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은 어떻게 하이난도(海南島)에 위안소를 세우고 ‘위안부’를 동원하였나

최종길원광대학교 HK연구교수

  • 게시일2020.08.31
  • 최종수정일2024.11.07

일본은 어떻게 하이난도(海南島)에 위안소를 세우고 '위안부'를 동원하였나

현재 일본군'위안부' 문제와 관련하여 남아 있는 중요한 논쟁은 위안소 설치와 운영 및 '위안부' 동원에 일본 정부가 직접 관련되었는지와 강제성이 있었는지 여부이다. 일본 정부는 1992년 1월 12일 가토 고이치(加藤紘一) 관방장관의 발표와 1993년 8월 4일의 고노 요헤이(河野洋平) 관방장관의 발표를 통해 군과 정부의 직접 관련성 및 강제성을 인정했다. 그러나 일본의 우파들은 일본군이나 일본 정부가 직접 위안소 설치를 명령한 문서가 발견되지 않았으니 일본 정부의 직접 관련성은 없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일본군이나 정부가 '위안부' 동원에 관여하지 않았으며 민간업자들이 불법적인 수단을 사용하여 '위안부'를 모집하였을 뿐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주장을 수용한 아베 정부는 이전의 일본 정부가 인정한 사실을 부정하고 있다.

그러나 타이완척식주식회사(이하 타이완척식)이 작성한 일본군'위안부' 관련 자료는 일본군이 하이난도(海南島)를 점령한 이후 타이완총독부와 민간업자를 활용하여 위안소를 설치하고 '위안부'를 모집하는 데에 관여한 사실을 잘 보여준다. 이들 자료는 1939년 3월 17일부터 1943년 8월 5일 사이에 작성된 60여 종류 328페이지 분량에 이르는 방대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관련 자료들은 타이완의 타이완성문헌위원회에 소장되어 있다. 

이번 글에서는 이 가운데 아래 자료들을 중심으로 살펴보겠다. 

● 業務部長, 「海南島バラック建築ノ件」,1939.3.29. 파일번호 J_tw_002.
● 「海南島海軍慰安所ノ件」, 1939.4.4, 파일번호 J_tw_005.
● 台拓社長, 「海南島調査隊用並ニ軍用資材供給ノ件」, 1939.4.21, 파일번호 J_tw_010.
● 台拓事業課長大西文一, 「人員並ニ物資輸送ノ件」, 1939.5.9, 파일번호 J_tw_015.
● 営業部調査課長, 「海南島慰安所営業資金貸付ノ件」, 1939.5.6. 파일번호 J_tw_014.
● 台拓事業課長, 「海南島建築事業ニ係ル件」, 1939.5.11, 파일번호 J_tw_016.
● 南支課長, 「建築事業進捗状況ニ関スル件」, 1939.8.16, 파일번호 J_tw_032.
● 海口事務所長, 「建築事業進捗状況ニ関スル件」, 1939.9.14, 파일번호 J_tw_034.


타이완척식이 작성한 일본군'위안부' 관련 문서는 다음의 2가지 측면에서 '위안부' 연구에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첫째, 1939년 이후 일본군의 전선이 중국을 넘어 동남아시아, 태평양 등 남방으로 확대되면서 대륙의 위안소 설치 운영 방식을 섬에 그대로 적용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일본이 이들 지역에 어떻게 위안소를 설치하고 운영하였는지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라는 점이다. 둘째, 이 문서들은 일본군, 일본의 정부 기관, 국책회사, 민간업자가 어떠한 관계를 맺으면서 위안소의 설치와 운영에 서로 관련되어 있는지를 파악하는데 중요한 내용을 제공한다. 다른 지역으로 군부대가 이동하면 군인들의 수요를 대체할 수 있는 민간인들이 거의 없는 섬 지역에서는 위안소 운영의 수익성이 현저히 떨어진다. 이런 곳에서 민간업자들이 위안소를 운영했다는 사실은 그것이 민간의 위안소 업자들이 자발적으로 나선 경제행위가 아니라 군의 위탁일 수밖에 없음을 보여준다. 타이완척식이 작성한 '위안부' 관련 문서는 남방에서 이루어진 일본군 위안소의 설치와 운영에 국가 기관과 민간인 업자들이 긴밀한 유착관계를 형성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뒷받침하는 구체적인 증거인 것이다. 

