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군 ‘위안부’ 운동의 역사, 두레방은 결코 멈출 수 없다

김은진

  • 게시일2024.09.23
  • 최종수정일2024.09.25

미군 '위안부' 운동의 역사, 두레방은 결코 멈출 수 없다

 

기지촌 여성들의 인권 회복 활동을 비롯해 불법 성매매 문제, 군사주의로 인한 폐해를 알리며 한국 최초의 미군 '위안부' 운동을 주도해 온 두레방의 공간이 대규모 개발사업을 명분으로 철거 위기에 직면해 있다. 전국의 시민사회단체가 공동대책위원회를 구성해 '옛 성병관리소' 건물인 두레방 철거가 '빼뻘마을' 여성공동체를 내쫓는 일이자 원형이 보존돼 있는 근현대 역사문화적 공간을 폐기하는 일이라는 목소리를 내고 있다. 두레방 김은진 원장이 의정부시와 동두천시에 있는 '옛 성병관리소'를 역사문화평화공원으로 활용하자는 제안과 함께 현장 상황을 전해왔다.


 

기지촌 여성들의 보금자리, '두레방(My Sister's Place)'의 역사는 198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시작 지점에 '문혜림'이라는 여성이 있다. 2022년 세상을 떠나 지금은 고인이 된 문혜림은 헤리엇 페이 핀치벡(Harriett Faye Pinchbeck)이라는 본명을 가진 미국인. 고 문익환 목사의 동생 문동환 목사의 부인인 그는 사회사업가로, 국적 덕분에 미국 우편 시스템을 이용해 국제사회에 한국의 인권 상황을 알려 민주화를 도운 인물이기도 하다.

미군 부대에서 알코올, 약물 문제를 겪는 미군을 상담해주던 사회사업가 문혜림의 눈에 성매매를 하는 한국 여성들이 들어왔다. 이들은 세상 밖으로 내쳐진 사람들이었다. 문혜림은 '나라도 그녀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겠다'는 생각으로 미국장로교회와 한국기독교장로회여신도회전국연합회 프로젝트를 통해 1986년 의정부시 캠프 레드크라우드 옆에 두레방을 세웠고 후에 고산동, 일명 '빼뻘마을'에 둥지를 틀었다. '빼뻘'의 유래는 배나무가 많아 '배벌'로 불린데서 출발했다는 설이 가장 유력한데, 우리말이 익숙지 않은 미군들의 발음 때문에 와전됐다거나 기지촌에 한 번 발을 들이면 좀체 빼기 어려워 나왔다는 설도 흔하게 들을 수 있다. 

[사진 1] 문혜림 선생 (사진 제공 : 두레방)

 

 

두레방, 기지촌 여성들이 서로 돕고 쉬며 이야기하는 곳

'서로 도와가면서 일하는 공동체'라는 '두레'의 뜻을 연결해 '여성들이 서로 돕고 모여서 쉬며 이야기하는 공간'으로 탄생한 두레방은 인권 사각지대에 놓인 기지촌 여성들이 자존감을 회복하며 건강한 삶을 살 수 있도록 다각도로 활동했다. 일상적으로는 상담, 한글과 영어 교육, 공동 식사, 요리교실, 야유회, 탈성매매를 위한 빵 만들기, 카드 만들기 등의 프로그램으로 여성들의 자립을 도왔다. 또 기지촌에서 발생하는 불법 성매매 문제, 군사주의로 인한 폐해와 실태를 알리고 해결하기 위해 투쟁하는 한편 여성들을 위한 전문 상담, 의료·법률 지원, 치유 프로그램 운영, 자활사업 연계, 출판·영상자료 제작 등의 활동을 진행했다. 또 나날이 늘어나는 혼혈아들을 위한 놀이방, 공부방도 운영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두레방은 매우 정치군사적인 영역인 '기지촌'이라는 곳에서 여성들을 위한 보다 현실적인 지원 체계를 마련하기 위해서는 정치적인 해결과 민관 협력 체계가 필수적이라는 사실을 자각한다. 이는 2012년, 인권 침해 피해에 대한 진상 규명과 명예 회복, 교육과 홍보 등을 목표로 한 '기지촌여성인권연대' 발족으로 이어졌다. 두레방과 기지촌여성인권연대는 관련 조례 제정과 함께 기지촌을 조성하고 관리하며 성매매를 조장한 국가에 대한 책임을 묻는 국가손해배상 소송, 특별법 제정, 국제연대 활동을 활발하게 벌여왔다. 

