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거 운동과 평화의 소녀상
“운동에 참여하고 나면 사람들은 더 이상 이전처럼 살지 않는다.”[1]
2011년 12월 14일 1000회 수요시위에서 제막된 평화의 소녀상이 올해로 열 돌을 맞이한다. 1000회 수요시위 이후 10년 동안 일본군‘위안부’를 기억하기 위한 소녀상이 전국적으로 다양한 장소에 만들어졌다. KBS데이터저널리즘팀이 제작한 소녀상 지도[2]를 통해 지역의 다양한 주체들이 세운 전국의 평화의 소녀상을 한눈에 볼 수 있다.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대한 백서도, 국가에서 운영하는 일본군‘위안부’ 역사관도 없는 한국에서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잊지 않기 위한 노력은 그간 피해자와 시민활동가들의 손으로 이루어져 왔다. 대구의 희움 일본군‘위안부’역사관의 경우, 개관을 위해 시 정부에 지원과 도움을 요청했을 때 도움을 받지 못했다. 평화의 소녀상 건립은 역사관까지는 건립할 수 없더라도, 내가 사는 지역에서도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를 기리고자 하는 열망들이 만들어 낸 것이다. 그리고 이 열망들이 모인 곳이 아마도 소녀상 지도 속의 장소들일 것이다.
평화의 소녀상을 만들기 위해 뜻을 함께할 사람을 찾고, 기금을 모으고, 시민들이 모이기 쉬워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알리기에 가장 좋은 장소를 찾고, 소녀상을 설치하는 것은 녹록한 일이 아니다. 부산의 일본 영사관 앞 평화의 소녀상 설치 당시에는 소녀상 설치를 위해 몸싸움을 불사한 활동가들이 있었다. 1000회 수요시위를 기념하며 주한 일본 대사관 앞에 세워진 평화의 소녀상은 이미 세워지기 이전부터 일본의 반대가 있었고,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가 사실상 파기된 지금도 소녀상 지킴이들의 활동이 이어지고 있다.
소녀상 설치를 위해 몸싸움을 불사했던 활동가들과 소녀상 지킴이들이 지킨 것은 단순히 사람 모양을 한 동상인가? 그렇지 않다. 이들이 지키고 있는 것은 평화의 소녀상이 만들어내는 ‘장소’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수요시위가 열리기 이전의 서울 종로구 ‘일본대사관 앞’은 사람들이 오가는 거리에 지나지 않았다. 20년간 수요시위 때 일주일에 한 번 피해생존자, 활동가, 시민들이 모였다 해산하는 곳이었다. 그곳에 일본군‘위안부’를 기리고 기억하는 평화의 소녀상(혹은 동상)이 세워졌다는 것은, 그 거리를 점거하고 목소리를 냈던 운동을 영구히 지속하겠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이제는 수요일이 아닌 날에 일본 대사관 앞을 지나도 반드시 소녀상을 볼 수밖에 없다. 어떤 이들은 매우 불편해할 것이고, 어떤 이들은 ‘아, 이곳이 그곳이구나’, ‘그 장소구나’하며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떠올릴 것이다. 이제 수요시위는 ‘일본대사관 앞’이라기보다 ‘일본대사관 앞 평화의 소녀상’에서 이루어진다. 수요일 12시에 잠깐 점거당하고 금방 일상의 거리로 돌아가곤 했던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2길 22라는 장소는 평화의 소녀상이 점거하게 되었다. 전국에 만들어진 평화의 소녀상이 단지 설치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기억과 행동의 장소가 된다는 점에서 시민들이 주도했던 평화의 소녀상 설치는 아큐파이 운동이기도 하다.
식민주의와 언아큐파이(unoccupy)
아큐파이(occupy)는 ‘점령(占領)’으로 번역되기도 한다. 일본 제국주의의 강제 점령기를 생각하면 ‘아큐파이’라는 단어는 제국주의와 식민주의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는 말이기도 하다. 전후 일본의 많은 지식인이 일본의 ‘전쟁 책임’에 대해 얘기해 왔지만, 이와 별개로 식민주의와 ‘식민지 책임’을 인식하는 문제 제기는 드물었다. 이러한 역사 속 일제강점기가 한반도가 점령(occupy)당했던 기억이라면 평화의 소녀상은 이러한 식민주의와 점령에 저항하고 문제를 제기하는 언아큐파이(unoccupy)에 대한 요구이기도 하다.
