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스 프랭클린(Ruth Franklin)은 홀로코스트 문학을 다룬 저서 『천 개의 어둠 A Thousand Darknesses』에서 과거의 재난을 반복해서 다루고, 게다가 직설적으로 묘사하는 일의 윤리적 위험을 지적한다. 망자를 모욕하는 일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왜 적지 않은 독자, 관객, 청중, 시청자들은 끊임없이 홀로코스트의 직설적인 이미지를 읽고, 듣고, 보고 싶어 할까? 루스 프랭클린은 여기에는 어떤 열망이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홀로코스트에 ‘직접 연결될 수 있는 채널’에 대한 갈구 말이다.
폭력을 겪은 이들, 몸이 겪은 폭력을 고발하고 증언하는 이들의 외침은 같은 이유로 강력한 힘을 갖는다. 피해자, 희생자, 증인은 살아있다는 용기, 모습을 드러낸다는 용기, 입을 연다는 용기를 통해 존재의 존엄함을 증명한다. 이들이 “내 몸이 증거”, “내가 바로 증거”라고 외칠 때, 이 외침은 법정에서 사실을 입증하는 효과 이상의 효과를 생산한다. 증인이 여기, 우리 눈앞에 얼굴과 육신, 목소리를 가진 존재로 모습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역사적 재난을 몸으로 증언하는 증인을 통해 재난과 연결될 수 있다는 믿음을 갖는다. 가령 홀로코스트의 ‘위대한 증인의 시대’를 열었던 것은 이러한 믿음이다. 하지만 수전 손택(Susan Sontag) 같은 이들은 ‘타인의 고통’에 윤리적으로 응답하려고 노력했기 때문에, ‘타인의 경험’에 직접 연결될 수 있다는 이러한 믿음을 회의했다. 그의 관점 속에서 홀로코스트, 베트남 전쟁, 아프리카 내전, 제국주의 침략 등 재난의 희생자를 기록한 사진은 재난 그 자체에서 분리된 채 지구촌을 순회하며 의미와 감정을 만들어 내는 재현물이다. 그러니 그는 질문한다. 희생자를 찍은 사진을 보며 희생자에게 연민을 갖고, 재난에 대한 공포를 느끼는 일은 재난을 제대로 이해하는 방식인가? 그는 이런 사진들을 통해 재난과 피해자에게 ‘직접 연결’된다는 믿음을 곧장 갖는 이들을 틀림없이 못마땅하게 여길 것이다. 중요한 것은 연민과 공포를 자아내는 재난 사진에 기만당하지 않는 일이다. 역사적 재난은 우리를 이처럼 딜레마 속에 빠트린다. 직설적 묘사, 극적인 이야기, 사진 이미지 또는 증인의 모습으로 우리 앞에 나타나는 역사적 재난은 자신을 둘러싼 윤리적, 인식론적, 존재론적 딜레마를 생산한다.
어느 날 나는 나치 장교 아돌프 아이히만(Adolf Eichmann)의 전쟁 범죄를 기리는 재판을 다룬 다큐멘터리를 시청하다 아이히만 법정 증언대에서 흰색 양복을 입은 한 증인이 실신하는 장면을 보았다. 그는 증언대에서 웅얼거리며 증언을 이어나가다, 안절부절못하더니 갑자기 증언대 옆 바닥으로 쓰러졌다. 1961년 6월 7일 예루살렘 민중의 전당 법정에서 속개된 68차 공판에서 일어난 일이다.(영상링크 이동: https://www.youtube.com/watch?v=m3-tXyYhd5U) 정신을 잃고 쓰러져 증언이 중단된 이는 수용소 생존자 예히엘 디누어(Yehiel Dinur, 1909-2001)였다. 아이히만 재판은 홀로코스트를 비롯한 국가폭력, 인종학살, 전쟁 범죄 같은 역사적 재난의 기록, 기억, 기념에서 “증인의 출현”을 개시하고, “위대한 증인의 시대”를 연 사건으로 기록된다. 1961년 겨울까지 이어진 아이히만 재판에서 수용소 생존자, 유대인 레지스탕스를 포함한 백여 명에 가까운 증인들이 4월부터 6월까지 증언대에 섰고 예히엘 디누어도 이들 중 한 사람이었다. 예히엘 디누어라는 인물은 전혀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었지만 그의 필명은 이스라엘 국내외에 제법 알려져 있었다. 그는 1946년부터 카체트닉(Ka-Tzetnik)이라는 이름으로 수용소 경험을 바탕으로 한 몇 권의 책을 펴낸 인물이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벌어졌던 나치 유대인 절멸 계획에 대한 세계적 관심을 처음 불러일으킨 사건, 피해 생존자의 증언이 비로소 공적으로 발화된 사건, 생존자의 법정 증언이 텔레비전 방송을 통해 세계 37개국에 최초로 중계된 사건, “증인의 출현”을 가능하게 한 사건, 존재로서 역사를 증언하는 생존자-피해자-증인의 시대를 연 사건으로 기록되는 이 재판에서 증인 예히엘 디누어는 증언대에 선 지 십 분이 채 지나지 않아 정신을 잃었다. 그는 병원으로 후송되어 신경 발작 치료를 받았고 다시는 증언대에 서지 않았다.
