비적인 해이다. 경제·안보·문화 교류와 협력을 비롯해 과거사 문제 등 한일관계를 기반으로 양국 사이의 다양한 현안을 재조명하는 작업이 어느 해보다 활발하다. 이런 가운데 새롭게 제기되고 있는 사안이 있다. 바로 강제동원 문제와 관련한 일본 정부와 수송 회사들의 책임 문제이다. 

2000년대 들어서 주목되기 시작한 이 문제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의 전쟁 범죄에 대한 역사적 단죄의 과정으로부터 시사점을 얻었다. 나치의 학살에 가담하여 유대인 등의 수송을 담당했던 기업의 책임이 제기되었고, 그 대표적인 사례로 철도로 유대인을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로 수송한 프랑스 국철에 대한 소송이 진행되었다.

독일의 사례와 달리, 조선인 강제연행, 강제노동과 일본군‘위안부’ 문제와 관련하여 이들의 ‘수송’과 관련된 연구는 거의 전무했다. 조사 연구의 필요성이 절실한 상황에서 이에 부응하여 전시 일본의 해상 수송체계, 그중에서도 특히 철도, 연락선, 상선 등을 중심으로 ‘위안부’ 수송에 관여한 운송회사들의 역할을 검토하는 연구가 시작되었다.

 

[사진 1] 2002년 여성부에서 발간한 「일본군’위안부’문제에 대한 국외자료조사 연구 보고서」와 학술논문지 ‘Amerasia Journal’에 발표된 논문 「2차세계대전 기간 ‘성노예’로 동원된 조선인 여성과 강제노동자들」.


 

 

 


통제경제 아래에서도 면할 수 없는 수송 기업의 책임

전시 일본 경제의 가장 큰 특징은 일본 특유의 ‘통제경제’였다. 특히 중일전쟁 초기에는 민간 자치에 의해 해운이 통제되었으나,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점차 국가 주도의 통제로 전환되었다. 

1941년 8월, 일본 정부는 각의에서 ‘해운국가관리요강’을 결정하고, 선박· 선원· 조선(배 건조) 등을 국가가 전면적으로 관리하기 시작했다. 이는 중일전쟁 발발 이후 육·해군의 군용 선박 징용이 급격히 늘어나 민간용 선박이 부족해진 데 따른 조치였다. 태평양전쟁이 시작되면서 선박 부족은 더욱 심화되었고, 일본은 전면적인 전시 해운 통제 체제를 본격적으로 시행하였다. 1942년 4월 1일부터 선박운영회의 주도 아래 해운 통제가 시작되었으며, 이에 앞서 3월 26일에는 원할한 전시 수송을 위해 ‘전시수송강화기간’이 선포되어, 4~6월까지를 제1기로 설정하였다. 그러나 전투가 격화될수록 수송 체계의 대대적인 개편이 불가피해졌다. 기선(증기선)과 선박이 급감하면서 화물의 육상 수속으로의 전환과 기범선(돛단배) 이용이 빈번해졌다.  1943년도 일본의 ‘교통동원계획’은 현실적인 수송 능력을 고려하여 해상과 육상의 통합 운용을 더욱 강조하는 등, 시설과 운영 면에서 전시적 성격이 한층 짙어졌다. 

당시 치열한 전투 속에서 해상 수송은 일본군의 전력 유지에 직결된 중대한 문제로 인식되었다. 수송난을 타개하기 위해 늦게나마 범선과 목선의 건조까지 계획하였다. 상선 건조 규모는 1942년 36만톤, 1943년에 109만톤, 1944년에 159만톤으로 증가하였지만, 조선 속도는 전투로 인한 선박 손실을 따라잡지 못했다. 

이처럼 난관이 거듭되자 일본 해운 당국은 육상 수송으로의 전환을 강행하고, 기범선의 국가 징용 범위 확대를 추진했다. 1944년 10월, 일본의 운통성은 해상 수송력 증강을 위한 비상 대책으로 ‘전시해운관리령시행규칙’을 개정하여, 기범선의 국가 사용 기준을 기존 50톤 이상에서 15톤 이상으로 낮췄다. 또한 ‘지방기범선운항체제정비방침요령’을 발표해 ‘계획수송’체제를 보강하려 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전황은 점점 악화되었고, 폐색은 갈수록 짙어져갔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전시 체제 하에서 일본의 해상 운송과 조선업에 대한 국가 통제가 일반적이었다 하더라도, 그로 인해 일본의 상선회사나 선박회사 등의 전쟁 책임이 결코 무효화될 수는 없다는 사실이다. 당시 선박회사들은 강력한 국가 통제의 자장 하에 있었으나 단순히 국가의 지시에 따르는 ‘피동적 존재’이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이들은 여전히 민간 기업으로서의 경영책임과 이윤구조를 유지했다. 국가로부터 보조금과 손실보상, 이익 보증을 받으며 적극적으로 전쟁 수송에 협력했다. 다시 말해 ‘민유 민영의 국가관리방식’이라는 말이 상징하는 것처럼, 개별 군수기업의 자율성과 책임은 분명히 존재했다.