전국을 넘어 해외의 시민들까지 동참해온 평화의 소녀상 설치는 아큐파이 운동으로서의 의미를 가지는 동시에, 식민주의와 점령에 문제를 제기하는 언아큐파이(unoccupy)에 대한 요구 역시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아큐파이(occupy)는 동시에 언아큐파이(unocuupy, 점거해제, 해방)여야 한다는 아큐파이 운동의 역설적 과제[3]를 구현하고 있는 것이 평화의 소녀상을 둘러싼 일련의 활동이다.
김세진 씨의 『평화의 소녀상을 그리다』(보리, 2018)를 보면 많은 지역의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평화의 소녀상을 만들어 낸 일에 한번 놀라게 되고, 평화비를 설치할 의미 있는 장소를 찾았던 노력에 또 한 번 놀라게 된다. 식민지 시기 경찰서가 있었던 담양 중앙공원에 세워진 소녀상, 1919년 3․1운동의 만세 현장에 세워진 양평의 소녀상, 일본군 주둔지 - 미군 주둔지를 거쳐 시민에게 돌아온 인천의 부평공원에 세워진 소녀상, 식민지시기 강제노동의 현장이었던 광명동굴에 세워진 소녀상 등은 일제강점기 식민주의를 환기하고 역사의 망각에 저항하는 의미를 담고 있기도 하다. 이 장소들은 일제강점기(occupy)와 식민주의에 문제를 제기하는 ‘언아큐파이’(unoccupy)로서 평화의 소녀상을 대면하게 한다.
한편, 이는 이 글을 쓰고 있는 ‘나’ 역시 되돌아보게 한다. 가부장제와 가족주의, 군사주의와 성차별주의로 구성된 교육 시스템과 사회 시스템을 전제로 키워진 ‘나’의 삶이라는 것은 그 같은 시스템에 점령당한 삶이었을지도 모른다. 가부장제 속에서 딸의 역할과 여성의 역할을 받아들여 온 나,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식민주의의 역사와 구조에 대해 의문이 없었던 나는 어쩌면 이러한 것들이 유지되는데 기여해온 것과 다름없다. 평화의 소녀상이 이런 나에 대해 다시 인식하고 문제를 제기하게 한다면, 어쩌면 내 마음과 머릿속까지 언아큐파이(해방)하는 존재, 나를 구성해 온 시스템을 전복시키는 존재일지도 모른다. 평화의 소녀상과 해방된 관객의 정치적 자각과 활동이 지금까지 우리를 구성해 왔던 이데올로기와 담론을 거역[4]하고 부정하게끔 하는 것이다.
해방된 관객과 네트워킹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 반대 시위에서 퍼포먼스를 했던 어효은 씨의 「2주간의 소녀상 관찰기」는 “나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갔다. 나의 삶을 살았다. 소녀를 점점 잊어갔다. 다시 마주할 자격이 있을까.”라는 질문으로 시작한다. 여기서 ‘일상’이라는 것은 아마도 일본군‘위안부’ 문제와 관계가 없는 개인적인 시간으로서의 ‘일상’일 것이다. 어효은 씨는 일상으로 돌아간 자신이 일본군‘위안부’를 다시 마주할 ‘자격’이 있을까 묻는다. 그러나 어효은 씨가 돌아갔다고 하는 그 ‘일상’은 12·28 한일 ‘위안부’ 합의 반대 시위에서 퍼포먼스를 하기 전의 그 ‘일상’이라고 할 수 있을까? 아마도 아닐 것이다.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 반대 운동의 성과는 정권을 교체하고 바뀐 정권이 합의를 검토하고 화해치유재단을 해산한 것에 있지 않다. 운동의 성과를 말해야 한다면 그것은 무엇보다 거기에 참여한 이들의 변신[5]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평화의 소녀상을 전국에 만들었던/만들고 있는 사람들, 평화의 소녀상에서 함께 했던 세월호 유가족들, 일본 오키나와의 헤노코 기지 반대 운동을 하는 활동가들, 기지촌 여성 운동 활동가들, 반전 평화 운동가들이 연대하고, 발언을 듣기 위해 귀를 열고, 문제 제기에 입을 열었다. 이처럼 다양한 운동에 참여한 사람들의 몸은 그 이전의 몸과 같은 몸이라고 할 수 없다.
