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의 방 - 강일출 할머니 편

김대월나눔의집 학예실장

  • 게시일2021.04.20
  • 최종수정일2021.05.27

 

해방, 또 다른 피해의 시작

1945년 8월 15일, 라디오에서는 포츠담선언을 받아들인 ‘히로히토’ 일왕의 항복 선언이 들려왔다. 그리고 다음 날인 8월 16일, 서대문형무소에서 풀려난 항일인사들과 그들을 환영하는 시민들이 종로 거리를 행진하기 시작하면서 해방의 기쁨과 환희는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거리는 수많은 사람들의 ‘만세’ 소리로 가득 찼으며, 해외에 있던 임시정부 요인들도 귀국을 서두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일제에 의해 아시아 각지로 끌려갔던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에게는 이 같은 해방의 기쁨과 환희가 전달되지 못했다.

1945년 7월 포츠담선언 이후, 일본군은 본국으로의 회군을 준비하고 있었다. 하지만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는 이들의 안중에 없었다. 일본군은 피해자들에게 해방이 된 사실조차 알려주지 않고 자신들만 귀국길에 올랐다. 이에 낯선 타국에 방치된 피해자들은 오롯이 자신의 힘만으로 앞날을 대비해야 했다. 피해자들에게 놓인 선택지는 많지 않았다. 이들 중 일부는 도보나 기차 등을 통해 스스로 귀국하였으며, 또 다른 일부는 연합군에게 발견되어 귀국선을 탈 수 있었다. 그리고 대만, 필리핀 등 상대적으로 멀리 끌려간 피해자들은 귀국을 포기하거나 귀국을 위해 중국관내로 모여드는 경우도 있었다.

중국에도 해방 이후 귀국을 포기하거나 귀국할 방법을 찾지 못해 중국에 남아있는 피해자가 상당하였다. 귀국을 포기한 피해자들이 어떠한 이유로 귀국을 포기하였는지 그 사정을 알 수는 없지만 이옥선 할머니(부산)는 “내가 이마에 ‘위안부’ 간판 써 붙이고 어떻게 부모형제 얼굴을 보느냐?”라고 말씀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피해자와 돌아가지 않으려는 피해자들이 중국 관내에 많아지기 시작하자 중국 정부는 이들에 대해 ‘무녀’, ‘기녀’, ‘풍기문란’ 등의 이유를 들어 강제송환을 추진하였다. 이에 강제송환을 피하려는 피해자들은 중국 국적의 남성과 결혼해 거류증을 발급받아야 했다.

 

강일출 할머니는

강일출 할머니도 해방 이후 국내로 돌아오지 못하고 중국에 체류한 피해자 중 한 명이다. 할머니는 1928년 경상북도 상주에서 열 두 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부모님은 농사로 생활을 이어나가셨는데, 땅과 논·밭 등이 많아 사는데 크게 어려움은 없었다고 한다.  이에 강일출 할머니는 다른 할머니와는 달리 어릴 적부터 학교를 다닐 수 있었다. 그러나 일제가 어린 여성들을 차출한다는 소문에 학교에 가지 못하고 집에 있는 날이 더 많았다. 어느 날 마을 이장이었던 할머니의 전(前) 형부가 할머니의 언니가 이혼 후 다른 남자와 재혼한 일에 앙심을 품고 할머니를 밀고하였다. 이 때문에 할머니는 1944년, 17살이 되던 해 중국 흑룡강성의 한 위안소로 끌려가게 되었다.

그렇게 끌려간 할머니는 얼마 뒤 장티푸스에 걸려 제대로 밥도 먹지 못하고 겨우 물만 마시는 신세가 되었다. 일본군은 할머니가 군인들에게 장티푸스를 옮길까봐 할머니를 산으로 끌고 가 태워 죽이려고 하였다. 다행히 할머니는 당시 일본군이었던 조선 사람의 도움을 받아 죽음 직전에 살아날 수 있었다. 그렇게 죽음을 피한 할머니는 해방 직후 조선족 남자를 만나 혼인하고 길림성에 정착하였다. 그러나 시어머니의 고된 시집살이에 남편마저  6.25전쟁에서 사망하자, 할머니는 시댁을 떠났다. 시댁에서 나온 할머니는 중국군의 간호사로 입대하였으며, 전역 후에는 길림시의 한 병원에서 30여 년간 간호사로 근무하였다.

1991년 한국에서 일본군‘위안부’ 문제가 공론화된 이후 국내의 시민단체들은 해외거주 피해자들을 찾아 나서기 시작하였다. 이때 한 시민단체가 일본군‘위안부’피해자를 찾는다는 신문광고를 낸 적이 있었는데, 강일출 할머니는 그 광고를 보고 직접 시민단체에 연락을 하셨다 한다. 그렇게 할머니는 고향을 떠난 지 56년 만에 한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국내로 돌아온 할머니는 잠시 친척집에서 생활하시다 2000년 3월에 나눔의 집에 입소하셨다.