2004년 '성매매방지특별법' 제정 이후 '성매매 피해 지원 상담소'로 지정받은 두레방은 2006년부터 '두레방상담소'를 운영하고 있다. 또 2009년에는 '두레방쉼터'를 설립해 1990년대 중순부터 국내 기지촌으로 유입된 성매매 피해 이주여성을 돕고 있고, 2021년에는 '평택여성인권상담센터 품'을 설립해 반성매매 활동을 펼치고 있다.

[사진 2] 1986년 초창기 고산동의 두레방. (사진 제공 : 두레방)

 

 

인권 개선부터 조례 제정, 국가 책임 인정한 대법원 판결까지!
기지촌 미군 '위안부' 운동을 주도해온 두레방의 주요 성취들

지난 38년 동안 기지촌을 둘러싼 착취 구조와 인권 침해 상황을 인식한 두레방은 '기지촌 여성들의 인권을 회복시키겠다'는 선언을 바탕으로 한국 최초의 기지촌 미군 '위안부' 운동을 주도해 왔다. 이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성취는 의정부시 안에, 빼뻘마을 안에서 여성들과 통과해온 시간이다. 수많은 상처를 딛고 사회와 화해(통합)하기, 홀로서기(자활), 자기 존중감 회복하기(치유 프로그램) 등은 여성들과 지금까지 살던 영역에서 벗어나 '보통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을 모색해온 과정이었다.

법률 제정 등 사회적 성취에 기여한 부분도 상당하다. 2004년 2월의 성매매방지법 제정에 앞장선 것을 비롯해 기지촌 여성 명예 회복과 지원을 위한 법률 제정 활동, 조례 제정 운동, 이주여성을 위한 E-6-2비자대안 네트워크 활동 등이다. 모두 여성들을 억압하는 가부장제 사회와 거대한 군사화가 취약한 한 개인에게 가하는 폭력을 극복하는 연대활동이었다. 이를 위해 두레방은 성매매피해상담소(2006), 외국인여성지원시설(2009), 평택여성인권상담센터 품(2021) 등을 등록, 운영하며 국가 예산을 받아 공식적으로 기지촌 미군 '위안부' 여성을 지원하는 체계를 마련했다. 두레방은 의정부시 역사상 여성단체 최초로 등록된 비영리민간단체였다.

2020년 4월 29일은 기지촌 여성운동에서 역사적인 한 페이지가 넘어가는 날이었다. 대한민국 최초로 경기도의회에서 '경기도 기지촌 여성 지원 등에 관한 조례'가 통과된 날이기 때문이다. 두레방이 7년 동안 헌신한 성과였다. 2022년 9월 29일도 기념비적인 날로, '기지촌 성 산업 제도를 국가폭력으로 인정한' 대법원의 원심 확정 판결을 이끌어낸 일은 두레방 기지촌 여성운동의 쾌거였다. 2014년 6월 25일, 기지촌 미군 '위안부' 여성 122명이 국가가 기지촌을 조성하고 여성들의 성매매를 방조, 묵인, 관리한 책임이 있기에 이를 배상하라는 취지로 집단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제기한 지 8년 3개월만의 일이었다. 

'기지촌 정화 운동'은 판결에서 정부의 책임을 판단하는데 인용된 대표적인 증거였다. 1969년 주한 미군 감축이 추진되는 과정에서 여러 이해관계가 뒤섞여 있던 기지촌 일대에는 인종 갈등, 성병 등의 문제가 더해지면서 혼란이 극심했다. 그동안 여성들에게 '달러를 벌어들이는 애국자다, 자긍심을 가지고 국익을 위해 헌신하라'며 정책적으로 기지촌 성매매를 장려해온 박정희 정권은 1971년 대선에서 아슬아슬하게 승리하자 불안한 정치적 위상을 회복하는 출구로, 또 주한 미군의 주둔을 보장하기 위한 자구책으로 대통령 직속기구 '기지촌정화위원회'를 만드는 등 '기지촌 정화 운동'을 추진했다. 핵심은 미군을 상대로 성매매를 하는 기지촌 여성들의 '성병 정화'였다. 당시 미군 측은 심각한 성병의 책임을 여성들에게 전가시키고, 이들에 대한 관리를 한국 정부에 요구했다. 이후 클럽, 길거리 등을 불문하고 이른바 '토벌'이라고 불리는 불심검문이 이뤄졌고, 여성들이 무차별적으로 체포됐다. 이때 미군으로부터 성병이 있다고 지목당한 여성은 정당한 검사 절차 없이 바로 '몽키하우스'라고 불리는 성병관리소로 보내져 감금, 격리 치료를 당했다. 이 과정에서 독한 치료제로 인해 고통받은 것은 물론 페니실린 부작용으로 쇼크사하는 등 수많은 기지촌 '위안부' 여성들이 인권을 유린당하는 비극이 발생했다. 