구글 검색창에서 ‘소녀상’과 ‘평화비’를 검색해 보면, 이제 적어도 검색된 첫 페이지에는 모두 ‘평화의 소녀상’ 혹은 일본군‘위안부’와 관련된 기사와 페이지가 나온다. 검색 엔진에서조차 평화비나 소녀상이라는 단어는 일본군‘위안부’와 따로 생각할 수 없게 된 단어가 된 것이다. 반세기 동안 일본군‘위안부’ 피해를 말할 수조차 없었던 사회를 구성하는 언어의 질서와 문법(에피스테메)이 이제 겨우 조금씩 바뀌고 있음을 검색 엔진이 가장 먼저 보여주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운동의 성과가 있다면 그것은 운동한다는 사실, 변화가 일어난다는 사실 그 자체에 있다.[6]
웹진 <결>에서 인터뷰한 김세진 씨는 각 지역의 소녀상 건립추진위원회 간에는 네트워크가 없었고, 어느 지역을 가도 비슷한 시행착오를 겪고 있어 자신이 우연히 네트워킹하는 역할을 맡게 되기도 했다고 말한다. 많은 사람이 『평화의 소녀상을 그리다』를 보고 가까운 평화비를 찾아가 보기도 하고, 집회의 장소로 활용하기도 한다. 김세진 씨가 한 일은 단지 ‘소녀상 그림을 그리다’가 아니라, 평화비를 만드는 움직임과 마주하고, 이어주는 일이었다. 한반도에 나비로 표시된 ‘소녀상 지도’를 보면, 일본에서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위해 활동해 온 ‘액티브 뮤지엄 여성들을 위한 전쟁과 평화 자료관(WAM, Women's Active Museum on war and peace)’의 ‘위안소 지도’[7]가 떠오른다. 아시아태평양 각지, 일본의 군인이 점령하는 곳마다 만들었던 ‘위안소’의 위치를 표시한 지도와 그 ‘위안소’ 피해자들의 목소리와 역사가 기록되는 소녀상(평화비) 지도가 드러내는 것이 단지 ‘지도’ 자체만은 아닐 것이다.
때때로 급박하게 진행되는 운동은 사실 변화를 위해 지루하고 긴 시간을 투쟁하는 일이다. 이른바 1987년 이후의 ‘민주화’에 젠더와 인종이 삭제되어 있었음을 꾸준히 문제 제기한 결과 이를 확인하고 감각하는 2019년과 2020년. 평화의 소녀상에서 또 어떤 의제들이 논의될까. 우리는 또 어떻게 바뀌어 갈까.
각주
- ^ 고병권, 『점거, 새로운 거버먼트』, 그린비출판사, 2012, 221쪽.
- ^ KBS데이터저널리즘팀은 2017년 이후 전국 소녀상 지도를 제작하고, 이후 매년 새롭게 세워지는 소녀상을 지도에 업데이트하고 있다.
- ^ 고병권, 앞의 책, 231쪽.
- ^ Vicki Sung-yeon Kwon, “The Sonyŏsang Phenomenon: Nationalism and Feminism Surrounding the "Comfort Women" Statue,” Korean Studies 43 (2019): 28.
- ^ 고병권, 앞의 책, 113쪽.
- ^ 고병권, 앞의 책, 113쪽.
- ^ https://wam-peace.org/ianjo/map/
연결되는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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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국의 소녀상을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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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방방곡곡을 다니면서 75개의 평화의 소녀상을 그린 김세진 작가는 그 누구보다 많은 수의 소녀상을 자세히 관찰한 사람이다. 그와의 인터뷰를 통해 현재 소녀상이 우리에게 주는 메세지에 대해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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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주간의 소녀상 관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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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수많은 사람이 오고 가는 왕십리광장에는 4개의 평화의 소녀상이 자리하고 있다. 이 에세이는 4개의 평화의 소녀상을 보고 느낀 2주간의 관찰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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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장수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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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대학교 한국어문학과 강사. 일본군‘위안부’ 서사에 관해 연구하고 있다. 관련 논문으로는 「정동적 전회와 증언의 쓰기」, 「중첩되는 전쟁과 망각되는 일본군‘위안부’ 서사」 등이 있다. 번역으로는 「제국의 성관리 정책과 인신매매」(송연옥), 「오키나와현 평화기념자료관 전시조작 사건 재고」(타마시로 후쿠코)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