 

강일출 할머니는 강인하면서도 따뜻하고 항상 자신감이 넘치신다. 치매를 앓고 계시지만 역사문제와 나눔의 집 일에 관심이 많으시다. 2016년에는 할머니가 그린 ‘태워지는 처녀들’이라는 그림이 모티브가 되어 ‘귀향’이라는 영화가 제작되기도 했다. 이 영화의 흥행으로 인해 강일출 할머니는 유명한 할머니가 되었지만, 정작 할머니는 치매로 인해 자신이 유명해진 사실을 알지 못한다. 가끔 영화 얘기를 하면서 ‘귀향’의 주인공이 할머니라고 설명하면 금방 잊어버리긴 하시지만 무척이나 좋아하신다. 또 새로운 사람을 보면 증언을 해야 한다는 기억이 남아있어서인지 낯선 사람들에게 항상 “역사문제를 똑바로 알아야 해!”, “일본놈들이 우리나라 불바다로 만들었잖아!”, “다신 그런 나라가 오면 안 돼!” 등의 이야기를 반복하신다.

또한 강일출 할머니는 다른 할머니들에 대한 질투와 샘이 대단하신데, 직원이나 방문객이 다른 할머니와 친하게 지내거나 대화를 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 무척 화를 내신다. 한번은 점심시간에 강일출 할머니가 계신 것을 모르고 이옥선 할머니에게 먼저 인사를 했다가 밥을 다 먹을 때까지 강일출 할머니가 아는 모든 욕을 들어야 했다. 오래전부터 나눔의 집에서 생활하셨던 할머니들은 강일출 할머니에 대한 내성이 생기셨는지 할머니의 어떠한 시비에도 반응하지 않으신다. 처음에는 이 모습이 참 신기하면서도 의아했다.

그러나 최근에 나눔의 집에 오신 속리산할머니 같은 경우에는 강일출 할머니의 텃세를 견디다 못해 몇 번 크게 싸우기도 하셨다. 다툼 이후 강일출 할머니는 계속해서 속리산 할머니에 대한 불만을 표출하고 계셨는데 어느 날 속리산 할머니가 갑자기 강일출 할머니에 대한 칭찬을 하셨다. “강일출이는 키도 크고 인물도 좋아, 자식들도 다 있으니 얼마나 좋아. 부러워” 이 말을 들은 강일출 할머니는 언제 싸웠냐는 듯이 웃는 얼굴로 표정을 바꾸시고 “아이고~ 언니야~ 고마워~” 라고 말해 주위에 있던 직원들이 모두 박장대소 한 일이 있었다. 이날 이후 지금까지 직원들은 두 할머니가 다투시면 강일출 할머니에게 “할머니, 속리산 할머니가 할머니는 키도 크고 인물도 좋대”라며 귓속말을 한다.

나눔의 집 할머니들은 서로 친하지 않으시다. 오히려 서로에게 무관심하시거나 다투는 일이 더 많다. 심지어 강일출 할머니와 속리산 할머니처럼 갈등으로 스트레스를 받는 할머니들도 계신다. 그래서 가끔은 ‘이렇게 사이도 좋지 않고 스트레스도 많이 받으시는데 왜 할머니들은 굳이 이렇게 함께 살아야 할까?’라는 의문이 들기도 한다.

 

강일출 할머니의 방

 

강일출 할머니는 다른 할머니들과 달리 방에서 거의 생활을 하지 않으신다. 할머니는 주무실 때를 제외하고는 방에 잘 계시지 않는다. 항상 거실에 나와 TV를 보시거나 직원들과 얘기를 나누신다. 따라서 할머니의 활동무대는 주로 나눔의 집 거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강일출 할머니의 방에는 할머니의 특성을 나타낼 수 있는 소품들은 거의 없는 편이다.

할머니의 방은 나눔의 집 복도 끝 제일 안쪽에 자리 잡고 있다. 다른 방들도 많은데 굳이 왜 가장 안쪽 방을 쓰시는지는 잘 알지 못하였는데, 얼마 전에 2009년 지금의 생활관이 완공될 때 고(故) 김군자 할머니와 고(故) 배춘희 할머니 그리고 강일출 할머니가 가장 먼저 방을 ‘찜’ 하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강일출 할머니가 가장 안쪽 방을 고르신 이유는 그 방이 다른 방에 비해 조금 더 넓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실제로 강일출 할머니의 방은 앞서 소개했던 다른 할머니들의 방보다 조금 더 큰 편이다.

강일출 할머니의 방은 직사각형 구조로, 다른 할머니들의 방과 마찬가지로 방 맨 끝 창문 아래 돌침대가 놓여져 있다. 침대 다리 방향 왼편으로 장롱 2개가 자리 잡고 있고, 그 장롱 맞은편에는 화장대가 놓여져 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서랍장, TV, 냉장고, 또 다른 장롱이 차례대로 자리 잡고 있다. 처음 할머니의 방을 보았을 때 색깔과 모양이 전부 다른 장롱 3개가 한 방에 있는 것이 좀 의아했다. 당시에는 그것을 알아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는데, 어느 날 이옥선 할머니가 “강일출이는 죽은 할머니 사진도 못 걸게 해! 무섭다고, 근데 자기 방에는 먼저 간 할머니 물건들을 다 갖다 놨어.”라고 말씀해 주셨다. 그제서야 그 각양각색의 장롱들이 돌아가신 할머니들 것임을 알게 되었다.