두레방은 또 19대, 20대, 21대 국회에 '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진상규명과 명예회복 및 지원 등에 관한 법률안' 발의에 기지촌여성인권연대와 함께 했다. 하지만 법안이 현실화되지는 못하고 임기 만료로 모두 폐기됐다. 그럼에도 두레방은 다음 국회에서도 '기지촌 여성 특별법'을 다시 발의할 계획이다. 이 과정에서 남성 중심의 가부장제 속에서 기지촌 미군 '위안부'에 대한 낙인을 제거하고자 노력해 여성을 피해자로 위치시키고 미군 성매매가 범죄임을 명확히 한 점, 1980~1990년대 한국 상황에서 성산업은 성착취라는 사실을 공식화하고 반성매매 운동을 촉발시킨 부분 등 두레방이 이끌어낸 사회적 인식 변화도 꼭 평가받아야 할 부분이다. 

 

철거 위기의 두레방과 원형 간직한 '옛 성병보건소' 

이런 두레방은 최근 또 다른 커다란 시련과 과제에 직면했다. 첫째는 1990년대 중반부터 한국 여성이 떠나간 기지촌의 빈자리를 대체해온 '이주여성' 문제다. 이들의 불안한 존재론적 특성은 여성의 빈곤화와 인신매매성 이주로 연결되면서 인종 차별, 계급 차별, 성 차별이라는 삼중의 인권 사각지대를 더욱 강화하고 있다. 두레방은 이들 이주여성들을 위해 법률, 의료, 각종 노동 인권 침해 관련 지원과 상담, 나아가 보호 시설, 안정적인 숙식, 귀국 지원까지 감당하고 있는 실정이다.

더 당황스러운 문제는 두레방 이전이다. 1979년에 준공된 두레방 건물은 원래 기지촌 여성들이 일주일에 두 번씩 검진받던 '옛 성병보건소'였다. 두레방은 의정부시 소유의 이 '아픔'의 공간을 2000년부터 임대해 평화교육의 장, 국제 인권 운동의 장, 기지촌 여성 운동의 장으로 탈바꿈시켜 현재까지 운영하고 있다. 그런데 두레방에게 시내로 이전할 것을 요구한 것이다. 발단은 2022년 대통령 직속 국가균형발전위원회의 '취약지역 생활여건 개조사업'이다. 일명 '새뜰마을사업'으로, 국가균형발전위가 선정한 신규 사업 대상지 68개소 중에 의정부시의 현 빼뻘마을이 포함돼 두레방 건물을 부수거나 고쳐서 커뮤니티센터를 짓겠다는 계획이 추진되고 있는 것이다. 

새마을운동과 비슷한 이름이라 별다른 설명 없이도 개발 방향이 읽힌다. 옛것은 미련없이 포기하겠다는 것이다. 2024년 1월 11일 의정부시청 여성보육과 과장과 팀장이 두레방을 방문해 사무실 이전을 종용했다. 1월 22일에도 균형개발추진단 도시재생과 과장, 재생정비사업팀장 외 주무관 2인이 두레방을 찾았다. 이들은 '두레방 건물을 철거하지 않고 보강해 사용할 계획이다. 건물을 활용해 빼뻘마을 라이프 푸드 팝업스토어(쿠킹클라스-통닭만들기 등)를 진행하고, 등산객도 유치하려 한다'고 설명했다. 

