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의 소녀상을 바라보는 시각은 다양하다. 누군가는 과거사 문제를 의제화하는 사회예술로의 가치가 있다고 말하고, 누군가는 소녀상이 ‘위안부' 문제를 다루는 소통의 매개체 역할을 한다고 말한다. 한편에서는 소녀상으로 인해 '위안부' 피해자들이 연약한 소녀의 모습으로만 각인되고 소녀와 할머니 사이의 시간이 사라지며, 피해자들이 가지고 있는 다양한 이미지를 대변하지 못한다고 비판하기도 한다. 이렇게 다양한 시각이 존재하는 까닭은 평화의 소녀상이 ‘위안부' 문제를 표상하는 대표적인 상징으로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소녀상은 ‘위안부' 문제가 불거질 때마다 함께 소환된다. 소녀상은 현재를 사는 우리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하고 있을까.
웹진 <결>은 소녀상을 직접 관찰한 두 사람의 이야기를 통해 소녀상의 의미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보는 계기를 마련했다. 누구보다 많은 소녀상을 자세히 관찰한 김세진 작가와의 인터뷰, 그리고 2016년 '효녀연합'으로 활동했던 어효은 작가가 하나의 소녀상을 2주간 관찰하고 느낀 바를 적은 에세이를 준비했다. 두 개의 글을 읽은 독자들이 소녀상을 바라보는 각자의 시각을 갖추기를 기대한다
1. [인터뷰] 김세진 - 전국의 소녀상을 만나다
2. [에세이] 어효은 - 2주간의 소녀상 관찰기
다시 마주할 자격이 있을까
'약 2주간 소녀상을 관찰하고 에세이를 작성하는 일이 있는데, 할 수 있을까?'
에세이 기고 제안을 받았을 당시 해보고 싶은 마음과 무겁고 걱정되는 마음이 함께 올라왔다. 사랑, 감정, 경험, 관계, 일 등 다양한 소재로 에세이를 써왔지만 모두 내가 경험한 것들에 대해 쓴 글이었다. 소녀상을 바라보며 아픈 역사를 기억하자는 말을 할 수 있지만, 일본군 성노예제 피해자분들의 마음을 헤아릴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고 생각했다. 눈물을 흘렸고 가슴도 아팠지만 그건 나의 삶이 아니었다. 어떤 글을 어떻게 쓸 수 있을까. 소녀상을 더 많은 사람에게 알리고 싶은 마음과 해보지 않은 일에 대해 시도해본다는 생각 속에 생계 활동의 일환을 이유로 작업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곧 나는 이 작업을 몇 번이고 포기할 뻔했다.
몇 년 전 동료와 함께 12・28 한일 ‘위안부’ 합의 반대 시위에서 일본대사관 맞은편 소녀상을 지키며 함께 싸웠다. 오랜 기간 연극을 해 온 나는 무작정 퍼포먼스를 만들어 동료들과 함께 거리 공연을 했다. 많은 사람에게 상황을 알리고 싶었고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소녀가 되어 울분에 차 소리치고 분노했다. 추위보다도 견디기 힘든 것은 아픔에 마주하며 분노하는 마음이었다. 몸과 마음이 아팠다. 시간은 흘러 유난히도 길었던 겨울이 지나가고 따뜻한 봄이 왔다. 나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갔다. 나의 삶을 살았다. 소녀를 점점 잊어갔다.
다시 마주할 자격이 있을까. 어쩌면 만회할 기회가 주어진 것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미안한 마음을 안고 소녀를 만나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왕십리광장의 평화의 소녀상
약 2주간의 기간을 두고 소녀상을 관찰했다. 내가 관찰한 소녀상은 서울 왕십리역에 있는 성동구 평화의 소녀상이다. 왕십리역은 여러 호선이 겹치는 역이라 유동인구가 많은 곳이다. 많은 사람이 소녀를 스쳐 간다.
평화의 소녀상은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 해결을 위한 수요시위 1,000회를 맞은 2011년 12월 14일,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가 중심이 된 시민 모금으로 서울 종로구 일본대사관 앞에 처음 세워졌다. 일본군 성노예제 피해자분들이 일본군에 끌려가 말로 다 할 수 없는 고통을 겪던 14~16세 때 모습을 재현해 만들었다.
성동구 평화의 소녀상 건립은 일본군 성노예제 피해자의 인권과 명예 회복뿐 아니라 미래세대인 청소년이 아픈 과거를 잊지 않도록 역사적 교훈을 남기고자 지역 내 초·중·고교 학부모들이 주축이 되어 추진되었다. 지난 2017년 2월부터 뜻을 함께한 학부모들이 모여 성동평화의 소녀상 건립추진위원회를 만들었다. 건립 모금 바자회, 소녀상 배지 제작 등을 통해 두 달 만에 학생, 구민 등 1,000여 명으로부터 6,000만 원에 가까운 기금을 모금했고 그해 6월 10일 왕십리광장에 소녀상이 건립되었다.