 

1. 복대공사(福大公司)의 '위안부' 모집

1938년 10월 일본군이 광둥(廣東)을 침공하자 광둥의 정세 악화를 염려한 중국은 하이난도 주둔군을 광둥으로 이동시켜 일본군의 침략에 대응하였다. 그러자 1939년 2월 일본군은 중국에 대한 해상봉쇄를 강화하고 하이난도에 군 작전기지를 설치해 남진정책을 추진하기 위하여 방어력이 약해진 하이난도를 점령하였다. 일본군이 하이난도를 점령하고 여기에 주둔하면서 하이난도에 위안소를 설립하는 문제가 대두된다.


이러한 상황을 잘 보여주는 것이 타이완척식의 업무부장이 타이완총독부의 나가세 촉탁에게 보낸 1939년 3월 29일 자 문서이다.[1] 여기에는 "군 정보부장이 이 지역 해군 무관실을 통해 우리 회사에" "요리점 및 위안대 관계자 각 20명을 수용할 수 있는 막사 건축 2동(건평 각 53평 반)"을 지어달라고 한 내용이 적시되어 있다. 이 문서의 수·발신 관계를 역으로 읽으면 하이난도를 점령한 일본군이 하이난도에 위안소 설치를 결정하고 그 구체적인 사항을 타이완총독부를 통해 타이완척식에 의뢰한 사실이 밝혀진다.

이 문서의 작성으로부터 약 1주일 정도가 지난 1939년 4월 4일 자 문서[2]에는 타이완총독부의 기하라 조사과장이 타이완척식의 다카야마 이사에게 "예기 10명, 예기 겸 창기 30명, 창기 50명을 공급"해달라고 의뢰한 내용이 있다. 타이완총독부의 이러한 요청에 따라 타이완척식은 기존의 예·창기업에 종사하고 있던 "가케츠(花月)와 다케노야(竹之家)란 업소를 통해" 우선 "예창기 10명을 파견하고" 여기에 필요한 자금 "3만 엔"까지 빌렸다. 동시에 타이완척식은 일본군'위안부' 문제와 관련된 업무를 자신들의 이름으로 직접 "취급하는 것은 여러 가지로 좋지 않으므로 우선 복대공사(福大公司)에 별도로 대부"하는 등 직접적인 관련성을 감추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이처럼 타이완척식은 타이완총독부를 통해 전달된 군의 '위안부' 공급 의뢰에 대해 우선 급한 대로 10명의 예·창기를 파견하였고, 이후 1939년 4월 6일에는 복대공사와 하이난도에서의 위안소 운영에 관한 정식계약을 체결하였다. 타이완척식 사장이 작성한 문서[3]에 의하면, 이후 복대공사는 타이완 각지에서 '위안부'를 모집하여 1939년 4월 18일 기륭(基隆)항을 출발하는 타이완척식 소유의 긴레이마루(金令丸) 선박을 통해 예기 4명, 작부 7명, 관계자 8명을 하이난도로 데리고 온다. 타이완척식과 복대공사 간 정식계약 체결일이 1939년 4월 6일임을 고려하면, 계약 후 12일 만에 사람을 모집하고 도항 절차를 모두 마친 후 여성과 관계자를 배에 태워 이동시킨 것이다. 복대공사가 계약체결 이후 발 빠르게 움직였다고 하더라도 촉박한 시간이다. 이렇게 '신속한' 업무 진행이 가능했던 것은 '위안부'의 모집과 도항에 관한 사항은 군의 요청에 의한 것이었으며 국가의 행정기관인 총독부를 통해 의뢰된 업무라 관련 기관이 긴밀하게 협조한 결과라 판단된다. 특히 기륭항을 통해 출발한 도항자 명부에는 1922년 11월 5일 생으로 1939년 당시 17세였던 우사미(宇佐美)라는 여성도 포함되어 있는데[4], 이처럼 미성년자를 풍속업(매춘업)에 종사시키기 위해 도항시키는 것은 당시 일본의 국내법으로도 불법이었다. 그럼에도 미성년자를 모집하고, 승선자 명부에 이를 기록하여 도항할 수 있었던 것은 경찰과 외무성 등 관련 기관의 협조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이어서 타이완척식의 사업과장이 총독부 임시 남지조사국 이사장에게 보낸 1939년 5월 9일 자 문서[5]를 보자. 이 문서는 "해군 무관실이 타이완총독부를 통해 조회한 건에 관하여 별지대로 수배를 마치"고 "산야(三亞)방면으로 향하는 특요원 10인 1조(5월 23일 긴레이마루 선박으로 출항예정)"를 하이난도로 도항시킬 예정이라는 사실을 적시하고 있다. 문서의 뒤쪽에 산야방면행 특요원 명부가 붙어있는데 이 명부에는 작부 8명과 관련자 6명 등 총 14명의 이름, 본적, 현주소, 출생일이 기록되어 있다. 작부 가운데에는 1916년 9월 17일생으로 당시 23세였던 경상북도 안동군 출신의 조선인도 있다.[6] 이처럼 복대공사는 여러 행정기관의 협조를 통해 '위안부'를 하이난도로 도항시키는 일을 적극적으로 담당하였다. 

