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속마음은 한 치 앞도 알 수 없어. 그래서 사람을 믿지 못하고 살아왔어. 계속 속기만 했으니까 말이여. 하지만 재판을 하고, 또 내가 겪은 일을 터놓고 나니 조금 위안이 되었네. 나도 조금은 사람다워졌어. 완전히 때 빼고 유식한 할머니가 되었지."
1993년 4월 5일 일본에 사죄를 요구하는 소송을 제기한 이후 10년 동안 일본 내 유일한 원고로서 '위안부' 재판에서 투쟁해온 송신도 씨는 일본 대법원이 상고를 기각해 패소가 확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난 후 감상을 이렇게 말했다. 제소 이전과 패소 이후의 감정을 단적으로 표현한 발언이었다.
송신도 씨는 긴 인생 속에서 삶의 격변을 두 번 체험했다. 중국 위안소로 끌려갔을 때와 일본이 패전한 후 일본군 출신이었던 남자에게 청혼을 받고 일본으로 건너갔을 때다. 두 번의 격변은 모두 남에게 속아서 일어난 결과였다.
송신도 씨를 처음 만났을 때, 그는 "나는 잘 속아" 라면서 몇 번이나 스스로 경계하듯 말했다. 그가 오랫동안 사람을 믿지 못한 채 살아왔던 것은 이 두 번의 격변이 원인일 것이다.
결혼을 피해 고향에서 중국으로
송신도 씨는 16살 무렵 어머니가 정해준 남자와 결혼식을 치렀다. 피로연을 마치고 침실에서 11살 연상인 신랑이 자신의 어깨에 손을 올린 순간, 뒷간에 가는 척하며 속옷 차림으로 신혼집을 뛰쳐나와 논개구리 울음소리가 울려 퍼지는 밤길을 정신없이 달려 친정으로 도망쳤다. 친정집은 모두 잠이 들었는지 조용했다. 몸에는 속옷만 걸치고 있어 추웠던 송신도 씨는 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심조심 불이 꺼진 아궁이 속으로 들어가 그대로 잠이 들고 말았다.
다음 날 아침, 여동생이 아궁이 속에서 잠든 송신도 씨를 발견하고 깜짝 놀라 소리를 질렀다. 어머니는 그 소리에 달려 나와 크게 화를 냈다. 그 당시에는 결혼 후 3년간은 친정에 올 수 없다는 관습이 있었기 때문이다. 송신도 씨는 이 집에는 있을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어 친정을 나왔다. 어머니가 소리를 지르면서 쫓아왔지만 붙잡히지는 않았다.
이후 그는 친구 집에 머물면서 아기 돌보아주는 일을 했다. 어느 날, 중년의 여성이 그에게 말을 걸어왔다.
"중국으로 건너가 나라를 위한 일을 하면 결혼을 안 해도 혼자서 살 수 있어."
그 중년의 여성은 송신도 씨가 왜 친구 집에서 아기 돌보는 일을 하고 있는지 자초지종을 들었을 것이다. '나라를 위한 일'이 어떤 일인지 그는 잘 알지 못했지만, '시집 안 가도 된다'는 말에 끌려 여성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일본 패전 이후 일어난 두 번째 격변
두 번째로 속은 것은 일본이 패전한 직후 중국 후베이성 셴닝(咸寧)의 위안소에 있었을 때다. 갑자기 일본군이 위안소를 찾지 않았고 그곳의 여주인과 송신도 씨를 비롯한 '위안부'들도 어찌 처신해야 할지 모른 채였다. 그 시기, 송신도 씨가 몇 개월 전까지 머문 웨저우(岳州) 위안소에 드나들던 일본군 하사관 '이다 가네사쿠(井田金作)'가 돌연 나타나 송신도 씨에게 청혼했다. 이다는 군인보다 민간인들이 더 빨리 귀국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 군에서 이탈한 뒤 부부 동반 귀국으로 위장하려고 송신도 씨를 이용한 것이다.