아이히만 재판은 이제 막 문을 연 대형 회관의 강당을 개조한 법정에서 열렸다. 생존자, 피해자, 가족, 시민, 언론인, 학자들이 방청석을 가득 메웠다. 4월부터 두 달 가까이 증인들의 증언이 진행되는 동안 텔레비전은 법정 방탄유리 뒤 피고석에 앉아 있던 아이히만의 표정과 동작을 내내 클로즈업 화면 속에 담아냈다. 아이히만은 6월 20일, 75번째 공판에서야 변호사의 심문을 받게 되고 7월 20일부터 검사와 판사에게 수십 차례의 심문을 받게 된다. 재판에서 아이히만 못지않게 언론의 주목을 받았던 검사 기드온 하우스너(Gideon Hausner)-아이히만 재판을 기록했던 한나 아렌트(H. Arendt)는 기드온 하우스너에게 방청객을 힐끗거리며 연극적 허세를 지닌 채 법정을 미디어 쇼 무대로 만들었다며 날 선 비난을 가했다-는 이날도 증인의 신분을 확인하며 증언을 끌어내기 시작했다. “당신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예히엘 디누어입니다.” 검사는 디누어에게 가명으로 카체트닉을 선택한 까닭을 물었다. 카체트닉은 강제수용소를 뜻하는 독일어 Konzentrationslager를 줄여 부르던 KZ(카-체트)에서 비롯된 말로 수용소 수감자를 일컫는 은어다. 따라서 왜 수감자를 가명으로 선택했냐는 검사의 질문은 증인이 아우슈비츠 생존자 당사자임을 확인하기 위한 질문이자, 참혹한 수용소 경험을 들려달라는 요청을 건네는 질문이었을 것이다.
증언대에 선 예히엘 디누어는 검사에게 자신은 문학 작품을 쓰는 작가가 아니며, 카체트닉 역시 필명이 아니라고 답한다. 자신은 지구의 규칙이 작동하지 않았던 “아우슈비츠 행성의 연대기”를 적는 인물일 뿐이라고 밝힌다. 아우슈비츠 행성에 사는 이들은 모두 카체트닉과 숫자로 이루어진 이름을 지니고 있을 뿐이라고. “민족이 십자가에서 죽은 이후에도 세계가 깨어나지 않는 한” 카체트닉, 수감자를 이름으로 지니고 있어야 한다고. 2년 동안 아우슈비츠 나치 수용소에 갇혀 있었던 예히엘 디누어는 실제로 이후 평생 카체트닉, 또는 나치가 자신의 팔뚝에 새긴 수감자 번호 135633을 더한 카체트닉 135633이라는 이름으로 살았다. 그는 심지어 강제 수용소 경험 이전 이디시어(편집자 주: 중부 및 동부유럽 출신 유대인이 사용하는 언어)로 썼던 자신의 시집들을 불태우기도 했다. 도서관이 보관하고 있던 시집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는 아우슈비츠를 기억하는 일에 수용소 이후의 여생을 바쳤지만 이름, 얼굴, 목소리를 드러내는 미디어 인터뷰는 한결같이 거절했다. 그는 평생 이름 없는 이름, 수감 번호 135633의 낙인과 수감자 아무개라는 이름으로만 아우슈비츠에 관해 썼다. 아이히만 재판의 증언대에서 이름과 얼굴을 드러냈던 일이 오히려 예외적인 일이었다. 유럽 전역에서 아이히만 재판 증언대에 서기를 희망했던 이들이 수만 명이었지만-신청자 중 백여 명이 실제로 증언하게 된다-, 이들 중 나치 치하 수용소 생존자는 일부에 불과했던 것이 사실이다. 수용소 생존 당사자 대부분은 당시 증언대에 서서 신분을 드러내거나 경험을 복기하려고 하지 않았었다. 예히엘 디누어도 증언대에 서기를 자처했던 인물은 아니다. 아우슈비츠에 대한 수기와 소설을 펴낸 카체트닉이 증언대에 서기를 희망했던 이는 기드온 하우스너 검사다.
