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수도권에서 1990년생 딸이자 여자로 생의 초년기를 보냈고, 지난 12년 동안 베를린에서 살았다. 사진을 시작하며 품었던 바람은 하나였다. “나를 알고 싶다.”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길에 언제나 여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나와 분리되지 않는 엄마로, 친구로, 동료로, 기사 속 인물로, 길에서 스치는 낯선 이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발을 딛고 선 세계와 아직 닿지 않은 미지의 세계 사이에서 만난 여자들은 과거와 현재, 미래를 뒤섞은 거울이자 위로였다. 이 만남들을 통해 나는 변해왔고, 그 중심에 늘 어머니가 있었다.
현대 교육을 받고 ‘아버지의 사회’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딸은 어머니를 죽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버리지는 못한다. 버리지 못한 어머니의 시체를 껴안고 울며불며 사막을 헤매는 것, 이것이 딸들의 인생이다. 몇 년 전 내가 쓴 일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나 자신이 누구인가를 묻기보다는 내가 어디에 있는지 알고 싶다. 그러나 어머니를 만난 순간 나는 길을 잃었다.”[1]
지금도 이 문장을 곱씹는다. 이 생에 떠오른 질문들에 대한 답을 사진이라는 매체를 통해 구해왔다. 남겨진 질문을 전달하기에 가장 적절한 형식을 찾아가는 과정이 곧 나의 작업이었다.
2020년 가을이었다. 독일 베를린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시민단체 ‘코리아협의회(Korea Verband)’가 미테구 모아빗(Moabit)이라는 동네에 평화의 소녀상 ‘아리’를 설치했다. 아리는 세워진 뒤 끊임없이 철거 압박에 시달렸고, 나는 베를린에 거주하는 한 사람의 한인으로 그 과정을 지켜보게 되었다. 당시는 학교 졸업을 앞두고 향후 거취에 관한 질문을 반복적으로 받는 일이 일상이었고, 코로나-19를 계기로 뚜렷하게 가시화된 인종 차별을 경험하고 있던 터였다.
이런 개인적 상황에서 소녀상 아리는 단순한 역사적 기념비가 아니었다. 철거 과정은 인종 차별과 거주권 문제, 기억 문화 내부의 위계와 단절, 그로 인한 배제의 시도, 그리고 여성운동이 지닌 소수자성 같은 현재의 문제들을 응축한 상징처럼 다가왔다. 그 중에서도 특히 인상 깊었던 것은 소녀상 철거에 맞서 연대하는 다양한 이주 여성단체들의 존재였다. 서로 다른 배경을 가지고 베를린이라는 도시로 온 여성들의 경험과 기억을 잇는 것은 무엇일까. ‘평화의 소녀상 아리 지키기 활동’을 계속 주시하는 동시에 일본군‘위안부’ 역사를 공부해야겠다고 결심하는 계기였다.
돌아보면 독일로 떠나기 전 20대 초반의 나는 한국 사회를 바라보는 데서 오는 우울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그때의 감각이 ‘위안부’ 역사를 공부하며 살아났다. 일본군‘위안부’ 운동이 오랜 기간 이어져 왔음에도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과제라는 점, ‘위안부’ 역사와 운동이 지닌 무게감, 생존 피해자들과 연대의 중요성을 생각할수록 이 역사는 감히 한 개인이 의견을 말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었다. 마치 독일인들이 홀로코스트 역사에 대한 책임으로 유대인에게 무조건적인 연대를 표명하는 것처럼.