이들이 반복하는 논리는 대략 다섯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는 현재 빼뻘마을에는 미군도, 여성들도 많지 않은데 두레방이 꼭 그곳에 있어야 하냐는 것이다. 이에 두레방은 고령의 미군 '위안부' 여성들이 빼뻘마을에 단 한분이라도 살아계시는 한, 곁에서 지속적인 지원과 지지를 담당해야 하는 단체라고 응답했다. 둘째는, 그럼 공간을 의정부 시내로 옮기란다. 하지만 성매매피해지원상담소가 시내로 가면 내담자들이 업주의 눈치를 보고 상담하러 올 수 없지 않겠는가. 더욱이 시내로 가면 거동이 불편한 고령의 기지촌 여성들은 방문하기 어렵다. 셋째, 현 빼뻘마을의 교통이 너무 불편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지난 24년 동안 두레방은 아무 불편 없이 역할을 수행해 왔다. 넷째, 기초생활보호대상자인 고령의 기지촌 여성을 지원하는 일은 그만해도 되지 않느냐는 이야기도 있다. 하지만 두레방의 정체성은 기지촌 여성 지원이다. 지원을 멈추는 것은 늙고, 연약하고, 외롭고, 병든 이들을 국가에서 또 외면하는 일이다. 경기도는 '기지촌여성지원조례'를 제정했고, 두레방은 그 조례에 맞추어 지원하고 있다. 다섯째, 보조금은 의정부에서 받으면서 아웃리치는 동두천 등 타 도시로 많이 나간다는 지적도 나왔다. 하지만 성매매피해지원상담소 보조금 예산은 매칭펀드(여성가족부 50%, 경기도 25%, 의정부시 25%)이며, 어느 지역에 있든 요청하는 모든 내담자를 지원해야 한다. 동두천으로 특히 많이 가는 이유는 기지촌 이주여성을 지원하기 위해서다. 국내에서 성착취 피해 이주여성 지원 사례가 가장 많은 곳이 바로 두레방이다.

[사진 3] 1979년 준공된 두레방 건물은 원래 기지촌 여성들이 일주일에 두 번씩 검진받던 ‘옛 성병보건소’였다. 사진은 한미간 전략적 관계를 유지하는 데 기지촌 성매매 여성들이 어떤 역할을 담당했는지를 추적한 캐서린 문의 <동맹 속의 섹스> 95쪽에서 발췌한 이미지이다.

[사진 4] 2024년, 현재 두레방 건물의 모습 (사진제공 : 두레방)

 

 

두레방이 '빼뻘마을'에 계속 있어야 하는 이유

빼뻘마을이 깨끗하고 안전한 마을로 거듭나는 것을 반대하지 않는다. 다만 두레방은 그 과정에서 약자의 역사가 무시되고 고스란히 삭제되는 것은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 전쟁 후 스스로 거름이 되어 도시 경제를 일으키고 가족과 나라를 먹여 살린 기지촌 여성들, 국가폭력에 희생된 기지촌 여성들의 삶과 역사를 지우려는 것은 참을 수 없다. 정부는 그간 노년이 되면 아파트를 주겠다고 속여왔다. 그런데 아파트는커녕 기지촌 여성들의 보금자리요, 사랑방이며, 최후의 공간인 두레방을 빼앗으려 한다! 언니들은 분노했다. 만나주지 않는 시장을 만나기 위해 시청 앞 거리로도 나섰다. 시장과 만남은 성사되었으나 결론적으로 "(2025년 6월까지) 1년간 유예기간을 가지며 머리를 맞대고 생각해 보자"는 것이 현재까지 시장의 답변이다. 

두레방은 빼뻘마을에 계속 있어야 한다는 입장에 변함이 없다. 캠프 스탠리가 아직 반환되지 않았다는 의미에서 빼뻘마을은 아직도 기지촌이기 때문이다. 두레방은 '옛 성병보건소' 건물을 기지촌 여성들의 고통과 상처로 가득한 장소를 치유와 회복의 장소로 변신시켰다. 두레방이 지자체의 지원을 받아 운영되는 상담소지만, 기지촌 여성들의 공동체이기에 이들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반영해야 한다. 기지촌 현장인 빼뻘마을과 두레방은 군사주의의 폐해와 여성 인권에 대해 교감할 수 있는 상징적인 공간이다. 미군기지와 기지촌과 여성들의 삶, 두레방의 역사가 응축돼 있는 '옛 성병보건소' 건물은 아픈 역사를 후대에 알리고 교육하는데 더 없이 훌륭한 공간이다. 더욱이 한국에서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어 그 자체로 근현대 역사문화적 가치가 있는 공간이자 유일한 건물이기도 한 '의정부 옛 성병보건소'는 물론 '동두천 옛 성병관리소' 역시 근대문화유산으로 등재시켜 보존해야 한다. 1970~1980년대 기지촌 미군 '위안부'가 된 여성들, 한때 외화를 벌어들이는 '애국자'로 명명되기도 했던 이들은 기지촌 쪽방에서 고령의 독거노인으로 외로움을 안고 만성질환, 빈곤과 싸우며 고단한 삶을 살고 있다. 제도가 짊어져야 마땅한 책임까지 개인의 잘못으로 몰아서는 안 된다. 우리 사회의 가장 어둡고 은폐된 성매매 공간인 기지촌에서 수십 년 동안 '국가안보'라는 명분 아래 이용당하고, 버려지고, 고쳐지지 않은 트라우마를 안고 지금껏 살아온 기지촌 여성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시에서 추진하는 두레방 이전은 단순히 공간을 옮기는 사안이 아니다. 기지촌 여성들의 보금자리, 최후의 공간을 빼앗는 인권의 문제이다.