 

 

 

세계를 잇던 해운, 전쟁의 도구로 전락하다 

해운은 예나 지금이나 일본의 산업과 경제를 지탱하고 세계를 연결하는 핵심 동맥이었다. 메이지 시대 이후 빠른 근대화를 거치며 일본의 해운회사는 수많은 배를 건조했고, 일본인 1920년대에 이미 세계 3위의 해운국으로 성장했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 당시 3,000여 척의 배를 잃으면서 일본의 상선대는 심각한 타격을 받기에 이르렀다.

전시 선박의 주류는 군함과 군용선이지만 이에 못지 않게 상선 또한 중요했다. 상선에는 여객선, 화물선, 화객선, 특수선 등이 있으나, 이른바 상선대(Mercantile fleet)의 80~90%는 화물선이었다. 전시하 일본의 선박 제조회사로서는 가와사키와 미쓰비시중공업이 가장 대표적이었고, 해운회사로서는 일본우선주식회사와 가와사키기선회사, 오사카상선주식회사가 손꼽혔다.

1870년 창립한 일본우선주식회사는 1873년 미쓰비시상회로 개명한 이래 일본 최초로 요코하마에서 상하이노선을 항행했고, 1885년 일본우선회사로 재출발했다. 1939년에는 근해기선회사를 흡수 합병하며 비약적으로 성장했다. 가와사키기선회사는 1919년 4월에 고베에서 창립한 일본 굴지의 선박 회사이다. 1921년에 가와사키조선과 국제기선이 합쳐져 이른바 ‘K Line’을 구축하게 되었다. 이후 유럽 및 미주노선을 시작으로 1924년에는 캘커타 노선, 1925년에는 봄베이 노선에 ‘상하이마루(上海丸)’을 출항시켰다. 이어 1926년에는 북태평양선, 1933년에는 ‘카미가와마루(神川丸)’를 뉴욕 노선에 출항시켰다. 1941년 당시 36척(260,108톤)의 배를 소유하고 있었다. 또 1884년 오사카상선회사로 창립한 미쓰이-오사카상선에서는 1930년에 이미 1만톤 규모의 상선을 요코하마-뉴욕 노선을 운항했고, 1939년에는 남미 노선을 신설했다. 태평양전쟁이 한창인 1942년 미쓰이 재벌이 미쓰이기선회사를 분리 신설했다. 관련 주요 자료를 살펴보면, 오사카상선의 주요 항로는 일본 연안 항로를 비롯해 조선 및 대만, 중국 항로, 남양 및 인도 항로, 호주 및 북미, 남미 유럽 항로 등 세계를 총망라하고 있었다. 이들은 전세계 노선을 운항하며 막대한 이익을 거뒀지만, 동시에 강제동원된 조선인 노무자와 ‘위안부’의 수송에도 관여하였다.

 

 

 

‘위안부’를 실어 나른 일본의 상선들

일본의 상선들이 군인, 군속, 징용 노무자뿐만 아니라 일본군‘위안부’의 수송에도 관여했다는 사실은 여러 피해자들의 증언을 통해 확인된다. 예를 들어, ‘위안부’ 피해자 K씨는 오사카-사이공 사이를 운항한 아라비아마루를 탄 기억을 증언하였는데, 1930년대 후반, 이 선박은 고베, 요코하마, 오사카, 모지, 홍콩, 싱가폴 등을 거쳐 아프리카까지 항해하던 상선이었다. 또 다른 피해자 J씨는 시모노세키에서 대만의 기륭까지 다쿠사마루 혹은 교마루를 탑승했다고 증언하였다. 당시 오사카상선은 고베에서 모지, 시모노세키를 거쳐 대만의 기륭까지 오가는 정기선을 운항하고 있었다. 

K씨는 히로시마에서 파라오까지 미도마루, 오사카마루 등을 탑승했다고도 진술했는데, 이는 오사카상선의 남양(南洋) 노선에 해당되는 항로였다. 또한 P씨는 가고시마에서 나하까지 말레이마루[1]를 탑승하였다고 증언했는데, 실제로 당시 가고시마-나하 간 정기선이 존재했다. 마지막으로 S씨는 시모노세키에서 뉴기니아까지 헤이요마루라는 병원선을 탑승했다고 밝혔다. 이는 당시 오사카상선이 육군 및 해군 병원선도 운행했다는 사실과 일치한다.