송신도 씨에게 이다는 위안소를 드나들던 수많은 군인 중 한 명에 불과했다. 하지만 송신도 씨는 이다의 청혼을 받아들였다. 7년이나 되는 긴 세월,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일본군 장병에게 성적 대상으로만 다뤄졌던 그는 자신은 결혼과는 인연이 없다고 믿고 있었다. 이때의 송신도 씨는 상대가 누가 됐든 누군가가 자신에게 청혼했다는 사실만으로도 마음이 벅차올랐을 것이다.
이다는 가진 돈이 얼마 되지 않았기에 둘은 그동안 송신도 씨가 모아온 돈을 쓰고 노숙을 하면서 배를 탈 수 있는 한커우(漢口)로 향했다.
한커우의 일본 조차지(租借地, 한 나라가 다른 나라로부터 빌려 통치하는 영토)에는 고향으로 돌아가는 인양선[1]을 기다리는 일본인이 대거 몰려 있었다. 송신도 씨는 일본인들 사이에 섞여 거적으로 만든 좁은 공간에서 이다와 약 9개월간 지내게 되었다. 가진 돈은 점점 줄어들었다. 송신도 씨는 패전 이전부터 일본 조차지에서 살고 있던 일본인들의 집을 돌면서 주문을 받아 세탁 일을 하며 돈을 벌었다.
일이 없었던 이다는 몇 명과 공모해 중국인과 결혼한 일본인의 집에 잠입하여 집주인을 살해하고 금품을 빼앗아 공범들과 나누어 가졌다. 송신도 씨는 나중에야 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인양선을 기다리는 사람 중에는 생후 두 달 된 아기를 안고 있는 여성이 있었다. 그 여성은 전염병에 걸려 거의 죽게 되자 아기만 남겨두고 죽을 수는 없다며 자신도 약을 먹고 아기에게도 약을 먹여 같이 죽으려고 했다. 하지만 여성만 목숨을 잃고 아기는 살아남았다. 인양단 관계자가 갓난아기를 키울 사람을 구했지만 송신도 씨는 양육자로 나설 마음이 없었다. 송신도 씨는 위안소에 있을 때 사산도 하고 민간요법으로 낙태도 한 적이 있었다. 두 명의 아이를 무사히 낳긴 했지만 위안소에서는 아이를 키울 수 없어 다른 사람에게 맡겼다. 그래서 자신의 아기도 건사하지 못했는데 다른 사람의 아기를 키울 수는 없는 노릇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다는 송신도 씨의 의사를 무시하고 갓난아기를 무작정 떠맡았다. 자살한 여성의 짐보따리에는 저비권(儲備券, 1941년부터 중국 중앙은행에서 발행한 은행권)과 옷가지, 금시계, 금반지 등 고가의 귀중품이 잔뜩 들어 있었다. 이다는 그것을 노린 것이다. 저비권은 이미 사용할 수 없는 것이었지만, 이다는 여성이 갖고 있던 귀중품 중 팔 수 있는 모든 것을 돈으로 바꾸었다.
드디어 인양선이 도착했다. 아기에게 먹일 분유를 구할 수 없었다. 배가 출항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밤, 배 안의 사람들이 모두 잠들고 송신도 씨도 깊게 잠들었을 때 이다는 컴컴한 장강(長江) 속으로 갓난아기를 던져버렸다.
"그게, 나의 가장 큰 죄여."
비록 이다가 저지른 범죄였지만, 송신도 씨는 아기를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침통해 하며 중얼거렸다.
배가 하카타(博多)에 도착한 날, 이다는 한커우 관청에 신청하여 교부받은 송신도 씨와의 임시 혼인 증명서를 찢어 버렸다.
