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순을 추억하다 2 - 할머니들의 리더같은 존재, 김학순

Posts 나카가와 히사코 (中川寿子)

  • Created at2019.08.15
  • Updated at2022.11.28

 

 

할머니들의 리더같은 존재, 김학순 


1991년 12월, 김학순 할머니를 비롯해 '위안부' 피해자들이 일본 정부에 사죄와 명예회복을 요구하며 도쿄지방재판소에 제소( 아시아태평양전쟁 한국인 희생자 보상청구사건  )했을 때, 많은 일본인이나 재일한국인들이 할머니들을 지원하기 위해 힘썼다. '군위안부'의 존재는 센다 가코(千田夏光)의 책 『종군위안부』나 시로타 스즈코씨의 호소로 알고 있었지만, 한국인, 조선인 피해자들의 모습은 미지의 것이었다. 1970년대 만들어진 '위안부' 관련 기록영화 『오키나와의 할머니』에서도 감독 야마타니 테츠오(山谷哲夫)가 서울에서 피해자들을 수소문했지만 결국 만나지 못했던 상황이 담겨 있다.

시로타 스즈코 씨를 알게 된 것은 1986년의 일이다. 어느 날 밤 TBS 라디오에서, 시로타 스즈코 씨는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심각한 이야기를 풀어 놓고 있었다. "팔라우를 떠날 때는 비가 내리고 있었습니다. 그 비는 팔라우의 산속에 숨어 떠나는 배를 바라보면서 이런 몸으로는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다며 울던 여성들의 눈물과도 같습니다." 이렇게 이야기를 끝맺은 그녀는, 존재가 잊혀지고 있던 이름 없는 여성들을 위해 비석을 세우고 싶다고 호소했다. 

그녀의 바람은 방송 이후에 실현되어, 치바 현 카니타 부인의 마을에 '아아, 종군위안부'라고 새겨진 비석이 세워졌다. 이 잊혀진 여성들 대부분이 한국, 조선인이었다는 것, 그리고 그 비참한 경험들이나 위안소의 실태가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김학순 할머니의 용기 있는 고백과 그녀를 뒤따라 증언한 할머니들 덕분이었다. 일본에서도 명예회복을 요구하는 여성들의 투쟁에 공감하여 재판을 응원하는 분위기가 고조되기 시작했다. 

리 노조 여성부 일부 회원들은 위안부 문제 해결에 힘쓰는 모임을 결성하여 재판을 지원하고 국가보상을 요구하는 운동에 참여했다. 재판의 원고인 김학순 및 다른 할머니들과는 숙소 생활을 도와드리면서 친해지게 되었다. 취사가 금지되어 있던 숙소에서 식사 시간이면 할머니들은 큰 주전자에 찌개를 끓이셨고, 마지막에 황금주 할머니가 간을 보면 완성. 할머니의 자신만만한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특히 김학순 할머니는 할머니들의 리더 같은 존재였다. 할머니를 따라다니는 열성적인 팬도 있었다. 

어느 날, 신문기자였던 나는 우연히 쇼와 천황이 사용하는 타올을 미쓰비시 백화점에서 살 수 있다는 것을 알고, 할머니들의 숙소로 가는 도중 이케부쿠로의 미쓰비시 백화점에 들러 그 수건을 몇 장 사서 선물로 들고 갔다. 할머니들께 천황이 쓰는 수건이라고 설명해 드리자, 김학순 할머니가 천천히 일어서시더니 '히로히토 녀석! 천황이 다 뭐냐!' 하고 소리치며 하얀 수건 포장을 발로 밟기 시작했다. 그러자 다른 할머니들도 각자의 수건을 밟으며, 함께 소리치며 즐거워했다. 나는 김학순 할머니의 의외로 장난스러운 모습에 놀라기도 했지만, 할머니들의 뜨거운 투지에 압도되어버렸다.

전후보상을 요구하는 국회 앞 농성에는 학생들을 비롯한 다양한 사람들이 참가했고, 참가자들은 밤을 새우기도 했다. 가을이라 태풍도 오고 춥기도 해서 고령의 할머니들께는 혹독한 싸움이었다. 나는 할머니들을 격려하러 오는 국회의원들이 사비를 털어 할머니들을 가까운 호텔에 모시지 않는 것이 불만이었다. 국회의원회관 앞에서 강순녀 할머니가 굿을 한 이후, 갑자기 김학순 할머니가 '저도 하겠습니다' 하면서 장구채를 손에 쥐었다. 노오랗게 빛나는 은행잎 아래에서 김학순 할머니는 씩, 미소를 짓고나서 천천히 장구를 치기 시작했다. 꽃과 같은 웃음이라는 말은 바로 할머니의 미소를 가리키는 듯 주변이 갑자기 밝아졌고,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할머니의 장구 소리에 끌려들어 갔다. 옆에 있던 동료들은 와, 하고 경탄했고, 나 역시 '훈련받은 프로는 다르구나' 하고 감동했다. 김학순 할머니의 연주는 단 한 번뿐이었지만, 그 연주를 듣게 된 것은 전후 보상 운동에 참가한 나에게 가장 큰 선물 중 하나였다.