 

2. 해남건물공사(海南建物公司)의 위안소 건설

타이완척식은 위안소 운영과 '위안부' 모집을 복대공사에 위임한 것과 동일하게 위안소 건설  업무 역시 별도의 회사를 설립하여 위임한다. 이를 위해 하이난도에 필요한 건축사업을 진척시키기 위한 대책 회의가 1939년 4월 25일과 26일 양일간 타이완척식의 사장 저택에서 이루어졌다. 이 회의에 타이완척식에서는 사장, 구사카(日下) 이사, 오니시(大西) 과장이, 총독부에서는 나가세 촉탁이 참가하였다. 회의를 통해 "하이난도에서의 건축사업은 해남건물공사의 이름 하에 독립회사로 영업한다. 단 법률상의 의미로 별도의 회사를 설립하는 것은 아니며 실제로 우리 회사의 사업 일부에 지나지 않지만 사업경영의 편의상 회사를 독립시켜 해남건물공사의 이름을 사용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이 회의내용을 기록한 문서[7]에는 해남건물공사의 담당 업무가 나열되어 있는데 그 가운데 "이미 다무라 구미(田村組)에 하청을 준 해군 위안대용 막사 및 해군조사대용 막사"는 "공사 완성 후 해군에서 대금을 받는다"는 내용이 적시되어 있다. 그리고 이 회의내용은 타이완척식의 도쿄지점장, 중국 광둥의 모리 참사, 하이커우(海口)에 있는 총독부 나가세 촉탁에게 보고되었다. 

위안소 완공 이후 그 대금을 해군에서 받는다고 명시한 것으로 보아 위안소 건설업무의 원 발주처는 해군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즉 해군이 총독부를 통해 위안소 건설을 위촉하자 총독부는 이를 다시 타이완척식에 위촉했고, 위안소 건설을 위촉받은 타이완척식은 해남건물공사를 설립하여 이 업무를 담당하게 한 것이다.

이후 해남건물공사를 통한 위안소 건설은 예정대로 진척되었고 타이완척식은 이러한 상황을 원래 사업 의뢰 기관인 타이완총독부와 해군에 보고했다. 1939년 5월 11일자로 타이완척식의 오니시(大西) 사업과장이 타이완총독부 남지조사국과 해군 무관실로 보낸 문서[8]에는 완성된 건축물에 대한 상세 정보와 함께 "해군 위안소 총건평 291평(대소) 5동 준공예정 5월 20일"이라는 준공 계획이 담겨 있다. 이 내용은 앞에서 살펴본 1939년 3월 29일 자 위안소 건축 관련 문서에 적시된 '요리점 및 위안대 관계자 각 20명을 수용할 수 있는 막사 건축 2동(건평 각 53평반)'과는 서로 다른 건물이라고 판단된다. 