한커우에서 하카타로 출발한 배 안에서 일본군 간부 출신의 일본인이 군대 내에서 혹사당했던 조선인들에게 둘러싸여 격렬한 항의를 받은 사건이 있었다. 송신도 씨는 이러한 광경을 본 이다가 조선인 여성과의 혼인에 불안을 느껴 임시 혼인 증명서를 찢어 버린 것이라고 여겼다. 이다는 임시 혼인 증명서를 찢어 버린 것으로 모자라 송신도 씨에게 자신이 일본 조차지에서 벌인 강도, 살인 범죄와 아기를 바다에 버린 사실을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말라고 단단히 입단속을 시켰다. 일반인이 된 이후의 이러한 행위는 모두 범죄에 해당한다. 하지만 전쟁 중 침략군의 하사관이었던 이다의 주변에서는 살육도 약탈도 일상적으로 벌어졌다.
이다는 사이타마현 후카야(埼玉県深谷)의 본가로 송신도 씨를 잠시 데려갔지만, 결혼도 하려하지 않고 다시 오사카부 쓰루하시(大阪府鶴橋)로 끌고 가 "몸이라도 팔아라"라는 매정한 말을 남기곤 그대로 떠나버렸다.
송신도 씨는 조선인이 경영하는 모모다니(桃谷) 장화 공장에서 일하면서 기찻삯을 마련하고 선물을 준비해 이다의 본가를 찾아갔다. 이다의 모친과 그의 형이 "네가 데려온 여자인데 매정하게 굴지 말라"고 이다를 설득했지만, 이다의 마음은 바뀌지 않았다. 송신도 씨는 쌀 한 되 오 합(약 2kg)과 간편복(원피스) 한 벌 분의 옷감을 받아든 채 다시 기차에 몸을 실었다.
기차의 종착역인 우에노(上野) 역 안에는 부랑자들이 많았다. 우에노 역에 도착한 송신도 씨는 소변이 마려워 지나는 사람을 붙잡고 공중화장실의 위치를 물었다. 한 남자가 흔쾌히 짐을 맡아 주겠다고 하여 그가 가르쳐 준 장소로 갔지만 화장실을 찾을 수 없었다. 짐을 맡긴 곳으로 돌아가니 짐과 함께 남자는 사라지고 없었다. 짐 속에는 귀환 증명서가 들어 있었다.
임시 혼인 증명서는 이다가 찢어버렸고 귀환 증명서도 우에노에서 분실하고 말았다. 이제 송신도 씨는 일본에 머물 길이 뚝 끊기고 말았다. 망연자실한 그는 마침 정차해 있던 열차에 올라탔고 한참을 흔들거리다가 달리는 열차에서 뛰어내렸다. 송신도 씨는 목숨을 건졌지만, 유산하고 말았다. 이다의 아이였다.
열차에서 뛰어내린 송신도 씨를 도호쿠(東北) 본선 선로 근처 농가 사람이 구해주었다. 송신도 씨가 뛰어내린 곳은 이시코시(石越) 근처였다. 농가에 출입하던 암거래 쌀 장수 남성이 오나가와에서 함바집을 관리하는 조선인이 있으니 식모라도 해 볼 것을 권해 주었다. 송신도 씨는 밥은 못 하지만, 잡일은 할 수 있을 것 같아 함바집을 찾아갔다.
오나가와의 함바집을 찾아간 송신도 씨는 그곳에서 하재은 씨를 만났다. 송신도 씨는 이로리[2] 곁에서 그가 묻는 말에 모두 대답했다. 그는 송신도 씨의 더러워진 스웨터를 이로리 불 가까이에 가져가 쬐면서 "아니고 딱해라, 딱하기도 하지."하며 몇 번이나 고개를 끄덕였다. 하재은 씨가 송신도 씨의 얘기를 듣는 동안 불을 쬔 이들이 올 스웨터의 올 사이사이에서 기어 나와 이로리에 떨어졌다.
그날부터 송신도 씨는 하재은 씨와 함께 살게 되었다.