광장에는 네 개의 동상이 함께 세워져 있다. 인도 맞은편에는 뜯긴 듯한 단발머리를 한 소녀가 의자에 앉아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왼 어깨 위에 새가 앉아있다. 옆에는 빈 의자가 놓여있다. 오른편에는 비둘기를 한 손으로 높이 들어 올리고 있는 소녀가 서 있다. 금방이라도 함께 날아오를 듯하다. 의자에 앉아있는 소녀와 비둘기를 들어 올린 소녀 사이에 측면을 바라보며 앉아있는 소녀가 있다. 무릎을 감싸 안고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길 쪽에서 바라보았을 때는 뒷모습이 보인다. 마지막 동상은 소녀가 아닌 할머니의 모습이다. 광장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야만 할머니의 얼굴을 볼 수 있다. 김학순 할머니다.
김학순 할머니는 1991년 8월 14일, 한국에서 일본군 성노예제 피해자 사실을 최초로 공개 증언하고 일본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할머니의 공개 증언 이후 국내 성노예제 피해자들의 목소리가 연이어 터져 나왔고 필리핀, 네덜란드 등 세계 각지의 일본군 성노예제 피해자들의 증언이 이어졌다. 왕십리광장에 있는 김학순 할머니 동상 옆에는 할머니의 사진과 글이 함께 세워져 있다.
잊어서 미안해요
성동구에 4년째 살고 있는 나는 왕십리광장을 수십 번도 넘게 지나쳤다. 소녀상의 존재를 당연히 알고 있었고 사람이 많이 오가는 장소에 세워졌다는 것에 감사함과 자부심을 느꼈다. 네 개의 평화의 소녀상이 한 곳에서 강한 에너지를 뿜어내 모두들 한 번쯤은 쳐다보고 지나치게 된다. 자발적으로 자원하여 소녀상 지킴이를 하고 있는 청소년은 소녀에게 겨울엔 모자와 목도리를, 크리스마스엔 예쁜 머리띠를 해준다. 지금은 현대를 살아가는 여느 소녀같이 분홍색 후드티를 입고, 어여쁜 꽃 마스크를 쓰고 있다. 따뜻한 마음이 느껴진다.
첫날은 동상 하나하나를 세심하게 살펴보았다. 이렇게 자세히 들여다본 적이 없었기에 생소한 느낌이 들었다. 가까이 다가가 가만히 소녀의 두 눈을 응시했다. 눈물이 고여 있었다.
'잊어서 미안해요.' 속으로 말을 건넸다.
마주하고 싶지 않아
아무도 곁에 없고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을 때의 심정은 어땠을까. 평생 트라우마를 짊어지고 제대로 된 사과와 치유를 받지 못한 채 살아오신 분들을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다. 김학순 할머니 동상을 보면서 투쟁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나는 작년 1월, 트라우마 상담을 받았다. 과거의 상처는 끈질기게 일상을 가로막고 나를 절벽 아래로 끌어내렸다. 누구도 만날 수 없었고 어떤 일도 할 수 없었다. 사람들에게 인정과 사랑을 받길 원했지만 어떻게 사랑해야 하고 받아야 하는지 몰랐다. 어린 시절 마음에 생겨버린 구멍은 그 무엇으로도 메울 수 없을 것 같았다. 평생을 짊어지고 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자 살고 싶지 않았다. 죽는 것은 더 두려웠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상담소를 찾았다.
상담하며 내면에 있던 어린 시절의 나를 만났다. 아팠던 그 날의 기억들이 떠올라 많이도 울었다. 이제는 괜찮아졌다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나는 상처 가득한 어린아이였다. 일일이 나열하기 힘든 사건들. 이제는 괜찮다고 다 지난 일이라고 생각하려 해도 어쩔 수 없이 비집고 나오는 납덩이 같은 감정들. 다시 마주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남에게 이야기한다는 것은 더 어렵게 느껴졌다. 일본군 성노예제 피해자분들은 그렇게 끔찍한 일을 겪고도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그러니 그 한이 얼마나 깊게 뭉쳐있을까.
소녀를 만나러 갈 때마다 잊고 있었던 사건들이 하나, 둘 떠올랐다. 아픈 과거를 외면하고 싶은 마음이 소녀에게 투사되었다.
'보고 싶지 않아', '마주하고 싶지 않아', '다 없었던 일이었으면 좋겠어', '그냥 나도 남들처럼 행복한 어린 시절을 갖고 싶었을 뿐인데, 왜', '더는 떠올리고 싶지 않아.'
그렇지만 분명히 일어난 일이었고 과거는 바꿀 수 없는 것이었다. 외면하고 싶은 마음을 안은 채 거리를 두고 소녀를 찾아갔다. 새로운 형태를 발견하고 기록했다. 동상에 꽃이 놓여있거나 동상의 발뒤꿈치가 들려있는 모습을 본 것 등이었다. 하지만 무언가 더 깊게 느껴지려고 하면 차단했다.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봤다. 무심히 지나가는 사람들도 있었고 소녀상을 바라보며 잠시 멈춰선 사람들도 있었다.