김학순 할머니 (제공: 나눔의 집)


나는 재판을 위한 증거 확보를 위해 김학순 할머니를 도운 적도 있다. 김학순 할머니가 일본군에게 연행된 '칵카현 철벽진(カッカ県ゼッペキ鎭)' 을 중국 지명집에서 찾아보았지만, 중국은 시 아래에 현이 있고, 그 아래에 진이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을 정도로 중국 지리에는 문외한이었다. 누군가는 단순히 "'후오루(獲鹿)'를 '칵카현(カッカ県)'이라고 불렀겠지" 하고 말했지만, 그 현에 비슷한 이름을 가진 진은 없었고, 허베이성 석가장의 주변에서 트럭으로 갔을 만한 거리도 아니었다. 그 외에 허베이성에는 트럭으로 갈 만한 거리에 '허젠현(河間)'이라는 곳이 있었지만 거기에도 비슷한 이름의 진은 없었다. '훠자현(獲嘉)'은 있어도 허난성에서 너무 멀었다. 결국 유감스럽게도 지명을 특정하지는 못했다.

 김학순 할머니는 일본군의 위안소를 탈출하고 각지를 전전하며 마지막으로 프랑스 조계의 정안사로에 정착하여 전당포를 열었고, 이후 일본은 패전을 맞았다. 당시 이야기를 들으면, 할머니는 훙커우 공원에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 김구의 연설을 들으러 갔다고 한다. 훙커우 공원은 윤봉길이 상해파견군 총사령관들에게 폭탄을 투척하여 두 명을 암살한 곳이다. 이 공격을 계획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 김구 주석의 연설로 그곳은 광복과 독립의 열기로 가득 차, 그 자리에 있던 김학순 할머니 부부의 기쁨도 컸을 것이다. 할머니로부터 이 이야기를 들은 후, 헤이본샤(平凡社)에서 출판된 『백범일지』(『白凡逸志』, 1973)를 가져가니, 할머니는 일본어로 된 그 책을 손에 꼭 쥐고 계셨다. 

한편 우리가 지원하고 있던 재판도 아시아여성기금 설립에 의해 크게 방향이 바뀌고 말았다. 재판의 주임변호사가 국민기금을 추진하여 변호사로서 입장을 의심할 만한 상황이 되었고, 한국 단체를 지원하고 있던 일본 단체도 국민기금 추진을 둘러싸고 분열되었다. 우리 모임도 예외가 아니어서, 회원 사이에 의견이 어긋나 해산하게 되었다. 그 후 나는 패배감에 서울에 연 2회 정도 할머니들을 뵈러 가는 것 외에는 이렇다 할 활동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김학순 할머니와 만날 기회도 없어졌다. 1997년 어느 날, 김학순 할머니의 열렬한 지지자였던 변기자 씨를 만나, 할머니가 서울의 이화여자대학병원에 입원 중이라는 말을 들었다. 그녀가 말하길, 자신은 조선적이기 때문에 한국에 입국할 수 없으니 만약 서울에 간다면 병문안을 가주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11월에 나눔의 집을 방문하고, 김학순 할머니를 찾아갔다. 벽에는 아이들이 보낸 편지들이 붙어있었고, 할머니는 매우 건강해 보여서 안심했다. 

그러나 12월이 되자 변기자 씨로부터 김학순 할머니의 병세가 악화되어 걱정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다시 친구와 둘이서 서울의 병원에 갔다. 마침 크리스마스 전이어서, 병실의 문에는 트리가 장식되어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할머니는 주무시고 계셨다. 일본에서 왔다고 하자, 간병인이 할머니를 흔들어 깨웠다. 우리는 그렇게 세게 흔들어도 괜찮을까 걱정했다. 눈을 뜬 할머니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는 듯했다. 간병인이 사정을 말하자, 미소를 지으며 기뻐해 주셨다. 누군가가 마지막으로 일본인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는지 할머니께 물어봤으면 좋았겠다고 했지만, 우리는 할머니의 몹시 쇠약해진 모습에 놀라 오래 머무르지 못하고 나왔다. 오래 사시지는 못할 것 같다는 우울한 기분으로 희미한 빛 속을 걸었다. 그리고 16일에 부고를 들었다. 우리는 김학순 할머니를 추도하고 그녀의 원통함을 일본인에게 전하고 싶어서 오랜만에 예전 동료들에게 연락하여 국회 앞에 모였다. 그중에는 물론 변기자 씨도 있었다. 할머니의 사진이나 꽃, 슬로건을 걸었고, 국회의원 츠지모토 기요미(辻本清美)가 지나가자 같이 사진을 찍기도 했다.

만약 김학순 할머니의 첫 증언이 없었다면(부산의 이귀분 할머니는 자기가 먼저 부산 방송국에 갔었는데 상대해주지 않았다고 불평하셨지만!) 일본군 여성 인권침해는 역사의 어둠 속에 묻힌 채로 잊혀졌을지도 모른다. 김학순 할머니의 용기가, 그리고 그를 뒤따른 할머니들의 용기가 올해 노벨평화상으로 이어졌다고 생각한다. 할머니들이 노벨상을 탄 것이다![1] 

 

각주

  1. ^ 본 에세이는 2018넌 12월에 작성되었다.2018년 노벨평화상은 이라크 소수민족 야지디족 여성운동가 나디아 무라드와 내전 성폭력 피해자 치료에 앞장선 의사 드니 무퀘게가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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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er 나카가와 히사코 (中川寿子)

일본의 시민운동가. 전’위안부’문제를생각하는도립고교유지네트워크회원, ‘일본의 전후 책임을 명백히 하는 핫키리회(ハッキリ会)’ 활동. 수십년간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싸워왔다. 식민지역사박물관에 ‘위안부’ 관련 서적 35권 및 사진 등을 기증했다. 한편, 한국의 피해자뿐만 아니라, 중국, 대만 등 아시아 지역 위안부 피해자 문제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고 현지조사에 참여, 보고서를 작성하기도 했다. 정년 퇴직 후에는 삼광(三光) 작전 조사회 회원으로 허베이성 북단촌(北坦村)의 독가스 피해 조사 등에 참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