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의 방 -박옥선 할머니 편-

김대월나눔의집 학예실장

  • 게시일2020.12.08
  • 최종수정일2021.05.18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도 모른 채로


1980년대, 재일한국인들의 지문 날인 거부 운동과 일본 역사 교과서 파동 등으로 인해 한일관계는 급변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 일본은 자민당의 장기집권으로 인해 점차 우경화의 길로 접어들고 있었으며, 자신들에게 불리한 역사를 부정하려는 이른바 '역사수정주의'를 노골화 하였다. 이에 국내에서는 일본에 대항하는 민족정신이 강조되기 시작했다. 이 같은 사회 분위기는 가요 '독도는 우리 땅'의 대유행과 함께 독립기념관 건립으로 이어졌다. 또한 민주화에 대한 국민의 목소리가 점차 높아지면서 과거사 논의도 조금씩 활기를 띠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 1990년 1월 4일~24일, 한겨레 신문에 윤정옥의 「'정신대' 원혼 서린 발자취 취재기」가 4회에 걸쳐 연재되면서 한국 사회는 점차 '위안부' 문제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91년에는 故 김학순 할머니를 시작으로 많은 피해자가 증언과 피해 신고에 나서면서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에 대한 관심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이에 그들을 지원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시민사회를 중심으로 높아지기 시작하였고 한국 정부도 이에 대한 대책을 마련하기 시작하였다. 이로 인해 민간은 물론이고 정부 차원의 여러 지원책이 시행되었고, 대부분 힘겨웠던 피해자들의 삶은 조금이나마 나아질 수 있었다.

하지만 해방 이후 국내에 돌아오지 못한 피해자들의 상황은 '위안부' 문제가 공론화된 이후에도 달라진 게 없었다. 해외 거주 피해자들은 한국에서 '위안부' 문제가 공론화되었다는 사실 자체를 모르는 경우가 대다수였으며, 알았다 하더라도 한국 국적이 아니라는 이유로 피해자 등록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또한 국내에서 고조된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대한 관심에 비해 해외 거주 피해자들에 대한 관심은 상대적으로 적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 1994년부터 해외 거주 피해자들에 대한 실태 조사가 시작되어 2000년대 초반까지 수십 명의 피해자가 밝혀지게 되었고, 이 중에는 박옥선 할머니도 있었다.

박옥선 할머니는 1924년 경남 밀양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 큰오빠가 보증을 잘못 서 집이 빚으로 넘어가게 되었고, 이로 인해 아버지까지 화병으로 돌아가시게 되자 집안 형편이 급격히 기울어지게 되었다. 1941년 할머니가 18살이었던 해 할머니는 중국에 있는 방직공장에 가면 돈을 벌 수 있다는 친구의 말을 믿고 따라나섰다가 중국 흑룡강성에 있는 '위안소'로 끌려가게 되었다. 해방 직후 '위안소'에서 나올 수 있게 되었지만 '위안부' 피해를 당했다는 자괴감에 할머니는 고향으로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후 피난 도중 흑룡강성 목릉 근방에 있는 마을에 들렀다가 홀아비를 만나 혼인하고 그곳에 정착하였다.

2001년도에 할머니와 같은 마을에 살던 조선족 동포가 한국에 시집을 오게 됐다. 이때 이 동포가 자신이 살던 마을에 일본군'위안부' 피해자가 있다는 제보를 하게 되면서 박옥선 할머니의 존재가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시민단체의 노력으로 할머니를 찾을 수 있게 되었고, 할머니는 얼마 후 한 방송국의 도움으로 한국에 있는 남동생과 조카를 만날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가족을 찾은 할머니는 고향을 떠난 지 60년 만에 고국에 돌아올 수 있었다. 귀국 후 할머니는 서울의 동생 집과 조카 집을 오가며 생활하다 2002년 나눔의 집에 입소했다. 

박옥선 할머니는 온화하고 배려심이 많다. 평소에는 아주 점잖은 편이지만 노래를 너무 좋아하셔서 음악만 나오면 빼는 법 없이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시곤 한다. 한번은 자기소개를 해야 하는 상황이 있었는데 할머니는 자기소개 대신 노래를 불러 많은 사람을 당황하게 하기도 했다. 이옥선 할머니는 박옥선 할머니가 노래를 부르면 "박옥선이는 노래도 못하면서, 아무 데서나 노래를 해! 밥 먹는 데서도 하고…."라면서 가끔 박옥선 할머니에게 쏠리는 관심을 못마땅해하신다. 이에 반해 속리산 할머니는 "옛날에 이 형님(박옥선)이 노래를 잘한다고 사람들이 찾아와 노래를 해달라고 아주 사정을 했어. 참 잘했어!"라면서 박옥선 할머니의 노래 실력을 인정해주신다. 두 분의 말이 상반되지만 속리산 할머니의 말이 더 사실에 가깝다. 왜냐하면 박옥선 할머니는 2014년 KBS 특집방송에 출연해 아리랑을 무반주로 불러 객석을 눈물바다로 만든 이력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이다.