소녀의 아픔은 나의 아픔이다
늦은 밤 소녀를 찾았다. 그날따라 기운이 없어서 차가운 돌 벤치 위에 앉아 가만히 동상을 응시했다. 그러다 문득 같은 감정을 공유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너는 너, 나는 나'라는 생각에서 '너도 아프고 나도 아프구나.'라는 생각이 올라왔다. 나의 아픔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니 소녀의 아픔이 나와 다르지 않다는 걸 알게 됐다. 소녀의 아픔은 나의 아픔이기도 한 것이었다. 순간 울컥하고 마음 안에서 무언가가 솟구쳐 올라왔다.
'누군가 이야기를 들어주길 바랐구나. 함께 공감해주고 따듯하게 안아주길 바랐구나. 끔찍한 만행을 저지른 가해자들의 진심 어린 사과를 바랐구나. 마음에 쌓인 울분을 참을 대로 참아 결국은 화산이 폭발하듯 터져 나온 것이구나.'
자신의 깊은 상처를 타인에게 이야기하고 가해자에게 사과를 받으려고 목소리를 내는 행동이 얼마나 용기 있는 행동인가. 나는 지금도 용기가 없다. 고작 여섯 살 정도였던 아이의 성기를 더러운 손으로 만지던 아빠의 지인, 어린아이가 울자 입안에 혀를 밀어 넣었던 삼촌, 초등학교 1학년 아이에게 코피가 날 정도로 뺨을 때리던 남교사, 그 밖에 일일이 입에 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들.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고 다시 마주치고 싶지도 않다. 나는 행복하지 않았다. 행복해지고 싶었고 차가운 공간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외면하고 도망치고 싶었다. 그러나 아무리 보이지 않게 묻어두려 해도 한 번 깊이 파인 상처는 남아있는 것이었다. 덮을수록 곪아서 결국엔 터지고 마는.
상처를 다시 꺼내어 투쟁하는 삶이란 마치 매일 전쟁을 치르듯이 살아내는 삶이라는 생각을 했다. 피해자들은 여전히 외치고 있다. 우리는 그 이야기를 들어야만 한다.
소녀는 친구였다
소녀상을 관찰하던 중 인상적인 장면이 있었다. 마치 관찰카메라 프로그램 피디가 된 기분이었다. 지나가던 한 행인이 멈춰 서서 소녀에게 다가왔다. 그러더니 내려간 소녀의 마스크를 다시 묶어주었다. 마음이 따듯해지는 것을 느꼈다. 조심스럽게 사진을 찍어도 괜찮냐고 묻자 쑥스러워하며 인사를 하고 빠른 걸음으로 멀어져갔다. 관심 어린 손길이 고맙고 소중하게 느껴졌다.
또 한 장면은 다섯 살 정도로 보이는 여자아이가 엄마와 함께 걸어오다가 소녀상을 향해 나비처럼 날듯이 달려오는 모습이었다. 보기만 해도 미소가 지어지는 사랑스러운 아이는 밝게 웃으며 맑은 목소리로 “안녕~”하고 소녀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가슴이 벅차올랐다. 아픔을 투사하는 대상도 아니었고 외면하고 안쓰러워할 존재도 아니었다. 순수한 아이에게 소녀는 친구였다.
마음에 새겨진 아픔을 어떻게 치유할 수 있을까. 기억하는 것, 행동하는 것 그리고 사랑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너이기도 하고 나이기도 한 존재를 기억하고 사랑하면 좋겠다. 누군가는 공감하며 아파하고 누군가는 묵묵하게 곁에 있고 누군가는 분노하며 투쟁하고 누군가는 아이같이 반갑게 인사하는, 저마다의 방식으로 행동하면 좋겠다.
포기할 뻔했던 집필을 마치며 그 자리 그곳에서 많은 이야기를 들려준 소녀에게 고맙다.
소녀상
나는 본다.
그날의 기억을.
나는 본다.
상대의 두 눈을.
한 치의 부끄러움도 없이 떳떳한 마음으로.
나는 본다.
아픔을 숨기지 않는다.
뜨거운 눈물을 두 눈 가득 담고서 나는 본다.
Credit
글/사진 : 어효은
편집 : 현승인
연결되는 글
-
- 전국의 소녀상을 만나다
-
전국 방방곡곡을 다니면서 75개의 평화의 소녀상을 그린 김세진 작가는 그 누구보다 많은 수의 소녀상을 자세히 관찰한 사람이다. 그와의 인터뷰를 통해 현재 소녀상이 우리에게 주는 메세지에 대해 생각해본다.
- 글쓴이 어효은
-
시골 바다마을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도시(서울) 생활 5년 차, 배우 및 퍼포머로 활동하다 현재 '별짓' 커뮤니티에서 글쓰기 모임을 운영하고, 독서, 텃밭, 예술 놀이 프로그램 등에 참여하고 있다. '서울잡스'에서 기자 및 촉진자로도 일하고 있다. 과거의 상처로 인한 괴로움을 극복하고자 매일 108배와 명상을 한다. 나를 탐구하며 소중한 존재들과 함께 여행하듯 살아가고 싶다.
lovewill333@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