위안소 제도가 파괴한 것들
중국으로 가면 결혼을 피할 수 있다는 꾀임에 속아 중국으로 향한 송신도 씨는 1938년 늦가을에 우한(武漢) 작전으로 일본군이 막 점령한 직후의 우창 위안소로 끌려갔다. 벽돌로 지어진 건물 출입구에는 핏덩어리들이 말라붙어 있었고 뒤뜰에는 시체가 늘어서 있었다. 우창 위안소는 '세계관'이라 불렸다. 세계관은 원래 식당으로 쓰인 건물이었는데 목수나 미장이 출신인 군인들이 건물을 작은 방으로 나누어 위안소 용으로 개조했다. 곧 여성들이 도착한다는 사실을 안 병사들은 위안소 개설 허가가 나기 전부터 세계관으로 모여들었다.
위안소에 도착하고 처음, 송신도 씨는 방으로 들어온 병사를 몸을 한껏 움츠리며 거절했다. 거절할 때마다 병사들과 위안소 관리인에게 두들겨 맞았다. 몇 번이나 도망치려고 했다. 하지만 그때마다 발각되어 관리인에게 맞고 발에 차이며 긴 머리채를 잡혀 휘둘렸다. 그리고 "그렇게 여기서 나가고 싶다면 여기에 오는 데 든 비용을 지금 당장 전부 내놔!"라는 협박을 당했다. 설령 위안소에서 빠져나간다 한들 중국의 말도 글도 모를뿐더러 가진 돈도 없었다. 송신도 씨는 중국으로 향하기 직전 동생을 만나러 갔을 때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도 들은 참이었다.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엔 고향은 너무나도 멀었고, 고향으로 돌아간들 몸을 의탁할 만한 곳도 없었다. 그 때문에 있을 곳이 여기 밖에 없다며 그는 점차 탈출을 포기하게 되었다.
우창에는 병참기지가 마련되어 있어 전선으로 향하는 부대는 병참기지에 들러 무기와 탄약, 식량을 보충하고 전선에서 돌아온 부대는 우창에서 휴식을 취했다. 우창에 주둔해 있는 부대만이라면 그리 많은 숫자는 아니었지만, 우창을 통과하는 부대가 오는 때면 송신도 씨의 방으로 줄줄이 들어오는 병사는 하루에만 70여 명에 달했다.
송신도 씨는 위안소에서 생활하던 중 아이를 가지게 되었다. 임신 7개월에 들어선 어느 날, 배가 이상하게 차가워졌다. 점점 고통이 강해지면서 가늘고 다 자라지 못한 한쪽 발이 바깥으로 나왔다. 한쪽 발은 나왔지만, 그 후로 진전이 없었다. 옆에 있던 주먹밥을 양 볼 안에 욱여넣고 온몸의 힘을 짜내어 몇 번이나 배에 힘을 주자 드디어 몸이 나오고 머리도 나왔다. 해삼 같은 형상의 사산아는 포도색을 띠고 있었다. 송신도 씨는 싸늘해진 주검을 안고 혼자서 위안소 뒷산 기슭으로 가 아이를 묻었다.
두 번째로 임신했을 때는 몸에 무리가 가지 않도록 한커우의 해군 위안소로 이동해 잡무를 맡게 되었다. 아기는 무사히 태어났다. 하지만 위안소에서는 아이를 키울 수 없었다. 아기는 한커우 교외에 사는 조선인 여성에게 보내지고 송신도 씨는 웨저우의 위안소로 보내졌다. 웨저우는 낡은 동네로 위안소는 2~3곳 밖에 없었다. 웨저우는 전선과 가까운 곳이라 웨저우의 '위안부'들은 소탕전에 나서는 부대를 따라다녔다. '종군'은 경험이 많은 '위안부'만 가능했다.
"철모를 쓰고, 각반을 두르고 전선으로 끌려나갔지. 사람이 겨우 한 명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구멍을 파고 담요 하나 깔고 거기서 했어. 여름에는 괜찮지만, 겨울에는 눈이 내리니까. 추운 곳에서 30분이나 엉덩이를 까고 있으니 공알이 얼 것만 같았지. 죽기보다 괴로웠어."