타이완척식에서 건축업무를 위임받은 해남건물공사는 다무라 구미에게 건축 실무를 담당하게 하여 위안소 건물을 완공하였다. 그러나 공사 진행 과정 중 회의를 통해 '공사 완성 후 해군에서 대금을' 지불하기로 결정했으나, 다무라 구미가 공사를 마친 후에도 공사대금은 지불되지 않았다. 사정이 이렇게 되자 1939년 8월 16일자로 타이완척식의 남지과장이 총독부의 하이커우 사무소장 앞으로 공사대금 미지급문제와 관련된 회신을 요청하는 문서[9]를 보낸다. 여기에 대하여 하이커우 사무소장은 "해군위안소 건물의 하명은 기술자가 없어" "다무라 구미의 기술자에게 설계 및 그 외의 것을 시행한 것으로"  "당시 군의 예산이 없었기 때문에 해군 위안소로 사용할 수 있는 건물을 타이완척식이 건설해주는(서비스의 의미) 의뢰를 받았기 때문에"[10] 등과 같은 답변을 하면서 해군이 대금을 주지 않으므로 위안소 건물을 타이완척식 소유로 하여 대금을 변제할 수밖에 없다는 대안을 제시한다.

 위의 내용을 종합하여 도식화하면 다음과 같다. 


즉, 타이완척식이 작성한 자료의 분석을 통해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 수 있다. 일본군이 위안소 건설과 운영 및 '위안부' 모집 업무를 타이완총독부에 의뢰하자 총독부는 이를 다시 타이완척식에게 의뢰했다. 타이완척식은 해남건물공사에게 위안소 건설업무를 담당시키고, 복대공사에게는 '위안부' 모집과 위안소 운영 업무를 맡겼다. 특히 타이완척식은 본인들이 '위안부' 모집과 관련된 업무에 직접적으로 관련되는 것을 피하기 위하여 자회사인 복대공사를 설립하여 운영하였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각주

  1. ^ 業務部長, 「海南島バラック建築ノ件」,1939.3.29. 파일번호 J_tw_002.
  2. ^ 「海南島海軍慰安所ノ件」, 1939.4.4, 파일번호 J_tw_005.
  3. ^ 台拓社長, 「海南島調査隊用並ニ軍用資材供給ノ件」, 1939.4.21, 파일번호 J_tw_010
  4. ^ 台拓社長, 「海南島調査隊用並ニ軍用資材供給ノ件」, 1939.4.21, 파일번호 J_tw_010.
  5. ^ 台拓事業課長大西文一, 「人員並ニ物資輸送ノ件」, 1939.5.9, 파일번호 J_tw_015.
  6. ^ 台拓事業課長大西文一, 「人員並ニ物資輸送ノ件」, 1939.5.9, 파일번호 J_tw_015.
  7. ^ 営業部調査課長, 「海南島慰安所営業資金貸付ノ件」, 1939.5.6. 파일번호 J_tw_014.
  8. ^ 台拓事業課長, 「海南島建築事業ニ係ル件」, 1939.5.11, 파일번호 J_tw_016.
  9. ^ 南支課長, 「建築事業進捗状況ニ関スル件」, 1939.8.16, 파일번호 J_tw_032.
  10. ^ 海口事務所長, 「建築事業進捗状況ニ関スル件」, 1939.9.14, 파일번호 J_tw_034.
글쓴이 최종길

원광대학교 한중관계연구원 동북아시아인문사회연구소 HK연구교수. 일본근현대사 전공. 위안부와 관련한 논문으로 「행정문서 재구성을 통해본 일본군 '위안부'제도의 성립과 운용」『일관계사연구』제51집(2015년 8월 30일), 「타이완척식주식회사 자료를 통해본 일본군 위안소 설치와 운영」『일본연구』제27집(2017년 2월 28일)이 있다.

gilchoi6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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