할머니는 다른 할머니들은 못마땅해하고 질투하시지만 직원들에게는 참 친절하신 편이다. 또 사람들을 좋아해 직원들이나 방문객들을 보시면 본인 옆에 앉으라며, 옆자리를 툭툭 치신다. 그렇게 옆자리에 앉으면 금방이라도 자리에서 떠날까 봐 이런저런 얘기를 하면서 붙잡아 놓으신다. 가끔 할머니가 거실에 없으면 방으로 찾아가곤 했는데, 역시나 반갑게 맞아주시면서 내가 금방이라도 방에서 나갈까 봐 끊임없이 이야기를 이어나가셨다.

그 이야기는 보통 어릴 적 할머니 고향집에 감나무와 대추나무가 많았다는 것과 할머니가 막내라 부모님이 많이 아껴주었다는 것, 그리고 할머니의 집이 부자라 손님들에게 항상 식사를 대접했다는 내용이었다. 처음에는 일본군‘위안부’ 피해에 관한 이야기도 해주시려나 했지만 그런 이야기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 그 대신 머리 뒤에 흉터를 자주 보여주시는데 어떨 때는 일본군에게 맞았다고 하시고, 어떨 때는 포탄에 맞아 생긴 흉터라고 하시고 또 어떨 때는 어릴 적 감나무에서 떨어져 난 상처라고 하신다. 할머니 증언집에 일본군에게 맞은 상처라고 쓰여 있지만 굳이 할머니의 기억을 바로잡으려 하지는 않았다.

2019년 나눔의 집은 더이상 신규 입소할 일본군‘위안부’ 피해자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피해 할머니를 더 모시겠다며 증축공사를 강행해 정원을 20명으로 늘렸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할머니의 물건들은 외부에 방치돼 장맛비를 맞았다. 이 중에는 강일출 할머니의 물건들도 있었지만, 다행히도 강일출 할머니의 물건들은 다른 할머니들의 물건에 비해 상대적으로 피해가 크지 않았다. 덕분에 강일출 할머니의 방은 직원들의 노력으로 비교적 빨리 복원되었지만 그 사이 할머니는 치매로 인해 자신의 방을 완전히 잊어버리셨다.

 

일본군‘위안부’운동과 할머니

우리 사회에서 일본군‘위안부’문제가 공론화된 지 벌써 30년이 지났고 해외 거주 피해자들이 국내에 돌아온 지도 어느덧 20여 년이 흘렀다. 그동안 수많은 시민단체와 정부 그리고 할머니들의 노력으로 일본군‘위안부’문제는 많은 성과를 이뤄냈다. 아직까지 일본 정부는 이 문제를 부인하고 있지만 국제 사회는 일본군‘위안부’문제가 일제가 저지른 중대한 전쟁범죄이자 인권침해라는 사실을 공유하고 있다.

지난 30여 년간 할머니들은 일본군‘위안부’문제를 국제 사회에 알리는 데 최선을 다했다. 할머니들은 노구를 이끌고 세계 각지를 돌아다니며 피해 사실을 알렸으며, 일본과의 소송도 불사했다. 또한 매주 수요일에는 일본대사관 앞에 앉아 일본 정부를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이 같은 할머니들의 희생으로 일본군‘위안부’문제를 포함한 일제의 반인륜성은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할머니들은 일본군'위안부'피해자라는 굴레를 넘어 우리사회를 위해 자신들이 할 수 있는 모든 역할을 다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할머니들이 일본군'위안부'피해자로서 가져야 할 역할에 대해서만 그 필요성을 강조하였을 뿐, 피해자가 아닌 박옥선, 이옥선, 강일출로서 가져야 할 권리와 역할에 대해서는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할머니들은 일본군'위안부'피해자의 삶을 살지 않았다.  할머니들은 피해자의 삶보다 누군가의 어머니와 할머니, 또 누군가의 친구 그리고 누군가의 박옥선, 이옥선, 강일출로 살아왔다. 지난 30년간 피해자로서 최선을 다한 할머니에 대한 우리사회의 보답은 이들을 피해자가 아닌 한 사람으로, 우리사회의 구성원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할머니들은 평범하지 않은 아픔을 겪었을 뿐 우리와 같은 평범한 사람이다.

  • 강일출 할머니의 방 ⓒ김대월
  • 강일출 할머니의 방 ⓒ김대월
  • 강일출 할머니의 방 ⓒ김대월
  • 강일출 할머니의 방 ⓒ김대월
  • 강일출 할머니의 방 ⓒ김대월
  • 강일출 할머니의 방 ⓒ김대월
  • 강일출 할머니의 방 ⓒ김대월
  • 강일출 할머니의 방 ⓒ김대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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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김대월

<나눔의집> 학예실장. 현재 국민대학교 국사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할머니의 내일 展>의 총괄 기획을 맡았으며, 일과 공부를 병행하는 가운데 틈틈이 본인의 경험을 살려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관한 특강을 하고 있다.

corea80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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