그런데 카체트닉의 저작들은 진정한 목격의 기록이라는 최근의 재평가에 이르기 전 오랫동안 수용소 포르노라는 평가를 받아왔다. 카체트닉의 저작은 쇼아를 관음증적 소재로 다루는 비윤리적 저작이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키취(편집자 주: 진품이 아닌 천박한 복제품, 모조품)와 다름없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수용소라는 한계 상황에 대한 철학적 성찰을 이어나갔던 엘리 비젤(Elie Wiesel), 프리모 레비(Primo Levi) 등의 걸작 수용소 증언 문학들과 달리 수용소를 배경으로 한 카체트닉의 자전적 수기 혹은 소설에는 나치의 고문, 수감자 사이의 폭력, 수용소 내 윤락 시설(Joy Division), ‘수용소 매춘부(Feld-Hure)’, 수감자 사이에서 벌어진 카니발리즘 등에 대한 묘사가 거칠고, 직설적이고 잔혹하게 이어지기 때문이다. 쇼아 문학 연구에 따르면 전쟁 직후 이스라엘에는 수용소에서 일어난 폭력, 섹스, 살인 등을 소재로 삼아 선정적 흥미를 자극하는 대중 소설이 적지 않게 유행했기에, 카체트닉의 소설도 그러한 대중 소설의 하나로 치부되곤 했다. 아이히만의 심문 기록을 소상히 기록했던 한나 아렌트도 증거와 증언을 다룬 장에서 카체트닉의 실신 사례를 잠깐 언급하는데, 카체트닉에게 곱지 않은 시선을 던진다. 아렌트는 “아우슈비츠의 매음굴, 동성애, ‘인간적 흥밋거리’에 대한 글”[1]을 써서 유명해진 인물로 카체트닉을 소개한다.
수용소 포르노로 비난받는 카체트닉의 글과 삶의 간격은 어떻게 이해되어야 할까? 증인의 이름 없는 이름과 얼굴은 어떻게 이해되어야 할까? 증언의 시대를 연 사건으로 평가받는 아이히만 재판정에서 일어난 예히엘 디누어-카체트닉의 실신은 어떤 의미로 이해되어야 할까? 당시 언론은 지옥을 경험한 피해자의 현재의 고통을 입증하는 사례로 예히엘 디누어의 실신을 다루었다. 이를테면 프랑스 일간지 르몽드는 예히엘 디누어의 실신 후 68차 공판을 보도(1961년 6월 9일)하면서 “재판정에서 작은 사고가 일어났다”고 적었다. “이로써 이스라엘에 카체트닉의 본명이 처음 알려지게 되었다. 카체트닉의 본명은 바로 예히엘 디누어다. 증인은 눈을 감은 채 저음의 목소리로 강제수용 기간 동안 경험한 공포를 되짚어 나갔다. 증언이 한껏 고조된 탓에 증인은 이내 증언대에서 비틀거렸고, 이어서 실신에 이르렀다. 들것으로 그를 옮기는 동안 두 번째 증인인 조셉 클라인만(예루살렘 거주, 목수)이 이야기를 이어받았다.”[2] 그러나 카체트닉-예히엘 디누어가 증언대에서 수용소의 참상을 복기하다 실신했다는 보도문 속 묘사는 사실에 완전히 부합되지 않는다. 정신을 잃기 전 예히엘 디누어는 눈을 감은 채 말을 이어나가지 않았다. 그의 독백은 수용소 공포에 관한 생생한 묘사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는 증언대에서 독백처럼 “아우슈비츠 행성”에 관해 읊조렸다. 예히엘 디누어의 읊조리는 증언은 사실 기술을 중시하는 법정 진술에도, 극적 증언의 효과를 보여주고자 했던 아이히만 법정에도 어울리지 않는 진술이었다. 그는 독백을 이어갔다. “저는 점성술에서 별이 우리의 운명에 영향을 미치듯, 잿더미의 행성인 아우슈비츠가 우리 행성의 맞은편에서 우리 행성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온전히 믿습니다.” 한나 아렌트는 예히엘 디누어 독백의 구절을 인용하면서 그가 재판을 벗어난 독백을 제지하려는 판사와 검사의 질문에 상처를 받은 기색을 보이더니 정신을 잃었다고 적었다. 하지만 아렌트가 언급하지 않은 사실이 있다. 몇 분 동안 독백을 이어나가던 예히엘 디누어는 실신 직전 수용소 가스실로 향하던 수감자들을 언급했다. “저는 그곳에서 2년을 보냈습니다. 저는 아직도 그 뒤에 남아 있습니다. 저는 여전히 저를 바라보고 있는 그들을 봅니다. (증언대에서 일어서 증언대 밖으로 나가려다 다시 앉는다) 저는 그들을 봤어요. [가스실로 들어가기 위해] 줄지어 선 그들을 보고 있어요.” 검사는 이 순간 “괜찮다면 다른 질문 몇 가지를 해도 되겠냐”고 묻는다. 