 

박옥선의 방




한편 박옥선 할머니는 나눔의 집 할머니들 사이에서 아주 깔끔한 분으로 소문이 나 있는데, 이는 할머니의 청결한 성격 때문이다. 그리고 이 같은 할머니의 성격은 할머니의 방에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할머니의 방은 나눔의 집 복도를 기준으로 오른쪽 두 번째 방이다. 할머니의 방을 기준으로 오른쪽 방은 일전에 소개한 속리산 할머니 방이고 건너편 방은 2017년 돌아가신 故 김군자 할머니의 방이다. 할머니의 방은 한마디로 깔끔 그 자체이다. 할머니는 나눔의 집에서 18년이라는 긴 세월을 보내셨지만, 워낙 깔끔한 성격 탓에 불필요한 물건이나 중복되는 물건이 거의 없다.

4평 남짓한 할머니의 방에는 오른편부터 장롱 2개와 4단으로 된 플라스틱 수납장이 있었고 방 끝에는 역시 후원받은 돌침대가 놓여 있었다. 한번은 할머니의 옷을 챙기기 위해 이 장롱을 열어본 적이 있었는데, 그 안의 옷들과 소품들이 계절별로 오와 열을 정확히 맞추고 있어 굉장히 놀랐던 기억이 있다. 정리정돈이 훌륭해서 놀란 것도 있지만 치매를 앓고 있는 할머니가 이렇게 정리정돈을 잘 할 수 있으셨다는 게 더 놀라웠다. 또 돌침대 위에는 창문이 하나 있었는데 그 창틀에는 할머니의 손주들 사진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방의 왼편에는 직사각형의 큰 액자가 세로로 걸려있었고 그 안에는 여러 장의 사진들이 모자이크처럼 붙여져 있었다. 사실 이렇게 큰 액자 안에 여러 사진을 붙여놓는 이 방식은 나눔의 집 할머니들의 공통된 양식이다. 근래에 나눔의 집에 오신 할머니들을 제외하고 2000년대 초반부터 나눔의 집에서 생활했던 할머니들은 모두 이와 같은 양식의 액자를 가지고 있었다. 이 이유가 궁금해 나름대로 알아보았지만 아직 그 답을 찾지는 못했다. 다음으로 액자 왼편에는 전신거울이 벽에 걸려있었고 또 그 왼쪽으로 나무로 된 3단 수납장이 있었다. 수납장 위에는 전화기와 TV 그리고 TV 리모컨이 있긴 했지만, 방에서 TV를 보는 할머니의 모습을 본 적은 거의 없다.

 


박옥선의 전신거울과 보행기




내가 기억하는 할머니는 보통 방보다는 거실에 많이 앉아 계셨다. 내 생각에 할머니가 사람들을 워낙 좋아하시다 보니 혼자 있는 것보다 여럿이 있는 걸 선호해서 그러시는 거 같았다. 가끔 강일출 할머니가 소란을 피우시거나 화를 내시면 할머니는 조용히 보행기를 끌고 방으로 들어가신다. 이럴 경우 보통 침대 앞까지 보행기를 끌고 가 앉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할머니는 좀 다르셨다. 할머니의 물건은 항상 지정된 자리가 정해져 있다. 이 중 보행기의 자리는 전신거울이 있는 벽이다. 그 때문에 할머니는 방에 들어갈 때는 전신거울 앞에 보행기를 두고 침대까지는 보행기 없이 걸어가신다. 가끔 할머니를 따라 들어가 "할머니 여기서 TV 볼까?"하고 리모컨을 가져와 TV를 틀었던 적이 있었는데 할머니는 이내 다시 리모컨을 원래 자리에 가져다 놓으셨다.

또 방 이곳저곳을 주시하다가 지정된 자리를 이탈한 물건이나 각도가 틀어진 물건들이 보이면 기어이 다시 제 위치로 정돈하시고 돌아오신다. 이에 대해 몇몇 사람들은 '위안소'에서의 피해가 할머니의 이런 성격을 만들었다고 종종 얘기하곤 했다. 하지만 그런 피해가 없어도 깔끔한 성격을 가진 사람은 많기 때문에 나는 꼭 그렇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속리산 할머니는 박옥선 할머니의 방을 보면 "참 이 형님은 방 청소도 깨끗하게 잘하고, 살림도 잘하고 다 잘 해!"라며 박옥선 할머니를 자주 치켜세워 주셨다.