[사진 5] 두레방 빼뻘마을 존치를 위한 기자회견 모습. (사진 제공 : 두레방)

 

 

기지촌 여성 공동체 의미 담은 '평화여성인권박물관'을!

지난 2024년 5월 25일부터 6월 5일까지 예술가들과 '두레방×ㅃㅃ보관소' 연대로 '거품·소음·웅성거림' 전시 프로젝트가 있었다. 기지촌 여성들의 아픔이 스며있는 미술치료 결과물, 공예작품, 사진자료, 인터뷰 영상이 설치된 전시장이 바로 두레방 건물이었다. 그리고 '공존과 공생의 마을재생을 제안하다' 포럼을 열어 두레방이 왜 빼뻘마을에 계속 있어야 하는지 목소리를 공유했다. 이 자리에서 제안된 가장 현실적인 공간 활용 대안이 '기지촌여성박물관' 혹은 '평화여성인권박물관'이었다. 
우리 사회 여성 인권을 둘러싼 또 하나의 이야기의 집인 두레방은 지난 8월 '동두천 옛 성병관리소 철거 저지를 위한 공동대책위원회'를 발족시키고 역사적 가치를 기록하고 보존해 후대에 전할 수 있는 기억의 공간으로 만들기로 했다. 전시회 마지막날인 6월 5일 열린 '공존과 공생의 마을재생을 제안하다' 포럼에서 발표한 이원재 문화연대위원장의 제언도 연결된 내용이었다.

"생태와 사람 그리고 시간에 대한 존중이 없는 도시재생은 있을 수 없다. 1년 유예가 아닌 60년의 성찰로 함께, 다양하게 숙의해야 한다. 두레방 공동체를 시민들이 함께 축적하고 의미화하는 커뮤니티아트센터 형태면 좋겠다."
- 이원재 문화연대위원장 

두레방은 여전히 기지촌 여성들의 공동체 공간이다. 이 공간을 지켜내기 위한 최우선 과제는 대중들의 공감을 얻는 것이다. 이를 위해 두레방은 국가인권위원회에 '두레방 이야기'를 적극적으로 알릴 것이다. 9월 경기여성정책컨퍼런스 주제로 '두레방 이야기'가 확정됐다. 정기적인 포럼을 계속할 수도 있다. 지금처럼 기지촌 평화기행이나 다크투어 등 여러 프로그램을 통해 경기도는 물론이고 전국의 시민들을 만나고, 나아가 세계와 자연스럽게 교류하고 소통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할 것이다. 두레방 공간은 부끄러운 장소, 감추어야 할 역사가 아니기에 결코 멈출 수 없으며 갑자기 '쫓겨' 나서도 안 된다. 두레방의 정체성이 성매매피해지원상담소로 제한되어서도 않된다. 두레방 활동의 사회적, 역사적, 지역적 가치와 의미는 앞으로도, 더 다양하게 공유되고 해석돼야 한다. 두레방은, 두레방 언니들은, 두레방 활동가들은 마지막까지 빼뻘마을에서 함께 할 것이다.

[사진 6] 예술가들과 연대해 진행한 '두레방×ㅃㅃ보관소' 프로젝트 마지막날 열린 '공존과 공생의 마을재생을 제안하다' 포럼 현장. (사진 제공 : 두레방)


 

연결되는 글

  • “국가 없는 애국자들”의 승리
    “국가 없는 애국자들”의 승리

    이 승리는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 이번 판결을 계기로 더 많은 생존자들이 용기를 내어 자신의 경험을 증언할 수 있기를, 그리하여 한국 사회가 그들의 경험에 공감하고 과거의 폭력과 불의를 성찰하여 새로운 미래로 나아갈 수 있기를 기원한다.

    박정미 2022.11.30

글쓴이 김은진

한국기독교장로회 여신도회전국연합회에서 활동했고, 2018년부터 두레방 원장으로 일하고 있다. 현재 기지촌여성인권연대 공동대표, 한소리회 공동대표, 경기여성연대 상임대표이며, 전국 63개 시민사회단체가 참여한 '동두천 옛 성병관리소 철거 저지를 위한 공동대책위원회' 공동대표로 참여해 의정부와 동두천 '옛 성병관리소'를 역사문화평화공원화하기 위한 대책 마련을 촉구하고 있다.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의
새로운 소식을 받아보세요