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림의 날에 기억하는 김학순과 그녀의 증언

Posts 소현숙

  • Created at2019.08.16
  • Updated at2022.11.28


기림의 날에 기억하는 김학순과 그녀의 증언
 

“신문에 나고 뉴스에 나오는 걸 보고 내가 결심을 단단하게 했어요. 아니다. 이거는 바로 잡아야 한다. 도대체 왜 거짓말을 하는지 모르겠단 말이오. 그래서 결국 나오게 되었소. 누가 나오라고 말한 것도 아니고 내 스스로….”

“정신대 위안부로 고통 받았던 내가 이렇게 시퍼렇게 살아 있는데 일본은 종군위안부를 끌어간 사실이 없다 하고 우리 정부는 모르겠다 하니 말이나 됩니까.”

 

1991년 8월 14일 오후 한국여성단체연합 사무실에서 개최된 기자회견에서 김학순은 자신이 일본군 ‘위안부’로 강제 동원되었던 피해자임을 폭로했다. 아직도 “일장기만 보면 억울하고 가슴이 울렁 울렁하다”는 그녀는 눈물을 훔치며 자신이 당한 고통을 만천하에 알렸다. 눈물과 콧물이 범벅이 되어 그때의 아픈 기억을 얘기할 때면 스스로 진정하느라 한참씩 말을 멈추곤 하던 김학순. 그러나 잘못된 것을 바로잡기 위해 스스로 나서 그동안 파렴치하게 발뺌해 온 일본 정부와 이 문제를 수수방관해 온 한국 정부를 준엄히 비판한 김학순. 그녀의 이 용기 있는 증언으로 그때까지 뜬소문에 불과했던 일본군‘위안부’는 비로소 실체를 가진 역사적 사실로 드러나게 되었다. 

반세기 넘게 침묵 속에 갇혀 있던 ‘위안부’ 피해를 공개적으로 증언하고 일본의 사실인정과 공식사죄를 주장한 김학순. 그녀는 누구인가? 증언에 따르면, 김학순은 1924년 중국 지린에서 출생했다. 식민지 치하에서 많은 조선인들이 독립운동을 위해, 그리고 먹고살기 위해 짐을 싸 만주로 떠나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태어난 지 백일도 되지 않아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생활이 막막해진 어머니는 두 살 된 어린 학순을 데리고 평양으로 돌아왔다. 가난한 친정에도 의탁할 수 없었던 학순의 어머니는 남의 집 고용살이를 하면서 어려운 삶을 이어갔다. 학순이 열네 살 되던 해 어머니는 재혼했지만, 의붓아버지와의 동거를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학순은 마음을 잡지 못하고 겉돌았고 어머니와 관계가 소원해져 버렸다. 그러던 차에 기생집의 수양딸로 팔려간 김학순은 평양의 기생 권번에서 2년 정도 춤과 판소리, 시조 등을 배웠다. 권번을 졸업하고 17세가 된 김학순은 기생 영업을 위해 1941년 양아버지와 함께 중국으로 떠났다. 

그러나 떠난 지 일주일 만에 도착한 베이징에서 김학순은 일본 군인들에 의해 군용트럭에 강제로 실려 위안소로 끌려가게 되었다. 밤새워 달려 도착한 철벽진이라는 곳에서 그녀는 일본군 중위에게 강간당하는 것을 시작으로 악몽 같은 ‘위안부’ 생활을 강요당했다. 몇 차례 도망쳐도 봤지만, 그때마다 붙잡혀 모진 구타를 당해야 했다. 4개월 남짓 지났을까 군인들이 전투 나간 어느 날 빈틈을 타고 불쑥 찾아온 조선인 은전장수 덕분에 그녀는 그 지긋지긋한 위안소를 기적적으로 탈출할 수 있었다. 