박옥선의 파손된 장롱과 파란 보관상자



하지만 이 같이 깔끔하고 정리정돈이 잘되어 있던 방도 2019년 초 건강 악화로 인해 할머니가 침상 생활을 하시게 되자 주인 없는 방처럼 되었다. 여기에 증축공사 사태까지 더해지면서 할머니의 방에 남아있던 물건조차 모두 망가지게 되었다. 「이옥선 할머니의 방」편에서 언급하였지만, 당시 나눔의 집 운영진들은 생활관을 증축한다는 명분으로 할머니의 방을 무단으로 치우고 장마철에 할머니의 물건들을 야외 주차장에 쌓아두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내린 장맛비에 이 물건들은 모두 훼손되었는데, 이때 가장 큰 피해를 본 것이 박옥선 할머니의 물건들이다. 특히 나무 수납장은 아예 사용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이 훼손되었다. 

이옥선 할머니와 속리산 할머니의 경우 아직 인지가 또렷하신 편이고 또 방에 대한 자료도 많이 남아 있어 훼손된 방을 복원하기가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박옥선 할머니는 치매를 앓고 있어 방에 대한 기억을 묻기도 어려운 상황이었고 또 이상하게 다른 할머니에 비해 할머니의 방에 대한 자료는 사진 한 장이 전부였다. 여기에 물건들마저 훼손되어 아직 박옥선 할머니의 방만 복원하지 못하고 있다. 

2020년 할머니의 방 훼손이 발단이 되어 시작된 공익제보와 코로나 19로 인해 몇 달간 나눔의 집에서는 더 이상 증언하는 할머니의 모습을 볼 수 없게 되었다. 아마 나눔의 집이 생겨난 이후 처음 있는 일일 것이다. 이로 인해 할머니들에게도 작은 변화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먼저 할머니들에게서 '위안부', '위안소', '사죄와 배상' 등등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상징하는 단어들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 대신에 "바람 쐬러 가자", "김치를 담가야 한다.", "속리산에 가야 한다.", "왜 저 할머니 말은 다 들어주고 내 말은 안 들어 주냐?"는 등의 말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누군가에게는 의미 없는 변화일지 모르지만, 나에게는 아주 큰 충격이었다. 이 같은 변화를 보면서 왜 할머니들이 피해자화 되었는지 그 이유와 배경은 무엇인지에 대한 생각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지난 3년간 나눔의 집에서 할머니와 함께 생활하면서 느낀 점은 할머니는 어제(과거)와 내일(미래)보다 오늘(지금)을 위해 대부분의 에너지를 쓰고 있다는 점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현재와 미래를 위해 살아간다. 아마 과거를 위해 사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박옥선 할머니를 포함한 나눔의 집 할머니들 또한 마찬가지다. 할머니들이 과거를 붙잡고 계신 이유도 현재를 위해서다. 만약 할머니들이 과거를 붙잡지 않고도 현재와 미래를 그릴 수 있다는 걸 아셨다면, 또 그래야 한다는 우리 사회의 목소리가 있었다면 과연 할머니들은 인생의 마지막 한 꼭지를 나눔의 집에서 보내셨을까? 

박옥선 할머니의 방을 제외한 이옥선 할머니, 속리산 할머니, 故 김군자 할머니, 강일출 할머니의 방은 모두 복원되었다. 그리고 멀지 않아 박옥선 할머니의 방도 복원될 것이다. 할머니들의 방은 앞서 소개한 바와 같이 평범한 방이다. 하지만 그 방 주인들의 삶은 평범하지는 않았다. 평범하지 않은 삶을 살아온 사람들의 평범한 방. 나는 이 방을 통해 우리 사회가 할머니들을 어떻게 바라보았는지 또 그 시각이 할머니의 삶에 어떠한 영향을 주었는지 그리고 할머니의 실제 모습은 무엇이었는지에 대해 앞으로도 계속 이야기하고자 한다. 

 

Credit

일러스트 : 백정미
 

* 아래 사진은 2018년 10월 중 촬영한 박옥선 할머니의 방이다. 방 복원에 참고할 수 있는 유일한 사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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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김대월

<나눔의집> 학예실장. 현재 국민대학교 국사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할머니의 내일 展>의 총괄 기획을 맡았으며, 일과 공부를 병행하는 가운데 틈틈이 본인의 경험을 살려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관한 특강을 하고 있다.

corea80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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