군의 명령에 따라 장안(長安)에 갔을 때의 일이다. 역시나 '위안' 용도로 판 구멍에서 병사를 상대하고 있을 때 갑자기 머리 위로 총탄이 날아다니기 시작했다. 송신도 씨는 한시라도 빨리 그 자리를 피하고 싶었는데도 병사는 "지금 여기서 죽어도 여한이 없다."하며 떨어지지 않았다.
웨저우(岳州)에서 잉산(応山)으로 보내졌을 때는 송신도 씨가 있던 옆 위안소에서 일하던 도시코가 전염병에 걸려 혈변을 보았다며 알고 지내던 병사를 거절한 일이 있었다. 화가 난 병사는 밖에서 자고 있던 도시코에게 큰 돌덩이를 던졌다. 도시코는 병사가 던진 돌덩이에 배를 맞아 복막염으로 죽고 말았다. 위안소의 여자들이 도시코의 시신을 수습해 화장했다. 나무를 몇 그루나 쌓아 그 위에 시신을 올리고 화력이 약해지면 나뭇가지를 던져 넣어가며 뼈를 주울 수 있을 때까지 오랫동안 태웠다. 도시코는 전라남도 출신이었지만, 유골은 근처 산에 매장했다.
그리고 송신도 씨가 웨저우에서 셴닝의 위안소로 옮겨진 지 수 개월이 지났을 때 일본이 전쟁에서 패했다.
7년에 걸쳐 새겨진 깊은 상처들
송신도 씨의 몸에는 매우 많은 흉터가 있다.
목 부근에는 작은 콩알 정도 크기의 팬 곳이 있어 일본군이 입힌 상처인지 물었더니 막 태어났을 때 원하던 사내아이가 아니어서 어머니가 찌른 흔적이라고 했다. 신도라는 이름은 출산 전에 지은 이름을 그대로 사용한 것일 테다.
왼쪽 팔에는 세계관에서 이름을 잊어버리지 말라며 새겨준 '가네코(金子)'라는 한자 문신이 있다. 송신도 씨는 글자를 읽을 수 없다. 나는 위안소에서 여성들이 도망가지 못하게 하려고 이 문신을 새긴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왼쪽 옆구리에는 약 10cm 크기의 검상 자국이 있다.
"1940년 즈음인가, 병사들이 미쳐 날뛰는 현장이었고, 일요일이었는데 정말 무서웠어. 또 칼을 빼 들고 설쳐 대는 거여. 군인들끼리 싸우는 놈들도 있었고 질투 때문에 칼을 빼든 놈도 있었어. 나는 이렇게까지 널 사랑하는데 안 해줄 거냐면서. 자기 손을 베고 내 여기(옆구리)를 베더라고. 상처가 크고 깊었는데 피는 별로 나오지 않았어. 붕대를 감고 신음하면서 울어도 병사들 상대는 계속해야만 했지."
손목에도 동반 자살을 강요당한 흔적이 있다.
허벅지 끝부분의 상처는…….
"나한테 위로 올라가라고 하질 않나, 옆쪽이나 뒤에서 해대는데, 싫다 하면 칼을 가지고 있으니 죽이는 것도 살리는 것도 누워서 떡 먹기잖여. 우창을 통과하는 부대가 오는 날이면 아침 7시부터 밤 10시까지……. 샅에서 불이 나는 것 같았지."
위안소에서 병사들과 있었던 일들을 말하는 게 더는 견디기 힘들었던 것일까. 송신도 씨는 이제 나에게 이런 얘기는 그만 시키라고 했다. 파괴와 살육을 되풀이하던 전장에서의 잔학행위를 '위안부'의 몸을 희롱하면서 달래고자 했던 상식을 벗어난 병사들의 행위에 대한 혐오감, 견딜 수 없는 원통함이 되살아난 것일 수도 있다.