이후 김학순은 생명의 은인이기도 한 이 조선인 남성과 함께 살며 중국을 떠돌다 1946년 6월 해방된 조국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녀의 불행은 끝나지 않았다. 귀국 직후 콜레라에 어린 딸을 잃었고, 곧이어 사고로 남편과 아들을 차례로 저 세상으로 먼저 보내야 했다.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게 된 김학순은 남의 집 식모살이며 날품팔이 등으로 모진 삶을 이어가야 했다.

반세기가 다되도록 침묵하던 그녀는 어떻게 용감하게 나서서 증언을 하게 된 것일까? 그녀의 증언에서도 드러나듯이, 여성들을 ‘위안부’로 동원해 놓고서도 그런 일은 없었다고 잡아떼는 일본 정부에 대한 분노가 무엇보다 큰 역할을 했다. 그러나 그녀의 말을 ‘듣고자 하는 사람들’이 없었다면, 그녀는 계속해서 침묵 속에 머물렀을 수도, 그리하여 ‘위안부’문제는 역사 저편의 먼지 속에 감춰지게 되었을 수도 있었다. 

사실, 그녀의 증언 이전에도 ‘처녀공출’이니 ‘정신대’니 하는 일을 사람들이 몰랐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오랫동안 한국 사회에서 일본군‘위안부’문제는 해결해야 할 과제로 포착되지 않았다. 그러기는커녕, 해방직후 미군정 하에서 한국 여성에 대한 미군의 성폭행 사건이 발생했을 때, 사회 명사들이 그 대응책으로 일본군에 있었던 것과 같은 ‘위안소’가 필요하다고 버젓이 말하지 않았던가. 여성의 성을 언제든지 남성의 성욕을 풀기 위한 도구로 활용할 수 있다는 인식, 나아가 성폭력을 폭력으로 인식하지 못해 온 한국 사회에서는 강간당한 여성은 오히려 몸이 더럽혀진 죄인에 불과했다. 이런 분위기에서 ‘위안부’ 피해는 개인적 수치일 뿐 구조적 폭력으로 인식될 수 없었던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 피해자의 말을 듣는 ‘귀’가 생기기까지 1980년대 민주화의 열기 속에서 성장한 여성운동의 줄기찬 노력이 있었다. 1986년 부천서 성고문 사건을 계기로 성폭력을 여성에 대한 폭력으로 규정하고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요구해온 한국 여성운동 세력은 일본군 ‘위안부’문제의 가시화에도 크게 기여했다. 

특히 기독교 여성들을 중심으로 진행되던 ‘기생관광’ 반대운동은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대한 한국 사회의 관심을 촉발하는 역할을 했다. 86년 아시안게임과 88년 올림픽 게임을 준비하면서 당시 한국 정부는 외화 획득을 목적으로 일본 남성들의 ‘기생관광’을 부추기고 있었다. ‘일본의 식민 통치를 받은 것도 억울한데, 아직도 기생관광으로 성적 수치를 당해야 하는가’라는 울분 속에서 교회여성단체는 기생관광을 ‘현대판 정신대’라고 규정하고 반대운동을 전개했다. 이 과정에서 민족적 성 침탈의 역사로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관심이 모이기 시작했다. 이어서 자신은 ‘정신대’를 모면했지만, “또래의 많은 처녀들이 일제에 끌려갔던” 그 기억으로부터 군 ‘위안부’ 피해자들을 찾아 나선 윤정옥 등은 1990년 11월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이하 정대협)를 발족하였고, 일본군 ‘위안부’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위한 활동을 본격화했다. 이로써 드디어 한국 사회는 피해자들의 ‘말’을 들을 준비를 마치게 된 것이다.  

하지만 당시까지도 이 문제를 풀 결정적 고리인 ‘위안부’ 피해자들은 나타나지 않았다. 한국 정부는 진상조사를 요구하는 여론의 압력에 밀려 1990년 노태우 대통령 방일 시 일본 총리에게 전시 강제연행자의 명부를 만드는 데 협력해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군위안소는 민간업자의 단순한 상행위이며 군 위안부는 업자가 데리고 다녔다”고 대응하면서 일본 정부의 관여를 전면 부인했다. 