이 중 아트라스마루와 큐슈마루(九州丸)는 가장 대표적인 ‘위안부’ 수송선으로 꼽힌다. 모두 오사카 상선 소속으로, 일본과 아시아 각지를 오가며 군인·군속·‘위안부’를 실어 날랐다.

 

[사진 2] 불타고 있는 헤이요마루의 최후 모습으로, 동북아역사재단 블로그에서 ‘함께 쓰는 역사, 일본군‘위안부’ ④ - 황선순은 어디로 끌려갔을까’ 내용 중 이미지를 캡처한 화면이다. (자료 : https://blog.naver.com/correctasia/221948536167)


 

[사진 3]   전시 수송선 모형을 소개하고 있는 블로그에서 소개하고 있는 침몰된 큐슈마루(九州丸)의 복원도 이미지이다. (자료 : http://ww6.enjoy.ne.jp/~iwashige/kyushumaru.htm)


 


 

 

‘지시받은 수송’이 아니라 ‘이윤을 얻은 협력’ 

20세기 초부터 세계 곳곳에 항해 노선을 가지고 있던 일본의 상선은 1930년대에 들어 전시 체제에 편입되어 전쟁에 동원되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의지와 무관했다고 주장하지만, 실제로 군수 물자는 물론 징용 노무자와 일본군’위안부’ 등을 수송하는 데 협력하며 전쟁 범죄에 해당하는 행위를 수행했다. 

당시 철도와 상선, 특히 연락선의 내부 분위기는 멸시와 감시가 일상적이었으며, 열악한 위생 상태로 인해 도중에 사망자가 발생하기도 했다. 어떤 경우에는 여객선이 아닌 화물선으로 사람들을 수송하기도 했다. 아우슈비츠로 가는 수송 열차가 악명 높았던 것처럼, 일본의 연락선 ·철도 ·상선 역시 생존자들로부터 ‘수인선(囚人船)’, ‘생지옥’이라 불리며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다. 실제로 영어권에서는 이들을 ‘Hell Ship(지옥선)’이라 부르기도 했다. 

이 시기 해상 수송은 일본의 국책사업과 밀접히 연관된 집단 수송이었다. 일부는 상대적으로 저렴한 요금을 받았을 수도 있지만, 어쨌든 일정한 요금을 징수하며 정당한 영업 활동의 형태를 띠었다. 또한 이들은 국가로부터 보조금을 지급받았고, 전후 침몰한 상선의 경우 일본 정부로부터 보상까지 받았다.

이처럼 일본의 철도, 연락선, 상선 등은 모두 징용 노무자와 ‘위안부’의 강제동원 사실을 알고도 의도적으로 이를 도왔고, 그 과정에서 이익을 취했다. 특히 철도나 연락선은 1906년부터 국유화되어 있었고, 민영화는 1986년에 이르러서야 이루어졌다. 다시 말해, 당시 이들 기관의 운영주체는 일본 국가였다. 국유였다는 사실은 단순히 정책적 차원을 넘어, 일본 정부가 국가적 책임을 회피하기 어렵다는 점을 의미한다. 

무엇보다 이들 수송 기관의 행위는 그 결과를 충분히 예견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부당한 이익을 얻은 명백한 전쟁 범죄의 공범 행위였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이들은 별다른 책임을 지지 않은 채 오늘날까지 정상적인 영업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오히려 일부는 전쟁 범죄와 부당 이득을 부인하며 자신들은 무관하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강제동원과 ‘위안부’ 수송에 관련된 일본 정부, 국유 철도 · 연락선, 선박 제조 회사, 여행사, 상선 등은 국제법 위반과 부당 이익 취득의 책임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바로 이 지점이 ‘위안부’ 등 전쟁 피해자 수송 문제에 대해 일본 정부와 기업의 책임을 다시 묻는 이유이자, 앞으로도 꾸준한 관심과 연구가 지속되어야 하는 이유이다.

 

각주

  1. ^[필자 주] 실제 증언에서는 마라이마루라 하고 있는데, 이는 기억 및 발음상의 오류로 생각됨.
  • 글쓴이 김민영
    군산대 교수이다. 1980년대 후반부터 ‘식민지 시대 한반도로부터 국외로의 노동력 이동’에 대해 관심을 갖고, 특히 ‘강제동원’ 문제에 대해 연구를 시작했다. 1990년부터 1992년까지는 일본 현지에 체류하며 식민지기 규슈지역 탄광의 조선인 노동현장 조사, 과거장의 조사에 이어 유골 수습과 망향의 동산 봉환 등에 참여했다. 조사연구 결과는 1991년 2월 박사학위 논문으로 제출되었고, 광복 50주년인 1995년 『일제의 조선인노동력수탈 연구』(한울)로 발간됐다. 이후 지속적으로 강제동원 관련 조사연구에 참여하며, ‘2차 대전의 전쟁 피해와 전후 책임’에 대한 국내외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