한편으로 학교에서 배운 역사와 대중매체를 통해 접한 기억에도 불구하고 ‘위안부’라는 글자는 익숙하면서도 낯선, 무엇보다 조심스러운 낱말이었다. 차츰 이 낱말을 둘러싼 무거운 감각을 직면하고 싶었고, 조심스럽다는 감각에 대한 질문은 프로젝트를 해야 하는 이유가 되었다. 그 감각 속에 여성의 오늘이 연결되어 있는 것 같았다. ‘위안부’라는 핵심어를 두고 여자들의 발자국을 따라가며 이 연속성을 감각할 수 있는 전시를 만들고 싶었다. 먼 길을 돌아 지금, 이 순간 내게 도달한 삶이 던지는 질문에 응답하는 것이 작가로서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베를린에서 살기에 조사의 시작은 대개 웹 리서치였다. 언론 기사와 백과사전류 자료를 통해 기본 정보를 익히고, 관련 논문을 찾아 읽으며 참고문헌 범위를 넓혀 갔다. 동시에 생애사 단행본, 논픽션 형식의 소설, 기지촌 문학 등을 읽었다. 문학은 여성들의 삶이 하나의 서사로 환원될 수 없다는 점, 각 삶이 지닌 고유성과 다양성에 대해 생각하게 했다. 파편적이었지만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특정 지역의 미군 기지촌에 대해서도 웹 자료들에 도움 받았다. 여자들이 살았던 시대의 조건과 분위기를 이해하고 싶어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이나 한국 서울기록원,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의 아카이브814 등과 같은 공기관 아카이브 사이트에서 자료를 찾았고, 한국 방문 때마다 관련 박물관에 전시된 기록들을 살폈다. 이러한 아카이브는 기록하는 주체에 따라 달라지는 관점을 이해할 수 있는 자료이자 시대의 인식을 반영한 가늠자로 프로젝트에 수렴되었다.
공부를 시작하고 가장 먼저 접한 것이 배봉기님 이야기를 담은 칼럼이었다. 프로젝트 1부 ‘입’의 중심이자, 여전히 이 프로젝트를 추동하는 주요 인물인 배봉기님은 일본 오키나와에서 특별 체류권을 얻기 위해 강제된 증언을 해야만 했던 일본군‘위안부’ 피해 생존자였다. 이후 배봉기님과 인터뷰가 기초가 된 단행본[2], 구술사 자료, 기사, 논문, 영화, 오키나와전에 관한 미군 자료 등 다양한 기록을 만났다.
그리고 참고문헌을 열람하면서 조금씩 차오른 ‘빈자리에 대한 감각’은 오키나와로의 리서치 트립[3]으로 이어졌다. 리서치 트립은 배봉기님이 오키나와에 도착하게 된 경로(흥남 - 경성 - 부산 - 모지 - 시모노세키 - 가고시마 - 오키나와 나하 - 토카시키섬)와 이후 오키나와에서 살았던 곳(토카시키섬 - 자마미섬 - 이시카와 포로수용소 - 코자 - 야케나 - 요미탄 - 마키시 - 나하 등등)들을 방문해보는 것으로 계획했다. 리서치 트립 방식 역시 프로젝트의 단계에 따라 달라졌는데, 1부 ‘입’에서는 한 여성의 삶에 집중하고 있었기에 배봉기님이 이동했던 경로를 가능한 한 그대로 따라가 보는 계획을 세웠다. 반면 2부 ‘그리고 그 후에 남은 것’에서는 한국 및 독일 내 기지촌에 대한 정보를 조사한 뒤 방문하는 식이었다.
1부의 리서치 트립은 남겨진 기록으로는 도저히 닿을 수 없는 배봉기님의 시간과 장소를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참고 자료를 읽으며 배봉기님의 생에서 ‘위안부’ 피해자이기에 중요하게 다뤄지지 않는 시간이 있다는 사실이 계속 마음에 남았다. 집을 나온 이후 취업 사기로 오키나와에 도착하기까지의 약 10년, 그리고 전후 ‘위안부’였음이 밝혀지기까지 오키나와에서의 약 30년의 세월은 흐릿했다. 무엇이 이 시간을 흐릿하게 만들고, 그것이 어디에서 발생하는지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녀가 머물렀다고 언급한 지역들을 가봐야 할 것 같았다. 그 장소를 직접 가면 한 사람의 삶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다.
그러나 리서치 트립 과정에서 마주한 것은 예상하지 못한 막막함이었다. 그가 처했을 상황에 대한 추측이 대부분이었기에 ‘모르겠다’라는 감각만 더 선명해졌다. 또 리서치 장소들이 나의 일상과 맞닿아 있지 않다는 사실도 인지했다. 프로젝트가 진행되면서 점점 미군 기지가 있었던 지역들, 기지촌과 인근 성매매 집결지를 방문하게 되었는데, 이 역시 애초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향이었다. 오키나와에 있었던 한 일본군‘위안부’의 삶에 대한 끌림이 시간이 지나 한국의 집결지까지 이어질 것이라고는 알지 못했다.