 1996년 히로시마 증언집회에 선 김학순 할머니 ©이희자

 

김학순이 스스로 ‘위안부’의 피해자였음을 폭로하고 최초로 대중 앞에 나섰던 것은 바로 이 시점에서였다. 반세기 만에 피해자의 말을 들을 준비가 된 한국의 대중들 앞에서 엄연히 ‘위안부’였던 자신이 살아 있는데도 진실을 부정하는 일본 정부의 무책임한 태도에 분노하여 자신의 경험을 털어놓기로 한 것이다. 증언 이후 김학순은 일본 정부를 상대로 한 소송에 나서 사죄와 피해배상을 요구하며 인권운동가로서 남은 생을 이어갔다.

8월 14일 김학순의 용기 있는 증언은 많은 것을 바꾸어 놓았다. 그녀의 증언 이후 같은 ‘위안부’ 피해를 입은 생존자들이 200명 넘게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일제의 만행을 고발했다. 증언의 연쇄는 해외로까지 이어졌다. 대만, 필리핀, 인도네시아 등 일본의 침략을 당했던 다른 아시아 피해 국가들에서도 ‘위안부’ 피해 생존자들의 폭로가 잇달아 나왔다. 이로써 ‘위안부’문제는 한일 간의 문제가 아닌, 국제적인 문제가 되었다. 김학순의 증언에 탄력을 받은 진상규명운동은 한국은 물론 북한, 일본과 중국, 아시아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그리고 일본군‘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아시아의 연대운동이 본격화되었다. 또, 피해자의 등장에 충격을 받은 역사가들에 의해 일본군의 직접적 개입을 보여 주는 많은 증거 자료들이 발굴되었다. 

김학순의 생생한 증언과 잇따른 움직임 속에서 더 이상 발뺌이 어려워진 일본 정부는 고노담화를 통해 군과 관헌의 관여와 동원에서의 강제성을 인정하고 사죄의 뜻을 밝혔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군의 관여가 부분적인 것에 불과하고 전반적인 책임은 민간업자에게 있다는 태도를 고수하면서 도의적 책임만을 인정할 뿐, 법적 책임이나 피해자에 대한 배상은 거부해 왔다. 그나마 아베 정권이 들어선 이후엔 고노담화조차 부정하며 역사왜곡을 일삼고 있다. ‘김학순들’의 처절한 증언을 듣고서도 아베 정권과 일본의 우익들은 피해자들의 말에 귀를 닫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낙담할 필요는 없다. 얼마 전 일본 ‘아이치 트리엔날레’ 전시회에서 소녀상이 철거되자, ‘내가 소녀상이다’라는 해시태그 운동이 소셜미디어를 중심으로 확산되고 있는 것을 보자. 김학순의 증언이 있은 지 30년, 그녀의 용기에 의해 피해자의 말에 공감하는 열린 ‘귀’들이 계속해서 전 세계에서 확산되고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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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er 소현숙

현재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학술연구팀장이다. 한국근현대 가족사, 사회사, 여성사, 마이너리티 역사 전공. 논문으로 “Collaboration au féminin en Corée”, 〈식민지시기 ‘불량소년’ 담론의 형성〉, 〈'만들어진 전통'으로서의 동성동본금혼제와 식민정치〉, 〈식민지 조선에서 ‘불구자' 개념의 형성과 그 성격〉, 〈전쟁고아들이 겪은 전후:1950년대 전쟁고아 실태와 사회적 대책〉 저서로 《이혼법정에 선 식민지 조선 여성들》, 공저로 《일상사로 보는 한국근현대사》 《식민지 공공성》 《日韓民衆史硏究の最前線》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