일본의 패전 이후 송신도 씨와 동거했던 하재은 씨는 주변인들로부터 일본인이었다면 관직을 맡던지 교사가 되었을 사람이라는 평판을 받는 인물이었다. 송신도 씨는 하재은 씨를 존경하고 신뢰했다. 그 이상으로, 낯선 일본 땅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했을 때 구해주었던 은혜를 평생 무엇보다도 소중히 여겨왔다. 세간의 부부처럼 생활했지만, "아빠, 아빠"하고 여길 뿐 성적인 교류는 없었다. 이러한 내용에 대해 도쿄 지방 법원의 본인 심문에서 그는 이렇게 진술했다.
"나는 '위안부'로 일해 온 사람이고, 역시 몸도 망가져 버렸으니 그럴 마음이 전혀 안 들지. …중략… 육체관계에 대해서는 아예 생각도 안 하게 되었지. 남자만 봐도 저 자식, 뭐지 하는 생각부터 들 정도니까. 남자는 얼굴만 봐도 징그러워."
위안소에서 7년에 걸쳐 새겨진 깊은 상처였다.
이다의 아이를 포함해 송신도 씨는 일본 군인의 아이 다섯 명을 임신했다. 하지만, 단 한 명도 자신의 손으로 키울 수 없었다. 일본군의 위안소 제도가 파괴한 것은 송신도 씨의 심신에 깊게 새겨져 있었다.
"네 거기는 양동이처럼 크다며."
"하도 많이 해서 굳은살이 배겼던데."
처음 만났을 때 송신도 씨는 오나가와에서 살면서 이런 듣기 거북한 말로 야유당한다고 말했었다. 송신도 씨의 이웃에는 중국 전선을 경험한 사람도 있었다. 이다처럼 선봉 부대에 소속된 사람도 있었다. 송신도 씨는 중국 위안소에 있었던 사실을 누구에게도 말한 적이 없다. 하지만 송신도 씨를 향한 이런 소름끼치는 야유는 그의 몸에 새겨진 전쟁 당시의 상흔을 표적으로 삼고 있었다.
송신도 씨는 '사람 속마음은 한 치 앞도 알 수 없다'고 느낄 수밖에 없는 전후 시대를 살아왔다. 하지만 제소 후 송신도 씨는 자신의 재판을 진심으로 응원하는 많은 지원자를 알게 되었다. 그래서일까. 대법원에서 패소가 확정된 후에도, 2011년 동일본 대지진으로 인해 집과 세간살이가 모두 떠내려가 도쿄에서 살기 시작했을 때에도 "나는 지금이 제일 행복해."라고 그는 중얼거렸다.
송신도 씨가 일본 정부, 일본군, 일본 사회로부터 받은 처절한 피해에 비하면 지원자 한 명 한 명의 힘은 너무나도 약소하다. 하지만, 그의 마음에 큰 울림을 주었다는 의미에서 귀하다. 송신도 씨는 2017년 12월 16일, 별세했다.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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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와타 후미코(川田文子)는 1943년 일본 이바라키 현에서 태어났다. 1966년에 와세다대학 문학부를 졸업한 뒤 1977년부터 작가로 활동. 1977년 말, 일본군'위안부' 피해 최초의 증언자 배봉기를 만난다. 배봉기의 인터뷰를 토대로 오키나와(沖縄) 게라마제도(慶良間諸島) 위안소로 끌려간 조선 여성의 발자취를 따라간 저서 『빨간 기와집 - 일본군 위안부가 된 한국여성이야기(赤瓦の家―朝鮮から来た従軍慰安婦)』가 대표작이다. 이 외에도 『바로 어제의 여자들(つい昨日の女たち)』, 『류큐코의 여자들(琉球弧の女たち)』, 『황군 위안소의 여자들(皇軍慰安所の女たち)』, 『전쟁과 성(戦争と性)』, 『인도네시아의 '위안부'(インドネシアの「慰安婦」)』, 『'위안부'라고 불리는 전장의 소녀(イアンフとよばれた戦場の少女)』, 『할머니의 노래(ハルモニのうた)』등을 집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