리서치를 위해 혼자 낯선 장소를 이동하는 일은 내 신체를 재인식하는 기회이기도 했다. 대낮이지만 인적이 없는 길, 밤의 거리로 발을 내딛는 일은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고, 매번 긴장으로 온몸이 뻣뻣해지곤 했다. 장소에 대한 내면화된 시각–타자화, 두려움–이 신체화되어 나타났다. 이 과정은 촬영 방식에도 영향을 미쳤다. 카메라를 삼각대에 세우고 천천히 셔터를 누르던 평소의 나는 사라지고, 낯선 장소를 종종걸으며 두근거리는 마음을 진정하려 애썼다.
프로젝트에 포함된 초상 사진 속 여성들은 군 ‘위안부’ 당사자가 아니다. 배봉기님이 오키나와에 도착했던 나이를 떠올리며 서른 살 즈음 여자의 초상을 포함하고 싶었다. 여자의 삶을 구체적으로 재현하기보다, 그가 지나갔을지도 모를 장소에 서 있는 현재의 나에게 공명하고 있는 것들을 의식하려 했다. 여자를 비극의 피해자로 상상하기보다 그 장소에 사는 선택을 했던 한 사람으로 떠올렸다. 살아남고 싶었을 평범한 마음과 그 당연함을 얻기 위해 이루어진 선택과 이동, 그 결과를 유추하며 여자들을 따라 걸었다.
리서치 트립에서 촬영한 사진과 영상, 사운드는 몇십 년 전 누군가가 살았던 장소의 ‘오늘의 모습’이다. 폐허 같아 보이는 풍경은 망각을 감각하게 할 뿐이지만 이제는 만날 수 없는 누군가를 알고 싶다는 마음에서 출발한 프로젝트라는 점에서 그 빈자리를 전하는 일이 중요했다.
명확하지 않은 것이 많은 프로젝트의 특성상 리서치 트립에서 촬영한 것 중에 어디까지가 유효한 이미지인지에 대해서도 고민했다. 이미지의 유/무효에 대한 판단은 이 프로젝트가 저널리즘이 아니라는 것을 상기하며, 정보 전달보다 질문을 남기거나 혹은 남길 수 있는 배치에 중점을 두었다.
오키나와를 걸으며 체감한 일본군‘위안부’와 미군 ‘위안부’ 사이의 연속성에 대한 자각은 자연스럽게 한국 내 미군 기지촌 여성의 역사에 대한 관심으로 확장되었다. 한 여성을 찾는 과정 속에서 명확해진 연속성이 기억 문화에서는 일본군‘위안부’와 미군 ‘위안부’라는 벽을 두고 다뤄지는 것 같았다. 또 다시 조심스럽다는 감각을 떠올리게 하는 이 연속성이 나중에 프로젝트 입의 1부와 2부를 한 전시에서 보여주고자 한 이유가 되었다.
작업 중에 내가 1990년에 태어났고, 배봉기님은 1991년에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잊었다가 상기하는 일이 반복됐다. 이 반복 속에서 나의 작업이 배봉기님에 대한 다큐멘터리가 아니라 그녀의 삶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작가가 느낀, 한 여성의 남겨진 기록 속 ‘빈자리’에 대한 ‘정동’이라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다.
여기서 말하는 빈자리는 배봉기님의 생(1914~1991)에서 1944년 오키나와에서 일본군‘위안부’가 되기 이전의 약 10년(1933~1944), 그리고 1975년 강제된 증언 이전의 약 30년의 세월(1946~1975)을 가리킨다. 배봉기님의 삶은 저널리스트 가와다 후미코가 펴낸 단행본 『빨간 기와집』에 비교적 상세히 기록되어 있지만, 많은 기록에서 ‘위안부’ 전후 배봉기님의 약 40년의 세월은 빠지거나 요약된다. 배봉기님이 집 밖의 여성으로 다양한 노동을 한 이 40년의 공백을 나는 ‘빈자리’라고 명명했다. 이 시간을 기억하지 않고 그녀의 말을 온전히 들을 수 있을까? 또 다른 (집 밖의) 여성의 말을 들을 수 있을까? 말한 것이 생략될 때, 그 생략은 발화하는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남길까? 침묵이 가리키는 자리에서 살아가는, 지워진 사람들이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