판사는 디누어에게 검사의 질문을 들어달라며 플리즈(Please)를 연발한다. 디누어는 이 순간 쓰러진다. 그의 언어와 독백은 법정이 요청하고, 인정하고, 경청하는 해석, 낱말, 표현, 인과성, 증명의 방식에 어울리지 않았다. 크리스티앙 두메(Christian Doumet)는 『증인의 실신』이라는 저작에서 침묵에 대한 거부, 증언의 의지에도 불구하고 부닥친 “말하기의 불가능성” 속에서 예히엘 디누어가 “낱말들의 밤” 속으로 실신했다고 적었다.[3] 자명하게 설명할 수 없는 사건일 때, 아우슈비츠라는 사건, 극단적인 부조리와 복잡성을 가진 비극적 사건을 자명하게 설명하고, 증언하는 것이 가능할까? 희생자의 표정, 목소리, 시선을 증언할 수 있을까? 겹겹의 의미와 감정의 고유성을 전달할 수 있을까? 예누엘 디누어는 재판정을 지배하는 일반 규칙에 맞추어 가스실로 걸어 들어가던 이들의 시선과 얼굴을 표현할 방도를 알지 못했던 증인이다. 그리고 많은 아우슈비츠 생존자처럼 그 역시 아우슈비츠의 기억 속에서 고통받았다. 우울증이 심화되었던 1970년대에 그는 마약 복용을 통한 환각 치료를 시도한 바 있는데, 이 과정에서 대면할 수 있었던 과거의 이미지, 죽음을 앞두고 있던 수용소 희생자를 포함한 수용소의 이미지를 저서 『지옥의 일출 Sunrise Over Hell』에 글로 다시 기록했다. 조르주 디디 위베르만(Georges Didi-huberman)은 카체트닉의 사례를 생존자가 과거의 ‘사실’을 정신적으로 받아들일 때 ‘이미지’를 대면하는 과정이 필수적이었다는 점을 보여주는 사례로 꼽는다.
말하자면 예히엘 디누어는 증인의 모순된 존재 방식을 증언하는 인물이다. 그는 한편으로 재난을 겪은 얼굴, 목소리, 눈빛의 현존성을 지닌 증인이다. 그의 신체, 존재, 고통의 경험은 우리를 역사적 재난에 접속하게 한다. 다른 한편 그는 몸, 존재, 고통의 경험을 통해 절박한 증언 불가능성을 증언한다. 그는 증언대에서 정신을 잃으며 몸의 감각을 중단시킨다. 그의 실신과 침묵은 우리 눈앞에서 우리, 그를 목격하는 증인이 된 우리에게 말하는 다른 언어가 된다. 그의 사례는 한편으로 공감을 장담하는 고통의 이미지를 소비하는 우리에게 윤리적 질문을 던진다. 그러나 다른 한편 그는 스스로 고통의 이미지와 그치지 않고 대면하려는 자이기도 했다. 증인이 우리에게 “내 몸이 증거”라고 외친다. 증인을 마주한 채 우리는 어떤 청자, 관객, 목격자가 되어야 할까? 증언의 사실성, 증언의 활력을 기대하기에 앞서 우리는 우선 연루되어야 할 것이다. 증인의 모순 속에 우리는 먼저 연루되어야 할 것이다.
각주
- ^ 한나 아렌트 지음, 김선욱 옮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파주: 한길사, 2006), 제14장 증거와 증언 참조.
- ^ 『르몽드』, 1961년 6월 9일. https://www.lemonde.fr/archives/article/1961/06/09/un-temoin-s-evanouit-en-rappelant-les-horreurs-du-camp-d-auschwitz_2281887_1819218.html
- ^ Christian Doumet, L'évanouissement du témoin (Paris: Arléa, 2019) 참조.
- 글쓴이 이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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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문화연구자. 영화, 무빙 이미지, 재난 이미지, 인류학적 이미지에 대한 동시대 미학 이론을 연구하고, 동시대 이미지 작업에 대한 비평적 글쓰기를 시도한다. 〈유럽영화운동〉, 〈알렉산드르 소쿠로프〉(공저), 〈하룬 파로키〉(공저), 〈풍경의 감각〉(공저), 〈어둠에서 벗어나기〉(역서), 〈색채 속을 걷는 사람〉(역서) 등을 펴냈다. 현재 동의대 영화 트랜스미디어 연구소 전임연구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